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 묻힌 비밀(34)
작가 양삭의 죽음
양삭(陽朔ㅡ1913ㅡ1968), 본명은 양육진(陽毓瑨), 산동성 봉래현사람이다. 현대저명한 소설가이며 산문가이다. 항일전쟁시기에 자그마한 통신과 중, 단편소설을 썼다. 해방전쟁시기 신화사특파기자를 지냈고 항미원조시기에 우수한 중편소설 <<삼천리강산>>을 썼다. 해방후 중국작가협회 외국문학위원회주임, 세계평화보위대회당조위원을 지내면서 산문을 많이 썼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양삭은 중국작가협회내에서 생겨난 반란자들의 중점투쟁대상이 되었다. 1968년 7월말에 양삭은 모택동에게 상서를 올려 령도를 만나게해달라고 제기했으나 번번이 반란자들에게 제지당했다.
8월 3일 그는 반란파손에 박해받아 죽었다.
작품으로는 <<빠미르고원의 맥박>>, <<붉은 돌산>>, <<남산을 바라보며>>, <<북선>>, <<금수강산>, <<삼천리강산>> 등 중편소설과 장편소설 <<세병마>>의 상권 <<폭우>>가 있으며 산문집 <<해시>>, <<양삭산문선>>등이 있다.
【양삭평전】
양삭의 아버지 양청천(陽淸泉)은 청말의 수재였다. 7살에 소학을 다닌 양삭은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받았다.
1927년에 할빈에 가 태고양행(太古洋行)의 실습생, 직원노릇을 하면서 짬짬이 영어공부를 했고 번역도 하고 중국고전문학연구도 했다. 그는 <<철의 흐름>>, <<괴멸>> 등 작품을 탐독하여 거기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1937년, “7.7사변”이 일어나자 태고양행을 떠나 항일구망선전에 투신했다. 동년 9월에 무한에 가 친구와 합자하여 문예지 <<자유중국>>과 <<광명주간 전시호외>>부간을 꾸리다 경제난으로 그만두고 그해말에 서안팔로군판서처의 소개로 연안에 갔다.
1938년 봄에 산서항전전선으로 나갔다.
1939년 중화전국문예계항전협회에서 조직한 작가전지방문단에 들어 화북의 각 항일근거지를 다녔고 팔로군을 따라다니면서 중국인민의 항일투쟁생활을 반영한 우수한 작품들을 써냈다. 중편소설 <<빠미르고원의 맥박>>이 이 시기에 나온 대표작이다.
1942년에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했고 후에 중앙당교에 들어가 학습했다. 그 기간에 선후하여 <<검은 달밤>>, <<큰기발>>, <<상천>>, <<밀이 누르렀을 때>> 등 단편소설을 썼다.
194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그해에 광산공인들의 투쟁을 반영한 중편소설 <<붉은 돌산>>을 창작했다.
1946년 가을, 신화사종군기자신분으로 전선을 다니면서 많은 통신과 단편소설들을 썼다. 중편소설 <<전선>>은 이때에 쓴 것이다.
건국초 양삭은 중화전국총공회 문화부장을 담임하고 동북과 화남일대를 채방하면서 중편소설 <<북흑선>>, <<금수강산>>을 썼다.
1950년 12월, <<인민일보>>특약기자의 신분으로 조선전쟁에 나가 대량의 통신보도와 항미원조생활을 반영한 우수한 중편소설 <<삼천리강산>>을 써냈다. 이 소설을 씀으로 하여 양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2급국기훈장”을 수여받았다.
1954년에 중국작가협회에 조동하여 선후 외국문학위원회 부주임, 주임을 지냈다.
1956년 후에 선후 중국세계평화보위위원회 부비서장, 아세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 부주석, 아세아아프리카인민리사회비서처 중국서기, 아세아아프리카작가상설국련락위원, 비서장 등 직을 맡았었다. 그러면서 제3기, 제4기 정협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아세아 아프리카인민들의 투쟁모습을 반영한 우수한 작품들이 단행본 <<아세아 아프리카에 뜨는 해>>, <<동풍제일지>>, <<생명선>>에 들어있다.
양삭은 일생에 많은 글을 썼는데 성적이 특히 돌출한 것이 산문이다. 그의 산문들은 혁명격정이 충만하고 결구가 째였으며 언어가 세련되고 함축되였기에 시적감정이 흐른다.
1978년에 인민출판사는 <<양삭산문선>>을 출판하고 <<삼천리강산>>을 재판했다. 이듬해에는 <<양삭단편소설집>>을 펴냈다.
(1). 죽은 원인 명확치 않아
1968년 여름에 양삭이 세상을 뜨자 그의 산문작품들도 교과서와 각종 출판물에서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그의 서거10주년이 되는 1978년 1월에 인민문학출판사는 <<양삭산문선>>을 출판했다. 이 책은 “편집후기”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양삭동지의 산문은 풍격이 독특하길래 독자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사인방’이 반혁명적인 수정주의로선을 실시하면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반대하고 자산계급문화전제주의를 실시하였기에 그 영향으로 하여 수많은 우수한 작품들이 강제속박되여 햇볕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양삭의 작품역시 오랬동안 재판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영명한 령수 화국봉을 위수로 한 당중앙의 정확한 령도하에 모주석의 혁명문예로선은 승리를 취득하여 문예원지는 또다시금 백화가 아름다움을 다투는 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양삭의 죽음에 대해서는 “1968년 8월에 병으로 서거했다”면서 그의 죽음을 “문화대혁명”에 박해를 받은것과는 련계시키지 않았다.
2년후인 1980년 9월 15일, 양삭추도회를 문련주석 하연이 집행하였는데 이를 신화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던 것이다.
“양삭동지는 림표, ‘사인방’의 극좌로선의 박해를 받아 1968년 8월 3일 원한을 품고 세상떴다. 향년 55세.(실제나이 58세)”
그런데 과연 박해받아죽은것인가? 원인이 며확하지 않은 것이다. 양삭이 생전의 신분은 중국세계평화보위위원회 부비서장, 중국아세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외국문학위원회 주임이였다. “문화대혁명”초기 탈권운동 때 그는 충격을 크게 받고 마지막에는 북경병원에서 죽은 것이다.
<<인민일보>> 원문예부주임이자 저명한 작가인 원응(袁鷹)이 양삭의 산문 여러편을 편집한적이 있는데 그가 기자에게 말하기를 양삭이 병원에서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당시 떠도는 말이 같지 않으니 아직도 수수께기다고 했다.
양삭생전의 동사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양삭은 격리투쟁을 받던 중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양삭의 양녀 양도(陽渡)의 말은 달랐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말은 그때 반란파가 꾸며낸 것이라면서 양삭은 병원에 갇혀 위를 씻어낸 며칠 후에 페부감염으로 죽은 것이니 응당 반란파가 “박해하여 죽은것이다”고 해야한다고 우기였다.
(2). 사상진보를 위해 애썼다
양삭은 16살때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했다. 그가 쓴 첫 중편소설은 <<빠미르고원의 맥박.>이다. 대외우호협회 원부회장 림림(林林)이 <<양삭산문선>>서언에 회억한 것을 보면 1938년 봄에 림림이 <<구망일보>>를 복간하려고 상해에서 광주로 왔는데 양삭이 그들을 찾아왔다가 항일을 제재로 한 소설 <<빠미르고원의 맥박>>을 쓰기로 약속한것이고 그가 쓰는 족족 신문에 련재했다고 한다.
1956년 여름, 양삭은 자기의 이 소설책 속표지에다 자아평어를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나의 정치사상, 창작사상은 모두 엄중한 결점과 착오가 있어서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석상에서 한 강화>>의 지시와는 거리가 멀고도 먼 것이다. 아니, 어떤 관점, 묘사는 모주석의 지시를 근본 위반한 것이기에 투쟁중에서 참답게 자기를 개조할 필요가 있으며 공농병과 잘 결합하여야만이 공농병을 위해 복무하는 것들을 써낼 수 있는것이다. 예전에 쓴것들을 다시보면 부끄러워죽겠다!”
이에 대한 림림의 평가는 “양삭은 사상진보를 위해 애썼거니와 사작도 애써 련마하면서 자기 작품에 착오가 생기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사상상 극력 진보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양삭의 창작태도를 알아볼 수 있는 선색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우(反右)”가 시작되기 착 전에 양삭의 발언에서 그의 내심의 진실한 생각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령수가 만들어 낸 운동에 바싹따르려는 일종의 표현일 것이다.
1957년 5월 18일,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석상에서의 강화>>발표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중국작가협회와 인민일보편집부의 련합으로 좌담회를 열면서 북경에 있는 작가 류백우(劉白羽), 양삭(陽朔) 등을 청했던 것이다.
5월 28일의 <<인민일보>>는 양삭의 강화를 실었다. 그 내용은 양삭이 모택동의 “백화제방, 백화만발” “음모”의 영향을 받아 한 말이였다.
“전에는 오로지 무산게급 사상을 구비한 작품만이 공농병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그런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 <<인민일보>>에 실린 한 문장에서는 이런 제기법이 나왔다. ‘무산계급은 향기로운 꽃이고 비무산계급은 독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것 같지 않다. 민주주의사상의 좋은 작품도 마찬가지로 인민의 전진을 고무하고 추동하니 기실은 향기로운 꽃인 것이다.”
6월 6일, 중공중앙이 모택동이 친히 초고를 쓴 <<력량을 조직하여 우파분자의 창궐한 진공을 반격할데 관한 지시>> 를 내리기 이틀전에 중국작가협회당조(中國作家協會黨組)는 정(령)진(기하)의 문제를 처리하고 당내의 단결을 확대강화하는 회의를 열었는데 그 회의에서 양삭은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나는 회의에 의연히 희망있다. 당조가 틀리는 것이 있지만 당은 틀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전해의 회의는 비판인것이아니라 투쟁이였다. 숙반투쟁성질을 띈 것이였다. 지나친 문제인것이 아니라 정도부동하게 동지와 문예골간을 틀리게 대한 것이니 응당 교훈을 섭취해야한다. 그번의 회의에서 나는 좌였다. 당을 따라간 것이다. 당조는 착오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류백우가 회의전에 정령의 력사자료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강탁이 착오라 본다. 오늘에 와 보면 강탁, 정령은 종파정서가 있는 것이다. 강탁의 발언에 나는 깨여났다.”
이로보아 양삭은 1955년에 “정진반당집단”을 비판할 때 따라서 비판했지만 1957년에 정(령)과 진(기하)를 평판 할 때는 반성한 것이다. 하지만 뒷이어 시작된 “반우운동(反右運動)”에 정, 진 등 사람들을 다시금비판 할 때는 “당조가 착오가 있어도 당은 착오가 없다”고 견지하던 양삭의 반응이 또 어떠했겠는가? <<인민일보>>는 양삭이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것이다. 웃말과 아래말을 련계시켜 보고 “정진반당집단”을 어떻게 대했겠는가는 추측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중국작가협회의 지도자로 된 양삭이였으니 정치운동밖에다 몸을 둘 수는 없는 일이였다. 매우 기괴한 것은 “문혁”기간 양삭은 의연히 정령, 진기하와 관계를 벗어못했다는 그것이다. 양삭의 양녀 양도가 하는 말인즉 양삭이 죽기전에 반란파는 양삭을 “정령반당집단의 검은 수완가, 그믈에서 빠져나간 분자”로 몰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3)문혁의 소용돌이에 들어
중국작가협회외에도 양삭의 다른 한가지 중요한 직무는 중국아프리카단결위원회였다. 그는 경상적으로 아프리카국가에 가서 회의에 참가하면서 외사활동에 종사했다. 그가 1961년에 출판한 <<동풍제1지>>에는 그가 그 몇 년사이에 국제자료를 가지고 쓴 산문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 산문들은 국내문제를 다루어 널리 알려진 <<려지밀>>, <<동백꽃을 읊노라>>, <<설랑화>> 등 산문보다는 못한 것이다.
양삭은 1950년대에 조선에 나가 문학창작을 했다. 그런 작품들은 격문색채를 띄고있다. 화동출판사에서 1951년에 출판한 조선전선의 통신집은 양삭이 쓴 한 문장의 의름을 달았는데 <<미국은 인피를 쓴 짐승이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여론은 “미제”가 첫째가는 적이였지만 20년전에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과는 관계가 온화해지고 있었다. 양삭은 중국세계평화보위위원회 등 기구의 일을 보는 신분이였기에 그의 작품에서나 공개장소에서 하는 연설은 다가 시종 관방의 의식형태와 발을 맞추었던 것이다.
1966년 3, 4월간에 양삭은 단장의 신분으로 중국아세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의 대표들을 거느리고 일본에 가 한달가량 채방했다. 그는 3월 26일 도꾜에서 성대하게 열린 아세아차프리카단결대회에서 “일본인민이 반미투쟁중에서 거둔 탁월한 공헌을 창양한다. 중국인민은 시종 일본인민의 정의투쟁결심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같이 성근하게 관방과 발을 맞추었건만도 “문혁”이 폭발하니 운명은 끝장나고 만 것이다. 1966년 6월 9일 오후, 아세아아프리카상설국회의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당시 <<인민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증국대표 양삭은 회의에서 보고를 한 것이다. 이는 그가 생전에 <<인민일보>>에 마지막으로 남김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후 양삭은 곧 “문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말았다.
어떤 사람은 “반우파”전에 양삭을 호풍반혁명집단성원에 끌어넣어보려고 소설<<삼천리강산>>을 거들면서 그것을 지어 반혁명죄상으로 취급했지만 그때 양삭의 많은 작품들이 도리여 국내에서 호평을 받았거니와 여려편이나 교과서에 들어가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도 “문혁”이 시작되니 반란파들이 또 그의 작품에서 어떤 죄증이든 찾자고 부덕부덕 애를썻다.
“
"화대”의 오랜 종업원인 심학고(沈鶴皐)의 말에 의하면 양삭이 임직했던 중국세계평화보위위원회와 중국아세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는 국무원외사판공실의 령도를 받는 군중조직이였는바 하나의 큰 울안에 두 개패쪽에 하나의 인마(人馬)가 그려져 있다하여 “화대”라 불렀다고 한다.
양삭은 중국세계평화보위위원회에다 부주석이란 이름을 걸어놓았을 뿐 일반회의에는 참여하지 않고 아주중요한 회의가 있어야 왔길래 “문혁”전에는 6,7년을 사업한 자기도 몇번밖에 보지 못했노라했다.
“‘문혁’이 시작되여서부터는 사업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타 다른령도들은 한쪽으로 밀려난 처지였다. 1966년 말쯤아니면 1967년 초에 그가 ‘대화’에 와서 일상사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투쟁을 받았다. 그때는 그래도 집권파가 군중을 대하는 태도가 괜찮았던것이다.”
당시 “대화”에서 사업했던 자중균(資中筠)은 이렇게 말했다.
“양삭을 비판투쟁할 때 반란파맹장들은 그의 작품을 ‘수정주의사상’이라면서 생트집을 잡았다. 양삭은 특수한 력사문제도 없었고 중앙에서 점을 찍고 비판한 어떤 문장도 없은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단위의 령도인데다 작가니까 ‘문혁’때라는 그런 특수한 분위기속에서 잡혀나오기마련이였던 것이다.”
양삭의 양딸 양도가 말했다.
“그이한테 덮어씌운 죄명이 ‘정령반당집단검은 수완가’말고도 ‘삼반분자’라는 것도 있었어요. 그이가 <<설랑화>>를 북대하에서 썼는데 그것이 팽덕회를 번안한 것이고 <<려지밀>>에 일벌이 왕벌을 섬기는 것은 백성들이 모택동을 왕벌처럼 섬긴다고 빗대고 비유한 것이라면서 집에 돌려보내지도 않고 투쟁했어요.”“처음에는 엄중할것 없다고 생각했어요. 심사하여 문제를 가리겠지 하면서 최후결론은 아무튼 별문제없는것으로 되리라했던거얘요.”
양도는 그러나 후에 군대표가 들어와서는 달라진 것인데 그들은 ‘대화’의 반란파는 비교적 우적이라면서 양삭을 격리심사하는 새 정책을 쓰기시작했다고 했다.
자중균이 또 말했다.
“양삭 이 사람은 아마 비기였던 모양이다. 반란파가 투쟁은 해도 문제의 성질을 규정하지 못하지만 이들 군대표는 중앙을 대표하니 오합지졸이 아니라 생각하고는 쪽지를 써서 군대표와 담화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가 자기는 반당사상이 아니라고 표명하자고 그렇게 한것 같다. 그런데 군대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거니와 이런 사람은 둿다가 다시보자면서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날밤 그는 수면제를 많이 먹고 자살했다. 그것이 군대표가 들어와서 3일였다.”
훗날 자중균은 또 동사자들과 의논했는데 모두들 양삭은 군대표를 너무믿었다는 것이다.
심학고도 역시 같은 견해였다. 그가 말했다.
“양삭은 속으로 당중앙과 모주석의 령도하에서 자기문제는 아무 때건 제대로 밝혀질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군대표가 들어 온 후에는 생각밖에 자기 문제가 커지니 절망하여 자살하고 만 것이다.”
자중균은 양삭이 자살한 후에 벽을 사이한 저쪽방의 사람이 발견했다.그들은 회의를 열고 양삭은 “스스로 인민을 배척했다” 면서 비판했다고 말했다.
외교부의 공정한 결론
양양삭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사람이다. 친동생 양옥위(陽玉瑋)가 딸 양도를 한 살이 채 안되였을 때 형한테 주어 딸로 기르게 했던 것이다. 양삭과 양옥위는 북경록미창호동에 있는 한 정원에서 함께 살았는데 “문혁”이 발생했을적에 양도는 10살이 채안되였다. 그때 어린애였던 약옥위마저도 격리심사를 받았던 것이다.
장기적인 신경공능문란으로 하여 양삭은 신체가 허약하여 격리심사를 받기전에는 늘 수면제를 먹어야 휴식했다. 양도가 하는 말인즉 양삭은 전에 벌써 신경쇠약때문에 북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반란파와 병원측은 그에게 약도 주지 않고 치료하지도 않고 병원에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양도가 또 말했다. 1968년 8월 1일 반란파가 양삭을 병원에 가져갔는데 양옥위가 여러번이나 형을 보게해달라고 사정했건만 반란파는 들어주지 않았거니와 조폭하게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8월 3일날에 양삭이 세상떴건만 시종 집식솔들을 접근시키지 않아 시체마저 피끗 볼 수도 없었다. 구급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모든 처리를 반란파가 저들의 손으로 하면서 골회마저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1971년 “9.13사건”후에 중앙은 정책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여 “대화”가 주동적으로 양옥위와 양도에게 통지하여 인사부문에서 양삭에 대해 내린 결론을 보게했다. 양도는 종이장우에 씌여진 글을 기억했다.
“양삭은 문화혁명에 대해서 리해하지 못했기에 자살한 것이다.”라는것이였다.
그 결론에 대해 양옥위는 불복하여 친히 북경병원에 가서 병지를 들추어 보았던 것이다. 병력에 밝혀진 것은 “양삭은 페염이 감염되여 죽었는데 그는 8월 1일에 병원에 온 후 위를 씻어내여 구했다, 후에 반란파가 사람을 전문파견하여 병실을 지킴.” 이라했고 8월 3일날 병력의 처음기록은 “병정황 온정, 간수인의 반영은 양삭의 상황이 정상, 그러나 20분후, 간수인이 또 의사를 찾아 양삭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말함.” 이라 적혀있었다. “나는 의문이 많다. 그 20분내에 구경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누가 아는가.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지금돌이켜보면 부친은 반란파의 손에 죽은 것이다.” 양도가 긍정적으로 하는 말이였다.
그 외 한가지 반상적인 데가 있는데 그것은 양삭이 죽은 그당시 “대화”의 일상사무를 책임지고있었던 양기(陽驥)가 이미 퍼뜨린 풍설이다. 그는 양삭의 시체를 병원에서 해부했는데 위가 수면제에 타서 구멍이 뚫어졌다고 말했거니와 자기가 그것을 직접봤노라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옥위가 그 소리를 듣고 허다한 의학전문가들과 물어보니 같은 대답인즉은 수면제는 위를 태워서 구멍내는 일이 없다는 것이였다. 양도는 양삭의 림종전의 모든 일은 반란파가 만든 것이고 그들은 책임을 벗자고 양삭은 “죄가 두려워 자살했다”고 꾸민것이라 주장했다. 양삭이 격리심사를 받을 때에는 덮개외에 몸에 지닌 것이란 약간한 수면제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 투쟁받던 그 몇날밤에 다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반란파가 샅샅이 검사하였기에 근본 대량의 수면제를 휴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화”의 결론에 불복한 양옥위는 “대화”의 상급주관단위인 외교부에 신소하고 료승지(廖承志)를 찾아가고 주은래에게 편지하여 억울함을 호소했다.
1975년에 외교부는 “양삭병사(陽朔病死)”결론을 내리고 그해 12월초, 팔보산에서 양삭골회안장의식을 했다. 사실은 골회가 없고 골회함에는 양삭이 생전에 꼇던 낡은 안경과 만연필 하나가 들어있을 뿐이였다.
1976년 “4인방”이 분쇄된 후, 양옥위와 양도는 계속 상소를 올렸다. 하여 1979년전후하여 조사를 거쳐 외교부는 드디여 양삭은 “박해받아 죽었다”는 최종결론을 내린것이다.
1980년 9월 15일, 300여명이 “화대”원지의 례당에 모이여 양삭의 추도회를 열었다. 추도사에 “양삭은 당과 인민에 충성하였고 문예창작과 국제활동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둔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당원이다.”고 하였다.
양삭이 세상을 떠나서 옹근 12년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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