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 묻힌 비밀(26) (1)중쏘관계파렬 : 흐루쇼브 모택동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때문 (2)파렬의 길(1960ㅡ1963)
중쏘관계파렬 : 흐루쇼브 모택동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때문
새중국이 성립된 후 수많은 전문가들이 낯설고 물선 이국땅 중국에 와서 자기들의 지식,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였는바 그들은 중국인민과 함께 땀흘리면서 새정권의 온정과 경제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공업화기초건설을 하느라 모든 힘을 다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7월, 쏘련정부의 종이 한 장의 명령에 따라 그때 중국에 와 있던 모든 전문가들이 하루밤사이에 갑자기 돌아가고말았다. 하여 중국은 중대한 항목들이 메울수 없는 손실을 입게되였으니 이 사건은 중쏘량국의 관계가 악화되였음을 표시한것이다.
중쏘관계는 50년대후기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량당은 정치로선과 관점상에서 분기가 컸거니와 그것이 공개화되여 쏘련이 쓰딸린을 부정하는 반면에 중국은 쓰딸린을 비호했다. 쏘련은 중국이 개인숭배를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중쏘량당시대에 화평공처, 사회주의혁명, 제국주의본성 등 일련의 문제에 대해서 이름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적인 변론을 했던것이다.
다음은 중쏘량당간의 분기인데 국가와 민족의 리익을 발전시키기 위한 모순으로서 초점은 1958년 4월 7일에 중국의 지도자가 쏘련에 중국과 합작하여 공동히 공률이 높은 장파방송국과 잠수함대를 세우자고 제의한 것 때문에 쌍방간에 논쟁이 생긴 그것이였다.
셋째는 중쏘량국은 중대한 국제행동을 함에 제마끔 서로알리지도 않은것이다. 국제관계문제를 처리하는 방면에서 협조가 일치하지 않다보니 이제는 배를 같이 타고 강을 건너는 일이 없게 되여버렸다. 쏘련은 화해를 바라고 중국은 투쟁하려했다. 쏘공의 총서기인 흐루쇼브는 미쏘간에 정상회담을 열고 평화경쟁으로 핵군비축소등을 실시하여 서방국가들과 온화한 관게를 건립하련다고 했다. 그렇지만 모택동은 투쟁으로 생존을 쟁취해야한다면서 국제긴장국세를 리용하여 압력을 가하며 국내의 일체 적극인소를 동원하여 “대약진”을 가속화함으로써 단시간내에 신속히 국력, 군력을 키워 영국을 초과하고 미국을 따라잡아 제국주의와 맛선다는것이였다.
넷째는 경제건설방면에서 모택동과 흐루쇼브는 서로 대방을 질책했는데 다가 대방이 틀렷다는것이였다. 중국은 쏘련에서 사회주의기업은 반드시 리윤이 있어야 한다고 제출한 것은 수정주의관점이라했다. 하지만 쏘련은 중국의 대약진은 소자산계급의 광열로서 공상적인 사회주의라했다.
이리하여 중쏘량국공산당과 중쏘량국관계의 파렬되였다. 의식형태와 민족모순이 교착되였다. 중공은 쏘공이 창도한 평화경쟁에 대해 비평했거니와 전민당은 수정주의라했다. 쏘공은 중공이 공산주의유아병에 걸려 전쟁모험을 한다고 비평했다. 모택동은 쓰딸린의 대국쇼비니즘을 극도로 미워하면서도 다른한면으로는 쓰딸린의 독재와 개인숭배를 몹시 흠상했다. 흐루쇼브는 사회주의진영에서의 중국의 작용을 중시하는 한편 중국을 제마음대로 부리려했기에 중국지도자의 자손심을 상하게 했던것이다.
파렬의 길 (1960ㅡ 1963)
중공중앙은 중쏘관계의 위기를 어떻게 대했는가
손가락 아홉 개와 하나.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10주년기간 북경에서 중쏘량국의 지도자들은 서로만나 중인변계충돌을 대하는 중국의 정책을 어떻게 볼것인가, 주동적으로 미국과 관계를 온화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 없는냐, 미국범인들을 눌러놓고있는 등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처음으로 정면으로 격렬한 쟁론을 벌리였다. 서로간 격정을 랭정히 삭인후에 흐루쇼브의 제의대로 이번의 불유쾌한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해 각기 회담기록들을 서슴없이 없애버리였다. 그랬어도 이미 악회된 추세는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이때 특별히는 중국쪽에서 목에 걸린 가시가 있었으니 주요하게는 두가지 문제였다. 첫째는 인도가 암중에서 서장의 반란을 지지하면서 고의적으로 변경에서 사달을 일으키고있건만도 중국의 맹국이라는 쏘련은 알게모르게 인도쪽으로 쏠리는 것이고 둘째는 흐루쇼브가 내놓고 평화과도, 평화경쟁, 평화공처를 부르짖으면서 중국의 제일 큰 원쑤인 미국에 추파를 던지면서 맞장구를 칠 지경에 이른것이다. 그렇지만도 대다수 중국지도자들은 아직은 중쏘관계가 뿌리까지 동요가 생긴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진의(陳毅)는 그해의 12월 27일에 한 보고에서 지어는 “제국주의자, 현대수정주의자와 각국반동파는 사회주의각국지간, 특히는 중쏘량국간의 손가락하나만큼한, 지어는 손가락하나만큼도 안되는 분기를 리용하여 쓸데없이 리간을 도발하려 애쓰면서 헛짓을 하고있다.” 라고 특히 훈계했던것이다. 번연한바 진의의 설법대로 하면 흐루쇼브가 아직은 “현대수정주의자”가 아니였다. 그가 보고에서 가리킨 “현대수정주의”란 바로 유고슬라비아였던것이다.
1960년 1월 중순에 상해에서 열린 중공중앙사업회의에서는 정황을 진일보로 반영했다. 중쏘분기가 이미 사실로 된 것을 고려하고 당내고급간부들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껴 회의는 모택동의 동의와 비준을 거쳐 “쏘련과 우리 나라가 중대한 정치문제에 대한 일부견해”, “국제공산주의운동”, “중쏘가 국제형세에 대한 약간의 관점에 관하여”, “중쏘가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에 대한 약간의 관점에 관하여”, “중쏘가 리론문제에 대한 약간의 관점에 관하여” 등 일련의 대조성적인 자료들을 인발했다.
하지만 중공중앙은 중쏘량당간의 관계에서 그 어떠한 최종적인 평가든 내리려고 하지 않은것만은 명백했다. 공포된 자료에는 애써 트집잡느라고 중쏘지간의 부동한 관점을 하나하나 배렬한것이 아니라 능히 생각할 수 있는 소유의 중요한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대조하는 것으로써 쌍방의 견해를 전면대조했을 뿐이다.
회의에서 인발한 자료중 주요하게는 1959년 9월에 있은 중인변계문제를 둘러싸고 서로오고간 편지와 쏘련정부에서 “유감표시”성명을 한 것이 량당지간의 분기를 가장 넉넉히 설명하고있었다.
회의는 주은래의 건의에 의해 진의가 1959년 12월 27일에 한 보고도 동시에 인발했던것이다. 이는 그때의 분기에 대한 중공중앙의 견해의 한 측면을 반영 할 뿐이지 진의의 보고를 평가한건 근본 아니였다.
1960년초 중쏘교섭은 이전모양으로 중인변계때문에 분기를 더 자아냈 다. 1월 19일, 쏘련령도가 이제 곧 인도를 방문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알개되자 주은래는 쏘련대사를 접견하여 그보고 쏘련령도가 인도를 방문할 시 중인변계문제는 물어보지 않는것이 좋으며 그 일로 하여 인도자산계급이 량당지간의 분기를 알고 폭로하면서 리용하는 일이 없게끔 해달라는 중국의 건의를 쏘공중앙에 전달하라했다.
22일 쏘련대사는 진의를 만나 답복을 전달했다. 쏘공중앙은 이미표시한바이지만 쏘련정부는 중인변계문제에 대해서 엄숙히 중립을 지키며 제3국이 간섭하는것을 반대한다고 했다는것이였다.
26일에 주은래는 쏘련대사를 다시만나 쏘련이 중인변계문제에 대해 “엄숙히 중립을 지킨다”는 제기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면서 한 사회주의국가가 자본의국가와 충돌이 생겼는데도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립을 지킨다는게 웬말인가, 그것은 사회주의진영은 물론 국제공산주의관계를 봐서도 한낫 새로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이는 중쏘량당이 중인변계문제를 놓고 분기가 생겼다는것을 공개하는것과 뭐가 다른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섯가지 사실로서 중국의 “념려와 불안”을 표시했던것이다. 례를 들면 따스사가 중인변계문제에 관해 태도가 다른 성명을 한것에 대해서다. 1959년 9월 30일에 흐루쇼브가 북경에서 있은 국경연회석상에서 내놓은 “우리는 무력으로 자본주의제도의 온고성을 떠보지 말아야 한다.”는 설법을 그들은 공개한 것이다. 물론 주은래가 중쏘간의 분기는 손가락한개정도밖에 되지 않아 량당간의 단결을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어디그렇게 되는가?
그렇지만 2월 4일, 와르샤와조약국회의에서 발생한 사건은 문제를 급속히 복잡하게 만들었던것이다. 이날 와르샤와조약국정치협상위원회의 회의에 참가한 중국관찰원 강생은 쏘련이 군축 등 문제에서 우리가 대신 의무를 감당하게 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필히 한 방면으로는 보편적인 군축을 찬성하면서 다른 한 방면으로는 중국은 그 어떠한 의무든 짊어지지 않으리라고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방면의 립장을 명백히 밝혔다. 이 일은 쏘련의 강렬한 불만을 야기시켰다. 그날밤 사회주의국가의 형제당대표단을 초대하는 연회에서 흐루쇼브는 담화중에 돌연히 형제당사이는 평등하니 응당 호상존중해야 한다, 의견을 제기할 수 있지만 첨예한 어투로 조롱하지는 말아야 한다, 제 생각을 우리한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하는 말은 다 진리거니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중공을 빗대고 비평했던것이다.
“나는 그 무슨 전쟁이 일단 발생한다면 사람이 얼마나 죽고 얼마나 사는가 하는건 말하고싶지 않다. .....우리는 인민을 생각해야한다. 인민은 전쟁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로인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존중하는건 년세가 많고 적은 것이 아니라 그가 영명한가 하지 않은가 하는거다. 영명하지 못한 로인은 낡아버린 신짝모양으로 집구석에 밀어놓고 로인자신이나 흠상하게 해야한다.”
이틑날, 즉 2월 5일에 쏘공중앙은 강생에게 구두로 중공중앙에 알리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중공중앙은 인도변계문제에서 협애한 민족주의와 모험주의정서가 있다고 비평했다. “사실상 지난 때나 지금이나 인도가 인민중국에 그 어떠한 현실적인 군사위협이란 없기 때문이다”. 구두통지는 동시에 강생이 2월 4일에 발언한것은 틀렸다면서 이는 실제상사회주의를 충격한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흐루쇼브의 말은 분명히 모택동을 놓고 한 것이였다. 명백한바 쏘공의 이런 구두통지는 중국공산당에 “민족주의와 모험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준 것이다. 중쏘량당의 분기는 이로하여 진일보로 한급 더 오르게 되였던 것이다. 3월상순에 이르기까지 주은래, 진의 등이 쏘련과 관계를 좋게해야한다면서 쏘련동지들과의 쟁론을 피면하고 중쏘량당은 중인변계문제 대해 각기 의견을 보류하고 다시 더 쟁론하지 말아야하다고 했다. 그랬으나 실상은 쟁론이 점점 공개적이 되여간것이다. 2, 3, 4 몇 달사이 련이어 열린 국제학련집행위원회, 세계청년집행위원회, 아세아아프리카인민단결대회 등 국제회의에서 중쏘대표지간에는 평화공처와 군축 등의 문제를 놓고 련거퍼 엄중한 의견분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4월 22일, 레닌탄신 90주년을 기념하면서 중공중앙은 또 세편의 문장을 발표했다. 즉 <<붉은기>>잡지편집부의 문장인 <<레닌주의만세>>, <<인민일보>>편집부의 문장인 <<위대한 레닌의 길을 따라전진하자>>와 중선부장(中宣部長) 륙정일(陸定一)이 중공중앙레닌탄신90주년기념대회에서 한 보고 <<레닌의 혁명기치하에 단결하자>>. 이 세편의 문장은 계통적으로 당전시대에 화평공처, 화평과도, 사회주의혁명, 제국주의본성 등 일계렬의 중대한 리론문제들에 대한 중공중앙의 견해를 천술하면서 유고슬라비아를 수정주의라고 지명비판했다. 사실은 화살을 쏘공중앙에 돌렸던 것이다. 주의를 돌리게 되는 것은 중공중앙에서 선정한 문장이 의연히 흐루쇼브와 쏘련지도자들은 “수정주의자가 아니다”면서 그들은 “선한 마음을 지닌 사람”인데 그저 적잖은 “불정확한 의견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 그것이다.
중인변계문제로 인해 생긴 중쏘지간의 분기가 레닌주의리론관점방면으로 까지 범위가 넓어지게 된 하나의 근본 원인은 모택동이 시종 쏘공20차대표회의가 제출한 평화과도, 평화공처관점에 의혹을 품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흐루쇼브가 인도자산계급두목 네루와 미제국주의두목앞에서는 태도가 연약하다고 여기면서 이것이 쏘공지도자들이 리론상 오류가 생긴 원인이고 일련의 문제가 생기게 된 근원이라 인정했다. 5월 21일과 28일에 모택동은 조선로동당의 지도자 김일성과 덴마크공산당주석을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말한것이다.
“평화공처란 없다.”, “제국주의와는 평화공처가 있을 수 없다. 오직 랭전공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폭력을 쓰지 않고 능히 자본주의를 거쳐서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데 소위 평화과도를 한다는것이겠지. 그렇다면 맑스, 레닌주의리론기초는 어리로 가버렸는가?”
그는 쏘련과 생긴 분기에 대해서 말했다.
“이제는 공개적으로 말할 때가 됐다.”, “만약(우리) 개변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증명할만한 문건들을 싹다내놓을테다.”
이때의 모(毛)는 중쏘지간의 분기는 의연히 그저 손가락하나 문제일 따름이라 긍정하면서 한편으로는 흐루쇼브를 수정주의와 등호도 쳐보면서 “절반수정주의”라 했다.
1960년 2월이래, 중국과 쏘련지간의 론쟁이 많이는 국제회의장소에서 벌어졌다. 쟁론초점역시 많이는 군축(재군ㅡ裁軍) 등 세계범위의 전쟁과 평화에 관계되는 큰 문제들이였다. 거의 모든 쟁론에서 중국의 의견은 아주 선명하게도 소수를 차지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였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여 중공중앙은 더 광범한 선전과 해석공작이 필요하다는것을 깊이 느끼고 각국당에 우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관점을 진정으로 료해하게끔 하려했다. 하여 중공중앙은 일부 중요한 보취를 취했는데 그것인즉 외교적수단을 포함하여 군중단체와 각종 거도를 통하여 <<레닌주의만세>> 등 3편문장을 살포함으로써 중공중앙의 리론관점을 선전하자는 것이였다. 한펴 또 그러면서 유리한 장면을 만나기만 하면 주동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6월초, 세계공련리사회(世界工聯理事會)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첫시작에 중화전국총공회주석 류녕일(劉寧一)은 공련리사회의 보고가 세계평화와 군축문제에서 평화공처의 작용을 과분하게 강조했다는 것을 감촉했다. 그리하여 류녕일은 전문 회의에 참가한 전쏘련공회리사회주석 그리신과 교섭을 제출하여 보고를 수개할 것을 요구했다.
“자산계급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을 미화하는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까지 속히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자산계급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방지할 수 없는 것이다.”
6월 5일밤에 중공중앙의 관점을 천명하기 위해 중공중앙정치국주요성원과 회의에 참석한 20명 외국공회공산당책임자를 만찬에 초청한다는 명목으로 만나 중국측의 관점을 계통적으로 소개하려고 시도했다. 한데 한시간쯤 지나자 쏘련대표 그리신을 위수로 한 다수의 공회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닦쳐 이쪽은 그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만것이다.
한쪽에서는 중공중앙이 여론공작을 쟁취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쏘공중이 공개적으로 움직이기전에 동구라파국가형제당 지도자들을 찾아 바삐 여론을 일으키느라 돌아쳤다.
팽진은 6월에 열리는 루마니아공산당 제3차대표되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대표단을 거느리고 부카레스트에 갔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흐루쇼브가 1월달부터 벌써 언녕 손을 써서 여러 형제당대표들을 제쪽에다 끌어당겼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부카레스트에 이른지 얼마안되여 분위기가 이상하다는것을 인차감촉하게됐던 것이다.
회의가 금방 시작되여 대표단은 부득불 중앙에다 쏘련에서 선손을 써서 포치해놓은 올가미에 들었노라 보고하면서 모든 것을 보아 이것은 “국제공산중의운동에서 보기드믄 대음모인 것이다.”고 알리였다.
중국대표단은 두가지 사명을 지니고 부카레스트에 간 것이다. 하나는 관례대로 형제당의 대표대회를 축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쏘공중앙이 이번 회의에 온 형제당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기회에 그들을 만나 원래의 결정대로 년내에 거행하게 될 세계공산당과 공인당대표회의 유관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자는 것이였다. <<레닌주의만세>> 등 3편문장을 발표했을 때 쏘련공산당도 역시 6월 10일, 12일에 련이어 레닌의 <<공산주의운동에서의 좌익소아병>> 발표 4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의로 문장을 발표하여 중국공산당을 빗대고 비평했다. 이에 중공중앙은 대표단에 위탁하여 방법을 다해 쏘련공산당과 량당지간의 분기를 놓고 토론하라했다. 그리하여 중공대표단은 6월 17일에 먼저 모쓰크바에 가 쏘공정치국위원 까자로브 등과 8시간동안이나 토론했던 것이다.
부카레스트대회기간에 중공대표단은 또 흐루쇼브와 담화를 길게 했다. 그러나 두차례 담화결과 쌍방은 접촉이 가까와진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이가 더 벌어지고말았다.
까자로브와 흐루쇼브를 만나 담화하는 사이, 그리고 형제당회의기간에 쏘련측과 그쪽에 쏠린 동구라파 각국의 지도자들은 다가 중공중앙은 세계공련리사회의기간에 정황을 잘 모르는 각국공회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량당간 분기의 작법을 놓고 첨예한 비판을 했다면서 “그렇게 한건 쏘련을 반대하는 동맹군을 찾자는게 아니였는가?”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중국이 외교를 리용하여 선전하고 군중단체같은 경로를 리용하면서 각국당과 정부의 유관령도기관을 뛰여넘어 3편문장을 살포한데 대해 강렬한 불만을 표시했다. 쏘련은 지어 이미전에 벌써 각국문자로 번역하여 찍어두었던 84페지에 달하는 “통지서”를 산발하여 중국측이 책임도 지지 못할 자기의 선전자료들을 산발하였다고 질책하면서 중국에서 발표한 <<레닌주의만세>>란 문장에서 제출한 시대성질, 전쟁과 평화, 평화공처, 평화과도 등 문제들에 대한 중공중앙의 관점과 정책을 계통적으로 비판했다.
흐루쇼브는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하는 원인을 해석했다.
“모택동지는 나를 설복하지 못하고 나도 모택동동지를 설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오로지 문제를 이런 회의에 내놓아야만 해결되기 때문이다.”
중공대표단이 쏘련당과 당면에서 의견을 교환 할 임무를 맡았지만 부카레스트에서 이같이 험악한 장면을 당할줄은 몰랐다. 팽진이 날카론운 말로 응부하기는 했지만 중공대표단은 사실상 이미 몰림에 들어 공격받으니 한심한 피동에 빠졌던것이다.
마음이 어지간히 격해진 흐루쇼브는 일단 벌린 입을 막아내지 못할 지경 말을 쏟아냈다. 그는 모택동을 몹시 하찮게 여기고 조소하면서 비평했다. 례를 들면 그는 모(毛)가 현대전쟁을 알기나하는가, 걸핏하면 중국은 사람이 많다는 소리나 하고 민병만해도 얼마나 된다는지..... 현대전쟁조건에서 그런건 한무지 고기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것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모택동은 전쟁이 무섭지 않다고 선양한다고 했다. 몇억이 죽는다해도 몇억은 살아서 사회주의건설을 그냥하리라는지.... “미친사람이지”. 현대전쟁에 살아남았다한들 잔페가 되어 결국은 다 죽고말것인데 알기나하고그러는가 했다.
한가지 더 례를 들면 그가 오만스레 성명한 그것이다.
“당신들이 나와 쓰딸린을 대립시키는데 팽진동지, 당신네 도박이 그닥잖은것 같구만. 만일 당신들이 쓰딸린을 요구한다면 내가 줄 수 있지, 그의 시체를 당신네 북경에 갖다놓고 당신들이 흠상하게말이요.”
중공대표단은 쏘련측에서 극력배치한 이번의 “돌연적인 습격”에 대한 반응이 매우 강렬했다. 중공중앙역시 문제가 엄중하게 돌아졌다는것을 민감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이때의 중국은 “대약진”으로 인해 빚어진 전례없는 심한 곤난에 빠져 허덕이다보니 쏘련의 원조를 받아야 할 신세였던것이다. 때문에 지도자 다수가 중쏘지간의 단결과 합작이 이전처럼 유지되기를 바라고 몹시 중시하면서 쏘련의 작법에 대해서 비교적 억제하는 태도를 취해야했던 것이다. 중공중앙은 대표단에 흐루쇼부를 엄정하게 비판한 후 “여지를 주어 그를 끌어당겨보라”고 명확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중공중앙기초의 대표단성명은 일면 흐루쇼브를 엄하게 비평하면서 일면 아래와 같이 표시했다.
“우리와 후르쇼브동지사이의 의견분기가 우리 량당의 옹군관계를 놓고 보면 의연히 일부분에 속하는 성질인 것이다. 우리는 량당은 공동의 사업을 위해 분투하고 단결하는 것이 의연히 주요부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두 나라는 다가 사회주의국가이고 우리 량당은 다가 맑스레닌주의원칙에 따라 건립한 당으로서 다가 전체사회주의진영의 사업과 발전을 위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당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부카레스트회의가 제1차로 사회주의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 중쏘량당지간의 엄중한 분기를 폭로했지만 중공중앙은 조직이 있게 형제당간부군중에게 <<레닌주의만세>>등 몇편 문장을 산발했길래 바라던것대로 진동이 비교적 크다는 것을 느끼였다. 하지만 중공중앙은 이런 일이 중쏘 두 국가관계에 직접 영향이 미친다는 것은 미처예상못했던것이다. 중공대표단은 특별보고에서 흐루쇼브는 회의가 결속되여 중국대표단과 고별할 적에 주동적으로 이같이 태도를 표시를 했다고 했다.
“우리는 다퉛구만, 그래도 한진영에 있는거니까 응당 두당지간에는 큰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해야지요.”
그러나 중공중앙으로하여금 뜻밖에 깊은 충격을 받게 한 것은 대표단이 북경에 돌아온지 얼마안되여 쏘련측에서 7월 4일부터 16일사이 련거퍼 중공중앙에 쏘련에서 출판발행하는 중국측의 로씨아문간물인 <<우호>>주간을 정간하기를 촉구하는 동시에 소유의 중국건설을 지원하고있던 쏘련전문가들을 철회한다고 통지를 해 온 그것이였다.
그들이 이 두가지 엄한 결책을 내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게아니였다. 중공중앙에서 조직이 있게 쏘련국내의 군중과 중국에 와 있는 전문가들에게 사상선전을 한데 대해서 강렬한 반감과 위구를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21일, 쏘련외교부는 쏘련에 주재하고있는 중국대사관에 전대미문의 각서를 보내여 중국측은 쏘련기관단체에다 산발하던 중국간물을 중지하라, 간물에 등재한 틀린선전과 관점과 발언이 있는 문장을 걷어들이고 그런 자료를 산발한 이원을 즉각 자국으로 데려가라고 촉구했다.
중국에 와있던 쏘련전문가들을 갑작스레 철거했다. 이로인하여 중국은 과학, 군공(軍工)과 외무(外貿)등 방면에 엄중한 부정적 영향이 조성된건 더 말할 것 없다.
모택동은 쏘련의 그같은 작법에 극도로 되는 반감을 품었다. 그렇지만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으니 감정을 억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면에 경멸을 짓고나서 말했다.
“이제는 자력갱생해야지, 나쁜일이 좋은일로 변할 수 있는거야. 그렇지 않은가?”
중국은 곤경에서 벗어나기위한 방도를 찾아야 했다. 하여 7월 30일에 정치국상무위원회확대회의를 열었고 8월 4일에는 중앙서기처회의를 열고 연구토론을 한 것이다.
이때까지만도 두차례의 회의에서 다 량당간의 모순과 분기는 아무튼 인민내부모순에 속하는 것이라했다.
이 정신에 근거하여 중공중앙은 현이상 당간부는 회의를 열고 부카레스트회의정황과 중쏘관계의 현상황에 대해 알려주라고 통지했다. 통지에서 중공중앙은 쏘공20차당대회이래 중쏘량당의 분기발전력사에 대하여, 그러나 우리와 흐루쇼브지간의 투쟁은 “국제공산주의운동중의 두갈래로선투쟁”으로서 분기의 주요관건은 아직도 혁명의 승리를 취득하지 못한 세계 2/3의 인구가 혁명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승리를 쟁취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며 역시 이미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취득한 1/3 인구가 혁명을 끊지 않고 계속하느냐 하지 않느냐, 어떻게 공산주의로 과도하느냐하는 문제라고했다.
“중쏘량당간의 전체관계와 세계투쟁의 전국면을 놓고 보면 의연히 국부성을 띄고있으며 이런 분기를 극볼할 인소는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이 감에 따라 이런 인소는 커질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단결의 념원으로부터 출발하여 합당한 비평을 거쳐 새로운 기초상에서 더욱더 견고한 단결을 이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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