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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님의 글을 읽고 답함
김송죽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좌진이 살해되자 무릇 화요파사람이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살인흉수로 락되고 숙청의 대상이 되였다는 것, 그래서 독립군 “복수대”에 의하여 똥줄빠지게 도망쳐야했다는 점이다. 특히 리복림(공도진)이 유표하게 추격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아 그가 김좌진장군암살에 주요획책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그가 당시 화요파에서의 지위를 알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공산당가입 후의 지위에 대해서는 력사기재를 보아 알수 있고.)
한즉 화요파였던 량환준선생이나 양재문, 지어는 당시 엠엘파였던 지희겸선생까지도 그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주범으로 여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틀리지 않는다. 리복림이 호로군에게나 독립군에 추격을 어떻게 어떻게 당했소 하는것이 다가 진실일수 있다. 하지만 나는 김좌진을 향해 직접 총을 쏜 박상실이 바로 그였다는 주장에는 어쨌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 원인의 첫째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직접목격한 박상실은 이듬해 아성호로군손에 붙잡혀 사형되였으니까말이다. 나는 어쨌든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가 정확했다고 믿는다. 그것이 “오보가 아닌지”하는건 어디까지는 현대에 이르러 사건추적자(즉 연구가)의 가설로만 머물기에 확정(確定)이 아닌것이다.
내가 지삼재삼 강조하는것은 그 새대 그 장소에 있었던 두 목격자 리광훈과 리을규선생의 공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라면 그들의 공술이야말로 가장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목격자도 아니였던 그 사람의 그 어떠한 공술도 그들앞에서는 다가 빛을 잃고마는것이다. 나는 형편이 이같이 번연함에도 견증(見憎)도 아니요 근거불충분한 공술을 증거(證據)로 그냥 우기며 내세우는건 무리로밖에 볼수없는 억지라고 본다.
“이범석에 의해 청산리전투가 엄청나게 부풀어졌다”데는 나도 동감이다. 이범석은 청산리전투의 전과를 너무 과장했다. 크게 불어댔다는 말이다. 청산리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총재였던 서일이 림정에 써올린 보고와 이에 대한 그 당시 림정의 공포가 가장 신빙성이 있으니 그를 믿는것이 옳다고 본다.
쏘련에 건너간 홍범도가 레닌으로부터 권총까지 선사받은일이 있다. 항일투쟁에 공이 컷다는것을 표명한다. 한데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당시의 반일투쟁경력으로나, 그리고 세상에 알려졌던 지명도를 볼때도 홍범도는 모든면에서 김좌진의 대선배였다”면서 1920년대에 있어서 홍범도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만주독립군 1호로 순위를 매기는 건 어딘가 사람을 웃기는 일같다. 무의미한 론쟁은 하고싶지 않으니 반론을 하지 않으련다.
다음, “두만강”님한테 묻겠다. 대체 무슨근거로 나를 “토공대”의 일을 싸고돈다“고 하는가? ”김좌진의 반공을 싸고 돌 타산“인가고 하는가? ”이광훈의 철저한 반“공이 그래 나와 무슨 관계있는가? 나는 그당시 그 지점에서 목격자였던 그의 공술이 신빙성이 있기에 믿는것이다. 그가 어떻게 반동이고 립장이 어떠하여 어떻게 죽을 놈이건 간에 ”증명인“으로 자격이 구비되였면 그 증명을 믿어줘야 하는 것이다. 간단한 도리다. 이러는것이 당연하고 아무런 잘못도 없다. 나는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적인 면에서 그의 학술과 그 성과들을 응당 존중해주어야한다고 다시한번 말한다.
다시 한마디, 이광훈은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분자였던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그는 지금 우리가 의론하고있는 사건의 견증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는 자기의 회억록에 강경애는 김봉환(金一星)의 “동거녀”, “김장군암살교사범”이라 밝혔다. 생각해보라, 무슨 개인 혐원이 있어서 일개문학초학자에 불과했던 강경애를 김봉환의 “동거녀”라 하고 “김좌진암살교사범”이라 했겠는가? 세상에 많고많은 녀인들을 두고? 다음, 무정부주의자 리을규의 경우를 놓고보자, 그는 생전에 <<시야 김종진전>>을 썼는데 거기에도 그렇게 밝혀놓았다. 그 두사람이 약속이라도 하고 그랬단말인가? 그럴필요가 있었던가? 나는 김좌진전기를 쓰면서 그가 쓴 <<시야 김종진전>>을 의거(依據)로 삼았다. 나는 나의 <<雪恨>>이 출판되여 4년이 지나서야 이광훈의 편저로 된 대한독립운항쟁사의 70인이라는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이란 책에 오른 백야 김좌진장군전기에서 꼭갇은 서술의 글을 발견하고는 내가 강경애의 문제에 대해서 쓴것이 옳았다는 생각을 굳힌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겠는가? 너무나 명명백백해진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학계에서 강경애연구요 하면서 강경애가 김좌진암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것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치부하여 견결히 반대해나선것이다.
나는 언녕부터 내가 이렇게 나서면 학계의 반항에 부딧치리라는 것을 각오한바다. 그리고 “공산당의 켠”에 서지 않은 반역으로 몰아 내 명성이 더러워질수도 있다는 것도 각오한바다.
댓글에 올라온것을 보면 그런 화약냄새가 풍긴다. 하지만 나는 할말은 해야겠다. 내가 “마구드잡이”로 나왔다는 지적은 틀리지 않은것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일개 소설을 쓰는 소졸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가지 도리는 깨달은 바가 있다. 남이 나를 돌로 치면 나도 돌로 쳐야 한다는 것.
이광인선생이 시비는 시비고 앞으로 거래하며 지냈으면 하는 바램이라니 감사하다.
201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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