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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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44)
2011년 03월 29일 19시 28분  조회:3667  추천:12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44)

(1)"문혁"때 모택동은 어떻게 림표를 당내투쟁에 리용했는가.
(2)림표의 도망은 큰 타격

                       모택동은 어떻게 림표를

모택동이 림표를  선택하게 된 원인의 첫째는 그가 홍제1군단의 직계였고 모택동에 대해서 줄곧 충심이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택동이 고강의 교훈을 섭취하여 제멋대로 날뛰여서 부리기 힘든 사람은 쓰지 않기로 맘먹었기 때문이다. 림표는 1949년 후부터 줄곧 병치료를 하다보니 무기력해져 남과 다투려하지 않거니와 몸도 그리좋지 않은 편이였다. 한즉 당내에서나 군내에서나 자력있고 말을 들으며 무기력하고 병이 있어서 신체가 허약한 그가 바로 모택동이 요구하는 표준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림표는 다시금 출두하자마자 로산회의에서 팽덕회와 맞붙었는데 그번 싸움에서 이겨 모택동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었다.


한편 이로보아 림표는 모택동과 그의 사상을 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백만대군을 지휘했던 모택동이 경계심을 버릴리 만무하다고 여겼다. 하기에 그는 1949년후부터는 병을 핑계대고 집에서 휴양하면서 당내투쟁을 피하고 말려들지 않았다. 림표는 고강의 말로를 보았던 것이다. 하기에 그는 얼굴을 다시내밀면서부터 능란하게 모택동의 심리에 맞춰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력(韋力)이 편집한 <<1965년이전의 림표>>란 책에 보면 림표가 살았을 적인  1949년부터 1959년지간에 모택동에대한 감상을 적은것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심리분석ㅡ “그는 자아숭배를 하고 자아미신을 하며 숭배를 스스로 억제하고 공은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가 크게 우려하는 것은 표결때에 자기가 다수를 점할 수 있겠는 가는 것이다.”    
분석수단ㅡ “그는 먼저 대방의 ‘의견’을 꾸며만든다. 그래놓고는 그것을 반박한다.”
    
경험교훈ㅡ “네가 동쪽을 말하면 그는 기어코 서쪽을 말해 고의적으로  먼저듣게 만들어 놓고는 일치하게 한다.” 
림표는 모택동의 심리를 어느정도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한데 이때는 마침 모택동이 중공당내에서 어려운 처지에 몰려든 때였던 것이다. “대약진”과 “민민공사”문제에 대해서 중공의 고위급간부는 다가 책임을 져야 했지만 모택동이 우선먼저 져야했다. 그건 모택동이 첫책임자라는 것도 있지만 그가 너무나 공상적인 공산주의리념을 믿었기때문이였다. 모택동은 평생 금전을 하찮게 여겼다. 젊었을적에 호주머니에 돈한푼 없이 친구와 같이 농촌을 돌아다녀보고는 어디에나 돈이 꼭 있어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지어는 상품경제에 대해서 까지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기에 “대약진”시기에 장춘교가 군사공급제를 선양하는 문장을 써내니 그는 그것을 즐겨흠상한 것이다. 제 심리에 맞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불가능하니 방법없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등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기에 힘쓰면서 어떤면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경영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했다. “대약진”이 실패했고 대기황이 들어 숱한 사람이 굶어죽었기에 7천명대회 때 모택동은 당내에서 고립되였던 것이다. 그가 이같이 관료파허위화의 위험에 빠지게 된 관건적인 시각에 림표가 손을 써서 도와주었기에 형세는 역전한 것이다. 
      

림표를 위해 번안하는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림표가 하는수 없이 대세에 따라 행동했다는데 그것은 전혀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1962년에 모택동은 당내에서 이미 고립상태에 빠졋기에 제 힘으로는 가마를 메라고 남을 협박할 수 없는 형편이였다. 림표는 1962년 7천명대회에 발언할 때 모택동은 리념에서 나온것이고 력사연원에서 나온것이고 의기에서 나온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여 두둔했다. 
   
모택동으로 놓고 보면 림표가 관건적인 시각에 이같이 자기를 힘껏 지지해 나섯으니 란세에 충신을 알아본다고 이건 금상첨화(錦上添花)라기보다는 설한에 화로불을 준것이니 그지없이 고마운 일이였다. 
   
림표는 이같이 관던적인 시각에 듣기좋은 말로 두둔해서 자기의 력사지위를 세운 것이다.
 

7천명대회가 지나자 모택동은 제 부인 강청마저 정치무대에 오르게 했다. 이 지경에 이르니 당내에는 기본상 두 개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중공당내에서 모림동맹(毛林同盟)이 소수를 점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군대를 장악했기에 당내관료파는 부득불 방어태세를 취해야했던 것이다. 이 사이에 림표는 군대내에서 모택동을 숭배하는 열조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모택동으로 하여금 1966년에 당의 체제외에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충분한 여론준비를 하게 한 것이다. 
   
순 모택동과의 관계로만 놓고 보면 고강의 죽음이 억울하고 림표의 죽음 역시 억울하지만 류소기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류소기는 모택동이 경제건설방면에 들어가서는 작법들이 확실히 틀리는것을 적잖게 발견하였거니와 그것을 부추기는 추종자들의 행동을 보고 는 몹시 분노했던 것이다. 
   
지금도 <<연산야화>>나 <<삼가촌찰기>>를 잘 읽어보면 “대약진”에 차가운 조소와 실랄한 풍자를 던진건 바로 모택동을 겨누고 욕한것이라는것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다. 하여 모택동은 밸이 났고 자기를 욕하게 하는 후원자는 팽진이고 그 뒤에서 팽진을 보호하는건 류소기라고 짚은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을 진정 호되게 때린것은 경제회복과 발전을 위해서였다. 7천명대회후에 모택동은 류소기와 등소평이 막판을 수습하게 했는데 류와 등은 뜯밖에도 예상을 벗어나 성공한 것이다. 류소기는 대기황이 들었던 1962년에 자기가 구상한 농촌정책으로 중국의 경제를 살려냈는데 그것이 바로 이름난 “3자1포, 4대자유”였다.   “3자”란 “자류지, 자유시장, 손익을 자기가 책임지는 것”을 가리키고 “1포”란 “호도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4대자유”는 땅소작자유, 매매자유, 대차자유, 무역자유를 가리킨다. 이 강령중에서 땅소작자유와 팔고 사는 매매자유는 당시에 미처 락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산계급색채가 선명하고도 농후한 경제강령이 농촌경제를 회복함에 거대한 추진작용을 놀았던 것이다. 근근히 2, 3년 사이에 중국사회는 대기황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준엄한 상태에서도 물질이 극도로 결핍하던 현상을 신속이 돌려세운 것이다. 1964년에 이르러서는 각 성시마다 산품진렬대에 농부산품이 그득올랐거니와 가격도 폭락했던 것이다. 1962년에 닭알하나 값이 1원하던 것이 1965년에는 한알에 10전이였다.       
이같이 경제상의 성공으로 하여  류소기는 당내에서 위신이 급상승했고  한편 대약진에서 실패한 모택동은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모택동은 전쟁만 할줄을 알았지 경제는 모른다는 평가와 설법이 당내에 만연했다. 류소기도 차츰 모택동을 안중에 두지 않기 시작했는데 지어는 회의때 모택동의 말을 공개적으로 중둥자르기까지 하는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이때 류소기를 꼭 꺼꾸러뜨리고말리라 결심을 내린 것이다. 모택동은 자기가 만약 류소기를 꺽꾸러뜨리지 않으면 흐루쇼브가 당내의 다수사람을 리용하여 말렌꼬부를 꺽꾸러뜨리듯이 자기를 꺽꾸러뜨릴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에 당내고층인물들 가운데 모택동을 지지하는 사람은 림표, 강생, 주은래 등 그 몇사람뿐이였던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은 림표가 열광적으로 개인숭배를 하게 만든 군대의 지지를 빌어 종당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모택동으로 놓고 보면 사상관념이든 력사연원이든 개인감정이든 어쨌든 림표가 합작하기 제일 적합해서 마음에 들었다. 결과 그 둘은 손잡고 류소기의 온 관료체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따라서 림표는 고강의 교훈을 섭취해서 모택동을 힘써 떠받들면서 그가 자기를 두마음가졌다고 의심하지 않게끔 하느라고 무척 조심했다.
모와 림의 개인관계를 보면 림표가 모택동에게 시종충성했다. 그러나 모와 림이 그같이 손잡고 류소기의 관료집단을 타격하였기에 결국은 전국에 큰 재난을 가져왔고 수천수만의 무고한 백성이 거기에 련루되였던 것이다. 
   
온 “문혁”에서 제일 어두웠던 때는 1967년부터 9차대표대회기간이였다. 모와 림 두 사람이 손잡고 류소기를 꺽꾸러뜨린건 일종의 당내투쟁이였고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비판투쟁한것 역시 당내투쟁에 속하는 것이다. 류소기건 혼쌀먹은 관료간부건 당내에서 다른 사람을 족친것도 사실이니 피장파장이라해야 할수있다. 
 그러나 모와 림의 가장 큰 문제는 보통민중에 대해서까지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한  그것이다.        
모택동과 림표는 1957년 “대명대방”교훈을 섭취하여 “문화대혁명”을 시작하자마자 <<공안6조>>를 발표하여 백성이 모택동과 림표를 반란하기만 하면 현행반혁명이니 총살하거나 그러지 않으면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문혁”을 하면서 모택동과 림표를 반대했다하여 살해되고 갇힌 사람이 수천수만에 달한다. 더욱 엄중한 것은 민중의 힘을 빌어 류소기를 무너뜨린 후 모와 림 두 사람은 토끼를 잡고나면 개를 삶아 먹듯이 일이 성공한 후에는 그 일을 위해 애쓴 사람까지 버린 그것이다. 
  모택동은 홍위병들을 농촌에 보냈고 그리고나서는 림표와 손잡고 1968년말부터 시작해서 계급대오를 정리한다면서 “一打三反運動”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약 50만을 핍박에 못이겨 죽게했고 3천만에 달하는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거나  진압한것이다.  이는 1949년이래 보통백성에 대한 가장 큰 숙청이고 박해였던것이다!        
림표를 변호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는 모택동이 혼자한 것이지 림표는 참여하지 않았다는데 그런 변명은 근본 발을 붙이고 설 수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은 두가지다. 
       

一. 정치발전의 일반상태를 보면 모가 위주고 림이 그다음이지만 둘은 공동히 이번 운동의 최고지도층을 이룬것이기에 그 누가 서명하여 진압명령을 했던지간에 모와 림은 그 누구도 서로 책임을 밀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단지 진압명령에 서명한 것만 놓고 따진다면 실은 모택동본신이 직접 서명해서 진압명령이 내린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모택동이 책임이 없겠는가? 이것이 바로 정치책임이라는 것이다. 
      
二 . 림표가 후에 취한 행동을 보면 알수 있는바 9차대표대회전에 급히 써먹은 반란파와 보통군중을 탄압한 그 자신의 심태는 사실 모택동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림표는 진정한 정치가가 아니였고 리론가는 더구나아니였기에 모택동처럼 그렇게 일련의 무산계급전정하에 계속혁명하는 리론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1959년에 모택동을 지지해 나선것은 력사연원과 개인관계가 있었기 때문이고 전강산의 옛전우였다는 의기에다 한편으로는 더더욱 비군사계통의 사람인 류소기가 1949년후에 중앙대권을 쥔데 대해서 반감과 분노가 생겼기 때문인 것이다.  
   
림표는 류소기를 꺽꾸러뜨려 대공을 세웠으니 9차대표대회때는 승리의 과실을 나눠가질줄로 알았다. 1967년도 중기에 이르러 전국은 군사관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각 성과 시, 지방정권 그리고 각 기업과 사업단위들이 군관회(軍官會)의 공제를 받은것이다. 9차대회전에 군관회는 각종계급이기분자를 진압했다. 이때 모와 림 두 사람의 인식은 일치했던 것이다. 사실근거가 있는 것이다. 1967년 하반기부터 시작하여 전국각급정권은 기본상 군관회의 손에 장악되였다. 계급대오를 정리하는 운동은 완전히 군관회의 장악하에 진행되였던 것이다. 림표의 몇몇 대장(大將)이 구체적인 강화를 했는데 그중에서 구회작(邱會作)의 강화가 제일 살기등등했다.
당시에 운남에 파견되였던 곤명군구제1정위인 담보인(譚甫仁)은 림표4야전군의 친신이였는데 운남에서 계급대오정리를 하면서 한 말은 하나의 본보기책이라 하겠다. 그것은 림표의 심리 그대로였는데 정권이 곧 진압할 권리로서 살인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였다. 
   
담보인이 림표의 말을 공개적으로 뇌였던 것이다. 
   
“1천명이 있으면 1천명을 붙잡고 1만명이 있으면 1만명을 붙잡고 10만명이 있으면 10만명을 붙잡고 100만명이 있으면 100만명을 붙잡아야 한다. 절대 손이 물러서는 안된다.” “두개 백분의 오의 틀에 매여 구속받지 말아야 하고 제한받지 말아야 한다.” 
   
온 “문화대혁명”에서 군관회가 전국에다 펼친 홍색공포가 제일무서웠고 박해가 제일잔혹했으며 죽인 사람도 제일많은 것이다. “문혁”초기 홍위병들의 홍색공포를 훨씬초과했다. 

표가 모택동의 뜻에 따라 류소기를 꺽꾸러뜨렸겠다 9차대회까지 열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정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림표는 정치두뇌가 모자라다보니 모택동에게 두가지 의심을 안져주고 말았다. 그 하나는 림표가 개인숭배를 제 머리에까지 올려놓아 백성들이 모택동을 숭배하듯이 자기도 숭배하게 만든 것이다. 모택동어록이 있으니 림표어록도 나왔고 그것을 모택동어록을 드는 것 처럼 손에 들게 했다. 모택동이 제 녀편네 강청을 정치국에 밀어넣은 것처럼 자기도 녀편네 엽군을 정치국에다 밀어넣었다. 모택동을 가장 꺼리게 한것은 림표가 4야전군의 친신인 황영승, 오법헌, 리작붕, 구회작을 총참모와 총후근과 몇가지 큰 병종의 지휘권을 쥐게 한 그것이였다.       
모택동은 청일색이면 부리기 힘들다고 말한적이 있다. 종래로 청일색을 무서워 한 그였다. 모택동의 직계는 1방면군이건만 전국에 군구가 포치된것을 보면 비상히 중요한 남경군구를 원 장국도(張國燾) 4방면군의 허세우(許世友)에게 주었고 무한군구는 진재도(陳再道)에게 주었던 것이다. 서로 견제하게 하자는데서였다. 한데 림표는 군대내에서 자기의 4야전군장령들로 청일색으로 만드니 모택동은 불안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림표를 다른 눈으로 보게되였다. 입이 무겁고 말이적으며 병을 칭탈하고 장기간을 집에서 보낸 그가 전에 생각했던 것 처럼 권력에 담백한 사람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여 모택동은 빨리 림표를 바꿔버려야겠다는 궁리를 하게되였다. 다른 한면으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목적이 류소기의 관료집단을 없애치우고는 이어서 자기의 계속혁명리론을 진일보로 확보하고 실현하자는 것이였다. 하기에 9차대표대회후에도 모택동은 손을 놓지 않고 혁명을 계속부르짖었을뿐만아니라 중공의 권리를 결국 강청과 그녀를 추종하는 장춘교, 요문원 등에게 준것이다. 그러니 림표의 군인집단은 하나의 과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림표는 권력을 쥔다음부터는 앞으로 더 나갈 궁리를 하지 않았거니와 자리도 권력도 강청의 문인집단에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9차대표대회후에 모택동이 림표를 제거하려고 맘먹은건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당시 림표의 지위와 모택동과의 관계를 봐서는 림표가 모택동을 암해하려는 그 어떤 리유도 가질 수 없었다. 모와 림의 충돌에서 모가 주동이고 림은 피동이였다. “571공정기요”란 것은 림표가 죽어서 나온것인데 이것은 모택동이 당내외에 할말이 있어야겠기에 알짜 꾸며낸 것이다. 
       
림표가 모택동을 암살할 리가 없는 리유는 아래와 같다. 
   

제1. 림표는 9차대표대회후 이미 황제가 정해놓은 계승자로 되었으니 한사람의 아래 만민의 머리우에 올라앉은것이다. 림표로 놓고보면 가장 큰 리익은 현상유지를 하였다가 이제 모택동이 죽으면 자리를 넘겨받는 그것이다. 모주석이 장수해서 인차죽지 않는다해도 림표는 부통수이니 그만하면 괜찮은 것이다. 한데도 왜서 제 생명에 위험이 있는 짓을 하겠는가? 림표가 정녕 모택동을 죽이였다해도 순리롭게 보좌에 올라앉겠는지 미지수인 것이다.  이 문제에서 모험과 수확의 비례가 맞지 않은것이다. 때문에 모가 림을 계승자로 부통수로 하자 할 때 림표가 모를 암살할  동기가 생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제2. 림표가 모택동이 이제는 자기를 신임하지 않는다는것을 발견하고는 먼저 손을 써서 정변을 일으켜 모택동을 살해하려다 들킨게 아니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형세를 분석해 보면 그것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다. 당시의 조건을 보면 그가 정변을 일으킬 리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모택동이 그를 불신임하기 시작했다면 모택동은 꼭 경각성을 높혔을 것이다. 모택동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것이다. 그는 언녕 림표와 그의 아들 림립과를 엄밀히 감시하고 공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모택동이 엄밀히 감시하면 림표는 군대를 움직일 수 없는데 어떻게 무장기의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쪽의 림립과의 패가 이른바 “571공정”이라는 것을 계획했다는데 음에 맞추면 “武起義(무장기의)”가 된다. 그렇게 알기 쉽게 로골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제3. 가장 중요한 것이다. 1970년 8월에 열린 9기2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이미 림표와 충돌이 발생하여 진백달을 타도했고 황영승, 오법헌, 리작붕, 구회작은 검사서를 썼으며 림표의 처 엽군도 핍박에 의해 검사서를 쓴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림표는 피동이 되어 이미 뚜드려맞는 상태였던 것이다. 림표의 온 가정행동거지, 공군에서 권리를 쥐고있는 아들 림립과의 행동마저도 모택동과 주은래의 감시를 받는 처지였고 그들의 친신이였던 황, 오, 리, 구는 실제상 모택동에게 투항하여 이름만 걸어놓았을 뿐  실권은 없는 상태로서 군대의 지휘권은 주은래가 장악하고 있은 것이다.  당내투쟁에 숙실한 림표가 이런 상황임을 알면서도 무장기의를 조직하고 암살을 계획했다니 그것은 천방야담인 것이다. 
   
오히려 모택동이 림표가 손쓰는 틈을 타서 림표를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없애지 않았고 등소평도 철저히 없애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바둑돌을 남기자는데서였다.  본래는 “문화대혁명”초에 벌써 모택동은 림표와 손을 잡고 주은래도 류소기와 마찬가지로 꺽꾸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인은 두가지다.
        
첫째는 나라를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주은래와 같은 대관사장이 있어야만이 온 사회가 운전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주은래를 남겨둬야 림표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첫시작에는 림표를 리용하여 류소기를 꺽꾸러뜨렸다. 그런데 림표의 세력이 더 커지면 수습하기 어렵기에 주은래를 남겨 그를 제약해야하는 것이다. 
       
실제상 림표는 종래로 모택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571공정>>이라는 그 문건은 완전히 모택동이 꾸며 만든 가짜인 것이다. <<571공정>>이라는 문건을 조작한 다른 한 목적은 그 다음에는 주은래를 꺽꾸러 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주은래를 남긴것은 림표를 꺽꾸러 뜨릴 바둑돌로 써먹기위해서였다. 한데 림표가 스스로 죽어버렸으니 다음의 목표는 주은래로 돌아진 것임이 아주 명백한 것이다. 
   

한편 주은래는 림표가 무너지는 과정에 손을 써서 당내와 군대내에 자기의 권력을 확대했다. 림표가 죽은 그 몇달사이에 주은래는 조정의 권리를 거의 제 혼자손에 넣은 것이다. 
 모택동은 이를 의식했기에 곧 주은래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림표가 죽자 주은래는 “비림정풍(批林整風)”책략을 써서 “좌”를 비판함으로써 당내관료집단과 민중의 호감을 사면서 지지를 받았다. “좌”에 대한 비판은 관료통치를 다시건립하고 생산을 회복하자는 것이였기에 그의 이런 거동은 당내관료와 보통민중의 옹호를 받은것이고 따라서 주은래의 위신도 갑자기 더 높아지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이 점을 보아내자 주은래가 응집한 관료복벽세력을 제거할 절박성을 느껴 “문혁”을 계속하면서 죽은 범인 림표를 “우”경으로 정해놓고 복벽을 비판하는 것으로써 주은래의 세력을 문어뜨리려고 했다. 하여 모택동은 자기가 꾸며 만든 <<571공정>>을 신속히 림표의 “우”를 비판하는 것으로 고쳤고 중공의 정책은 계속 “좌”의 로선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라면서 중공당내의 관료복벽집단을 타격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권력투쟁에 모택동이 주은래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주은래의 매력과 친화력은 물론 장기적인 특공생애에서 이루어진 조직능력과 외국과 교섭하는 능력을 모택동은 근본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에 “우”를 비판하고 림표를 비판정풍하는 것으로는 주은래를 상하게 할 수 없었거니와 주은래의 명성은 날따라 높아만 간 것이다. 모택동은 하는 수 없이 “비림비공”운동을 조작해 낸 것이다. 이러니 문제가 까밝혀진 것이다.  누구나 다 림표는 군인이니 공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한데도 이미 죽은 그를 공자를 비판하는데다 끌어붙이는 건 기실은 림표와 공자를 비판한다는 간판을 내걸고 주은래를 하자는 것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모택동은 림표가 죽자부터 시작해서 제가 죽기전 까지 줄곧 주은래라와 투쟁했다. 
   

등소평이란 이 바북돌을 보기로 하자. 등소평은 당내에서 류소기계통에 속하지 않았고 주은래계통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줄곧 모택동을 바싹따른 것이다. 그러다가 1962녀부터 1966년까지 등소평은 류소기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리념이 같기 때문이였다. 류소기가 내놓은 자본주의방식인 “3자1포, 4대자유”와 등소평이 주장하는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실용주의”가 중국의 경제문제를 해결함에는 공통점을 갖고있었던 것이다. 하기에 두 사람은 함께 손잡게 된 것이다.  
        
1975년, 모택동은 등소평을 다시쓰면서 그가 주은래를 철저히 대치하게하려했다. 그 원인인즉은 “4인방”가운데는 군대자력과 경력이 있는 자가 없거니와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근본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과 비해보면 주은래를 대치할만한 사람은 그래도 등소평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국내에서의 각색은 등소평이 주은래의 대립면으로 출현하는 것이였다. 한데 등소평은 직책을 내놓았다가 활동을 재개하자 모택동이 바라는 로선으로는 가지 않았거니와 계속혁명을 정지하고 경제건설을 회복했다. 모택동으로 놓고 보면 이것은 자기가 발동한 “문화혁명”을 부정하는 행위였기에 부득불 등소평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그같은 정치수단은 점점 쓸모없었다. 권술을 일시쓰는 것이지 반복적으로 쓰는게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민심에 달린 것이다.        

1976년 4월에 주은래가 별세했는데 “문화대혁명”을 거쳐 결국은 그가 이긴 것이고 크게 패한것은 모택동이였다. 그것은 그를 추모하여 천안문광장에 나타난 화환과 눈송이 날리듯 날린 무수한 시편들이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어떠했는가? 모택동이 죽으니 그의 녀편네와 조카와 그가 가장 흠상했던 몇몇 문인들은 다가 수쇠를 차고 심판대에 올라 억만국민의 지탄을 받고 하수인이 되고만 것이다. 
  
옹근 정치로선이 개변되여 등소평은 70년대말부터 시작하여 경제개혁을 했는데 그것이 당년에 류소기가 내놓은 “3자1포, 4대자유”를 계승한 것이라는건 너무도 명백한 일이다. 그러니 모택동은 아무튼 큰 실패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술한 공산당내의 투쟁으로 보아 고강과 림표는 그래 억울하지 않겠는가? 고와 림 두사람은 다가 모택동을 바싹따르면서 그를 위해 당내투쟁에 적극리용되였다가 결국은 버림받아 비명에 죽고 말았으니. 그러니까  억울하다는거다. 그렇지만 온 중국사회, 전국민이 그 사람에게 품은 분하고도 억울한 마음이 사라질 수 있는가?  당내정치투쟁에서 희생품이 된 그 두사람의 억울한 죽음이 나라백성을 위해 “대약진”의 페단을 지적하고 바로잡으려다가 모택동에게 몰려 관직을 떼우고 “문화혁명”에 박해받아 숨을 거둔 팽덕회의 억울한 죽음과는 근본 성질이 다른것이다.  
   
림표가 중국민중앞에 지은 죄는 회피할래야 회피할 수도 없고 남에게 덮어씌울래야 덮어씨울 수도 없는 것이다. 
   

1949년부터 개혁개방을 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력사를 놓고 보면  1959년부터 1971년에 이르는 사이에 온 나라가 제일 엉망이였는데 그 5년간에 홍색공포가 가장심했던 것이다. 림표가 전력을 다해 협조하지 않았다면 모택동은 그렇게 미친년 널뛰듯하는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그같이 오랜기간 큰 재난에 빠져 그같이 엄청한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림표는 어쩌는 수 없어서 모택동을 떠받들고 그의 정치에 따랐다는 리론은 서지 못하는 것이다. 1959년은 모택동이 위망이 내려가서 제가 하기싶은대로 할 처지가 못되였다. 림표는 계속 병을 칭탈하고 집에서 다른 원수들 처럼 지냈더라면 죽어도 좋게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7천명대회에 이르러 모택동은 고립되여 근본 일어서기조차 어려운 처지였는데 림표가 나서서 협력하고 받든것이다. 림표가 만약 군대내에서 개인숭배고조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관건적인 시각에 주동적으로 힘을 다하지 않았다면, 모택동은 가능하게 당내에서 실권을 잃어 영원히 제2선에 물러났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됐더라면 중국은 차라리 무사했을 것이다. 한즉 림표가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책임이 없다는 변명역시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것이다. 모택동이 림표를 부려먹고는 억울하게 죽게했다해도 림표의 죄는 죄대로 남는 것이다. 
   
오늘 이 한단락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당내인사투쟁으로서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결책집단이 중국의 발전방향과 도로를 놓고 생긴 분기였다는 것과 1949년 후부터 모택동이 걸은 심리의 력사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중공은 민주가 있는 집정당으로 되여야 하는가 되지 말아야 않는가, 현대사회의 과층(科層)관리를 해야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 가 하는 문제가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서 명백해졌다.     


              림표의 도망은 큰 타격

內容提要:    모택동은 연안에 있을 때 원자탄이 있는 미국과 일체 반동파는 “종이범”이라 했다. 하지만 림표가 도망치니 대번에 폴싹 늙어버렸다. 림표의 도망이 그에 대한 타격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어찌보면 그 타격은 치명적이였다고 볼 수 있다.  .....수영장(pool)에 있는 모택동의 침실창문은 활짝 열려있는데 침대에 바로 누은 모택동의 낯색은 퍼런빛갈이 났고 입술은 자지색이였다. 흡사 호흡이 멎은것만 같았다.        

1971년 9월 13일에 림표가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도망쳣다는 것이 밝혀지자 어떤 사람은 당장 유도탄으로 갈기자고 했다. 
 모택동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늘의 비가 내리려 하고 과부가 시집가겠다는데 가게 내쳐둬.”
    
주은래는 송수화기로 삼지창에 앉은 림표와 말했다. 
   
“림부주석, 국내의 그 어느 비행장에 내려도 내 이 주은래가 가서 맞이할테요.”
    
하지만 저쪽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돌발적인 사건에 대처하느라 주은래는 꼬박 사흘간이나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중국에 와있는 몽골대사관에서 저희들 사람을 시켜 사진을 보내와서야 림표는 부러진 창모양으로 모래에 묻혓다는것이 실증되였다. 비행기가 몽골의 얼두얼한에 추락해 자멸하고 만 것이다.    
내내 긴장속에 팽팽하던 대청의 분위가 확 풀리여 모두가 한시름을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고 방안에 남은건 주은래와 기등규(紀登奎) 둘뿐이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졋다. 그 소리가 마치도 홍수가 언제를 무너뜨리는것 같이 우람졌다. 깜짝 놀랜 기등규는 머리돌린 채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주은래가 벽에 기대여 주저앉은채 어깨까지 들먹이면서 통곡했던 것이다. 구곡간장이 터지듯 했다. 그것은 오래동안 가슴에 싸이고 싸이여 억눌리여있던 일종의 말못하던 울분이 범람하는 것이였다. 
   
너무도 생각밖이여서 기등규는 넋을 잃을 때 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방금전까지만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만면에 웃음지으면서 참으로 불행중 다행이라면서 술잔을 들던 주은래가 아닌가!  
   
기등규는 중앙에 조동되여서부터 다른사람은 몰라도 주은래만은 영원히 침착하고 차분하고 락관적일것이라 믿었다. 주은래는 중등키에 몸가짐이 단정하고 장중하거니와 태도역시 고상하고 우아했다. 하기에 전형적인 남방사람으로서 용모가 청수하고 말씨도 점잖았던것이다. 기등규는 그를 따라 사업하면서부터 그가 외교상에서 맏다드는 일촉즉발의 형세거나 당내의 온갖복잡한 국면이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지있게 응부하는 것을 친히 목격한 것이다. 그는 마치도 곤난을 극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난것 같고 그래서 그의 앞에는 해결못할 곤난이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데 오늘은 이같이 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같은 장면을 처음당하고 보니 진동이 너무나도 커서 기등규는 제 가슴을 짚었다.     
이윽고 그는 그를 안위했다.
    
“총리, 총리, 림표일당이 떨어져 죽었으니 이거야말로 천만중다행이 아닙니까. 그의 끝장이 이러하니 기뻐해야지요, 않그렇습니까?”
    
기등규가 두번 곱씹어서야 주은래가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너는몰라, 넌  몰라!”
       
두번이나 곱씹는 말이였다!
    
그렇다. 기등규는 모른다. 알수 없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나서야 그때 주은래가 왜 그같이 소리내여 울었는지를 비로서 깨닫게되였다. 
   
림표를 부통수자리에 올려놓느라고, 그를 수립하고 지켜주느라고 그 얼마나 많은 당, 정, 군의 로간부들을 억울하게 만들었던가. 학교는 교학을 걷어치우고 공장은 생산을 중지했던 것이다. 전국이 엉망진창이였다. 우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면 재난을 입지 않은 곳이 있는가? 반란자들은 국가주석 류소기를 “반역자, 내부간첩, 로동귀족”이라면서 타도했고 석탄부장 장림지(張霖之)를 산채로 때려죽였다. 그 얼마나 많은 간부가 감옥에 같히고 그 얼마나 많은 군중이 계급계선을 가른다통에 비판투쟁받고 릉욕을 당했던가!....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가 되어 이 모든 짓을 적극해놓고는 그 “공”으로 계승자가 되어 당장에 까지 이름을 박았던 림표가 결국은 처자식을 데리고 배반자가 되어 스스로 이국사막에다 제 시체를 던지고 말았으니 어떻다고 말해야 하는가?
        
주은래는 가슴아팠다. 주관욕망이야 어떻던지간에 결과가 나쁘면 나쁜것이다. 책임이 무거운 그런것을 누가 발동했던지간에, 나라 총리인 그가 여러해간 하지말았어야 할 “문화대혁명”을 하여 결국은 온 나라를 이꼴로 망태기되게 한 것을 보고 어찌 가슴아프지 않겠는가! 이래도 류소기를 꺽꾸러뜨리고 림표를 올리세운 “문화대혁명”이 좋다고 해야 한단말인가? 
  전국의 당, 정, 군과 인민앞에 대체 무엇이라고 어떻게 교대한단말인가?     
모택동은 연안에 있을 때 원자탄이 있는 미국과 일체 반동파는 “종이범”이라 했다. 하지만 림표가 도망치니 대번에 폴싹 늙어버렸다. 림표의 도망이 그에 대한 타격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어찌보면 그 타격은 치명적이였다고 볼 수 있다.
 

1971년 12월, 인민대회당의 동쪽대청에서 회의를 소집하고있던 주은래는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만 낯색이 하얗게 질려가지고 들어오면서 손을 저어 회의를 그만둔다고 선포했다.    
“산회! 산회!” 
   
어떻게 된건가?  무슨일이 생긴건가? 
   
모든 사람의 눈길을 받으면서 주은래는 작은 가방을 끼고 엘리베이터쪽으로 급히걸어갔다. 
  
 위사장 장수영(張樹迎)이 그를 부축했는데 그는 주은래의 몸이 떨리고있음을 감촉했다. 
       
“수영장에 도착했습니다.”
    
그 자신의 목청도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아마 모택동 그쪽에서 무슨 변이 난 모양이구나 속으로 짚었다.
        
아니나다를가, 수영장(pool)에 있는 모택동의 침실창문은 활짝열려있는데 침대에 바로누운 모택동의 낯색은 퍼런빛갈이 났고 입술은 자지색이였다. 흡사 호흡이 멎은것만 같았다. 
     
장춘교, 요문원, 강청 등이 이미 와 있었지만 그들은 멀찌기 서서 랭담한 표정으로 보고만있을 뿐이였다. 의사는 긴장하고 촉급한 기분에 싸여있다. 급히 가져다놓은 흡담기(吸痰器)만 봐도 병세가 과연 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은래는 의사와 조용히 정황을 알아보았다.      
       
흡담기로 목구멍의 가래를 아느새 걷어내서야 모택동은 숨을 내몰아쉬면서 혈색이 돌아섰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는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이였다. 주은래는 그의 손을 붙잡고는 입을 그의 귀가에 대면서 사뭇 격동된 음성으로 알려주었다.
    
“주석, 주석, 대권은 아직도 주석손에 있습니다!” 
   
이 말을 주은래의 신변에 있던 장수영이 똑똑히 들었다. 
중공당내에서 모택동의 심리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그래도 주은래였다. 그가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지간에 주은래는 전반 대국을 위해서는 그래도 그를 받들어 준 것이다. 한평생 재상질을 착실히 했다해야 할 것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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