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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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28)
2011년 03월 25일 00시 07분  조회:2901  추천:11  작성자: 김송죽
          움지에 묻힌 비밀(28)

           (1) 문화대혁명
        (2) 문화대혁명전의 "반동학생" 정리사건
 
                       
                                문 화 대 혁 명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중국에서 모택동이 발동하고 령도한 정치운동인바 발전과정을 3개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발동되여서부터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제9차전국대표대회까지. 이 계단의 임무는 이른바 “자산계급사령부”를 쓸어버리고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의 “권리”를 빼앗아내는 것이다. 목적은 “자산계급전정을 무산계급전정으로 바꾸자는 것”인바 “일체를 의심”하고 “일체를 타도”하며 “전면내전”을 하는 것이였다.    
1966년 5월 중앙정치국확대회의와 동년 8월에 열린 8기11중전회는 “문화대혁명”이 전면발동되였음을 표시한다. 그 두차례의 회의는 각각 <<5.16통지>>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통과하여 이른바 “팽진, 라서경, 육정일, 양상곤 반당집단”과 “류소기, 등소평사령부”에 착오적인 비판을 한 것이다. <<5.16통지>>에 근거하여 5월 28일 중공중앙은 통지를 내고는 중앙문화혁명소조를 내왔는데 조장에 진백달(陳伯達), 고문에 강생(康生)이였고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등이 부조장였다. “중앙문혁소조”는 중앙정치국상위아래에 속했다가 후에는 점차 중앙정치국과 중앙서기처를 대체하여 “문화대혁명”의 실제적인 지휘기구로 되었다. 
   
8기11중전회 후, 전국적인 범위에서 드높은 기세로 “자산계급반동로선”을 비판하는 물결을 일으켰는바 창끝을 직접 류소기와 등소평에게 돌리였다. 홍위병이 갑자기 생겨나 전국범위내에서 “대련계”를 지었다. 그들은 중앙문혁소조의 뜻에 따라 각지에서 동란을 일으켜 지방당조직들을 반신불수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던것이다. 
   
1967년 1월 6일, 왕홍문을 위수로 한 “상해공인혁명반란총사령부” 등 반란조직은 강청, 진백달, 장춘교의 책동으로 “상해시위타도대회”를 열고 상해시위의 권력을 탈환했는데 이것을 “1월폭풍”이라 한다. 
   
1월 8일, 모택동이 권력탈취를 지지하고 호소함으로 하여 전국적인 그같은 혼란이 가심해졌다. 
   
1967년 1월부터 2월사이 중앙은 부동한 회의를 열었는데 로일대혁명가들은 “문화대혁명”의 착오적인 작법에 대해 강렬한 불만을 품으면서 림표, 강청무리가 로혁가와 간부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당과 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죄악이라면서 맛서 투쟁했다. 강생일당은 모택동에게 편면적인 보고를 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을 비평하면서 2월항쟁을 도리여 “2월역류”라고 모욕했다. 
       
2월항쟁이 부정되면서 일체를 타도하는 바람이 점점 더 전면적으로 세차게 불기시작했다. 림표, 강청, 강생일당의 조종하에 이른바 반역자잡아내기운동, “혁명대비판”운동, 계급대오정리라는 운동을 일으켜 류소기, 도주, 팽덕회, 화룡 등을 비롯한 무수한 혁명자들을 박해하고 숱한 원안(寃案)을 빚어냈다. 1968년 9월 5일, 전국 29개성과 시, 자치구에서 선후하여 혁명위원회를 건립함으로써 마침내는 “전국을 붉게” 만든것이다. 
       
1968년 10월, 중공8기확대회의12기전회는 “문화대혁명”의 리론과 실천에 대해서 완전히 긍정했다. 그러면서 전회는 류소기를 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거나와 <<중국공산당장정(초안)>>에서 “림표는 모택동동지의 친밀한 전우며 계승자”라고 규정했다. 
   
1969년 4월, 중공제9차대표대회가 열리였다. 림표가 회의에서 “무산계급전정하의 계속혁명리론”이라는 정치보고를 하면서 그 일당의 골간들은 중앙정치국에 들어가 당내의 세력을 강화했다.
 

제2단계:
1969년 4월 중공9차당대회가 열려서부터 1973년 8월 중공10차당대표회를 열때 까지. 이계단의 주요내용은 림표반혁명집단이 최고권력을 찬탈하려고 음모하면서 반혁명정변을 책동하다가 분쇄된 것이다. 이 사건은 객관적으로는 “문화대혁명”이 실패하였음을 선고한것이된다.    
그후부터 주은래의 장악하에 중앙의 일상적인 사업과 각항사업은 호전될 기회를 얻었다. 
       
그전에 있은 당의 9차당대표회 후 전국은 “투쟁, 비판, 개혁”계단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단계의 중심은 이른바의 “수정주의로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9차당대표회의 방침을 관철하여 전국을 “문화대혁명”의 궤도에로 이끄는 것이였다. 이 계단에 “혁명대비판”을 계속벌려갔다. “대오정리”를 계속했고 “1타3반”을 계속했으며 “5.16분자”를 낱낱이 조사하고 대오를 정리확대하는 사업들을 했다. 따라서 기구를 간소화하고 간부를 아래로 내려보내여 이른바 “5.7도로”를 걷게 한다면서 수많은 간부와 지식분자들이 박해를 받게 했다. “교육혁명”은 또다시 교육질량이 보편적으로 내려가고 교학질서가 혼란한 현상을 빚어냈다. 1971년, 강청이 만들어낸 <<전국교육공작회의기요>>는 광범한 지식분자의 적극성을 엄중하게 압제했다. 
   
1971년 9월, 림표집단의 반혁명정변이 분쇄된 후에 주은래는 모택동의 지지를 받아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면서 정치, 경제, 외교 등 방면의 사업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조치를 댔다. 하지만 그는 강청일당의 공격을 받았다. 모택동도 당시에 해야 할 것은 의연히 “극우”를 반대하는 것이라 여겼기에 “좌”를 비판해야한다는 정확한 의견을 부정하면서 “좌”경착오를 그냥 발전시켜나갔던 것이다. 
       
1973년 8월, 중공10차전국당대표회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대회는 9차당대표회의의 “좌”경착오외 지도방침을 계승하면서 왕홍문(王洪文)을 중앙부주석으로 올려놓았다.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은 중앙정치국내에서 “4인방”을 결성하였는바 이로부터 강청반혁명집단의 세력은 강화되였던 것이다. 


제3단계:
1973년 8월 중공10차당대표회가 열려서부터 1976년 10월 “4인방”이 분쇄될 때 까지.    
1973년 7월, 모택동은 비림비공(批林批孔)을 제창하는 것으로 “문화대혁명”을 보호하려했다. 1974년 1월초, 강청, 왕홍문은 “비림비공”을 전개할 것을 제출하여 모택동의 비준을 받아냈다. 강청일당은 이기회에 화살을 주은래에게 견줌으로써 당권과 정원을 찬탈하려고 음모했다. 모택동은 그 음모를 알아보고 그들을 엄히 비평하면서 “4인방”이라 했다. 
   
1975년초, 4기인대에서 주은래를 총리로 하고 등소평 등을 부총리로 하는 국무인선이 있었다. 회의 후 주은래는 병이 중함으로 등소평이 모택동과 주은래의 지지를 받아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그는 선후하여 군위확대회의와 공업, 농업, 교통, 과학기술 등 여러방면의 회의를 열어 정돈을 하였기에 형세는 선명하게 좋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가 계통적으로 “문화대혁명”의 착오를 규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무산계급전정리론”을 먼저 학습해야한다면서 “등소평을 비판,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운동을 발동했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가 서거하자 전국인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추도활동을 벌리였다. “4인방”은 이를 극력압제하면서 “등소평을 비판,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허나 그것은 민분을 자아냈다. 북경, 남경, 태원 등 지에서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발동되여 주은래를 추도하였는데 그것이 어느덧 “4인방”을 반대하는 성세호대한 군중운동으로 번지였다. 중앙정치국과 모택동은 천안문사건의 성질에 대해 착오적인 판단을 하고는 이를 “반혁명사건”이라 했고 등소평을 틀리게 처리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죽었다. “4인방”은 반혁명의 발걸음을 재우쳤다. 왕홍문은 중앙령도자리에 제가 오르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는 상해민병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어 반란을 준비했다. 
    
10월 10일, <<광명일보>>는 “4인방”이 꾸며 만든 문장 “영원히 모주석의 기정방침대로 하자”를 실어서 “기정방침”이라는 모택동의 유촉을 조작해냈다. 당과 국가의 최고령도권을 어떻게하나 잡아보려는 속셈이였다. 화국봉, 엽검영, 리선념 등을 핵심으로 한 중앙정치국은 강청일당을 숙청함으로서 나라를 구원했고 “문화대혁명”의 재난을 결속짓게되였다. 1977년 8월, 중공11차대표회는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였음을 선포했다. 
        
1981년 6월 중공11기 6중전회는 <<건국이래당의 약간한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하였는데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와 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문화대혁명’의 력사는 모택동동지가 발동한 ‘문화대혁명’의 주요론점이 맑스레닌주의에 부합되지 않거니와 중국의 실제에도 부함되지 않음을 증명한다.”“실천이 증명하다싶이 ‘문화대혁명’은 혁명 혹은 사회진보에는 그 어떠한 의의도 없거니와 될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차례 지도자가 틀리게 발동하여 반혁명집단에게 리용된 , 당과 국가와 각족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갖다준 내란인 것이다.”

           문화혁명전의 “반동학생” 정리사건


건국이래, 개혁개방이전 “반동학생”이란 이 명사를 교육계통내부통보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진짜 정치모자로서 정식처분을 받은 학생은 당안에 들어가 1963부터 1966년에 이르는 사이 반동학생으로 처리되였다.


원인

“반동학생”을 족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은 1963년도 여름방학에 북경고등학교졸업생들의 졸업감정을 하면서였다. 1963년 북경사원(北京師院) 수학계 선생이였던 주지증(朱志曾)의 회억을 보면 그때 학교측은 졸업전에 매사람마다 모두 자아감정(정치성을 띈)을 쓰라해서는 집체토론을 거쳐야만 졸업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는것이다. 

감정서를 쓰기전에 학교측은 북경시위대학공작부와 북경고교국의 문건을 전달했다. 문건은 북경고교령역에 첨예한 계급투쟁이 존재하는바 그것은 졸업생중에 계급의 적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례를 들었던것이다. 그중 인상이 제일깊은것은 북경지질학원의 물리탐사전업을 졸업하게 된 상육삼(尙育森)이란 학생이 <<국제공산주의운동총로선의 건의에 관하여>>에 이의(異議)가 있어서 곧 중앙방송국에다 7,000여 자에 달하는 편지를 써서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번 공개적인 변론을 해보자고 요구했다는것이다. 그랬다하여 그를 북경시 첫 “반동학생”으로 몰아버린것이다.
 
이 일을 북경시시위서기였던 팽진이 모택동에게 보고하여 1963년 7월에 <<중공중앙, 국무원이 고등학교응계졸업생중 정치상 반동인 학생처리통지>>를 내린것이가. 

모택동은 지금 이런일이 많은데 이는 한무리의 극우분자라고 했다. 문건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었다. 
       
“북경시의 반영에 근거하면 금년의 고등학교응계졸업생중 극소수의 반동학생이 있어서.... 우리를 발광적으로 진공하는데 그 정도가 지어 반우투쟁때 극우분자를 초과하는것이다.” “북경시고등학교가 이런 상황이니 전국고등학교에도 역시 같은 상황일것이다. 한줌도못되는 이런 반동학생은 반드시 시간을 놓치지 말고 제때에 잡아내여 폭로비판하고 엄숙히 처리해야 한다.”
    
이 문건의 정신에 따라 교육부는 국무원교육판(國務院敎育辦)의 비준을 거쳐 <<고등학교응계졸업생중에 정치상 반동인 학생을 로동교양 혹은  로동고찰기간시행관리방법>>을 비준제정했던것이다.      
                                 

이리하여 1963년 여름방학전부터 전국의 대학과 전문대학에서는 “반동학생”을 색출하여 처리하게 되었다. 맨처음에 처리받은 이들로는 상육삼, 주지증, 리명창(李明昌)과 북경대학의 오계원(吳啓元), 항철보(伉鐵保), 과학기술대학의 마가화(馬家驊) 등이였다. 1964년에 그들은 붙잡혀 홍기농장에 끌려가 로동개조를 했다. 
                                    

넓게 펴다
    
1964년에 이르러 계급투쟁은 끓어번지였다. 1963년 3월 5일 “뢰봉을 따라배우자”(목적은 계급투쟁을 틑어쥐기 위함)는 명목으로 학생을 상대로 하는 계급투쟁이 서막을 올리였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청년학생의 진지는 무산계급이 점령하지 않으면 자산계급이 점령”하니  <<뢰봉일기>>중의 “좋은일하기” 정신을 본받아 일련의 계급투쟁교육을 해야한다는 것이였다. 요구는 학생들이 실제와 결합하여 고비를 넘게끔 동원하여 자아검사를 하라는것이였다. 북경사원화학계의 우(于)아무개는 “반동학생”표본이 되어 로개국농장에 가서 로동개조를 했다. 1964계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분위기가 매우긴장했던 것이다. 

1964년 “반동학생”정리는 전국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북경사범학원(지금은 북경사범대학) 중문계는 1964년새학기가 시작될 때 두해전인 1962년하반년에 있었던 반급 “선거문제”는 계급투쟁이였다고 하면서 학생끼리 “좌중우”를 갈라 내부에서 타격대상을 점찍어놓았다. 일부학생더러 지난일을 회억하게 해서는 유관학생의 언론을 긁어모았으니 목적은 바로 그를 타격하자는 것이였다.    
   
단장취의(斷章取義)라 문장의 일부를 끊어 저자의 본의와는 달리 제멋대로 사용하면서 다른 꽃을 접목하는 식의 현상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했던것이다. 그래서 소동을 유발했는데 어느 학교나 검은명단에 든 학생은 따돌리였다. 7월중순부터 감정이 시작되였다. 사람마다 계급투쟁높이에서 자아검사를 하면서 자신의 인식을 분석했다. 먼저 소조에서 검사하고 마지막에 “계총지(系悤支)”가 결정지었던것이다. 그 다음의 순서에서는 선이후난(先易后難)이라 “사상이 진보한 학생”은 얼른 통과되여 출전하지만 문제있는 학생은 뒤로 밀려 반복적으로 검사하고 적발 비판을 받아야했다. 이같이 매 학생의 사상면모를 밝혀냈던것이다. 관건적인것은 “세폭의 붉은기”와 “반수투쟁(反修鬪爭)”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가였다. 
       
7월말, 매 학생마다 돌아가면서 검사했는데 대부분이 통과되였다. 한데 매개조에 한둘은 통과되기 과연힘들었던것이다. 그들은 바로 반복적으로 적발비판받았고 이른바 “죄”라는 것을 승인하고 검사한 사람이였는데 통과된다해도 그야말로 아득바득 겨우겨우였다. 

    
즉각평하지 않았다, 통과되지 않을거라고 말하지도 않았거니와 통과된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사람을 벌벌 떨고 불안하게만 만들었던 것이다. 더욱히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건 이틀후에 례당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총지서기가 졸업검증은 승리적으로 결속지었다고 하면서 지금부터는 적을 투쟁하는 단계에 진입하는데 다시말하자면 “반동학생”을 정리한다고 선포한 그것이였다. 그는 계속하여 “반동학생정리문건”을 선독하고나서 “반동학생표준”을 선포했다. 주요하게는 “당령도, 당정책과 사회주의를 공격한 언론”, “세폭의 붉은기”와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적이 있는 학생이였다. 

    
이러하니 통과되지 않은 학생은 자연히 “반동학생”후선인으로 보게되는 것이였다. 

   
중문계에 10여명이나 되였다. 그들에게 “반동학생”이라 선포하고는 3년간 로동고찰처분을 주었다. “반동학생”으로 정한 후 졸업을 시키지 않고 그저 생활비(매월 28원)만 주면서 먼저 학원에서 일을 시키다가 1965년 1월 4일에 북경남구농장2분장에 보내여 로동개조를 하게했던것이다.
 
   
그후 모두 3차의 정리가 있었는데 남구농장에 온 사람이 모두 61명으로서 그들은 27개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온 학생들이였다.


“죄행”
  
“반동학생”이라는 것이 다가 평상시에 동학지간에 한담을 하면서 속심을 토로했거나 학교에서 사상을 정리하면서 그릇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꼬리를 잡지 않으니 허심하게 시원히 털어놓으라 유도해서 믿고 말했거나 혹은 일기에 혹은 친구간에 오간 편지에 쓴 것이 죄증으로 되었던 것이다. 
   
구경 어떻게 되어 “반동”이 된건가? 무슨 법을 위반했길래? 무슨 죄를 졋길래? 아래 몇가지 방면이였다. 
       

(1). 반수방수(反修防修)에 대한 태도.
   
(2).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태도.
    
(3). 1957년 우파분자의 억울함을 대신말한 것.
    
(4). 팽덕회의 처경을 생각하면서 그의 관점을 찬성한 것.
   
(5). 개인미신을 반대하고 민주를 부르짖은 것. 

   
이상의 소위 “죄행”이라는 것이 대부분이 개인 견해로부터 나온 언론으로서 실상은 근본 아무런 문제꺼리로도 되지 않는 것이였다. 례를 들것 같으면 어느때 “마레주의는 강냉이 떡을 먹고 수정주의는 빵을 먹는다.”는 말을 죄친것을 꼬집어 사회주의를 악독하게 공격하고 수정주의를 불어댔다고 죄를 씌운 것이다. 그 외에 1957년에 우파로 된 4명의 학생(북경사범대학의 소수장, 진수강. 북경농업대학의 장신행. 북경대학의 장세림)은 별로 문제될 말을 한것도 없는데 순전히 숫자를 채우느라 짚혀나와 “반동학생”이 된 것이다. 


“반동학생”은 우선 적아모순으로 성질을 정해놓고는 처리는 인민내부모순으로 했는데 2. 3년로동고찰(생활비 28원) 혹은 로동교양 3년(생활비 23원)으로 판결했다. 고찰이라는것과 교양이라는 것은 생활비가 좀 차이있을 뿐이지 기실은 같은것이였다. 

   
1965년 원월 3일부터 북경고등학교의 “반동학생”은 모두 북경남구농장2분장에 보내여 집중관리하게 했다. 당시 북경시위대학부로동생산처가 2분장에 로동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이를 “고교대대”라 불렀으며 시위는 방수반수(防修反修)의 수요로부터 남먼저 고교계통의 로동기지를 그같이 만들어 전문 시소속 교직공의 하방로동을 안배했던 것이다.  

“반동학생”은 조직상에 고교대대에 속했지만 관리는 거기서 하지 않고 따로 “반동학생”관리조에서 관리했다. 관리조에는 상관되는 고교에서 파출한 보위, 후근과 정공인원이 있었고 그들은 시위대학부와 시고교국의 공동지도를 받은것이다.         

관리조는 관리를 잘하느라 “반동학생”을 “개조에 적극적인 것”, “일반적인 것”과 “반개조”로 나누었다. 정치태도를 깨끗하게 가지게 하느라 제1보로 “계급투쟁”방법으로 개조를 촉진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적극에 의거해서 일반과 단결하여 반개조를 타격하는 것이였다. 이를 잘해내기 위하여 서로감독하고 적발하는 분렬책을 썻다.  


“개조”는 잔혹했다. 어떤 때는 감옥만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특별히는 문화혁명시기에 그러했던것이다. 본래 “반동학생”이란 처리자체가 과도한게 분명하건만 쩍하면 “반동학생”을 상대로 하여 비판투쟁회를 하군했던 것이다. “비투(批鬪)‘라는 것이 쩍하면 입과 손을 함께 놀렸기에 사람을 때리고 때려 부상을 입히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관리조라는 것이 거의 아무런 조직의 령도도 받지 않았거니와 책임마저 지지 않아서 개인 악감에서 나온 자들은 제가 어떻게 하기싶으면 어떻게 행패부렸으니 당하는 학생은 신체상에서나 정신상에 심한 모욕과 고통을 받은 것이다.  
       

감옥에서 죄범에 대한 요구는 “제 힘으로 먹고 제절로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였다. “반동학생”들이 남구농장에 있을 때는 한창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고조기였는데 그들에게 “구평(九評)”을 학습시켰다. 이 역시 개조를 위해 학습하는것이였는데 중점이였다. 그 문장에는 무산계급의 후계자를 배양하는 다섯가지 표준이 있었는데 이것이 본래는 국가대권을 이어받을 “무산계급정치가”에 대한 요구였지 보통백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반동학생”들더러 자기를 그 표준에 도달하게하라는 것이였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학생모두가 그 표준에 도달해야한다면서 지어는 “반동학생”마저 그 표준에 도달해야한다고 요구했으니. 


1965년 말에 건축공정학원의 해기복(解基伏)이 표현이 좋다해서 앞당겨 처분을 해제했다. 1966년도에 2년사이 개조가 괜찮다고 여겨지는 “반동학생” 한패를 골라 내보내는 것으로 처리했다. 


문화혁명때는 허다한 “반동학생”이 이미 기한이 다 되였거나 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처분은 해제되지 않았거니와 도리여 인신자유마저 박탈되였다. 그들은 외계와 일체 련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매일 힘든 일을 12시간이나 강제적으로 했다. 1966년 모택동이 천안문성루에서 첫번째 백만홍위병을 접견 했을 때 그들을 고무하느라 “요무(要武)”라한 것이 이들에게는 화를 주었다. 그후부터는 “반동학생”의 머리를 진짜죄인모양으로 깍아버리고는 목에다 패쪽을 걸고 조리돌림했다. 그러다가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 쩍하면 때리면서 투쟁했으니 그들이 받은건 온갖 비인간적인 시달림과 모욕이였던 것이다.  


1969년 1월에 이르러, 말하자면 기한이 1년이나 지난 후에야 이 무고한 학생들은 비로서 북경시위의 명령에 따라 각자는 제 학교에 돌아가 처리를 받았게되였다. 한데 한참 란잡하고 무질서한 때여서 더구나 제마끔이니 말이아니였다. 
     
어떤데서는 일자리를 주었었지만 평판은 하지 않고 모자를 씌운채 감독하면서 사용했고 상당부분의 학생들이 계속하여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혁명적인 대중비판의 표적이 되여 계속 투쟁받았고 어떤 싸람은 되돌아가 4류분자로 처리되면서 판결받거나 감금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갈데마저 없어 떠돌다가 실종되고 만 것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1976년 7월 26일에 “무산계급사령부를 악독하게 공격하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과 비림비공운동
(批林批孔ㅡ림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을 모욕했다고 13년도형에 떨어졌다가 1978년 10월에 북경 중급법원으로부터 “사인방”을 겨누고 맛선 것으로 된다면서 원판결을 철수하고 새로 평판을 했던 것이다. 출옥 후 그는 당초에 법원에서 원래대로 “반동학생”으로 판결했길래 사범학교를 찾아갔더니 거기서 인차 반응을 보여 1979년 3월에야 잘못된 안건으로 인정하고 마침내 시정을 받은것이다.        

그해의 4월에 남구의 동창들이 그를 청하여 고등교육부에서 전체 “반동학생”들을 평판하게끔 할 수는 없겠는가고 했다.  7월 원 북경항공학원의 평내빈(平乃彬)이 그를 찾아 북경에 와서 이 일을 이야기했다. 8월에 필자는 원 북경교육국국장 위명(魏明)을 찾아갔다. 위명은 자기의 태도를 네가지로 명확하게 표시했다. 
       
(一) . 이 일(“반동학생”문제)은 의례 언녕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二) . 응당 취업년령에 넣어야 한다.
    
(三). 늦게 왔다. 언녕 일찍이 와야했다. 
   
(四) . 자료를 써달라. 직접 원교육부장 장남상(張南翔)에게 갔다 줄 것이다. 
       

1979년 9월 1일, 평내빈은 위명을 찾아갓더니 위명이 자료를 이미 장남상에게 주었는데 장남상이 “응당해결해야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다고 알려주었다.
 
   
장남상은 당년에 동의하지 않았건만 육정일이 제기한 것이고 그래 지금와서는 그가 몹시 후회한다고 했다. .....상해에서 안휘에 보냈던 “반동학생”들은 그 누구든 봐주지 않아 일자리도 없었다. 그들은 람루한 적삼을 입고 거리에서 류랑걸식을 하며 연명 할 지경이였다. 교육부는 이네들을 빨리 구원하자고 서둘렀다. 

   
40여년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와보면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이 학생들은 아무런 죄도 없거니와 모두가 가슴속에 조국애를 품고있은 열혈의 젊은이들이였다. 

   
2007년 4월 10일 당년의 “반동학생”으로 몰렸던 그들은 북경에 다시금 모였는데 아쉽게도 련계가 닿아 만나게 된 27명이 이제는 다 환갑줄에 들어 머리가 희여졌다. 그 외는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도 있고 병들어 잔페로 된 사람도 있었으며 지어는 실종 된 사람까지 있었다. 


대체 누가 이모양으로 만들었는가? 구슬픔이 원한이 사무치고있는 그들의 가슴을 더더욱 아프게 허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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