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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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32)
2011년 03월 27일 17시 22분  조회:3716  추천:14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32)

           삼가촌의 생존자 료말사의 회억   

그는 강청이 맨먼저 “문화대혁명”의 대상으로 삼고 점을 찍은 사람이다. 만약 그와 강청사이에 얽히고 설킨 사회관계가 없었더라면 아마 오함먼저 “문화대혁명”의 돌파구로 되었을 수도 있다.    
강청은 1964년도에 벌써 장춘교와 이렇게 말한적이 있는것이다.
   
“북경시위에 있는 그 료말사는 나를 내놓고 똑똑하 아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는 철두철미한 반역자로서 30년대에 상해에 있을적에 로신,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반대하는 보루의 인물이였지. 내가 그의 집에 있었을 망정이지 안그랬더면야 내가 벌써 그럴듯한 비판문장을 조직했을거야. 이 작자는 종이범이돼서 제꺽 때려엎을 수 있지. 한데 아쉽게도 팽진이 이런 사람을 다 보호해주고있으니 아닌게아니라 괴상한 일이지.”
    
료말사는 30년대는 상해에서, 40년대에는 계림과 향항과 중경에서, 50년대 즉 해방후에는 줄곧 북경에서 필을 무기로 손에 잡고 시, 잡문, 소설을 써 공산당의 정책과 로선을 선전하고 국민당과 맛서 음모를 폭로 비판했다.
해방후에 그는 북경의 교육사업과 문화사업을 맡아 지도하다가 후에는 북경시위통전부부장을 맡아 사업을 한 것이다. 
   
1961년 중순이였다. 하루는 <<전선>>편집부에서 사람을 보내여 그한테 이틑날 정오에 사천판점에서 모입이 있어서 요청하니 와달라고 알리는 것이였다. 
   
때가 되어 사천판점에 가보니 등척, 오함이 먼저와서 쏘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한담을 하고있었는데 편집부의 사람도 몇이 있었다. 
   
등척이 료말사를 향해 말했다. 
   
“말사, <<전선>>에서도 〔공동문〕,〔마철정〕과 같은 특별란을 꾸리는게 좋지 않겠소? 오함과 당신이 참가하고 나도 참가해서 셋이서 써보잔말이요.”     
   
이 소리를 듣고 료말사는 처음에는 그저 세사람이 도맡으면 부담이 너무크지 않을가 생각했다가 의론 끝에 그러면 그렇게 해보자고 대답했다. 그도 잡지의 편집위원이였으니까!
    

특별란의 이름을 무엇이라 달면 좋겠는가를 놓고 의론 할 때 등척이 세사람이 맡아 쓰니 <<삼가촌찰기>>라 하자고 했다. 오함도 료말사도 그렇게 하는게 좋겠다고 동의했다. 한데 문장에 서명하는 문제에 들어가 료말사는 풍격이 저마끔이니 각기 제이름을 쓰는게 좋겠다고했다. 
   
이에 등척이 말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필명을 하나로 쓰는게 좋겠소. 듣자니 〔마철정〕도 그들 셋의 이름을 모아 만든거라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잔말이요. 한사람의 필끝에서 같잖은 풍격의 글이 나올수도 있는게 아닌가.”
    
그는 이어 계속말했다.
    
“오함이〔오〕자를 내놓소. 나는〔남〕자를 내놓겠으니 말사 당신〔사〕자를 내놓소.”
     
이에 료말사가 말했던 것이다.
     
“나는 종래로 문장에 본명을 쓴 일이 없소. 〔번성〕을 내놓겠소.”
     
저쪽 두사람 다 그러는게 좋겠다면서 끝자를 택했다. 이리하여 이들 세사람의 필명 〔오남성〕 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세사람이 륜번으로 글을 쓰되 1천자를 초과하지 말고 반달에 한편씩 써내기로 했던 것이다. 
      
오함의 <<해서의 파직>>이 발표된 후 료말사가 <<력사와 극>>이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1964년도에 맹초(孟超)가 제가 쓴 극 <<리혜낭>>을 들고 료말사를 찾아와 글을 한편 써달라고 했다. 료말사는 극본을 읽어보았다. 맹초는 그가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이 극은 강생이 쓰라해서 쓴건데 그가 읽어보고 맘에 들어하니 어떻게 하든 꼭 한편 써달라는 것이였다. 게다가 <<북경만보>>의 기자역시 독촉하길래 료말사는 <<귀신무해론>>이란 글을 쓰게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반년만에 <<리혜낭>>을 비판하면서 그까지 끌어넣을 줄이야 어찌알았으랴! 과연 모를 일이였다. 왜서 그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극을 놓고 단독으로 료말사를 비판하는 것일가? 
   
이것은 강청의 작간이였다. 그해에 모택동은 문예계를 비평했는데 비준지시가운데 두가지는 문화부를 겨냥한 것이였다. 문화부는 핍박에 못이겨 검사보고를 썼는데 거기에다 <<리혜낭>>을 나쁜 극이라면서 비판했던 것이다. 강청은 보고서를 보고나서 문화부책임자에게 질문했다.
    
“또 하나 <<리혜낭>>을 불어댄 <<귀신무해론>>이 있는데 모두들 아는가 모르는가? ... 안다면 왜 한데넣고 비판하지 않는가? ”
    
강청은 그 문화부의 책임자를 향해 질문했다.
    
“거기서는 번성이 누군지 아는가?”
    
그가 잘 모른다고하니 강청이 알려주었다.
    
“그게 바로 료말사란 말이요, 북경시위에 있는 그 사람!”
    
이렇게 되어 보고서에는 료말사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고 그는 비판대에 올라 핍박에 못이여 자아검토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강청은 왜서 료말사를 미워하는가?
    

1933년, 전한(田漢)은 련화영화공사의 극본을 맡아 썼는데 료말사는 그의 조수가 되어 그가 쓴 극을 베끼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던것이다. 
   
하루는 전한의 한 녀성친구(즉 황경의 누이 유산)가 젊은각시를 데리고 전한을 찾아와 사정했던 것이다.
    
“내동생의 각시 리운학이얘요. 건데 동생이 체포되는 통에 운학이는 촌에있을 수 없어서 여기 이 상해로 몸을 뺀거얘요. 그런데 지금 있을 자리가 없어요. 내 거겐 불편하고.... 여기서 한동안만 지낼 수 없을가요?”
    
전한은 통쾌하게 그래라고 했다. 전한의 어머니도 젊은각시가 존귀한 집의 며느리같지는 않은지라 보모와 한침실에 들게 허락했다. 료말사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며칠후 료말사는 제 처가 호남의 친정에 가니 잠자리를 전한이 극본을 쓰고있는 려관으로 옮기였다. 
   
그랬더니 생각지 않은 일이 생기였다. 하루는 물건가지러 집에 오니 리운학이가 따라들어와 이말저말 끝에 집에서 자지 않아 비는 것 같은데 자기가 며칠와서 자면 안되겠는가고 물는 것이였다. 료말사가 말했다.
    
“우리 집 사람이 호남에 갔는데 이제 곧 돌아올거요. 그가 오면 있을 수 없소, 오기전까지는 있을 수 있어도.”
    
료말사의 부인은 집에 돌아와 보니 그지간에 면목모를 젊은각시가 자기의 잠자리를 차지하고있는지라 매우 불쾌해 하면서 남편과 말했다.
    
“당장 이사를 하자요. 여긴 못있겠어요.”
    
료말사의 부인은 과연 당날로 다른 곳에다 셋집을 얻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리운학은 그들이 짐을 꾸리는 것을 보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는 “며칠후에 제가 보려가겠어요.”했다.
    
료말사는 너무 랭정하게 굴수는 없는지라 그래라 했다. 
   
한데 그녀가 과연 찾아올 줄이야.
    
“료선생님, 전한이 시끄럽게 굴어서 거겐 있지 못하겠어요. 제가 여기에 오면 안되겠나요? 전 선생님네와 함께 지내고싶어요.”
    
료말사가 말했다. 
   
“보다싶히 잠자리가 없잖소. 그여히 오겠다면 저 정지칸밖에 없지.”
    
리운학은 낯색이 변하더니 말했다.
   
 “이러자요. 친구집에 가보겠어요. 거기도 안되면 전 올래요.”
        
이러고 돌아간 그녀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3년후에 그녀는 상해의 무대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말았다. 
   
그 리운학(李云鶴)이 바로 강청(江靑)이였다.      
            

1949년도의 일이다. 료말사는 북경에 조동되여 사업을 하게되었는데 한번은 중남해의 회인당(懷仁堂)에서 연극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강청과 마주쳤던 것이다. 10몇년간이나 보지 않았더니 그지간 그녀는 완전히 다른사람같이 변하고 말았다. 만면에 광채돌고 머리를 멋스레 가꾼데다 금테안경까지 걸어 거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였다. 일견하여 고급수장의 존귀한 부인티가 났던 것이다. 
   
그쪽에서 먼저알아보고 반가운양 했다. 
   
“아유, 거기서도 북경에 왔네요, 아직도 날 알아보지 못하겠나요?....  내가 지금 어데있는지 아나요? 난 중남해에서 살아요. 시간있으면 한번 놀러와요!”
    
료말사는 문화인의 성실한 패기가 있는 있는 사람이라 학문을 연구하는 외에는 일반적으로 교제할 줄도 아첨할 줄도 모르거니와 더욱히는 남의 낯색을 봐가며 거동을 취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였다. 하길래 그는 그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지 다른 표시는 하지 않았다. 
   
1951년 5월, 료말사가 동교민항의 원 북경시위휴식실에서 신문을 보고있는데 강청이 들어와 팽진을 찾으면서 아예 료말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955년 초에 료말사가 척추결핵에 걸려 북경병원에 가 수술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강청역시 거기에 와서 병을 보이였던 것이다. 그녀는 병실을 지나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료말사를 발견하고는 들어와 자기의 “영광스러운 력사”를 한바탕 늘어놓고는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다면서 래일 다시오마고 했다. 그런데 이틑날 료말사는 집사람들이 와서 출원수속을 했기에 병워을 나오다나니 강청을 다시만나는 일은 머릿속에 까맣게 잊고말았다. 그러니 강청과 미처 고별의 말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일이 강청으로 놓고 보면 태만하고 멸시로 받아져 죄가 된 것이다. 옛적에 받은 멸시에다 새 멸시가 더해져 증오로 되여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몇 년후에 기회가 생겨 보복하가 시작했다. 
   

1966년4월 16일, 료말사는 북경교구의 통현에 가서 사청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휴대용 작은 반도체라디오를 틀었더니 거기서 나오는 소리가 오함, 등척, 료말사의 <<삼가촌>>을 비판한다는 것이였다. 그 소리가 마치도 벼락치듯 하여 료말사는 머리가 뗑해났다. 
   그는 총망히 성으로 들어와 시위로 갔다.    
팽진이 한창 회의를 집행하고있었는데 료말사가 나타나자 당신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니 집에 돌아가 소식이나 기다리라했다. 
   
4월 20일에 이르러 갑갑해 난 료말사는 시위선전부장 리기(李琪)에게 전화를 쳐 물었다. 그러니 리기가 하는 말이 “집에서 기다리고있으시오. 일후 결론이 내리면 다시봅시다.”하는 것이였다. 
   
이런 말을 듣자 료말사는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흥, 기다리라구? 기다리느라면 당신들까지 잡혀나올거요. 꼴을 보니 반란자들은  지금 내나 팽진이나 류인이나.... 모든 혁명자들을 비판대에 끌어올리자고 날치는 판인데.”
    

“문화대혁명”이 방금시작되였을 때는 원내의 애들이 문을 뚜드리고 들어와서는 수색하고는 붙잡아내다가 투쟁했다. 그러다가 1966년 8, 9월에 리설봉(李雪峰)을 위수로 한 북경의 새 시위가 그들을 남창구의 “반수보”에 집결시켰다. 그곳은 본래 청화대학의 교수들이 여름휴양을 하던 곳이였는데 그들은 거기서 3개월을 보냈다. 그러다 10월에 이르러 반란파들은 “추귀대” 깃발을 들고 와서 그들을 정식으로 투쟁비판하면서 때리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11월에는 그들이 료말사 등을 다시 성안으로 끌고 들어와 집에 보내면서 매일 기관의 청소를 하고 신문을 보라했다. 그러다가 1966년 겨울부터 그들을 학교, 공장, 농촌을 끌고 다니면서 비판투쟁을 했는데 옹근 1년이 더된다. 하루에 두세번씩이였는데 빼놓는 날이 거의없었다. 
   
내내 그러다가 1968년 3월에 이르러서야 반란파는 그들을 가두었는데 가둔 곳은 북경위수구였다. 사람마다 저가끔 작은 방에 갇혔는데 유리창에 도료칠을 해서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방안에는 침대하나에 네모난 나무쪽걸상 하나, 가래통하나, 밥그릇에 채그릇 각각 하나씩이였다. 변을 보자면 허가를 받고 나가야 했다. 아침과 저녁은  강냉이떡 한 개, 점심에는 죽을 주었는데 근본 배를 물리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가니 습관이 되는지 그런대로 참아낼 수 있었다. 
   
그때 시위에서 말하기는 가두는것이지 체포한건 아니다 인심보호를 하느라 그런다고 했다. 무법천지였던 그 시절에 책임지고 관리하라고 맡긴건데 때리지 않고야 어찌 “혁명“을 한다고 하겠는가?
    
료말사는 먹는 것 때문에 매를 맞고 때를 굶는 벌까지 받았던 거다. 그날 점심에는 국수를 먹었다. 료말사가 차례가 오자 그릇을 내밀어더니 젊은 병사가 떠주는것이 너무적어 좀 더 달라고 했다. 그랬다고 병사가 너는 한달에 량식을 얼마먹는지 아는가고 물는 것이였다. 료말사는 28근이라 했다. 그러니 병사는 안된다 더 줄수 없다고 했다. 료말사는 화가 동해 “그러면 먹지 않겠다”면서 국수를 되쏟아주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좀있으니 그 병사가 들어와 “좋다, 그럼어디 실컷 먹어보라.”면서 한그릇 그득담아주었다. 료말사가 방금 먹자는데 젊은 군관이 들어와 을러멧다.     “네가 감히 절식을 해? 안먹겠으면 먹지 말어!”하면서 그릇을 빼앗았다. 그 젊은 군관은 나가더니 병사몇을 데리고 다시들어와 료말사를 한바탕 되게 때리였다. 그러고나서 처벌로 하루를 굶긴다고 선포했다. 
   
료말사는 항의했다. 
   
“너희들이 어디 모택동의 군인이냐, 너희들은 파시쓰다, 파ㅡ시ㅡ쓰!”
    
료말사를 때린 한 병사는18,9살이나 될 어린 나이였는데 “파시쓰”라는게 무슨 말인지 몰라거 뇌이다가 눈을 흘기면서 그만 나가버렸다. 
                
서생이 글쓰기 즐기더니 걸려들었구려 
                

오늘도 허리굽혀 재간부려야 하는가 
                
팔비틀고 머리숙이는 분기식 춤 
                
대지에 불어치는 건 투쟁바람뿐일세          
               

이 시는 1967년 7, 8월에 그가 오함과 함께 투쟁받으면서 지은 것이다. 그때 그들은 당교에 갇혀있었는 데 하루는 경서탄광의 반란파가 오함과 그를 뽑아 탄광에 데리고 가 투쟁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들은 두사람을 한 자그마한 방에 가두었다. 오함이 잔뜩 수심에 잠겨있는지라 료말사는 번민을 풀어주느라 우스개소리를 꺼냈던 것이다. 
   
“여보, 우리가 이젠 이름나게 됐소. 매란방과 정연추모양으로 한사람만 없어도 노래는 부를 수 없게되니까.”
    
오함이 숙였던 고개를 치키면서 물었다.
    
“당신말해보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그래 어느 극의거요?”
    
료말사는 진대의 팽택현령 도연명(陶淵明)이 쌀 5되 때문에 허리굽혔다는 이야기가 피끗 상기되였다. 지금 쩍하면 팔을 탈아 뒤로 올리고는  머리숙이고 허리를 잔뜩 굽히니 분기식투쟁을 받는게 아닌가. 
  
 “우린 쌀다섯되를 위해서 허리굽히네.”
    
오함이 웃었다.
    
“쌀다섯되라? 내돈갖구 쌀 다섯되나 살까?”
    
보아하니 서생티가 물씬나는지라 료말사가 그한테 물었다.
   
 “당신한달에 얼마받소?”
    
“3백원가량받지. 계산해보오. 그걸루 쌀 몇되나 사오?”
    
료말사도 오함도  계산해내지 못했다. 쌀한되 값이 멀만지 모르니까. 
   
료말사가 말했다.
    
“그럼 쌀다섯되라는 글자를 지워버리고 간단히 ‘허리굽힌다’고 하면 되잖아?”
    
오함은 웃으면서 동의했다. 번민을 일시 털어버린 것이다.
    
그번 투쟁대회는 공인들이 제멋대로 소리치고 떠들어대다가 끝났다.
    
료말사는 그번투쟁을 기념하느라 시를 지었던 것이다. 
   
유머, 락관, 자신, 고통을 참고 벗티는 말에 료말사의 완강한 의력이 내비치였다. 5년넘는 철창생활과 근 4년간의 돌림투쟁속에서 이를 악물고 벗텨낸 료말사였다. 그런데 그가 집에 돌아와 친구를 만나볼 궁리를 했더니 그제야 집 식속들이 오함은 1969년 10월 11일에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이 소식은 벼락같이 머리를 때려 그는 한동안 정신을 잃고 멍청해졌다. 전혀 믿고싶지 않았다. 등척과 오함, 지식이 연박(淵博)한 그 두 사람은 사람됨됨이가 충후(忠厚)하여 평생을 신근(辛勤)하게 당을 위해 사업해온 혁명자가 아니였는가! 먼저 저 세상에 가버리다니! 료말사는 두 주먹을 부르쥐고 하늘을 우러러 웨치였다.
    
“장천아, 네가 말하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고통이 가라앉은 다음 지난 을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세상에 류례없다는 이른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애 대해서 진일보 인식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1959년 팽덕회를 반대하기 시작하여서부터 그 스스로가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종자를 심어놓은 것이다. 3년간의 련속적인 재해, 그가 애써 창조한 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는 전부 망태기로 되고말았으니 이같은 실제상의 철저한 실패는 팽덕회의 예언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류소기가 편향을 바로잡은것은 실제상에서  우경기회주의라고 착오적으로 정해놓은 모든 사람들을 평판한 것으로 되었기에 팽덕회는 자기를 다시인식해달라는 번안서를 쓴 것이다. 력사와 현실에 민감했던 강청이나 모택동은 다가 류소기, 등소평, 팽진은 꼭 련계가 있어서 오함이 <<해서의 파직>>을 썼을 것이고 그들은 이 극을 통해 팽덕회를 대신하여 “해서를 파직시킨것은 잘못된 것이다, 억울하다”고 빗대고 호소한 것이고 그를 “하늘을 떠받히고 땅우에 우뚝선 대장부”라고 칭찬하면서 고무격려했고 “조만간에 법도가 바로서리라”는 등등의 내용을 세상에 설파한것이라고만 여겼던 것이다. 
   
료말사는 말했다.  
   
“그것은 커다란 자극이였다. 그녀(강청)는 문예계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그녀는 모택동을 설복하고 동원하여 문예계부터 칼을 댄건데 단지 일부 작가나 연원만을 목표로 한게 아니라 팽덕회와 번안하자는 일체 중앙령도들을 겨눈 것이였다. 지금와서 나는 더 똑똑히 알았다, 그 대상들이 류소기, 팽진 같은 사람들이였다는 것을..... 일찍 1962년 1월, 중앙공작회의때 류소기는 ‘3이 자연재해고 7이 인재’였다면서 ‘팽덕회의 만언서는 적지 않은것이 사실과 부합된다’ ‘그러니 착오라고 할 수 없다’면서 ‘팽덕회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하여 외국과 내통했다고 볼 수 없으니 모두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것이 당연히 모택동의 권력에는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료말사는 또 말했다.
    
“바로그렇다, 나는 주의해서 관찰했는데 이 시기에 강청이 특별히 활약적이였다. 그녀는 각처로 다니면서 극을 보고 문예방면의 활동에 참가했다. 회의가 여러차례나 있었는데 나는 번번히 그녀를 보았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그리 중시하지 않은것이다. 이정도로 발전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1962년 9월에 모택동은 8기10중전회에서 <<천만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는데 거기에 이런 한단락의 지시가 있는 것이다.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활동을 하는 것은 일대의 발명이다. 무릇 정권을 뒤집어엎으려면 우선먼저 여론부터 일으켜야 하고 의식형태방면의 공작부터 해야하는 것이다. 혁명적인 계급이 이러하거니와 반혁명적인 계급역시 이러한 것이다.’           
   
이런 전달을 받고 나는 좀 긴장했지만 보아하니 중앙의 기타령도들은 팽진과 류소기를 포함하여 모택동의 말을 최고지시로 여기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하고싶으면 어떻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나는 중앙이 바로 집체령도니까 모택동개인의 의견이 큰 운동까지 일으키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중앙에는 다른 령도들도 있지 않는가. 모택동은 어쨌든 제2선으로 물러난 사람이고, 나는 중앙의 집체령도를 믿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꼴이니 사람들은 아마 나를 서생티난다고 웃는 모양이다. 
   
그런데 1963년 9월과 11월에 이르러 모택동의 지시가 련속내려왔던 것이다. 우리가 후에 보게 된 ‘희극계는 추진출신해야한다’, ‘문화방면 특히는 극에는 많은것이 봉건적인 락후한 물건짝들이고 사회주의적인 것은 적으니 무대는 두말할 것 없이 제왕장상의 것이 되고만 것이다. 문화부는 문화를 관할하니 응당 이 방면의 문제에 주의를 돌려 검사하고 참답게 고쳐야 한다. 만약 개변하지 않는다면 제왕장상이라 이름을 고치고 재자가인부라고 하거나 아니면 외국사인부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전달을 받자 그때 주양, 하연을 찾아 분부한 기억이 난다.
    
‘모주석이 언영 분부를 하지 않았소, 당신들은 빨리 주동을 쟁취해야지 안그랬다가는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구만.’
    주양은 대수롭지 않아했다.    ‘일없어, 모주석은 우스개소리로 한 말이지 뭐. 문화사업이란건 종래로 이런거니까. 어떤 말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의론을 충분히 하여 사람마다 쟁론을 하게 하자는게 아니겠소.’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강청이 그때 늘 극과 영화를 본것이 기실은 각방면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조사연구를 한 것이였고  모택동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그를 준비하 게 한 것이다. 꼭마치 일장의 대격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찰부터 충분히 해야하는 것 처럼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였던 것이다. 강청은 문화방면에는 내항이였거니와 모택동한테서 군사리론도 배운것것이다. 
료말사가 말했다.    
“강청 그녀가 강화하는 걸 들어보면 말끝마다 ‘전략상’을 붙이면서  문화전선이 경제전선과 정치전선에 어떠니어떠니 했다. 쓰는 말투를 보면  전부가 군사술어였다. 그녀가 모택동의 신변에 오래있으면서 그 한가지는 헛배우지 않은 것이다. 솔찍히 말해서 강청은 30년대에 벌써 배우기를 즐기는 여자였던 거다. 그녀가 우리집에 몸을 의탁할 때 가죽트렁크를 들고왔는데 그 안에는 책이 많았다. 체르늬쉡쓰끼의 저작과 다른 작가들이 쓴 명작들이였다. 그녀는 매일 짬을 타서 독서를 했다. 이 한가지만 봐도 그녀는 결코 일반적인 녀인은 아니였다는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료말사는 또 말했다.
    
“1963년초에 강청은 주은래에게 경극을 혁명현대극으로 개혁하는 합동공연을 하자고 제의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모택동이 ‘타파하고 세우는 신호’였던 것이다. 9월에 주은래는 중선부와 문화부에 즉시 전국적인 현대경극합동공연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주은래는 또 주양 등을 만나서 말했던 것이다.
    
‘모주석은 이 합동공연을 몹시 중시하여 강청을 보내여 일이 되어가는 형편을 물어보기까지 했소. 강청이 문예에는 내항이니만큼 당신들도 고도로 중시하고 세심하게 포치해서 꼭 좋은 수평에 오르도록 해주기 바라오. 그러지 않고는 당중앙과 모주석께 교대할 방법이 없단말이요. 이번의 합동공연을 1964년도 춘절전후에 할까하오. 그러니 시간을 미루지 말아야겠소. 우리가 다른 기타의 일도 안배해야하니까.’
    
하지만 주양과 하연 등 여럿은 그닥지 반가와하지 않은 태도였다.
    
‘이젠 강청이 다 우리한테 호령을 하는 판이네. 우리야 그녀를 잘 알고 있지. 이 방면의 일이야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지 않을라구 원.’
    
그들은 이 일이 당내의 정치투쟁과 그 무슨 계급투쟁에다 련관시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륙정일에게 청시하고는 주은래의 지시에 그닥 시답지 않은 태도로 1963년 9월 17일에 <<소형경극현대극목시험공연에 관한 통지>>를 내렸던 것이다. 
   
강청은 그 통지를 보고는 성이 펄펄나서 륙정일을 찾아 질문했다.
    
‘당신들의 이 통지를 보란말이요. 왜서 모주석의 극공작에 대한 중요지시를 관철집행하지 않고있나요, 이번의 합동공연이 사상과 문화령역의 혁명이라는 말은 근본 없으니? 주은래가 권국범위내의 현대경극합동공연을 하리고 지시했다는데 당신들은 왜서 일곱 개 성 두 개 시 지구의 소형극시연으로 고쳐버렸는가말이얘요? 당신들은 현대극의 범주를 현대의 력사제재까지 확대시키고는 지어 아편전쟁이래의 구민주주의 각개 력사시기의 극목까지 다 연구할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대체 무슨뜻인가요?’
    
륙정일과 주양은 대답거리가 없는 지라 합동공연을 연기하기로 하고는  강청을 쫓아버렸던 것이다. 
   
한데 이로 하여 과연 시끄럽게 되었다. 1963년 12월에 모택동의 문예공작에 대한 첫 비준지시가 하달되였던 것이다. 모택동은 “허다한 부문을 아직도 죽은 사람이 통치하고있다. 허다한 공산당원들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예술을 열심히 제창하고 사회주의예술은 열심히 제창하지 않고있으니 이 어찌 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륙정일과 주양등은 그제야 당황해났다. 그들은 1964년 1월 16일에 <<합동연출을 뒤로 미룰 통지에 관하여>> 를 내면서 근 백년내의 력사내용이라는 부분을 슬그머니 빼버리고 정정할 곳은 정정했다. 
   
기실 강청이 륙정일에게 질문을 들이댄 일과 비평한 말들이 이미 류소기에게 보고되였는데 류소기는 당시에 아무런 말이 없다가 1964년 4월 9일, 외국문화대표단을 영접했을 적에 자기의 관점을 말했던 것이다. 
   
“제왕장상, 재자가인도 언급하고 연출해야 한다. 연출하지 않는것이 우리의 방침이 아니니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신민주주의시대의 음악, 소설, 시가, 극들의 예술수평을 보면 봉건시기의 것보다도 높지 못하거니와 지금 쓰고있는 소설, 극본역시 봉건시기의 것만 못하니 제왕장상의 연극을 놀아야 하고 재자가인을 놀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이 방금나왔을 때 오함과 하연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래도 류소기가 말을 객관적으로 한다고 했다. 
   
그들이 새로운 활동을 준비하고있을 때 모택동의 지시가 또 내렸다. 
   
“류소기는 헛소리를 하고있다, 예술과 정치를 알기나하는가, 완전히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에 눈을 크게 뜨고있는 사람이다.”
    
이리하여 문화부의 사람들을 감히 어쩌지를 못했다. 
       
기실 료말사는 모르고있었다.
    
류소기가 자기의 관점을 말한 한달 후인 즉 1964년 5월 9일에 림표가 군대의 문예공작회의에서 한가지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무산계급의 문예의 목적은 바로 인민을 단결하고 인민을 교육하고 혁명인민의 투지를 고무하는 것이며 적을 와해하고 적을 소멸하고 흥무멸자를 하는 첫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유력한 사상무기로서 형상적이고도 통속적인 수법으로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선전하는 공구역할을 하는 것이다. 군대의 문예공작자는 모택동의 문예사상의 지도하에 창작을 크게 틀어쥐어야 한다.”
    
소화(宵華)가 말했다. 
   
“강청과 림표, 엽군지간에는 왕래가 비교적 많았는데 강청은 림표에게 문화령역을 포함한 허다한 암시를 했다. 림표에게는 강청의 이러한 건의가 계략을 알려주는 것으로 받아졌다. 그러니 그가 들어주지 않을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는 림표가 우로 바라오르고 싶어도 어쩌는 수가 없던 판이였으니까.”
    
아래는 료말사의 말이다.
   
 “그때 강청이 문예계에 손을 펴게 된것은 모택동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다. 주은래는 그런 소식을 듣고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륙정일이나 주양은 강청의 활동이 정치의의를 띄고있으리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강청을 하찮게 보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류소기가 허다한 정치활동이나 외교활동에 자기 부인 왕광미(王光美)를 대동하는데 모택동이 왜 그렇게 못한단말인가? 강청이 제일익숙한것이 문예인데 문예란 이 령역의 혁명을 한다면 용의하게 상상못할 성적을 거둘 수 있을것이다.그런다면 이는 실제상 강청이 정치자본을 얻게되게 아닌가.
    
강청은 륙정일과 주양, 하연등의 동향을 알아내여서는 즉시 문화부와 선전부를 비평했거니와 그것을 모택동에게 고해바치여 모택동이 지시를 내리게끔 만들었던것이다. 
   
‘주종리가 출면해서 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라. 중앙은 반드시 이 령역에 돌파구를 내여 그런 자들이 계속 우리의 진지를 통치하지 못하게끔 해야한다. 나는 사회주의중국에서 우리는 발언권이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때 강청은 이미 실험전에 손을 대여 친히 현대극을 만들어냈다.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백호탄을 기습>>, <<붉은신호등>>, <<갈밭의 불종자>>(사가방의 원명) 등이였다. 
   
그번 합동연출이 어찌보면 강청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그러했다. 팽진이 료말사에게 한 말이 있다.    
“당당한 북경시장이 천만 강청이 지휘하게는 말아야지, 우리 북경시에는 그래도 인재가 있지 않은가. 당신들은 일체방법을 다해서 경극개혁기치를 앗아와야 하오.”
    

이리하여 북경시에서는 시간을 바싹틀어쥐고 현대극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1964년에 이르러 6월 6일부터 7월 31일까지 21성시, 자치구에서 참가한 전국현대경극합동공연을 했다. 합동공연을 하기 착전에 주은래가 문화부에 서면지시를 했다. 
   
“이번 합동공연에는 강생과 강청 두 동지를 반드시 고문으로 청해야한다.”
    
륙정일과 주양, 팽진 등은 토론연구 끝에 전한, 양한생, 로사, 마련량, 초은국, 진운 등을 더 너으려했다. 한데 주은래가 어떻게 알고는 전화로 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이번공연에는 반드시 강생과 강청동지가 고문이 되야한다. 이것은 이미 모주석께 보고 된 것인데 당신들이 청시도 없이 제맘대로 보탠다면 후과를 조심하라!”
   
 팽진은 그제야 륙정일보고 말했다.
    
“됏소, 됏소, 그만두기오. 주총리가 하라는 대로 하지뭐. 우리는 합동공연 전체가 제대로 되게끔 총체적인 공작에서 령도를 가강히 하여  기타 어떤 정치문제와 예술상에 편차가 없도록해야겠소.”
 
   
1964년 6월 13일, 장춘교가 중선부령도와 문화부령도앞에서 상해에서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를 창작한 경험을 말할적에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서 무장투쟁의 작용을 돌출히 했길래 량호한 사회적반응을 취득하게 되었노라 했다. 
   
이런 소리를 들은 후 륙정일은 중선부의 부장판공회의를 할적에 한바탕 푸념질을 했다.
    
“무슨놈의 모주석저작학습이구 군중운동이란 말인가, 모두 형식주의지! 성인도 아닌 사람의 말을 가지고 일체절대적이라고 하지 말란말이야. 당초에 장정을 할적에 홍군이 운남에 가면 매일 운남햄을 먹는다고 선포하지 않았는가. 첫맛이야 신선했지, 반달이 되니 보기만해도 싫어서 다시는 먹지 못하겠더란말이요. 지금은 모택동저작을 하늘만큼 떠받들면서 만능적인 령단묘약으로 치니 이게 어디 말이 되는가말이요. 문장 한편을 읽고 문제를 해결한다니 이건 인기를 끌자는 것이지 뭐요. 허풍떨어도 분수있지. 어떤 사람은 모선을 읽지 않고도 좋기만 한데 꼭 읽어야한다니 뒤죽박죽이 아닌가말이요. 이번 종합공연도 그렇지. 주의는 했겠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 머리를 어지렵혀 어리뻥뻥하게 하는걸 못봤는가말이요.”
 
어떤 사람이 륙정일이 한 이 말을 강청에게 알려주어 강청이 웃었다.    
“어떤 사람은 모주석의 저작을 읽는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제 힘줄을 빼내는 것 같아한다. 어디 소리쳐보라지, 자신이 있거든 대회에 나서서 말해볼거지 뒤구벅에서 방귀나 뀌니 그게 다 사나인가! 내가 그네들에게 주문을 읽어줄테야, 머리아파하게, 덜덜 떨게, 벅작떠들어대게.”
                  

1964년 6월 23일에 주은래, 강생, 강청 등과 합동공연에 참가한 300여명 경극공작자대형좌담회를 열었다.
회의에서 주은래가 말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이번 현대경극 대합동공연은 중요한 세계의의를 갖고있는 것이다.  우리의 극공작자들은 반드시 모주석의 문예방향에 관한 지시를 끝까지 관철집행해야 하고 꼭 보급과 제고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하며.....  생활에 심입하고 사상을 개조하여 철저한 혁명자가 되어야 한다.”  

강생도 강화했는데 말중에 말이 있었다.    
“우리의 현대극은 사회주의혁명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반혁명현대극을 노니 경각성을 높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극은 혁명적인 사람도 리용하고 반혁명적인 사람도 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의 적이 우리의 진지를 리용하여 우리의 정권을 정복하는 활동을 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강청이 말을 할 차례가 오자 그녀는 매우 격분하여 입을 열렀다. 
   
“나는 사회주의극은 응당 우리의 사회주의경제기초를 보호해야한다고 봅니다. 만약 이 방향을 틀어쥐지 않는다면 비뚠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응당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극이 구경 6억몇천만의 공농병을 위해 복무하는 가 아니면 한줌도 못되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분자와 자본주의분자를 위해 복무하겠는가?”
    
그녀의 어투는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아니라 대바람에 온 문화계에 퍼졌던 것이다. 
      

이날 장춘교역시 전국성적인 회의에서 얼굴을 드러냈는데 중요하게 상해지도부에서 현대경극을 창조한 경력을 소개했던 것이다. 
   
“우리는 강청동지의 지도에 따라서 처음시작부터 현대극을 연습하는 문제를 무산계급이 문예의 진지를 점령하는 높이에 끌어올려놓고 인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예공작자들에게 금후의 방향을 밝혀준 것으로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주석께서 가르친 방향을 바싹따르리라 결심했습니다. 강청동지가 제출한 혁명현대극을 창조라는 요구에 따라 한갈래의 무산계급에 속하는 참신한 도로를 창출할 것입니다.... ”            

   
그러나 주은래총리가 그같이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좌담회를 륙정일과 주양등은 문화예술을 장악하고있는 령도인 팽진에게 청시한 후 전국에 광범하게 선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신문계에서 “선전하지 않고, 보도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는 방침”을 채취하여 주은래, 강생, 강청, 장춘교의 발언을 눌러놓았다. 
   
한주일 후 륙정일, 주양등은 인민대회당에서 만인대회를 열었다.  팽진이 전문 현대극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주은래, 강생, 강청, 장춘교 등의 강화와는 전혀 상반되게 현대극, 전통극과 신편력사극은 세가지 병행, 세가지 중요, 세가지 동등 방침을 취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인제는 고대극을 다소 한쪽에 밀어놓을건 밀어놓고 내놓을건 내놓고해서 현대극을 쥐여도 된다. 현대극연출이 순리롭게 될 때면 고전극을 일부 더 내놓아도 되는 것이다. 지금의 부분적인 현대극은 실제상 조잡하고 되는대로 만들어서 노새도말도 아니니 뭐가 뭔지 콩 모르겠다. 우리한테는 그런 현대극이 수요되지 않는다. 우리는 <<전한강변>>(화살을 맊는 강변)과 같은 극을 잘놀아 대중의 옹호를 받아야 한다.”
 
   
쟁진의 강화는 즉시 <<인민일보>>와 <<붉은기>>잡지에 발표되였거니와 단행본으로 인쇄되고 전집으로 나와 광범히 선전되였다. 

   
강청은 주은래와 말했다. 
   
“이것 봐요. 바쁘지 않는가요. 모주석의 지시를 거기서 나서서 틀어쥐니까 좀 낳은것 같잖아요. 지금 모두들 일부러 우릴 인정하려하지 않으니 이 문제의 엄중성이야 내가 내가 부는게 아니겠죠. 그네들은 하나하나씩 우릴 부정하면서 대항하고 모주석과 대항하는거얘요. 북경에서 한가지 일을 해내자니 얼마나 힘든가요!”
 
   
이와 때를 같이하여 림묵함(林黙涵)이 일부 문일들을 조직하여 <<광명일보>>에 문장을 발표하여 상해에서 연출한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를 비판했는데 그것은 “이 극이 원소설의 정화부분을 떼여버렸기에 적의 형상이 소설에 쓴것과 같이 그렇게 교활하고 기염이 높지 못하다.  정면인물부각도 따라서 제대로 되지 못했다. 때문에 이 극이 연기는 물론 극본과 연기 모두가 성공적이 되지 못한것이다.”라고 했다. 
   
연출인원과 전문가들의 좌담회에서 모두가 강청이 틀어쥐고 개혁한 극에 그 비슷한 의견들을 제출했던 것이다. 
   

강청은 듣고나서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면서 중선부와 문화부의 일부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이건 그저 예술에 대한 의견인게 아니니 잘 고려해야해요. 어느쪽에 섯는가 하는 문제인거죠. 정면인물쪽인가 아니면 반면인물쪽인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할 수 없요. 문장을 조직해 토론해야지.”
 
   
료말사는 자기가 친히 목격한 바를 이상과 같이 구술하고나서 지난일을 좀더 자세히 밝히였다.
 
그때는 그 누구도 강청이 한손에 살생대원권(殺生大權)을 쥐고있는 인물인줄을 몰랐기에 제 견해대로 그녀와 과감히 맛섯던 것이다. 중선부와 문화부의 내부간행물에 정황을 반영한다는 명의로 그들은 강청에 대해 부동한 이견을 제출했다. 례를 들면 <<간보>>에 여러번이나 발표한 문장들이 강청은 의견이 간단하고 조폭하며 도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북경선전부의 내부간물인 <<문예전신>>에는 <<전한강변>>을 평가하는 허다한 문장들을 실였는데 다가 그 이극을 좋다고 칭찬한 것이였다. 강청이 이 극은 “바른것이 사악을 누르지 못했다”한데 대해 류후생(劉厚生)은 자기의 글에서 “나는 이 극이 괜찮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이 극은 ‘바른것이 사악을 누르지 못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돌출하게 알리지  않는다. 그것은 정면인물의 연기가 괜찮기 때문이다.”고 반박했다. 
   
팽진과 북경시위는 연원들의 의론을 듣고 <<신화사>>의 보도가 <<백호탄기습>>을 너무 관분하게 돌출히 선전하고 당이 친히 길러낸 화극 <<전한강변>>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불공평하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본래 정상적인 비평의견것이였던 것이다. 한데 “무화대혁명”이 일어나서는 그것이 강청을 공격한 “죄”로 되어 그 사람들은 다가 박해를 몹시 받았다.
 
  
팽진, 륙정일 등 사람들은 모택동이 다른안속이 있어서 문예전선에 대해 시종 후퇴하지 않는 진공책략을 쓰리라고는 미처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강청의 허다한 의견들이 차츰 옳은 것으로 평가되면서 그녀는 승리자연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3년, 주양과 림묵함이 중국의 극을 연구하느라 실험극단을 하나 조직했는데 강청이 예극(豫劇) <<조양구>>를 이식하면서 반드시 경극음악에 기초하여 혁신함으로써 경극예술형식이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길을 탐색하게 해야 한다고 지시를 한 것이 그 례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양과 림묵함은 그 지시를 귓등으로 들었기에 강청의 눈에는 이도저도 아닌 극을 만들어냈다. 강청이 보고서 펄펄 성을 냈다.    
“나는 당신들이 경극을 발전시키라했지 경극을 훼멸하구는 하잖어요. 이 극은 전국현대극표연에 참가못해요.”
    

주양은 이런 소리를 듣고는 어쩔 방법이 없어서 말했다.
    
“<<조양구>>는 좋지 않아 내놓지 못한다지만 기실은 좋아도 내놓지 못할것이다. 강청의 동의를 걸쳐야 하니 과연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림묵함은 더 똑똑하게 태도를 표시했다.
    
“이 극은 예술 때문에 내놓지 못하는게 아니라 강청의 허락을 받지 못해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내놓지 못한다면 자연히 세간의 공론이 있을 것이다.”
      
주양, 림묵함, 장경(張庚)등은 열심스레 <<홍기보>>를 연속공연하는 장편연극으로 만들고는 인력과 물력을 많이 들여 열심히 무대련습을 조직했다. 
   
장경이 말했다.
    
“장원한 리익을 놓고 보면 <<붉은신호등>>이 방향인게 아니라 <<홍기보>>가 방향이다. "
   
강청은 이 말을 들고 극본을 가져다 보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의 이 극은 기조가 문제있다.”
    
그러고는 련습하는 것 마저도 보지 않겠다고 했다. 
   
강생역시 같은 태도로 말했다.
    
“우리가 제창하는건 간단한 현대극다. 현대극역시 이분법으로 보아야 한다. 혁명적인 현대극이 있거니와 혁명적이 아닌 현대극 지어 반혁명적인 현대극이 있길래 우리는 반드시 이 점에 대한 인식이 똑똑해야 한다.” 

 
하여 주양은 팽진과 륙정일에게 청시하였더니 모택동이 문예에 대한 두 번째 비준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런 협회와 그들이 장악하고있는 대부분간물이(몇기지는 좋고), 15년래 기본상(모든사람이 아니라) 당의 정책을 실시하지 않고 벼슬하여 나으리질이나 하고 로농병과 접근하지 않으며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반영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수정주의변두리에 엎어졌다. 만약 참답게 개조하지 않는다면 장차 아무때든 웽그리아 뻬데피구락부와 같은 단체로 되고 말 것이다.”
    
주양을 비롯한 그들은 이러한 정황하에서 하는 수 없이 극을 두 번째 심사할적에 가슴아파하면서 빼버리였다. 
   그들은 말했다.    
“강청이 이미 이 극은 ‘좌’경맹동주의를 가송한다고 소문냈으니 놀지 말아야 한다. 우기고 놀았다가는 불리하게 될것이다. 한데 ‘좌’경맹동주의도 혁명이지 반혁명극은 아닌거다. 됐어, <<홍기보>>를 놀지 말지.”
      
이는 그들이 강청을 미워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들은 강청을 무서워한게 아니라 그녀의 뒷받침인 모택동을 무서워한 것이다.”  
료말사는 이같이 긍정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진술했다. 

 1
1964년 6월부터 7월까지 옹근 합동공연기간 아무튼 강청과 장춘교가 내놓은 극, 이를테면 <<위호산을 지혜롭게탈취>>, <<붉은신호등>>, <<사가병>>과 <<백호단기습>> 등 극들은 모택동이 다 보았다. 그가 보면 소유의 중앙령도들도 따라서 보았다. 모택동은 연원들을 접견할 때면 공개적으로 이런 극들은 좋다고 했다. 그랬으니 누가 감히 나쁘다고 말하겠는가? 강청이 하는 모든 일이 모택동의 지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료말사는 1963년부터 이 점을 직감했던 것이다. 
       

합동공연이 끊난 후 주양은 총결보고를 했다. 
   
“문예에 들어가 문화부는 이미전부터 전통을 발굴하고 유산을 건져내며 류파와 배사학도(拜師學徒)의 구호를 제창했다. 이렇게 하는것은 옳은것이지 봉건주의와 재자가인을 만들어내느것이라 할 수 없다. 이미 공개적으로 비판한 대표인물에 대해서도 우리의 태도는 그들이 계속혁명하도록하는 것이다. 또 틀리면 어쩌는가,  고치면 되는 것이다..... 전한, 맹초는 긴장해 할 필요없다.”  등등. 
   

료말사는 주양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놓고 얘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7월달에 들어서자 모택동은 사회주의계급투쟁지시를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사상령역내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지간의 투쟁은 누가 누구를 이기는가 하는 것으로서 매우 오랜시간이 걸려야 해결되는 것이다. 몇십년갖고는 되지 않는다. 백년 몇백년의 시간이 걸려야 비로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문제에서 짧게 준비하는 것 보다 늘게 준비하는게 좋고, 사업문제에서는 쉽다고 보는것 보다 곤난하다고 보는게 낳은것이다. 이같이 생각하고 이같이 하면 비교적 유익하고 손해도 적을 것이다.”
 
   
이는 바로 계급투쟁을 무한정 늘게 하겠다는 소리니 그 누군들 시름을 놓으며 무서워하지 않겠는가?  한즉 강청의 태도가 물론 모택동을 대표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말을 모택동과 련계시키게 되는 것이였다. 이 점은 료말사는 물론 팽진마저도 깨닫고 끝내 굴복하고 만 것이다.
 
   
1967년 7월 29일부터 시작하여 8월 2일을 한단락으로 하여 극부문의 반란파들이 련속하여 제연명(齊燕銘), 하연(夏衍), 팽진(彭眞), 륙정일(陸定一), 주양(周楊), 림묵함(林黙涵)을 비판하면서 료말사(廖沫沙)까지 끌어다 함께 투쟁했다. 
  
 팽진은 중간휴식때 료말사와 가만히 말했던 것이다.
    
“강청의 말을 언영들었더면 이렇게까지는 큰 죄를 뒤집어쓰지 않겠는걸 그랬지. 이젠 내가 굴복한다니까. 당신이 내한테 귀띔했을 때 조금만 들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됐을 걸.”
    
강청이 료말사를 비판할 때다. 료말사는 팽진과 말했던것이다.  
   
“비판하겠으면 하라지, 그러나 팽진동지, 당신은 제발 강청하고 엇서지 마오. 당신이 그녀와 엇서면 그녀가 아무 때든 당신을 수습할거요. 이 여자는 반격심이 제일 강렬한거요. 당신이 그녀를 노엽히면 그녀는 죽을때까지 당신을 잊지 않을거요.”
    
팽진이 말했다.
    
“그렇게 지독한가. 나는 진리에 복종하는거요. 지리를 내놓고는 그 누구도 무섭지 않고 누구도 상대하고십지 않소. 네가 중앙의 주석이라해도 하늘을 떠받는 신성이라해도, 지리앞에는 사람마다 평등하니까.”
        
그러던 그가 얼마지나지 않아서 쓴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신들은 료말사를 비판했는가? 하지 않았다. 료말사(전북경시위통전부장)는 당년에 문화대혁명주장(主將)이였던  로신을 향해 ‘이름을 바구어 암전’을 쏘아 공격한 사람이다. 지금 그는 꼭같은 수단으로 당을 향해, 인민을 향해 암전을 쏘았다. 묻노니, <<전선>>, <<북경일보>>, <<북경만보>> 는 이런 사람을 언제 비판하려는가?”
    
이것은 1966년 5월 16일의 <<인민일보>>와 <<붉은기>>잡지 제7기에 발표한 척본우의 문장 << <전선>과 <북경일보>의 자산계급립장을 평함>>의 글에 있는 한단락이다. 
       
강청이 료말사를 변절자, 특무라 한것은 료말사를 꺾꾸러뜨리려고 전안조가 강청의 지시에 따가 강박적으로 핍박해서 만들어 낸 것이였다. 이에 대해 료말사는 일일이 다 반박해버렸던 것이다. 
   
로신을 반대했다는 것도 그렇다. 
   
1934년도에 료말사는 “림묵(林黙)”이란 필명으로 <<大晩報>>에다 한편의 <<“화변문학”을 론함>>이란 문장을 발표하여 로신의 잡문은 “화변문학”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이에 로신은 “이름을 바꿔서 암전을 쏜다”고 그를 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상 이같은 문학평론은 정상적인현상인데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거리라는 식으로 “문화대혁명”때에  와서는 로신을 반대한 것르로 되었거니와 그것을 죄로 정해 나중에는 법적제재를 가하는 정도로까지 승급시킨 것이다. 이것은 아마 력사에도 보기드믄 “문자옥”일 것이다!
   
료말사는 1990년에 세상을 떴다. 그는 생전에 명언 한마디를 남기였다.
      
“육체는 민멸되여도 정신과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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