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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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14 )
2011년 03월 19일 14시 08분  조회:3294  추천:18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14)


(1)
기아: 한 기층교사의 “대약진”회억

(2) 장삼을 입은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굶어죽었다


              기아: 한 기층교사의 “대약진” 회억

          
내가 친히 겪은 "대약진"이 눈깜짝사이 반세기된다! 50여년이 지났건만 그 나날의 일들은 잊혀지지 않고 눈에 삼삼하다. "대약진"을 친히 겪어본 사람이 이제는 얼마남지도 않은것 같다. 그 당시 집정했던 중년들도 지금남아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느지 아마 퍽 더 적을 것이다. 그 당시 20살나이의 총각나이였던 내가 이제는 고희의 나이를 먹어 이 글을 쓰자니  곤혹스러움이 없지 않다. 그때는 농촌에 문맹이 많았다. 문화가 있는 사람은 거개가 구사회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가정출신이 지주부농이여서 관제를 받았다. 새사회에서 그런 사람을 내놓고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싶이하니 소학교만 졸업해도 문맹을 벗은 것으로 치부되였기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구의 비서로 되거나 아니면 공사간부로 되었던것이다.   
그러나 "대약진"때는 간부가 붓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조장해서 백성들의 미움을 받은것이니 그때의 일들이 지금은 그저 불쾌한 회억으로나 남을뿐이다.
 
 농민들이 해를 심하게 입었지만 그때의 일을 돌이켜 회억록을 쓸만한 사람은 거의 없는것이다. 그들의 후대는 문화가 있긴해도 력사를 말하면 다가 세상에 그렇게 황당한 일도 있을 수 있느냐면서 곧이듣지도 믿지도 않는것이다. 그 당시 관제를 받았던 사람은 지금도 감히 쓰지 못하고 있다. 그 당시는 물론 그 후에 계속이어진 정치운동은 다가 문제있지만 지난 력사를 좋지 않게 평하는것을 허락하지 않는것이다. 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 이 세폭의 붉은기를 견결히 보위했던것이다. 그런형편에 그래 누가 세폭의 붉은기를 감히 반대하겠는가, 반대하기만 하면 그는 반혁명이였다. 입을 벌려 이사이로 반마디라도 나쁘다는 소리를 냈다가는 비판투쟁을 받는 판이였으니 속이 꿈틀거려도 그저 묵색이여야했다. 그래서 "대약진"의 착오와 죄악은 여지껏 력사속에 묻혀 가려진 것이며 아직도 그 착오적인 작법을 담습하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지금은 응당 실사구시적으로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 력사교훈을 총결 할 때가 된 것이다. 소인이 재간이 무디여 친히 겪은 생활편단을 더듬어 기록할 따름이니 여러분께서 디딤돌로 삼아 장차 내용을 훌륭하게 보태기를 바란다.

1956년 가을의 어느날, 나는 사범학교 록취통지서를 받았다. 화식을 학교에서 무료로 공급하고 월마다 생활비까지 6원씩 준다고 하였다. 하루에 세끼 아침은 닭걀비빔밥에 락화생을 볶은 반찬이고 점심은 네가지 채와 국에 밥은 량껏 배불리먹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절약된 화식비를 모은 것으로 옷을 사주거나 우산도 사주었다. 묵은 밥을 먹거나 묵은 채를 먹는 법이 없었다. 턱찌끼는 돼지를 먹이였고 수저를 대지 않고 남은 채는 부속소학교의 학생식당에다 넘겨주었던것이다.

 
정풍, 반우운동이 시작되여서부터는 선생들은 반날만 교수하고 반날은 회의를 했다. 학생들은 반날 공부하고 반날 일을 했는데 그것을 반공반독(半工半讀)이라했다. 우리는 학교주위의 황지를 일쿠어 거기에다 강냉이와 채소를 심었던것이다.


반우운동이 결속되고 보니 글을 가르칠 선생이 많이 적어졌고 남은 사생은 모두가 오직 국가에서 정해놓은 분량만한 량식을 사서 먹는 수밖에 없었다. 매달 공급하는 량식이 남학생이 36근, 녀학생은 30근이였다. 오늘와서 봐도 그만큼한 수량이면 적은건 아니였지만 배를 제대로 불릴 수는 없었다. 원인은 부식품이 매우적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만스런 말은 하지 못했다. 반우투쟁이 “위대한 승리”를 걷우었는데 만약 국가에서 공급하는 량식이 모자라다고 한다면 그건 “반우투쟁이 취득한 위대한 성과를 부정했다”는 정치모자를 쓸것같아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명넘는 학생이 매일 밥은 먹어야 하는건데 국가에서는 통구통소정책을 실행하기에 시장에서는 량식을 팔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임명된 령도팀은 학생이 먹는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머리를 몹시썼던것이다.

한가지 방법은 호박채를 많이 먹는것이였다. 사생이 동원하여 제 손으로 호박과 채소를 심은건데 그것도 며칠안가니 다 먹어버렸다.   
두 번째 방법은 돼지기름을 섞어먹는 방법이였다. 민간에서도 량식을 절약해먹는 수가 돼지 비계를 많이 먹는것이였다. 그때는 그래도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팔았기에 살 수 있어서 비계를 사다가 밥이 거의 될 무렵이면 칼로 얇게 저민 비계를 우에 덮어 기름이 밥에 스며들게 하는것이다. 학생들은 누구나 다 맛갈스레 먹었다. 
   
세 번째는 풀채소를 많이 넣고 비빔밥을 하는것이였다. 그래도 배를 제대로 불리지는 못했다. 
   
네 번째는 전문 싸래기를 사들이여 먹는것이였다. 식량이 모라는 정황을 지위에 반영했더니 지위에서는 싸래기 3근을 량식1으로 계산해서 학교에 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사범학교 학생들은 한동안 맨 싸래기밥만 먹고지냈던것이다. 
  
다섯째는 고구마를 량식으로 대체하는것이였다. 고구마역시 량식류에 들었다. 그렇지만 쌀 한근이 고구마 5근을 대체하니 좋았다. 고구마와 입쌀을 섞어서 쪄먹었다. 처음 한두끼는 달달해서 먹기좋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서로 쌀쪽을 더 먹자해서 분기가 생기였다....
 

학교령도측은 학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천방백계를 다했지만 더 어쩔 방법이 없으니 먹던안먹던 똑같이 나눠주는 방법을 택했던것이다. 

그래도 배고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모두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선생의 강의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리 만무였다. 나는 내 친구와 같이 밤에 학교밭의 무우를 도적질해 먹기로 약속하고 갔다. 그런데 웬걸 학교밭의 무우는 벌써 다른 사람이 말끔히 도적질해가고 없었던것이다. 배가 고프니 제것도 지켜내지 못한것이다. 

그래도 배고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모두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선생의 강의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리 만무였다. 나는 내 친구와 같이 밤에 학교밭의 무우를 도적질해 먹기로 약속하고 갔다. 그런데 웬걸 학교밭의 무우는 벌써 다른 사람이 말끔히 도적질해가고 없었던것이다. 배가 고프니 제것도 지켜내지 못한것이다. 
반우를 하는통에 우리를 배워줄 선생이 부족하였기에 우리는 부득불 한해앞당겨 졸업했다. 나는 표정구중심소학(瓢井區中心小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는 사업에 착수하기전의 시간을 고향마을에 가서 지냈다. 농촌에서는 인민공사화를 하느라 집체식당을 꾸리고있었는데 개인집의 량식과 기름, 고기와 닭알까지 몽땅 집체에 들여놓은 형편이였다. 농촌에서는 먹는데 돈을 내지 않거니와 군대식을 본따 후근과 전선이 엄격히 갈라져 제마끔 제임무를 다했는바 취사반은 전문 밥짓는것만 맡고 기타사원들은 생산에 동원되였던것이다. 군대와 다른것이라면 사원지간에는 식당계선이 없이 어디가면 어디것을 먹기로 되어진 그것이였다. 그 리유는 모두 뛰여서 “공산주의”에 들어온 것이니 어디가면 어느 식당에서 먹는것이요 하루 몇끼먹던 맘대로였다. 어떤 사원은 기회를 타 일은 하지 않고 배돌면서 전문 먹을데만 찾아다녔다.

농민들가정에서 저축했던 생활물자들은 전부 공사식당에 들여놓았고 주요로동력은 집중하여 철강을 만들어내는 일에 동원되였다. 그러다보니 로인들이 아이들을 거느리고 전간의 곡식을 걷어들이였는데 얼마걷지도 못한채 다 염근 낟알들이 전간에서 그대로 썩어갔다. 그러니 월하미인(月下美人)이라 공사식당의 “공산주의생활”은 잠깐나타났다가 덧없이 사라지고말았다.

 나는 표정구중심소학에 도착하자 구위기관식당에 안패되여 그들과 한패로 되었다. 월마다 화식비 9원을 냈는데 공작에 방금착수한 내 월급의 절반이 들었다. 그렇지만 먹는것이 정량이 아니여서 배껏 먹을 수 있으니 학교식당같은건 비기지도 못하는것이다. 그러니 학교문을 방금나온 나에게는 행운이라 기쁘기 그지없었다. 

학교에서 교학을 맡을 일이 없으니 나는 구위하향공작조에 선발되여 흥룽공사로 내려갔다. 구를 관리하는건데 임무는 농민들을 감독하여 밤낮으로 끊지 않고 벌목하고 석탄을 때여 철을 제련하게 하는것이였다. 우리의 감독하에 그 좋던 원시림이 하나하나 훼손되어 황산으로 변하고말았다. 그랬건만도 당시의 정치수요였던 그 “영국을 초월하고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련강속도에는 이르지 못했던것이다. 그렇게 되자 구위에서는 사원들에게 군사화관리를 하게했는바 어린것들은 학교나 유치원에 맡기고 로인은 “행복원”에, 청장년은 민병단에 들어갔으며 남녀따로 구분되여 집체숙식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여진 집은 허물어 재목을 패여 쇠를 녹이는 화목으로 했다. 집집에 있던 가마를 비롯하여 철기물이란 기물은 다 거두어 뚜르려 부수어서 “토용광로”에 넣어 녹이였다. 그래서 만들어낸 쇠를 “철구아(鐵狗兒)”라 불렀다. 불합격생철이였던것이다. 

개학날이 되었기에 학교에 갔더니 학교에서도 교학은 하지 않고 학생들을 데리고 철광을 파낸다, 토용광로를 만든다, 철을 제련한다 그야단이였다. 그래 학교에서도 그모양으로 “철구아”를 얼마간 만들어낸것이다.

그때는 공부를 하는데 년령제한을 받지 않다보니 지어는 15살 16살나이에 소학을 다니는 학생까지 있었기에 학교에서는 “소년초감락(少年超甘樂 )”의 운동을 한것인데 지어 소학1학년생마저도 토방법으로 쇠를 제련하는 “인민전쟁”에 참가시켰던것이다. 하다못해 광석한덩이를 날라도 그렇고 목탄을 날라도 그렇고 일손이 모자라 개미떼가 헤매듯 하는 판이였으니 그야말로 망망한 “인민전쟁”에 뛰여든 것이였다.  선생들 중에는 쇠를 만들어내는 데다 열정을 부어 “화선입당”을 하는 사람도 있고 페철한근도 못만들어내여서 비판투쟁받은 교원도 적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대변론이라 했다.) 
철제련이 한단락을 짓자 학교는 드디여 시간을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6학년담임선생은 지금의 공사청부업자나다름이 없었다. 공사에서는 땅을 떼여 학교에 주었는데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마태자(馬駄子)라는 곳에 가서 하루종일땅을 깊게 파번지는 운동을 했다.  토지를 적당히 심경해야만이 다수학을 거둘 수 있건만 정부의 지시는 깊이번질수록 좋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꼭마치도 전호를 파듯 경지를 한 장(一丈)넘어 파번지였던것이다. 밑의 누런 흙을 등짐으로 지어내고는 표층의 비옥한 흙을 집어넣었다. 그랬으니 겉면의 흙은 비옥한것이 아니였다. 그런 땅에 심은 곡식이 어떻게 높은 산량을 낼 수 있겠는가?
땅을 깊게 뒤집는 일을 끝낸 후 우리는 고산실험지에다 밀을 심었다.
전해에 종자를 배게 넣던 습관에 대처하여 누군가 합리밀식을 해야만 증산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건만 정부의 지시는 그렇지 않았다. 종자를 배게 넣으년 배게 넣을수록 좋다면서 우리더러 모범전을 꾸려 경험을 총결하여 추광하게끔 하라는것이였다. 요구는 무당 종자를 100근 넣으라는것이였는데 리유인즉 그만한 종자를 넣으면 산량은 100배되여 10000근을 수확할거라는거다. 그러면서 을러메는것이 누가 감히 반대하려는가, 일언바구라도 부동의하는 자가 나타나면 무자비한 비판투쟁과 타격을 받는줄을 알라는것이였다.
우리는 심기시작했는데 종자를 다 쓸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산종을 했더니 밀종자가 온땅을 한 벌 덮었다. 그래도 적잖게 남아서 그것을 어떠게 처리할건가 궁리하는 판인데 평시에 작란이 심하고 말성부리던 한 학생애가 고개를 외로 탈더니만 쓰레받기에다 남은 종자를 담아서는 밭에다 아예 부어버렸다. 어떤데는 손두께만했다. 어쨌든 종자는 다 처리된 셈이였다.

 종자가 발아했다. 소털같이 배니 통풍이 되지 않은 탓에 더 자라지 못하고 죽고말았다. 다른것이 발아하여 좀 자라낫다가는 역시 그 모양으로 죽어버렸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밴 종자를 솎아냈다. 그러니 좀 낳은것 같았지만 다 자라서도 결국은 이삭을 맺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래 “대증산”을 했다고 보고를 올려야한단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증산했는지? “사람이 많으면 담이 커지고 땅이 많으면 산량을 많이 낸다”지만 나는 감히 회보할 수 없었다. 어떤 실험지에서는 현장회를 열고 “대증산”을 했다고 소개했다. 현장회의에 참가했던 사람이 나에게 알려주는것이였다. 그의 말인즉 교구에서는 여러무에서 성숙한 벼를 포기채로 뽑아다 실험전으로 꾸려온 1무논에다 바람도 통하지 않을지경 꽉 배게 꽂아놓아 벼이삭우에 닭걀을 올려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라는것이였다. 어떻게 증산했는가? 바로 그렇게 증산한 것이다!   그가 계속 알려주는 말이 그렇지만 그래도 자기가 있는 구(공사)보다는 증산하지 못했으니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보고 너도 남처럼 허풍떨고 가짜회보를 하면 될건데 왜 그러느냐 하는것이였다. 

그당시 사용한 전화는 손잡이를 돌려야 대방과 련계되는것이였는데 여러방향에서 선로를 같이쓰다보니 전화벨이 울리는 차수와 길고짜름으로 사용하는 측의 단위를 표달했던것이다. 례를 들면 한번길고 두번짧으면 그것이 갑공사고 두번 다 길면 을공사 등등. 같은 한선로를 쓰다보니 호상간에 겸청할 수 도 도적질해 들을 수도 있는것이 큰 흠이였다. 우리 그곳에서는 세 큰 공사가 한선로를 리용하였기에 현에서 전화를 돌리면 세공사의 벨이 동시에 다 울리는 판이였다. 각 공사는 매일 현에다 량식수확진도를 보고해야했다. 장석공사와 내가있던 표정공사는 한 전화선을 리용했는데 장석공사는 어느결에 선진공사로 되였다. 대체 어떻게 하여 선진이 되었는가? 듣자니 매번마다 표정공사가 장석공사보다 먼저보고해서 장석공사에서는 전화를 훔쳐듣고는 수자를 더 높혀 보고하군했던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선진이 될 수 밖에!
   그런데 어느날은 평비에서는 표정공사가 앞섯다. 장석공사는 지려하지 않고 숫자를 불구어 보고했다. 표정공사도 지려하지 않았다... 그때의 량식산량은 바로 이같이 허풍떨고 거짓말하는 작법을 서로비기는데서 높아간 것이다.               
나는 한시기 공사에서 상급과 하급지간에 사업을 서로 련계하게끔하는 일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기층에 내려가 수자를 알아보고 우에다 보고를 올리였는데 반드시 먼저 공사당직령도의 비준을 받아야했다. 그런데 내가 애를 써서 수집해 정리해놓은 숫자가 생각밖에 늘 그 령도의 말 한마디에 부정되였다가는 마지막에야 보고되군하였다. 그제야 나는 “묘리”를 알았다. 아예 조사를 하지 않고 그에게 물어서 그가 부르는 수자를 적어 바치였던것이다.


사업상 선진이 되느냐 못되느냐도 마찬가지로 “묘리”가 있었던것이다. 조건이야 어떠했던지간에 앞사람이 하는대로 따라하면 되었다. 내가 있는 현은 산구였는데 계곡이 깊었다. 해발 700m에서 2,300m였다. 1959년에 전현에서 낮은 저지의 추수가 시작되였다. 조이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공사에서는 그것들을 도적맞힐것 같았던지 학생들을 동원하여 밤새에 걷어들이게 했다. 조이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아 근 절반이나 감산이였다. 한데도 공사에서 우에다 올리는 보고서는 “대증산”이였다.


먹는 량을 제한하지 않고 식비도 내지 않는 “큰가마밥”은 얼마오래가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 농민들이 저축해온것이 거덜이 났던거다. 그러자 집체식당에서는 “게거리식충”을 잡아내는 운동을 벌리였다. 구실은 공사식당이 거덜이 나는 원인이 그따위 인간들이 량식을 훔쳐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래서 한집도 빼놓지 않고 삿삿이 뒤지였는데 무릇 알곡과 기름, 고기같은것이 있기만하면 몰수했거니와 “게걸이식충”이라 하여 잔혹하게 투쟁했고 지어 어떤사람에게는 “나쁜분자”라는 모자를 씌워 엄한 로동관제를 하기까지 했다.  일찍이 걷어들였기에 큰 손실을 본것도 있지만 파종을 너무일찌기한탓에 크게 감산한것도 있는것이다.

파종때부터 선진이 되고 표병이 되어야지 락후가 되여서는 안되였다. 이는 지시였던것이다. 새해를 잡자 “혁명화의 대년”으로 만든다면서 사원들은 몽땅 동원하여 정월초부터 한달 30일을 공지에서 보냈다. 전간에서는 “혁명화의 춘절”을 쇤다면서 원소절날에 얼음을 까고 조이종자를 묻었다. 그래서 종자가 발아하기는 커녕 몽땅 얼어 죽고말았다.


곡우가 지났는데도 곡식묘가 자란게 보이지 않으니 강박적으로 재종하게 했다. 숱한 농민이 굶어죽었거니와 죽지 않았다해도 맥이 없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월달에 시작한 파종이 6월에야 겨우끝난건데 그것이 잘된들 수확을 얼마나할가?   “붉은선진”이라 이름났던 한 공사서기는 어쩔 수 없으니 사실대로 말했다.   
“1960년에는 풀이 자라서 조이키를 넘었고 염근 낟알은 쥐가 달려들어 다 먹어버렸다. 그래도 우에다는 량식생산이 ‘대풍수’라고 보고했다.”


1960년은 “3년곤난시기”중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제일많은 한해였다. 선진이라는 장석공사도 1959년부터 사람이 굶어죽기시작했다. 그렇지만 굶어죽었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우리가 식사를 해왔던 공사기관식당은 공사서기의 식당으로 되여버렸다. 간부들의 한달 표준식량이 21근이고 농민은 15근이였는데 골고루나누어먹었다. 한데 실제는 평균15근도 못먹었다. 공사서기와 식당관리원이량식을  탐오했던것이다. 
교원들은 여위고 붓기시작했다. 그래서 “糖服丸”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다. 당분으로 부중을 치료한다는것이였다. 교원들은 교학이 끝나면 꼭 생산로동를 해야했다.

 섧고도 참기어려운것이 기아였다. 일하면서 산나물을 뜯어먹는 것으로 주린배를 달래였다. 공사식당이 사람의 배를 불리지 못해 죽음을 내니 농민들은 밤이면 산나물을 캐여다 제집에 갖고 가서 가만히 끓여먹었다. 부엌에 불을 때니 자연히 굴뚝에서 연기나기마련이여서 그것이 공사간부의 눈에 들키우고말았다. 악한자의 마수를 어찌 벗어나랴. 그들은 어느 집에서 야채를 캐여 끓여먹으면 어느집에 달려들어 “공공식당을 파괴한 죄”를 씌우면서 끓인것을 못먹게 했거니와 산나물을 끓이는 도구를 짓밟아 부수었고 발로 부엌을 허물어뜨려 다시는 불도 때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나서는 그 집 식솔들에 처벌이라면서 하루 혹은 이틀간 먹을것을 영 주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은 굶어죽는것이였다. 때를 굶기는것이 공사에서 “죄”진 사람을 징벌하는 법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들 죽지 않고 살려는 사람의 욕망을 영 꺾어버리는 재간은 없었다. 때리고 발로 차고 모자를 씌워도 사원들은 목숨을 내걸고 먹을것을 찾아 헤매였다. 그들은 계속 야채를 캐먹고 “仙人土”를 파먹는 것으로 기아를 달래었다. 그것은 일종의 흙이였다      
사원들이 죽지 않자고 애쓰고 발악할 수록 그것을 제지해보려는 공사간부들의 수단역시 점점 더 혹독하고 묘해졌다. 그들은 무릇 산나물을 비롯해서 무엇이든 끓일 수 있는 도구는 수색해내여서는 모조리 못쓰게 만들었던것이다. 그리하였기에 굶어죽는 사람이 부쩍 더 늘어난것이다.


1960년의 초여름에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로부관리구에 가서 “두가지서두르는 일”했다. 서둘러 추수하고 서둘러 종자를 거두는 일이였다. 거기에 가서 보니 적지 않은 농가들이 문앞에 풀이 무성했다. 흡사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같았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 보면 사람이 있었다. 숨이 겨우붙어 누워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체를 놓고 한숨지으며 우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하려던 일을 집어치우고 죽은자의 시체를 하나하나 드러내다가 파묻는 일을 했다.

집근처에 구덩이를 파고는 짚이나 풀을 베여 펴고는 시체를 눕힌 다음  흙으로 덮었다. 우리가 그렇게 파묻은 시체가 적지 않았다. 어떤 마을에 가면 사람을 보기힘들어 마을전체가 그대로 무덤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한번 청가를 맡고 집에갔다왔다. 40여리길이 되는데 길가에 죽은시체 3구를 놓고 한사람이 숨이 간들간들 붙어서 지키는데 누구도 관게하지 않았다. 집에가서 3일간있는사이에도 마을앞 오솔길가에 굶어죽은 시체 두구나있는것을 보았다. 시체 하나는 하루종이 길에서 헤매다가 서서히 죽어간것이라 한다.
 

훗날 자료를 보니 그 3년간에 전국적으로 굶어죽은것이 몇천만에 이른다고 했다. 과연 그럴것이다.

하다면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많았는데 왜서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는가? 없는것이 아니였다. 질문해도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거니와 도리여 비판까지 받았던것이다. 팽덕회대원수가 “상서”를 올렸다가 결국은 잘못되였다는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우리 그곳에는 적잖은 “작은 팽덕회”가 있었다. 지구어느 한 부문의 정처급령도는 그때 전국에서 선진이라는 장석공사의 사업을 검사하면서 이미 굶어죽은 사람이 나진것을 발견하고는 아주 객관적으로 현위에 회보하였더니(당시 상급에서 파견되여 내려온 공작조도 지방당위의 령도를 받았다.) 현위에서는 지구에다 그가 “붉은기를 뽑으려한다”고 고발해서 그를 처분받게 만들었던것이다. 그랫으니 누가 감히 말한단말인가? 말해봤자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던것이다. 

우리 고향의 한 공사(여기서 한가지 보충설명을 하련다. 당시의 행정구이름은 정사합일(政社合一), 한개단위가 두가지 명칭이였는데 구(區)가 곧 대공사(大公社)였다. 역시 구라불렀고 구아래에 속하는 향을 공사라 하기도 하고 관리구라하기도했다.)의 어떤 사원은 이미 굶어죽었건만 그 공사에 있는 국가창고에 쌀이 많았건만도 팔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사의 비서가 구위부서기에게 회보하기를 자기가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게 허락해달라했다. 그랬더니 구위부서기는 듣고서 묵허(黙許)를 했던것이다.        
그들은 밤중에 부분적인 창고를 열고 거기의 량식을 부근의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누어주되 그저준게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등기하여 서명을 했고 공동히 이 일은 절대비밀에 붙이였던것이다. 백성들은 약속을 지켰거니와 그 간부의 처사에 감지덕지하여 일도 잘해 이듬해에 곡물산량을 내자 꿔먹은 그 량식을 비밀리에 몽땅 국가창고에 들여놓았다. 그리하였기에 그곳에서는 굶어죽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던것이다.
 
도리대로 말하면 이것은 “애민지거(愛民之擧)”였건만 마음대로 국고를 다쳤다하여 유관간부를 체포할 것은 체포하고 당적을  긁을건 긁어버리고  철직시킬건 철직시켯던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투쟁하라고 군중앞에 내놓았더니 투쟁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후에 정풍정사(整風整社)를 하면서 이런 간부들에 대한 처리를 부분적으로 개정했지만 창고문을 열었던 그 간부는 영원히 다시일어서지 못하고말았다. 애석한 일이다! 

1961년봄, 중앙은 <<十二조>>문건을 내려 전국적으로 정풍정사를 하게하였는데 그것의 구체내용은 “일평일조” 즉 평균주의와 돈, 량식, 물자를 무상으로 조달하는것을 반대하고 가짜회보, 허풍떨기, 관료주의작풍, 주관주의작풍과 맹탕지휘풍을 쓸어버리는것이였다.   
군중앞에 잘못을 빌고 죄를 깨닫고 배상하게하는 한편 위법란기하는 간부들을 한무리 처분하였다. 그러면서 농촌에서는 “3자1포”, “4대자유”를 실시했던것이다. 문화혁명 때 소위 “류등로선”이라하여 비판하면서 더 똑똑히 알게되였다. 당시 당지의 사원들에게 자류지, 자류산을 주었고 자유시장을 개방했다. 그러나 량식을 시장에 내놓고 팔지는 못하게 했다. 원래 인민공사가 통일수구하고 통일분배하던 “공산주의분배원칙”을 “3급소유와 대를 기초”로 하는 분배원칙으로 고치였다. 그러면서 함께 “三包一獎四固定”을 실시했다. 三포의 내용은 공수를 소조가 맡고 농호가 맡으며 림시농군이 맡는것인데 산량이 계획한것을 초과할 때는 “초산장려”하는것이다. 4고정이란 토지, 로력, 밭갈이소, 농구를 고정시키는것이다. 
 
인민공사 대집체때는 “일평일조”로하여 토지, 로력, 밭갈이소, 농구의 귀속이 완전히 헝클어지고말았다. 그래야만이 이른바 다시 나누고 고정하여 대를 기초로한 경제핵산원칙을 실현할 수 있다는것이였다.
 

여름에 대공사에서는 나를 팔보관리구에 공작대로 내려가게 했다. 그때는 중앙에서 벌써 인민공사식당을 철소하라는 문건을 내렸던것이다. 그렇지만 공사당위에서 아직 태도를 표시하지 않으니 누구든 감히 철소하지 못했다. 나는 한 생산대에 내려갔다. 그곳의 식당에서는 식량을 사원에게 나누어 주어 사원이 집에 가서 밥을 지어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규률을 위반한것이여서 비평했다. 그러나 감히 투쟁하지도 우경모자도 씌우지 못했던것이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나는 새삼스레 학과장(郝科長)이 생각난다. 그가 어느 급에서 파견되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공사간부들은 그를 그저 학과장이라 불렀던것이다. 그는 허름한 옷에 “유사모”를 쓰고는 진종일 사원들과 같이 휩쓸면서 그네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하루는 점심을 먹을 때였는데 그가 서기식당인 보관실문앞에 가서 큰소리로 사무장보고 문을 열라해놓고는 말했던것이다.
  
 “열어주지 않으면 내가 발로 차고 들어갈테다!" 
  
들어가 보니 서기와 사무장이 한창 식사를 하고있는 중이였는데 그들은 얼른 그를 끌면서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학과장은 그런 소리에는 응대도 없이 사무장보고 밥상우에 있는 술과 고기채를 당장 큰칸에 날라다가 사원들도 좀 먹어보게하라했다. 당황해난 사무장은 어떻게했으면 좋을지 몰라했고 서기는 전전긍긍하여 일어나자도 못했다.
   학과장은 그 둘에게 한바탕 욕사발을 퍼부었다.   
“개같은 자식들, 군중들은 겨도 배물리 먹지 못하는네 네놈들은 주지육림에 빠져있단말이냐, 그래!”
   
밥먹으러왔던 사람들이 그런 욕설을 듣고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랬지만 박수까지는 치지 못했다. 공사서기라는 그 범이 무서워서. 하지만 오늘 범의 궁둥이를 감히 때리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기에 그들 모두가 내심으로는 고맙고 반가왔던것이다.     
  
학과장은 공사량식관리소에서 입쌀을 가공하는 일을 군중에게 맡겨 완성케했다. 그러면서 보드라운 겨를 나누어 주어 먹게했다. 군중들은 입쌀겨로라도 몇끼 배불려보니 살것같다면서 만족스러워했다.

학과장이 돌아가자 전현의 정풍정사를 하면서 시점을 여기에다 잡았다.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공사, 관리구와 생산대 3급의 령도 3명을 체포했고 그 다음에는 이어서 3개 “홍기”관리구의 서기를 체포했다.

            1959년, 장삼을 입은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굶어죽었다


오늘은 내가 음마농장에 돌아온 마직막날이다, 래일 여기를 떠나 소완농장에 가게된다.  
나는 1965년에 하서주랑서단의 소완농장에 하향해서 로사련에서 농공질을 했던것이다. 아마 1970녀도일것이다. 우리 련의 련장이 음마농장의상점주인으로 조동되면서 나도 함께 조동되여 상점의 점원이 되었던거다. 
  
떠나기마지막날이였다. 저녁을 먹고나서 나는 창부를 찾아가 마당을 거닐면서 전에 같이왔던 지식청년들이 돌아가고 남아있는 친구들이 제2차의 창업을 하느라 일떠세운 맥주과립가공공장을 가 보다가 땅거미질무렵에야 초대소로 돌아왔다. 초대소문을 열고 들어서니 웬 사람이 쏘파에서 벌떡일어나면서 “양회계!” 하고 부르는것이였다. 어디서 들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를 마주보았다. 누구던가?....


난 허지전이야.


 그렇지, 나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농장기무대의 뜨락또르를 몰던 기무원이였던것이다. 나는 그보고 어떻게 되어 여기는 왔는가고 물었다.   
그는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일부러 보러왔다는것이였다.
                 
과연 고마운일이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내가 들어있는 객방으로 들어갔다. 차물을 따르고나서 나는 그를 향해 황갑만변전소에 조동했다기에 다시는 보지 못할줄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보게되는구나했다. 그 변전소는 여기서 10여리 떨어져있었다. 그는 자기네 소장이 내가 왔다는것을 알려줘서 곧바로 왔다는것이였다. 감동을 주는 말이였다. 나는 뭐라고했으면 좋을지 적중한 말을 미처 찾지 못했다. 음마농장에 오고보니 사뭇 면면한 회포를 자아냈던것이다. 그때 심어놓은 백양나무들은 그사이 아름차게 자라났다. 하지만  여기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이안되였다. 지식청년은 거의다 도시로 되돌아가고 로직공은 다가 퇴직해버렸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은 거의가 생면이였다. 그때 여기로 함께왔던 1백여명의 고아에서 아직 남아있는것이 2,30명이 된다는데 그나마 여러 마을에 나뉘였길래 서로지간에 만나본지도 오래다는거다. 하기에 나는 여기로 오긴했어도 형용그대로 빈층집에 들어 온 감이였다.   
나는 그보고 지금도 배구치기를 즐기는가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다들 이제는 퇴직을 했는데 어떻게 치겠는가 했다.
 

나도 웃엇다. 내가 그렇게 물어보는 자체가 어처구니없었다.   이제는 어언 30년이나 지나갔다. 그때는 농장에서 해마다 배구시합을 조직했다. 그래서 련대에서는 운동을 즐기는 열몇을 뽑아 며칠간 훈련을 시킨 후에는 농장에서 열리는 시합에 내보내군했던것이다. 나는 바로 그때에 그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배구를 치던일이며 친구들이며 서로의 가정형편이며를 말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보고 그래 집에는 자주가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낯색을 흐리우면서 머리를 가로젓더니 자기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것이였다.
나는 적이 놀랬다.
어쩌면 한번도 안가보는가?
내가 집이 없다는걸 알면서.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
이윽히 침묵했다가 나는 입을 다시열었다.
그래도 친척이야 있겠지?
 
거래를 하잖아. 내가 거래하고싶잖은거야. 몇해전에 삼촌이 편지를 했더군. 한번 와보겠는데 기차를 어떻게 갈아타는지 알려달라고. 나는 회답도 하잖고 편지를 찢어버리고말았어.
아니, 건 왜서?
내가 굶어 곁사람의 방조를 바랄적에 그는 어디에 가 있었는가말이요?
나는 이윽고 숙였던 머리를 다시치키고 말했다. 그런걸 왜 한번도 말하지 않았나. 나는 여적지 그런 가정사가 있는줄은 몰랐지.
난 누구하구도 말하지 않았어. 가슴아프기만 하는 그런 얘기를 누가 듣자구나 하겠는가. 안그래?
아니야, 그런건 아니야. 누가듣지 않겠다구하는가, 거기서 말하지 않으니 듣지 못한게지. 이젠 다 늙었어. 아직까지도... 그래 그런일을 평생 가슴속에 묻어둘 생각인가? 옛친구한테도 말하지 않으면?

하긴 늙었지.... 그는 탄식을 길게 뽑고나서 입을 열고 말했다. 요몇년사이 나도 사상이 좀 변했어. 지나간 력사지만 이 일만은 애들에게 꼭 말해서 우리가 당했던 고통을 알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단말이요.
  나의 아버지부터 얘기를 하지. 우리 하정평에서 온 고아들은 다 부모들을 잃은거요. 하긴 사람마다 죽은 경위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다가 꼭같이 굶어죽은것만은 사실인거요.  1958년에 아버지는 고란현(皐蘭縣)에 민공을 갔던거요, 강철을 뽑아내느라고. 그때는 대약진철이아닌가, 그래서 강철을 제련한다구 고와댔지. 정서지구에는 대부분 현에 철광이 없고 석탄도 안나오. 그래서 전구의 민공들은 한데 모여갖고는 고란현하고 정원현에 가서 강철을 제련해야했던거요. 통위현에서만도 1만7천명갔으니 생각해보오, 민공의 숫자가 얼마였겠소. 1959년 봄에 강철제련은 실패하고말았소. 우리 아버지가 언녕말했던거요. 이따위 거머틱틱한 초탄부스럼이나 만들어서는 뭘하는가구. 그래그꼴이 되고나니 다들 걷어치우고 그만 돌아와버렸던거요. 돌아오니 할 일이 없다면서 수백, 적산 철로닦기에 보내더라오. 그래 거기가서 일을 하고는 1959년 여름에 집으로 돌아왔던거요. 그런데 그건.... 아니야, 아니야, 돌려보내서 온게 아니야, 집에 자식들을 돌볼 엄마가 없으니까 뺑소니를 친게지. 아버지는 나와 나의 두 녀동생이 걱정되였던거요. 우리 집에 그렇게 아이가 셋이였는데 내가 맏이였소. 난 1947년도생이요.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없어진거요. 1959년봄이였소. 공사식당은 량식이 떨어져 사원들에게 내내 멀건 죽만 먹이다가 여름이 되니 그런것마저 먹일 수 없게 되니 아예 퍼런 나물국을 먹어라고 주었던거요. 이게 그래 괴상한 일이 아니고뭐요, 글쎄. 여름에 밀을 수확했는데 왜서 먹을 량식이 없는가말이요? 모두들 하는 말이 공사에 가져다가 징구량으로 몽땅 바쳤다나. 그런데 징구량이 모자란다면서  수색대가 집집을 뒤져 묵은 량식을 좀씩 감쳐둔걸 싹 다 걷어갔던거요. 그러니 사원들은 뭘 먹고 살란말이요? 나무껍지를 발라먹고 풀뿌리를 캐먹는 수밖에.   
하루는 어머니가 밀타작을 하다가 배가 너무너무고프니 밀단곁에 회색줄기에 닭털모양으로 잎이 촘촘히 난 풀이 있길래 그걸 뜯어 입에 넣어 씹어삼켯던거요. 그래 어떻게 됐겠소.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남의 부축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던거요. 메스겁고 구토가 나면서 복통이 심하니 자기는 독풀을 먹었다는걸 알구는 물을 마시였소. 그래도 복통은 멎지 않고 점점 더 심했고.... 구들에 누운채 말을 못하더구만. 오라고 손짓하길래 가까이갔는데 어머니는 혀가 감각을 잃고 굳어진통에 한마디도 번지지못한채 그만 그길로 세상뜨고만거요. 하고푼 마지막 말도 못한채.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하여 대장은 적극분자들을 조직해서 련거퍼 두 번 투쟁하더니 그만뒀소. 더 추구하지도 않았고. 뉘집에든 어른이 어없이야 어디되겠소?


기실 우리 집에는 강냉이를 감춰둔게 두독이나 있었던거요. 그런것을 후에 공사의 수사대가 와서 한알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걷어간거요. 그 량식은 1958년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파묻은거였소. 그때는 집체식당이 방금생겨 량식을 다 집체에 바치라했지. 집체식당을 하면 공산주의로 들어가니 사람마다 배불리먹거니와 이제 곧 집집마다 전화를 놓고 잘살텐데 집에다 량식을 둬서는 뭘하느냐 그거였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절반만 바치고 절반은 감춰둿던거요. 아버지, 어머니는 뭣이 공산주의인지 모르지만 량식이 목숨을 살린다는건 잘알고있었던거요. 그들은 공산주의가 당장오리라는 선전같은건 아예 믿지도 않았던거요. 그러니 그들이 사상이야 반동일 수도 있었지. 황차 가정성분이 부농이였으니 계급투쟁리론대로하면야 본질상 반동이 아니겠소.
우리 아버지는 형제가 넷이였는데 아버지가 맏이였구.... 아버지가 전에는 마영진성안에다 상점을 차리고 살았던거요. 해방전에 부친을 여의자 형제 넷은 분가를 했던거요. 아버지는 또한 농사일도 잘하는 실농군이였소. 지금도 기억나는데 밭갈이철에 아버지가 호리질해놓은걸 보면 잣대로 줄을 친것 같이 밭이랑이 곧고 깔끔했던거요. 아버지가 말했던거요, 밭갈이해놓은걸 보고 농부의 낯이 깨끗한가 깨끗하지 않는가를 안다고말이요.


부모님들이 강냉이를 감춰둔걸 내가 알고있었던거요. 1958년에 내 나이가 11살이였지. 강내이독을 파묻던 그날밤 나는 대문가에서 망을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뜰악에다 구덩이를 팟던거요. 강냉이가 싹이 날까봐 독에 넣은채로 웅덩이에 넣고는 밀짚으로 우를 덮은다음 흙으로 우를 평평하게 했고 그런 다음에는 거기에다 냉이를 심었던거요. 이듬해에는 편두를 심었다가 뽑아버리고는 다시 냉이를 심고.... 수사대가 량식을 찾아내느라 뒤질 때는 냉이가 꽃이 피였길래 그네들이 그 밑에다 량식을 숨겼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거요. 그들은 손에다 쇠꼬쟁이를 들고 다니면서 집뜰악의 의심되는 곳은 다 찔러보았던거요. 돼지우리, 변소도 검사했고.... 집안의 구석구석 어디를 뒤지지 않았겠소. 지어는 장수(漿水)독에마저 쇠꼬쟁이를 넣어 찔러봤던거요. (장수ㅡ서북지구의 백성들이 담그는 일종의 시큼한 채. 주로 절군 물을 마시는데 밥에 넣어 식초대신 리용하기도 한다.)

1959년봄이되니 배고파 어디 견딜 수 있어야지. 그래 내가 어머니보고 다리맥이 없어 후둘후둘 떨린다면서 강냉이를 꺼내여 먹자고했지. 그랬더니 어머니는 “안된다, 굶을 날이 아직은 뒤에있다.”는것였소.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강냉이를 꺼내여 먹지 못했소. 아버지가 말했던거요. “감히 먹지 못하겠구나. 대에서 알기만하면야 인차걷어갈거다.” 그때는 집체식당에서 사원들이 그래도 퍼런 풋나물국이라도 먹였기에 개인집에서 연기나는걸 허락하지 않았던거요. 집굴뚝에 연기만 나면 대장이 적극분자들을 데리고 조사를 다녔던거요. 야채도 식량이였으니까.

음력9월이 되었어도 아버지는 강냉이를 끄집어 내여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거요. 그때는 집체식당이 이미 문을 닫아 집집에서 야채를 끓여먹게되였던거요. 
   
아버지는 담이 작은 분이였소. 아버지는 들키는 날이면 비판대회를 열가봐 벌벌 떨었던거요. 안그럴리 없지. 그때 전구공작조(專區工作組)가 어느 한 농가에서 땅에 묻어 감춰둔 량식을 몇십근 들춰내고는 큰공을 세웠다고 마영진에다 1만명 투쟁대회를 열었던거요. 그 농가의 아들이 현 어느 공작부의 부장이였는데 전구공작조는 그 아들이 투쟁대회를 집행하여 아버지를 계급의 적, 모첨인물(冒尖人物)이라 비판하게했던거요. 모첨인물이라는게 뭔지 아오? 부자가 돼보자는 농민을 가리키는거요! 
  
아버지는 그 투쟁대회를 보고와서 알려줬던거요. 회장에다는 기관총을 걸어놓았고 민병들은 손에 서리발치는 큰 칼을 쥐고 주위를 지키더라고. 아버지는 자기까지 잡아내여 투쟁할까봐 무서워죽을지경이였다오. 생각해보오, 토개때가 되돌아온것 같았으니 안그럴리 있겠소. 토개때는 어깨에 총을 멘 민병들이 집재산을 빼돌릴까봐 문을 지켰다오. 우리 집이 지주로 될 조건이 충분하다면서. 그런데 조사해본 결과 되지 않으니 부농으로 획분하더라오. 그렇지만 그래도 지주와 꼭같이 취급하면서 회의만 열리면 번번이 끌어내다 앞에 세워놓고는 지주와 같이 비판하고 투쟁하면서 계급의 적이라 했다오. 쩍허면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면서.


짐승이면 몰라도 사람이 알곡을 전혀먹지 않고 살아가기야 어려운 일이지, 안그렇소?  이제 겨우 7살밖에 안되는 망냉이 녀동생이 굶어서 맥골쓰지 못하고 비틀거렸소. 나는 보다못해 아버하고 말했던거요. 아버지, 강냉이를 꺼내 먹읍시다. 굶어죽겠는데도 먹지 않고 감춰둿다가는 그래 어느때에 먹어보겠는가구했던거요. 어머니는 한알 입에 넣어보지도 못하고 죽지 않았는가고 덧보태면서말이요. 아버지는 한참 궁리하더니 내 의견에 동의했던거요. 이때는 공사에서 개인집에 불을 때는것을 허용했던거요. 그래 모두들 야채를 캐여 끓여먹을 수 있었지. 재간이 있는 집은 무슨 방법이든 대여 푸대죽이라도 끓여먹었을게요. 이건 내 생각이오만. 량식을 묘하게 감춘집이 왜 우리밖에 없었겠소, 안그러우? 사람이 눈에 달이 오른 땐데. 그날 밤 우리는 뒤뜰악에 파묻은 강냉이를 얼마간 꺼내였소. 마침 깨버리지 않고 건사해 둔 솥이 있었길래 물을 붓고 그걸 푹 끓이였지. 그래서 우리집 식솔 넷은 그날 밤 처음으로 배를 불려봤던거요.

그런데 그같이 기쁜시간도 그만 오래가지 못했소. 이틑날 아침때였소. 작은 녀동생이 간밤에 먹고 남긴것을 먹다가 그만 들켯던거요. 이웃에 사는 촌의 적극분자가 우리 집에 왔다가 걔가 강냉이알을 씹는걸 봤던거요. 그래 그길로 생산대장을 찾아가 적발한다면서 고발해서 생산대장은 집체식당관리원과 함께 적극분자로 조직된 수사대를 거느리고 번개같이 우리 집에 나타났던거요. 아버지는 댓구할 말이 없어서 벌벌 떨기만했소. 그래 내가 나서서 집체식당을 꾸린다는 소문이 났을 때 굶어죽을가봐 부모들과 떼질을 써서 제먹자던 량식을 얼마간 감추게 된거라고말했소.

그들은 내 말은 개방구로 여기는지 듣는둥마는둥 하더니 수색하여 감추어둔 강내이 두독을 몽땅 메여간거요. 그리고는 그 당날로 비판회를 열고 아버지를 끌어 내다가 투쟁했지. 량식을 감추고 여지껏 내놓지 않은건 바로 계급의 적이 본성을 고치지 못해서 공산당의 정책에 완강하게 항거한 것이며 공산주의를 믿지 않고 복벽을 꿈꾼것이라 하면서말이요. 그리고는 아버지한테 체력이 가장 소모되는 힘든 일만을 골라 시켰던거요.  얻어먹는것 없이 고역을 당하던 아버지는 이러다가 꺾구러지기보다는 차라리 산속으로 도망쳐 원시인이 되어 살다가 소리없이 죽는편이 낳겠다 마음을 도슬려먹고는 짐을 꿍쳤던거요. 그는 나보고 동생들을 잘 돌보거라, 산나물을 캐여 말리우고 산과일을 따 말리웠다가 가져다주리라 했지. 글쎄 그래도 되겠지만 나는 아버지가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가, 그래도 집에 아버지가 있어야지 하면서 그가 떠나는것을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던거요. 아버지는 여러말로 나를 설복시키느라했지만 나는 그것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꿍친 짐을 주지 않았던거요.

아버지는 끝내 집을 떠날 수 없게 되었소. 내가 꿍친 짐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였지. 이웃의 적극분자(후에 알고보니 그자는 전문 우리를 감독할 임무를 맡았더구만.)가 어떻게 낌새를 알고는 또 고발을 했던거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번에는 “도피분자”로 몰렸던것이요. 나는 내가 그 “죄”를 써야한다고 생각되여 생산대장을 찾아가 그런일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촉하여 산에 들어가 며칠간 있으면서 산나물을 많이 캐오게했노라했소. 
  
그러나 그들이 내 말을 믿어줄리 만무였지.
   
생산대에서는 즉시 대회를 소집하여 아버지를 “방조”한다고 하였소. 그 “방조”라는게 어떤겐지아오. 사람을 중간에 세워놓고는 빙 둘러서서 돌아가면서 발길로 차는것이였소. 교훈을 준다는게지. 
  
아버지한테 발길질한 사람들 다가 오래간만에 우리 집에서 압수해 간 강냉이를 먹어보고는 기뻐했을거요. 생산대에는 그런 알곡이 없어진지두 오래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뭇발질을 당하고는 그만 들어눕고만거요. 그래서 이제는 일하러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방조”를 받은지 5일만에 작은 녀동생이 죽고말았소. 그래 내다가 묻어야겠는데 아버지는 일어날 념을 하지 않았소. 하는 수 없이  내가 안았지. 어찌나 무거운지. 아니요 걔가 무거운게 아니라 내가 시체를 다룰 맥이 없었던거요. 나는 그를 안고 문을 나가다가 꼭그라지고말았소. 그래 아느새 숨을 돌려서야 다시금 움직일 수 있었던거요. 나는 걔를 품에 안고 뒷뜨락에 가 강냉이독을 끄집어 낸 구덩이에 넣었소. 삽을 쥐였지만 흙을 뜰 힘이 나지 않아 발로 흙덩이를 밀어넣었던거요.

한주일지나 큰녀동생이 얼굴이 붓기시작했소. 끔찍스럽기두하지. 소래짝같이 크게되더란말이요. 면목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지경으로말이요.

언젠가 할머니한테 들은 기억이 되살아나더구만. 사람은 오래굶으면 얼굴에 부중이 생기는데 녀동생이 바로 그런 부중이였건거요. 사람은 부중이 생기면 맥골을 쓰지 못한다더니 여동생이 그러했소. 내가 국을 끓여 먹어라고 한사발 줬더니 그는 겨우 반사발을 먹고는 층계에 누워 볓쪼임을 했던거요.
며칠지나서 대장이 우리 집에 찾아와 하는 말이 파종을 해야겠는데 누가 일밭에 나갈 수 있느냐, 일을 하면 마령서한그릇을 준다는것이였소. 아버지는 일을 나갈 수 없었소. 그는 구들에 엎딘채 대장보고 일어날 수 없어서 못나겠다고 했소. 대장이 돌아가자 나는 아버지와 말했던거요. 아버지어째서 못일어나는가, 일어나기 싫어서 그러는게 아닌가? 일어나서 일을 하는척해도 마령서한그릇이 차례질텐데? 그래 누워서 죽기를 기다릴셈인가? 아버지는 마령서한그릇을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겠는데 하는것이였소.

나는 그래도 마령서한그릇먹으면야 죽는게 늦고 안먹으면 빠르지 않은가고 반박했소.

아버지는 나를 욕했던거요. 네나 먹어라, 네나 먹어! 네나 먹고 살거라, 나는 이대로 죽고말겠다. 아버지는 내 일에 화났던거요. 그가 전날 꿍쳤던 짐은 생산대장이 빼앗아갔던거요. 아버지는 여기를 떠나지 못한건 내탓이라 했던거요. 그러니 결국은 내가 그를 해친거로 된게 아니요.

내가 일하러 나갔던거요. 하는 일은 전간에서 흙덩이를 부수는것이였소. 곁에서 밀종자를 넣겠는데 흑덩이가 데굴데굴 구르니 그걸 부수어야했던거요. 나무방망이를 썼는데 기실은 가벼운것이였소. 그런데도 그게 어찌나 무거운지.... 과연 힘들었소. 그래도 일은 해야지.... 다 하고나니 마령서한그릇을 주더구만. 어찌도 기쁜지. 지금도 기억이 똑똑한데 푸른빛갈을 겉면에 올린 그 그릇은 본지에서 토방법으로 만들어 쓰는 그릇이였던거요.

 이게 그래 어디 마령서 형태나 보이는가말이요, 글쎄. 그래도 나는 한그릇 받아 손에 드니 다행이라 여기면서 집으로 갔던거요. 먹을게 있으니 굶어죽지 않게 됐구나! 나는 집에 가자 마령서를 녀동생에게 먹이였소. 아버지한테는 주려고하지 않고. 일하러 나가면 한그릇 차례질텐데 하고. 나는 오히려 아버지한테 불만이 컷던거요. 그는 구들에 누운채 꼼짝하지 않았소. 나는 녀동생을 부축하면서 마령서탕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했소. 아버지가 듣고서 나의 애명을 부르면서 얘야 네가 왜 날 먹라는 소리는 안하느냐했소. 나는 아버지보고 일하러 나가면 생길건데 왜 나가지 않는가 그래서 먹으라는 말은 하고싶지도않다고 했던거요.

오후에 나는 또 흙덩이부시러 나갔소. 어떤때는 밭에 꿀어 엎디여 흙을 부수었소. 그러면서 심어놓은 밀씨가 밖으로 나온걸 보기만하면 주어 입에 넣었소. 그러는 나를 보고 대장은 욕을 퍼질렀던거요. 나의 손목을 분질러놓겠다고 하면서. 그래도 나는 밖에 나온 밀씨만 보이면 주어서 입에 넣군했던거요. 그래도 저녘이면 식당에 가서 마령서한그릇 타고.... 나는 그걸 집에 갖고 가서 절반은 녀동생한테 먹이였소. 이번에는 아버지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소. 달라해도 내가 주지 않을줄을 아는지. 나는 그를 그냥 쌀쌀히 대할 수는 없었소. 그래 나는 아버지께도 절반 주면서 잡수시라한거요. 아버지는 받아 잡숫기시작했소.   
이때 녀동생이 목이 마르다면서 나보고 물을 달라는것이였소. 집에는 마실물도 없었던거요. 그래서 나는 물명을 들고 가까운데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소. 물가지러 왔으니 문을 좀 열어달라고 사정했던거요. 그런데 열어줘야지. 식당에는 사람이 있었던거요. 밤중이라서 일어나기 싫으니 물이 없다는것이였소. 나는 다시 또 사정했지, 동생이 물을 먹겠다해서 그러니 좀 달라구. 그런데 어디 선심을 써줘야지. 기다려도 기다려도 종시 열어줄 념을 하지 않으니 나는 하는 수 없이 돌아서고말았던거요. 
   
집에 돌아온 나는 하는 수 없이 물통을 들고 개울로 향했소. 산골개울이였는데 마을에서 2리가량 먼데있었던거요. 밤은 어둡지 사위를 더듬으면서 가고가다나니 계곡에 거진이른건데 무언가 발에 걸려 나는 그만 앞으로 꼭그라지고말았던거요. 알고보니 죽은 사람의 시체에 내가 걸채였던거요. 겨울이여서 물을 퍼오려면 얼음을 깨야 하는건데 나는 떠나올 때 미처생각이 돌지 않아서 얼음깰 도구도 갇고오지 않았던거요. 그래 하는 수 없이 어둠속에서 손더듬이를 하여 겨우 돌쪼각 하나를 찾았던거요. 나는 그걸로 얼음을 까기 시작했소. 그러다 맥이 진해 더 까지 못하고 얼음조각들을 주어 담아갔고 집으로 돌아왔던거요. 그러느라니 날이 히붐히 밝아오더구만. 나는 얼음을 솥에 붓고 불을 때기시작했소. 그런데 얼음이 빨리녹아줘야지.  
   
나는 얼마가량 녹은 물을 떠서 녀동생게 주었소. 녀동생은 먹을 수 없다는것이였소. 나는 숱갈로 떠서 그의 입에 조금씩 넣어주면서 아버지를 나무람했던거요. 왜 녀동생을 돌보지 않는가구. 아버지는 그사이 장삼을 꺼내 입었더구만. 나의 푸념질에 아버지기 대꾸하는것이였소. 나도 이젠 당장 죽을 사람인데 언제 다른 사람을 돌볼새있는가구.
얼마지나지 않아서 녀동생은 끝내 숨을 거두고말았소.

나는 녀동생을 업을 수도 안을 수도 없었소. 그래 하는 수없이 사람을 불러다 그를 뒤뜰악에 갖고 가 작은 녀동생을 넣은 구덩이에 넣고 함께 파묻은거요. 
   
나는 이틑날도 사흗날도 계속해서 일하러 나갔소. 마령서를 얻어먹기 위해서. 나는 한그릇타서는 절반을 아버지께 드리였소. 아버지는 빨리 일어나 자기도 일하러 나가야겠다고 했소. 서천에 가면 입고 갈 장삼을 벗기까지 하면서. 그 장삼은 해방나던 직전에 어니가 맘먹고 지어준 것이였다오. 그때는 온마을치고 그같이 좋은 적삼을 입은 사람은 그 하나뿐이였소. 아버지는 명절때라야 꺼내입군했던거요. 
   
아버지는 왜선지 갑자기 정신나는 것 같다면서 죽지 않는다, 죽지 않아, 래일 일하러 나간다했소.


나는 아버지께서 정신차리는것 같으니 기뻐서 말했던거요. 아버지 세상뜨지 말아요. 그러니 아버지도 말씀했지, 일만 하면 하루에 마령서 두그릇주잖냐, 그건 하느님이 죽지 말라구하는거다!


아침에 깨여나 보니 아버지는 엎딘채 까딱하지 않더구만. 나는 아버지가 또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했지, 일하기 싫어서. 나는 높은 소리로 불렀던거요. 아버지, 왜 안일나요, 오늘은 일하러 나간다해놓구는?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소. 나는 또 말했던거요. 아버지는 말한대로 하잖으니 거짓말쟁이야! 그래도 응대가 없길래 나는 그가 잠을 깨지 못하는 줄로 알고 다가가 흔들었던거요. 그런데도 아무반응이 없고 몸은 꽛꽛했소. 그제야 나는 알았던거요, 아버지는 밤새에 사망했다는걸.

나는 농짝에서 장삼을 꺼내여 아버지께 입혀드렸소. 생일이거나 명절때가 되어야 꺼내여 입군하던 그 장삼을 말이요.   나는 그러고나서 대장을 찾아가 아버지가 밤에 세상을 떴으니 시신을  파묻어달라했던거요. 그런데 대장이 오지 않았소. 나는 종이로 아버지의 얼굴을 덮었소. 사흘이 지나서야 대장이 회계와 보관원을 불러 데리고 왔던거요. 그들은 우리집의 류조마자(柳條耱子ㅡ중국서남지구에서 갈아놓은 땅을 고르는데 쓰는 버들로 엮은 농구.)를 가져다 아버지시신을 들어 올려놓고는 침대보를 덮어 내갔소. 회계가 나보고 너는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것이였소. 나는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했소.

아버지시신을 묻은 그날 우리 집에 사람이 많이왔더랬소. 거의가 친척들이였소. 모두들 나를 보러왔다면서 하는 소리가 인과응보라는것이였소. 나는 그네들이 다 돌아간 후에야 발견한거요. 삽이 없어졌고 호미가 없어졌고 물통이 없어졌고 사기그릇이 없어졌고 지어는 물길을 때 쓰는 질항아리마저 보이지 않았던거요. 나는 혼자 며칠 보내고나서 집을 뛸쳐나와 공사로 달려갔소. 거기에 유아원이 있는데 전문 부모없는 애들을 기른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었던거요.
 
1969년겨울날, 오대평농장이 음마농장으로 옮겨가서 나는 한번 집에 가 보았던거요. 아버지묘를 옮길 생각이였지. 나는 회계를 찾고 보관원을 찾아 아버지를 어디에다 묻었는가고 물어봤소. 그러니 어쩌는지 아오? 그들 다가 모르겠다는것이였소. 그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메내가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 매장하게했던거요. 내가 그럼 그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더니 또 뭐라는지 아오? “문을 닫았어!” 한단말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오, 문을 닫는다는게? 그건말이요, 우리네 그 지방의 방언인데 온 가족이 다 죽어버렸다는 소리요. 그러니 어디가서 더 물어보겠는가말이요. 

그 후 다시는 집에 가지 않았소.  
하지진(何至眞)이 자기집의 력사를 이같이 알려주었다. 
 과연 눈물겨웠다. 이윽고 내가 물었다. 두 녀동생은? 아직도 뒤뜰악에 묻혀있겠지?

아니요, 그때 가보니 우리 집을 대부에서 점령했더구만. 나는 녀동생둘을 파내여 조상들의 묘곁에 묻겠노라했소. 그런데 어떤 친척이 그건 안된다 계집애들를 어떻게 조상곁에다 묻느냐 녀편네는 묻을 수 있어도 하는 것이였소. 나는 그따위 법이나 족규를 믿지 않는다면서 기여히 동생들을 거기로 옮겨야한다고 우겼던거요, 벼락이 친다해도!

그날밤 나와 하지진은 얘기를 오래하다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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