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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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46)
2011년 03월 30일 18시 17분  조회:3483  추천:15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46)       

(1)강생은 어떻게 모택동과 배합했는가
            
(2)베일에 가리운 강생의 얼굴                                   (3)강생이 서명한 비밀처결령
 
강생은 어떻게 모택동과 배합했는가 
            
                                                                                                                  모
택동은 정치가이자 시인으로서 적잖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글은 거의가 빈틈없이 째이고 읽으어보면 무게가 있다. 강생(康生)은 중공의 고위층인물로서 시사(詩詞)와 서법을 아주 완벽하게 리해하는 령도자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는 금석자화(金石字畵)를 흠상하기 즐겼고 시사와 서법에 조예가 깊어 웬간한 사람은 따르지 못했다. 더욱히는 특유한 정치민감성을 갖고있는데다 자기의 능란한 재주를 빌어 수령의 심리를 맞춰주니 환심을 사기마련이였다. 모택동은 그의 시사와 서법을 좋게 흠상하군했다. 그는 그를 신용했다. 강생(康生)이 그의 정치로선에 융합했던 것이다. 두사람지간에는 서법이 일종의 특수한 매개였다. 
   

최초의 문자

목전에 강생(康生)이 모택동이 손수 쓴 시사와 묵흔(墨痕)을 보고서 쓴 필적을 볼 수 있는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원문에 표점부호가 없는것을 필자가 달았음)       

1959年 10月 23일 아침 8시에 모택동동지의 침실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탁상머리에 놓여있는 선지 석장에 묵적이 선연해서 펼쳐 보았더니 정말 택동동지가 방금 쓴 사고(詞稿) 3수였다.....  그가 친히 쓴 붓글씨여서인지 과연 진귀하고 찬란해보였다. .....회의는 12시에 끝났다. 나는 원고를 다시금 읽어보고나서 택동동지에게 청을 들었다. “글이 무척 마음드는데 두고 보게 나를 줄 수 없는가?”고. 택동은 받아 다시훑어보고나서 말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거니 먼저 갖다보오.”. 나는 허가를 받고나니..... 갑자기 중남해의 가을빛이 유별나게 봄빛보다 더 좋아보였다.
    
사람들은 이것이 세상에 내놓으려는 책의 머리말로서 강생(康生)이 제 내심의 감수를 표달한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점점 의식형태의 대권을 장악하고 정계에서 요원이 된 후로는 각가지 작법으로 모택동의 시사와 묵적을 발표하는 것을 한낮 “사회주의문단의 훌륭한 일”로 여긴것이다. 
   로산회의전기였던 6월하순과 7월상순에 모택동은 <<칠률 ․ 소산에 이르러>>, <<칠률 ․ 로산에 올라>> 두 수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회의기간에 베끼여 돌렸다. 9월 1일, 모택동은 <<시간>의 주임편집인 장극가(臧克家) 등 에게 이 두수의 칠률을 보내면서 “될수있는대로 시간에다 내달라”했다. 모택동이 그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팽덕회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던것이다.    “근일에 우경기회주의가 창궐하게 진공하면서 인민의 사업이 이것도 잘못됐다 저것도 잘못됐다한다. 전세계의 반화반공분자 그리고 지난때 우리 나라 무산계급내부와 당내부에 혼입한 자산계급, 소자산계급투기분자들이 있어서 안팍으로 호응하면서 창궐하게 진공하고 있다. ......나의 이 두 시는 그 쌍놈의 개자식들에게 답복하는 것이다.”    9월 7일, 모택동은 이 두 시를 수개하여 호교목에게 보내면서 더욱 명확하게 말했다.    
“주제가 반우경기세를 돋구어 당을 반대하고 총로선을 반대하고 대약진을 반대하고 인민공사를 반대하는 자들을 징벌하자는 것이다.”
    
강생은 더 말할것 없이 이러한 내부정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사를 정치투쟁의 무기로 삼는 모택동의 심리를 제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1959년 10월하순에 강생이 책의 머리말을 쓴 것도, 모택동의 시사와 묵적을 발표하는 것을 “사회주의 문단의 훌륭한 일”로 만든것도 다가 정치형세를 봐가며 목적있게 개인숭배를 고취한 것이다. 
      
“수정주의”를 반대하여 세운 공

“세폭의 붉은기”가 쇠미하자 모택동은 60년대부터 시작하여 주의력을 흐루쇼브의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였다(간칭“반수”). 강생(康生)은 자기에게 중임을 맡길 기회를 보고있던 차 조어대(釣魚臺)에서 주관하는 중앙사작조의 “반수”격문을 쓰게 되었다.    
모택동은 시를 짓는 독특한 방식으로 정치가로서의 심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장정시사를 쓰던 30년대중기를 이은 제2차 창작고봉이였다. 그러니 시사에 통달한 강생은 거의 선인의 학설이나 리론을 기술할 뿐 자기의 생각을 가미하여 창작하지 않아도 공을 세우게 됐던거다. 
   
1961년 10월하순, 곽말약(郭沫若)이 소극(紹劇) <<손오공이 백골정을 세 번 치다>>를 보았는데 후에 칠률시 한수를 지어 <<인민일보>>에다 발표했다. 모택동은 11월 17일에 “대지에 폭풍우휘몰아친다” 를 써서 맞장구를 쳤다. 이듬해의 1월 6일, 곽말약은 광주에서 강생이 베낀것을 보았다. 모택동이 시사를 지어 맞장구를 친지 50일 후였다.  그들은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면서 “반수”를 했던 것이다. 
   
1963년 1월은 “현대수정주의”를 향해 공격을 시작한 긴요한 시각이였다. 모택동은 8일날 옹근 하루밤을 새워가면서 “일체 해인충을 쓸어버리자, 그 어떤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글을 썼다. 1964년 1월하순에 이르러 모택동은 영어문역자의 요구에 의하여 방금출판된 <<모택동시사>>중의 어떤 사의 구절을 해석했다. 그 중 압축이 잘된 <<만강홍 ․ 곽말약동지에게 화답함>>은 상세하게 해석까지했다. 
   
“비명적(飛鳴鏑)”은 우리의 진공을 가리킨것이다. “서풍에 락엽이 장안에 떨어질제”, 벌레가 추동을 무서워 한다. 형세의 변화가 빨라 그때는 “백장빙(百丈冰)”이였건만 지금은 “사해가 노하여 뒤번지고 오주가 폭풍우에 진동”한다. 지난해부터 이쪽은 진공을 시작했는데 9월부터는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것은 쏘공중앙의 공개신을 평한 것이였다. 
   
너는 천천히라지만 나는 빨리가자니 하여튼 우리는 같지 않은 길이다. 네가 1만년살겠다? 그렇게 길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이제 높고 낮음을 보면 명백해질테니 발뼘을 하려하지 말라. 시간은 우리쪽에 있는것이요, “조석을 다툰다”는 것 뿐이지 우리도 그다지 급하지는 않은 것이다. 
   
강생이 주관하는 중앙사작조가 쓴 “9평”이 “반수”의 중형포탄이라 한다면 모택동의 이 <<만강홍>>은 반공을 발동하는 진군령으로 볼 수 있겠다. 이해의 12월 26일은 마침 모택동의 70탄신이여서 인민문학출판사는 곽말약이 제첨을 쓴 세로짜기 간체본 <<모택동시사37수>>를 출판했다. 그 전이였던 12월 6일에 모택동은 강생에게 편지를 써서는 비서 전가영(田家英)을 시켜 갔다주게했다. 
   
“오늘이나 래일 회의를 열어 시사문제를 놓고 토론하고자 한다. 나는 더러 지우고 고치자고 한다. 회의는 강생동지가 주관하며 제출된 의견은 사정을 참작하여 결정해서 나에게 주기바람!”
    
회의참가자는 전체 22명으로서 명단은 모택동이 친필로 써서 정했는데 아래와 같다. 주덕(朱德), 등소평(鄧小平), 팽진(彭眞)과 같은 정치계의 요원이 있는가 하면 곽말약(郭沫若), 원수박(袁水拍), 장극가(臧克家)와 같은 시인들도 있었다. 모두가 어질고 덕망높으며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들로 년소자와 년장자가 모이는 장소였다. 모택동은 “강생동지가 주관”한다고 명확히 지명했다. 그를 얼마나 믿고 중히 여기는가를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정치와 예술 두가지 방면에서 모택동의 지기(知己)가 된 강생이였으니 안그럴리가 있겠는가?   

모택동시사와 묵적을 여러 가지 기풍으로


강생의 지령에 따라 1964년 1월 4일, <<인민일보>>와 전국각지의 신문들은 모두가 첫면의 대부분을 모택동의 <<시사10수>>를 실으면서 동시에 모택동의 사진을 크게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둘째면에다는 곽말약이 쓴 <<“백만웅사장강을 건너다”ㅡ모주석이 신작시사 <칠률 ․ 인민해방군남경점령>을 읽고서>>를 실었다.     
그후 4개월간 곽말약은 <<인민일보>>등 신문과 잡지에다 계속하여 9편의 해석문장과 모택동이 새로 창작한 시사 9편을 발표했다. 주의를 일으키게 되는것은 곽말약이 해석한 문장들에는 강생과 관계되는 자료가 여러군데나 있는 그것이다. 지어는 해석문장인 <<칠률 ․  리진동지의 제의에 따라 찍은 로산선인동>>란 글을 보면 온 문장에 강생이 1959년 7월 5일에 모택동 등과 함께 선인동을 유람하면서 지은 <<주리곡>>을 인용하면서 “묘사나 서술이 다가 생생하고 묘하다”는 칭찬이다. 
   
강생은 또 기발한 궁리가 생겨 이해의 춘절에는 <<광명일보>>첫판에  다 모택동의 <<뽕을 따다 ․ 중양>>묵적을 내라고 지령을 내렸다. 이것은  1959년 10월에 쓴 “청면득지(請面得之)”사 원고 세편중 한수인 것이다.   같은 면에다 또 곽말약의 해석문도 실었다.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꼭박 3  년 시사와 묵적을 내면서 그에 동반하여 곽말약의 해석문도 실었던 것이  다.      
   
1967년 원단, <<인민일보>>는 첫면의 웃머리에다 <<만강홍 ․ 곽말약동지와 함께>>묵적을 동반하여 모택동의 거폭의 사진을 냈다. 그때는 강생이 어느덧 중공중앙정치국상위로 승임하여 일시에 권력이 어마어마한 중앙문혁소조의 유일한 고문이 되였던것이다.        
             

베일에 가리운 강생의 얼굴
   

강생(康生ㅡ 1898~1975. 12. 16). 생전에 중공중앙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전국정협부주석이였고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주요성원중 하나다.


(1). 통일전선을 제출.


1933년 10월, 왕명, 강생 등은 련명으로 중공중앙정치국에 편지로 민족통일전선의 책략과 보취를 설명하면서 통일전선을 건립할 것을 강렬히 요구했다. 구체적인 항일강령을 내와 국민당을 제외한 기타 항일을 요망는 모든 당파와 단체들을 한데묶어세운다면 중화민족의 반일운동을 추진하고 항일민주운동을 발전시키고 나아가서는 중국인민해방전쟁을 조직하는데도 매우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후에 송경령(宋慶齡) 등 1779명이 련합서명을 하고는 공개발표했는데 항일민주운동의 발전에 아주 큰 작용을 했다. 당년에 왕명과 강생은 함께 통일전선을 건립한 것이다. 한데 그 이후의 처사는 나무도 상반되였다.      

(2).“왕명로선”


양상곤이 말했다. 
"강생은 공산국제시대에 모쓰크바에서 왕명을 적극지지했다." "1937년 겨울에 강생은 모쓰크바에서 돌아오자 말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져 자기를 왕명로선을 반대한 영웅으로 나타냈다. 그러면서 지어는 왕명에 대해 적발하기까지 해서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다." 
   
(사료에 적혀있는것을 보면 1933년 7월부터 1937년 11월사이에 강생은 모쓰크바에서 왕명의 조력자가 되여 왕명로선을 저극적으로 밀고나갓는데 왕명이 쓴 <<중국을 던욱 볼세비크화하기 위해 분투하자>>는 글을 소책자로 만들어 그것을 당의 로선으로 체현했거니와 모쓰크바에 있는 중국사람들을 선동하여 한차례 왕명을 총서기로 하는 서명운동을 벌리고는 공산국제와 련계하여 왕명을 중공중앙서기로 비준해줄것을 바라는 청원서를 올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양상곤은 계속말했다.
    
"1936년부터 1937년 쏘련의 숙반시기에 쏘련에 가 있은 우리의 당간부들이 박해를 받은데는 강생이 책임이 있는것이다."  "1943년 연안정풍때 강생은 숙반확대화를 하였기에 많은 간부들이 '반역자', '특무', '내부간첩'으로 몰리였던것이다. 다행히 그런것을 당중앙이 발견했기에 제때에 규정할 수 있은것이다. 후에 모택동은 그릇되게 처리한 것을 평판하고 잘못을 사과했다." "1947ㅡ1948년에 강생은 진수지구(晋綏地區)에서 토지개혁을 할 때 또 "좌"로 나갔다. 그래서 모택동이 강생은 극'좌'의 사람이다. 긴급구조운동때 극"좌"를 부리더니 아직까지고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있다."고 비판했다. "후에 모택동은 강생을 산동에 보내여 사업하게 하면서 북경으로 조동시키지 않았다."
    
건국후 강생은 장기휴양을 하면서 중앙으로 조동되지 못했다. 하여 심리상 매우 초조불안했던 것이다. 모택동을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의 리해와 신임을 다시받고싶었던 것이다. 1952년초, 모택동은 그가 북경에 오는것을 허락하여 중남해원내의 석복당(錫福堂)에 들게했다. 양상곤은 그때 석복당에 가 강생을 만나보던 정형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러갔더니 강생이 지금은 몸이 매우좋아졌다면서 유일한 희망은 모주석을 만나보고싶은 것 뿐이라고 했다. 나는 거기를 나오자 그길로 모주석이 있는 국향서옥(菊香書屋)에 가 모주석에게 강생이 왔다고 보고하면서 그가 주석을 몹시 만나보고싶어한다고 알려주었다. 모주석은 하던 사업을 제쳐놓고 나와함께 석복당에 갔다. 강생은 모주석을 만나게 되니 너무도 기뻐서 주석의 손을 어스러지게 잡으면서 '몹시 바쁠텐데 나를 보러 일부러 오시다니!' 했다.  주석은 그보고 그래 몸은 어떠냐고 물었고 강생은 많이 낳아졌다고 대답했다. 주석은 몸조리를 더해서 병이 다 낳은 다음에 사업을 하라하고는 돌아갔다. 그러자 강생은 나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격동되여 곱씹었던 것이다. '당신은 나를 재생시킨 어버이야! 무엇이라 감사를 드렸으면 좋을 지 모르겠네!' " 
  
 양상곤은 이어서 말했다.         
   
"문혁때 강생은 나를 너무도 흉하게 혼쌀먹였다. 그것이 그래 '감사'란 말인가? "
    
강생은 북경에 온 후 중앙위원, 정치국후보위원이 되었지만 실적인 중요한 사업은 맡지 않았다. 1958년에 그의 직무는 중공중앙문교소조 부조장, 교육공작위원회 부주임이였으니 아직은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3). 반수투쟁을 리용하여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다
1960년 2월 4일,
쏘련의 흐루쇼브는 모쓰크바에서 열린 와르샤와체약국의 정치협상회의에 중국이 참가하라고 요청했다. 중공중앙은 강생을 관찰원으로 파견하여 회의에 참석시키기로 결정했다. 대표단성원으로는 오수권(伍修权)과 쏘련에 가있는 중국대사 류효(刘晓)였다.    
흐루쇼브가 이번에 정치협상회의를 연 것은 소유의 사회주의국가가 일치하게 쏘련의 군축과 핵무기시험금지 주장을 일치하게 지지해줄것과 쏘련이 미, 영, 불 등 국가수뇌와 회의하는것을 지지해달라는 것이였다. 한데 중국대표단이 출국하기전에 외교부와 중련부는 강생이 회의에 가서 발언할 발언고를 미리작성하여 올려보내여 이미 중앙의 비준을 받았던 것이다. 이 발언고는 실제상 흐루쇼브와는 반대곡을 분 것으로서 제국주의본성은 개변되지 않는다는것을 강조하면서 전쟁위험성은 의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군축은 목전에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강화고에는 제국주의가 국제관계에서 중국을 배척하여 중국이 참가하지 않아서 정식서명하지 않은 군축회의는 그 어떠한것이든 중국에 대해서는 모두가 약속력이 없는것이다고 정중히 성명했다. 당시 국내의 배치에 따라서 대표단은 출발전에 강생의 강화고를 미리 신화사에 넘겼고 강생이 회의에서 선독하면 신화사는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로 되여있었던것이다. 
   
그러데 2월 5일, 모쓰크바회의시작 때에 한가지 결의를 통과했던 것이다. 회의<<선언>>을 내놓는 그 외의 어떠한 문건이나 발언이든 일률로 대외에 발표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시간의 차이로 인하여 강생이 회의에서 발언한 것은 이미 2월 6일자 <<인민일보>>에 나가고 만 것이다. 이는 대회의 규정을 위반하는 짓이였다. 게다가 강생의 강화내용이 흐루쇼브의 강화와는 반대곡이여서 흐루쇼브의 지대한 불만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흐루쇼브는 후에 중쏘량당대표와 담판하는 때거나 국제공산주의운동회의에서 여러차나 이 사건을 틀어쥐고 중공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 정치협상회의는 하루반을 하고는 이틑날에 끝났다. 쏘련정부는 클리믈리궁쵸치대청에서 초대회의를 열었는데 각국 수뇌가 다 참가했다. 흐루쇼브는 주연에서 이름을 찍지 않고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을 공격하면서 어떤 사람은 말로는 “쏘련을 위수로 한다”지만 실지상에는 쏘련의 받침대를 뜯어낸는다고 질책했다. 초대회의 이튿날 쏘공중앙주석단후보위원  프쓰레브, 외교부장 그로미꼬는 쏘공중앙대청에서 중국대표단의 강생, 오수권과 류효를 접견하면서 쏘공중앙이 중공중앙에 보내는 구두통지를 선독했다. 
   
통지는 중공의 대내대외정책을 모험주의라고 질책했거니와 협애한 민족주의립장에서 출발하여 중국과 인도변계충돌을 일으켯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내에서 주관유심론을 집행하면서 객관적인 경제규률을 위반하고는  그 무슨 강철대대적제련이니 인민공사니 뭐니 한다고 비웃었으며 중국대표단의 와르사와조약국수뇌회의에서의 발언은 동맹국이 제정한 선언을 위반한 것이라고 질책했다. 
       
그때 강생, 오수권은 쏘련의 질책에 대해서 유력하게 반박했다. 어제는 흐루쇼브가 이름을 찍지 않고 모택동동지를 공격하더니 오늘은 공공연히 구두형식으로 직접 모택동동지와 중국공산당을 반대한다, 이것은 쏘중관계를 파괴하는 엄중한 보취인 것이다. 강생은 면번이나 말했다.
    
“너희들이 모택동동지를 반대하면 좋은 끝장이 없을것이다.”
        
지금와보면 당시 강생이 쏘공에 그같이 반박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돌아오자 중앙과 모택동에게 회보할 때 그 일을 강조해 말하는것은 자기가 어떻게 모택동을 보위했는가 하는 자랑으로 주제가 변해버렸던 것이다. 갑을간 그가 그렇게 하는데서 모택동에게 다시금 신임을 얻게 된 것이고 중국공산당의 권력중심에 다시들어갈 길을 열게되였던것이다. 
   
1960년 2월 22일, 모택동은 중남해의 이년당(頤年堂)에서 정치국상위회의를 열고 흐루쇼브가 와르샤와체약국정치협상회의기간에 중공을 공격한 것을 놓고 토론했다. 중앙의 령도들은 흐루쇼브가 이번회의에서 취한 표현과 후에 그가 채취한 행동은 하나의 중요한 표지라고 인정했다. 이는 그가 서방과 타협을 이루기위해 중국을 반대하는 것으로써 서방의 비위를 맞춘다는것을 설명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정치국상위회의는 레닌탄신 90주년을 맞이하여 레닌을 기념하는 문장을 발표하면서 정면으로 레닌의 관점을 천명하고는 쏘공지도자는 레닌의 관점을 외곡하고 뜯어고친다고 비판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동년 4월에 륙속발표한 <<레닌주의만세>>등 3편문장인것이다.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강생은 줄곧 중앙의 쏘련에 대한 방침정책과 결책에 관여하면서 중공과 쏘공지간에 있게 되는 소유의 회담에 참가했던 것이다. 례를 들면 1960년 6월에 브카레스트회의에, 9월에는 중쏘량당회담에, 10월에는 모쓰크바회의기초위원회에, 11월과 12월에는 모쓰크바회의 등등에. 특별히는 중쏘공개론전후의 “반수”문장, 문건의 기초는 모두 강생의 참여하에 작성된것이였다. 
   
강생은 중국정부의 관찰원신분으로 1960년 2월 와르샤와체약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여 쏘련지도자와 론전을 함으로써 후에 중공중앙의 대쏘정책에 대한 결책에 참가했고 중쏘관계에서 중대한 사건을 처리함에 기초
를 닦은것이다. 그후로부터 강생은 갈수록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다. 말하자면 강생은 쏘련지도자와의 쟁론중에 한발 한발 승급한 것이고 중앙에서의 지위도 한발 한발 공고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대외로 그는 “반수투쟁”첨예화에 의거하였는바 쏘공과 쟁론첨예화로 득세한 것이고 대내로는 그가 모택동의 계급투쟁론이 점점 강화되는 형세와 모택동의 “좌”적경향이 날따라 엄중해지는 정황하에서 극력 모택동의 “좌”적로선과 영합한것이다. 하였기에 그는 날이가면갈수록 점점 더 모택동의 신임을 얻게되였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게 되는것은 강생의 극“좌”가 모택동만년의 “좌”경착오에 더욱 세차게 부채질을 했다는 그것이다.                  
                                                                    
(4). 왕가상을 배척하고 중련부를 공제

중쏘관계가 진일보로 악화되는 과정에서 강생은 언제나 늘 일체 기회를 타서 중앙서기처서기며 중앙련락부부장인 왕가상(王稼祥)을 배척하고 타격하는 것으로써 중앙에서의 자기의 지위를 강화했던 것이다. 왕가상은 강생의 극“좌”의 사상을 언녕알아보고 경계하면서 중련부의 유관 부부장과 어떻게해서든 강생이 중련부의 일에 손을 뻗치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960ㅡ1961년, 왕가상은 농촌에는 일반적으로 량식이 모자라는 현상이 엄중하거니와 허다한 지방에서 굶어죽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후에 그는 당년에 쏘련에서 농업공사를 하다가 그것이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은 무너지고말았다는 것과 새로운 경제정책이 나와서 관철되여서야 쏘련은 농업집체화로 인해 좌절되였던 경제가 차츰 춰서서 곤난을 급복할 수 있었다는 자료를 보았다. 그는 농촌에서 개인도급제를 실시한다면 농민들의 적극성을 일으킬수 있다는데 그것은 중국농민들이 호도거리를 하는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여 그는 중국도 응당 력량을 집중하여 당전의 곤난을 극복해야하는바 국내의 우환이 적지 않으니 외부의 우환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자면 국제상 응당 평온한 정책을 채취해야한다고 자기의 태도를 표시했던것이다.  
   
1962년 2월에 왕가상은 반복적인 사고끝에 중국의 외교정책문제를 결정하여 중앙에다 약간한 건의를 제출했다. 그는 자기의 의견이 이미 중련부의 사업범위를 벗어난것 같아서 개인이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외사사업을 주관하는 주은래, 등소평, 진운 등 세지도자에게 제 의견과 견해를 상세하게 진술했다. 이 편지의 기본정신은 “우리는 응당 력량을 집중하여 목전 국내의 경제곤난을 극복해야 하고 대외정책상에는 평온한방침을 취해야 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혁명의 두손책략을 채취하여 평온해야 하고 쏘련에 대해서는 강영히 맛서되 리유가 있고 리로운것이 이 이어야 하며 절제하면서 평온해야 하다. 인도 등 민족주의국가에 대해서도 평온해야 한다. 국내의 경제가 곤난한 형세하에서 우리 나라의 대외원조는 응당 실사구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야 한다.” 
   

주은래, 등소평, 진의, 류소기는 선후하여 이 편지를 보고서는 모두 부동의한다는 표시가 없었다. 모택동도 이 펀지를 보고서 역시 편지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2년 세계군축회의에서 한가지 사건이 발생하자 강생은 그것을 틀어쥐고는 기회가 왔다고 왕가상을 공격한것이다. 
   
1962년 7월, 세계평화리사회가 모스크바에서 세계군축대회를 열었다. 중국에서는 모순(矛盾)을 단장으로 강영화(康永和)를 부단장으로 하고 왕력(王力)을 책임으로 한 대표단을 보내여 회의에 출석케 했다. 대표단이 출발하기 전에 왕가상의 장악하에 대표단의 활동방침을 제정하고는 집체적으로 토론하여 대표단단장의 강화문을 작성하였는데 중국은 군축을 쟁취하고 세계평화를 보위하는데 대한 자기의 견해를 천술했다. 
   
모쓰바에 도착한 후 중국대표단 단장 모순은 대회에서 발언했고 대표단성원들도 각 소조위원회의 회의에 참가했다. 왕력은 주요하게 문건의 초안을 잡는 일을 했다. 활동이 비교적 괜찮게 진전되였다. 그러나 대표단이 북경에 돌아온 후 뜻밖에 한가지 전보를 받게되였다. 아프리카국가는 중국대표단의 이번표현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는 것이였다. 그것은 중국대표단의 발언에는 미제국주의를 크게 반대한다는 말이 없고 중국대표단의 동지들이 다른때 처럼 아프리카의 적극분자들과 의견을 적게 나누었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이 전보를 보자 대표단의 작법이 “좌파를 탈리하고 우파를 도왔으며 중간파의 동요를 증가시켰다.”고 비평했다. 이렇게 되자 강생은 기회가 왔다고 도처에 다니면서 중국대표단이 “착오”를 범한건 왕가상이 2월에 주은래총리 등에게 써보낸 편지에서 제출한 외교정책에서 생긴것이라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는 류녕일(劉寧一)을 추겨 모택동에게 왕가상의 일을 고자질하게 했다. 모택동은 중남해의 수영장에서 류녕일을 접견했다. 류녕일은 모택동앞에서 왕가상의 편지에 대해서, 이른바 문건의 “착오문제”에 대해서, 중국대표단이 축군대회에서의 “착오”에 대해서 일일이 라렬했다. 모택동은 듣더니 손가락을 모아 꽉 쥐면서 이건 미국을 위수로 한 제국주의와 평온하고 쏘련을 위수로 한 수정주의와 평온하고 각국반동파와 평온하자는 것이니 곧바로 “三和”요 민족해방전쟁과 혁명운동에는 원조를 적게하는 것이라했다. 
   

1962년 8월에 거행한 중앙공작회의에서 모택동은 대외정책중의 “삼화삼소(三和一少)”와 국내정책중의 “삼자일포(三自一包)”를 련계시키면서 “당내에 새로운 우경사상이 생겨났다”고 했다. 강생은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왕가상과 “삼자일포”를 비판하는 외에도 <<류지단>>소설이 출판되니 모택동에게 쪽찌를 건늬여 이것은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을 하는것이라 했다. 
   

이로부터 모택동은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을 하는것은 일대발명이다”는 어록을 만들어낸 것이고 습중훈(習仲勛)은 <<류지단>>소설과 련루되였다. 강생은 또한 그를 이미 죽은지 몇해되는 고강과 한패로 묵어놓았다. 중앙에는 전안조가 성립되여 그들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했는데 전안조의 조장이 바로 강생이였다. “문화혁명”기간에 강생은 기염이 더 올라갖고 “삼화일소”를 정치선에다 무한히 끌어올려놓고는 “삼강일멸”이라며 비판했거니와 그것을 당9차대회 “정치보고”에 넣기까지 했다. 
   

1962년 9월에 거행한 8기 10중전회에서 강생은 중앙서기처서기로 보충선거되였거니와 따라서 중앙은 그가 중앙련락부사업을 맡게끔 결정했다. “삼화일소”의 비판을 받은 왕가상은 사살상 사업을 그냥해나가기 어려워 병을 칭탈하고 휴양을 시작했으니 실은 한켠으로 물러난 셈이였다.    

(5). 내막을 아는 사람을 타격하고 사회부를 다시장악하다

강생은 1937년에 모쓰크바에서 돌아온 후 중앙사회부부장으로 임명되였더랬다. 허나 후에 그가 사업과정에 “좌”의 수단을 그냥쓰길래 그를 사회부에서 다른데로 조동시켜버렸던 것이다.  1948년에 중앙에서는 리극농(李克農)을 사회부장으로 임명했다.    
건국후 중앙사회부를 중앙조사부로 고치고는 주요책임을 주은래와 양상곤이 맡았다. 강생은 그때 사회부를 떠나기 싫었지만 감히 거역 할 수도 없었다. 1956년 중공 “8대”후에 중앙은 강생의 원 공작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줄곧 실제적인 중요한 자리는 주지 않았다. 그 몇해동안 강생은 늘 중앙조사부의 사업을 생각했다. 하지만 초기에 부장을 지냈던 리극농(李克農)이나 후에 부장을 담임한 공원(孔原)이나 다가 강생이 조사부사업에 깊이 개입하는것을 원치 않았다. 하기에 그는 손을 댈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강생은 늘 이같이 투덜거렸다.  
   
“지금 나와 중앙조사부의 관계는 ‘신문잡지’관계에 불과하다.” 
       

1966년 5월 “문화혁명”이 시작된 후에 강생은 드디여 기회를 만났다. 그는 중앙문혁소조고문이라는 직권을 리용하여 우선먼저 반란파를 시켜 중앙조사부부장 공원부터 타도했다. 그것은 강생이 30년대 모쓰크바레닌학원에서 학습할적에나 공산국제에서 사업할적에나 왕명을 바싹따랐거니와 선줄을 끌어 “왕명동지만세”를 줴친 력사가 있는 것을 공원이 잘 알기때문이였다. 공원이 한켠에 밀려난 후 강생이 이번에는 창끝을 일상사업을 장악하고있는 부부장 추대붕(鄒大鵬)에게 돌리였다. 추대붕은 전에 동북에서 정보사업을 했길래 30년대에 강생이 왕명과 함께 모쓰크바로부터 동북지하당조직에 <<왕강지시>>를 내린일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무릇 손에다 <<왕강지시>>를 쥐고있거나 <<왕강지시>>를 알고있는 사람은 다가 그의 심복지환(心腹之患)이였다. 강생은 중앙조사부로 뚫고 들어가려는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치우고 추대붕이란 이 치명적인 화근을 뽑아버리기 위해서 이른바 당내에 “동북반혁명반역집단 고로장”(동북원로 고숭민이 이 집단의 수뇌)이란 죄명을 날조했다. 그리고는 추대붕을 다짜고짜로 이 집단의 주요성원이였다고 몰아붙이게 했다. 반란자들은 강생의 명령에 따라 추대붕을 반역자라면서 투쟁했다. 강생은 밤중에 추대붕에게 전화를 걸어 죄를 승인하라협박했다.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날조무함과 치욕에 격분한 추대붕은 참을래야 참을 수 없어서 그만 제 부인과 함께 자결하고말았다.   
   
강생은 뜻이 이루어지자 바라던대로 주은래를 젓히고 실제상 중앙조사부를 제 손아귀에 넣었다. 조사부의 업무, 운동, 간부임면과 같은 중대한 문제들은 반드시 그에게 청시하고 회보해야했다. 
   

1968년 2월 4일, 강생은 중앙조사부에 반란파가 “강로2.3지시”라 하는 문건을 내려보냈다. 그 지시에는 건국이래 중앙조사부에서 주은래가 지도하여 거둔 사업의 성과들을 전면 부정하였거니와 또한 하장겸(何長謙) 등 한패의 골간명단을 만들어 그들을 나쁜사람이라 무함했다. 하장겸은 혼혈아여서 외모가 “서양사람”을 닮았다. 그는 40년대에 연안에 가 혁명에 참가했던 것이다. 유관부문에서는 그의 외모특점을 리용하여 적구에 들어가 지하공작을 하게했다. 하장겸은 명령을 받고 북평에 잠입하여 정보망을 건립하고 일본과 적위의 정보들을 대량적으로 수집하여 보냄으로써 항일전쟁승리를 위해 공을 대단히 세운것이다. 하장겸은 해방전쟁시기에는 또 명령을 받고 남경에 들어가 지하사업을 했다. 그는 남경이 해방되기전 국민당특무기관이 남경과 주변지구들에 박아놓아 잠복해있는 특무들의 명단을 장악함으로써 남경이 해방된 후에 공안기관이 일거에 특무망을 분쇄하게 하여 특공을 세웠던 것이다. 
   
하장겸은 로씨아문, 영문, 일문 등 다국문자를 정통한 번역계의 권위였다. 그는 중공중앙과 쏘공중앙지간에 오가는 편지들을 변역했고 론전문장과 모택동저작번역에도 적극참가해서 공이 많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 강생이 그를 이름찍어 “8국특무”라는 얼토당토않은 죄명을 씌운통에 반란자들에게 끌려 투쟁받다가 북경 진성감옥(秦城監獄)에 들어갔다.  그는 무고하게 여러해를 갇혀 고생하다가 1974년 여름에 옥사하고말았다. 그는 생전에 자기에 대한 공정한 판결을 보지 못했다.  “사인방”이 분쇄되자 하장겸의 동생 하장청(何長靑)이 형의 억울함을 하소하는 글을 써 중앙에 올리였다. 중앙은 팔보산혁명공묘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하장겸을 평판하여 억울함을 풀었다.          
                                                                                                                                                                                                              
(6).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박해광”


사람들은 강생은 사람을 혼쌀내우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해서 “박해광”이란 별명을 달아주었다. 그것은 추호도 틀림이 없다. 외국사람들은 지어 그를 중국의 “베리야”라고 한다. 강생의 “박해광”본질은 “문화대혁명”기간에 통쾌하기 그지없게 표현되였다. 그가 혼쌀먹이면서 박해한 것은 대체상 두 종류였다.         
첫종류는 정치기후변화에 따라 자기한테 불리한 사람. 
   
그것이 후에는 강청의 뜻에 따르는 정도로 발전했다. 강청이 그 누구를 나쁜사람이라 하기만 하면 강생은 밤을 새워가면서라도 자료를 찾거나 아니면 꾸미여서 이틑날에는 변절자아니면 특무라는 죄명을 달아주었다. 
   
“문혁”전에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지낸 국제문제전문가 요진(姚臻)은 1960년부터 강생의 지도하에 사작조에서 근신하게 사업하면서 강생과 조석을 같이한 사이다. 그러나 “문혁”이 시작되자 어떤 사람이 요진의 대자보를 몇장 써 붙이니 강생은 인차 그를 뽑아내여 팽진(澎眞)이 “전문 나를 감시하라고 파견한 특무다” 라고 무함했다. 그리고는 그의 비서를 추겨 한차례의 중선부회의에서 요진을 무함하게 만든것이다. 요진은 너무나 억울하고분함을 못이겨 그만 그날밤으로 자살하고말았다.
    

1966년 5월 18일, 림표가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고금중외의 “정변경(政變經)”에 유관되는 강화를 했는데 강생은 그에 긴밀히 배합하여 1966년 7월에 허망하게도 팽진이 “2월병변”을 꾸미였다고 날조하고는 “이것은 아주확실해서 틀림이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숱한 사람이 억울하게 련루되여 박해를 받은것이다. 
   
1968년에 강생과 강청은 함께 “류소기, 왕광미전안조”를 지휘하여 고문하여 자백을 강요했고 가짜죄증을 위조하여 류소기와 왕광미를 “반역자”, “특무”라 무함했는데 왕광미전안조에서만도 무고한 사람을 64명이나 가두었던 것이다. 
   

1968년 9월 16일, 강생은 강청보고 류소기에게 “대반역자, 대내부간첩, 대공인역적, 대매국적, 대한간”이라는 모자를 씌우는것이 어떤 가고했다. 강청마저 끔찍해하였다. 
  
 “어마나, 생각해봐요! 그가 이같이 깊숙이 잠복해서 내부활동을 오래했으니 제국주의특무훈련을 받아도 단단히 받은게 틀림없네요!”
    
강생은 류소기를 무함하고 박해하느라 거의 미칠지경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종류는 강생의 밑그루를 아는 간부. 
강생은 속이 졻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는 다른사람이 자기의 믿그루를 새삼스레 들추어 모택동에게 고자질할까봐 무서워했다. 뒷끝이 깨끗치 않은 사람이면 거개가 갖고있는 공포증의 일종이였다. 하기에 그는 제손에 대권을 잡자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독수를 뻗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공원, 추대붕 외에도 왕세영(王世英), 리상영(李上英), 진강(陳剛), 조건민(趙健民)), 풍중운(馮仲云), 사철(師哲) 그리고 이전의 비서 등이 모두 심한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지어는 그 본인의 처 조철구(曺轍毆)와 조철구의 녀동생 소매(蘇枚)와 은원(恩怨)이 있는 사람마저도 액운을 면하지 못했다.    
강생이 “문혁”기간에 의무일군을 박해한 사건은 많은 사람이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른바 “소매모해안건”이라는 것이다. 자료에 기재 된 것을 보면 소매는 조철구의 녀동생으로서 중앙정법간부학교정치부 부주임이였는데 이전에 국민당에 체포였던 한단락 력사가 있는 것이다. 출옥후 강생이 그녀의 당적을 회복시켜주었다. 한데 “문혁초기”마침 홍위병들이 도처에서 “반역자”를 잡아낼 때 소매가 돌연히 수면제를 먹고 자살해버렸다. 강생은 조철구를 보고 이것은 “반혁명모살”이라고 굳이 말하면서 공안부문과 정법간부학교에서 모살흉수를 잡아내야한다고 명령했다. 
   
1968년 1월, 강생과 조철구는 정법간부학교에서 어떤 사람이 소매의 력사문제를 들춰냈다는 소리를 듣고는 사부치(謝富治) 등이 “소매를 모살한 혐의”라면서 “무산계급사령부를 포격한다”는 죄명을 씌워 그 학교의 부교장 석뢰(石磊)등 7명을 체포했다. 그리고는 50명넘어 격리심사하고 비판했는데 그중 한명이 핍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4사람은 미쳐버렸다.  
   
이 안건에 어떻게 되어 북경병원의 의무일군들이 걸려들었는가? 정황소개를 보면 소매가 정법간부학교에서 돌연히 혼미하자 학교령도는 북경병원 수직실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빨리와서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숙직실에 있던 내과의사 고석춘(顧惜春)이 바빠라 정법간부학교에 와서 소매를 살려내려고 구급했다. 그러다가 그를 북경병원구급실에 보내여 구급하게 했던 것이다. 병원내의 전문가들을 불러왔다. 왕신덕교수(王新德敎授)를 비롯하여 전문가들이 다 모여 구급했으나 허사였다. 사람은 끝내 죽고만 것이다. 전문가들은 수면제를 먹고 자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하여 결국은 시체를 해부하게 되었는데 해부하고 보니 사자의 위속에 과연 아직 채 녹지 않은 수면제알이 있었다. 하여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 것이 확인되였다. 
   
한데도 강생은 진단보고가 어떻게 나왔건간에 무리하게 지시했다. 
   
“소매는 견정한 ‘무산계급혁명파’였다. 그는 자살할 수가 없다. 위속에 들어있은 수면제는 해부할적에 집어넣은게 분명하다”
    
그리고나서는 조사하라해서 고석춘을 비롯한 의사와 의무일군 10명이  체포되였는데 그들은 감옥에 같혀서 6년넘어 고생한 것이다. 왕신덕교수는 그때 림시로 요청받아 가서 회진에 참가한 것이고 자기 의견을 제출하고는 인차 돌아서 나왔길래 액운을 면했던 것이다.       
   

(7). 재질이 뛰여난 “도적문인”

강생은 세월을 실없이 보내는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혁명을 한적이 있거니와 서화문예방면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깊다고 볼 수 있다. 당년에 왕명의 “좌”경로선을 한창불어댈 때는 그는 월마다 문장한편씩을 써서 발표했던 것이다.    
강생은 서화를 감상하기 좋아했는데 늘 “로적수”라는 이름을 쓰면서 “齊白石”과 어깨를 나란히 해보려했으니 그것은 그의 “붉은 면”의 한쪽을 나타낸 것이다.   
   
1961년, 중앙은 또다시 “쌍백방침”을 제기했는데 <<인민일보>>는 학술판을 꾸리면서 첫머리에다 “學術”이란 두글자를 박았다. 그것이 강생의 글씨인 것이다. 중화서국상해편집소에서 다시인쇄한 <<寶晋齋法帖 >>(보선재법첩) 역시 강생의 글씨로서 서법재간이 높음을 말한다. 강생의 <<聊齋志异>>(료재지이) 판본은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필명을 쓴 것인데 <<문학유산증간>>에 발표했다. 당시 당내고층 “수재”중 전가영이 첫손을 꼽았는데 그가 강생이 서화방면에 조예가 깊은것을 보고 탄복한 적이 있다. 전가영의 진장품가운데 <<醒世恒言>>(성세항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강생이 그한테 증송한 것이다. 전문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목전에 발견된 명천기정묘년각본 <<醒世恒言>>(성세항언)이 세간에 있는것은 4부뿐인데  그중 2부가 일본내각문고와 다른 한곳에 보관되여있다고 한다.  다른 1부는 원래 대련도서관에 보관되여있던것이 지금은 종적이 없어져버렸다. 강생이 가져간 것은 연경당39권(衍慶堂39卷) 20책으로서 해방초기 적위의 수장품이였던 것으로 인정된다. 강생은 아주 곰곰한 사람이여서 매 페지마다에 종이를 끼여 덧대고는 제본을 다시했거니와 모자라는 페지는 일률로 색종로 메우고는 친히 교정했다. 그는 또 그 책에 송체목각글자를 그대로 모방해 붙인것이 70여곳이나 된다. 약 3600여자나 되니 조예가 만만찮은 것이다. 이는 건국초에 그가 몸에 병이 있어 않으면서 국가를 위해 “공헌”한 것이라 하겠다!
    

강생은 애호가 서화를 모아 건사하는 것이였는데 그 몇 년사이에 미친듯이 략탈했다.  “문화대혁명”전에는 늘 빌리는 방법으로 문물을 점유했다. 1956년에 고궁박물관태화전에다 한쪽에 당대에 제작된 도자기로 만든 거부기형 벼루를 전시했는데 강생이 욕심내여 “빌려”본다면서 가져가서는 돌리지 않았거니와 강생스스로가 저의 “康硯第五十三號”로 편입했던 것이다. 고궁박물관에서는 돌려달라는 말을 못하고 강생에게 조달하는 수속을 밟아 결국 강생의 소유로 되게 해버렸던 것이다.  
  
 “문화대혁명”때 강생은 북경시내에 있는 유명한 문물수장가 등척(鄧拓), 아영(阿英), 룡운(龍云), 장내기(章乃器), 박석화(博惜華), 박충모(博忠謨), 조원방(趙元方), 제백석(齊白石) 등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자기의 심복에게 주고는 홍위병들을 선동하여 집을 들추게해서는 그들의 문물을 다 걷어다 문물관리처에 집중시키게 했다. 그러고는 제욕심나는것은 다 걷어갔는데 그야말로 남의 집에 불이 난 틈을 타서 도적질하는 재간을 실컷 부린 것이다. 수단이 과연 교묘한 략탈이였다. 
   
강생은 여러차나 북경시문물관리처에 가 따져 물었다. 
   
“박석화의 책들을 다 모았는가?” 
   
그리고나서 부탁했다.
   
 “그의 책은 한권이라도 잃어지거나 흩어져서도 안된다.”
        
1969년 10월 18일 오전, 강생은 박석화의 책들을 이미 다 걷어다 국자감장서고에 집중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삐 차를 갖고 달려갔다. 커다란 서고(書庫)안은 어지럽고 추웠다. 그는 한 낡은 나무상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책을 고르기시작했다. 강생이 그때는 이미 71살이 된 늙은이였다. 추워서 입술이 퍼래지고 코물을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장 3시간이나 욕심나는 책들을 골랐다. 박석화의 서적들은 그렇게 홍위병들손에 빼앗기워 강생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였다!    
1968년부터 1972년사이에 강생은 선후로 북경시문물관리처에 32번갔는데 도적질한 도서 12080책, 도적질한 문물이 1102건이였다. 그중에 많은것이 송원대의 판과 명대판 진본(珍本)이고 둘도 없는 고본도서였다. 2000년전의 청동기가 있는가 하면 1000년전의 벼루, 서화, 인장, 탑본
(비문을 그대로 박은 책) 그리고 30만년전의 대모갑화석 등 모두가 중요한 력사적인 가치와 예술가치를 갖고있는 진품으로서 어떤것은 세상에 극히 드믄 국보였다.    
강생은 이러한 도서문물들을 침점하면서 어떤것은 상징적으로 값을 지불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문물고(文物庫)에서 송탁한석경(宋拓漢石經)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채문희(蔡文姬)의 아버지 채옹(蔡邕)이 쓴 것으로서 국내에 3개밖에 없는 아주 귀중한 보물이였다. 그런것을 강생은 지갑에서 돈 10원을 꺼내 주면서 
   
“이건 내가 샀어.”했다. 
   
그러고는 또 <<랍매삼영>>(臘梅三咏)이 욕심나 눈길을 돌렸다. 그것은 황정견(黃庭堅)이 손수제작한 진적(眞迹)으로서 아주진귀한 것이였는데 그는 또 말했다. 
   
“이 물건은 5원으로 하지!” 
   
좀 지나 그는 또 송화원(宋畵院)에서 모조한 <<기교도>>(起蛟圖)를 보자 역시 욕심나 손을 떼지 못했다. 한데 호주머니에 남은 돈이란 10전밖에 안되였다. 10전을 내놓고 사기는 부끄러운 일이니 그는 힛죽 웃고는 아예 그것을 들고 가버렸다. 낯가죽이 두꺼워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강생이 죽은 후인 1980년도 여름에 북경고궁후원에 있는 동궁에서 한차례 사인수장품내부전람을 했는데 거기에 강생의 수장품도 나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때 전람을 참관한 한 일본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중국에 백만부자가 없다하는가? 강생이 백만부자가 아닌가?”
       

강생은 “문화대혁명”기간 중앙문혁소조고문, 중앙조직선전조조장, 중앙위원회부주석 등 직을 맡았다. 그는 “문화대혁명”기간에 림표, 강청 등이 당권정권을 찬탈하려는 음모활동에 참가했다. 그들은 당과 국가의 많은 지도자들을 무함하고 박해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범위내에서 “때리고, 마스고, 빼앗는것”을 선동했고 각급령도간부와 지식분자들을 무함하고 박해하여 억울한 안건을 수없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기에 1980년, 중공중앙은 그가 범한 엄중한 죄행에 근거하여 그의 당적을 취소하고 “추도사”를 철회하였으며 그의 죄행을 세상에 공포했다.     

(8). “문화대혁명”에 저지른 죄악

1966년 “문화대혁명이 폭발랄적에 강생는 중앙문혁의 고문이였지만 실제상에는 문혁소조의 정식 주인이였다. 그러면서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을 맡고있었다. 1968년에 중공정보기관인 중공중앙조사부의 령도권을 획득하면서부터 대량의 억울한 안건을 만들어내여 당내투쟁에서 사람을 치떨게 하는 회자수(劊子手ㅡ살인백정)로 되고말았다.    

1967년초, 그는 하룡(賀龍)을 국민당의 군벌이라 했다. 그리고나서는 “61인반역집단안건”을 조작하여 많은 로간부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후에는 류소기를 질책했다. 
   

1968년, 무고한 운남성위서기 조건민(趙建民)을 “특무”라하여 “조건민특무안”을 만들어 내고는 조구년(趙九年)을 붙잡아 가두었다. 이에 연루되여 살해된 간부가 14,000여명에 달한다! 그해 3월에는 내인당사건(內人黨事件)을 조작했는데 강제로 내몽고인민당원은 3일내에 각 혁명위원회에 등기하라 하고는 등기하지 않는 자는 일률로 적아모순으로 처리하리라 했다. 그렇게 핍박하고 박해한 사람이 87,180여명이 되는데 살해된 것이 17,000여명이고 연루자는 347,000여 명에 이른다. 
   
4월에는 공안부장 사부치(謝富治)와 함께 라서경(羅瑞卿)을 위수로한 “지하검은공안부”라는것을 제조하여 225명에 이르는 간부, 공인을 반역자, 반혁명이라 무함하였는데 공안부내부의 부부장들도 다 불행을 면치못했다. 많은 사람이 체포구금되였고 지어는 박해 받아 죽었다.   
   
7월, 강생이 강청한테 친필서한응 하나 보냈는데 “요구하는 명단을 보낸다”는 것이였다. 명단에 오른 제8기중앙위원과 후보위원 88명이 강생의 손에서 “특무”, “반역자”, “반당분자” 로 만들어졌다. 그들 다가 박해받았는데 8기중앙위원과 후보위원 전체 193명중 70%가 되는 것이다. 
   
9월 16일, 강생은 류소기의 죄를 “대반역자, 대내부간첩, 대공인역적, 대매국적, 대한간”으로 만들었다. 강청마저 끔찌해하였다.
   
 “어마나, 생각해봐요! 그가 이같이 깊숙이 잠복해서 내부활동을 오래했으니 제국주의특무훈련을 받아도 단단히 받은게 틀림없네요!”
    
10월, 중국공산당은 제8기중앙위원회 제12차전체회의를 열었는데 강생은 전체 중공중앙위원, 중공감찰위원회위원, 전국인민대대표대회상무위원회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위원회위원의 소유의 명단을 일일이 심사한다고 선포하고는 대량의 위원들을 “반역자”, “특무”로 몰았다.
    

1969년 11월, 사람을 상해공안국에 파견하여 공안국군대표에게 가둔지 여러해되는 로복단(魯福壇)을 처결하라고 비밀지령을 내렸다. 로복단이 1968년 11월에 강생은 1930년대에 체포되여 반변한 일이 있다고 발설한 것이 귀에 들어간 것이다.
    
1970녀부터 모택동은 중공중앙부주석 림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강생은 정치기후가 좋지 않아 불리함을 민첩하게 감촉하고는 병을 핑계대고 집안에 들어앉았다. 
   
1973년, 중공10대회의에서 강생은 중공중앙부주석으로 당선되여 차례가 모택동, 주은래, 왕홍문 다음이였다. 
   
1974년부터 강생은 암에 걸려 장기적으로 병원에서 휴양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휴양기간에 공포증에 걸렸기에 하루종이 사람이 지켜야했고 그 본인은 의사의 분부를 핑계대고 기타령도가 보러오는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중앙문혁소조의 사람들은 늘 만났고 영화를 그냥보았다는 것이다. 원국가안전부부장 릉운증(陵云曾)이 강생은 죽기전에 여러번이나 자기는 1930년대에 반변한적이 없다고했으니 그건 가리려고 하다가 오히혀 더 드러나고말았다고 지적한바있다.
    
1975년 1월, 제4기중국인대1차회의에서 전국인대상위회부위원장으로 당선되였다. 4월 비서와 강청, 장춘교, 요문원은 력사문제가 있어서 믿을바가 못된다고 했다. 10월에 들어서 강생은 생명을 더 이어나가기 힘들어졌다. 그러면서도 모택동을 만나 지금 등소평을 올려놓고 쓰지만 모택동이 일단 죽기만 하면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릴것이니 쓰지 않는게 좋겠다고했다. 그러잖아 자기가 죽으면 “문화대혁명”을 부정할것 같아 걱정하던 모택동은 그를 다시 내리떨구고 타도할 결심을 내리게 되었던거다.
    
1975년 12월 16일, 강생은 죽고말았다. 그때 중공중앙은 부고에 다음과 같이 칭했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중국인민의 위대한 
혁명전사, 맑스주의리론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령도자의 한 사람인 중국인민의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영광스러운 '반수'전사."         

“문화대혁명”이 끝나서 1980년 10월 16일, 관방은 강생이 생전에 력사상 억울한 안건들을 수없이 만들어냈다고 결론짓고나서 그의 당적을 취소하고 그에 대한 추도사를 철소한다고 공포했다. 그뿐아니다. 중앙조직부는 그의 골회마저 사후영예의 상징인 팔보산에서 축출하기로 결정지었던 것이다. 후에 강생을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성원에 넣으면서 그가 저지른 죄악들이 하나하나 더 적발되고 밝혀지는 추세를 이룬 것이다.     
   
강생은 계속 연구해야할 대상이다.   
                               
        강생이 서명한 비밀처결령
 

<<黨史縱橫>>
1969년 11월, 공안부에서 파견한 일행이 상해시공안국에 총망히 나타났다. 온 사람은 공안국의 군대표앞에다 “비밀”문건 하나를 내놓았다. 강생이 친히 서명하고 사부치가 비준한 처결명령이였다.    
이 “유래”가 깊은 처결명령은 이 감옥에 같힌지 근 30나이나 되는  79세에 나는 한 로인에게 떨어진 것이였다. 로인은 성명이 로복단(魯福壇)이다. 
       
명령을 받은 상해시공안국책임자는 리해하지 못할 의혹이 갈마들었다. 북경쪽에서 뭣 때문에 전문 사람을 파견해서 강생의 서명처결령을 전달하는건가, 풍전등화마냥 숨이 간들간들 붙어있는 이 로인이 대체 누군데? 더구나 명령에 서명한 사람이 강생이다. 그러니 상해시공안국은 태만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즉각 집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에서 내려온 공안부의 사람은 상해공안국책임자에게 “특별”한 요구를 제출했다. 
   
“범인”을 처결하기 전에 입을 봉해 그가 아무소리나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였다. 
   
로복단은 이미 늙어서 고령에 들어선 쇠잔한 몸인데 무슨 씨끄러움이 있겠는가. 이런 사람의 입을 봉한다는건 너무나도 조폭한 짓이라 생각되였다. 하지만 그래도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니 감히 거역할 수도  없는지라 상해공안국에서는 머리를 짜다가 나중에는  한끼 “대접”한다면서 그가 푹 취할 정도로 술을 먹이였다. 그래놓고는 총살했던 것이다. 
   총살당한 이 로복단로인이 이전에 중공5차대회때는 중앙정치국상위, 중앙조직부부장을 지냈다. 그러다 1932년 12월에 체포되여 변절했고 변절한 후에는 인차 국민당군통특무로 되여버린 것이다. 그는 1950년 5월에 중공에 체포된 후 비밀리에 상해에 압송되여 줄곧 이날까지 남모르게 갇혀있은것이다.    
로복단은 1890년에 산동태안에서 태여났는데 젊었을적에 산동 치천현(淄川縣) 로대회사에서 공인질을 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산동청도시위서기, 중공산동성위서기(집행위원회서기), 하북성위서기, 하남성위서기, 전국총공회책임 겸 중앙조직부부장 등 직책을 맡았었다.  
   
1928년에 공산국제와 쓰딸린은 진독수등 사람들의 착오에 비추어 중공은 당내에 공인출신의 간부를 대량적으로 령도강위에 제발할 것을 희망하다고 지시했다. 이런 정신에 따라 무한삼진부두에서 일하던 공인 향충발(向忠發)이 일약에 림시중앙정치국상위회주석으로 되어 당중앙6기1중전회에서 총책의 령도를 맡았던 것이다.  로복단역시 공인출신이라는데서 화항영(和項英), 관향응(關向應), 소조정(蘇兆征), 서석근(徐錫根) 등 사람들과 함께 정치국에 들어가 후보위원으로되였던 것이다. 그뒤에 잇따라서 열린 6기 4중전회에서 로복단은 왕명의 눈에 들어 중앙정치국의 정식위원으로 된 것이다.
       
1931년부터 시작하여 왕명은 공산국제에 가서 모쓰크바주재 중공대표로 사업했다. 동년에 로복단은 패성을 일으키는 라장룡(羅章龍)을 대체하여 총공회의 책임을 맡았다. 주은래가 그를 찾아 담화하고는 서기처의 사업을 하게된다고 선포하여 로복단은 실제적인 중공중앙정치국상위의 한 사람으로 되었던 것이다. 
   
1932년 12월에 로복단은 영국순경에 붙잡혀 상해시경찰국에 압송되였다. 후에 경찰국자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로복단은 체포되자 인차 반변했고 그전의 향충발보다도 속도가 빠르게 국민당중통조사실의 후보특무로 돼버린 것이다. 로복단은 반변하는 기간에 중공의 한 요원의 “지난일”을 교대했는데 그것이 바로 강생이 1930년에 체포되여 반변한 비밀이였다. 
   
강생은 당년에 체포되여 감옥에 갇혔다가 국민당중앙요원 정유분(丁惟汾)을 통해서 풀려나왔는데 묘하게도 정유분의 친척 하나도 동시에 체포되였던 것이다. 이일을 당시는 아주적은 사람만 알뿐이였다. 하여 강생이 반변했는지 안했는지가 당사에서는 내내 풀기 어려운 수수께였던 것이다. 상해시경찰국당안은 1949년도에 접수할적에 일부가 잃어지고 일부는 대만으로 건너갔다. 하기에 강생이 체포된 후의 구체적인 세절은 오직 로복단이 국민당에 교대한 사실을 봐야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내에서 그 일을 알고있는 사람은 진갱(陳賡) 한사람뿐이였는데 그는 종래로 다른 사람의 말은 하지 않다가 “고요집단”을 비판할적에야 한마디 훌 내던진적이 있었던 것이다. 
   
강생은 후에 이 일은 요수석(饒漱石)거기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요수석은 전에 사람을 전문 상해시공안국에 파견하여 강생이 상해에서의 배경을 뒷조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로복단이 설토한 자료를 제일먼저 본 사람은 요수석이였다. 요수석은 자료를 본후 모택동에게 자료내용을 상세하게 회보했다. 모택동은 듣고나서 아무런 태도표시가 없이 이일을 한쪽에다 밀어놓았다. 
   
60년대에 사부치가 명령을 받고 상해공안국에 가서 당년에 요수석이 보았던 원당안자료를 자세히 보았거니와 상관한 기록들도 보았다. 강생은 요수석이 뒤에서 자기의 “검은자료”를 만들고있는게 아닌가고만 여겼지 로복단이 1950년 5월에 체포되여 줄곧 다른 사람은 모르는 곳에 갇혀있다는것은 여지껏 깜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968년, 대만의 정보당국은 강생이 체포되여 반변했다는 적발자료 한부를 향항의 거도를 통해 북경에 들여보냈다. 그것을 맨먼저 안 것은 괴대부(蒯大富) 등 몇이였다. 그들은 이 일을 강청과 강생에게 보고했다. 강생은 그제야 비로서 로복단이 살아있는것을 알게되였다. 강생을 극도로 격노시킨것은 상해시쪽에서 홍위병들의 충격에 보밀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로복단이 반란파 두목 몇이 심문하니 30년대에 자기가 저지른 행실을 고스란히 발설해서 그것이 “간보”에 나가게 한 그것이였다.
               
강생은 강청 등을 통하여 자기는 절때 체포된 적이 없노라고 선양하면서 “내가 만약 체포되였더라면 렬사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할것이다.”라고 말했다. 강생은 또 사부치를 찾아가 이 사건의 유래를 캐물었거니와 그를 통해서 로복단은 50년대에 이미 체포되여 여지껏 30여년간이나 비밀리에 감금되여있은 사실도 알게되였다. 그는 왜서 50년도에 붙잡힌 사람을 아직도 살려두는가고 했다. 강생의 뜻을 알아챈 사부치는 강생보고 서명만하라 그러면 자기는 당장 처결명령을 내리리라했다. 이렇게 되어 로목단을 처결하는 비밀지령이 꾸며진 것이다. 
   
일은 이것으로 다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강생은 사부치가 자기모르게 그 비밀처결명령을 한부 가만히 사진찍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시기에 간부를 심사하는 중앙규률검사위원회의 책임자중의 한 사람인 왕학수(王鶴壽)는 다른사람이 강생을 반역자로 결론짓자고 하니 동의하지 않았다. 주요한 당사자인 로복단이 이미 죽어 없어졌으니 증거를 어떻게 찾는가, 결론이 형성될 수 없다는 리론이며 주장이였다.
    강생의 일을 아는 요수석마저 마지막으로 남았다가 “문혁”때 병을 앓아 죽어 이제는 이 세상에 증명할 사람이 과연 영 없게되였다.    
강생본인이 자기의 일이 들통날껏 같아 오랬동안 걱정하면서 비밀조사를 까근해서 자기의 께림직한 과거사를 좀이라도 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온갖 수단을 다해 심하게 박해를 했다. 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없게 만든 것이다. 강생이 로복단을 비밀리에 처결한것은 로복단의 입을 막기 위한 수단이였지 저승의 안락을 주자는 목적은 아니였을 것이다. 
   이럴때도 그래 반드시 증명인이 있어야 결론내릴 수 있단말인가?    로복단을 처결하라고 한 지령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추리는 아마 소학생도 내릴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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