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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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님의 글을 읽고 답함
2010년 01월 30일 20시 07분  조회:3552  추천:22  작성자: 김송죽
 

            ‘진실’님의 글을 읽고 답함

                                                                                                                김송죽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좌진이 살해되자 무릇 화요파사람이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살인흉수로 락되고 숙청의 대상이 되였다는 것, 그래서 독립군 “복수대”에 의하여 똥줄빠지게 도망쳐야했다는 점이다. 특히 리복림(공도진)이 유표하게 추격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아 그가 김좌진장군암살에 주요획책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그가 당시 화요파에서의 지위를 알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공산당가입 후의 지위에 대해서는 력사기재를 보아 알수 있고.)

   한즉 화요파였던 량환준선생이나 양재문, 지어는 당시 엠엘파였던 지희겸선생까지도 그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주범으로 여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틀리지 않는다. 리복림이 호로군에게나 독립군에 추격을 어떻게 어떻게 당했소 하는것이 다가 진실일수 있다. 하지만 나는 김좌진을 향해 직접 총을 쏜 박상실이 바로 그였다는 주장에는 어쨌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 원인의 첫째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직접목격한 박상실은 이듬해 아성호로군손에 붙잡혀 사형되였으니까말이다. 나는 어쨌든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가 정확했다고 믿는다. 그것이 “오보가 아닌지”하는건 어디까지는 현대에 이르러 사건추적자(즉 연구가)의 가설로만 머물기에 확정(確定)이 아닌것이다.

   내가 지삼재삼 강조하는것은 그 새대 그 장소에 있었던 두 목격자 리광훈과 리을규선생의  공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라면 그들의 공술이야말로 가장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목격자도 아니였던 그 사람의 그 어떠한 공술도 그들앞에서는 다가 빛을 잃고마는것이다. 나는 형편이 이같이 번연함에도 견증(見憎)도 아니요 근거불충분한 공술을 증거(證據)로 그냥 우기며 내세우는건 무리로밖에 볼수없는 억지라고 본다.

   “이범석에 의해 청산리전투가 엄청나게 부풀어졌다”데는 나도 동감이다. 이범석은 청산리전투의 전과를 너무 과장했다. 크게 불어댔다는 말이다. 청산리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총재였던 서일이 림정에 써올린 보고와 이에 대한 그 당시 림정의 공포가 가장 신빙성이 있으니 그를 믿는것이 옳다고 본다.


   쏘련에 건너간 홍범도가 레닌으로부터 권총까지 선사받은일이 있다. 항일투쟁에 공이 컷다는것을 표명한다. 한데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당시의 반일투쟁경력으로나, 그리고 세상에 알려졌던 지명도를 볼때도 홍범도는 모든면에서 김좌진의 대선배였다”면서 1920년대에 있어서 홍범도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만주독립군 1호로 순위를 매기는 건 어딘가 사람을 웃기는 일같다. 무의미한 론쟁은 하고싶지 않으니 반론을 하지 않으련다.


   다음, “두만강”님한테 묻겠다. 대체 무슨근거로 나를 “토공대”의 일을 싸고돈다“고 하는가? ”김좌진의 반공을 싸고 돌 타산“인가고 하는가? ”이광훈의 철저한 반“공이 그래 나와 무슨 관계있는가? 나는 그당시 그 지점에서 목격자였던 그의 공술이 신빙성이 있기에 믿는것이다. 그가 어떻게 반동이고 립장이 어떠하여 어떻게 죽을 놈이건 간에 ”증명인“으로 자격이 구비되였면 그 증명을 믿어줘야 하는 것이다. 간단한 도리다. 이러는것이 당연하고 아무런 잘못도 없다. 나는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적인 면에서 그의 학술과 그 성과들을 응당 존중해주어야한다고 다시한번 말한다.

   다시 한마디, 이광훈은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분자였던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그는 지금 우리가 의론하고있는 사건의 견증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는 자기의 회억록에 강경애는 김봉환(金一星)의 “동거녀”, “김장군암살교사범”이라 밝혔다. 생각해보라, 무슨 개인 혐원이 있어서 일개문학초학자에 불과했던 강경애를 김봉환의 “동거녀”라 하고 “김좌진암살교사범”이라 했겠는가? 세상에 많고많은 녀인들을 두고? 다음, 무정부주의자 리을규의 경우를 놓고보자, 그는 생전에 <<시야 김종진전>>을 썼는데 거기에도 그렇게 밝혀놓았다. 그 두사람이 약속이라도 하고 그랬단말인가? 그럴필요가 있었던가? 나는 김좌진전기를 쓰면서 그가 쓴 <<시야 김종진전>>을 의거(依據)로 삼았다. 나는 나의 <<雪恨>>이 출판되여 4년이 지나서야 이광훈의 편저로 된 대한독립운항쟁사의 70인이라는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이란 책에 오른 백야 김좌진장군전기에서 꼭갇은 서술의 글을 발견하고는 내가 강경애의 문제에 대해서 쓴것이 옳았다는 생각을 굳힌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겠는가? 너무나 명명백백해진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학계에서 강경애연구요 하면서 강경애가 김좌진암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것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치부하여 견결히 반대해나선것이다.

   나는 언녕부터 내가 이렇게 나서면 학계의 반항에 부딧치리라는 것을 각오한바다. 그리고 “공산당의 켠”에 서지 않은 반역으로 몰아 내 명성이 더러워질수도 있다는 것도 각오한바다.

   댓글에 올라온것을 보면 그런 화약냄새가 풍긴다. 하지만 나는 할말은 해야겠다. 내가 “마구드잡이”로 나왔다는 지적은 틀리지 않은것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일개 소설을 쓰는 소졸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가지 도리는 깨달은 바가 있다. 남이 나를 돌로 치면 나도 돌로 쳐야 한다는 것.

   이광인선생이 시비는 시비고 앞으로 거래하며 지냈으면 하는 바램이라니 감사하다.

                                                201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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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보충-3
날자:2010-01-31 04:50:04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화요파출신 무장대원 공도진에게 사살됐고, 공도진은 바로 리복림이며,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박상실 사살설도 실제로 박상실이 바로 리복림이 또 다른 이름이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것에서 문제가 생긴다. 김송죽선생님의 주장을 보면 박상실은 당시 조작기사가 살벌했던 30년대 동아일보의 기사 하나 때문이다. 그것말고 다른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호로군사령부에 의해 박상실로 불리였던 리복림이 체포되였으며, 사형받은것이 아니라 요시찰중범으로 봉천에 압송되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상당하게 크다. 봉천에서 직접 김좌진을 나포하려고까지 포고문을 냈을 정도로, 당시 문제의 요시찰대상과 관련된 중범죄자들은 전부 봉천에 이송되였으며, 당시 호로군사령부가 즉석 사형이 가능한 잡범이라도, 사형까지 하게 되였을 경우라면, 안건을 만들고 상부에 보고되기 마련이다. 왜서 이렇게 판단하는가? 당시 할빈지방에서 중형 6개월 이상 판결받게 되면 , 반드시 봉천으로 이송하였다. 1930년 5.1 대시위때 잡혀 8개월 판결받았던 허형식도 봉천으로 이송된것이 바로 그 원인이다. 그러면 호로군사령부가 리복림이나 김책까지도 봉천으로 이송하였으면서, 자기들에게 협력하고 있었던 김좌진장군을 사살한 어마어마한 죄범을 잡았다는데, 안건도 없고, 상부에도 보고하지 않고, 당지에서 총살해버렸다는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때 오로지 혐의자가 전염병자나 아니면 당지의 폭력단체가 겁옥할 가능성이 있거나. 현장에서 즉석 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안되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안된다. 때문에 동아일보의 박상실 사형 보도는 두가지 가능성으로 풀이할수 있다. 호로군사령부가 기자들에 흘린 틀린 정보일수 있다. 박상실을 내놓으라는 소리에 이미 죽여버렸다고 했을수 있다. 기자가 확실한 증거와 증빙을 제출하지 못한채로 나름대로 풍문을 기사로 썼을수가 있다. 그것은 호로군사령부가 사형한다고 했으면 사형포고문이라도 반드시 내놓아야 했을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송죽선생님의 주장은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것]이고, [무근거를 근거로 하는 것은 여전히 무근거다]는 말로 정리할수밖에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댓글을 달겠다...
2   작성자 : 보충-1
날자:2010-01-31 04:30:43
조선공산당 화요파 무장대원 춣신신이였던 젊은 테러리스트 리복림림은 진정한 공산주의자였다. 자신이 소속되였던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집행했고, 당이 지시하는대로 당에 위해가 가는 적을 암살도 하고 납치도 했던 리복림의 모습은, 썩 이후 주하동북항일유격대 시절에도 나타났다. 어느 댓글에서 밝힌바 있지만, 리복림은 유격대의 정치위원이였으면서도 우군인 구강부대와 마찰이 생겼을때 구강부대의 가족을 납치하였다. 모두 조상지가 한 짓이라고 의심하였으나 실제로 리복림이 한짓이였다고 흑룡강성 당사연구소 김우중소장이 직접 필자에게 말했다. 김송죽선생님의 주장의 근거는 주로 이강훈이고 증거는 당시의 동아일보 보도인데, 항일투쟁과 관련하여 당시 동아일보노 조선일보, 그리고 삼천리 등 조선경내의 신문 잡지들이 얼마나 많은 오보를 냈는지를 조사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굳직굳직한 사건들에 있어서, 김일성 사살설, 리홍광의 여자비적설, 최현부대와 김일성부대를 혼동하여 오보하였던 설, 혜산사건에 대한 엉터리 보도, 그외에도 전광을 박금철로 오해하고, 박금철을 김일성으로 오해하였던 설, 이러루한 사건들이 부지기수다. 당시의 동아일보가 박상실이 호로군에 의해 체포되여 사형당했다고 보도했다는데 사형당한 죄범 박상실의 사진이 공개라도 돼서 그 신문은 본 이강훈이 바로 이 사람이 맞다고 하면, 여지의 신빙성이 존재라도 한다. 왜냐하면 김좌진의 정미소에 잠복했던 박상실을 이강훈은 반드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상실이 사형당했다고 했을때, 사진이 공개된적이 잆고, 그뒤에서 썩 오래동안 북만에서 항일투쟁을 해왔던 박상실, 즉 리복림의 사징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것이 한장도 없다. 대신 리복림이 박상실이며, 리복림은 어디로 해서 어떻게 도주했으며, 누구의 집에 숨어있었으며, 어디서 체포됐으며, 또 어떻게 봉천까지 가서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놓여나온 뒤에 어떤 일을 하였으며, 종당에는 어떻게 희생되였다는 력사가 상당히 자세하게 조사되여있다. 어떻게 할것인가? 김송죽선생님은 여전히 [나는 그래도 이강훈을 믿고 동아일보 보도를 믿는다]고 주장할것이다. 이런것을 가리켜 무근거를 근거로 삼는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이강훈은 박상실을 직접 보았지만 박상실이 사형당했는지 안당했는지, 당했다면 당한 사형수의 사진이 과연 박상실이 옳았는지, 아닌지 본적이 없다. 동아일보도 호로군사령부에서 흘려나온 박상실 사형설의 기사 내원에 대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30년대는 조작기사가 얼마나 살벌했던 시대인가를 조금만 그때 시대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넉넉하게 감을 잡을수 있다. 신문사와 기자가 기사가 없을 때면 기사를 조작하기도 하고 꾸며내기도 하고 다시 재탕 삼탕하면서 우려먹기도 하는데, 우려먹자면 뭔가 건덕지가 있어야 할 것이나, 박상실의 사형설은 우려먹을 건덕지도 없었던 모양이다. 재탕해나온 기사도 없다.
1   작성자 : 진실
날자:2010-01-31 04:04:18
김송죽선생님이 [어쨌든]이라는 이 말이 문제가 된다고 본다. 김송죽선생님은 근거는 여전히 목격자인 이강훈과 이을규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두사람은 그럼 직접 박상실의 얼굴을 보았는가? 보았지만 박상실, 즉 이복림은 생전에 사진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럼 이 두사람은 자신들이 보았다는 박상실의 얼굴모습을 회고했는가? 어떻게 생겼다고 회고한 것이 없다. 당시 호로군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박상실의 사진이 그럼 신문지상에 올랐던 적이 있는가? 그런것도 없다. 해방후 구 동북군, 또는 만주군의 적위당안에는 사형당한 사람들의 사진이 모두 보관되여 있었고, 사형범들의 권종도 대부분 보관되여 있었다. 이를테면 양정우나 진한장은 권종 당안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약물에 담가, 만주국 군정부 지하창고에 보관해두고 있었던 것을 해방후 찾아내기 도했다. 이렇게 일본군도 좋고, 구 동북군이나 만주군이 주요한 형사요범을 사형했을 경우에. 사형공시를 발표할 때는 반드시 사진과 함께 권종이 보관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상실을 사형했다고 한 근거는 호로군이 내다붙이 사형포고나 그런 공시같은 것도 없다. 당시 기자들이 풍설을 얻어듣고 나름대로 김좌진장군을 사살한 혐의범이 사상당했다고 오보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실제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신문이 당시 아성에서 박상실을 잡았다고 보도했던 바로 그 시점에 아성에서 잡혔던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 무장대원은 리복림뿐이였고, 호로군 사령부는 리복림과 함께, 리복림보다 먼저 붙잡혔던 김책까지 두 사람을 봉천으로 압송해버렸다. 호로군사령부에 의해 봉천에 압송된 이 두사람에 대한 권종은 심양시 공안국에서 발굴되었으며, 당시 봉천헌병대장을 담임한적 있었던 뢰항무의 과거사에 대하여 조사하였던 조사자료에서 이런 사실들도 모조리 확인되였다. 뢰항무는 당시 봉천헌병대 대장으로 있으면서 조상지 김책 허형식 리복림 등 사람들을 모조리 책임지고 취조하였다. 다시 리복림에게로 돌아와서서- 리복림이 박상실이라는 사실을 제보한 가장 주요한 증거는 여전히 지희겸에게서 나왔는데, 해방후 반역자 혐의를 쓰고 연변으로 돌아왔던 지희겸은 연변대학에서 역사교수로 재직했고, 지희겸의 제자가운데서 유명한 박창욱교수가 나왔다. 지희겸은 리복림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회고했다. 리복림은 관운장처럼 눈이 쨰지고 눈섶이 치겨올라갔다고 했다. 평소에 다브산즈를 입고 다니며 옆구리에 권총을 숨겨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아성에서 할빈으로 오는 길에 호로군에게 걸려들었는데 몸에서 권총이 나오는 바람에 붙잡혔으나 심사도중에 바로 리복림이 박상실이라는 신분도 드러났다고 했다. 호로군이 대외다가는 어떻게 흘렸는지 박상실이 사형당한것으로 오보되였으나, 문제의 박살실로 불렸던 리복림은 사형당하지 않고 봉천으로 압송되였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공산당 화요파 무장대원이라는 표현을 다르게 말하면, 청년시절의 리복림은 테러리스트였다. 테러리스트가 본명을 하나만 가지고 사용할리는 없다.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최동범, 공도진, 박상실, 그외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여러개의 이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연변의 조선족 역사학자들은 리복림의 별명가운데 박상실이라는 이름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였다. 한국쪽에서 박상실이라는 청년이 김좌진사살범으로 알려졌고, 당시의 어느 신문에서 사형까지 받았다고 보도되였다고 주장하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리복림이 박상실이였다는 사실은 실제로 최근에 밝혀진 것만은 아니다. 박창욱교수는 오래전부터 리복림이 바로 박상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지희겸의 녹음테프는 연변농학원에서 사업하였던 지희겸의 딸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테프줄이 다 들러붙어 열리지 않았으나 후에 지희겸의 외손녀 (연길에서 도장방을 운영)가 테프를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력사는 계속 복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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