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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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43)
2011년 03월 29일 16시 18분  조회:2942  추천:16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43)

            개인숭배와 림표의 두꺼운 낯가죽

우매하고도 황당한 력사화면

50년대말에 형성된 개인숭배가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림표가 붙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선동해서 열광적인 “새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림표본신이 각종 공개장소에 나타날 때면 어록책이 손에서 떠나지 않고 만세소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째지는 듯한 특이한 목청으로 “네가지 위대”, “세가지 충성”, “네가지 무한”, “높이들고”, “바싹따르고”, “그대로 처리”를 웨치면서 “실제의 필요에 근거하여 배우고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느니 “빠른길을 걷는 것”이니 “매일읽어야 하고”, “어록은 외워야한다”면서 “최고봉론”, “천재론”, “수령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론”, “정신이 물질을 초과한다는 론”으로 머리를 무장해야 한다면서 령수에 충성하는 “좋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신주대지는 온통 농후한 종교기분이에 감싸이고말았던 것이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아침 저녁으로 손에 어록책을 들로 신으로 부각된 그 사람의 초상앞에 마주서서 만수무강을 빌면서 “청시”하고 “회보”했고 크고 작은 회의때마다 “붉은태양의 만수무강”을 웨치고 남녀로소가 “어록노래”를 부르고 “충성무”를 추게했던 것이다.    
한 신문은 1968년 4월 13일자 보도에 력사적인 이 화면을 생동하게 기록했다. 
   
“3월 23일 7시 30분, 위생과의 전체인원은 떠오르는 붉은태양을 맞이하면서 <<동방홍>>을 높이 불렀고 <<로삼편>>을 외우고나서는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 장엄하게 선서했다. 수술실 네벽에다는 모주석사진과 모주석어록을 걸어놓았다. 장□□가 모주석의 어록 ‘下定決心, 不怕犧牲, 排除 万難, 去爭取勝利’를 읽고나서 조용히 병상에 누웠다. 병자가 호흡하기 힘들어하자 그 장소에 있던 책임간부는 인차 모주석의 교도를 뇌였다. 
  
 ‘우리가 수요하는 것은 열렬하고도 침착한 정서, 긴장하면서도 질서있는 공작이다.’
    
그는 사람들을 고무하면서 빨리 원인을 찾아내도록했다. ....종양막때문인지 아니면 복막인지 똑똑치 않았다. 당지부서기는 즉시 모주석의 교도로 그들을 격려하였던 것이다. 천난만난이 있다해도 모택동사상만 있으면 어려울 것 없다. 그들은 끝내 복막에 문제가 생긴것을 알아내고는.... ”
    
경력이든 자격이든 다 풍부한 한 신문사의 편집은 개인숭배시기에 신문을 꾸린 정황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첫면에 모주석사진이 나올 때면 반듯이 그 면의 다른 사진들에서 총구멍이 모주석이 있는 방향으로 돌린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잘 살펴봐야 했다. 지어 ‘모주석’이라는 글자가 있을 때도 반드시 광선을 투시하여 그 반면의 똑같은 위치에 모주석을 헐뜯거나 비방하는 글귀가 없는가를 보아야 했다. ..... 후에는 아예 신문투시상을 하나 만들었다. 유리탁상 아래쪽에 전등 몇 개를 가설해놓고서는 신문이 나오면 첫면 반면 셋째면... 골고루 비춰보았다. 그래서 모주석초상이나 이름자에 그런 나쁜 글이 있는가 없는가를 검사했다. 검사는 엄격했다. 문제가 없다고 확인돼야 찍었던 것이다. 매 신문마다 다 그렇게 했다. 얼마전까지도 그런 신문판면투시기가 창고에 보관돼있었다.”
    

오늘 사람들의 눈에 그따위가 그래 생각못할 황당한 웃음꺼리가 아니고 뭐겠는가! 하지만 지난때 우리 시대에는 확실히 어쩌는 수 없이, 그것도 아주엄숙하게 그같이했던 것이다. 후세는 그것이 우매한 력사의 화폭이였음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개인숭배라는 것을!


(2)림표가 붉어진다는 건 알짜 속임수                   

한때 사람들은 림표는 알짜 “정치사기꾼”이라 했다. 그러면서 전당은 상하모두가 “정치사기꾼을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고 토론을 벌리였다. 결과 점점 더 어리벙벙해지고말았다. 따져보면 제기법자체가 맞지 않은 것 같다.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져 그 한 단락의 력사를 다시회고해 보면 그것이 다가 림표 한 사람이 놀아댄 “연극”이 아니요 모택동역시 그한테 “속히운게 아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건국이후, 50년대에 모택동은 림표를 중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군대의 중요한 지위와 작용을 고려해서였다. 모택동은 력사이래 시종 군사를 중시했는바 정권을 탈취하던 그 년대에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언녕말한바있다. 전국적의 정권을 건립한 후에는 군대가 정권을 공고히 함에 중요성을 깨달아 그는 군대는 “무산계급전정의 기둥이고 주축돌”이라한것이다. 10대원수에서 두 번째자리에 놓인 팽덕회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조국에 돌아오자 그에게 국방부부장을 시켜 군위의 사업을 장악케했던 것이다. 한데 얼마지나지 않아서 모택동은 그가 하는 사업에 대해 불만하기 시작했다. 원인인즉은 “정치를 우선할 줄 모르고 경험주의가 있으며 케케묵은 상투적인 수법밖에 쓸줄을 모른다”는 것이였다. 후에 개성이 다르고 모종의 원인으로 의견분기가 있게되니 지어는 팽덕회를 의심하면서 불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은 로산회의때 말했다. 
   
“지난해 8대2차당대회에서 말했지만 분렬에 맛설 준비를 하라고 한건 바로 너를 놓고 한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1958년 5월에 열린 8기5중전회에서 모택동은 10대원수에서 세 번째 자리에 있는, 병 때문에 구체적인 사업을 맞지 않고있었던 림표를 중공중앙부주석, 정치국상위라는 임무를 주면서 병치료를 잘하여 제3차대전에 맛설 준비를 하라고 제의했던 것이다. 
   
1959년, 로산회의때 팽덕회가 “문제”생기자 림표는 “지원병”이 되어 팽덕회를 여지없이 비평하면서 모택동을 힘껏 도왔다. 그는 팽덕회를 향해 격앙된 음성으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영웅이 될 사람은 모택동밖에 없어, 당신은 저리 썩 비키라구, 제 주장을 세우려말구, 난 무기력해졌어도 그런 야심은 없는거야.”
    
로산회의가 지나자 자칭 “야심”이 없다던 림표가 팽덕회를 제거하고 1959년 9월 17일에 국무원부총리 겸 국방부장이 되어 군권을 손에 쥐였던것이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택동은 정치우선과 계급투쟁으로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고 발전을 촉진할 궁리를 했는데 그것이 점차 주도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당내 허다한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따르지 못해”, 지도일군들지간에 생겨난 정치분기를 앞에 놓고 모택동은 제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를 반성해보지는 않고 잘못을 남에게 돌리면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는건 자기의 권위가 박약한 탓이라고 오판했다. 하기에 그는 “이 몇해간 개인숭배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여긴것이다. 그는 개인숭배를 가강히 하는 방법으로 진일보로 자기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기도했다. 그런데다가 림표가 장악하고있는 일련의 군위사업은 그 작법들이 면바로 모택동의 구미에 맞았던 것이다. 
   
1960년 12월, 림표는 군위확대회의에서 “모택동사상의 붉은기를 높이추켜들고 모택동사상을 진정으로 배우자”고 제출하면서 그것을 “결의”형식으로 전군에 관철했다. 하여 부대로부터 시작하여 전국범위에서 이른바 “活學活用”이라는 즉, 실제의 필요에 근거하여 배우고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열조를 일으킨 것이다. 이 시기에 림표는 모택동사상과 모주석저작의 일부의 말들을 갖고 강화를 자주했는데 영향이 자못컸다. 례를 들면 “최고봉론”(“모택동사상은 당대 맑스레닌주의의 최고봉”), “첩경론”(모주석저작학습은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는 첩경”이고 “만가지 리득을 보는 일”이다), “최고지시론”(“모주석저작을 우리 군의 각항사업의 최고지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배워서 활용”해야 하며 “매일 읽고 매일 사용”하며 “로삼편”은 암송해야 한다는 등등. 
   
그는 전 국민이 “개인숭배”를 하게끔  동원시킨 것이다. 그가 여론을 크게 일으키느라 실용주의를 부르짖은 통에 더더욱 거세게 생겨난 형식주의악풍은  전당과 국가에 말할 수 없는 큰 화를 입힌 것이다.
    
당내의 유지인사들은 림표의 이같은 착오적인 작법을 제지했거니와 지어는 공개적으로 비평까지 했던것이다. 전군의 정치사업을 장악하고있었던 라영환원수(羅榮桓元帥)는 60년대초에 “活學活用”이 금방나왔을 때 찬성하지 않는다고 표시했다. 
   
그는 말했다. 
   
“문제를 가지고 모주석저작을 학습한다는데 그래서는 책에서 절대 답안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력사는 앞으로 발전하고 사물은 다양성이 있는데 앞사람이 우리한테 만능약처방을 떼여주었으려니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후에 그는 또 군위회의때 림표를 앞에 놓고 제출했다.
    
“‘문제를 가지고 모주석저작을 학습해야 한다’는데 재삼 고려해봐야 한다. 이 말은 모병이 있는 것이다.” “몇마디 어록을 가지고 그래 부대를 잘 건설 할 수 있단말인가?” 
   
림표는 맛대고 대꾸를 하지 못하다가 회의가 끝난 후에야 라영환이 “문제를 가지고 학습”하는것을 반대하는건 모택동을 반대하는 것이라 했다. 
   
이 일이 중앙에 반영되여 중앙서기처는 회의를 열고 토론했는데 모두일치하게 라영환의 의견이 옳다고 찬성했다. 
   
등소평은 1975년 9월에 농촌공작회의에서 이 단락의 력사를 말했다. 
   
“림표가 모택동사상을 그모양으로 용속화하니 라영환이 먼저 동의하지 않는다고 표시하면서 모주석저작의 정신실질을 학습해야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서기처의 토론은 라영환동지의 의견을 찬동한 것이다. 후에는 또 모택동의 거기까지 올려가면서 야단쳤다. 모택동은 라영환이 자기를 반대하는건 아니라는걸 알지만 림표의 주장을 지지하여  ‘림표동지의 의견대로하라’는 지시를 내렸거니와 림표를 표양하면서 ‘부대건설에 몇가지 아주좋은 조치를 제출했다’고 말했던것이다”.
    

“좌”의 사상을 받들어올린턱에 50년대말에 “대약진”을 하여 커다란 손실을 입은것이다. 경험교훈을 총결하기 위해서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사이 당중앙은 북경에서 중앙공작확대회의를 열고 7천명넘어 참가한, 통칭 “7천인대회”라 부르는 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의 사업에 대해 직접 비평했다. 
  
모택동이 
  
 “낮에 화를 내고 밤에 극을 보니 풀리는 것이 있어서 모두들 만족스러워한다.”면서 자아비평을 했지만 내심으로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요 심지어는 비평에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칠천인대회 때 겨우참았던 화를 문화혁명에 와서야 풀게 됐다.”
    
“문혁”초기에 강청이 토로한 말이 그것을 인증하고 있다.
    

림표는 7천인대회에서 모택동의 이런 심리를 더듬어 내고는 찬가를 높이 부른 것이다. 그는 “대약진”이 조성한 큰 손실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면서 얼렁뚱땅  말했다.
    
“하긴 수입이 조금 떨어지긴했지만도 우린 그 대신 정신상  커다란 수입을 했단말이요.” 
   
그는 모택동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자고 무진 애를 썼다. 발생한 모든 곤난들이 상반대로 모두가 모택동의 지시를 제대로 따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는 영향이 아주 큰 공식하나를 내놨던 것이다.
    
“우리들의 사업이 잘 될 때는 모주석의 사상이 순리롭게 관철될 때이고 모주석의 사상이 방해를 받지 않을 때인 것이다. 만약 모주석의 의견이 존중을 받지 못하거나 혹은 큰 방해를 받을 때는 곧 탈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당의 몇십년력사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공식이 당과 혁명의 일체승리가 모택동개인의 것이거니와 모택동은 일정한 력사시기내의 정확한 방향을 대표하는 것이다. 실천경험이 더는 필요없게까지 도니 그는 영원히 정확한 진리의 화신인 것이다.”
    
모택동은 림표가 남다르게 하는 강화를 기분좋게 흠상했다.
그는 억제하기 힘든 희열에 잠겨갖고 회의에 참가한 라서경과 말했던 것이다.    
“림표동지가 강화하는 수평이 아주높다. 이런 강화를 당신이 할만한가? ”
    
라서경이 대답했다.
    
“난 못하겠습니다.” 
   
우리 당이 곤난에 직면했을 때 의례 정신이 맑아져야 하는건데 림표가 이같이 개인숭배를 계속해서 퍼뜨리고 고취하였기에 오리무중에 빠져 전당이 정상적으로 해오던 비평과 자아비평은 물론 경험교훈마저도 정확히 총결할 수 없게되였으니 그야말로 큰 장애였던 것이다. 
   
1962년 9월에 열린 중공8기10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진일보로 계급투쟁을 벼리로해야 한다는 지도사상을 제출하면서 계급투쟁은 반드시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매일 말해야한다고 했다. 이 사상은 즉시 림표의 옹호를 받으면서 그를 향응하게 했다. 
   
림표는 일관적으로 자기를 나타냈다. 
   
“나의 직업은 군사고 흥취는 정치인 것이다.” 
   
하면서 그는 군위사업을 시작한지 얼마안되여 제출했던 것이다.
    
“사람의 인소가 제일, 정치공작이 제일, 사상공작이 제일, 산사상이 제일인 것이다. 이는 우리 군의 정치사상공작의 방향이다”. “네가지 제일”의 실질은, 림표의 말대로 하면 즉 “우리는 있는 방법을 다하여 사상의 힘이 물질의 힘을 대체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물질의 힘을 초과하게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4년이후에는 또 “정치돌출”, “바로 모택동사상을 돌출히 하고 바로 계급투쟁을 틀어쥐는 것이다”, “모주석이 어떻게 말했으면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표시한것이다. “어디에서나 정치를 돌출히 해야한다. 일마다 정치를 돌출히 하고 때때로 정치를 돌출히 해야 한다”, “해마다돌출히 하고 영원히 돌출히 해야 한다”. 림표는 “정치돌출”을 표준으로 하여 간부를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정치를 돌출히” 하면 “최대의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최대의 나쁜 사람이다”, “누가 정치를 돌출히 하지 않으면 누구를 파직시켜야 한다, 그가 아무리 하늘만큼한 능력이 있다해도 파직시켜야한다”. 등등. 
   
림표가 “정치돌출”을 제출하자 아주 묘하게도 부대내부에서는 또 한차례 성이 라가인 사람의 제지를 받았다. 그는 라영환이 아니고(라영환은 1963년 12월에 별세) 군위비서장이자 총참모장인 라서경이였던 것이다. 라서경은 1965년 1월 9일 군위판공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이다.
   
 “정치사상공작을 반드시 군사훈련과 기타 각항공작에 락실해야 한다.” “만약 단순히 정치만 부르짖으면서 다른것은 잘 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마는것이다. 그러한즉 이런 정치는 아마 좋은 정치인 것이 아니라 텅빈 정치라해야 할 것이다.”
    

동년의 11월에 림표는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 올려 라서경은 “당을 반대”하고 “모주석을 반대”하며 “자기 림표를 협박하여 직위를 능력있는 자에게 물려주라한다”고 고자질했다. 무함이였다.
    
12월 2일, 모택동이 지시를 내렸다. 
   
“정치돌출을 믿지 않고 정치돌출에 변종복배하면서 한쪽으로 절충주의(기회주의)를 산포하는 자에 대해서는 모두가 경각성을 높혀야 한다.”
        
12월 8일, 중앙은 상해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라서경이 “군권을 찬탈하는 반당”죄행을 범했다했고 회의후에는 그의 총참모장직을 해제했다.
    
그러나 “정치돌출”을 놓고 벌어진 쟁론이 결속되지 않아 1966년 2월에 등소평은 전국공교(工交)회의에서 “정치를 우선하는 것을 생산에 락착해야 한다”고 표시했다. 4월에 <<인민일보>>는 주은래가 심사하고 정한 정치돌출에 관한 사론3편을 발표했는데 “정치를 업무에 락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자산계급관점”이라면서 비판받았다. 림표가 의중(意中)을 말하여 알아챈 어느 한 신문은 1966년 2월 3일부터 4월 5일사이 련속 7편이나 되는 “정치돌출”사론을 발표했다. 그중에서 “정치돌출을 다섯 번째론함”이란 문장은 집중적으로 림표의 개인숭배관점을 공개적으로 선전한것이다.
    
“모주석의 말은 수평이 제일높고 위신이 제일높으며 위력이 제일크고 구절마다 진리여서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해낸다. 모주석의 말을 꼭 굳게믿고 견결히 그대로 처리해야 한다. 모주석의 책을 읽는 일은 일반적인 독서가 아닌것이다. 일반적인 독서는 실행할 수도 있고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시는 꼭 집행해야 하는데 최고지시는 더욱 에누리없이 집행해야하는 것이다. 모주석의 저작에 나온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각방면 모두를 그대로 따라서 처리하면 되는것이다.”
    
이리하여 극히 농후한 개인숭배분위기가 이루어진것인데 그것은 실질상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충분한 여론준비를 한 것이다. 
   
림표본신은 전국에 온통 펴진 개인숭배분위기속에서 신성한 인물로 도금되여 모택동의 “가장친밀한 전우, 가장좋은 후계자”로 장엄한 당장속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에 출판한 <<림부주석어록>>, <림부주석지시>>는 편자의 말로 림표가 만들어 낸 20가지 “가장”을 평가했다. 
   
“림부주석은 모주석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고 가장좋은 학생이며 가장리상적인 계승자로서 전국인민의 존경을 받는 부통수인 것이다. 림부주석은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기를 가장높이 가장높이 가장높이 추켜들었거니와 모주석에게 가장충성하고 가장충성하고 가장충성하며 모주석을 바싹따르고 바싹따르고 바싹따르며 모주석저작학습을 제일활용하고 제일활용하고 제일활용하며 모택동사상을 제일좋게 제일좋게 제일좋게 사용한다. 림부주석은 전당이 모택동사상을 학습, 관철, 선전하고 지키는 최고전범으로서 영원히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광휘로운 방향인 것이다!”  

(3)림표가 고취한 개인숭배 3가지 구호

림표가 고취한 개인숭배구호 세가지는 “높이든다”, “돌출히 한다”, “바싹따른다” 였다. 이 세가지 구호는 개인숭배의 “정수”를 체현한 것이다. 림표가 꺾구러지자 그가 제창했던 “높이들다”, “돌출히 한다”, “바싹따른다”가 가짜고 맞지 않는것이 판명되였다. 구호본신을 비판하고 없애야 하는데 그 영향이 하도 커서 자취를 지우기는 과연 어려운 것이다.   

“고봉”에 관하여.
림표가 올라앉자부터 시작한 “모택동사상의 붉은기를 높이든다”는 구호가 기실은 입에 발린 말이였다. 그가 제창하여서 신문들은 매일 “어록”을 실었고 문장마다 “어록”을 인용했고 크고 작은 회의때마다 “어록”을 읽었으며 각종문건들은 전격으로 “어록”을 찍기까지 한 것이다. 후에는 그것이 발전하여 어떤 지방에서는 지어 물건을 팔고 전화를 칠때마저도 먼저 “어록”을 뇌이는 괴상한 현상이 생기였다. “문혁”중 대립되는 파끼리 맛서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울적에는 “어록격전”이 형편없이 격렬해졌던 것이다.    
림표가 이따위 “높이든다”는 리론을 내놓으니 열광적으로 향응하는 자가 나진 반면에 적잖은 사람의 반감을 자아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용감한 사상선행자들은 당장에서 맛대고 첨예한 비판까지 한 것이다. 례를 들면 항일전쟁시기에 혁명에 참가한 로간부 륙수란(陸秀蘭)은 아래와 같은 문장을 썻다. 
   
“모주석어록을 최고지시라면서 모주석의 말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래 모주석을 봉건황제로 만드는게 아니고 뭔가”.
    
서북공업대학의 강명량(姜明亮) 등 사람들은 1968년 4월에 중앙과 모택동에게 상서를 올려 감정을 표시했던 것이다.
    
“맑스주의는 범진리가 모두 상대적이라고 했는데.... 한 사람의 말을  구절마다 진리라 하는건 오로지 봉건사회에서 황제를 신으로 만들때만이 생기는 일이다. 황제의 말을 이른바 금구옥언(金口玉言)이라 했던것이다.”
    
이같이 의견을 제기한 사람들은 물론 참혹한 액운을 면치못했지만 그들의 사상은 찬란하여 영원히 후세를 비춰줄 것이다. 
   
이런 사료를 읽을 때면 내심의 진감을 받게 된다. 필자는 그 년대를 겪은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1971년 림표가 도망쳐 “9.13사건”이 생겨서야 한차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반성ㅡ 지난일을 돌이켜 사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림표는 어떻게 되어 “붉은기를 내들고 붉은기를 반대”하고 나와같은 수많은 사람을 완전히 “속임수에 걸려들게” 만들었는가?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누가 어찌했든간에 나 자신은 어떤 일에나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고 먼저 그것이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따져봐야한다는거다. 신앙이 과학을 떠나면 곧 미신으로 변하고마는 것이다.


“돌출”에 관하여.   
1966년 5월 18일, 림표는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저명한 광화를 하나 했다.    
“모주석이 어느날까지 살던지간에, 90살 100살이 넘더라도 우리 당의 최고수령이니 그의 삶은 우리의 행동준칙이 되는 것이다. 그 누가 그를 반대하면 전당이 일떠나 죽여버리고 전국이 일떠나 토벌해야 한다.”
    
림표의 이러한 사상에 의하여 <<인민일보>>는 1967년 11월 3일자 첫면에 <<위대한 통수 모주석의 권위를 크게 세우고 특히 세우며 모택동사상의 절대적인 권위를 크게 세우고 특히 세우자>>는 저명한 문장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리론과 력사로부터 “수령을 돌출히”하는 드높은 기세를 일으킨 것이다. 그때이미 <<당내두갈래로선투쟁사>> 자태가 나타나 력사상 오직 모택동 한사람만 정확하다고 불어대면서 기타의 수령들은 반면교원이 아니면 혁명을 했다하더라도 정확한 로선을 곁들어 안받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전부의 당사는 모택동이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기타 다른 소수의 수령인물과 투쟁한 기록이라고 했다. 이런 <<투쟁사>>의 허위성은 요근년에 공포한 대량의 사료들에서 얼마든지 료해할 수 있는것이니 장황하게 더 늘여놓지 않겠다. 여기서 림표가 당년에 골간으로 골라잡고 직접 공제했던 중요한 단위에서 어떻게 수령에 대한 맑스의 학설을 뜯어고치고는 여론을 크게 일으켜 적라라하게 “일체는 수령의 결정”이라 선전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 단위에서는 1970년 11월 3일에 수령문제에 관한 리론문장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의 이름이 <<영원히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 충성하며 목숨걸고 모주석의 최고수령의 지위를 수호하리ㅡ 수령, 정당, 정권, 계급, 군중상호관계학설의 느낌을 학습하고서>>.
    

요점은 아래와 같다. 
   
(1). 수령, 정당, 정권, 계급, 군중 다섯 개 관계에서 수령은 “군중의 령혼”이니 “무산계급수령이 혁명과 력사발전에서의 결정적작용을 승인해야 한다.”, “무산계급의 운명을 결정하고, 무산계급정당의 운명을 결정하고, 무산계급정권의 운명을 결정하고, 사회주의력사발전의 운명을 결정한다.”
          
(2). “당의 령도는 곧 모주석의 령도다”, “모주석이 우리 당의 성질을 결정하고 우리 나라의 성질을 결정하며 력사의 발전을 결정한다”, “모주석이 없으면 당이 없고 정권이 없고 무산계급로동인민의 일체가 없다”. 
   
(3). “영원히 모주석께 충성하고 목숨걸고 모주석의 최고수령지위를 수호한다. 이는 무산계급의 근본리익으로부터 수요되며 중국혁명과 세계혁명을 끝까지 하기위해서도 수요되는 것이다”. 
   
당당한 사회주의국가에서 이같이 적라라하게 “영웅이 력사를 창조한다”고 선양하고 “수령이 일체를 결정한다”고 선양했으니 그야말로 보기드믄 유심주의리론의 발작이였던 것이다. 한데 이것을 만약 근근이 림표개인의 문제로만 본다면 곤혹은 또 생기는 것이다. 림표가 끝장이 난지 5년이 지났건마도 “화국봉을 돌출히” 하는 일장의 새고조가 또 일어났거니와 그 형식이든 규모든 기분이든 다가 이전을 떼 닮았은것이였다. 그런현상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신문은 1976년 10월 29일자 문장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당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우리의 국가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우리의 군대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우리의 인민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는 집중적으로 우리의 수령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또 다른 허다허 신문, 잡지들에서 화국봉은 “강산이 영원히 변색하지 않는 믿을만한 보증”이라 했고 “화주석이 있기에 우리의 국가는 희망이 있다”고 하면서 “모주석을 열애하듯이 화주석을 열애”하고 화주석을 “무한히 신뢰”하고 “무한히 충성”하야한다고 선양했던 것이다. 
   
뒷이어서 곱잡아 출현하는 “수령개인을 돌출히”하는 력사현상은 그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님을 설명하는 바 이는 전당이 장기간내 아직도 여하히 과학적으로 수령의 작용에 대해서, 수령과 인민과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를 내릴것인가를 똑똑히 밝혀내지 않았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11기3중전회전후, 등소평이 앞장서서 “수령도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했고 로혁명가 엽검영(葉劍英)은 레닌의 사상을 거듭천명했던 것이다.
   
 “당의 수령은 하나의 집체다”, “그 어느때든 개인의 작용을 과대하지 말아야 하고 개인의 말이면 그만인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처럼 이같이 큰 집정당이 비록 그가 천재라하더라도 개인을 돌출히 하고 독단전횡한다면 꼭 착오를 범하게 되여 당사업에 엄중한 해를 끼칠 것이다.”
    
호요방은 <<철저한 유물주의자로 되자>>는 강화에서 첨예하게 제출했던것이다.
    
“우리는 개인을 인민군중의 머리우에 올려놓지 말아야 하고 개인을 력사규률밖에다 놓지 말아야 한다”
그는 또한 “개인돌출”이 가져다주는 위해성을 다음과 같이 규납했던 것이다.     

첫째, 당의 민주집중제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둘째, 근본적으로 실사구시가 되지 못하게 한다. 
셋째. 사상해방이 근본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대중의 의견에 귀를 기우리지 않고 제 의견만을 고집하면서 가장제 등 봉건전제주의를 피면하지 못하니 결국 심보나쁜자에게 리용되여 파시스주의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1980년 7월 30일, 중공중앙은 륭중히 <<“개인을 적게 선전”할 몇가지 문제지시를 견지할데 관하여>>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고도로 집중된 체제문제는 해결하게 된 것이다.

“바싹따른다”에 관하여          
본래 우리 당에는 “바싹따른다”는 제기법이 없었는데 1958년에 개별적인 간부가 “모주석을 따라가면 틀리지 않는다”했고 모택동은 즉석에서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1958년 5월 17일 8대2차회의에서 표시했던 것이다.
 “어제 어떤 동지가 말하기를 모모를 따라가면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모모라는 게 바로 나 이 모택동이다. 그 말은 고려해봐야겠다. 내가 말할 것은 따라가든 따라가지 않든 옳으면 따라가고 옳지 않으면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며 얼떨떨하게 따라가지 말고 독립적인 제 사고를 해야지 뭐나 다 따라가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한데 애석하게도 모택동의 이 정확한 사상은 개인숭배가 풍성해지면서 그 자신이 구중천에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림표가 제창한 “바싹따른다”는 구호가 붉어지기 시작해서 일종의 농후한 풍기를 형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싹따른다”는 구호가 리론상 존재하는 문제였기에 모택동은 이미 명명백백하게 말한적이 있다. 이 구호는 개인숭배가 만연 될 때에 생겨나는 것으로서 위험성이 자못 크다는건 누구나 다 잘 알고있다. 시비를 가릴줄 모르고 바람부는대로 움직이며 왁작 허장성세나 부리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형식주의 작풍, 바람이 부는데 따라 돗을 올리는 투기적인 작풍 등등이 성행할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림표는 무엇때문에 말끝마다 “바싹따른다”고 했는가?  마음속으로는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흔히 있는 계발이다. 
 

“9.13사건”후 “림표의 죄행”자료들이 적잖게 나왔는데 그중 림표와 엽군의 독서필기, 찰기따위들이다. 기묘한 글 몇단락을 뽑아보는것도 괜찮겠다. 
   

(一). “옛책략.
(1)군주는 앞에 신하는 뒤에(신이 군을 앞서서는 절대안된다).
(2)군주가 창도하면 신하는 어울려야 한다(위치가 바뀌여서도 안된다)”. “일자천금ㅡ더많아도 안되고 적게하더라도 잘해야한다. 동의, 쓸모가있다. 일각천금ㅡ시간을 다투라, 늦으면 피동이다”. 
   
림표는 당의 수령과 간부군중간의 관계를 봉건사회의 군신관계로 보고 수령의 말이면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서 맞건 틀리건간에 한마디면 다라했다. 리해되여도 집행하고 리해되지 않아도 집행해야한다면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야 할 뿐이라 했다. 이래야만이 “바싹따른다”는거다.
    
(二). “당성이란 명령에 따르는 성질을 말한다”, “민주집중ㅡ복종ㅡ규률”. 여기서 림표는 당성을 ㅡ공산당원은 숭고한 리상을 위해서라며 자각적인 헌신정신이 있어야 한다면서 외곡된 것이라도 수령과 상급의 명령이면 맹목적으로 복종야 한다는 것으로 풀이했다. 민주집중제는 근근히 복종과 규률뿐이라면서 “민주집중제의 주요한 원칙인 소수는 다수에 복종해야한다”는 것을 취소했거니와 당의 민주정신을 취소화했다.  이래야 “바싹따른다”는 거다. 
   
(三). “주석은 가장 큰 ‘군중’인바 그 혼자서도 억만사람을 당하길래 그이와 관계를 잘해야 한다. 그런다면 군중과 관계를 잘하는 것이 되고 선거표를 제일많이 얻는것으로 된다”. 이는 그의 투기적인 심리를 적라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자기처럼 해야 “바싹따른다”는 거다. 
   
(四). “견결히 좌경적인 높은 자태를 가져야한다”, “결의가 좋지 않더라도 동의하는 것이 최상의 의의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책벌레가되고만다”, “부득이할 때 떠받드는 방법을 쓸것이다. 그러다 드러날것 같으면 때려엎는다” 이 말은 림표의 량면성을 폭로하였는바 당면에서는 좋은말을 하고 뒤에서는 독수를 뻗치는 음모가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림표의 “바싹따른다”는 함의를 알수 있는것이다. 
    
림표의 이상 네가지 “바싹따른다”는 구호로부터 사람들은 그의 심태가 기본상 봉건주의 군신의 심태였고 민주를 반대한 심태였으며 개인의 득실을 따지고 원칙을 지키지 않는 투기적인 심태였다는것을 알수 있고 속심을 헤아릴 수 없는 음모가, 량면파의 심태였다는 것을 넉넉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고취한 “바싹따른다”본질이 후세사람들에게 깊은 사고를 던져주고있다.  
                   

(4) 풀지못한 수수께기
                   
림표의 생전 사후 여러해지났건만 그에 대한 수수께기는 의연히 흐릿한 안개속에 들어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흑백이 대비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하니 과연 불가사이한 일이다. 허다한 사람들의 심목중에 림표는 어느덧 “허위”, “음모”, “량면파”의 화신으로 되고말았다. 기실 림표는 천성적인 량면파가 아니였거니와 남한테 아부굴종하는 사람도 아니였던 것이다. 림표와 몇십년을 같이 사업했던 섭영진원수(葉榮臻元帥)는 건국전의 림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알건대 그가 아직은 나이가 젋었을 적에는 사상물정을 아는것이 많지 않았다”. 
       

모택동의 위사장을 지냈던 리근교(李根橋)도 말했다.
    
“내가 모택동의 신변에 있었던 기간에 림표가 모택동을 만날적에는 언제나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였다. 얼굴을 봐도 사업일을 보는 태도로 과감히 의견을 발표했거니와 심지어 당면에서 모택동에게 의견을 말하기도했다. 조금도 구속받는 티가 없었다. 모택동앞에서 과감히 말하고 쟁론하는 군사장령으로서는 팽덕회와 림표가 비교적 돌출한 것이다.”
    
이같던 림표가 왜서 손에서 “어록”이 떠나지 않고 만세를 떠나지 않으면서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하고 뒤에서는 독수를 뻗치는 량면파가 되여 개인숭배를 추동하는 급선봉으로 나섯는지 과연 참?.... 
       
등소평이 말한적이 있다.
    
“지난날 발생한 여러 가지 착오들을 보면 지도자의 사상과 작풍에 유관되기도 하지만 조직제도와 사업제도방면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은것이다. 이 방면에서 나쁜사람이 제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횡행 했기에 좋은 사람은 좋게 하려고해도 되지 않아 지어 반면으로 나간 것이다.”
    
우리 나라는 “문혁”때나 “문혁”전이나 오랜 시기내에 “권력을 과분하게 개인에게 집중시키고 소수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하는 “중앙의 권력을 고도로 집중시키는 관리제도”를 써왔기에  적잖은 지방과 단위들이 모두 가장식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기에 그들의 손에 들어간 권력은 제한을 받지 않았고 다른 사람은 명령에 따르기만해야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인신종속관계가 형성되여 군신과 부자관계, 고양이와 쥐관계로 돼버리고만 것이다.  
   
이런 지방과 단위들은 그 무슨 당내민주니 사회주의민주니 하는건 근본 운운조차 하지 못했다. 림표가 개인숭배를 대대적으로 한것이 곧바로  이런 집권체제의 력사산물로서 그 실질은 수령의 손에 틀어쥔 무한한 권력에 대한 숭배인 것이다.....
    
권력에 대한 림표의 숭배가 결국은 권력을 쥔 사람에 대한 숭배로 되어 “령도그룹은 정권”이다, “수령이 정당, 정권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불어댔던 것이다. 우리가 권력숭배각도에서 림표를 보면 그가 모택동을 숭배한것이 한방면이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모택동본신이 어떤데는 문제가 있다는것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그가 모택동을 해치려고 기도했으니 리해가 되지 않는다.   
   
림표가 고취한 “권력숭배”를 비판하는 것은 령도체제를 진일보 개혁하고 따라서 개인숭배를 근절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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