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제시: “모택동이 하루를 살던 90을 살던 백살을 살던 어쨌던 우리 당의 최고수령인것이다. 그의 말은 모두가 우리들의 행동준칙인것이다. 누가 그를 반대한다면 전당이 일떠나 죽여버리고 전국이 일떠나 토벌해야한다.” 이런 귀맛좋은 말은 모택동의 마음에 들었을것이다. 이 말을 한 림표는 3개월후에 모택동이 제정한 계승자로 되었던것이다. 그러한즉 두말할 것 없이 그가 한 말이 큰 은을 낸것만은 사실이다. 모택동은 개인숭배반대를 주장하지 않았다. 1956년 쏘공20차당대회에서 쓰딸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자 모택동과 중공중앙은 처음에는 지지했다. 그러나 후에 모택동은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데 대한 견해가 달라졌던것이다.
변화가 생기게 된 원인은 반모진(反冒進)사건때문이다. 1955년하반년에 모택동이 경제건설속도를 빨리려하자 1956년에 주은래, 진운 등 사람들은 그와 맛서서 반모진을 했기에 모택동은 매우 불만했던것이다. 하지만 그당시 그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되지 않는지라 부득불 타협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반모진사건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당내에서 순리롭게 관철되기는 어렵거니와 저애가 크다는것을 심심히 느끼게하였던것이다. 이로부터 모택동은 오로지 개인숭배를 강화해야만이 당내외의 많은 반대파를 내리누르고 국내에서 “흐루쇼브”가 나타나는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가장 선명한것은 1956년 12월 29에 발표한 <<무산계급전정의 력사경험을 론함>>이란 글에서 개인숭배반대를 다시는 제기하지 못하게 한 그것이다.
1958년 3월, 모택동은 성도회의에서 강화 할 때 진일보 명확하게 제출했던것이다. “개인숭배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확한 개인숭배인것이다.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정확한것을 우리는 꼭 숭배해야 하고 영원히 숭배해야한다. 숭배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진리가 그들의 손에 쥐여있는데 그래 숭배하지 않아서야 되는가?.... 다른 하나는 불정확한 숭배인것이다. 분석도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해서야 안되지.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목적도 역시 두가지인것이다. 한가지는 불정확한 숭배를 반대하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다른사람을 숭배하지 말고 자기를 숭배하라고 하는것이다.”
모택동이 이렇게 말한 진실한 의도는 바로 자기를 숭배해달라는거다. 진리가 자기손에 쥐여있는데 왜서 숭배하지 않느냐하는 그거였던것이다. 그러니 어떤 중앙위원은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맛장구치며 나왔다. “주석을 미신해야한다.”, “우리는 미신할 정도로 주석을 믿어냐 하고 맹목적인정도로 주석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런말이 마음에 흔연히 받아져 모택동은 두달후에 중앙위원인 그를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올려놓았던것이다. 모택동의 가슴을 찌른 여러가지 언론들 1959년의 팽덕회사건은 모택동을 심하게 자극했다. 모택동은 늘 자기가 죽은 후에 그 누가 자기를 부정할가봐 겁나하고있는판인데 그런일이 죽기전에 벌써 발생하고 만것이다.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자기의 의견서를 준 외에도 소조회의에서 매우 자극적인 말들을 했던것이다. 팽덕회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사람마다 제 목이 있고 책임이 있다, 모택동을 포함해서. ‘1070’(강철산량 1070만톤을 가리킴)은 모택동이 결정한것인데 그래 책임이 없단말인가!” “ ‘불어대기’, ‘토용광로’ 등등. 모두 표면에 드러나고말았다. 민주가모자란게 아닌가. 모든 병페(病弊)는 개인숭배에 근원이 있는것이다.”
장문천(張聞天)도 말했다. “주석이 늘 부동한 의견은 과감히 제기하라, 몸이 동강나더라도, 목이 날아나더라도 하는데 그건 옳은것이다. 그렇지만 목이 날아나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해서 되는건아니다. 누구나 다 목이 날아나는걸 무서워한다. 국민당손에 목이 날아나는건 괜찮은데 공산당손에 날아나면 죽어서도 천추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것이다. 때문에 문제는 령도에서는 하급이 부동한 의견을 과감히 제기하고 교환할 수 있는 생동활발한 국면이 형성되게끔 일종의 기분과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그것이다.”
이런 말은 모택동이 민주를 압제하길래 당내의 동지들이 할말도 감히 하지못하고있다는 비평이였다. 모택동을 더 아프게 한것은 로산회의에서 “彭, 黃, 張, 周”를 비판하는 과정에 적발되고 교대한 사사로운 언론들이였다. 몇가지 례를 들면:
장문천의 교대ㅡ 팽덕회는 중앙상위회의에서는 모택동 한사람이 말이 제일많고 다른사람은 적다. 그혼자 마음대로 정한다. 남녕회와 성도회의에서 반모진을 한 동지에 대해서 그렇게 투쟁하는 방법까지 채취할건 뭔가, 개인의 위신만 주의하고 집체의 위신은 주의하지 않은게 아닌가했다. 또 말할건 쓰딸린의 후기위험에 주의해야한다, 모택동은 중국의 고서들을 많이 읽고 구사회에서 사람다스리는 방법을 배웠기래 매우 사납다. 황극성의 교대ㅡ 팽덕회는 나보고 “지난해 너무크게, 빠르게, 급하게 해서 항가리사건같은게 생길번했다.”고 말했다. 팽덕회는 또 “성마다 모택동의 집을 지었다.”고 알려주면서 “각지에서는 집을 짓는데 불만이 있고 <동방홍>을 부르는것을 반대하며 모택동만세를 부르는데대해서도 불만있다.”고 했다. 그는 “문공단을 움직여 임금의 첩을 선발한다.”고 소화와 라서경동지를 욕했는데 기실은 모택동동지를 욕한것이다. 팽덕회의 교대ㅡ 로산회의때 장문천이 세 번 웃층에 올라와서 내하고 모택동동지는 사납다고 하면서 쓰딸린의 만년과 독재를 말했다. 주소주는 자기도 쓰딸린의 만년에 대해서 말했다고 승인하면서 이것은 모택동은 의심이 많고 독단전횡하며 자아비평이 모자라다는것을 빗대고 말한것이다, 로산회의가 반“좌”던것이 반“우”로 180도 돌아졌다. 주소주는 교대하는 과정에 모택동의 비서 전가영이 자기는 장차 중남해를 떠날때는 모택동에게 세가지 의견을 드리겠노라했다면서 그 세가지를 아래와 같이 밝히였다.
(1) 천하를 다스릴줄을 알아도 좌우를 다스릴줄은 모른다. (2) 백년후에 자기를 의론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3) 비평을 들으려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은 진언하기 어려운것이다
불정상적인 “양보”습관이 생겼다.
모택동의 속심을 제일 잘 알아맞히는 림표가 1959년에 팽덕회를 비판할적에 공개적으로 선포했던것이다. “당을 믿고 모주석을 믿어야 하며 당성을 가강히 하고 자기를 좀 낮출줄 알아야 한다. 제가 옳은것 처럼 다른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당중앙과 모주석이 하는 것만이 옳으니 혁명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자신심을 버리고 개인영웅주의를 버리라. 영웅은 오직 모주석밖에 없다. 그 누구도 영웅이되려니 생각지도말라.” 림표는 1966년 5월 중앙정치국확대회의때도 맹세가 성실해서 믿을만하게 부르짖었던것이다. “우리가 지금 모주석을 옹호하고있는데 백년후에도 우리는 모주석을 옹호해야한다.” “모택동이 하루를 살던 90살을 살던 100살을 살던 어쨌든 우리 당의 최고수령인것이다. 그의 말은 모두가 우리들의 행동준칙인것이다. 누가 그를 반대한다면 전당이 일떠나 죽여버리고 전국이 일떠나 토벌해야 한다.” 이런 귀맛좋은 말이 아마 모택동의 마음에 들었던모양이다. 이 말을 한 림표는 3개월후에 모택동이 제정한 계승자로 된것이다. 그런즉 이건 두말할것없이 그가 한 말이 큰 은을 낸것만은 사실인것이다.
팽덕회의 사건은 당내민주생활이 엄중한 손해를 입었다는 표시였다.
그때로부터 당내에에는 일종의 불정상적인 “양보”습관이 생겨났다. 모택동은 언제나 옳다는것, 그래서 사업상 오유가 생겨 비판을 해도 우선 모택동의 “혁명로선은 옳다.”고 긍정하면서 당이 양보하고 중앙이 집체적으로 책임을 질 지언정 그의 책임은 감히 묻지 않는 그것이였다.
모택동의 정치비서 대약진중 량난처경
모택동은 호교목의 일에 화를 냈다. 그는 호교목을 아주 예리하게 비평했다. “넌 나의 비서일 따름이야, 부주석의 의견을 왜서 보고하지 않았나?” 이때는 진운(陳云)이 중공중앙의 부주석을 담임하고있었던것이다. 호교목은 모택동한테 비평받았는데 사실 그한테도 딱한 사정이 있은것이다. 중공8기6중전회에서 왕가상(王家祥)이 인민공사문제에 대해 의견이 있어서 류소기와 담화했다. 류소기는 이를 모택동에게 말했건만 모택동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것이다. 이 일을 대략알고있었던 호교목은 진운의 의견마저도 모택동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원인은 말해봤자 자기말이 모택동의 귀에 들어가지 않거니와 도리여 진운이 책망만 받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6일 모택동의 생일날에도 진운이 당면에서 말했건만 모택동은 들은체도하지 않았던것이다 .
1958년은 “대약진”의 한해였다. 모택동은 의기분발하여 빈번히 순찰을 나가 이르는곳마다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대약진을 고무격려했다. 호교목은 비서였으니 그를 따라 모든 회의에 참석해야했다.
1월, 항주회의(부분성시위서기회의), 남녕회의(9성2시서기회의). 3월, 성도회의(중앙공작회의) 4월, 한구회의(성도회의의 계속)
주은래는 하는수 없이 5월에 열린 중공8대2차회의에서 검토를 했다. “반 ‘모진’은 착오로서 1956년 11월 8기2중전회의 발언중에서 집중적으로 반영되였다.”
“반 ‘모진’의 착오는 엄중한것이다. 다행히 당중앙과 모주석의 정확한 령도가 있었기에 즉시 규정하고....”
진운역시 회의에서 검사했던것이다. “당시 반 ‘모진’의 방침성착오에 대해서는 내가 주요책임을 져야한다.”
그 외에도 리선념과 박일파가 핍박에 못이겨 반‘모진’은 ‘착오’라고 검사했다.
주은래, 진 운, 리선념, 박일파의 검사는 “반모진”비판을 발동하려는 모택동이 발을 붙이게 만들었던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그를 무모하게 아무런 효험도 없는 활을 쏘게끔 부추기는 격이되고만 것이다.
대약진”을 실현하기 위하여 1958년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북대하에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전당전민은 1,070만톤강철생산을 위하여 부투하자!”고 호소했다.
공보는 호교목이 초안을 잡았다.
박일파(薄一波)가 다음과 같이 회억한바있다. “지방책임자 몇이(인용자 주: 중공상해시위서기 가경시같은 사람)강철생산을 배로 늘일것을 극력주장했다. 모주석은 매우기뻐했다. 나는 완성할것 같지 않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서 모주석께 ‘1070’을 공보에다 써넣을것을 건의했다. 모주석은 찬성했다. 당시 나는 공보의 초안을 잡은 호교목에게 모주석이 ‘1070’을 공보에 써넣으라 말했다고 통지했던것이다. 나의 뜻은 공보에 ‘장군’의 뜻도 있고 모두가 이같이 주장하니 책임을 모두가 져야한다는것이였다. 사실이 증명하는바 나의 그 건의는 착오였다.”
박일파는 그당시 국무원북총리 겸 국가경제위원회주임이였다. 솔직히 말해 그는 몇 달전에 “반모진”을 했다가 검토를 한 처지였기에 아직 머리가 랭정했던것이다. “약진”의 물결을 막안낼 재간이 없다는것을 알고는 “장군”의 뜻에 맡기는 판이였다. 모택동이 머리를 끄덕였으니 호교목은 그러는대로 “1070”을 공보에 넣은것이다.
3개월후, 중공8기6중전회가 무창에서 열리였다. 초안을 회의에 공보한것도 의연히 호교목이였다.
공보를 쓸 때 호교목은 또 같운 문제에 부딛쳤다. 전회에서 1959년의 “대약진지표”를 통과하면서 공보에 써넣는가 넣지 않는가를 대중앞에 공개하는가 어쩌는가였다.
“반모진” 때문에 검사를 해본 진운역시 머리가 맑아있었다. 그는 그런 “약진지표”는 완성하기 어렵다는것을 알고있었기에 호교목을 찾아와 구체적인 수자는 공보에 써넣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던것이다.
호교목은 진운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거니와 진운의 그같은 의견을 모택동에게 반영하지도 않았다. 호교목은 초안을 잡은 회의공보에다 또 이런 한단락을 써 넣었던것이다.
호교목이 초안을 잡은 공보를 모택동이 심열하고는 동의했다. 모택동은 1958년12월15일에 호교목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교목동지: 문건이 탈고되였다고 볼 수있소. 제삼항에다 몇글자 가첨했소. 전화로 수개된 곳을 북경에 알려 17일오후에 방송하도록 준비시키며 겸하여 주석문제결의도 함께 18일신문에 나가게하기 바라오. 모택동 12월 15일 오후10시.
(주석문제결의란: 전회에서 모택동자신이 다음기에는 국가주석후선인에 넣지 말아달라는 건의에 따라서 지은 결의를 가리킨다.)
공보가 발표된 후 강철, 석탄, 량식, 면화 그 네가지의 큰 지표는 전당과 전국 1959년도의 분투목표로 되었다. 따라서 높은 지표자체가 실제를 떠난것이였기에 “대약진”은 허영뿐인 불길로 타올랐던것이다.
진운은 한번 또 한번 모택동에게 자기의 의견을 진술했다. 그 의견들이 처음에는 모택동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1958년 12월 26일, 모택동의 생일날에 진운은 그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귀띔했던것이다. “명년의 강철산량 1천8백톤을 아마도 완성할것 같지 않소.” 모택동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던것이다. “내가 하자는 일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이제 실천이 검험할게요.”
1959년 1월, 4월에 진운은 지표를 낮출 의견을 제출했다. 고지표집행중 어려움을 당한것이다. 그제야 모택동은 차츰 진운의 의견을 들어주기시작했다.
1959년 4월, 중공8기7중전회를 상해에서 열었다. 모택동은 말했다. “매일 고조를 일으킬 수는 없으니 파도식전진을 해야한다.” 이는 그가 고지표문제에 이미 다소감각이 생겼다는 표명이였다. 그렇지만 중공8기7중전회공보는 의연히 중공8기6중전회의 공보에서 제기한 “4대지표”에 무게를 실어 술평했던것이다.
공보는 아래와 같이 썼다.
“전체회의는 충분한 토론을 거쳐 1959년국민경제초안을 통과하였다. 이 국민경제초안은 제8기6중전회에서 제출한 강철산량 1천8백만톤, 석탄산량 3억8천만톤, 량식산량 1만공 5백억근, 면화산량 1억단. 이 4대지표와 급년 제1계도생산과 건설의 정황에 의하여 편제한... ”운운.
진운은 이 공보를 보고나서 직접 모택동을 만나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지표들을 공보에 써넣지 말아야지. 이러면 피동에 처한다니까.” 모택동이 들어보니 진운의 말에 도리가 있는것 같았다. 진운은 이때라 생각되여 그한테 중공8기6중전회가 결속될때에 자기는 이미 호교목에게 제견해를 모택동에게 전해달라했노라했다
이리하여 모택동은 대번에 화를 내면서 호교목을 예리하게 비평했던것이다. “넌 나의 비서일 따름이야, 부주석의 의견을 왜 보고하지 않았나?” 그 리고는 진운을 표양했다. “진리가 때로는 개인의 손에 있을 수 있지.”
주의깊고 신중하거니와 조직규률성이 높은 호교목은 모주석의 비평을 적게 받았다.
호교목은 이번에 주의깊고 신중하거니와 조직규률성이 높은 호교목은 모주석의 비평을 적게 받았다.모택동한테 비평받았는데 사실 그한테도 딱한 사정이 있은것이다. 중공8기6중전회에서 왕가상이 인민공사문제에 대해 의견이 있어서 류소기와 담화했다. 류소기는 이를 모택동에게 말했건만 모택동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것이다. 이 일을 대략알고있었던 호교목은 진운의 의견마저도 모택동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원인은 말해봤자 그것이 모택동의 귀에 들어가지 않거니와 도리여 진운이 책망만 받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6일 모택동의 생일날에도 진운이 당면에서 말했건만 모택동은 들은체도하지 않았던것이다.....
중공8기7중전회이후, 진운은 모택동과 중앙서기처의 위탁을 받고 경제계획지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5월 11일, 그는 정치국회의에서 1959년도 강철산량을 1천3백만톤으로 낮추었다. 후에 사실이 증명한바 진운의 의견은 중국의 실제에 부합되였던것이다. 1959년의 강철산량은 1천3백87만톤이였다.(게다가 이 수자마저도 수분이 있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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