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청의 반항과 음모 강청은 모택동이 로산회의에서 팽덕회를 내리떨군후로는 속이 편하지는 않게 지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당심, 민심이 불복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였다. 그녀는 모택동이 1959년 4월에 간부들이 자기앞에서 진속의 말을 하지 않으니 명조때의 재상 해서의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고 솔직히 간언”하는 정신을 따라배우라고 제창한 것과 모택동의 비서 호교목이 오함을 찾아가 이건 모택동의 뜻이라면서 “해서”를 쓰게끔 고무했다는 것, 그래서 오함은 신속히 해서에 관한 글 몇편을 련속 써내게 되었다는 것도 잘알고있었으며 로산회의 때 팽덕회가 8일사이 소조회의에서 7차나 첨예한 발언을 하여 과연 해서가 가경황제를 노엽히듯 모택동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는 것도 알고있었거니와 팽덕회는 그 일로하여 해서모양으로 나떨어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오함이 쓴 <<해서의 파직>>이 결국은 파직당해 억울해 하는 팽덕회를 위해 번안한 것으로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그 극은 굴강한 해서를 찬양하고 그를 부당하게 처리한 가경황제를 비난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결국은 극을 빌어서 빗대고 모택동을 비평한 것으로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모택동의 지고무상한 권위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단말인가?
강청은 <<해서의 파직>>이 제 남편의 신경을 아프게 긁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방법을 대야했다. 그 방법이란 우선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서의 파직>>부터 칼을 대 돌파구를 뚫고는 머리를 치켜드는 반대세력들을 전부 누르고 제거해버리는 그것이였다. 오직 그렇게 하는것 만이 수였다. 이 수가 만약 모택동의 본의가 아니였다하더라도 모택동 역시 필경은 강청의 사고방향으로 나아갈 것이였다.
하기에 강청은 <<인민위해 새공을 세우자>>는 글에서 “주석께서 윤허하였기에 나는 과감히 이 문장을 조직한 것이다”고 명확히 토로한 것이다. 바로 오함의 <<해서의 파직>>을 비판하는 문장을 조직할 수 있은 것은 모택동이 윤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훗날인 1970년 12월 18일, 모택동은 미국의 우호적인 인사 스노를 만났을 적에 담화가운데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그때 북경에서는 문장을 조직 할 수 없었다. 오함은 력사학가여서 건드릴 수 없었던 거다. 다른사람을 찾았는데 감히쓰려하지 않았다. 그래 다른 사람을 찾았더니 그도 쓰려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람을 찾았더니 그역시 쓰려하지 않았다. 후에는 상해에서 조를 하나 조직해 요문원을 위수로 문장이 나온건데 북경에서는 그것을 실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상해에 있었는데 화나서 소책자로 만들어 내면 그네들이 어쩌는가 보자고 말했던 것이다.”
이 말에서 사람들은 <<해서의 파직>>에 대한 비평은 모택동이 친히 조직하고 지휘한 것이며 이는 또한 그의 중요한 전략부서의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상해에서 조직된 오함비판조
한시기의 온양을 걸친 후 1965년 봄에 강청은 지시에 따라 상해에 와 당시 중공중앙정치국위원이자 상해시위제1서기인 가경시(柯慶施)를 찾았다. 가경시는 초면인 그녀가 찾아오니 친히 나서서 주식을 안배했고 강청을 도와 그녀가 조직하려는 사작조를 조직했다. 가경시의 방조를 받아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세사람으로 구성된 오함의 <<해서의 파직>>을 비판하는 소조가 극비밀리에 조직되였다. 요문원이 <<해서의 파직>>을 평하는 문장을 집필했다. 요문원은 상해 <<해방일보>>의 편집위원이였고 장춘교는 문예계를 육성하는 몽둥이로서 둘은 다 전에 허다한 비판문장을 써서 호풍(胡風), 풍설봉(馮雪峰), 정령(丁玲), 파금(巴金), 애청(艾靑) 등등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을 때려엎었던 것이다. 강청은 그같이 재간있고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했으니 그네들이 <<해서의 파직>>역시 학술문제가 아닌 정치문제로 끌어올리여 비판하는 일도 문제없이 해내리라 믿었다.
한편 요문원은 전에는 허다한 비판문장들이 장춘교의 추김을 받아 제 규칙에 투기적으로 썻지만 지금은 그때와 퍽 다른것이였다. 강청이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이고 배후에 모택동의 지지가 있으니 문장의 성패는 요문원의 전도와 관계되는것이였다. 벼락출세를 할 수도 있고 자칫 목이 날아날 수도 있는 판이였다. 그러니 정신을 바싹 가다듬고 머리를 써야했다. 더구나 그의 상대인 오함은 학문이 깊은 력사학가였거니와 지위가 혁혁한 북경시부시장이였다. 요문원은 강청을 보고 이건 매우 큰 모험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저나온 말이 아니였다. 확실히 그런것이다. 요문원이 문장을 제대로 써내지 못해 모택동의 전략부서가 변하는 날이면 목숨은 끝나는 것이다. 하기에 요문원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다지면서도 한편 대단히 두렵고 불안해 하면서 임무를 접수한 것이다. 요문원은 자기가 대학공부를 못하고 근근히 고중을 다녔기에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는 것, 특히는 력사지식이 말할 수 없이 짧다는 것을 잘알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장춘교의 지지를 받아 복단대학력사계교수 주영가(朱永嘉)를 찾아가 사료를 찾고 열독하는 데 방조를 받았고 집에 와서는 아버지 요봉자(姚蓬子ㅡ작가)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
때로부터 요문원은 신비한 인물로 변해버렸다. 그는 강청으로부터 임무를 받자마자 <<해방일보>>총책에게 자기는 시위로부터 글쓸 임무를 맡았기에 바쁘니 사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겠다면서 청가를 맡았다. 그리고는 강평로에 있는 제 집에 깊숙이 들여박혀 두문불출했다. 누구도 그가 무슨일을 하는지 알수 없었다. 바로 여기서 오함을 쏠 암전이 조심스레 만들어지고있었던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강청은 비밀을 지키느라 장거리전화로는 감히 의견을 교환하지 못하고 본보기극토론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늘 상해에 왔다. 표면상 경극<<해항>>을 보고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를 보는 것 같지만 암암리에 요문원의 문장이 되어가는 형편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한편 장춘교역시 본보기극회보를 한다면서 북경과 상해를 넘나들면서 강청에게 <<해서의 파직>>비평문장이 꾸며지고있는 상황을 보고했는데 그 문장을 아홉번을 고쳐써서야 마침내 비슷히 되는 것 같아 요문원자신도 어느정도 긴장을 풀게되였던 것이다.
강청은 후에 여러번이나 자기는 지시를 받고 이 문장을 조직했는데 위험이 대단히 컸노라고 폭로했다. 사실그러했다. 그것이 비록 눈부시게 빛날 정치자본을 위해 꾸미는 작업이기는하였지만 확실히 모험적인 것이였다. 그녀가 비록 남다른 특수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하는 일이 광명정대한 것이 못되고 그자신이 깨끗치못한 령혼을 가지고 작당하여 활동하는 것이니 한도가 있었던 것이다. 오함의 <<해서의 파직>>을 비판하지만 사실은 화살을 팽진과 북경시위에다 겨눈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류등사령부”의 류소기와 등소평을 꺾꾸러뜨리자는 것이니까.
이같이 큰 일이 솔직히 말해서 당시 당중앙이 좀이라도 민주주의였다해도 모택동 한사람의 말이 판을 치지 못했을 것이며 문장을 꾸며 만들어 내는 자들, 강청까지 포함하여 추궁을 면치못하고 당규률과 국법의 제재를 받을것이였다. 그러니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강청이 표범의 담을 먹었다해도 감히 나덤비지 못할것이였다. 그러나 당시의 실제정황을 보면 모택동은 지고무상의 위망을 갖고있었기에 그의 전략부서라면 정치국에 넘겨 토론할 필요조차 었었던 것이다. 그런즉 이른바 강청이 말하는 모험이란 실제상 존재하지 않는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실 좀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문화대혁명”이 발동된 것은 모택동의 전략부서고 <<해서의 파직>>은 “문화대혁명”의 신호로서 모택동을 내놓고서는 그 어떤 사람의 기백과 담략으로든 막지도 거역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형상그대로 점점이 붙는 불꽃이 료원을 태우듯 할 때 강청은 적잖게 영웅자태로 나왔다. 그녀로서의 야심이 따로있은 것이다.
(3) 요문원이 뛸쳐 나온 후
한동안 알심을 들이여 정성스레 꾸며 만든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이 마침내 요문원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타났다. 교정쇄가 나온 후 장춘교는 친히 명단을 작성해 상해의 학술계, 리론계, 문예계의 지명인사를 청하여 이 문장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는데 기실은 그것역시 뱀을 굴속에서 끌어내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첫 번째 보취였던것이다. 장춘교는 친히 회의를 열고 말했다. “오늘 이같이 여러 전문가, 교수님들이 광림해 주셔서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오시라 한건 달음이 아니라 요문원동지가 문장 하나를 썼는데 ‘의견’을 듣고자하는겁니다. ‘의견청취고’인것만큼 역시 의견을 정취하는데 드리자는 것이여사 채 성숙되지 않았으니 여러분의 기탄없는 지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다면 진일보로 수개를 할 것입니다. ”
여기에 모여 온 선량하고 정직한 교수, 전문가들은 장춘교의 “겸허”하고 “성근”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여 요문원의 문장에 대하여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의견을 제출했다. 상해력사연구소부소장 주여동(周予同)은 첨예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오함은 나의 오랜 친구여서 나는 그가 좋은사람이란 걸 잘 알고있소. 해방전에 그는 국민당의 파시스통치를 용감히 반대한 민주전사였고 해방후에는 충성스레 공산당을 따라 모택동의 깊은 신임을 받았는데 어떻게 반당반사회주의일 수 있겠소? 학술문제를 이같이 억지로 정치문제에다 끌어붙인다면야 그 누가 죄를 쓰지 않겠는가?” 뒷이어서 화동사범대학력사계의 리평심(李平心), 상해사회과학원당위서기 리배남(李培南) 등이 발언하였는데 그들 역시 요문원은 허튼소리를 치고있다, <<해서의 파직>>극중의 원옥(寃獄)을 평판하고 빼앗은 밭을 임자에게 돌려주게끔 한 것이 어쩌면 요물잡귀의 원옥을 평판한 것으로 되고 인민공사의 밭을 돌려주는 것으로 된단말인가고 질문했다. 학술문제를 이같이 맘대로 정치문제에다 끌어올리는 작법이 당연히 사회상의 전문가, 교수들의 반대에 부닥치기마련이였다. 한편 위군자인 장춘교는 근본 전문가, 교수들한테서 그 무슨 의견을 참답게 들어보자는 속셈이 아니였던 것이다. 그는 요문원의 문장이 그들 전문가, 교수를 자극하는 정도와 태도를 알아보자는것이였다. 만약 이 전문가, 교수들이 요문원의 문장에 이외의 느낌을 갖거나 돌연감을 갖고 접수하지 않는다면 음모는 실현된 것이라 여긴 그였다. 과연 이 문장의 토론을 거쳐 그들은 많은 선량한 지식분자들을 끌어냈으니 더 큰 사회적인 효과를 거둘수 있다고 신심을 가졌다. 장춘교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기쁨을 금치못해 요문원과 말한것이다. “화력정찰이 성공적이다!” 요문원은 악독한 말로 남을 중상모략하면서 시비를 온통 뒤바꾸고 흙백을 뒤섞어놓았다. 이런 문장이 보통때 같으면 읽고난 사람마다 코를 싸쥐고 웃을일이였다. 정직한 전문가, 정직한 교수, 정직한 인민군중은 다가 문제를 정치선에다 무한히 끓어올리는 이런 사람은 미치광이로 보게되니까. 한데 그때는 정상적인 세월이 아니고 계급투쟁을 벼리로 하는 년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문원의 문장이 나오자 오함같은 정직하고 선량한 학자의 머리에 재난이 떨어진 것이다. 이때 오함은 북경에서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그날 어떤 사람이 <<문회보>>에 요문원의 비평문장이 실린것을 보자 그한테 알려주었다. 오함은 그 신문을 쥐여 대충읽어보고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코방구를 뀌였던것이다. 문장은 아무런 상관없는 일까지 억지로 끌어다 붙이였고 사용한 자료라는것도 이것저것 끌어다 제마음대로 주어붙인것이였다. 지어어떤곳은 어휘배치마저 맞지 않았던것이다. 게다가 오함의 인상에 남아있는건 요문원이란 인간은 문인을 잡기좋아하는 무지한 몽둥이라는것이여서 그런 인간과는 마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중앙의 정책의 일관한 작법이 북경시부시장같은 이런 고급간부를 비평하자면 반드시 우로 상급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인데 요문원이 대체 뭔데, 담이 얼마나 크길래 <<문회보>>에다 그런 글을 제멋대로 내는가? 제 혼자는 감히 그러지를 못할 것이다. 오함은 한해전에 주은래가 하던 말이 새삼스레 상기되였다. 그때 주은래는 어떤 사람은 <<해서의 파직>>을 뒤에서 의론한다고 귀띔했던것이다. 하여 그는 신문에 난 오함의 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았다. 과연 기분잡치면서 치가 떨렸다. 이건 순전히 생사람을 잡자고 드는게 아니고 뭔가!.... 한데 대체 누가 뒷심을 서주길래 이럴가? 대체 누가 요문원을 이따위 짓을 하게 부추기는 걸가?..... 오함은 머리속에 의문부호를 그리고 그리였다. 생각을 아무리 많이 굴려봐도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자고 준비하느라 이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은 그였다. 그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는 당과 모주석에 대해 시종여일하게 충성을 다했고 굳게 믿어왔다고 여기는데 지금와서 갑자기 반당반사회주의자라는 모자를 쓰다니 웬 말인가? 그는 전혀달통되지 않았다. 한편 그 개인의 사상이 달통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있는 사람에게는 손톱만큼도 념려되지 않았다. 아무튼 불이 당겨 전국의 구석진데까지 열화로 타오르게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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