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의 래왕은 손님처럼 서로존경했다 왕광미(王光美)가 강청을 처음만나기는 연안에 있을 때였는데 그때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한지 이미 8년이 되었다. 1946년도였다. 하루는 왕광미가 말을 타고 류소기가 있는 조원(棗園)에 가는데 트럭한대가 마주왔다. 운전수옆 조수좌석에 앉은것이 강청이였다. 그때 연안에는 작은 차가 없었기에 제일 좋은 운수공구가 트럭이였다. 강청은 연안에서 유명하였기에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강청은 왕광미를 몰랐다. 후에 둘은 서백파(西栢坡)에서 인사를 나누어서야 서로 알고 사귀게 된 것이다.
북경에 들어온 후 두사람은 왕래가 좀 더 잦아졌다. 1949년 10월 1일 개국대전을 한 그날밤에 강청은 왕광미와 약속하고 함께 천안문에 올랐다. 그것은 낮에는 천안문에 오를 수 없었기에 강청이 전화로 왕광미보고 자기를 동무하여 천안문에 올라가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왕광미는 강청과 함께 갔기에 보초병이 막지 않아 올라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천안문성루를 한바퀴돌았다. 왕광미는 강청이 자기 남편보다 지위가 더 높은 모택동의 부인이였기에 그녀를 존중하여 언니처럼 대했다. 전세기의 50년대에 강청과 왕광미는 진심스레 래왕이 있었다. 강청은 왕광미가 있는 곳으로 자주다니면서 가정일이며 복장을 차리는 등에 이르기까지 얘기를 나누군했다. 왕광미가 평평(平平)을 낳았을 때였다. 쏘련에서 휴양을 하고있었던 강청은 왕광미가 딸을 보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양계집애인형을 사서 인편에 보냈거니와 후에는 왕광미에게 옷감까지 사보냈다. 그러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늘 전화로 왕광미를 자기 집에 불러서는 한담을 나누면서 사진도 보이고 같이 뜨개질도 하고 영화도 보았다. 강청은 영화보기를 즐겼다. 외국영화와 향항영화 아니면 해방전의 영화들이였는데 왕광미는 그의 흥취를 맞추어 같이 웃고 한담을 나누면서 각별히 친절히 보냈다.
류소기는 습성이 쓴오이 따위의 남방채를 먹기좋아하는데 북경에 들어온 후에는 시장에 파는 것이 없어서 먹지 못했다. 하여 왕광미는 다른사람에게 부탁하여 남방의 쓴오이를 사왔다. 그는 모택동역시 호남사람이니 쓴오이를 즐기리라 여기고 더러 보냈다. 그랬더니 강청이 인차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였다. “아유, 어쩜 그리 부실해! 우리 여기 중남해에 공급참이 있어서 말만 하면 그들이 어련히 사다주지 않을라구, 원.” 그리고는 왕광미에게 감사하마면서 성의를 받아준다고했다.
1963도부터 왕광미와 강청지간의 관계가 이전보다는 랭담해지기시작했다. 그래도 둘은 만나면 례절이 밝아 점잖게 대했다. 한번은 왕광미가 강청에게 전화를 쳐서 자기의 복장을 와서 좀 봐달라고 했다. 한것은 왕광미가 류소기를 배동하여 동남아를 방문하게되는데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몸단장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도움을 받자는 데서였다. 강청은 왕광미가 소박한 고니메리야스 한 벌을 해입는게 좋겠다고 했다. 강청이 말했다. “그 영화있잖아, <<안나 까레니나>>의 여주인공이 입은것 같이. 그래야 척 봐고 고귀해서 다른누구와도 구별이 되는거야.” 강청은 종래로 동남아에 방문을 가본적이 없었길래 고니메리야스옷을 입고 그곳에 가면 더워 죽을지경이라는 걸 몰랐다. 그녀는 왕광미와 말했다. “외국에 가는 데 단장은 어떻게? 옷에 빈침은 꽂지 말어. 안나 까레니나를 보란말이야, 일신이 검은 복장에다 진주보석 장신구하나 없어도 우아해보이기만하잖아.” 류소기를 배동하여 출국방문하는것이 지루하지만 사람의 눈길을 끄는 일이니 처음부터 끝날 때 까지 옷을 자주갈아입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왕광미는 강청의 의견을 존중해서 여러벌 갖추지 않았다.
2. 질투가 생겨서 타격보복
강청이 연안에서 모택동과 결혼할적에 중공중앙정치국은 강청과 간단한 규정을 약속한바있는데 그것인즉은 강청이 그저 일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는 사무조리신분으로 모택동의 생활과 건강을 돌보아야지 당내기관에서 그 어떤 직무도 맡아서는 안되고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였다. 한데 강청은 질투와 야심이 있는 여자였기에 장기간 그러한 규정에 눌리워 약속을 지키자니 속에 불만이 여간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기후에 변화가 생겨 차츰 모택동과 류소기사이에는 분기가 발생했고 중국의 정치는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인도네시아 스카르노대통령부인이 중국에 방문왔을 적에 같이 찍은 사진이 도화선이 되여 강청은 왕광미를 향해 반란을 하기시작한것이다. 1962년이래 왕광미는 국가주석의 부인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 올라 점점 활약했다. 이해의 9월에 인도네시아총통 스카르노가 부인을 데리고 북경에 방문와 열열한 접대를 받았는데 각종 연회와 각지를 참관하는것은 다가 관방의 신문에 보도되였다. 그러다보니 그를 배동하는 류소기가 신문보도의 중심인물이 되었거니와 그의 부인이자 아주 매력적인 왕광미역시 일순간에 신문보도에 열점이 되는 인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총통 스카르노가 제 부인의 팔을 끼고 트랩을 밟아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류소기도 제 부인을 데리고 비장장에 나가 그들은 영접했던 것이다. 9월 24일, <<인민일보>>는 류소기부부와 스카르노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냈고 이틑날에는 또 왕광미와 스카르노부인이 찍은 사진을 냈다. 그것이 강청의 질투심을 크게 자아냈다. 이 시기 왕광미는 나라에서 중요한 지위에 놓여있건만 그녀는 없었던것이다! 왕광미의 입당시간을 따지면 강청 자기보다는 15년이나 늦고 혁명력사도 비기지 못하는데 어쩌면 <<인민일보>>에 버젓이 난단말인가? 강청 자기는 떳떳한 제1부인인데도 <<인민일보>>에 한번도 난적이 없는데. 이래서야 말이 되는가?.... 강청은 제 남편의 위력을 빌어 왕광미를 눌러놔야겠다고 도슬려 맘먹은것이다. 베개밑소송이 은을 내여 강청은 마침내 모택동의 윤허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모택동부인의 신분으로 스카르노총통과 부인을 회견하는 데 참가했다. 그리하여 모택동, 강청과 스카르노부부가 같이 찍은 사진이 <<인민일보>>의 첫면에 뚜렷히 나타나게된 것이다. 중국의 백성들은 <<인민일보>>에 난 사진을 보고 처음으로 강청의 몰골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되였다. 그 사진은 모택동이 여지껏 막후에 있은 제 처를 막앞에다 떠미는 신호이기도했다. 이로서 전에 규정한 강청은 “그저 일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는 사무조리신분으로 모택동의 생활과 건강을 돌보아야지 당내기관에서 그 어떤 직무도 맡아서는 안되고 정치에 간섭해서도 안된다”던 중공중앙정치국의 규정과 약속은 철저히 효력을 잃기시작한 것이다!
왕광미와 강청은 만나는 기회가 점점 적어졌거니와 그들의 관계는 묘하게 번지였다. 왕광미가 농촌개혁에 종사하니 강청은 극개혁으로 그와 비기였다. 당내에서 왕광미의 영향력에 강청은 과연 눈이 붉어진 것이다. 1963년 11월말에 왕광미는 “동박(董朴)”이라는 이름으로 공작조부조장이 되어 하북성 당산전구 무녕현 로왕장공사 도원생산대에 자리잡고 “4청”운동을 했다. 1964년춘절에 왕광미는 류소기와 “4청”운동“문제를 담론했다. (담화내용은 <<同王光美同志談四淸>>으로 정리되였음) 류소기는 “동복”동지에게 편지 한통을 길게 써서 “4청”운동에 대한 제 견해를 말했다. 4월말에 왕광미는 도원대대에서의 사업을 끝맺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7월 5일, 왕광미는 중공하북성위회의에서 <<한개대대사회주의교육운동의 경험에 관하여 총결>>을 지었다. 이 총결은 류소기의 심열을 거쳐 1964년 9월 1일에 중공중앙의 이름으로 각지에 전달되였는데 “도원경험”이라 한다. 이 문건이 생김으로 하여 왕광미는 당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모택동은 “도원경험”을 “형좌실우”라고 그릇된 비평을 했다.)
1966년 10월, 중앙은 사업회의를 열었다. 회의후 전국에서 이른바 자산계급반동로선대비판을 전개했는데 류소기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거니와 얼마지나지 않아 타도되였고 왕광미도 련루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에 강청이 왕광미를 타격보복한 것은 아래의 몇가지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3. 지략으로 “왕광미를 나포” 강청의 지시에 따라서 청화대학반란파는 지략으로 “왕광미체포극”을 한바탕 놀았다. 1967년 1월 6일, 기요비서 류진덕(劉振德)이 왕광미에게 보고했다. 자기가 방금 북경의과대학제2부속병원의 의사라는 사람이 걸어 온 전화를 받았는데 내용인즉은 “평평이가 퇴교하여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자동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졌길래 당장 수술을 해야 하니 가장이 빨리 병원에 와서 서명하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날벼락이였다. 왕광미는 이런 말을 듣자 머리가 단통 뗑해나면서 말이 나가지 않았다. 류소기는 듣자마자 관단성있게 부르짖었다. “병원에 당장가보기기요!” 왕광미는 초조불안한 와중에도 문득 주은래가 당부하던 말이 상기됐다. “총리가 나보고 중남해를 절때 떠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가장이요. 그렇게 작은 애가 내 때문에 투쟁받았잖았소. 그런데다 이같이 큰 불행을 당했는데도 안가보면 어떻게 되오. 안돼, 가봐야 해, 병원에 가보잔말이요!” 류소기는 분연히 외투를 걸치고 나섰다. 그는 망설이는 왕광미를 향해 독촉했다. “당신은, 내차에 앉아가기오!” 류소기는 자기의 승용차면 안전한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류소기와 왕광미가 차를 달려 병원에 이르고 보니 딴판이였다. 인질로 잡힌 아들 원원(源源)이와 딸 정정(亭亭)이 부모들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저 사람들이 엄마를 붙잡자고해요!” 왕광미는 이것이 기편극이였음을 인차알아챘다. 남편을 그들 손에 잡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담히 빠른걸음으로 곧추 반란파들을 향해 가면서 높은 목청으로 웨쳤다. “내가 왕광미다. 아닌 사람은 모두 물러가라!” 류소기는 인차돌아가려하지 않았지만 그의 위사 가란훈(賈蘭勛)은 반응이 빨랐다. 그는 류소기를 제꺽 차안에다 밀어넣고는 차를 홱 돌려 중남해로 돌아왔다. 왕광미는 홍위병들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차에 실려가면서 캐물었다. “왜 이런 기편적인 수단으로 나를 나오게하는가?” 이 물음에 대방은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였다. “우리는 강청동지의 지시를 받고 이러는겁니다.”
한편 류소기는 중남해에 돌아오자 인차 주은래에게 전화를 쳤다. 주은래는 전화를 받자 그 즉시에 “정강산”홍위병에게 명령했다. “어찌됐던 간에 래일아침 5시전에 왕광미를 중남해에 꼭 돌려보내야한다.”
왕광미가 제 집 복록거(福祿居)에 돌아오니 장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류소기가 처한테 알려주었다. “평평이 정정이 다 울었소.”
이틑날, 청화대학에서는 “왕광미사냥”포스타를 찍어 사면팔방에 날려보냈다. 한때 그것은 그야말로 폭발성적은 중국의 특대뉴스였다. 한편 강청은 득의연하여 으쓱해하였다. 홍위병들을 추겨 왕광미에게 한번 수치를 주고보니 마음이 달착지근해나면서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고약한 못된 장난이이였다. 이것은 아마 중공당사에 “력사에 류례없는 기편극”으로 기록되여야 할 것이였다! 4. “목걸이사건”이 일으킨 풍파 지략으로 왕광미를 나포한 일이 있은지 얼마안되여 1월 12일, 중남해의 반란파들은 그의 집에까지 달려들어 한번 다시 비판대회를 열었다. 그것은 장차 류소기에 대한 비판투쟁을 전국적인 범위에서 기세를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재앙이 먼저는 왕광미에게 덮친것이였다.
1967년 4월 8일, 왕광미는 통지를 받고 청화대학에 가서 검사했다. 4월 10일, 강청과 진백달의 지지를 받고있는 청화대학의 반란파는 또 그의 세 자식을 붙잡아 놓고 인질로 삼아 왕광미를 중남해에서 나오게 하여서는 30만이 참가한 어마어마한 왕광미비판투쟁대회를 열었다. 아침 6시반좌우였다. 그들은 왕광미를 청화대학본관의 한 방에 데려갓다. 거기에는 이미 반란파가 만원이였는데 그들은 진세를 벌리고 왕광미를 심문했다. 기세흉흉하게 따지고 물었다. “류소기는 왜서 <<청궁밀사>>를 애국주의라했느냐? ” 이에 왕광미가 반박했다. “나는 종래로 류소기동지가 그 영화를 애국주의라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기는 긍정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나는 모주석을 믿는다. 모주석은 언제나 조사를 잘하라했다.” 반란파는 몇마디 묻지도 않고 왕광미를 향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할적의 모양대로 단장하라 했다. 몇은 강박적으로 그가 그때 입었던 치포를 입게했고 굽높은 구두를 신겼으며 영국귀족식의 변두리 채양이 큰 초모자를 씌웠다. 한데 왕광미가 지금음 몸이 나서 치포를 입을 수 없으니 한 홍위병이 나와 옷의 옆쪽을 찢어 입혔다. 홍위병하나는 탁구알 여러개를 한줄에 꿰여 꼴불견인 것을 목걸이라면서 왕광미의 목에다 걸었놓기까지 했다. 왕광미는 분노하여 항의했다. “너희들은 너무나 무단적이다. 모주석의 지시를 위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중앙에서는 본래 왕광미를 와서 그저 자아검사를 하게 하라했다. 그러나 회의장은 완진히 비판투쟁장소로 변하고말았던것이다. 그들은 왕광미를 말 한마디도 못하게 했다. 만인이 눈을 부릅뜨고 왕광미를 보는데 시선을 가장 홀치는 것이 바로 그의 목에다 걸어놓은 탁구알목걸이였다. 대체 왜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는가? 왕광미가 남편 류소기를 따라 비르마에 방문갓을 때였다. 연회에서 왕광미는 례모를 차리여 당시 비르마련방혁명위원회주석이자 혁명정부부장회의 주석이 례물로 증송하는 금목걸이를 감사히 받아 그것을 목에다 걸었던 것이다. 이는 본래 아무잘못된 일도 아니였다. 불행한것은 강청이 텔레비뉴스에서 이 장면을 보고 가슴에 새겨둔 것이다. 강청은 홍위병보고 말했다. “왕광미가 출국방문할적에 목걸이를 걸겠다는 걸 내가 말렸다. 그러면완전히 자산계급작풍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따위건 걸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때 광미는 내앞에서 장식품은 걸지 않겠노라 대답했던것이다. 그래놓고서는.... 훗날 텔레비를 보니까 목에 금목걸이를 걸었단말이다!” 이리하여 홍위병들은 탁구알로 목걸이를 만들어 그의 목에 걸어놓은것이고 강청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것을 사진까지 찍은것이다. 왕광미의 인격을 대단히 모욕했을뿐만아니라 형상을 추악하게 만들었고 명성을 그지없이 더럽게 했다. 강청은 그래놓고도 성차지 않았던지 근본 있지도 않는 죄를 만들어서 씌워 왕광미를 감옥에다 집어 넣었다, 그를 아예 죽게 만들자고들엇던것이다! 림표와 강청일당은 당과 국가의 최고령도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류소기주석과 그의 부인 왕광미를 극력 해치였다. 그들은 1967년 6월 3일에 북경시공안국군관회에다 “63전안조조”라 부르는것을 하나 세워놓고는 직접 중앙전안조의 령도를 받게 했다. 이 전안조의 성원10명은 전부 북경시공안국군관회에서 뽑아온 자들이였다. 이자들은 강청일당의 뜻에 순종하여 왕광미를 해치기 위한 가짜구술을 만들어 냈고 증거를 위조했다. 그리고는 종당에 누구나 들으면 놀랠 어마어마한 죄를 만들어냈다. 왕광미는 “미국특무, 전략특무, 전략정보특무”라는 것이였다! 1949년에 왕광미의 모교인 보인대학(輔仁大學)에서 특무가 나진 일이 있었다. 그들이 발출한 고사포부대의 정보가 중도에서그만 포획되였던 것이다. 그 일로하여 이름있는 대학교는 그 명성이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 잊어지게 된 것이다. 한데 “문혁”에 왕광미가 그 학교를 다닌적이 있었다는 조사가 나와 그 대학교가 다시금 열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강청의 뜻에 따라서 강생은 그 학교의 자료들로 왕광미의 가짜자료를 만들어 모택동에게 바치였다. “왕광미는 우리 당내에 혼입한 미제국주의전략정보국의 특무분자다”라고 하면서 중앙은 왕광미를 체포하여 심문해야한다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왕광미는 1967년 9월 13일에 정식체포되여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왕광미는 체포되자 비밀리에 진성감옥(秦城監獄)에 압송되였다. 류소기가 박해를 받아 죽자 강청은 왕광미도 죽여버리는것이 좋겠다고 제출했다. 중공 “9차대회”후 림표는 왕광미를 사형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당장집행”하라고 했다. 그 판결서는 모택동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지시를 내렸다. “刀下留人”이란 네글자였! 칼아래 사람을 남기라는 말이다. 하여 왕광미가 당장죽지는 않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왕광미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장장 12년을 그 감옥에 갇혀 있었다. 외계소식과는 전혀 단절된 상태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 하루도 남편과 자식들에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떠난적이라곤 없었다..... 5. 부동한 인생종막
1979년, 옥에 12년이나 갇혀있은 왕광미는 다시금 자유를 찾았다. 이듬해에는 류소기도 억울한 안건을 시정받았다. 악몽은 지나갔다. 그같이 잔혹한 “문화대혁명”을 겪고난 왕광미가 오직 바라는 것은 이제다시는 그따위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것이였다. 왕광미는 1979년에 중국사회과학원 외사국국장을 담임해서부터 선후하여 중공 제12차대표대회대표로 당선되였고 제3기전국인대표대회대표, 제3기전국부련회집행위원, 제5기전국정협위원, 제6, 7, 8, 9기 전국정협상위였고 제10기전국정협위원, “행복공정”조직위회주임, 중직기관계생회회장 등 직을 지냈다. 동시에 그는 또 북경사범대학교우회명의회장, 고교교우해외련의회회장, 북경보인대학교우회회장을 맏기도 했다. 만년의 왕광미는 왕년의 제1부인으로 다시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넓은 흉금과 인자함은 중국의 수천수만의 젊은 후대들에게 친어머니와도 같은 따스한 인정을 가슴깊이에 심어준 것이다.
한편 강청은 어떠한가. 강청은 모택동이 죽자 참지 못하고 최고권력을 탈취하려고 버둥이쳤지만 결국은 헛짓을 하고 만것이다. 1976년 10월 6일에 그와 그녀의 3명일당은 체포되여 심판대에 올랐고 종신철장생활을 해야만 했다. 1991년 5월 14일, 악한짓을 너무도 많이 한 강청은 “중국의 백골정”이란 더러운 이름을 남긴 채 77세의 나이에 죽고말았다. 력사는 아마 그녀의 치욕을 제 남편의 기념비와 함께 모순되는 의론속에 오래오래 남길것이다.
6. 강청은 어떻게 죽었는가?
강청은 몸이 좋지 않길래 1984년 5월 4일에 유관부문에서는 그녀에게 가히 보석치료를 할 수 있다고 통지했거니와 눈에 잘 띄이지 않는 곳에다 그녀의 거처를 잡아주기까지했다. 1988년 12월 모택동의 탄신 95돐에 강청은 가정집회를 조직하겠다고 제기했다가 툇방맞았다. 강청은 평시에 모아두었던 수면제 50알을 넘겨 자살하려 시도했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여 제때에 구급을 거쳐 목숨을 건지였다. 1989년 보석치료가 결속되여 그녀는 왕광미를 가두었던 진성감옥(秦城監獄)에 다시들어갓다. 감옥에 돌아온 후 의사는 그녀가 인후암에 걸렸음을 발견하고는 수술할을 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강청이 동의하지 않았다. 수술하면 말을 더 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1989년 11월, 중공중앙은 다시 한번 강청의 보석치료를 허락했다. 그녀가 있을 곳을 고를 때 강청은 중남해에 있는 모택동의 옛저택에 보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문혁”시기에 있었던 조어대호텔의 17호동에 들게 해달라했다. 그러나 역시 툇방맞고말았다. <<강청전>>에 기재된 것을 보면 1991년 2월 15일, 북경 주선교(酒仙橋)의 주거에서 강청은 열이 오른것이 내리지 않아 공안병원에 보냈다. 일반병자와 마찬가지로 입원수속을 밟았다. 그녀가 이번에 쓴 이름은 리윤청(李潤靑)이였다. 이로 보아 그가 모택동과의 혼인을 그리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것이다. “윤”은 모택동이 전에 사용했던 이름이다. “리”는 강청의 성이고 “청”은 내내써온 이름이다. 3월 18일 강청은 열이 올랐고 체중도 내려갔다. 의사는 인후수술을 재차권했으나 그녀는 거절하면서 표독스레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무산계급전사의 수술을 조심스레하리라 믿지 않는다.” 5월 13일에 강청은 <<인민일보>>첫면에다 “력사에 기념할만한 하루”라 거칠게 쓴 글을 한토막 냈다. 25년전의 이날은 “문화대혁명”을 하던 1966년 5월 13일인데 정치국에서 회의를 열고 새로운 투쟁로선을 제정하면서 그녀를 권력이 큰 령도소조의 책임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한동안지나 강청은 참답게 썼다. “주석이여, 난 사랑해! 그대의 학생이 보러가요. 강청 씀”
이것은 그녀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5월 14일 새벽 1시 30분, 호사가 강청의 침실을 떠났다. 3시 30분에 숙직을 서는 호사가 와보니 강청은 이미 자살하여 숨이 없었다. 강청은 자기가 평시에 모아둔 손수건을 이어서 끈을 만들어 한끝은 변기우의 천장가에 있는 수도관에 매놓고 다른 한끝쪽에 오라를 만들어 제 목가지를 밀어 넣고는 마치도 뀀지에 아가미를 꿰인 물고기마냥 허공에 달린 것이다. 강청이 자살극을 논것이 여러번이다. 30년대에 당납과 싸우고는 죽는다야단쳤고 1976년에 체포되니 절망하여 죽자했고 1984년 9월에 모택동기념당에 가보겠다는 요구가 거절당하니 젓가락으로 목구멍을 쑤셔 죽자했고 1986년에는 처경에 불만하여 목긴양마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매였다가 발각되여 죽지 못했는 데 이번에는 정말 온 국민이 시원해하게 죽어버렸다.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