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 묻힌 비밀(31)
(1)살벌한 분위기
(2)<자료1> 오함(吳含)
(3)<자료2> 해서(海瑞)
(4)<자료3> 등척(鄧拓)
(5)삼가촌 (三家村)
(6)<자료5> 삼가촌찰기
(7)<자료6> 료말사(廖沫沙)
“그 누가 모택동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을 까부셔야 한다! 영원히 일어나지 못나게 때려부셔야 한다!”
이것은 문혁초기 홍위병들이 학술권위를 비판투쟁하면서 부르짖은 구호중 제일전형적인 증오식표어였다.
이 표어가 이끄는데 따라서 홍위병들은 모택동에게 무한히 충성하였는바 그들의 가치평가역시 모택동의 지시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홍위병들의 이런 공포적인 “홍색구호”가 뒤덮이는 바람에 지어는 중국의 전통적인 가정가치론리관념마저 전부 붕괴되여 오로지 모택동만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친부모마저도 투쟁하여 계선을 가르는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일찍 1957년후부터 모택동은 개인숭배를 반대하면 자기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여긴것이다. 1958년에 그는 성도회의때 개인숭배관점을 제출한바 있다. 1964년 가을에 쏘련의 흐루쇼브가 내려앉았을적에 미국기자 스노가 모택동에게 쏘련사람들은 지금 중국에서는 개인숭배를 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런가고 물었다. 이에 모택동은 흐루쇼브가 내려앉은건 그가 개인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중국에는 확실히 개인숭배가 있다, 개인숭배가 좀 수요된다고 대답한 것이다.
1960년부터 림표가 신(神)을 만드는 운동을 발기해서 모택동의 개인숭배를 수립했다. 로산회의 후 그는 전국적으로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조를 일으키고는 그것을 앞으로 떠밀었다. 모택동저작은 각종판본으로 나와 각지에 발행됐고 열광적으로 학습하는 고조를 일으키고는 적극분자대회를 열어 모택동사상을 신격화했거니와 모택동을 신처럼받들게 만들었던것이다.
문혁이 시작된 후 고등학교와 중학들에서 학생들이 홍위병조직을 내오고는 학교령도에 진공을 들이댓는데 그것이 거의다가 폭력으로 번지였다. 1966년 8월 1일, 모택동은 청화대학부속중학홍위병들에게 편지를 하여 그들이 때리고 짓부시고 빼앗고 붙잡아 투쟁하는 행동을 “열열히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무릇 북경이나 전국이나 문화대혁명에서 너희들이 채취한것과 같은 혁명태도에 대해 우리는 일률로 열열한 지지를 보내는바이다.”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을 접견했을 때 다음과 같이 제출했다.
“우리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하며 일체 자산계급보황파를 타도하고 요물잡귀들을 타도해야한다.”
그후부터 홍위병들이 마구잡아내고 마구투쟁하며 때리고 부수고 빼앗고 수색하고 죽이는 무도마막지한 악성사건들이 온 나라에 수없이 나타나기시작한 것이다.
며칠후, 북경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장과 선생들을 운동장에 끌어내다가 투쟁했다. 운동장에는 근 1천여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선쟁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머리에다는 종이로 만든 높은 꼬깔모자를 씌웠고 목에다는 커다란 패쪽을 걸어놓았다. 고깔모자와 패쪽에다는 붉은글씨로 이름과 죄명을 써놓았다.
홍위병사령이 한손에 붉은책 <<모택동어록>>을 쥐고 “투쟁대회”를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일제히 높이 구호를 불렀다.
“혁명에는 죄가 없고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
“일체 반동적인 것은 타도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는다.!”
“쓸지 않으면 먼지는 없어지지 않는다!”
“홍색공포만세!”
“그 누가 모택동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을 까부실테다!”
등등.
사령이 높은 목청으로 물었다.
“홍위병전사들, 동학들! 우리가 그래 이따위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보황파, 반동권위, 요물잡귀가 우리의 붉은진지를 더럽히게 그냥놔둘수있단말인가?”
1천여명의 홍위병들이 일제히 향응했다.
“놔둘 수 없다!”
사령이 계속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 가?”
운동장에는 살기에 찬 웨침이 터졌다.
“개대갈을 까부셔야한다!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때려부셔야 한다!”
일장의 종교의식과도 같은 맹세가 있은 후 잔혹한 비판투쟁이 시작되였다.
이는 그당시 홍위병들이 요물잡귀를 잡아내여 투쟁한 전형적인 한 장면인 것이다.
☆ 1963년 2월 11일, 모택동은 중앙공작회의에서 호남, 하북 등지의 사회주의교육운동경험을 총결지을 때 “계급투쟁은 틀어쥐기만 하면 효과를 본다”고 했거니와 “절대 계급투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당에 호소했다. 하여 중공은 “계급투쟁을 벼리로 한다”는 로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로선은 그냥내려오다가 중공 11기 3중전회에 이르러야 비로서 부결되였던 것이다.
〔자료 1.】 오함(吳含)
오함(1909ㅡ1969), 중국력사학가. 원명은 오춘함, 자는 진백으로서 절강성 의조현(義鳥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량호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1927년 가을에 항주절강대학에 입학했다가 1년후에 교학을 정지하니 상해오송의 중국공학에 들어가 교장 호적(胡適)을 가깝게 알게 되였다. 1930년, 연경대학의 교수 고힐강(顧頡剛)이 소개해서 연경대학도서관에 들어가 중일문편고부관원이 되였다. 1931년초에 <<호응린년보>>를 써냈다. 오함은 당시 국립북경대학의 교수를 지내고있었던 호적의 천거를 받아 국립청화대학사학계의 아르바이트학생이 되면서 명사(明史)를 전공하기 시작했다. 대학기간 그느 40여편의 문장을 썼는데 <<호유용당안고>>, << <김병매>의 저작시대와 그 배경>>, <<명대의 농민>> 등 문장들은 당시 사학계명인들의 흥미를 끌었다. 오함은 대학졸업 후 한때 청화대학에서 명사강의 교편을 잡기도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폭발하자 그는 초청을 받고 운남대학에 가 교수로 사업했고 후에 2년간 남련대학에 가 교편을 잡기도했다. 그러다가 차츰 항일민주운동에 몸을 잠그기 시작했던것이다.
1943년 7월, 중국민주동맹에 가입. 이 기간에 력사잡문을 쓰면서 국민당의 암흑한 통치를 폭로하는 글도 썼다.
1946년 8월, 북평에 돌아와 의연히 청화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북평민맹의 주임위원 사업을 맡았다.
북평이 해방되자 오함은 부군대표(副軍代表)로 북경대학, 청화대학을 접관하는 일을 했고 청화대학교무위원회부주임, 력사계주임 등 직무를 맡았다.
1949년후 북경시부시장,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위원, 북경시력사학회회장 등 직무를 맡았다. 력사보급사업에 커다란 심혈을 기우린것이다.
195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59년 9월, <<해서를 론함>>,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 등 문장을 발표하여 과감히 바른말을 하는 정신을 적극제창했다. 1960년에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써냈다. 그후 오함은 등척, 료말사와 함께 오남성(吳南星)이라는 필명으로 <<전선>>잡지의 <<삼가촌찰기>>잡문전란에다 글을 발표했다. 그 전란은 정의광명과 국가시국의 병집을 드러내는 것을 종지로 한 것이였다.
1965년, 그의 대표작인 <<주원장전>> 제4차수개고를 출판했다. 이 책은 력사유물주의관점을 응용하여 쓴 것인데 학술적가치가 비교적 높다.
1965년, 11월, 요문원이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을 발표하여 오함의 <<해서의 파직>>을 반당반사회주의적인 “독초”라 했거니와 “팽덕회를 위해 번안한것”이라느니 “모주석을 공격했다.”느니 “반당반사회주의”라느니 제멋대로 무함했다. 그리고 그에잇따라서 <<삼가촌찰기>>도 비판을 받았는데 후에는 또 그에게 “반역자” “특무”라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뒤집어씌우기까지한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에 오함은 정신상에서나 육체상에서나 다 참혹하게 박해를 받다가 1968년 3월에 체포되여 옥에 같히웠고 1969년 10월 11일에 시달림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말았다. 그의 처 원진(袁震)은 박해를 받다가 남편먼저 1969년 3월 18일에 죽었고 양딸 오소언(吳小彦)역시 1976년 9월 23일에 감옥에서 자살하고말았다.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후에야 오함의 원안은 평판받아 억울한 루명을 깨끗이 씻을 수 있게되였던것이다.
오함이 쓴 경극 <<해서의 파직>>은 1961년 1월, <<북경문예>>에 발표됐다. 극본은 응천십부순무로 추임된 해서가 한가로이 지내는 재상 서계와의 투쟁이야기를 묘사하였다.
서계의 아들 서영은 권력을 믿고 백성들의 땅을 독점하고 민녀를 랍치하며 관청에 뢰물을 먹이고 빈고농민 조옥산을 때려죽이는 등 억울한 소송안건을 빚어낸다. 해서는 추임되자 민간의 정황을 시찰했고 소송한 안건들을 명철하게 처리한다. 사람을 때려죽인 서영과 화형현지현 왕명부를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했고 기한을 정해놓고 관리들이 점한 백성들의 땅을 도루내놓게끔 명령했다.
해서의 이같은 과감한 처리는 서계를 대단히 노엽혔다. 서계는 조정에 있는 관리와 태감에게 뢰물을 먹이고 가정황제에게 해서를 무함하였다. 가정황제는 즉시 해서의 관직을 파직시킨다.
그러나 해서는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순무가 추임되여 올 무렵에 의연히 선포한대로 서영과 탐관을 사형에 처했다. 서계는 기혼하여 땅에 넘어졌고 일을 마친 해서는 름름히 관청을 나온다.
극본은 이렇게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고 굴함없이 공정하게 탐관과 용속한 관리들을 처리하는 해서의 강직한 정신을 노래하였다.
극본은 발표되자 사학계와 희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창조적인 사업은 두말할 것 없이 사회주의문화예술을 발전시키는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기여한 것이다.
【자료 2.】 해서(海瑞)
해서는 중국의 력사상 저명한 청관이다.
명조(明朝)는 중국력사상 조정이 가장 혼란했던 시기의 하나였는바 간신과 환관들이 조정을 어지렵혀 혼관(昏官)과 탐관(貪官)이 수없이 많았다. 해서가 본래는 순안현(淳安縣)의 구품교유(九品敎諭)로서 일개 현령(縣令)에 불과했지만 원칙을 견지하고 아부굴종할 줄을 몰랐으며 일을 처리함에 언제나 공평한 원칙을 취했다. 해서는 후에 호부운남사주사를 지내내게되니 정권중심에 접촉하게 되엿고 조정이 혼란하고 국고가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그는 토지를 자세히 측량하고 억울한 안건과 가짜안건, 틀린 안건들을 고치였으며 탐관오리를 타격하여 민심을 몹시 얻었다. 따라서 또한 적지 않은 관리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해서는 가정45년(1566년)에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려 세종에게 도중문(陶仲文)같은 잡부의 무술을 믿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황제로서 생활이 사치하고 조정의 일을 제대로 해내지 않고서야 어디 말이되느냐고 비평했다.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냐, 나는 상주왕이 아니야!”
가정황제는 해서의 상소를 읽고나서 대노하여 상소를 바닥에다 집어 던지면서 좌우에 명령했다.
“그를 당장 붙잡아들이거라, 도망치기 전에!”
옆에 있던 환관 황금(黃錦)이 그에게 아뢰였다.
“듣자니 그는 상소를 올리면 죽을 죄를 진다는 것을 알고 미리 관채를 사놓고는 처자와 리별하고 어린 노복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달아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제는 듣더니 입을 다물고 묵묵했다. 한동안 지나 상소서를 다시보 고 또 다시보고는 탄식했다. 병을 앓고있는 몸이라 기쁨이란 도무지 없고 심정이 우울하기만 했던 그는 각신 서계력(徐階力)을 불러 제위를 황태자에게 선양할 문제를 의논하면서 말했다.
“해서가 한 말이 모두 맞는거요. 짐이 오랬동안 병이 있었으니 어찌 조정의 일을 제대로 봤겠는가. 짐은 확실히 근신치 못해 지금은 몸에 병밖에 없는거네. 짐이 만약 별전의정을 제대로 했다면야 어찌 그한테서 이따위 꾸지람을 듣는 욕을 보겠는가?”
그러고는 해서를 당장잡아다 가두라했다.
해서는 형부(刑部)에 넘겨졌다. 어명에 의한 것이니 죽일 죄로 치부하자는 것이였다. 재상 서계력은 해서를 구하려했고 황광승(黃光升)도 아들이 아버지를 꾸짖은 셈 치자면서 죄를 경감해서 해서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서 지내에 했다. 그러는 사이 그해의 12월에 세종 가경황제가 붕어하고 목종(穆宗)이 즉위했다. 해서는 마침내 풀려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해서는 출옥하자 원관직을 회복했거니와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병부(兵部)로 임명되였다. .....
해서는 아들이 없었다. 그가 림종 할 때 남경도찰원첨도어사(南京都察院僉都御史) 왕용급(王用汲)이 나서서 돌봐주었는데 가장집물이란 있다는 것이 갈포(葛布)로 만든 휘장과 허름한 죽기(竹器)뿐이였으니 어떤것은 가난한 문인도 쓰려하지 않을 것이였다. 해서가 죽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자원적으로 돈을 내여 그의 상사를 치르었다. 그가 죽은 소식은 재빨리 멀리까지 전해졌다. 남경백성들은 철시를 하면서까지 그의 장례에 참례했다. 해서의 령구를 배에 실어 고향에 운구하는데 흰옷에 흰모자를 쓴 백성들이 강연안을 따라 늘어선것이 백리나 되였고 하늘을 메우듯 울리는 곡성이 끊지를 않았다고 <<明史>>에 기재되여 있다.
〔자료 3.】 등척(鄧拓)
등척(1912ㅡ1966). 신문가, 정론가, 원명 등자건(鄧子健), 복건 민현(오늘의 복주시구) 죽서(竹嶼)사람. 아버지 등홍자(鄧鴻子)는 거인출신이였다. 등척은 일찍 사회과학가련맹과 상해반제대동맹구 당단서기, 중공법남구위선전간사, 선전부장과 남시구공위서기 등을 지냈다. 저작으로 <<등척산문>>, <<등척문집>>, <<등척시선>>, <<연산야화>> 등이 있다.
민국 15년(1926년), 등척은 복건성립제1고중을 다녔다. 민국 17년, 박의릉(博衣凌)등과 “야초사”를 조직해 자체로 간물 “야초”를 꾸렸다. 민국18년, 상해광화대학사회경제계에 입학. 이듬해에 중국좌익과학가련맹에 가입했고 중국공산당에 참가했다. 그 이듬해 가을에 상해법정학원에 전학하여 상해과학가련맹과 상해반제대동맹구 당단서기, 중공법남구위선전간사, 선전부장과 남시구고위서기 등 직을 지냈다. 민국 21년, 상해시에서 열린 “광주폭동” 5주년기념시위에서 체포되였다가 이듬해에 보석출옥했다. 그해 겨울 “복건사변”에 참가했고 “인민혁명정부”문화위원회, 외교부직무를 맡았었다. “민변”이 실패하자 상해로 도망가 하남대학사회경제계에 들어가 공부했다. 민국26년 6월에 저작 <<中國救荒史>>를 출판했다. 그해 여름에 다시체포되였다가 “七七사변”후에 풀려나왔다. 그해 9월에 오대산항일근거지에 들어갔다. 선후 진찰기중앙국선전부 부부장, 진찰기일보사 사장 겸 총편집을 지냈으며 신화사진찰기분사 사장, 진찰기문련주석, 중공중앙정책연구실경제조 조장 등 직을 맡았었다. 등척은 신문대오를 이끌고 태항산으로 들어갔는데 총편집이자 지휘원이였다. 중국공산당성립21주년을 기념할 때 그는 <<진찰기일보>>에다 <<7.1을 기념하여 전당은 모택동주의를 학습하고 장악하자>>라는 토론을 실었는데 중공당사에서는 처음으로 모택동사상을 계통적으로 론술한 글이였다.
동년 3월에 정일봉(丁一鳳)과 결혼했다.
민국 33년 5월 <<모택동선집>>(진찰기판) 5권본을 편집출판했다. 그것이 중국혁명출판사상 처음으로 나온 <<모택동선집>>이였다.
북평이 평화적으로 해방되자 등척은 중공북경시위정책연구실 주임, 선전부장직을 맡았다.
1949년 가을, 인민일보사 사장겸 총편집을 맡았다. 그해의 겨울, 북경대학법학계 겸직교수로 초빙되였다.
1955년, 중국과학원철학사회과학학부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58년, 인민일보사를 떠나 중공북경시위서기처서기를 지내면서 사상문화전선의 사업을 맡고 북경시위의 리론간물인 <<전선>>을 꾸리였다.
1959년, 중국력사박물관 건관령도소조조장을 겸해 맡고 <<중국력사의 몇가지 문제를 론함>>을 출판했다.
1960년, 중공화북국서기처부서기를 겸했다.
등척은 중국공산당 제8차전국대표대회대표였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대표였으며 제1, 2, 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였고 중화전국신문공작자협회 주석이다
60년대초, 등척은 <<북경만보>>의 요구에 응해 <<연산야화>>전란에 잡문을 써서 내기 시작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오함, 료말사와 함께 <<전선>>잡지에도 <<삼가촌찰기>> 잡문을 내기 시작했다.
1961년 3월 9일부터 1962년 9월 2일까지 등척은 짧디짧은 일년반사이 <<북경만보>>의 <<연산야화>>전란에다 152편의 잡문을 발표했다.
1961년부터 1964년 까지 자기가 장악하고있던 중공북경시위기관지인 <<전선>>에다 <<3가촌찰기>>전란을 꾸리고는 오함, 료말사와 합작하여 오남성이라는 공동의 필명으로 잡문수필을 발표했는데 그중 18편을 그가 쓴것이다. 그런 잡문들은 다가 “대약진”후 몇천만이 굶어죽는 배경속에서 발표한 것으로서 현실을 겨눈것이였기에 정곡을 찌르는 데가 있었다. 당시 사회의 병집을 실랄하게 풍자했던 것이다.
병이란 감출수록 치료하기 어렵거니와 결국은죽음에로 몰아가는 것이다. 병집을 찾아 텃뜨리고 부당한 것을 풍자하는것은 옳은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한데 그런 글들이 다가 “독초”라며 비판받았다.
등척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부너 이른바 “삼가촌집단”의 큰 우두머리라 몰려 모진 박해를 받다가 1966년 5월 18일에 원통하게 죽었다.
1979년 2월에야 평판하여 억울한 루명을 깨끗이 씻고 명예를 회복하게 되였다. 그의 말과 같이 력사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등척의 재난경과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문회보>>는 요문원이 쓴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이란 글을 발표했다. 문장은 지식계를 겨누고 만들어 낸 것이지만 정계에 미친 진동이 매우컸던 것이다. 진동을 먼저받은것은 당연히 북경시위였다. 북경시위는 이 문장에 대해 반드시 태도를 표시해야했다. 그것은 이 문장을 찬성하느냐 하지 않느냐, 문장을 전재하느냐 하지 않는냐 하는 것이였다.
요문원의 문장이 나온 그날 <<북경일보>>사 사장 범근(範瑾)은 당시 <<북경일보>>의 관리사업을 책임지고있는 시위서기 정천상(鄭天翔)에게 전화로 요문원의 문장을 전재하라는가 하지 말라는가 청시했다. 정천상은 총망히 대수훑어보고나서 전화로 그녀보고 다음날에 전재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한데 이틑날 <<북경일보>>는 요문원의 문장을 내지 않았다. 하여 정천상은 범근에게 전화로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등척동지가 싣는것을 찬성안해요, 경솔히 싣지 말래요, 팽서기한테 청시해보겠대요.”
그때 팽진은 외출해서 북경에 있지 않았다.
등척은 당시 의식형태사업을 맡고있었지만 신문은 관리하지 않고 전천상이 <<북경일보>>를 관리했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의식형태를 맡지 않은거나 다름이 없었다. 분공이 이렇게 된 것은 등척이 모택동한테 신문을 “서생이 꾸린다”다느니 “죽은 사람이 꾸린다”느니 하는 비평을 듣고 <<인민일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인민일보>>는 그가 10년간 심혈을 다해 꾸려온 사상진지였다.
등척이 거기서 나오게 된 리유와 경과는 간단히 이러했다.
1957년 초, 후에는 “음모”로 인정된 대명대방운동(大鳴大放運動)이 일어나서 등척이 장악하고있었던 <<인민일보>>는 신문사내의 일부사람이 대명대방의 물결에 말려드는 것을 저지했거니와 대명대방을 찬동하지 않는 문장까기 발표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이 일을 알자 노발대발했다. 4월 10일, 그는 중남해에서 <<인민일보>>의 편위들을 만났을 때 등척이 회보하니 여러번이나 말을 꺾어놓으면서 격한 음성으로 “이전에 내가 너보고 서생이 신문을 꾸린다구했지, 아니야, 죽은 사람이 신문을 꾸린다구해야겠다.”하고 꾸짖고는 당면에서 <<인민일보>>의 몇몇 부총편은 대체 뭘하길래 등척을 반란하지 않는가고 책망했거니와 지어는 30살밖에 안되는 왕약수(王若水)를 총편으로 시켰다.
모택동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정면으로 등척을 욕했던 것이다.
“넌 한원제같구나, 우유부단하는 꼴을 보니. 네가 황제질을 했다가는 나라를 다 망쳐먹고말겠다!”
등척은 사직하겠다고 제출하면서 언영부터 그럴 생각이였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 했다.
모택동이 그의 말을 중둥잘라버렸다.
“난 너의 진심을 믿지 않아! 너는 그저 차가 드나드는거나 알면서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지내는거야.” (<<새로발견된 모택동>> 하책. 529페지)
등척이 <<인민일보>>를 떠난 후였다. 하루는 왕약수와 다른 한 사람이 그를 보러 갔는데 등척은 1957년에 모택동께 비평받은 일을 늘 마음에 두고있으면서 격동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아무때건 력사가 결론을 내릴것이다!”
등척은 욕을 먹은 그때부터 모택동의 신임을 잃어 끝내 <<인민일보>>를 떠나고 만 것이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거니와 자기가 “반우파”때 <<인민일보>>의 처리를 잘한것을 자랑스레 여기기까지 했다.
“그때 안병부동하기를 참 잘했지, 안그랬더면 신문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착오를 범해 우파로 되었을 지 모른다.”
그의 말이였다.
등척은 중남해에서 욕을 먹은 직후인 1957년 5월에 <<인민일보>>에다 잡문한편을 발표했는데 제목이 <<“용인정치”를 버리자>>였다.
문장은 첫머리를 이렇게 뗏다.
“최근에 발생하는 어떤 일을 보고서 나는 갑자기 한가지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당조의 육상선(陸象先)의 이른바 ‘천하가 본래 아무렇지도않은데 용인이 스스로 어지럽힌다.’라는 것이다. 과연그렇다. 우리의 어떤 동지는 왜서인지 매일 바삐돌아치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어내고있다. 그들은 무어나 시름을 놓지 못하고 틀어쥐려 하는데 틀어쥐여도 이만저만이 아니게 꽉 틀어쥔다.”
그는 지적했다.
“무릇 주관용망에서 나온것이라면 표면상 아무리 좋아보여도 공명심일 뿐이지 실제효과는 모자라는 정치활동으로서 그 실질은 ‘용인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어서 륙유(陸游)의 시구를 빌어 “용인정치”와 “오진을 잘하는 용의”를 같게 취급하면서 매일 이것도 시름놓지 못하겠다 저것도 시름놓지 못하겠다 하고 웨치는 사람의 쓸데없는 걱정을 비판했다.
증언수(曾彦修)가 말한것과 같이 “등척은 무조건적인 ‘천왕성명(天王聖明)’정치야말로 ‘용인정치’라고 했다.” “그의 눈에는 모든 주관주의, 세상에 제밖에 없다고 안하무인하는 기재(奇才)가 기실은 진정한 용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등척문선>> 3권, 486페지)
화살을 어디에 견주었는가는 빤한 것이였다. 모택동이 이 문장을 보고 좋아할리 있겠는가? 이상할 것 없이 이 문장이 발표되자 호교목이 인차찾아와서 핍박하기에 등척은 하는 수 없이 검토서를 썼던 것이다.
이 일을 등척은 유서에다도 밝히였다.
그는 오랜 접촉에 모택동을 알아보았고 내심심처로부터 그에 대한 견해가 서고있었던 것이다.
등척역시 모택동을 당내 소수가 되는 중요한 간부중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가 한번은 호적위(胡績僞)를 청해 함께 담석사에 가 이렇게 속심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모택동 이 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많아 제가 전에 한 말도 모르쇠를 놓으면서 부인하는 것이다.”
(<<새로발견된 모택동>> 하책, 540ㅡ541 페지 )
북경시위는 등척에게 시끄러움을 주지 말자는데서 신문을 떼여 정천상에게 맡겨 관리하게 한 것이다.
등척이 요문원의 문장을 전재하는걸 동의하지 않은데는 그로서의 도리가 있었던겄이다. 모택동이 오함을 비평하라고 하자 팽진은 이 일을 시위에 내놓고 토론했다. 시위의 령도들은 다가 모택동의 지시기는 하지만 팽진을 포함하여 오함을 비평하자니 세가지 심리장애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오함이란 이 사람은 정직하고 일관적으로 당에 충성하며 사회주의사업에 충성하고 정치상 믿을만한 것이다.
둘째는 오함은 명사전문가이자 교수인 것이다. 그가 구사회의 지식분자니 학술관점상에 틀린것이 있다면 비판할 수 있겠지만 정치상 전반부정한다는 것은 접수할 수 없는 것이였다.
셋째는 중앙에서 전에 곽말약, 범문란, 모순, 전백찬, 오함을 보호해야한다고 선포한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름을 찍어 비판하라니? 적어도 중앙문혁5인령도소조거나 중선부에 보고하여 비준을 받아야 할 일이였다. 한데 요문원의 문장부터 우선 받아야 할 비준을 받지 않은 것이다.
요문원이 <<해서의 파직>>을 평하여 발표한 것이 실상은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기위해 꾸며낸 하나의 중대한 전략부서였던 것이다. 오함에게 첫칼을 대여 “삼가촌”을 건드리고 화살을 북경시위에 돌려 팽진을 꺾꾸린다면 가장 좋은 돌파구가 되는 것이다. 등척이나 오함이나 다 <<삼가촌찰기>>의 작자들인 것 만큼 오함을 잡아내면 자연히 등척도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강청과 장춘교가 설계한 일정표에는 등척에 대한 비판이나 오함에 대한 비판이나 거의 같은 시각으로 되어있었다.
요문원이 <<해서의 파직>>비평을 발표한 1965년 11월 10일부터 1966년 1월 5일 등척이 사업을 정지하고 검사하기 시작하기까지 사이거리가 불과 55일밖에 되지 않는다. 짧은시간이였다. 등척이 한 일 모든 것이 10년동란의 서막을 열기위한 리유를 꾸미는데 리용되였던 것이다.
등척은 무원칙적인 정치비판이 발광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사이 연설도 했고 사작조를 조직하여 학술비판문장을 쓰게도 했으며 그 자신도 “향양생”이란 문장을 써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같은 노력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량자간 모순을 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와 팽진에게 죄를 들씨우는 구실로밖에 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1966년 5월8일, 5월10일, 5월14일, 5월16일 선후하여 요문원, 척본우 등이 등척을 무함하는 비판문장을 련속발표하였는데 그들은 등척을 “반당반사회주의”두목이라며 터무니없이 날조하고 악독하게 중상모략했다. “등척이 어떤 사람인가? 이제는 밝혀졌는데 그는 반역자였다.”
등척은 자기를 무함하여 죽음에 몰아넣는것은 어떤자가 정치목적을 실현하기위해 놀아대는거라 짐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문원이나 척본우나 이같은 악세력을 제 힘으로는 당해낼 방법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등척은 “5.16통지”가 통과되여 이틀만인 저녁켠이 아니면 사흗날 새벽에 죽음으로써 항쟁을 결심한 것이다.
그전에 그는 팽진, 류인(劉仁)과 시위에다 길게 유서를 썼던 것이다. 한데 이때 팽진은 언녕 비판을 받고있었거니와 지어 5.16통지가 나오는 날에는 자유마저 박탈당하는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등척의 그 유서는 그가 그 두사람과 시위에 대한 믿음을 표시한 것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자기가 절때 “당내에 섞여들어와 적극적인체 위장하여 당과 인민의 신임을 편취”한것은 절대아니라고 했다. 한편 그러면서 그는 그따위 사람잡이를 하는 “반당반사회주의”죄명 따위가 결국은 “어떤 성질”이라는 것과 “아무때든 밝혀질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성실하고도 진진하게 썼던 것이다.
“나의 한 마음 영원히 경애하는 당을 따르고 경애하는 모주석을 따르리라.”
【자료 4.】 삼가촌 (三家村)
옛적 위(魏)와 진(晋)이 교체되던 시절에 초작(焦作)은 수도와 가까왔다. 력사기재에 보면 여기는 자고로 푸르른 참대와 실개천이 많아 옛모습이 이구한데다 술이 좋아 이름이 났거니와 진위의 풍격이 죽림과 어울렸다고 한다.
죽림질현(竹林七賢)때의 술문화는 더더욱 온 초작의 인문력사에 독특한 풍채로 한페지를 장식한 것이다.
검술로 몸단련을 즐기였던 박학다재한 혜강(嵇康)이 장기적으로 초가(焦家), 마가(馬家), 백가(白家) 세집이 사는 부근의 죽림에 자리잡고 살면서부터 집앞에 있는 수양버들아래서 향수와 함께 몸단련을 하면서 소일거리로 현명한 도리를 론하고 상담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그로노라니 산동에서 여안이가 역시 혜강을 숭배하여 여기에 이사를 와 자리잡게 되니 후세사람들은 여기를 삼가촌(三家村)이라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 것이다.
삼가촌근처에 간소한 술집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황로주점이였다. 주점주인 황씨가 고은 술은 맛이 감미롭고 온화해 먹기좋았다. 그들 셋은 매일 이 주점에 와 술을 마시였다.
“세 술꾼 하루도 빼놓을 세라 꼭 마셨다네,
술마시는 것을 덕으로 삼았던 모양이지,
문드러지게 취해야 돌아갔으니.”
성품이 소탈한 유영이 역시 이름있는 술꾼이였는데 혜강이 즐겨한 황로주점의 술을 세상이 녹두알만하게 보일 때까지 마시고는 대취하여 기분이 내키는대로 중얼댄 것이 천고에 전해지는 <<주덕송(酒德頌)>>이다. 그때로부터 이곳의 술을 “삼가촌술”이라 하여 이름이 나게 된 것이고 현인들이 모이고 모이다보니 어느덧 일곱이나 되여 “죽림7현”의 무리를 이룬것이고 그것이 드디여는 세상에 이름까지 남기게 된 것이다.
죽림칠현은 다가 허황하고 막막하여 종잡을 수 없는 사상으로 백성을 통치하는 사마조정(司馬朝廷)에 불만을 품었다. 혜강은 조정과 배합하지 않는다 하여 피살되였고 왕융과 산도는 관리로 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연회를 베풀어 흥이도도할 때 흩어지고말았다. 하지만 죽림칠현의 사상은 사라진 것이 아니였다.
“삼가촌”이름 석자만도 애틑한 정회를 자아내는 것이다.
등척, 오함, 료말사 이들 당대의 학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가? 옛이야기지만 삼가촌의 야화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은 자못 컷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죽림칠현ㅡ 진대의 로장(老莊)을 숭상하여 죽림에 모여 청담(淸談)을 일삼았던 산도(山濤), 완적(玩籍), 혜강(嵇康), 상수(尙秀), 유영(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등 일곱학자.)
【자료 5.】 삼가촌찰기
1961년 9월에 중공북경시위기관간물인 <<전선>>잡지는 “간물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 “기분을 활기롭게 하며”, “질량을 제고하기 위하여” 새로운 전란을 하나 설치했는데 그것이 <<삼가촌찰기>>였다. 이 전란을 꾸리면서 <<전선>>잡지는 북경시위서기처서기인 등척(鄧拓), 북경시부시장 오함(吳唅), 북경시통전부부장 료말사(廖沫沙)를 청하였는데 세사람은 매편 1천자좌우로 되게 돌아가면서 글을 써서 매기마다 한편씩 내기로 했다. 그들은 공동히 한가지 필명을 쓰기로 했는데 오함이 오(吳)자를 내놓고 등척이 남(南)자(필명 “馬南邨”)를 내놓았으며 료말사가 “星”자(필명 “繁星”)를 내놓아 오남성(吳南星)이라는 필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1961년 10월부터 1964년 7월에 이르기까지 “삼가촌찰기”는 도합 60편이 넘는 문장을 발표했다. 이 문장들은 다가 옛것을 빌어 오늘을 론하고 하늘을 거들어 땅을 말하는 식으로 사상수양을 담론하고 예술을 흠상하게 하였는데 어떤 문장은 독자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했다. 그중 어떤 문장은 사회생활의 불량한 현상을 비평한 것도 있고 병집을 들춰내여 통격한것도 있다. 그런데 이런 비평과 통격이 후에는 다가 “조직적인 보취에 따라”서 한 정치행위였다고 비판받았다.
1966년 5월에 강청의 책동으로 <<반당반사회주의검은선에 향해 불질하자>>, <<눈을 똑바로뜨고 진가를 가려내자>>와 <<“삼가촌”을 평함>>등 문장이 조작되였는데 다가 “삼가촌찰기”를 비판하는 것들이였다. 그 문장들은 “삼가촌찰기”전란은 “반당반사회주의적인 대독초”, “지휘가 있고 조직이 있으며 계획과 목적이 있게 자본주의를 복벽하고 무산계급전정을 뒤엎기 위한 여론준비를 한 것이다”고 했다.
문장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런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북경시당정계통이 뒷심이라 느끼게끔 하였다. 누구든 비판의 화살이 사실은 그쪽을 향해 겨눈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삼가촌은 “반당집단”으로 몰리우기 시작했다. 등척은 이 “검은 점을 운전하는 총책”이고 오함은 급선봉으로 인정되였던 것이다.
“삼가촌찰기”비판이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돌파구였다. 하여 마침내는 북경시위가 붕괴되였고 등척과 오함의 “죄”는 부단히 승급하여 나중에 죽음에로 몰아간 것이다. 그뒤에 잇따른 정치변동은 드디여 류소기, 등소평을 내리떨구는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전국각지에서 크고 작은 “삼가촌”, “사가점”을 들춰내는 물결이 일었고 투쟁화살은 당정군의 령도간부와 문예, 리론, 신문계와 출판계의 지식분자들의 몸에 돌리였다. “삼가촌”, “삼가촌찰기”는 다가 “반당반사회주의검은선”의 대병사로 되어 널리 류행되면서 공포기분을 한껏 자아냈다.
【자료 6.】료말사 (廖沫沙)
료말사(1907ㅡ1990), 잡문가. 원명은 료가권(廖家權). 필명은 야용(埜容), 야용(野容), 달오(達伍), 웅비(熊飛), 문벽(聞璧), 번성(繁星)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많다. 호남 장사사람이다.
료말사는 학생시절에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일찍 호남학생련합회 비서간사를 맡았었다. 1927년에 상해에 가 예술대학문학계에 방청생이 되었고 1928년에 무한에 가 <<혁명군일보>>부간편집을 지내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단호중구서업지부서기, 단호중구위선전부장을 지냈다. 1932년, 당조직의 파견을 받아 <<원동일보>>편집으로 되면서 잡문을 쓰기시작했다. 그는 1930년부터 1934년간에 세차례나 체포되였지만 시종 견정불굴하게 공산당원의 지조를 지키였다.
1937년에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자 전한(田漢), 양한생(陽翰笙), 원목지(袁牧之) 등과 함께 무한에서 <<항전희극>>간물을 꾸리였고 1938년에는 전한이 호남에서 꾸린 <<항전일보>> 편집사업을 하다가 1939년에 곽말약(郭沫若), 하연(夏衍)이 등이 계림에서 <<구망일보>>를 꾸리니 거기에 가서 편집사업을 했다. 1941년 “완남사변”후 료말사는 향항에 가서 <<화상보>>만보의 편집부주임을 지내였는데 태평양전쟁이 발생하자 <<화상보>>는 사정에 의해 그만 정간하고말았다. 이듬해에 그는 중경에 와서 <<신화일보>>의 편집부주임을 지냈다.
항일전쟁승리후에 료말사는 지시를 받고 향항에 조동되여 <<화상보>>를 복간하고 부총편 겸 주필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중공향항오문공작위원회위원직에다 보위서기(報委書記)를 겸해맡았다. 1948년에 향항신민주출판사총편집이 되었다.
1949년 6월, 지시를 받고 북평(북경)에 와 선후하여 시위위원, 선전부장, 교육부장, 통전부장, 시정협부주석, 전국정협위원 등 직을 맡았다.
료말사는 장기간 문자사업을 했고 지도사업을 한 후에도 필을 놓지 않아 <<료말사전집>> 다섯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료말사는 학생시절부터 문학에 애착을 가져 생동활발하고 풍격이 있는 잡문들을 써냈다. 한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문화대혁명”에 고초를 겪었다. 그는 글쓸 권리마저 빼앗겼지만 <<교대자료>>를 익살스럽고도 장중한 풍취로 써서 전안조 사람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안조: ‘통화팽창’이 생겼나이다. 원래는 5행밖에 쓰려하지 않았는데 그만 20행이나 되었나이다. 게다가 몇단락 크게 빼놓은건 베끼지도 않았군요. 어떻게 할가요? 헤아려 단정하기 바랍니다. 한데 전문은 보존해야겠습니다. 내 사상을 폭로한것이니 령도가 똑똑히 알아야하니까요. 운동에 대한 태도를 재다시금 흠상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같이 미미한 존재가 다 비판(점화)대상이 되어 몸소 이 위대한 력사의 성대한 활동을 보게되니 고통이 적지 않습니다만은 ‘영광’이라 생각하니 기쁜것입니다.”
등척과 오함은 죽음으로 항쟁했고 요말사는 8년간 옥고를 치르고나와 3년간 림장에서 로개를 하다가 1979년에야 평판받고 설욕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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