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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50)
원흉은 누구? 도주의 죽음내막
도주(陶鑄ㅡ 1908~1969). 혁명가, 정치가, 신사군의 로 전사.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학습, 제5기생. 그해에 공산당에 가입. 줄곧 혁명에 몸을 바치였다. 도주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으로서 견정한 맑스주의자, 고험을 겪어낸 충성한 혁명전사, 걸출한 무산게급혁명가, 당과 군대의 탁월한 정치공작자,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민족독립을 위하여, 인민해방과 국가의 부강을 위하여 중요한 공헌을 했기에 인민군중이 숙실히 알고 애대한
혁명선배였다.
도주는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애호했으며 지식분자의 단결을 중시했고 그들이 정치상의 진보와 사업과 곤난을 몹시 관심했다. 그는 우리 나라의 지식분자는 이미 근본성적인 변화가 생겼는바 광범한 지식분자가 혁명적이다. 그러니 “자산계급지식분자”라는 명사를 쓰지 말고 “응당 인민의 지식분자”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번이나 제기했던 것이다.
1965년, 그가 이끌고 지도한 중남구연극시연대회는 중국의 문학예술의 번영과 발전을 추진함에 아주 큰 작용을 했다.
1965년 1월, 도주는 제3차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무원부총리로 임명되면서부터 직접 중앙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선전과 교육 등 부문의 사무를 맡고 많은 사업들을 했다. 1966년 5월후 중공중앙서기처상무서기 겸 중앙선전부부장직을 맡았다. 1966년 8월, 중공중앙8기 11중전회에서 도주는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상위여서 모택동, 림표, 주은래다음으로 중공중앙의 네 번째 인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1. 왕력: “왕력회억록”〕
모(毛)역시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승인했다. 한데 이것이 비록 사실이긴 하지만 말을 그렇게 하지 않게 된다. 모(毛)는 손바닥을 펴고 덮어 구름이 모이게 하고 비가 오게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로모(老毛)는 낡은 조직기구를 개변시키겠다고 했는데 그래 중앙1급을 어떻게 고치는가? 로모(老毛)는 상무위원에다 문혁소조를 보태여 그것을 자기의 비서참모기구로 하고 권력기구로는 되지 않게 만들려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모(老毛)가 말한 1선, 2선으로 고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주은래는 리해가 아주 투철했다. 주(周)는 정치국비상위의 확대회의를 장악하여 열고는 일상사업중의 중요한 문제를 모(毛)에게 회보하군했다. 그 외에 중앙이 지방과 어떻게 련계하느냐 하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도주(陶鑄)역시 로모(老毛)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중앙은 몇개의 큰 구(區)로 각 성을 공제했던 것이다. 큰 구(區)는 이미 취소한 것인데 후에 또다시 만들었다.
모(毛)가 말하기를 “큰 구도 그네들이 만들었다”고 했다. 도(陶)는 큰 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기에 왕임중(王任重)을 큰 구서기로 조동시켰다. 한데 모(毛)는 큰 구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성을 다스리자고 했다. 8기 11중전회로부터 중앙공작회의에 이르기까지의 몇가지 세절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수선 11중전회 <<간보>>의 일이다. <<간보>>는 도주가 장악했는데 사부치(謝富治)가 소조회의에서 등(鄧)을 비평하는 발언을 했다. 그가 수도에 들어 온 후에는 옛부하가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례를 들면 철도병을 취소하는 것 같은 것은 얼마나 큰 문제인가, 진재도(陳再道)가 찾아갔건만 등(鄧)은 만나주지 않아 정관근(丁關根), 여정조(呂正操) 몇을 그저 카드놀이나 하게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도주는 이 말을 <<간보>>에 싣지 않고 특간호에만 내서 몇사람만 보았던 것이다. 이 일을 놓고 강청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그녀는 도주가 “등소평의 보호산(保護傘)이 아닌가?”고 떠들었다. 그녀는 도주가 <<간보>>를 잘못꾸린다고 내놓고 욕했다. 중앙위원들이 상무위원을 선거할적에 강청은 강생, 진백달, 도주를 보고 당신들은 투표권이 있는데 왜서 등소평에게 표를 주어 그가 전표를 얻게했는가고 불만스러워했다.
〔2. 왕력: “왕력회억록”〕
강청은 <<인민일보>>를 염왕전이 관할한다고 한번만 말한게 아니다. 그녀의 태도는 도주가 륙정일을 대체한 후에도 개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어는 <<인민일보>>가 8월 20일 홍위병들이 제일처음으로 거리에 뛸쳐나와 간판을 뜯어 부수고 길이름을 고치는 것을 상세하게 가송하는 식으로 보도한것 마저도 불만스러워 했다. 로모(老毛)가 8, 9월에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비판하자고 제기하니 진백달과 장춘교는 림표의 국경절강화를 쓰면서 맨먼저 “자산계급반동로선”이라는 제기법을 사용했다. 그 당시에 선전사업을 주관하고있었던 도주는 이 제기법이 너무나 중하기에 “자산계급이 혁명로선을 반대”하는 것으로 고친것을 모(毛)가 채납했다. 그랬다하여 강청은 이것이 도주가 류소기와 등소평을 보호해준 것이라 꼬리를 잡았던 것이다.
〔3. 고문겸: “만년의 주은래”〕
도주가 더욱 대담하게 행동한 한가지 일은 한때 들썽하게 소문을 낸 머리를 봐꾸는 “환두술” 사건이였다. 도주는 국경절신문에 나갈 사진을 검사하다가 등소평의 모습이 없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등소평이 로선착오를 범했다고는 하지만 의연히 8기 11중전회에서 선출한 중앙정치국상위인 것이다. 이 점을 보충하기 위해 도주는 신화사의 신문사진을 기술적으로 처리하기로 맘먹은 것이다. 그는 진의의 머리를 떼내고는 다른 사진에서 떼여 낸 등소평의 머리를 달았다. 그래서는 신문에 냈던 것이다. 이 일로 하여 도주는 “중국의 가장 큰 보황파”죄명을 쓰게 된 것이다.
〔4. 증지: “한 혁명의 생존자”〕
8기 11중전회가 페막해서 한달후에는 “문화대혁명”의 진전이 모택동이 바라는것 처럼 그렇게 순리롭게 되여주지 않았다. 상당히 많은 고급중급지도간부들이 원래 “잘 리해되지 않았고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건데”하던차 호위병이 충격하여 세상을 혼란하게 만드니 불만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홍위병들은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켜 “쓸어버리고” “포격”하자고 덤벼쳤다. 그것이 제한과 저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는 각 방면으로부터 오는, 우선 고급중급지도자들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저촉정서가 문제였다. 이것은 8기 11중전회이전에 류소기, 등소평이 공작조를 파견하여 군중운동을 “타격”하고 “압제”한 작법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류소기와 등소평이 실제상 중앙령도강위를 떠났어도 그들이 실시했던 “로선”은 의연히 존재하여 운동의 전진을 장애하고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5. 모전(毛傳)〕
이것이 바로 모(毛)가 왜서 10월에 중앙공작회의를 열었는가 하는 것이다. 주요하게는 8, 9월 두달동안 중앙의 사업을 장악해온 령도자(주요하게는 주총리, 도주) 그리고 각성시위령도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였다. 말하자면 공작회의에서 역시 자산계급반동로선문제를 철저히 비판하자고 제출하자는 것이였다. 한데 사실상 로모(老毛)와는 달리 중앙의 사업을 장악해온 주은래총리, 도주 이 두 령도동지가 생각하는것과 방법은 자기와 같지 않고 모순되였던 것이다. 바로 이같이 뿌리가 깊은 모순으로 하여 결국은 도주를 타도하게 된 것이다.
상해에서 “안정사건”이 폭발한 후, 장춘교는 중앙문혁소조를 포괄한 중앙의 일상생활과 사업들을 장악하고있는 주은래총리와 도주를 에돌아 11월 13일 오후에 로모(老毛)를 찾아가 그에게 왕홍문이 령도하는 “工總司”를 합법적인 조직이라는 것과 북경에 와서 혁명행동 등 5항의 요구를 제출하게끔 허락해달라해서 “동의”서명을 받은 것이다. 장춘교의 이러한 거동은 주은래를 포함한 중앙으로부터 상해지방에 이르기까지 각급령도들의 강렬한 반응을 야기시켰다. 이에 이어서 열린 중앙정치국상위의 만나는 회의에서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던 주은래와 도주는 상해의 “工總司”가 철길을 막아 호녕철로(滬寧鐵路)의 전부 운행이 중단되게 한데 대해서 엄격히 비평하면서 장춘교가 제마음대로 서명을 받아낸 것을 질책했다. 그러면서 중앙의 기정방침을 견지하는 한편 손실을 만구할 조치를 강구했던 것이다. 성격이 대바른 도주는 강경한 태도로 격하게 부르짖었다.
“그것들을 눌러버려!” (고문겸 “만년의 주은래”)
그런데 로모(老毛)는 자기가 친히 장악하고 연 중앙정치국상위확대회의에서 장춘교가 “안정사건”을 처리한데 대해 지지하는 태도를 명확하게 표명했던 것이다. 사후에 보고해도 되는 것이다, 어쨌든 먼서 사실이 생기고 후에 정책이 나오는 거니까 라고 했다. 모(毛)는 헌법에 있는 “결사자유”라는 조문을 가지고 도주(陶鑄)와 진비현(陳丕顯)이 상해공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릇된다고 비평했던 것이다.
(고문겸이 왕력을 방문한 담화기록)
모(毛)의 태도를 알게 된 강청과 진백달은 도주마저도 제멋대로 질책했다. 그가 “문화대혁명”을 파괴했다는 거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짝이 있다면서 강청은 후에 도주를 타도해놓고는 손가락을 거의 그의 코끝까지 들이대면서 욕했던 것이다.
“너는 일관적으로 중앙문혁과 엇선거야. 장기적으로 매주마다 그 무슨 국무원의 만나는 회를 한다면서 중앙문혁의 상위들을 제쪽으로 끌어갔지. 너는 맘먹고 중앙문혁을 허물어뜨린거야.” (목흔:<<“중앙문혁소조”와 몇차례투쟁>>)
(<<주은래 최후의 세월 1966ㅡ1976>>, 중앙문헌출판사)
도주가 경상적으로 중앙문혁소조를 반대했을뿐만 아니라 의견이 같았기에 도주와 주은래는 사이가 더 가까워졌던 것이다.
11월 17일부터 30일까지 북경에서 부분적인 성, 시와 국무원의 공업을 주관하는 유관책임자회의를 열었다.(통상적으로 “工交座談會”함) 회의를 진백달이 장악했는데 그가 초안을 잡은 공광기업에서 여하히 “문화대혁명”을 전개할 것인가 하는 문건을 내놓고 토론했다. 중앙문혁의 그 초안은 공교좌담회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회의에 참가한 부장들은 왁작 떠들고 일어났다. 모두들 공장에서 민주를 크게 풀어놓고 혁명을 하는 형세가 된다면 생산에 영향이 크게 미칠것라면서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다.
사회의 정황에 맞춰 주은래, 도주, 리부춘(李富春)은 함께 모(毛)를 찾아가 공교좌담회의 정황을 회보했다. 로모(老毛)는 몇가지 의견을 말했다.
(1), 그래도 공광업은 기를 나누어서라도 “문혁”을 해야한다.
(2), 8시간생산을 침범하지 말고 업여시간에 혁명해야 한다.
(3), 문건을 제출한 후에 곡목(谷牧)이 조를 거느리고 상해, 천진, 심양에 가서 각파 공인들의 의견을 들어 볼 것이며 계속 수개하여 12월에는 내놓도록 쟁취해야 한다.
(<<우리의 주총리>> 중앙문헌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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