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제시:이정(二廷)은 사람을 깜짝놀라게 하는 말 한마디를 더 뱉아놓았다. “우리를 그냥 얼려먹다가는 두해도 못가서 당신도 굶어죽을 거요”. 이 말에 주은래는 상을 탕 치면서 어성을 높혔다. “좋아! 당신 왜 두해면 나까지 굶어죽는다고 하는가?”
1961년 1월, 중공중앙은 엄중한 곤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공작회의와 8기9중전회를 열고 농촌정책을 조정할 문제를 토론연구했다. 모택동은 전당에 조사연구풍을 크게 일으키면서 일체는 실제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호소했다.
국무원총리 주은래는 몸소 조사조를 거느리고 중남해를 떠나 농촌으로, 공장으로, 부대로 돌아다니면서 방문하여 대량의 소식들을 조사수집하였고 실제에 맞지 않는 허다한 “좌”적인 행위들을 규정하였다. 촬영기자 두수현(杜修賢)은 그를 수행하면서 많은것들을 렌즈에 담았다. 시찰과정에 두수현의 렌즈에는 때때로 주은래의 숫많고 짙은 눈섭이 일어서면서 량미간이 모아지는 모습이 담기군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시찰에 주은래는 회색나는 중산복을 입고 나섯다. 무더운 날씨였다. 그는 단추를 벗긴 앞섭으로 부채질을 자주했다. 일반백성과 다름없는 그의 그런 소탈한 거동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안져주었다. 그가 외빈을 접견할 때 보이군하는 말쑥하고도 대범한 모습은 억만국민에게 수령으로서의 믿음을 주었기에 깊은 인상을 남긴것이다. 오랜 세월을 그의 신변에서 사업해 온 두수현은 그와 관련되는 허다한 보귀한 자료들을 적시에 빼놓지 않고 거의 자기 사진기렌즈에 담군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왕과는 아주다르게 주총리의 얼굴에는 내내 어두운 그림자가 꽉 내리덮혀있었다. 그것은 심한 우울이였다. 참혹한 현실앞에 그 누구의 심정인들 무겁지 않으랴!
하북성 무안현의 백연(伯延)은 10여개의 자연촌락이 한데 무어진 인민공사였는데 비교적 일찍이 집체식당을 꾸린데다 재해를 심하게 입었다. 1961년 5월 3일, 조사조성원은 여기에 오자 부근에 있는 부대병영에 들려 아침과 저녁은 그곳에서 전사들과 함께 먹고 점심은 시찰하는 촌에서 먹기로했다. 첫날 점심때, 두수현은 주은래를 따라 촌의 집체식당에 갔다. 사원들은 먼저먹고 간 후였다. 텅 빈 식당의 한 식탁우에 주총리를 위해 마련한 돼지고기 한 그릇과 닭걀볶음채 한접시가 놓여 있었다. 허나 주총리는 먹지 않고 공작인원더러 돼지고기와 닭걀채를 가져가라했다. 식당의 화식형편이 진짜 어떤가를 알아보려는 그였다.
이틑날 주은래는 다른일은 보지 않고 점심때가 되자 직접 식당에 갔다. 한데 공교롭게도 사원들은 다 먹고 가버린지라 식사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취사원이 황망히 가마뚜겅을 덮는 거동이 주은래의 눈에 띄였던것이다. 주은래는 성큼 다가가 가마뚜껑을 열어보았다. 가마안에 강냉이죽이 얼마가량 남아있었다. 그는 취사원과 공사간부가 황공해서 막는것도 무가내하고 사발에 담아 그 자리에서 먹었다. 주은래는 그러고나서 다른사람의 시선을 피해 단독조사를 나섰던것이다. 수행인원들은 그가 잃어지자 찾느라 돌아쳤다. 그러나 두수현만은 놀라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주은래의 성격을 알고있었기에 마을 어느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가를 보고는 곧추 그리로 갔다. 이때는 사원들이 식사를 집체식당에서 했기에 개인집굴뚝에서 연기나는 일이 드믈었다. 필유곡절이라 주은래는 바로 그 집을 찾아 들어간것이다.
“내꽁무니를 따라오지마오. 당신이 손에 든 그 기계가 내는 ‘찰칵’소리가 사람을 놀래운다니까.”
주은래는 집주인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한창 애기를 하다가 두수현이 찾아가니 하는 소리였다. 두수현은 주총리의 명령에 따르는것 처럼 사진기를 부뚜막에 내려놓았다가 다시들고는 찍어야 할것은 다 찍었다.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를 보고 찾아온 주은래는 가마뚜껑을 열어보았다. 광선이 집안을 덜 밝히였기에 가마안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주은래는 아마 물을 끓이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뚜껑을 도루닫았다. 그리고나서 집주인과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바당에 떨어진 비수리나무잎을 발견하고는 피끗 떠오르는 예감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마뚜껑을 다시열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니나다를가, 그 안에서는 비수리잎과 알곡을 섞은 멀건 죽이 끓고있었던것이다.
이는 분명 사원들이 식당에서 배불리먹지 못한다는것을 설명하지 않는가? 주은래는 낯빛이 몹시 어두워졌다. “배를 불리지도 못하는 식당을 해서는 뭘하는가?” 그 집을 나오자 그가 혼자소리로 뇌이는 말이였다. 하지만 그 말은 몇발짝 뒤진 두수연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리였다.
주은래는 지체없이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주은래는 12명사원에게서 식당에 유관한 문제들을 탐문했다. 헌데 조사가 순리롭지 않았다. 주은래가 비록 소박하고 친근하게 보였지만 어쨌던 중앙의 “높은관리”인지라 그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 낯만 쳐다보았던것이다.
아느새 침묵이 흐른뒤 주은래는 지삼재삼 마음놓고 할 말은 하라했다. 그제야 그의 곁에 앉아있던 농민이 용기를 내여 침묵을 깨뜨렸다. 성품이 소박하고 직심스러운 그는 성명이 이정이였는데 집체식당에 대해서 언제부터 의견과 불만을 갖고있었던것이다. 그는 똑똑한 목청으로 주은래에게 고발했다. “식당을 해서는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농민 이정은 계속하여 자초지종을 일러바치였다. 곤난한 시기여서 매 사람에게 차례지는 정량이 본래 적은건데 사무장과 취사원과 그네들의 친척이 많이 떼먹고 간부가 많이 떼먹고보면 일반사원에게 차례지는건 3량, 4량밖에 안된다는것이였다. 매일 체력로동을 하는 사람으로 놓고 보면 그것으로는 근본 량에 차지도 않으니 언제 한번 배불리 먹어보겠는가.
이정이 이렇게 말머리를 떼여서야 사원들은 분분히 입을 열기시작했다. 모두의 의견이 집체식당은 좋지 않다는것이였다. 본래는 의견을 청취하자고 연 회의였는데 그만 억울하고 고생스러움을 하소연하는 “이쿠스탠” 장으로 변하고말았다. 어떤 사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기까지 했다. 주은래는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무겁게 무겁게 아래로 내려갔다. 농사짓는 농민이 식당을 해서 배를 곯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가? 하건만도 그는 여지껏 오리무중에 빠져있은 자신을 이제야 발견하게되였던것이다. 이 시각 두수현이가 주총리몸에서 찾아볼 수 있는것란 오직 그 자신이 령도자로서의 량심상 가책을 심하게 받고있는 모색뿐이였다. 주총리는 사원들을 향해 부드럽고 성근한 어투로 말했다. “여러분, 나는 사업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내 이 총리가 제구실을 못한겁니다. 여러분이 배를 곯다니? 식당이 제대로안되면 꾸리지 말아야합니다.” 이정은 반신반의하면서 주은래향해 그건 얼리는 말이 아닌가고 했다. 주은래는 깎듯이 말했다. “아니요.” 그러니 이정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말 한마디 더 뱉아놓았다. “우리를 그냥 얼려먹다가는 두해도 못가서 당신도 굶어죽을거요.” 이 말은 사원들을 놀라게 하였거니와 국제상에서는 그래도 걸출한 외교가요 말이 청산류수라 소문난 주은래마저도 일시 말문이 막히게 만들었다. 회장은 다시금 침묵에 빠졌다.
이윽고 주은래가 상을 탕 치면서 이정을 향해 어성을 높이였다. “좋아! 당신은 왜 두해도 못가서 나까지 굶어죽는다고 하는가?”
“말하라면하지 뭐. 우리가 배불리먹지 못하니 맥이 없어서 밭일을 못하는거고 그래서 량식을 생산못해 올리바치지 못하는겁니다. 한해못바쳐도 국고에는 량식이 있는거고 두해못바쳐도 국고에는 그래도 량식이 있지요. 삼년못바치면은? 국고에 그래도 량식이 있을가? 총리도 밥은 먹어야하는건데 국고에 량식이 없어지면 그래 당신이라고 굶지 않을가? ” 어디서 난 용기였던지 이정은 한마탕 말을 뽑아냈던것이다. 주은래는 이정의 솔직한 토로를 개의치않아했거니와 조금치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했다. 진심은 믿음을 굳게 하는것이였다. 두 사람은 손을 굳게 잡았다. 총리의 마음은 이렇게 백성의 마음과 이어진것이다.
이틑날 이른아침때, 주은래는 곧바로 이정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정이가 안해도 없이 자식넷을 거느리고 몹시 구차하게 살아간다는것을 알고는 그의 막내딸을 자기가 갖다가 길러서 다 크면 갖고와 돌려줄테니 대답하라했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고마운일이였다. 총리의 지극한 관심에 이정은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이정은 주총리가 나라일을 보느라 그 누구보다도 바뻬돈다는것을 알기에 시름을 지울 수 없어서 고마움을 드리면서도 그렇게는 하지 않겠노라했다.
백연(伯延)에 와있은 4일간에 주은래는 선후 7차나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에 참다한 사람은 간부, 사원, 농기참과 수리공장의 인원....조사범위가 넓었다. 그는 당시 농촌의 진실한 정황을 깊이 료해하려했던것이다. 상세한 조사를 거쳐 주총리는 식당의 다른 한가지 페단을 더 알아냈다. 무엇이였던가? 그건 식당에서 먹으면 적잖은 사람들이 먹지 않으면 미찐다는 심리가 생겨 농사가 잘되건 잘되지 않건 절약할줄을 몰라 재황이 들면 당연히 먹을 량식이 모자라고 없다는 그것이였다.
5월 6일, 백연을 떠날 림박에 주은래는 친히 대중앞에서 백연의 식당은 해산시킨다고 했다. 그러면서 식당에서는 사원들의 량식을 나눠주고 10일전에 농민들의 생활을 기본상 적당히 안배해야한다고 지시했던것이다. 사원들은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저마다 주은래와 악수해보려했다. “주은래 어른!” 노인 하나는 너무나 감격해서 꿇어엎디여 주은래에게 절까지 했다. 두수현은 이 정경을 의례 렌쯔에 담아야 했건만 노인의 거동이 너무나뜻밖인지라 놀래여 멍해지다보니 그만 순간을 놓쳐버렸던것이다. 그것은 촬영기자로서 큰 실수를 했으니 평생 자책감을 안게되는 일이였다.
다른 한 회의가 주은래를 기다리고있었기에 그는 남아서 그 노인과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은래의 책임비서가 남아서 사정을 알아봤던것이다. 주은래는 고찰을 끝마쳤다. 이틑날 새벽 3시경에 잠을 자고있던 주은래는 상해에서 걸어오는 모택동의 전화를 받고 자기가 조사한 결과를 모택동에게 구두로 회보했다. 후에 주은래는 서면으로 총결을 지어 모택동에게 보고했다. 이듬해의 년초에 중앙은 7천명대회를 열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가 가장 직접적인 자료로 회의에 제공되였던것이다.
박일파의 력사회고:
주은래의 두 번실권은 모택동과 맛섰기때문
주은래는 1957년에 모험적으로 전진하는것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험적으로 앞으로 내몰기를 좋아하는 모택동의 기분을 다시한번 좋지 않게 만든것이다. 당시 주은래와 류소기 등은 경제건설에서 실제에 맞지 않게 지표를 높이는 현상이 나타나자 온건하게 발전해야한다고 제기했던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생각은 급진적인 좌였다. 박일파(薄一波)가 기재한것을 보면 모택동은 1958년 1월에 남녕회의때에 특별히 가경시(柯慶施)의 문장 <<파도를 혜치고>>를 특별히 칭찬했고 16일 회의에서는 모택동이 재차 가경시의 문장을 들고 주은래를 향해 질문까지 했던것이다. “은래동무, 당신은 총리요. 보란말이요, 당신은 이런 문장을 쓸만하오?” 이에 주은래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응대했다. “나는 쓰지 못하겠소.”
1957년부터 1958년 반년사이에 모택동은 “반모진”을 비평했는데 박일파의 글에 밝힌것을 보면 1957년 9, 10월사이에 열리였던 중공8기3중전회, 11월 13일자 <<인민일보>>사론, 12월의 항주회의에서 주은래의 이름을 지적했다. 1958년 1월의 남녕회의, 2월의 정치국확대회의, 3월의 성도회의, 4월의 무한회의, 5월의 8대2차회의, 정치국확대회의에 보내는 편지에서 모택동은 비평하기를 “반모진이라는 이 명사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듣기만해도 화난다. 6억사람을 화나게는 만들지는 말아야지.” “우파와 거리가 멀지 않다. 50m나될것이다.”고 했다.
주은래는 자주 검토를 헤야했다. 남녕회의, 성도회의, 중공8대2차회의때 빼놓지 않고 공개적인 검토를 했던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은 앞의 두차례의 검토는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스러워하면서 주은래더러 자기의 검토를 비서한테 씌우지 말라했다. 하여 주은래는 부득불 자신이 검토서를 썻는데 10여일되는 사이에 머리가 더 희여졌다.
중공이 정권을 세워서 주은래는 총리직외에도 외교부장을 겸하고있었다. 1958년 2월에 이르러 외교부장직을 부총리였던 진의(陳毅)가 넘겨맡았다. 동년5월에 열린 중공8대2차회의때 모택동은 강화에서 분렬을 방지해야한다고 제출하였기에 주은래는 중앙에다 자기가 총리감이 되기나하는지 고려해줄것을 제기했다. 하여 정치국상위회는 회의를 열었는데 상무위원모두가 그를 만류한것이다. 하건만 모택동은 이렇다 저렇다는 아무런 태도표시도 없었다. 이런일이 있은 후 중공중앙은 재정, 정법, 외사, 과학, 문교 등 다섯가지 소조를 성립하고 각각 전문인원에게 책임을 지웠다. 하여 주은래는 권력이 이전만 퍽 적어진것이다. 주은래는 대약지시기에 이르러서는 실제상 경제에 관한 발언권마저 잃고말았던것이다.
◎ 대약진에 경제관리권을 잃었다.
중공이 정권을 세워서 주은래는 총리직외에도 외교부장을 겸하고있었다. 1958년 2월에 이르러 외교부장직을 부총리였던 진의(陳毅)가 넘겨맡았다. 동년5월에 열린 중공8대2차회의때 모택동은 강화에서 분렬을 방지해야한다고 제출하였기에 주은래는 중앙에다 자기가 총리감이 되기나하는지 고려해줄것을 제기했다. 하여 정치국상위회는 회의를 열었는데 상무위원모두가 그를 만류한것이다. 하건만 모택동은 이렇다 저렇다는 아무런 태도표시도 없었다. 이런일이 있은 후 중공중앙은 재정, 정법, 외사, 과학, 문교 등 다섯가지 소조를 성립하고 각각 전문인원에게 책임을 지웠다. 하여 주은래는 권력이 이전만 퍽 적어진것이다. 주은래는 대약지시기에 이르러서는 실제상 경제에 관한 발언권마저 잃고말았던것이다.
◎ 주은래는 시종 지식분자에 대한 자신의 설법은 틀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공이 정권을 세워서 주은래는 총리직외에도 외교부장을 겸하고있었다. 1958년 2월에 이르러 외교부장직을 부총리였던 진의(陳毅)가 넘겨맡았다. 동년5월에 열린 중공8대2차회의때 모택동은 강화에서 분렬을 방지해야한다고 제출하였기에 주은래는 중앙에다 자기가 총리감이 되기나하는지 고려해줄것을 제기했다. 하여 정치국상위회는 회의를 열었는데 상무위원모두가 그를 만류한것이다. 하건만 모택동은 이렇다 저렇다는 아무런 태도표시도 없었다. 이런일이 있은 후 중공중앙은 재정, 정법, 외사, 과학, 문교 등 다섯가지 소조를 성립하고 각각 전문인원에게 책임을 지웠다. 하여 주은래는 권력이 이전만 퍽 적어진것이다. 주은래는 대약지시기에 이르러서는 실제상 경제에 관한 발언권마저 잃고말았던것이다. 주은래는 중국지식분자에 대한 설법이 모택동과 완전히 달랐다. 이는 태도문제였는바 그는 자기의 그 태도를 끝까지 굽히지 않은것이다. 1956년 1월, 지식분자문제에 관한 회의때 그는 중국지식분자는 이미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고있으며 이미 공인계급의 일부로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중앙을 대표하여 한 말이니 곧 중앙의 태도였던것이다. 몇해지나 1962년 3월, 인대2기3차회의때도 주은래는 중국의 지식분자는 로동인민의 지식분자에 속한다고 강조한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어떠했는가?
주은래가 그같이 중앙을 대표하여 태도를 표시했건만 모택동의 태도는 시종달랐던것이다. 1956년의 중공8대회의때 의연히 “자산계급지식분자”라는 설법이 나왔다. 1957년 3월, 모택동은 전국선전공작회의에서 재차 “지식분자의 세계관은 기본상 자산계급적이기에 그들은 자산계급지식분자다”고 말했다.
1962년에 주은래가 보고를 할 때 어떤사람은 지식분자문제에 대해서 질문했다. 하여 주은래는 모택동을 보고 태도표시를 하라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말이 없었다. 박일파가 기재한 것을 보면 동년 10월에 북대하에서 회의를 할 때 모택동은 꺼리낌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것이다. “자산계급지식분자 중에 더러는 양혼(陽魂)에서 건너왔다. 그러나 음혼(陰魂)이 흩어지지 않았기에 어떤건 지어 양혼도 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도 주은래는 강잉히 맛선것이다. 박일파의 기재에 보면 주은래는 1962년 10월 11일 중앙서기처회의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것이다.
“지식분자에 대해서 우리가 로동인민의 지식분자라고 제창하는건 계급분석을 하지 않는것아라고 말하는데 나는 당을 대표하여 보고한 것이고 당이 비준한것이지 내 개인이 초안을 잡은것이 아니였다. 소기는 헌법보고에서 공인계급지식분자, 로동인민지식분자, 자산계급지식분자가 있다고 했다. 나는 광주회의때 로동인민지식분자라한것을 틀린다고 보지 않는다.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