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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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48)
2011년 03월 30일 23시 59분  조회:5098  추천:13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48)           

                     백골정 강청                       
(1) 간 력                       
강청(1914ㅡ1991)은 “문화대혁명”기간 “림표,강청반혁명집단” 주요분자로서 원명은 리운학(李云鶴)이다. 산동 제성사람. 1929년 봄에 제남에서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갔다. 193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가 5개월후에 당과 관계를 잃었다. 1934년에 상해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였고 풀려나온 후에는 람평(藍苹)이란 예명으로 영화배우생애를 시작했다. 1937년 가을에 연안에 가서 당적을 회복하고 1938년에 모택동과 결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성립후에 전국영화지도위원회위원, 중공중앙선전부영화처처장 등직을 맡았었다. 1963년부터 “경극개혁”이라는 명의로 문예계에서 극“좌”의 사조를 일으켰다. 1965년 요문원을 추겨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쓰게 했고 림표와 함께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를 만들어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여론준비를 했던 것이다.  
   
1966년 5월후, 중공중앙문혁소조제1부조장, 대리조장, 해방군문예소조고문 등을 맡았었다. 중공제9차, 제10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 인민민주전정을 뒤엎을 목적으로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과 손잡고 “4인방”을 무었고 림표반혁명집단과 결탁하여 일체를 타도하는 극“좌”사조를 일으켜 당과 국가의 최고령도권을 찬탈하기 위해 음모활동을 하면서 10여년을 넘어 대혼란을 일으켜 당과 국가에 이루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죽자 10월에 중공중앙정치국은 강청에 대해서 격리심사를 시작했다. 1977년 7월, 중공10기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내외일체직무를 철소했다. 1981년 1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최고인민법원특별법정은 반혁명집단주범으로 강청을 사형으로 판결, 2년유예집행키로 했다. 1983년 1월, 최고인민법원형사심판청은 그녀를 무기형으로 심의결정하고 원판결대로 정치권을 영원히 박탈한다고 했다.  
 

(2)
중앙문혁을 전정, 진백달을 손자같이 훈시                     
중앙문혁소조는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기 위하여 성립한 하나의 조직이였는바 “문화대혁명”지휘부로서 “10년동란”을 구체적으로 조작해 낸 “아성”인 것이다. 중앙문혁소조내에서 강청의 지위는 어떠했는가? 이것은 “문화대혁명”을 알려면 응당 꼭 밝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밝혀 보면 한마디로  강청은 중앙문혁소조를 “전정”했다는 그것이다.    

모택동은 중앙문혁소조를 성립하여 그것이 중앙서기처 지어는 중앙정치국까지 대체하게 하려했다. 하여 그것은 정치무대로서 “문화대혁명”의 급선봉이 되었고 강청이 호풍환우를 하는 활무대로 되였던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은 진백달(陳伯達)이고 강청은 부조장이였지만 주도권을 쥔 것은 강청이였다. 진백달은 괴뢰였고 앞장서는 팔매질꾼에 불과했다. 강청이 중앙문혁소조에서 “독재”와 “전정”을 부렸다는 것은 그 세월을 겪은 사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년에 홍위병들이 “강청을 위수로 한 중앙문혁”이라고 부른것이 잘못된 말이 아니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진백달과 함께 지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다. 
   
진백달이 회억했다. 
   
“강청은 실제상 문혁의 제1수장이였다” 그녀는 “소조에서 제멋대로 횡포하게 허투로 생각하고 허투루 말했거니와 그것을 옳다고 우기였다. 소조를 자기의 독립적인 령지로 여기고 ‘독재’를 부리면서 제멋대로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것이다.”   
( <<진백달유고>> 향항)                      

왕력(王力)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중앙문혁소조에서 진백달은 ‘괴뢰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을 하면서 진백달은 강청의 말을 들었다. 진백달은 상무위원이고 조장이였기에 지위가 중요했다. 하지만 상무위원회에서 진백달이 스스로 속심을 말했던 것이다.  ‘나는 류펀즈(劉盆子)다’ 라고”.            
(<<王力反思彔>> 향항)  

【주해】
류펀즈 (劉盆子10~27), 신망(新莽)말년에 신망정권에 반항하여 기의한 적미군(赤眉軍)의 괴뢰. 한조황족. 공원 25년, 적미군이 장안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시제류현정권은 그만 멸망하고말았다. 당시 적미군의 수령은 번숭(樊崇)이였다. 그런데 적미군이 황제를 세우는 일을 론하다보니 15살난 류펀즈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원인은 류펀즈가 서한의 개국황제 류방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그가 서한황족혈통이였던 것이다. 공원 27년, 동한광무제 류수(劉秀)의 군대와 적미군대가 화음현에서 결전했는데 적미군은 대패하여 번숭과 류펀즈는 투항했다. 그들은 락양으로 호송되였다. 류수는 류펀즈를 류수의 숙부 조왕류랑의 랑중(郞中)으로 임명했다. 후에 류펀즈는 병에 걸려 앓으면서 두눈이 실명했다. 류수는 명을 내려 형양(滎陽)의 관전을 세를 주어 류펀즈를 종신토록 봉양하게 했다.      

목흔(穆欣)도 진백달에 대해서 말했다.
   
“진백달은 자기를 ‘류펀즈’라 했다. 진백달이 이같이 말하니 그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중앙문혁소조는 실제상 강청이 주인이 되어 장악한 것이고 그는(진백달)그저 하나의 괴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 穆欣 <<劫后長憶ㅡ10年動亂紀事>> 항향)        

강청이 중앙문혁소조를 공제하고 중앙문혁소조에서 “전정”을 실시한데 대하여 목흔은 전면적이고도 상세하게 밝히였다. 
   
“진백달이 중앙문혁소조조장이긴했지만 강청의 눈에는 ‘류펀즈’였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괴뢰에 지나니 않았던 것이다. 무릇 모든 일이 강청의 낯색에 따라 집행되였으니까. 강청이란 이 녀인은 자기가 제1부인이라는 데서 남편의 권력을 턱대고는 가짜 ‘성지’를 내리면서 행패를 부린것이다. 매번 소조회의를 할 때마다 회의를 몇시에 한다고 정했던지간에 강청이 오기전에는 회의를 열지 못하고 조장인 진백달이건 기타 조원들이건 다가 내심하게 기다려야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회의를 하면 강청이 거의 독판쳤다.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그녀의 안중에는 직별이란 없었다. 그러다가 진백달과 분기가 생길라치면 그녀는 휴식을 선포해서 회의를 중단하고는 지백달을 데리고 엽방에 들어가서는 그가 달통할 때 까지 담화를 하는 것이였다. 이럴 때면 “고문”이라는 강생마저도 입을 다물고 진백달이 “달통”되여 돌아와 회의를 다시집행 할 때 까지 내심히 “휴식”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강청은 속이 좁은데다 성질이 나빴다. 변덕많은 여자였던거다. 득이할 때면 제멋대로 말하고 떠들면서 진정하는 멋이란 없었다. 발연대노하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그녀는 랭기가 싫다면서 남이야 어찌건간에 공기조절기를 꺼버리였다. 그녀가 흥이 나서 말할라치면 귀가 멍먹해질 지경 높은 소리로 따떠위다가도 다른사람은 높은 소리로 말을 못하게 했다.... 문혁소조에거 그녀는 그야말로 높이 앉아 온 소조를 압도하면서 너덜거리는 “녀황”이였다.          
(穆欣 <<劫后長憶ㅡ10年動亂紀事>> 향항)                 

중앙문혁소조에서 강청의 말이면 다였으니 “일언천금”이였다고 할 것이다. 일반공작인원의 눈에마저도 소조원들이 조장인 진백달의 말을 듣기싶으면 듣고 듣지 않겠으면 듣지 않아도 되고 지시를 듣지 않아도 맘대로였지만 강청의 말은 에누리없이 듣고 집행해야 했다. 그녀는 턱으로 지시하고 기색으로 부리였으니 그 위풍이야말로 그 어디에 비길 데가 없었다. 소조성원들은 강청의 말을 공손히 들어야만했다. 
   
1966년 8월, 진백달이 병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중공중앙은 다음과 같은 통지를 낸바 있다. 
   
“진백달동지가 병이 있기에 중앙은 휴식을 비준했다. 진백달동지의 병가기간 혹은 금후 북경을 떠나 사업할 기간은 그가 맡은 중앙문혁소조의 직무를 제1부조장인 강청동지가 대리한다.” 
   
이는 강청이 명분이 정당해서 중앙문혁소조에서의 언론과 행동이 더욱 편리하게끔 된 법적인 의거로 되여버렸던 것이다.   
   
강청은 진백달을 대함에 사정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격하게 하고 낯색을 굳히면서 때로는 마치 제 손자를 다루듯이 훈계를 하기까지 했다. 도주(陶鑄)가 “문혁”때 진백달의 부인 증지(曾志)보고 말한적이 있다.
    “압니까, 강청은 늘 우리를 제 손자대하듯 그렇게 명령식이니 정말 배겨내지 못하겠습니다!”            (<<一個革命幸存者ㅡ曾志回憶實錄>> )    

왕력(王力)은 강청이 진백달이 자살하려한 일을 알고는 욕지걸이를 하던 일을 말했다. 1967년 1월 4일에 강청과 진백달은 공개적으로 도주(陶鑄)를 타도한다고 선포했는데 이에 대하여 모택동은 1월 8일에 긍정하고는 2월 10일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상위가 다른 하나의 상위를 타도한다”면서 이 일은 너와 강청 둘이서 만든것이라면서 문혁소조의 진백달과 강청을 비평했다. 진백달은 몹시 놀래여 자살하려했다. 그는 말했다.    
“강청이 나를 못살게 핍박했다. 그날
(도주를 타도한다고 한 그날) 나는 수면제를 먹었다. 강청이 나를 기어코 그 지경으로 끌고 간 것이다.”    
강생도 말했다.
    
“이건 다가 강청이 한 짓이다. 회의를 열고 비판하려면 강청을 해야 한다. 백달은 그녀가 핍박해서 자살하려 한 것이다.”
    
강생은 왕력, 관봉과 대국을 고려해서 회의를 소집했는데 강청은 몸이 아프다는 구실을 대고 회의에 오지 않아 진백달만 비평했다. 강청을 비평하는 사람이 없었고 진백달을 비평한다는 것도 그저 슬쩍 지나가는 식이였다. 자살까지 하려 한 사람을 놓고 딱딱한 말을 하려고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강청은 진백달이 자살하자고 한 일을 알고는 손가락을 거의 그의 코끝에 닿을지경 들이 대면서 욕을 퍼질럿던 것이다. 
   
“자살해봐요, 어디 자살해보라니까요, 자살만해보지, 당적을 긁어버리고 반역자로 만들어버릴테니까, 그래 어디 자살해버릴 담이나 있는가요?”
      (<<王力反思彔>> 976ㅡ977頁)  

강청의 기요비서가 강청이 진백달을 책망하는 소리를 직접들었는데 그녀는 진백달을 “죄죄꼬만한 백성”이라고 형편없이 비하하면서 깔보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11동(강청이 있는 곳)의 회의실에서 홀연히 강청이 진백달과 무슨일에 뒤틀렸는지 마구 꾸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래도 입벌려요, ‘죄죄꼬만한 백성’이, 입다물어요 ‘죄죄꼬만한 백성’이, 당신이 다 뭔가요 ‘죄죄꼬만한 백성’이, 당신은 정치국상위인거야! 저절로 ‘죄죄꼬만한 백성’이라하다니, 그게 겸허한건가, 책임을 벗자는 게지!” 
   
진백달이 뭐라 대꾸하는 소리는 않나고 “에 참ㅡ ”하는 탄식소리만 들렸다. 
   
“죄죄꼬만한 백성”이라니 확실히 그러했다. 진백달이 입에서 튀여 나온 소리거니와 그 어떤 사람이든ㅡ 보통사업일군을 봐도 그는 두손을 합장하고 “나는 죄죄꼬만한 백성이요! 죄죄꼬만한 백성이요!”할 것이다. 하지만 강청의 그 날카롭고 실랄한 꾸짖음은 확실히 진백달의 치명적인 약점을 틀어쥔 것이였다, 즉 남한테 책임을 떠미는 그 성질을. 
   
강청의 기요비서는 또 한가지 사건을 목격한바 있다. 1967년 1월의 어느 하루였다. 그가 16동에 있는 중앙문혁숙직실에 갔더니 거기에 강청과 진백달이 있었다. 쏘파에 앉은 진백달은 머리를 숙인 채 아무말 없이 거의 울상이 되어있는데 강청이 그를 향해 말하는 것이였다. 
   
“저 벌벌 떠는 꼴 좀 보지, 무서워하다니,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돼서..... ”
    
강청이 내뱉는 소리에 기요비서는 머리가 뗑해나기에 급히 돌아서고말았다. 벌벌떤다니?.... 강청이 대체 무슨일에 그같이 진백달을 자존심상하게 아름답지 못한 말을 내던지는걸가? 후에 안 일인데 그것은 이런 일이였다. 1967년 1월 19일, 진백달은 군위에서 연 한차례 회의에서 소화를 놓고 “소화(肖华)는 군인같지 않고 신사같다”고 비평했던 것이다. 진백달의 이 말은 재빨리 북경군구에 전달되여 그곳의 반란파들은 소화를 붙잡자고 인차 행동에 들어가 그의 집을 수색했던 것이다. 소화는 뒷문으로 나가 담장을 뛰여넘어 도망쳤다. 
   
모택동이 소화는 아직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그통에 진백달은 간이 뒤집어질 지경 놀랬다. 한데 강청은 그를 훈시하면서 용기를 내라고 바람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강청이 진백달을 대하는 태도가 이러하니 기타의 다른 중앙문혁소조성원들에게도 영향이 미친 것이다. 제일 돌출한 것은 왕력, 관봉, 척본우 같은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지 않는 그것이였다. 도주를 타도하자고 공개적으로 선포한 후에 한번은 16동의 회의실에서 왕력, 관봉, 척본우가 공개적으로 랭소를 지으면서 진백달을 보고 풍자쪼로 그가 도주한테서 례물을 받은적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진백달은 아무대꾸도 없다가 나중에 이런 말 한디를 했다. 
   
“본우동지가 나를 대신해서 주석과 강청동지앞에서 몇마디 좋은 말을 해주길 바라오.” 
   
진백달이 척본우한테 이같이 청을 들 정도니 과연 놀라운 일이였다!
    
그가 청을 드는데는 두가지 함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척본우와 모택동, 강청사이의 관계가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척본우더러 모주석과 강청앞에서 헐뜯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였다. 강청의 기요비서가 후에 진백달의 비서인 왕보춘(王保春), 왕문요(王文耀)와 알아봤는데 그들은 진백달이 도주한테서 례물을 받은 적이 없고 향항에 가는 도주한테 부탁해서 록음기를 사온적은 있었던 것이다. 
   

진백달에 대한 강청의 태도를 말하면 자연히 강청이 진백달의 처 류숙연(劉叔宴)에 대한 태도역시 거들게 된다. 1967년 11월 중순에 강청의 기요비서가 류소기를 비판하는 문장 한편을 써서 <<인민해방군보>>에 발표했더니 진백달의 처 류숙연이 11월말이 아니면 12월초에 전화로 발표한 문장이 리론성이 강하다느니 수평이 높다느니 한바탕 올리춰주는 것이였다. 하여 듣다못해 “숙연동지, 무슨일인지요?”하고 물었더니 그녀가 하는 말이 “다른일이 아니얘요, 강청동지에게 말 좀 해줘요, 바쁘시겠지만 강청동지가 나의 공작을 안배해 달라구요. 내가 본래 <<붉은기>>잡지 부총편집 범약우(范若愚)의 전안(專案)을 맡고있어요. 전 지식분자의 연변규률을 진일보로 연구하고싶어요. 강청동지의 그 어떤 지시가 있으면 저한테 쪽지로 알려만주면 되는 거얘요.”
   
 “그러지요, 방조하는 셈 강청동지와 물어보지요.”
    
강청의 기요비서는 강청에게 알려주었다. 
   
“진백달녀편네가 나보고 공작자리를 안배해 달라구? 아니 그 사람의 공작이야 왕동흥이 안배하기로 된건데. 그 지주녀편네가 원, 하는 일이나 잘하지 않고 나보고 공작자리를 안배해 달라니, 상관말고 내버려둬요.”
    
강청은 코방구를 뀌였다. 
   

중앙문혁소조에는 또 하나의 괴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회의를 해도 기록을 하지 않는것이였다. 무엇때문인가? 강청이 기록못하게 한 것이다. 회의한 내용을 기록하지 못하게 한 그 현상자체가 강청이 주앙문혁소조에서 “전정”을 실시한 표현의 하나인 것이다. 무엇 때문에 회의에 기록이 없는가? 이에 대해서 중앙문혁소조성원의 한 사람이였던 목흔(穆欣)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종래로 회의 기록을 못하게 했다.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말자는 데서였다.” 
   
그가 또 말했다. 
   
“도리대로 말하면 중앙문혁은 회의를 하면 반드시 기록을 해야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녀는 ‘기밀성’을 턱대고 책임을 벗어버리자는 수작이였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는 제 맘대로 떠버리고 욕하고 음모궤계를 꾸밀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죄악적인 언행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으니 죄를 져도 증거를 찾지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후에 주은래가 와서 경상적으로 중앙문혁의 만나는 회의를 조직했는데 그가 매차회의를 중앙문혁소조와 그의 판공실에서 사람이 와서 기록하기로 했던 것이다. 
   
첫 번에는 교옥산(矫玉山), 주가정(周家鼎)이 기록했는데 “평안무사”했다. 강청도 다른 어떤 반대의견이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에 와서는 달라졌다. 그때는 왕광우(王广宇)가 기록했는데 강청이 보더니만 대바람 신경이 예민해져 “누가 기록하라했는가? 누가 널 오라구했어?” 했다. 주은래가 다가와 “내가 오라고 한거요!”하고나서 몸을 돌려 왕광우를 향해 말했다. “됐어, 오늘 기록하지 말지!”
    주은래가 결정한 일이였건만 이같이 강청의 조폭한 유린을 당하고 만 것이다.               (穆欣《劫后长忆ㅡ10年动乱纪事》)               

림청산(林青山)은 <<강청과 그녀의 기요비서>>라는 책에서 “쏘얜”이
(강청의 기요비서ㅡ 이 문장의 작자) 문혁소조에서 회의기록을 했다면서 제220, 234, 305페지에 아래와 같이 썼다.       
“중앙문혁소조성원은 강청의 사무실에서 만나는 회의를 했는데 ‘쑈얜’이 기록했다.... 진백달이 머리를 쳐들고 한창 기록하고있은 쏘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적잖은 중앙문혁소조회의기록을 쑈얜이 한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엉터리없이 꾸며 만든 글이다. 강청의 기요비서는 종래로 중앙문화소조회의에 참가한 적이라곤 없는 것이다.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기록을 한단말인가?  림청산은 중앙문혁소조회의의 실제정황을 근본 모르는 것이다.     
   
강청은 중앙문혁소조에서 순리롭게 세도를 부리고 “전정”을 하기 위해 중앙문혁소조의 판사기구인 판공실(1966년말 그녀가 “판사조”로 고쳤음)을 매우 “관심”하고 걱정했다. 다른것이 아니였다. 자기를 위해 잘 복무하게 하자는 목적이였던 것이다. 근 200여 명이 운집한 이 방대한 기구의 성원은 모두가 그 년대에 고상한 도덕표준을 가진 사람들로서 중앙의 일부 단위와 특별히는 부대에서 많이 선발되였던 것이다. 
   

한데 이 방대한 기구가 점점 작아졌다. 지금 이야기하고있는 중앙문혁소조는 날이 가면 갈수록 인원이 점점 줄어든 그 기구를 가리킨 것이다. 1968년 1월에 왕력, 관봉, 척본우가 상거하여 떨어져 나간 후에 큰 인물로 강청, 진백달, 강생, 장춘교, 요문원 다섯이 남았다. 직무를 보면 고문하나에 정부조장 셋,  조원이 하나였고 절대다수가 채워나간 것이다. 
   
(4개의 큰 행정구역에서 파견되여 참가했던 성원과 원 중앙문혁소조성원이 도주를 포함하여 모두 14명이였다. 그중 고문이 2명, 정부조장이 5명, 조원이 7명이였는데 계산에 넣지 않음.) 
       

이 판사기구의 전임책임자 둘은 다가 중앙문혁소조성원이였다. 제1임은 목흔(穆欣), 부책임은 척본우(戚本禹), 조일구(曺軼毆)였다. 강청은 조일구가 맘에 들지 않으니 년세가 많아 돌본다면서 내보냈다. 제2임은 왕력(王力)이였다. 제3임은 송경(宋琼)이였는데 그는 본래 <<해방군보>> 기자부주임이였다. 그런데 리눌
(李訥ㅡ강청과 모택동사이에 난 딸)이가 1967년 1월중순에 <<해방군일보>>에서 반란을 일으켜 송경을 잡아 끌어갔던 것이다. 제4임은 왕광우(王廣宇)였다. 그는 마레주의연구원의 간부로서 왕력과 관봉이 1967년 8월말에 뽑히여 나가니 그도 마레주의연구원으로 돌아갔다가 그 이듬해의 3월에 “있지도 않는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제5임은 강청의 기요비서면서 이 글의 필자였다. 부책임은 교옥산(矯玉山)이다.  필자는 임기가 매우짧아서 1967년 12월에 상임하여 1968년 1월까지 였으니 아마 1개월도 채 안될 것이다. 다가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그때 그와 함께 무함당하여 감옥행을 한 사람으로는 또 중앙문혁소조당총지서기 왕도명(王道明)과 공작인원 장근성(張根成), 주점개(周占凱) 등이였는데 그들 다가 부대기층간부였다.    
이 글의 필자를 이어받아서 제6임 주임이 된 사람은 리눌(李訥)이였다. 마지막 책임자이기도했다. “조어대에 편안히 않아” 좋게 보낸 일임이라 하겠다. 아무렴 그가 어쩌면 한 나라 판사기구의 총책이 된단 말인가? 
불가사이한 일이다.  강청은 중앙문혁소조성원에 마저도 이런 저런 계급투쟁을 벌리여 하나 하나 다 처리하여 나중에는 그 몇만 남기고는 죄다 없는 죄를 씌워 감옥에다 집어 넣은 것이다. 도대체 왜서?   
그 이름을 하나하나 다 적을 수는 없다. 갇긴 사람 모두가 아무런 죄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심한 옥고를 여러해나 치른 것이다.
             

(3) 강청의 어지러운 과거사       

진계정(秦桂貞)은 지금도 홀몸이다. 그녀가 지금은 자그마한 화원이 달린 양옥에 살고있는데 그것은 향항에 있는 옛주인 허아가씨가 돈을 받지 않고 면비로 평생살라고 빌려 준 것이다. 가정기물 일절을 갇춰주었거니와 전화까지 가살하여 거의 매주일마다 안부를 물으면서 제집식솔같이 각근히 대해주고있다. 만년을 부러운 것 없이 편안히 보내고있는 그녀는 감개무량하여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고운일 하면 고운 밥 먹는다했어요. 아마 내가 착한 일을 했다고 복을 받고있는거겠지요.”     
   
최고인민법원특별법정에서 강청을 심판할 때 상해에서 북경에 와 출정한 사람으로 정군리의 부인 황신(黃晨)과 진계정(秦桂貞) 둘이였다. 
       

강청과 동갑인 진계정은 강청이 30년대에 상해에 있을적에 잘 숙친한 사이였다. 람평(강청)은 그녀를 보모라 불렀다. 기실은 람평이 끼니를 제대로 이어가기도 어려울 지경 가난한 연예인이여서 보모를 두고 살 형편이 못되였다. 진계정은 그당시 셋방주인이 고용한 보모였던 것이다. 
   람평은 그때 복도가에 있는 2층의 10여평되는 협착한 방에서 눅거리세를 물며 살았다. 맨 아래층 삼각지는 변소와 욕실이 겸비한 곳이고 3층은 진계정의 침실이였다. 그 중간인 2층 삼각지에 강청이 들었던 것이다.    
람평은 당시에 발표한 <<한통의 공개편지>>에서 두 번이나 그녀를 언급했다.... 
   

1936년 4월이다. 그때 람평이라 불렀던 강청은 상해의 배우였던  당납(唐納)과 결혼했다. 그건 람평이 두 번째로 하는 결혼이였다. 혼례식은 상해청년회 즉 항주의 륙화탑(六和塔)에서 거행했다. 이를 상해의 여러 신문들은 제가끔 보도했다. 한데 두달이 지나 그들의 혼인에는 파렬이 생겼다. 당납이 두 번이나 자살을 하려다가 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한때  온 상해를 들썽하게 만든 “당람사건”인 것이다.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 람평은 또 아들 딸 자식이 있는 연출 장민(章泯)과 동거를 해서 세상을 웃기였다.   
   
여론이 하도 심하니 람평은 1937년 6월 5일 상해에서 출판하는 <<련화화보>> 제9권 4기에다 <<한통의 공개편지>>를 발표하여 자변을 했다.     그녀는 당납(唐納)의 행위를 이같이 썼다.
    
“그가 또왔다. 들어서자마자 나를 욕했다. 나는 그를 나라가 했다. 그는 나가지 않았다. 그래 나는 아마를 불러 올라오게 했다. 그랬더니 그는 문을 잠그었다. 그 선량한 아마는 속이 달아 울었다. 그런데 나는?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럴 변이라구야, 하느님 맙소사!  욕한다는 꼴이? 평생에 이런 욕을 볼 줄이야. 나보고 남성을 갖고 놀았다고 하다니..... 자기를 기편했다는 것이였다.” 
  
 람평은 계속 썼다.
      
“한밤중에 그가 또 왔다. 그래 나는 그를 때렸고 그도 나를 때렸다. 우리는 문을 잠그어버렸다. 아마와 친구들은 열지 못했다. 나는 미칠것만 같아서 소래기를 쳤다. 전에는 그렇게 높이 웨쳐 본 적이 없다. 그번에 그는 내한테 보냈던 편지들을 다 걷어가지고 가버렸다. 그는 또 신문에 내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지는 않고..... ”
        
람평이 쩍하면 소리쳐 부른 아마라는 것이 바로 진계정이다.
    
진계정의 인상에 당납(唐納)은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고상하거니와 여자같이 말씨가 유화했다. 그는 늘 창가에 놓여있는 그 자그마한 탁상에 마주앉아 무슨 글인가를 썼다. 
   
람평아가씨는 성격이 달랐다. 그녀는 성격이 좋앗다나빳다 변덕이 심했다. 야밤인데도 진계정은 쩍하면 아래층에서 “아귀, 아귀”하는 소리에 깨여나군했다. 그것은 람평이 불러대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럴 때면 진계정은 알아챘다. 다툼질을 하거나 더 험한 싸움이 붙군 했던 것이다. 진계정은 중간에서 떼여 말리고 조해를 하는 역할을 했던것이다. 
   
람평이 당납(唐納)과 갈라진 후에도 그 삼각형의 방에서는 늘 그따위 싸움극이 재연되군했던 것이다. 
     
진계정이 이 련속극을 보면서 놀란 것은 람아가씨가 늘 “무단적”으로 “손찌검”을 먼저하는 그것이였다. 
   
“영화배우가 어쩜 그리도 흉악할 수 있나요, 글을 못배운 이 하인보다도 못하니 원!”
    
진계정은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머리를 저었다.    
 

 (4) 위사장폭로: 모택동 강청과 리혼할 방법없어
    

이것은 모택동의 위사장(衛士長)이였던 리근교(李根橋)의 회억이다.      
연안때의 일이다. 하루는 화룡이 물고기를 보냈기에 취사원 고영문(高經文)이 그것으로 강청이 먹을 채를 만들었다. 리근교가 들고 요동에 들어가니 마침 강청이 혼자 있었는데 기여히 같이 먹자면서 유달리 살갑게 굴었다. 그래 마지못해 마주앉아 젓갈을 든건데 강청이 돌연히 낯색을 고치고 욕지걸이를 하는 것이였다. 
   
“귀신이나 잡아가라지!”
    
그 소리에 리근교는 목구멍이 꺽 멨다.  
   
“천천히 먹어, 뼈가 걸리겠어. 너보고 하는 소리 아니야.”
    
리근교는 그 순간 목주래에 걸렸던 고기뼈를 간신히 넘겼다. 
   
강청이 동강났던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입당한걸 의심하고있잖아, 내가 1932년에 입당한게 분명한데도 기여코 1935년이라 우기니 원!”
    
위사장은 자기가 관계 할 일이 아니니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다.
    
강청은 혼자서 노기를 띄면서 풀풀거렸다. 
  
 “쑈리 생각해봐, 로반이 세가지를 검사하고 세가지를 정돈하라한지가  언젠가요, 두달이 넘지 않았는가. 하다하다가 이제는 나의 력사까지 들추자고 드니  원! 이게 그래 로반을 허물어뜨리자고 드는게 아닌가!”
    
리근교가 묵묵 부답이니 그녀는 점점 더 입심을 뽑았다.
  
 “그때 나는 성이 왕가란 사람이 소개해서 입당한건데 그가 이름이  뭔지는 모르겄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 ”
    
강청은 대방이 그냥 입다문채 듣기만 하니 홀연 어투를 바꾸었다.
    
“그렇지, 그네들이 글쎄 내가 거기를 좋아한다면서 옷까지 줬다잖아, 내가 그래 줬던가?”
   
 “없지요. 누가 그럽디까?”
    
“그러게말이지, 그러니까 요언이 아니고 뭔가말이야?.... 밥먹고 할짓들이 없으니 남을 혼내우느라 그러는게지, 점점 열의를 내가면서. 네가 남을 그랬으니 두고보지, 담음에는 다른 사람이 너를 혼내울 차례라는 걸!”
    
위사장 리근교는 그녀가 이같이 윽벼르는 소리를 듣고 강청은 과연 보복심이 강한 여자라는 것을 느겼던 것이다.....
  
하루는 리근교가 모택동을 따라서 강청이 있는 요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을 패가며 사업을 긴강히 한 모택동이 휴식을 해야 했던 것이다. 한데 요동에 이르고 보니 강청은 이불속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길래 리근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망을 봤다. 
   
좀 있으려니까 안에서 모택동이 참지 못해 웨치는 소리들려왔다. 
   
“조직원칙대로 해야지, 그 누구도 특수화를 부려선 안돼!” “그렇게 혁명을 한다면야 내가 또 말해선 뭘하는가?” “당신이 내 녀편네라구 그런다면야 난 더더욱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강청이 뭐라고 말했는지 모택동은 그를 꾸짖는 것이였다. 
 “당신은 과연 누구하고나 맞지 않아!” “속맘이 께림직하지 않으면야 심사를 두려워할게 뭔가말이요? ”    
그들은 음성을 점점 높이더니 마침내 강청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섧게 울었다. 그들의 담화는 점점 다툼으로 변해버렸다. 강청은 울면서 떠들었다. 안에서 모택동의 노한 웨침소리들려왔다. 
   
“당장물러가!”
    
강청은 옷들을 걷어 안고 리근교의 앞을 훌 지나 주은래의 사업실이 있는 요동쪽으로 갔다. 그녀가 제 남편과 다투고나서는 고소를 하느라 주은래를 찾아가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는 그의 요동을 나올때면 전같이 씁씁한 몰골로 되돌아가군했다. 
   
그날 오후, 리근교는 모택동의 침실가에서 그가 깨나기를 기다렸다. 
       
모택동은 피우던 담배꽁초의 불을 비벼끄고는 내던지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후! 강청이 내 녀편네렸다, 공작원이렸다, 안그럼 언녕 내쫓았겠다!”
    
리근교는 그저 듣기만 했다. 뭐라고 말했으면 좋으랴....  모택동도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번민을 갖고 있었다. 그도 자기를 리해하여 줄 사람이 옆에 있어서 하소를 하는 것이니 그럴 법도 한 일이였다. 
   
모택동은 담배를 다시말아 둬모금 피우더니 의연히 상심하는 울적한 낯색을 보이면서 리근교를 향해 입을 여는 것이였다. 
   
“방법없어, 그럭저럭 지내는 수 밖에.... ” 이윽고 그는 한마디 더 했다. “근교야, 너하고 하는 말이다. 인제 글쎄 어쩌겠냐, 애당초 그하고 결혼을 하지 말아야했을 걸 그랬구나. 에 참, 경솔했지.... ” “방법없구나,  과연 경솔했다니까! ”
   
 모택동앞에서 리근교는 그저 바로 서서 듣기만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른 사람과 그래 그가 무슨 말을 하랴?
    
모택동은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들이긋고나서 창가에 놓여있는 걸상에 가 앉더니 량미간을 그러모은 채 아느새 침묵했다가 한번다시 탄식을 내 뿜으면서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였다. 
  
 “이 정황에 내 신분을 봐서라도 리혼은 하기 어려운거구나. 강청이 큰 착오를 진것도 없거니와 이제 곧 승리를 할텐데 그하고 리혼을 해버린다면 일후에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뒷말을 할게 아니냐..... 방법없다니까. 근교야, 난 정치짐을 지고 사는거다!”
    
모택동의 가정생활은 유쾌한 편이 못되였다. 그는 각 방면의 영향을 고려하여 부득불 강청과 어울려 살아가는 판이였다. 
(
5) 모택동 시를 지어 강청이 정치야심을 갖게했다
    

【중심제시】
    
로산회의가 결속된 후에 기진맥진 한 모택동은 강청을 데리고 항주에 있는 별장에 가서 며칠을 쉴 생각이였다. 바로 그들이 항주로 가기전날에 둘은 로산의 선인동을 보러간다고 나선 것이다. 강청은 그번의 로산길에 정치자본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에 찍은 사진만은 훗날 강청이 탈을 쓰고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한 자본이 된 것이다.    

暮色蒼茫看勁松
                           
亂云飛渡仍從容
                           
天生一個仙人洞
                           
無限風光在險峰.
         

이것은 1961년 9월 9일, 모택동이 <<리진동지가 찍은 로산선인동사진에 쓰노라>>하는 한수의 칠률이다. 이 시는 일찍이 인민문학출판사 1963년도 판인 <<모택동시사>>에 발표된 것인데 “문화대혁명”기간에 전 중국에 널리 류행되였던 것이다.  
   
모택동이 이 시에다 쓴 리진(李進)이 바로 강청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강청이 찍은 이 사진은 대비가 크게 다르다고 한다. 왼쪽아래가 로산의 이름난 경관인 선인동인데 선인동은 고령서북켠의 불수암아래 해발 1,000m에 있는 것이다. 당조 때 여동빈(呂洞賓)이 여기서 수련을 해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오른쪽 웃켠절반가량은 하늘에 소나무가지가 찍혀있다. 강청은 성능이 좋은 사진기를 갖고 있었거니와 조건도 좋은데다 촬영술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선인동의 위치를 가려내기가 아주 어렵거니와 본래 험한 산세의 기복이 그리돌출하지도 않은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강청이 찍은 이 사진은 선인동인것이 아니라 로산 어비정(御碑亭)의 금수봉(錦綉峰)인 것이다.”
   
 (<<강청전>> 23페지)
  

한즉 모택동은 그 어떤 정경을 접하니 감개가 생겨났다기보다는 서정적인 정경을 빌어서 자기의 심정을 토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력사배경이 그같이 특정적인 년대였던만큼 그는 자기의 감정을 그 한 장의 사진에 쓴 시에다 쏟아부은 것이다.  
   
20세기 60년대초는 중국이 복잡하고도 준엄한 시대였다. 국내는 3년간 재해를 입은 것이다. 국제상에서는 쏘련이 중쏘량당의 분기를 량국관계로 까지 확대시켜 단방면으로 전부의 전문가들을 철거했거니와 몇백건에 달하는 협의와 합동을 찢어버렸고 중쏘변경의 분기를  일으켰던 것이
이다. 뿐만아니라 국내를 보면 동남연해일대에는 이른바 “초생달모양의 포위권”이 이루어졌고 서부와 북부변경도 안전에 위협을 받고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준엄한 형세하에서 중국공산당과 그 중앙의 주석이였던 모택동은 거대한 압력을 받아내야만했던 것이다.    
이런 형세하에서도 모택동은 의연히 침착하고 태연했으며 신심이 백배하여 투지가 앙양되고 분발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고립도 경제봉쇄도 군사위협도 다가 중국인민을 꺾구러뜨리지는 못한다고 믿었다. 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국인민은 쉼없는 투쟁으로 전진도로상의 곤난을 물리치고 자기의 숭고한 목적을 이루고야 말 것이라 믿었다. 
   
모택동이 쓴 시가 그같이 위인다운 함의를 갖고있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선인동 하나, 무한한 풍광은 험한봉에 있어라” 
  
시에서 보여주다싶히 이같이 평범하지 않은 추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계의 무한한 경치를 감지하자면 험한 봉을 톱아올라야 하고 험한 봉을 톱아오르자면 고생도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종당에는 아름다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설토한 것이다.  
   
사진을 놓고 보면 강청은 로산에 갔지만 로산을 오르기 싶지 않으니 선인동을 찍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찍은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강청은 성질이 좋았다 나빳다 변덕이 심하고 누가 뭐라해도 평소 자기식 자기멋으로 하는 녀인이였다. 그녀는 당년에 북대하에 있다가 돌연히 로산으로 갔던 것이다.  그 어떤 령감이 떠올라서가 아니였다. 모택동과 팽덕회지간에 모순충돌이 생겼다는 것을 안 그녀는 이 기회에 정치자본이라도 얻어보자는 생각이 돌았던 것이다. 
   
한데 강청은 그곳에 가긴했어도 모택동을 위로하지는 않고 자기는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데서 틀을 차리면서 도처로 싸다니기나했다. 그녀는 남과 자기는 모택동의 켠에 선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자본이 없었다. 그러니 정치충돌이였던 모택동과 팽덕회지간의 투쟁에 근본 삐쳐들 엄두를 내지 못했거니와 실은 그럴 자격도 없었건 것이다. 
  
 로산회의가 결속된 후에 기진맥진한 모택동은 강청을 데리고 항주에 있는 별장에 가서 며칠을 쉴 생각이였다. 바로 그들이 항주로 가기전날에 둘은 로산의 선인동을 보러간다고 나선 것이다. 강청은 그번의 로산길에 정치자본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에 찍은 사진만은 훗날 강청이 탈을 쓰고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한 자본이 된 것이다.  
   

강청을 놓고 보면 20세기 50년대는 과도기로서 감정상에서 모택동의 랭대를 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부처간 사이가 온화해 진 것이다. 한데 그것이 결코 생활상의 수요때문에서가 아니였다. 모택동은 50년대말부터 60년대초에 이르는 기간 정치상 좌절이 거듭되였다. 특히는 “대약진”운동의 “좌”적인 사상과 후에 있은 팽덕회를 위수로 한 “우경기회주의”를 반격한 로산회의를 거치면서 그는 기진맥진한 것이다. 이런 처지에 이르른 모택동은 돌연히 총명하지만 아직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제 처를 생각하는 쪽으로 머리가 돈 것이다. 이때로 부터였다, 바로 남편이 머리가 돈 덕에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었었던 강청의 처지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되였던 것이다. 모택동은 정치상 자기를 방조해 줄 사람으로 제 처를 택했으니 그녀는 순리롭게 정치인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강청을 보면 모택동이 이 시를 발표하기 전 까지만 해도 정치자본이 없었기에 정치인물이 될 수 없거니와 부처간의 관계도 그닥 화목하지 않아 희망이란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바른대로 말해 강청은 정치인물이 될 녀인이 아니였다. 이 기형적인 정치년대에 모택동이 제 정치투쟁의 수요로부터 그녀를 써먹자고 내세우지 않았다면 부처지간에 뒤틀려 버그러졌던 차가운 관계가 온화해질 수 있겠는지 하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강청은 독단적인 행동을 좋아하고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야심적인 녀성으로서 아무 때건 정치권리를 잡자는 것이 목적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모택동이 이 시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우선 부대에서 그의 위치가 없었고 전국문예계련합회에서도 그녀는 위치가 크게 없었던 것이다. 강청은 문화부에서 설립한 영화지도위원회에서 한자리를 얻어했다. 영화지도위원회라는것이 이름그대로 영화평론을 전문하는 곳이다. 그녀는 영화계에서의 자기의 권세를 빌어 40년대말과 50년대초에 벌써 <<청궁비사>>와 <<무훈전>>을 마구비난하는 것으로 한차례 영화계에 발길질을 해보았다.       
   
모택동이 시를 지어 그녀의 정치야심을 불러일이킨지 얼마되지 않아 강청은 댓바람 중앙판공청 비서처 처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런데 그녀는 마침내 생긴 그 정치벼슬을 몇주일을 하고는 그만두는 수 밖에 없었다. 한것은 그녀가 반공청의 주임이자 실력가인 양상곤과 어울리지 않고 늘 뒤틀어지군했기 때문이다. 
   
1958년과 1959년, 흐루쇼브는 두번 북경에 왔다가 번번히 강청을 만나겠다고 했다. 중앙은 강청이 병이 있다는 리유를 대고 대면시키지 않고 중앙령도의 부인들 중에서 활약적인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王光美)와 진의의 부인 장천(張茜)을 내놓아 그를 접견하게 했고 출국방문도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인상속에 강청은 연안에 있을 때 처럼 의연히 일개 가정주부로만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이 어떻게 대하던지간에 중앙이 어떻게 대하던지간에 그녀는 그저 일개 가정주부로만 있으려 하지 않았다. 강청이 1959년 전에는 그저 묵묵히 지냈는데 그렇다고 가슴속에서 불붙는 야심이 꺼진건 아니였다. 모택동이 정치에 참여시킬 기회를 내심 참고 기다린 것이다. 이 정치자본을 얻기위해 그녀는 마치 고양이가 비몽사몽간에 쥐를 기다리듯 눈이 가매 기다려 온 것이다. 
   
기회는 끝내오고야말았다! 1961년 9월 9일, 모택동은 강청이 찍은 사진뒤에다 <<리진동지가 찍은 로산선인동사진에 쓰노라>>라는 시를 쓴 것이다. 강청은 이것이 자기와 그사이 관계가 온화해지는 징조임을 감지했다. 그녀는 이런 때 이것은 모택동이 무엇보다 정치상에서 도와달라는 신호임을 촉기빠르게 알아챈 것이다. 이 점을 깨달으니 다년간 몸과 정신을 괴롭혀 온 잔병들이 물러가면서 꿈틀거리던 야심은 정식으로 활개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1962년 9월, 인도네시아총통 스카르노의 부인이 북경에 방문을 왔다. 류소기와 왕광미가 그를 접견했다. 9월 24일에 류소기, 왕광미가 스카르노대통령부인과 담화하는 사진이 나왔고 이틑날에는 왕광미와 스카르노대통령부인이 찍은 사진이 단독으로 <<인민일보>>첫면에 뚜렷이 났다. 
   
이것이 강청의 질투를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기위해서 모택동의 힘을 빌어 그를 누르려고 결심했다. 아니나다를가 5일후에 모택동과 강청이 스카르노대통령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인민일보>>첫면에 크게 났고 류소기와 왕광미가 스카르노대통령의 부인과 찍은 사진은 제2면  한쪽에 자그마하게 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이래 그때까지도 강청이 모택동과 찍은 사진은 한번도 신문에 난적이 없다가 이번에 단통 크게 나니 광채로왔다. 이것은 기실 모택동이 일부러 류소기와 왕광미에게 커다란 반응을 보이자고 한 거동으로서 그가 제 처도 남만 못하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한편 주목하게끔 떠 올리 민 것이다.  
   

후에 강청은 경극개혁에다 정신을 쏟아부었다. 그녀는 경극개혁을 우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로, 정치상에 나래를 펼치는 공구로 사용했다. 그때 모택동은 계급투쟁을 호소하면서 단언한 것이 하나의 정권을 뒤엎거나 혹은 공고히 하자면 관건은 여론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강청은 꺼리낌없이 극본과 노래가락을 뜯어 고쳤고 심지어는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에 중대한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부여한 권한을 가진것 처럼 예날 임금이 쓰던 보검을 휘두르듯이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에 중대한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부여한 권한) 영화 <<북국강남>>, <<이른봄 2월>>,  <<무대자매>>, <<섭이>>, <<천리역풍>> 등과 경극 <<사요환>>, 곤극 <<리혜낭>>을 제멋대로 비판했다.    
북경에서 강청은 불청객이였다. 그녀는 자기를 청하지도 않는 북경경극단에 가서 고압적인 정책으로 연원들을 줄곧 자기의 새 극인 <<사가퐁>>을 연습하게끔 강요했다. 
   
강청은 이어서 상해의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와 <<붉은신호등>>을 제 구상대로 개혁했다. 그가 연원들에게 내리먹인 좌우명이 있는데 그것은  “연극이 바로 전투다!”라는 것이였다. 
   
강청은 이어 경극을 무극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홍색랑자군>>과 <<백모녀>>는 본래 발레무용이였는데 강청은 사랑정서에다 계급원한을 붙이여 그것을 본보기극으로 만들었다. 강청은 자기가 하고있는 것은 정치활동이지 예술활동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자기가 그저 본보기극을 만드는데 그친다면 정치자본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문화령역에서 정치운동의 물결을 일으키느라 무등 애를 쓰기시작했다. 
   

강청은 투쟁목표를 저명한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에다 돌렸다.
    
<<해서의 파직>>은 북경시의 부시장 오함(吳唅)이 쓴 극이다. 내용은 명나라때의 재상 해서(海瑞)가 황제에게 직언으로 간하였다가 황제를 대노시켜 관직을 떼운 력사이야기다. 

강청은 부시장 오함과 그의 보호자인 팽진(彭眞)을 북경문화부문의 대변자라 짚었다. 그녀는 극중인물 해서는 로산회의에서 나떨어진 팽덕회(彭德懷)로서 극은 그를 대변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번안한 것이라 까밝히면서 비판하여 모택동의 공명을 일으켰다. 대약진의 실패로 비난의 목소리를 들었던 모택동은 주위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려던 참이였는데 강청은 그의 심리에 맞추어 부채질을 한 것이다.    
이같이 강청의 “정확한 지도”와 당시 상해시위서기였던 장춘교(張春橋)의 “구체적인 방조”하에 요문원(姚文元)이 그 중국인민들을 소름돋히게 만든 비판문장을 써서 당당한 부시장을 꺾구러뜨렸다. 
   
1966년 5월 28일, 정치국상위에 예속된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성립되자 붓을 놀리는 진백달(陳伯達)이 조장이 되였고 강청은 제1부조장으로 되었다. 강청은 이렇게 정치권력기구중심에 슬적 들어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그녀는 완전히 남의 지배에 들지 않았기에 자아를 마음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이 강청이 찍은 사진뒤에다 쓴 글이 “리진에게 선사”한다는 것이였다. 일반 사람은 리진이 누구인지 모른다. 근본 알 수도 없었다. 그것은 강청의 가명이다. 그녀가 1951년말에 호북 무한부근의 농촌사업에 심입할적에 쓴 가명이였다. 
   
모택동은 후에 사진에다 글을 쓰면서 리진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처음에 강청은 이 비밀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 사진으로 정치자본을 얻어 자기가 속에 품은 녀황의 꿈을 이루게 될것 같으니 참지 못하고 그만 토로하고 만 것이다. 
   
1973년도의 어느날 밤, 강청은 인민대회당에서 일본의 한 발레무용단을 접견했다. 강청은 사뭇 기쁜 심정으로 그 일본 발레무용단 단장에게 풍경을 찍은 사진 한 장을 증송했다. 일본무도가는 그것을 받고 의아쩍어서 보고 또 보았다. 보통사진이 아니였다. 리진이 찍은 로산 선인동인데 뒷면에다는 모택동이 시를 쓰고 “리진동지에게 증송”이라 한 것이다. 
   
강청은 신색이 사뭇좋아 필을 쥐더니 “강청찍음”이라 썼다. 그녀의 이런 대담한 거동은 일본손님들을 놀래웠다. 그제야 사람들은 리진이 바로 강청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여러해동안 중국의 독자들은 모택동의 이 격정높은 시, 더욱히는 “무한한 풍광은 험한 봉에 있어라”는 구절의 함의에  끌려 읊어보면서도 리진이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모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리진이 바로 강청!  그녀는 기형적인 정치시대의 산물이였다!           

【자료】로산회의(盧山會議)                 
로산회의는 두가지 회의를 포괄한다. 즉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당중앙이 강서의 로산에서 연 정치국확대회의와 8월 2일부터 16일까지 거행한 당의 8기 8중전회였다. 
   
1959년 7월 2일ㅡ 8월 1일의 회의는 중앙정치위원과 각 성, 시, 자치구당위 제1서기, 중앙, 국가기관의 일부문의 책임자가 참가한 회의다. 이 회의가 내놓은 원래의 의제는 경험교훈을 총결하고 지표를 조정하며 “좌”경착오를 계속 규정하자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회의강화에서 19가지 문제를 내놓아 대중이 토론하도록 했다. 회의는 7월 3일부터 10일까지 6개의 큰 지구를 소조로 나누어 토론을 하도록 했다. 토론과정에 회의에 참가자들은 정황을 내놓고 의견을 말하고 회의를 하면서 학습도 하면서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좋고 생동활발하기도해서 모두들 이것은 “신선회의”라고 했다. 회의는 국내문제를 여하히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두가지 같지 않은 의견분기가 생겼는데 일부 사람들은 농촌식당, 공급제, “공산풍” 등이 농민들의 적극성에 손해를 끼치니만큼 반드시 1958년도의 경험교훈을 참답게 총결지어야 한다했고 다른일부사람들은 실제사업중의 착오와 결점을 비판하는데 대해서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찬물을 끼얹으니 우경이라는 것이였다. 
   
7월 10일, 모택동은 조장회의에서 총로선을 강조다보니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는 수밖에 없는데 틀릴 수는 없다면서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의 결점과 착오를 성적에다 비하면 손가락 하나와 아홉개 비레와 같다고 했다. 그래도 성적이 많고 졀점은 대비도 되지 않게 적다는 뜻이였다. 
   
모택동은 이런 발언을 하고나서 <<로산회의의정기록>>대로 분조토론을 계속하게 하여 회의를 7월 15일에 결속지으려했다. 
       
7월 14일, 팽덕회는 자기가 소조회의에서 그냥 말하는 것 보다는 직접알려주는게 더 낫겠다고 여겨 당시 객관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문제들을  편지하는 식으로 한통에 써서 모택동에 주었다. 1958년이래 “좌”경착오와 경험교훈을 지적하고 자기의 관점을 밝힌 의견이였다.
(<<만언서>>라 함)    

7월 16일, 모택동은 팩덕회의 의견서를 찍어서 전체 대회참가자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다. 그러고나서 회의는 이 편지에 대한 토론으로 넘어갔다. 소조회의에서 황극성(黃克城), 주소주(周小舟), 장문천(張聞天) 등이 발언했는데 그들은 편지의 총정신이 좋다고 긍정면서 팽덕회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7월 23일, 모택동은 회의에서 강화했는데 그는 팽덕회의 편지는 “자산계급동요성”을 표현했다면서 당을 향해 진공한 우경기회주의강령이라했다. 그때로부터 회의는 이른바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 등의 “우경기회주의”, “반당집단”문제를 놓고 적발비판하기 시작했다. 
   
1959년 8월 2일ㅡ16일, 로산에서 당의 8기8중전회를 열었다. 회의에 출석한 사람은 중앙위원 75명, 후보중앙위원이 74명이였다. 중앙의 유관부문과 각 성, 시, 자치구당위제1서기 14명이 회의에 렬석했다. 
   
이 회의의정은 첫째는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고 둘째는 1959년경제계획지표를 정리하고 토론하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여러번 강화했다. 
       
회의는 <<팽덕회동지를 위수로 한 반당집단의 착오에 대한 결의에 관하여>>, <<당의 총로선을 보위하고 우경기회주의를 바대하여 투쟁할 결의>>, <<증산절약운동을 저개할 결의에 관하여>>와 <<중국공산당제8기주앙위원회제8차전체회의공보>>를 통과했다.
    
전회는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과 주소주 네사람이 각각 담임하고있던 국방부부장, 총참모장, 중앙서기처서기, 외교부제1부부장과 호남성위제1서기직무를 철소하고 그들의 중앙위원, 중앙후보위원, 정치국위원과 정치국후보위원직무는 보류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자료】
팽덕회의 발언내용        

팽덕회는 8일사이에 7차례 발언하고 말참견을 했는데 그가 발언한것과 말참견한 것을 후에 팽덕회를 바판하면서 정리하여 찍어냈다. 이런 흩어진 발언들에서 정황과 문제들을 지적한 것인데 어떤 말투는 날카로왔다. 특히 “좌”를 반대할데 관한 것과 개인숭배를 반대할 문제였는데 팽덕회는 8가지로 전면적인 첨예한 의견을 제출했던 것이다. 
  
 (1). 인민공사가 좀 일찍하다. 고급사의 우월성이 이제야 발휘하기 시하는데 더구나 경험도 없이 공사화를 하다니? 1년이나 반년이라도 시험을 거쳤더면 좋았을 것이다. 
   
(2). 북대하회의후부터 좌적으로 하는데 그래 “전민이 강철을 제련한다”는 구호가 맞기나 한가? 
   
(3). “전민이 공업을 꾸린다”면서 투자기준액의 한도를 1.3만이나 더 넘겼으니 이제는 어떻게 한단말인가? 
   
(4). 매개합작구와 성에서 공업계통일을 다해낸다는데 이건 1개 5개년계획을 갖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5). 우리 당은 언제나 “좌”를 극복하기는 어렵고 우경에 대서는 규정이 비교적 잘된다. “좌”를 실시한 이래 그것이 일체를 압도해버리길래 많은 사람이 속심에 할 말도 감히 하지 못한다. 
   
(6). 성적이 위대하지만 짧은기간(9월 ㅡ11월)에 발생한 착오는 그 영향이 그저 그 석달에만 미치는게 아니다.
    
(7). 경험교훈은 보귀하다. 사람마다 한목씩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모택동을 포함해서 나도 한몫이 있다. 적어도 당시에 반대하지 않았으니까. 
   
(8). 지금은 당위의 집체령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결정하고있다. 제1서기가 결정하면 그만이다. 제2서기가 결정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집체위신을 건립하지 못했고 그저 개인위신을 세웠으니 이는 불정상적이고 위험한 노릇이다. 
   

팽덕회의 상술한 발언과 말참견이 언사가 예리해서 객관에서 보아도 자신의 예기를 뽐내고 과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당시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공명을 일으킨 것이다. 주덕이 한 말을 례를 들어도 그렇다. 7월 6일에 그는 중남조회의에서 농촌식당문제를 놓고 비평한 것이다. 
   
“그런 식당은 전부 없애번린다해도 나쁜일이 아니다.”하면서 그는 말했던 것이다. “가정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 제집에 돌아가 살게 하는게 원칙이다.” “식당을 꾸려내기 어려우면 걷어장지고 제집에 돌아들 가는게 좋은것이다.” 등등. 

이에 모택동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람은 관건적인 시각에 동요하는데 력사의 대풍랑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시각 그의 심리는 모순에 부대끼고 있었다.
   
석달전이던 4월, 상해회의 때 그는 “해서의 정신을 따라배우라”고 제창했다. 그래놓고는 왜서?  
  
“그는 개별적으로 ‘내가 해서의 말을 한것을 후회한다. 해서가 정말 나온다면 나는 배겨낼것 같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는 모택동이 해서를 따라배우라고 호소는 했지만 사실은 해서와 같은 식의 예리한 인물이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호교목(胡喬木)의 분석이다. (그는한때 모택동의 비서였다. )  
          

6. 강청이 증건을 없앤 비밀행동    

“거기의 원쑤가 누구란걸 알려줘요,
내가 혼내워줄테니. 그리고 내원쑤를 알려줄테니 거기서 방법을 대여 내대신 그것들을 타도해줘요.”    
이것은 강청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엽군에게 한 말이다. 엽군은 그러자고 쾌히 응대했다. 
   
강청은 연안으로 간 그 시각부터 자기가 상해에서 보낸 나날의 각가지일들을 잊지 않았다. 그는 람평이란 예명을 우선 강청으로 고쳤다. 하지만 어지러웠던 과거사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전에 자기를 잘 알고있는 사람이 눈앞에 얼씬거릴거릴까봐 늘 가슴을 죄였다. 강청은 천방백계를 다해 자기의 력사를 고치려 했다. 하여 그녀는 제 력사를 위조하는 한편 자기에게 불리한 증건자료들은 없애버렸다. 례를 들면 국민당특무 최만추(崔萬秋)와 비밀리에 거래가 있은 일과 그녀가 옛친구였던 정군리(鄭君里)에게 쓴 편지들이였다. 강청은 제 입을 놀리고 제 손으로 증건이 될 자료들을 없애치우기만 하면 무사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1966년 6월, 장춘교는 강청의 “밀령”에 따라 버젓이 영화예술가 정군리를 만났다. 정군리인즉은 1936년 4월에 거행하였던 항주륙화탑혼례식에 주례를 맡았거니와 신랑 당납과 신부 람평(강청)의 둘러리를 섯던 사람인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언녕 “검은명단”에 들어갔다. 장춘교는 그를 만나자 우선 엄엄한 얼굴로 훈계부터 했다. 이 운동에서 립장이 온전하고 태도가 단정하게 잘 개조해야한다면서 하루빨리 혁명군중대오에 들어와야 한다 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청, 정군리의 이름을 꺼내서 그를 가슴이 얼어들게 만들었다. 
   
장춘교는 말했다.
   
 “강청동지가 지금은 지위가 달라진거요, 듣자니 지난때 보낸 편지들이 당신의 손에 있다는데 거기에 그냥두는게 타당할 것 같지 않으니 내놓소. 그가 제절로 처리하게 말이요.”
    
낮은 어조로 권유하는것 같지만 어딘가 살기가 너울댔다. 
   
정군리는 그래라고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자기 처 황진(黃震)과 함께 트렁크를 들추고 궤짝을 들춰서 강청과 관계된다고 여겨지는 편지거나 사진이거나 신문에서 오려낸 것들은 말끔히 찾아내여 한꾸러미를 만들어 상해시위판공실에 갖고가 장춘교에게 넘기도록 했다. 장춘교는 그것을 받자 곧 처리하기 바란다는 편지를 한통써서 강청에게 보냈다.   
   
그랬건만 강청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장춘교를 나무리면서 엽군이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하게 시켰다. 
   
1966년 10월 4일, 강청은 직접 모가만(毛家灣)에 있는 립표부(林彪府)로 갔다. 림표와 엽군은 그녀를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엽군과 강청 두 녀인은 손을 맞잡고 놓지 않았다. 뜨거운 인사말이 오간 후에 강청이 림표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우리 여성들끼리 할 얘기 좀 있어요.”
    
림표는 속으로 이 여자가 어째 온걸가고 생각했다. 
   
강청은 엽군의 침실에 들어가 밀담을 시작했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뭔지 알아요?”
    
엽군은 강청이 묻는 말에 마주보면서 웃기만했다.
    
강청은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었다.
    
“문화대혁명은 곧 혁명적인 수단으로 제가 타도하고싶은 사람을 모조리 꺾구러뜨리는 거야요.”
    
엽군은 그제야 낯색이 확 밝아지면서 고개릴 끄덕였다. 
   
강청은 제 속심을 곧이곧대로 토로했다. 
   
“거기서 원쑤가 누구란걸 알려줘요, 내가 혼내워줄테니. 그리고 내 원쑤를 알려줄테니 거기서 방법을 대여 내대신 그것들을 타도해줘요.” 
   
엽군은 들어보니 제 구미에 맞는지라 그러마고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강청동지의 말이 맞지요, 분부만해요, 힘써볼테니까.”
    
이렇게 되어 숱한 예술가들이 악운을 만나게 되였다.
    
강청은 수많은 명단을 한뀀지에 꿰여 그녀에게 주었다. 이전에 <<색금화>>의 주연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경쟁했던 왕영(王瑩), 한때 련인이되여 침상놀음까지 하고는 자기를 멀리하는 김산(金山)과 그를 차지한 손유세(孫維世), 자기와 모택동의 결합을 방해했던 엄박(嚴朴), 당년에 자기가 체포된 당안을 찾아주지 않은 왕제보(王濟普)..... 그 다음의 긴박한 일은 그가 쓴 편지 두통을 찾아내는 일이였다. 편지 한통은 1936년 6월에 란평(강청)이 확끈달아오른 정을 당납(唐納)에게 쏟아 부은 련애편지고, 단른 한통도 역시 당납과 관계되는 것인데 그건 정군리(鄭軍里)보고 자기를 도와 해외로 종적을 감춘 당납을 찾아달라고 사정한 편지였다. 강청의 생각에는 그가 당납과는 결의형제를 맺었으니 그의 행적을 꼭 알고있을 것 같아서 부탁한 것인데 여지껏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강청이 옛남편을 찾는건 옛정이 일시에 끓어올라 그러는게 아니라 다른 하나의 감정ㅡ 배심이 가슴속에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1957년 봄에 모택동은 양개혜(楊開慧)를 그리워하는 <<游仙>>이란 시를 한수 지었는데 그것이 후에 세간에 전해진 <<접련화 ․ 리숙일에게 대답>>이라는 것이다. 강청은 이 시를 보고 화가 부글부글 괴여 올라 모택동과 한바탕 해냈던 것이다. 너 모택동이 양개혜를 그리워하는데 내라고 왜서 당납을 그리워하지 못할가 하면서 그는 당납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분김에 옛남편 당납을 찾아달라는 편지를 정군리에게 띄웠다. 
   
한편 그의 편지를 받아본 정군리는 이만저만한 일이 아닌지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친구들을 불러다 모여놓고 상론했다. 친구들은 다가 이런 일은 절대로 해주지 말아야한다고 일깨워주었다. 하여 정군리는 강청의 편지를 태워버렸거니와 당납을 찾아주지도 않았다. 
   
장춘교가 얼리고 닥치고 위협까지 하지만 없는 편지를 어떻게 내놓는단말인가. 하여 정군리는 집을 털리우고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 
   1
937년에 연안에 있을 때 부터1966년 까지니 30년 세월이다. 실상 강청은 눌리여서 중국정치무대에 오르지 못한거나 답지 않다가 이제야 고개를 들게 된 것인데 자칫잘못하면 편지때문에 전도를 망칠것 같았다. 한데 정군리가 적잖은 편지와 사진과 오려둔 심문들을 바쳤지만 그녀가 찾는 편지는 없었다. 하여 잠이 오지 않은 강청은 림표부를 찾아간 것이다. 
그녀는 엽군과 말했다.                 
“나의 편지 한통이 상해에 있는 영화연출 정군리한테 있지 않으면 가능하게 조단(趙丹)이 아니면 고이기(顧而己), 진리정(陳鯉庭), 동지령(童芷苓) 중 어느 누구의 손에 있을거야. 그들은 한짝패니까. 거기서 어떻게 방법을 대서 그걸 찾아와요.”
    
이에 엽군은 그러리라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림표가 윗자리로 올라가자면 아무튼 강청의 도움을 받아야할 것 같았던 것이다. 
   
이틑날 엽군은 공군사령원 오법헌과 상의하고 연구한 끝에 구체적인 행동방안을 내왔다. 오법헌은 즉시 상해에 있는 남경군구부정위 강등교(江騰蛟)에게 전화를 걸어 속히 북경에 와서 한가지 임무를 맡으라했고  이번의 행동을 절대비밀에 붙이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강등교는 인차 북경에 날아와 오법헌에게서 임무를 맡았거니와 엽군을 만났다. 
   
엽군이 그에게 강청의 편지가 그곳 상해에 있는 정군리, 고이기, 조단 그 몇 사람 중 누구의 손에 있을테니 찾아내라면서 의심나는 사람은 다 수사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행동까지 연구했다. 우선 믿을만한 사람으로 홍위병을 조직해서 정군리, 고이기, 조단 등의 집을 수색하는데 일체 “문자자료”는 편지건 필기건 일기건 종이쪼박을 남기지 말고 몽땅 걷어야 한다 하고나서 엽군은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꼭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그루박아 강조했다. 
   
엽군과 강등교는 그래도 비밀이 새나갈까봐 수색당하는 정군리 등 사람들에게 번호를 달아 집을 수색할 때 번호를 쓰게하고 자료에다도 대호(代號)를 쓰도록 했다. 
   
10월 7일, 정군리는 재난이 당장 제 머리꼭때기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방금찾아낸 사진 몇장을 바치면서 강청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네가 내한테 한 편지가 더 있는지 기억나지 않거니와 네가 다른사람이나 조단의 부인한테 편지를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19월 9일 이른새벽에 가택수색행동이 시작되였다. 상해공군경위패의 전사들이 홍위병으로 가장했는데 그 속에는 선발된 공군간부자녀도 끼여있었다. 그들은 다섯갈래로 나뉘여 정군리, 조단, 고이기, 진리정, 동지령 등의 다섯집에 덮치였다.    
  
 원래의 명단에는 주신방(周信芳), 우령(于伶)도 있었지만 긁어버렸기에  다시털리우지 않았다. 주신방의 집은 홍위병들의 손에 이미 여러번이나 털리였길래 홍위병들은 그 집을 내쳐두었고 우령의 집은 공군초대소 바로 마즌켠이여서 비밀적인 행동이 남의 눈에 들킬 것 같아 한쪽에 밀어놓았다.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강등교는 5섯가지 군대규률을 하달했다.    
(1), 오직 편지, 필기본, 사진 등 문자자료만 걷고 다른건 다치지 말것.
    
(2). 누가 물으면 “상해홍위병총지휘부”사람이라 대답 할 것. 
   
(3). 대오를 이끄는 책임자는 권총을 휴대할 것. 맘대로 쏘지는 못함.
    
(4). 군용트럭의 패쪽을 바꾸거나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것.
    
(5). 행동대원은 오직 “공군지도 혹은 비밀문건이 잃어져서 찾는다.”고만 말할 것. 날밝기 전에 모두 철회해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깐깐히 수색했다. 정군리의 집에 달려든 자들은 돌아갈 때 제 원형을 들러내고말았다. 오늘밤의 일을 까딱말하지 말라, 자칫잘못했다간 머리가 날아나는 줄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엽군은 자료를 없앴다.
    

날밝기전에 한마대 한마대씩 검사한 자료들에 번호를 매긴것이 공군초대소에 놓여 있었다. 강등교가 선정한 친신들은 그것을 다시금 하나하나 꼼꼼히 정리하여 중요한 자료는 따로 한마대만들었다. 
   
강등교는 북경에 돌아온 후 자기가 한 일을 오법헌에게 회보했다. 한편 오법헌은 엽군의 뜻에 따라서 이 들춰낸 자료들을 봉하여 공군보밀실에 넣고 그 누구도 읽어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자료 한묶음을 엽군이 가져갔는데 이틑날 엽군은 오법헌에게 전화로 “상급”에서 아주 만족해하니 그런줄을 알라고 강등교에게 알려주라 했다. 이른바 “상급”이란 강청을 가르키는건데 강청은 엽군이 가져다주는 자료들을 일일이 보니 자기가 찾자는 편지거나 자료들이 거의있있기에 만족했던 것이다. 강등교도 가슴을 내리누르는 돌을 들어낸것 처럼 거뿐해지면서 이 특수임무를 완성함으로 하여 자기에게는 그 어떤 상이라도 내릴 것 같아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1967년 1월 초의 어느 하루, 엽군은 조어대(釣魚臺)에 있는 강청의 주숙에서 림표판공실비서 조근생(趙根生)에게 전화로 공군에서 물건 한꾸러미를 돌리니 먼저 받아놓으라, 자기 엽군은 그리로 인차가리라했다. 전화를 건지 얼마되지 않아 공군사령부당위판공실의 사람이 그 꾸러미를 가지고 갔다. 착전에 강청, 엽군과 당시 공안부장이였던 사부치(謝富治)는 조어대의 그 강청의 처소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들춰온 자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다가 나중에는 일로영일(一勞永逸)이라 한번 수고해서 내내 락을 보기로 결정했다. 엽군은 즉시 오법헌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사람을 파견하여 자료를 모가만(毛家灣)에 가져가도록 했다. 
   
엽군이 까만 “홍기패”승용차를 타고 모가만으로 갈 때 강청과 사부치도 함께 갔다. 엽군은 그 두 객을 객실에 모셔놓고는 공작인원을 시켜 조근생을 불러오게해서는 그의 손에 있는 자료를 받아쥐고 뜯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조근생이 뜯지 않았다고 하니 시름놓으면서 전부태워버리라 했다.     
  
그번의 강청과 엽군의 합작에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루명쓰고 고생했다. 하지만 결국 재수없이 딱살먹은 건 그 두 여인 자신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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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음지에 묻힌 비밀(38) 2011-03-28 21 3117
53 음지에 묻힌 비밀(37) 2011-03-28 19 2967
52 음지에 묻힌 비밀(36) 2011-03-28 15 3303
51 음지에 묻힌 비밀(35) 2011-03-28 23 2904
50 음지에 묻힌 비밀(34) 2011-03-28 14 2702
49 음지에 묻힌 비밀(33) 2011-03-27 15 3315
48 음지에 묻힌 비밀(32) 2011-03-27 14 3716
47 음지에 묻힌 비밀(31) 2011-03-27 12 3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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