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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기] 우리의 삶에 리별이 다가올 때 댓글:  조회:239  추천:0  2022-03-29
우리의 삶에 리별이 다가올 때 박미자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희붐히 밝아오는 새벽녘의 선잠을 뚫고 선뜻 깨여진 가슴 한 구석으로 예고도 없이 진한 아픔이 밀려온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짜릿한 아픔이 펌프질을 해대는 심장박동과 함께 혈관을 따라 발끝까지 전달된다. 사랑하는 딸애의 개학날, 행복이 솟아나는 상봉 속에 애잡짤한 리별의 순간은 눈 깜빡 할 사이에 다가온다.  필자 박미자 “엄마, 왜 그렇게 짜증이 났어?”딸애의 옷은 애 아빠가 사는 터라 솜옷 쪼르래기가 망가진 것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 돈을 절약한다고 일반 티켓을 구매한 딸애에 대한 아쉬움…북받치는 감정이 애한테는 신경질 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미안하다. 완벽하게 잘 챙겨야 하는데…솜옷도, 두고 온 목도리도…비행기 좌석도 다 마음에 걸려서 그래!”12시간을 달려야 하는 긴 로정이 마음에 걸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딸애는고생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꼭 끼였던 팔짱을 슬며시 풀고 덤덤한 뒤모습을 보이며 공항 보안 검색대로 향한다. 언뜻언뜻 사람들 틈에 끼여 겉옷을 벗고 안전검사를 받으며 검사구역을 지나는 모습이 눈에 띄이더니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비여진 자리, 목을 빼들고 찾아도 뒤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음을 실감하는 순간, 천천히 발길을 돌려 공항을 빠져나왔다. 왈칵,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터져나오는 아픔 속에 가슴에 남은 응어리 하나가 맴돌다가 꺽 하고 막혀버린다.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주면 근심걱정을 뛰여넘어 안전하게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가 무심히 흘러나올 수 있을가? 생명의 마지막 순간마저 깡그리 바쳐 추락하는 소슬한 락엽의 뿌리 사랑같은 모성애, 육신마저 자식에게 내주는 지독한 거미사랑, 엄마에게는 모질게 굴다가도 자식한테는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기만 한 엄마라는 그 이름을 무엇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을가… 딸애의 대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된 리별과 상봉, 어쩌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리별과 상봉의 련속이다. 리별이 남기고 간 자리, 래일이 기약되는 리별과 기약되지 않는 리별, 그 순간을 위해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가? “리별이 그렇게 싫으면서 교원직은 어떻게 했대?” “학생은 내 인생의 자락에 그냥 있는 거야…” 부녀간의 대화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3년을 주기로 리별을 반복해야 하는 정해진 인연 속에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 반복되는 리별과 상봉의 의미는 구경 어디에 있을가? 대학 입시와 함께 선생님과 제자의 인연은 한단락 막을 내리게 된다. 리별의 순간은 학생들의 찬란한 래일을 위한 알찬 꿈과 도약, 부모님들과 학교 지도부, 담임선생님들과 과임선생님들의 부푼 희망과 기대, 울고 웃던 3년간의 희로애락으로 여울져있다. “3년간 고마웠다. 대학 입시 잘 보자!”마지막 수업, 내 사랑을 송두리채 앗아갔던 첫 제자들, 담임선생님 생애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마음 먹었던 마지막 제자들, 차곡차곡 쌓았던 억눌렀던 감정 조각들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학생들도 훌쩍훌쩍 리별의 소용돌이에 휘몰아친다. “교사절을 축하합니다! 고마웠습니다!” 정성이 담긴 제자들의 교사절 이벤트, 졸업식 이벤트, 성장의 길에서 선생님의 옳바른 인도와 혈육의 정을 무색하게 하는 사랑과 훈육, 사랑하는 련인을 향한 랑만적인 이벤트도 울고 갈 이 세상에 두번 다시 없을 찬란한 깜짝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의 표현이다. 성장과 비약을 해야 하는 삶의 한 단계, 선생님으로서의 책임감과 기대, 학생으로서의 책임감과 도약, 울고 웃었던 시간들은 서로에 기대여가는 봄날의 따스한 정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해빛 한줌 / 바람 한 가닥 / 받고 또 받고 / 주고 또 주고 /살아 있는 것들은 저렇듯 / 누군가에게 기대여야 산다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지고 /길은 길에서 만나게 된다” 박수호의 〈살아 있는 것들〉이 기억을 스치운다. 졸업과 함께 다가온 리별의 순간, 함께 했던 시간 속에 믿음과 기대, 성장과 배려, 추억과 희망을 남기고 간다. 2009년 첫 졸업생을 계기로 방학은 학생들과의 만남의 장이다. 그 속에는 많은 추억이 소환되고 삶이 소환된다. 다채로운 대학교 생활, 다소 무거운 직장생활, 억척스러운 창업사, 오스트랄리아, 일본, 한국 등 이국 타향에서,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개척해나가는 삶의 이야기들, 놓칠 수 없는 학창시절의 추억들… “미안함다. 너무 늦게 찾아뵈여서… 조금은 성공한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어서 이렇게 늦었슴다.”상해에서 당찬 꿈을 키우고 있는 야무졌던 그녀, 녀자가 반장을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당당하게 반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그녀의 출현은 상봉의 환락으로 들끓었던 만남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렸다. 학창시절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해주는 학생들, 스승 앞에서 항상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학생들, 잘살아가고 있노라 전해주는 학생들, 너무나 자랑스런 제자들이다. “공부 성적도 낮았던 제가 뭐라고 퇴학 수속을 밟으러 갔을 때 대학시험을 보라고 그렇게 권고를 하셨습니까?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이 아니면 아마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 인생에 참 고마운 분입니다.”, “제 인생에 담임선생님은 선생님 밖에 없슴다.” 인생의 자락에 그냥 있는 존재, 가담가담 들려오는 제자들의 소식, 래일의 상봉을 기약할 수 없는 가족 간의 정이 아닌 사생 간의 정은 인생의 자락에 청청한 가을달처럼 걸려있다. 리별과 상봉이 반복되는 삶, 그 속에는 꿈을 향한 분투의 려정이, 당당해야만 하는 인간의 자존감이, 고마웠다고 전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선물처럼 준비되여있었다. “인생에 생과 사의 리별이 다가왔을 때 자식의 짐이 되지 말아야지. 그리고 잘 살아왔노라 인사정도는 하고 가야지…” 50대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꿈 하나 생겼다. 허둥허둥 달려왔던 인생,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아진 변곡점에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길가에 피여나는 이름 모를 잡초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나, 가족과 학생들 속을 오가며 살아온 단조로운 인생, 우리의 삶에 리별이 다가왔을 때 남길 수 있는 것은 구경 무엇일가? “나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가” 무심히 읽었던 인생에 던진 철학자들의 물음 한마디, 무심하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평범함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야광주같은 삶,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본연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일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 세대에서 끝을 내야지. 자식이 더는 부모님 때문에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사는 일이 없게 할 거다. 맏이라는 중임이 얼마나 큰지 너희들은 모른다. 그 희생도…” 친구들이 건네는 진솔한 이야기, 우리 세대의 많은 자식들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 그 속에는 부모님만의 희생이 아닌 부모를 위한 자식의 희생과 접어야 했던 꿈들이 꿈틀거린다. 마음 편한 리별을 위하여 서로가 놓아주면서 걸어가고 싶은 삶, 각자의 자리에서 인생에 대한 책임과 추구를 거듭하면서 잘살아내는 것, 나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겠다는 그 소망, 소박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이 길, 잘 걸어내야 한다. 수많은 리별과 상봉을 거듭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사랑하고 리별하고 행복하고 아프고 이 모든 건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다. 리별은 힘들고 슬픈 것만이 아니다. 살아왔던 인생, 살아가야 할 인생에 대한 약속이다. 설레는 상봉과 화사한 리별을 위해 열정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 상봉과 리별 속에 길을 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 그 길 우에 두고 가야 할 것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닐가… “꽃이 핀다 / 계절이 열린다 / 꽃이 만개한다 / 계절이 익는다/ 꽃비가 내린다 / 찬란한 슬픔/ 꽃은 지지 않는다 / 꽃이 열어준 시작에 열매가 맺힌다 / 또 다른 시작이 열린다 / 마음에 지지않는 봄 하나가 피였다” 가슴에 남은 아름다운 드라마 대사 한조각, 똑 같은 리별 속에 담겨있는 또 다른 인생, 찬란한 슬픔 속에 노오란 봄이 피여오른다. 길림신문
8    내 기억 속 평생 두번 뿐인 아버지와의 만남 댓글:  조회:153  추천:0  2021-09-06
[수기] 내 기억 속 평생 두번 뿐인 아버지와의 만남 김삼철 룡정 룡드레 우물가를 지날 때마다 내가 일곱살 되던 해인 1947년  룡정의과대학 병원에서 병치료를 하는 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이 지금도 영화처럼 선명하게 머리 속에 떠오른다.  필자 아버지 아버지는 항일전쟁승리 후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꾸려진 민주대동맹 조직에 가입하여 혁명사업을 하다 보니 늘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의 머리 속에는 평생 단 두번 아버지를 만난 기억 밖에 남지 않았다.  1947년 이른봄 아버지께서 페결핵에 걸려 병원치료를 하게 되였다. 돈이 없어 입원치료는 못하고 병원 가까이에 세집을 맡고 병치료를 다녔다. 그 세집이 바로 룡정 룡드레 우물가 버드나무곁의 일본식 2층짜리 판자집 1층에 있는 한칸이였다. 룡정의과대학 병원과는 100메터 거리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그 집에 주숙하면서 병치료를 했다. 우리 집은 조양천 북쪽 구수하 건너편의 중흥촌에 있었고 룡정과는 30리 거리이다. 어머니는 열흘에 한번쯤 식량과 남새 가지러 집으로 다녔다. 집에는 회갑이 지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무를 돌보고 농사를 지었다. 청명이 지난 어느 따스한 봄날 어머니께서 쌀 가지러 집으로 왔는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 뵈러 가겠다고 생떼를 쓰니 어머니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나도 쌀 짐을 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자그마한 쌀 짐을 등에 지게 하고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큼직한 쌀자루를 등에 지고 머리에도 이였다. 그 때 우리 집은 연길현 14구(현재의 연길시 조양천진 구수하벌) 중흥촌 (현재의 중평촌)에 살았는데 구수하가 서쪽을 굽이쳐 흘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떠난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30리 길을 쉬염쉬염 쉬면서 가자면 오후해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런 길을 어머니는 오전에 왔다가 쉬지도 못하고 오후에 또 무거운 쌀짐을 가지고 떠났다.   필자 어머니 4월중순이라 강물은 뼈를 에이는 듯 차가왔다. 차디찬 강물을 오전에도 건넌 어머니는 한손에는 다 바래진 하얀색 헌 코고무신을 검정치마폭에 받쳐쥐고 한손으로는 머리 우의 쌀 짐을 쥐고 앞만 보며 말없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발등도 가려지지 않는 벼짚신을 벗어들고 이를 사려물고 강물을 건넜다.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렸지만 키가 작아 다 젖었다. “물 속에 있는 돌들이 미끄러우니 주의하여 천천히 건느라”라고 어머니는 소리지르며 주의를 주었다. 조양천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산에서 기울어질 때였다. 이제 좀 지나면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는 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쌀 짐을 지고 헐떡이며 삼봉동 고개에 오르니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나는 삼봉 고개 기차 길을 지나 휴식하였다. 저 멀리에서 숱한 전기불이 반짝반짝 거렸다. 어머니는 저기가 룡정 시내라고 하면서 “빨리 가자”며 일어섰다.   1935년 3월 12일에 찍은 가족 사진(필자 아버지 뒤줄 오른쪽 첫번째,필자 어머니 중간줄 오른쪽 세번째)    삼봉 고개로부터는 내리막길이여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마안툰(马安屯, 지금의 광신촌)을 지나면서 큰 신작로가 나타났고 길 량켠에 조선족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기차 대교를 건널 때에는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5, 6메터 너머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따금씩 삐거덕하는 철교의 널판자소리가 들려올 뿐 사방은 괴괴했다. 어머니가 “지금 건너는 이 기차 다리가 ‘해란강 대교’”라고 알려주셨다. 룡정 시내에 들어서니 가로등이 훤히 흙길을 비추었다. 어머니는 수양버드나무 곁의 ‘룡드레 우물’을 보시며 “인제는 다 왔다”고 하면서 그 옆의 2층 판자집 아래층 문을 열었다. “여보, 아들 철이가 왔소!”하면서 소리치며 집안에 들어섰다. 나도 어머니 따라 집안에 들어서니 “아니, 철이라니? 셋째가 왔소?”하며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나의 몸을 어루어만지셨다. “철이 많이 컸구나. 그런데 이 발뒤축에 피는 어찌된 일이냐? 여보! 빨리 와서 이걸 보오. 발뒤축 껍질이 많이 벗겨져 피가 나는 구만.”하며 야단쳤다. 어머니는 쌀 짐을 내려놓고 달려와 보더니 “벼짚신에 긁히워 벗겨졌구나. 된장을 바르면 괜치않을거야.”라고 하며 상처를 싸매주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았다. 아버지는 소고기 반찬을 나에게 짚어주며 “오늘 철이 쌀 짐을 지고 오느라 수고했다.” 고 칭찬까지 해주셨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칭찬에 아픔은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유쾌했다. 얼마나 바라던 아버지의 칭찬이였던가. 다른 집 애들이 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돌이를 할 때면 나는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기분 좋게 저녁밥을 먹었다. 아마도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나니 심정이 좋았던 같았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내고 온돌에 앉더니 “여보, 철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제법 잘 춥니다.”라고 하며 “아버지 앞에서 한번 재간 피워봐라!”며 박수를 치니 아버지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나는 기분 좋게 제꺽 일어나 당시 마을 나그네들이 부르던 〈전투동원가〉를 힘차게 불렀다. “전투준비하자, 동북의 인민 4천만…”하고 노래하자 아버지는 “철이 정말 노래 실력이 대단하구나”며 크게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양걸춤을 추었다. “양걸, 양걸, 뚤양걸 나무다리 챙챙 해방이로다…” 입으로 반주하면서 궁둥 방아를 찧으며 양걸춤을 신나게 추었다. 모두다 마을 분들이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철이 인제는 다 자랐구나.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하며 아버지는 누웠던 이불자리 밑에서 붉은색 지페 한장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며 “래일 어머니와 함께 상점에 가서 검은색 고무신을 사 신어라”고 했다. 당시 나는 그 돈이 얼마인지 몰랐는데 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동북에서만 사용했던 동북 화페 만원짜리라 하였다. 나는 그 돈을 인차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버지 병치료비도 부족하여 온 가족이 힘들어 하는 형편에서 새신을 살 생각도 안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새돈 한장이 얼마만한 가치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돈이고 내 평생 단 한번 뿐 받아 본 새 지페여서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노래소리에 깨여나 밖으로 달려갔더니 룡드레 우물가의 큰길로 어깨에 장총을 멘 숱한 군인들이 네 줄 행렬을 지어 “썅첸, 썅첸, 썅첸…”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집으로 다시 들어와 아버지에게 물으니 우리 나라 군대—중국인민해방군이라고 알려주셨다. 그 때 수백명 군대가 일제히 발을 맞추어 씩씩하게 노래하며 행진하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메아리쳤다. 그날 아침을 먹고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갔다오시더니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룡드레 우물가에 가서 룡드레 우물의 래력과 룡정지명 관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몸소 나를 데리고 룡드레 우물가를 거닐 던 그 때 그 시절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다. 그 후 아버지는 병이 악화되여 고생하시다가 결국 1947년 겨울 40세도 안되여 사망하고 말았다. 아버지와의 인연은 너무도 짧고 비참하였다. 다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어 마음이 너무 쓰렸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10여일간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아버지와 같이 린근의 상점에 가서 개눈깔 사탕도 사 먹어봤고 닭똥과자도 먹어봤다. 어머니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향수였다. 어머니는 그 일을 알고 돈을 망탕 쓴다고 아버지를 나무람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치료만 생각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때 어린 나이인 데도 그런 눈치는 챘다. 그래서 “가난한 집 애들이 일찍 셈이 든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세를 맡고 있었던 집의 바깥벽은 몽땅 널판자로 되였고 집안에는 박우물도 있었다. 물이 아주 맑고 물 맛이 좋아 그 집 주인은 약수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던 그 집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룡드레 우물가를 확장하면서 정부에서 허물어버렸다. 다행이 수양버들나무만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 번 만남에서 나는 아버지와 더욱 친숙해졌고 아버지의 고매한 성품을 알게 되였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오늘까지도 내 마음속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되였다. “철이야,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하여 꼭 나라에 쓸모 있는 훌륭한 인재가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마디마디의 부탁은 내 인생의 등불로 되여 지금까지 나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아버지는 아주 멋진 사나이였다. 키 큰 미남이였다. 진한 눈섶에 이글거리는 쌍까풀눈은 아주 매혹적이였다. 그런 체격에 연설 할 때면 강물이 흐르는듯 류창하여 듣는 사람마다 감탄했다. 나의 기억 속에 처음 아버지를 만나 뵜을 때는  내가 여섯 살 되던해의 어느 가을의 구정부 마당이였다.  백성들이 연길현 14구 구정부 마당에 모였다. 사람들이 횡도촌 새장거리를 꽉 메워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분이 있었는 데 나의 아버지라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고 인차 나한테로 와서 어깨에 가로 메였던 가죽가방에서 질감이 좋은 종이(일본제 위생종이)를 꺼내여 내 코를 닦아주시며 “너는 왜 항상 코가 많니? 떨어지면 발등이 깨지겠다.”고 나무람했다. 나도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중학교 웅변대회 때 웅변을 잘해 상으로 붉은 수첩을 탄적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돌이를 하는 애들을 볼 적마다 부러움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특별했고 동년시절 아버지를 딱 두번 만났던 그 기억은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80고개 나이에 나의 손을 잡아주셨던 아버지의 그 따뜻한 손은 난류와 더불어 지금까지 내 마음을 덮혀주고 있다. 아버지의 인생은 37세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나에게 남겨주신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은 지금 이 시각에도 내 눈앞에서 또렷이 남아 있다. 그립고 보고 싶은 나의 아버지, 80고개를 넘어서고 있는 이 셋째아들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러봅니다, 아버지! 
7    [일본인상기] 입은 재앙의 근원 댓글:  조회:280  추천:0  2021-02-07
중국 5대 10국시대의 정치가 풍도(馮道)는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 즉 다섯 왕조에 거쳐 여덟 개의 성을 가진 열한명의 임금을 섬긴 재상이다. 그는 설시(舌詩)라는 제목의 시로 자기의 처세관을 후세인들에게 이렇게 남겼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페구심장설) :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기만 한다면. 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 가는 곳 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여러 지방정권(10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에 20년이나 재상으로 일한 비법이 말조심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풍도의 처세술에 대한 총화이다. 우리말에도 흡사한 속담이 있다. ・세치 혀 밑에 도끼 날이 들어 있다 ・화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내 뱉으면 못 줏는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일본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침묵은 금, 웅변은 은 (沈黙は金、雄弁は銀) ・꿩도 울지 않으면 총에 맞지 않는다(雉も鳴かずば撃たれまい) ・입은 재난의 근원(口は災いの元) 모든 속담의 의미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짧은 387일간의 임기 기간에 여러가지 부적절한 발언으로 각계의 비난을 받았던 일본의 제85,86대 총리 모리요시로(森喜朗)가 요즘 녀성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일본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도꾜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인 모리씨는 2월 3일에 있은 JOC 평의원 회의에서 “녀성이 많이 참가한 리사회는 시간이 걸린다. 녀성은 경쟁의식이 강하므로 누가 발언하면 자기도 발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긴다. 하여 누구나 다 발언하려 한다.”는 녀성비하적인 말을 하였다. 국내외 여론이 그 발언에 대한 비난에 박차를 가하면서 회장퇴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모리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상기 발언을 철회하였지만 여론은 여전하다. 한편 네티즌들은 모리씨의 발언은 올림픽정신에 위반되며 일본의 남존녀비 의식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된다고 비난이 쌓이고 있다. 3년전에 썼던 일본인상기 (2018년 4월 9일 발표)를 떠올리면서 변화되지 않는 낡은 의식의 존재를 다시 한번 비판하고 싶어진다. 2018년 4월 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舞鶴)시에서 있은 봄철 오오즈모(大相撲:일본전통씨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던 시장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다. 긴급한 상황에서 관객석에 있었던 두 녀성(간호사)이 도효(土俵:경기장)에 올라 구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잇따라 다른 두명의 녀성도 도효에 오르게 되였다. 두 녀성이 심장 맛사지를 진행하는 도중에 경기장내에서는 “녀성분들은 도효에서 내려 와 주십시오.”“남성분들이 올라 와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이 세번이나 있었고 더우기 관객석으로부터 “내려오라!”는 웨침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환자를 두고 잠시 주저했던 두 녀성이 도효에서 내려 오고 때마침 도착한 구급일군에 의해 환자는 병원으로 호송되였다. 구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남성이 현장에 없었던 상황에서 자칫하면 인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던 그날 안내방송이였다. 한동안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여론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따라서‘전통이냐? 구명이냐?’라는 재래의식에 대한 의문들이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인 스모(相撲)계를 흔들었다. 1500여년전, 농경민족인 일본인들의 신도(神道)의식에서부터 생겨났다는 스모,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일본 특유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경기장인 도효(土俵)가 신성한 장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도효에 녀성이 올라서는 안된다'는, 오래된 신도(神道)의 전통을 주장하는 일본스모이지만 거기에는 전통이라는 명목하의 남녀차별 유전자가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공개한‘큰’사건이였다. 의 ‘뼈대'를 다시 한번 옮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온 풍습이거나 신앙,경향에 대한 유형 혹은 무형의 계승을 전통이라고 한다면 그 전통 역시 력사와 더불어 개변되고 바로 잡혀지면서 나날이 승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고대로 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길게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인간의 정신적인 성취감만을 놓고 보아도 관례와 계통만이 아닌 인간자체의 리해와 납득이 동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계승이 아닐가 싶다. 메이지(明治)시대 이전에는 녀성스모가 존재했다는 력사기재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도효에 녀성이 올라서는 안된다'는 전통도 중도에 새롭게 정해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전통여부를 론하기전에 그번 일은 녀성에 대한 현재 일본사회의 심한 차별경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종 차별을 피하기 위해 피부색갈, 년령 등을 명확히 기재하지 않으며 일본인 특유의‘모호함'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현재 일본사회에서 아무리 전통을 중시하는 장소라 하지만 공공연하게 “녀성은 내려 오고 남성은 올라 가라”고 하다니… 전통의 원격조정에 의한 현존감 비슷한 고리타분한 규정이 죽느냐 사느냐의 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우선적으로, 거침없이 지켜져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능조차를 억제시키는 격이 아닐가 싶다. 3년전 그번의‘사건'을 두고 스모협회가 여러모로 사과를 했지만 한동안 사회적인 실망과 분노는 여전하였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고나니 그 때의 그일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다. 아마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까마득히 잊혀져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그 때와 류사한 아나운스를 하면 안된다는 매뉴얼이 만들어졌을 것 외에 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2019년 에서 발표한데 의하면 경제, 교육, 정치, 건강 등 4가지 분야에서 세계 남녀격차 지수(Gender Gap Index)를 분석한 결과 조사에 참여한 세계 153개 국가 중 일본녀성의 지위도가 121위였다고 한다. 물론 정치참여에 관한 중시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남성들과의 임금차이 등 홀시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존녀비'‘남녀평등'에 대한 일본의 뿌리깊은 의식은 언제쯤 탈을 바꿀가.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문제로 되고 있다. 일본 특파원 리홍매/길림신문
6    새 세기 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난 ‘고향’의 새로운 표상 댓글:  조회:178  추천:0  2020-11-17
새 세기 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난 ‘고향’의 새로운 표상 김옥철 1. 들어가며 조선족문학은 만주시기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 연구성과를 축적해오고 있는 문학분야이다. 현시대를 보면 조선족문학은 단순히 한국문학이나 중국문학의 범주 속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이 가능한 리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족문학이 탄생할 수 있는 독특한 자양분과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20세기의 이주문학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디아스포라적 경험은 조선족문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채를 띠게 한다.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고려할 때 우리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은 한국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과 일부 다른 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주의 경험을 지닌 조선족에게 최초의 고향, 즉 20세기 30~40년대의 고향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원적인 표상이다. 하지만 새로운 현실을 바라보고 낯선 지대에 정착하기 위해 ‘고향’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원적인 표상은 부득불 변화를 가져야 했다. 그리고 건국 이후에는 정치적 리념을 문학적으로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된 현실에 대한 수용은 고향의 표상을 변형시키면서 과거와의 매개점을 찾고저 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발표된 조선족 시에 관련된 연구 성과들을 보면 많이는 20세기 30~40년대, 즉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기에 형성된 간도 지역 문단과 그것을 토대로 성립된 중국조선족문학을 연구해왔다. 이러한 문제점들로부터 출발하여 본고에서는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조선족문학에서 고향의 표상은 어떠한 양상으로 변형 및 수용되였는가 하는 점을 고찰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본고는 새 세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에 대한 표상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2. 90년대와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고에서 말하려는 1990년대와 새 세기의 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에 관한 시에서는 이러한 표상을 찾아볼 수 있다. 떠나간 하늘이 가슴에 흘러들면/ 속삭이는 먼 별이 내 꿈속에 돋아나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개산골의 메밀꽃/ 젊은 엄마 모시수건 못내 그립소// ―〈향수〉(김학송 1990년) 우의 시에서는 ‘속삭이는 먼 별’, ‘개산골의 메밀꽃’과 ‘모시수건’ 등 많은 이미지들을 리용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렸다. 이처럼 9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사실상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시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시가 부단히 창작되는 반면 고향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보여주는 시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무너질듯한 도시에/ 밀려드는 사람… 사람…//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그립다〉(김학송 1993년) 우의 시는 1993년에 창작된 김학송의 〈사람이 그립다〉이다. 시 속에서 화자는 “무너질 듯한 도시에/ 밀려드는 사람…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표현했다. 하지만 진정 ‘무너질 듯한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사실상 화자가 말하려는 것은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개선하려고 도시로 밀려들었지만 진정 사람으로서 간직해야 하는 인성이나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느꼈던 이웃 사이의 다정한 정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무너질듯한 도시’에서 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지만 옛 추억 속에 살아있는 따스한 온기와 이웃 사이의 정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는 진정한 원인이 되겠다. 날로 늘어나는 생활수준에 비한 인성의 메마름과 옛 고향에서 느낄 수 있었던 풋풋한 정감의 소실, 이는 현시대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점차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는 고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바로 이러한 ‘밀려드는 사람…’과 동시에 조선족문학중 고향에 대한 새로운 표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녹 쓴 자물통 하나가 입을 꼬옥 다물고/ 지긋이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주인 없는 빈집 교대도 없이// 주인은 통도 크게 큰집 한채를/ 저 죄꼬만 자물통에 다 맡겨놓고/ 흔연히 먼길 떠났습니다// 미련도 없이 시름도 잊은듯/ 집도 맡기고 재산도 맡기고/ 래일의 기대와 희망마저 몽땅 맡기고 간/ 막중한 사명 때문에 자물통은/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합니다// 오로지 주인이 남기고 간/ 그 부탁 명심하고/ 깊은 밤 쇠망치에 몰래/ 정수리를 얻어맞으면서도/ 입만은 꼭 앙다물고 열지 않으려/ 신음하듯 아픔을 내뱉는/ 저 작은 보초군이 안스러워/ 처마밑 호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지나가는 바람이 흔들어보다/ 어둠 내쏘는 뚫린 창문이/ 마치 피리구멍인듯 입술을 바싹 대고/ 위로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피리소리 한바탕 내고 갑니다/ ―〈자물통― 어느 시골 마을에서〉(강효삼 2016년) 2016년에 창작된 강효삼의 시 〈자물통〉은 비교적 간단한 구성이다. 화자는 자물통을 인용하여 한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버려진 집에 대해 묘사했다. 여기서 비교적 독특한 것은 강효삼은 시에서 “주인은 통도 크게 큰집 한채를/ 저 죄꼬만 자물통에 다 맡겨놓고/ 흔연히 먼길 떠났습니다// 미련도 없이 시름도 잊은듯/ 집도 맡기고 재산도 맡기고/ 래일의 기대와 희망마저 몽땅 맡기고 간/ 막중한 사명 때문에 자물통은/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합니다.”라는 구절들을 인용하여 주인이 떠나게 된 ‘원인’을 서술했다. 주인은 ‘래일의 기대와 희망을 안고’ 흔연히 떠난 것이였다. 기대와 희망을 안고 흔연히 떠난 주인과는 달리 자물통한테 남은 것은 슬픔 뿐이다. 홀로 남은 자물통은 “깊은 밤 쇠망치에 몰래/ 정수리를 얻어맞으면서”도 자신의 ‘직무’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물통을 알아주는 것은 오로지 ‘처마밑 호미’와 ‘피리소리를 내는 뚫린 창문’ 뿐이다. 이처럼 강효삼은 ‘자물통’을 이미지화하여 ‘주인’들이 떠나고 난 ‘집’들의 모습을 그렸다. 슬프고 쓸쓸한 집들을 말이다. 이 시는 2016년에 창작된 만큼 사회문제인 농촌인구 류실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강효삼은 ‘주인’들이 떠난 후의 슬픈 모습을 그리는 동시에 일정한 희망도 남겨주었다. ‘자물통’의 주인은 ‘집도 맡기고 재산도 맡기고’ 갔을 뿐만 아니라 ‘래일의 기대와 희망마저 몽땅 맡기고’ 떠났다. 그리고 어떠한 ‘망치질’과 ‘녹’이 쓸어도 ‘자물통’은 자신의 입을 열지 않았다. ‘주인’이 맡기고 간 책임 때문이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주인의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마밑에 걸려있는 호미’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돌아와 다시금 호미를 잡고 일해야 하는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처마밑에 걸려있다. 이는 어찌 보면 언젠가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화자의 작은 바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 속에서 이미지화된 ‘굳건한 자물통’과 ‘처마밑에 걸려있는 호미’는 우리들한테 이러한 희망을 남겨주고 있다. 3. 결론 우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90년대와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문학중 고향에 대한 표상은 향수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떠난 후의 서러움과 슬픈 감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사회의 소용돌이와 개혁개방이라는 큰 환경하에서 날로 부유해지는 생활환경과 변화되는 조선족들의 정체성과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가지게 되는 응당한 변화인지도 모른다. 고향은 출생과 성장의 근원적 장소이자 정신적 기원이며 정체성의 뿌리로 여겨지는 장소이다. 고향은 구체적인 동년시기의 기억 뿐만 아니라 세대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 공간과는 달리 실제적인 장소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또한 고향에 대한 애착은 공통적인 인간의 감정이며 고향에 대한 애착, 특히 토지에 대한 애착은 정착민이라는 특수한 개체의 근원적인 정서이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이와 같은 감정은 마음이나 관념 속에서 규정된 지리적 개념으로 상상되고 인식된 공간이지 어떠한 구체적인 장소나 지리적인 위치에 속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고향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대한 인식은 항상 동일한 물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부동한 시기의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부동한 표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고향’은 실질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이야기되는 것에 의해 드러나는 공간인 것이다. 1990년대와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시인들은 이러한 사상에 비추어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다. 례를 들어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김기덕시인의 〈콩〉, 석문주시인의 〈고향의 살구나무아래에서〉와 전옥선시인의 〈귀향길〉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이중 김기덕의 〈콩〉에서는 “고향을 떠난 삶에 해살이 여뭅니다”와 같이 새로운 제2의 고향을 그렸고 석문주의 〈고향의 살구나무 아래에서〉는 ‘숙’이라는 녀성과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향수의 정감을 나타냈다. 길림신문                                                          
5    [지상토론]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댓글:  조회:136  추천:0  2020-07-16
지상토론(10)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ㅡ대형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을 읽고     (저자 김수영) «길림신문»에서는 지난해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70주년을 기념하여 를 펼치고 우리 조선족 문예계의 저명인사들의 사적을 소개하거나 문화에 대한 그들의 진술을 련속 소개하고 있는바 애독자들의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 나는 구술시리즈들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토템시인 남영전선생의 여섯편의 주옥같은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많은 지식을 새롭게 배웠으며 많은 일들이 련상되기도 하였다. ㅡ1ㅡ 남영전 시인은 이 글에서 우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문화와 민족의 개념에 대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은 토템의 개념에 대하여 아주 명석한 해석을 내렸다.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이다싶이 쓰고 있는 말이지만 이 단어의 개념은 똑똑하지 않으며 국내외의 사전들에서의 해석은 대동소이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리해하기 쉽지 않다. 한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인류가 사회의 력사발전중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 특히는 문학, 예술, 교육, 과학 등 정신재부를 가리킴.»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라, 그렇다면 물질재부는 무엇이고 정신재부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량자의 총화는 또 무엇인가? 과연 따분하고 아리숭하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 «‘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 ‘식’ 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어’는 언어를 말합니다. 이런 ‘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 ‘감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의식주행어가 표준으로 될 수 있고 자대라고 봅니다.» 남영전 시인의 문화에 대한 정의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의식주행어’는 문화의 표지이고 문화의 본질이며 문화의 핵심내용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의식주행어’는 인류사회의 모든 문제의 표준으로 될수 있고 모든 개인과 군체를 감별하는 라는 것이다. 그의 정의는 아주 명석하며 아주 리해하기 쉽다. 따라서 민족의 개념을 리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민족문화, 민족단결, 민족의식, 민족정신, 민족정책, 민족주의 등등 민족이란 단어를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이란 무엇이냐 묻는다면 누구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며 국내외의 사전들을 들추어봐도 그 개념이 명석하지 못하다. 례를 들면 한국의 한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족의 정의를 내리고있다. «동일한 지역· 언어· 생활양식· 심리적습관· 문화· 력사 등을 갖는 인간집단.»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사전들의 해석과 대동소이하며 민족에 대한 쓰딸린의 명제와도 거의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명석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실제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본질적 요소인 ‘의식주행어’가 민족과 민족을 구별하는 주요한 표지이며 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의 개념이라고 명시하였다. 쉽게 말하면 민족이란 ‘의식주행어’로 구별되는 인간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주 간단명료하고 누구나 리해하기 어렵지 않다. 남영전 시인의 글의 주제는 ‘문화를 말하다’인데 첫편을 제외한 다섯편의 소제목을 보면 시종 토템과 토템문화를 떠나지 않았다. , , , , 그리고 진술의 내용을 보더라도 토템과 토템문화에 대한 론술과 재미나는 토템이야기로 관통되여 있다. 그것은 무엇때문일가? 이에 대한 남영전 시인의 답복은 십분 명확하다.«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 발단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는 문화가 생겼고 토템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성씨가 생겼으며 또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 형성되였습니다.» 그렇다면 토템이란 무엇인가? 우리 말의 토템이란 외래어(totem)를 한어에서도  图腾이란 외래어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토템이란 원시사회의 사람들이 자기네 씨족과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종류의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자기네 씨족의 표지로 삼았다. 례를 들면 어떤 씨족은 룡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숭배했고 어떤 씨족은 곰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숭배했다. 남영전 시인에 따르면 씨족마다 토템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는 토템이 있는 성씨가 300개, 씨족토템이 3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남영전 시인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의 전통문화란 무엇인가? 실상은 토템숭배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형성되였다.» «토템이란 무엇인가? 파고 들면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게 토템문화이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관계라는 것이다.» 천인합일은 전통문화의 핵으로서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론술들은 우리가 토템이 무엇이며 토템문화가 무엇인가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명언들이다. ㅡ2ㅡ 남영전 시인의 글에는 문화, 민족, 토템과 관계되는 개념들이 명철할 뿐만 아니라 새롭거나 독자적인 견해와 론단들이 많아 지식성이 아주 풍부하고 구술 또한 통속적이고 생동하다.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아래와 같이 제강식으로 렬거할 수 있겠다. 에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21세기는 중국의 세기 세계적으로 제일 답복하기 어려운 단어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문화, 다른 하나는 민족. 에서: 왜 토템과 인류의 문화를 련결시켰는가? 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 발단의 징표. 세상의 모든 물체는 다 생명체. 문화가 산생한 원인 두가지, 하나는 토템제의, 다른 하나는 토템금기. 에서: 성씨는 어디에서 온 것일가?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온 것.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 조선민족의 성씨: 왕씨의 조상은 단군 왕검, 왕씨의 토템은 곰. 박씨의 조상은 박혁거세, 토템은 태양. 고씨의 조상은 고주몽, 토템은 태양. 김해 김씨의 조상은 김수로, 경주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 토템은 역시 태양. 석씨의 조상은 석탈해, 성씨와 이름 모두 토템표지. 최씨의 조상은 최치원, 토템은 금돼지. ※토템과 성씨의 기원을 아주 재미나는 이야기로 구술하고 있는데 조선민족의 시조의 탄생이야기들은 거의 모두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온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규명해온 조상들의 시생설을 토템신화로 명명한것은 남영전 시인이 처음이다. 에서: 토템성씨를 가진 씨족들이 한데 모여서 민족을 형성.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탄생. 인류가 중국에 발자욱을 들여놓은것은 5만년 전, 조선민족은 2만년 전. 중화민족의 시조는 염제, 황제, 치우. 중국에 토템이 있는 성씨가 300개, 300개의 성씨가 실상은 300개의 토템. 에서: 하늘의 일곱 신: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땅의 일곱 신: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동성불동혼. 한족토템은 300개 정도, 그 300개중에 우리 민족의 248개 모두 포함. 에서: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은 «천도», «하늘의 뜻을 따른다»,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고대 4대문명: 애급문명 7500년 전. 토템은 태양, 바빌론문명 7200년 전, 토템은 승냥이, 중국문명 6500년 전, 토템은 룡과 봉황, 인도문명은 중국보다 500년 후, 토템은 코끼리, 사자 등.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ㅡ3ㅡ 남영전 시인의 구술시리즈를 읽으면서 나는 남영전 시인이 무엇때문에 토템시인이라 자칭했는가를 한층 더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남영전 시인이 처음 위챗에 토템시인이라 자칭한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시인되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 리해되지 않는 점도 있었다. 왜 토템시인이라 보는가? 우선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를 창작하고 탐색하는 시인이니까 토템시인인건 분명하다. 남영전 시인이 출판한 시집으로는 «상사집», «신혼», «백의녃», «신단수», «원융», «꽃이 없는 이 봄날에», «남영전토템시집» 등 많이 있지만 대표작을 꼽으라면 토템시가 첫번째로 꼽힌다. 남영전 시인이 중국조선족문단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주류문단, 더 나아가서는 세계시인대회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또 중국문단에 «남영전의 문화현상»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가 처음으로 토템시를 창작하고 탐색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길래 «토템시의 창작자이며 명명자»라는 호칭이 아주 지당한한 것 같다. 다음으로, 남영전 시인은 또한 토템과 토템문화를 탐구하는 학자이자 시인인건 틀림없다. 그는 30여년 동안 줄곧 토템문화를 연구해왔다.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와 중국의 토템문화뿐만아니라 모든 인류의 토템문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연구는 범위가 아주 넓고 심도가 아주 깊다. 때문에 나는 남영전 시인이야말로 명실공히 토템시인이라고 처음부터 시인했다. 하지만 근 30년간 «장백산»잡지사에서 그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고상한 인품을 잘 알고있는 나는 그처럼 겸손하고 도량이 넓으신 분이 왜 «토템시인»이라 자칭하는지 미처 리해하지 못했다. 남들이 자기가 토템시인이라는걸 모를가봐, 인정해주지 않을가봐 념려한 때문은 결코 아닐텐데 말이다. 나는 의 그의 여섯편의 글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남영전 시인이 토템시인이라 자칭한 두가지 리유를 알 것 같다. 첫째, 토템시의 창작과 탐색을 통해 우리 민족의 백의혼을 구가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토템의 영원한 가치, 천지인의 조화, 세계의 평화와 원융을 호소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선언서, 토템문화에 대한 자기의 인식과 주장을 확신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선언서가 아닐가. 우리 민족 력사의 많지 않은 보귀한 문헌의 하나인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들을 토템이라 명명하고 «우리 조상들의 토템이야기»를 시화한 것 또한 그의 또 하나의 창거이다. 둘째, 남영전 시인이 언제나 안타까와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는 우리의 지식인들이 토템문화에 대해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함께 토템문화를 관심하고 리해하며 공동히 탐구하자는 절절한 기대와 강력한 호소가 아닐가. ㅡ4ㅡ 남영전 시인은 에서 토템이 나타나면서 인류는 성씨를 가지게 되였다면서 우리 조선민족의 성씨가운데서 왕씨의 토템은 곰, 고씨와 박씨, 김씨와 석씨의 토템은 태양, 최씨의 토템은 금돼지라고 례를 들어 성씨의 유래를 밝혔다. 그리고 진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자기의 성씨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 것은 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나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자기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리 김씨의 본이 연안이라는 것만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연안 김씨의 조상은 누구이며 이 성씨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1989년 한국에 친척방문을 갔을 때 김건영이라는 사촌형님한테서 받은 족보를 보고서야 비로소 퍽 늦게 알게 되였다. 그때 내 나이 이미 53세였으니 나는 반평생을 조상도 모르고 헛살아온 셈이다. «연안김씨 대동계보»라는 족보에는 김씨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우리 나라의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계와 신라의 대보공 알지계로 대별된다. 신화문헌에는 신라의 왕계, 박, 석, 김 3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김씨의 원조 알지의 시생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4대 탈해왕 9년(65) 봄 어느날 서라벌(현재 경주) 서쪽 시림 숲 속에 서기가 있음을 그 마을 촌장 포공이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가보니 금빛 찬란한 궤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아래에 흰 수탉이 있으므로 이를 왕에게 보고한즉 왕이 나아가 그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비범한 사내아이가 있는지라 왕은 하늘이 주신 사람이라 하여 키우고 이름을 알지(아기라는 뜻)라 하고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이라고 태자를 삼았으나 왕위는 받지 아니하고 파사에게 양보하였다. 閼智는 热汉을, 热汉은 阿道를, 阿道는 首留를, 首留는 郁部를, 郁部는 味邹를 낳았으니 이 분이 신라 13대 미추왕으로 김씨로는 최초의 임금이다. 그후 알지를 대보공으로 추존하고 발상지 시림을 닭이 나왔다 하여 계림으로 고쳤다. » 김씨는 조선민족의 성씨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이다. 김씨는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본만 해도 100여 본이라고 하지만 족보에서 말한 것처럼 원 시조는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두 갈래이다. 김해 김씨계의 시조는 옛날 가락국의 수로왕이고 경주 김씨계의 시조는 신라의 김알지이다. 족보에서 말하는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시생설은 신화문헌에 나오는 건국신화와 대동소이하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계에서도 대종이다. 연안 김씨처럼 많은 본들이 경주 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니 원조는 모두 김알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인정해왔지만 남영전 시인은 다년간 토템문화를 탐구한 결과 신화문헌의 이야기들은 분명 우리 조상들의 토템이야기이며 우리의 성씨는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왔다고 단언하였다. «김수로의 토템탄생은 하늘이 내린 알에서 나왔으니 그는 태양토템이고 그의 탄생에 사자역할을 한 수호신, 하늘이 내린 자주색 줄은 무지개(토템)로 보여진다.»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린 금궤에서 나왔으니 그도 태양토템이고 그의 탄생에 사자역할을 한 자주및 기운, 흰 수탉, 즐겁게 춤을 추는 새와 짐승들 모두 그의 친척(토템)이다.» 족보에서는 연안 김씨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혔다. «우리 연안 김씨는 고려 명종조(1171--1198)의 사문박사공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신라 천년의 력사상 56왕중 대보공의 후손인 김씨가 38왕(박씨 10왕, 석씨 8왕)인데 우리 선조는 왕가의 후손으로 처음에 형제 2인이 당시의 왕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먼곳으로 류배되여 형은 북빈경(현재 강원도 강릉)에 살았고 제는 고염성(현재 황해도 연안)에서 각각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고염성이 연안으로 고쳐짐에 따라 연안을 본관으로 정한 것이다.» «길림신문»에 실린 을 읽고나서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에서는 심득교류회를 조직할 타산으로 지금 준비중이다. 이번 심득교류회를 계획한 주요한 취지는 아래와 같이 세가지이다. 첫째, «길림신문»에서 펼치고 있는 대형구술시리즈 는 독자들에게 민족문화의 전통을 알리는 면에서 교육교양적 의의가 깊다. 우리 회원들은 우리의 신문을 사랑하는 애독자들인만큼 응당 앞장서서 열심히 읽고 참답게 배우며 널리 선전해야 한다. 둘째, 문화, 민족, 토템의 개념을 투철히 리해하고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종지를 진일보 명확히 인식하고 특히는 민족문화와 중화문화의 관계를 정확히 리해함으로써 민족문화의 번영과 중화문화의 번영을 위해 다소나마 기여하자는 클럽의 구호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습근평 총서기는 소수민족문화와 중화문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화문화는 여러 민족 문화의 집대성이다. 한족문화를 중화문화와 동등시하면서 소수민족문화를 홀시하거나 본 민족의 문화를 중화문화와 구별시하면서 중화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릇된 것이니 견결히 극복하여야 한다.» 저자 김수영 프로필: 1937년 서울에서 출생 1960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60~1983년 통화시조선족중학교 고중부 어문교원, 교원실주임 1984~2006년 «장백산»잡지사 편집, 부편심, 편심 중편소설 «무쇠바우»(1977), 장편인물실화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2007) 외 장편소설 등 번역작품 6권 출판. 길림성우수편집1등상, 전국소수민족문학 , 중국번역협회 등 수상. /길림신문
박영옥 작 〈얼룩진 운명의 시작〉을 읽고 허경수     필자 허경수 경기장에서 왕왕 맨 앞에서 달리는 선수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기가 일쑤다. 그러나 필자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끈질기게 달리는 선수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가 우승을 쟁취하지 못하더라도…   박영옥씨의 인생이 바로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살아온 눈물과 미소로 반죽된 교향곡인 것이다. 그녀가 4살 때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게 되니 너무 속상하고 조급해 난 그의 어머니가 “너 죽어라.” 라고  했을 때 나어린 영옥은 꼼짝 못하고 입만 움직일 수 있는 극한 속에서 “나 죽지 않겠어요.”라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되알지게 뱉았다. 이 말  한마디에서 필자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비록 철이 들지 않았을 때의 천진한 본능적인 말이였지만 필자에게는 전쟁판의 돌격 나팔소리처럼 들렸고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씩씩하게 나아가려는 그녀의 삶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왔다. 한 사람이 역경 속에서 견인불발하게 나아가려면 삶의 동력이 있어야 한다. 수기에서 쓰다싶이 계몽 선생님이신 부모님이 바로 영옥씨의 손을 잡아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 삶의 동력으로 되여준 것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그녀에게 많은 문학서적을 사주셨다. 그중에서도 소설 《붉은 바위》에서 나오는 녀 지하공작자 강설금의 강철 같은 의지는 박영옥씨의 심금을 깊이 울려주었다. (대나무는 참대로 만들었지만 공산당원의 의지는 강철이여라)는 강설금의 호언장담은 박영옥씨의 가슴 속에  강철처럼 단련되려는 씨앗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영옥씨는 어린 시절부터 책에서 깊은 인생의 도리를 알게 되였고 의의 있게 살아가려는 푸른 꿈을 품게 되였다. 그녀는 원래 독서에 취미 없었지만 묵직한 사랑을 베푸시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손길 아래에서 독서에 흥취를 갖게 되였고 점차 작가로 되려는 큰 꿈을 품게 되였다. 영옥씨는 취미로 독서하던 데로부터 책 속의 영웅인물들의 정신을 따라배우게 되였고 삶의 등대로 삼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되였다. 몸이 건장한 사람도 비관 실망할 때 있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할 때도 있다. 영옥씨는 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고민하고 방황할 때도 있었다. 딸의 일거일동을 자상히 살피시고 심리적 진단을 내리신 그의 어머니는  딸에게 현장 교육을 전수하였다.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업고 가시다가 오르막길을 오를 때 그녀를 일부러 내려놓고 먼저 올라가신 다음 그녀 더러 걸어올라 오라고 분부하셨다. 그 때 영옥씨는 몰리해하였고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평시에 날 잘  업고 다니시던 어머니가 왜 하필이면 올리막길에서 나더러 걸으라고 하는지?’ 선수들의 코치마냥 엄숙한 모습으로 서 계시는 어머니의 앞에서 영옥씨는 고스란히 학생으로 되여 난생 처음으로 올리막길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길은 높고 꽤나 가파로 웠고 여기 저기 얼음이 덮혀 있었다.  건장한 사람들도 힘겨웠을 험한 길인데  영옥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으로 오르는 사람마냥 숨 찬 로동이였다. 영옥씨는 넘어질 때마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속으로 웨치며 어금이를 앙다물고 일어나서 한걸음 톺아올랐다. 여러번 넘어지고 수차례 일어 나서 걷고 걸어 어머니가 계시는 곳까지 올라갔다. “그럼, 네 삶을 너절로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길로 딸을 보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모녀는 부둥켜 안고 일희일비의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어찌 격동되지 않으랴?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맥없이 넘어지는 딸의 처참한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아팠으리라. 그 당시 넘어질 때마다 영옥씨는 속으로 어머니를 원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야 이것이 어머니의 참사랑임을 영옥씨는 가슴 뜨겁게 절감하였다. 그 때의 현장 훈련이 영옥씨에게는 새롭게 출발하는 삶의 도약점이 되였을 것이다. 그렇다. 부모는 자식의 몸을 낳아줄 뿐 뜻은 낳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독수리는 새끼의 날음을 배워줄 때 벼랑가에서 새끼를 떨어뜨린 다음 새끼가 파들 거리며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어미 독수리는 날렵하게 비행하여 포근한 나래도 새끼를 툭 쳐서 올려주고 한쪽에서 빙빙 원무하며 새끼를 살펴보다가 새끼가 산중턱에 거의 떨어질 때 또 탄탄한 나래로 새끼를 툭 쳐서 올려준다. 이렇게 여러 날 반복적인 훈련을 시켜 저절로 날게 하는 것이다. 일반 동물도 이렇게 후대를 훈련, 배양하는데  현명한 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명장 수하에 약한 병사가 없고 사랑이 충만하고 현명한 부모에게 나약한 자식이 없다. 영옥씨가 어린 시절 과일을 훔쳤을 때 주인은 놓아주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과일 주인을 찾아가서 정중히 사과하시고 돈을 드렸다. 그 때 영옥씨는 몰리해하였지만 이것이 바로 산처럼 무거운 아버지의 사랑임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송곳 도적이 소 도적이 된다.”는 속담을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가물든 척박한 밭에서 곡식이 잘 자랄 수 없는 것처럼 계몽 선생님인 훌륭한 부모의 사랑과 엄격한 교육이 없다면 자녀가 건실하게 성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영옥씨도 물론 례외가 아니였다. 부모님의 후더운 사랑과 엄격한 교육하에서 꾸준히 독서하면서 의지를 련마하였다. 학교 선생님의 사심 없는 관심과 지지가 역시 박영옥씨의 삶의 동력으로 되였다. 하학할 때 선생님과 웃학년 학생들이 겨끔내기로 영옥씨를 업고다녔던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 속에서 자라며 사랑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영옥씨는 후에 사랑이 진지한 남편을 만나서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였다. 필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그녀는 출근하면서 여유시간을 타서 가끔씩 신문원고를 쓰기 시작하다가 1997년도부터는 안도현아동문학회 회장직을 맡으면서부터 아동문학에 몰두하였는데 2003년도에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한 건 물론 여러 쟝르의 글과 수두룩한 영예증서도 받게 되였다. 그녀는  삶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였고 긍지감을 느꼈다. 그렇다, 한 사람이 삶의 참뜻을 알게 되고 자기의 가치를 절감하게 되였을 때 그에게는 삶의 의욕이 새롭게 생기게 되고 무궁무진한 동력으로 되는 것이다. 병마와의 박투에서 의지를 단련하며 부모와 선생님과 남편의 사랑 속에서 박영옥씨의 가슴 속에 인간애가 충만하게 되였다. 그녀는 친구들이 여러가지 사연으로 괴로워 할 때 늘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해 주었고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울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을 응당한 일로 여겼다. 박영옥씨는 종래로 자기를 불구자로 여기지 않았다. 어느 장애자 협회에서 그녀더러 장애자협회 주석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사절하였다. 오기에 차서일가? 아니, 그녀의 정신세계는 건전하고 원만한 것이기 때문이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배려심이 풍성하기에 그의 주위에 건강한 문우와 친구들이 구름마냥 모여들고 있다. 건강한  사람들도 인생의 줄기찬 길에서 비관실망하거나 자포자기한 페단이 비일비재인데 박영옥씨는 섬약한 몸으로 험난한 길을 이악스럽게 걸어왔다. 실로 피땀과 눈물 속에서 소담스럽게 피여난 한송이 민들레꽃을 방불케 한다. 박영옥씨는 자신을 허약한 장애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장애물 뛰여넘기 경기에 참가한 달리기 선수로 여기고 인생의 길에서 여러가지 예측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넘어 억척스레 걸어왔다. 그녀가 걸어온 길에 피땀과 눈물이 흥건하다. 그녀의 자서 수기를 다 읽은 다음 늘 음미하며 묵상에 잠기면 항상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에 눈물이 핑 돌군 한다. 그녀의 수기는 그저 “잘 썼다.”로 간단히 평가를 내리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녀의 피땀과 눈물로 엮은 인생담인 것이다. 하늘 땅을 진감한 영웅이 아니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은 우리들의 삶의 교과서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그녀가 쓴 동화 〈삐뚠 나무의 꿈〉이 곧 박영옥씨의 비범한  형상인 것이다. 비록 소학교 교과서에 실렸지만 우리들의 교과서로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고 필자는 늘 생각하군 한다. 박영옥씨는 오늘도 애심으로 생활을 포옹하며 발자욱마다 땀방울을 수놓으며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참다운 삶의 발자취에서 더욱 심금을 울려주는  인생의 장엄한 멜로디가 울려나오리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길림신문 
3    [수기]‘미태혼’으로 맺은 ‘잠자는 공주’와의 사랑 댓글:  조회:332  추천:0  2020-05-28
90대 로부부의 사랑 이야기 나는 연변농학원 정년 퇴직 교수인 김수철이다. 1925년 4월 1일에 룡정시 태양향 홍도촌 향양툰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고 일곱살에 백부님의 계자로 갔으며 열살에 마을의 서당인 ‘양홍사숙’에서 배움을 시작하여 1942년 1월에 결혼 나이(18세)가 되자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 때인 1월 31일에 결혼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랑은 73년 간 이어졌다. 김수철교수 아버지의 ‘선견지명’ㅡ‘미태혼(未胎婚) ’ 운명론자의 얘기로 세상에서 자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배필을 하늘이 정해준 ‘천생배필’ 또는 ‘운명의 씨앗’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네 약혼례가 전무후무로 사전에도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 우리 스스로 아버지가 ‘선견지명’으로 정해 준 ‘미태혼(未胎婚)’라 했다. 1920년대에 아버지 김창구(金暢九)가 연길시 백석구 4대에서 살면서 겨울이면 동내야학교를 다녔다. 그 때 웃동네 맹영철이란 동반 선배가 있었는데 맹의 문화수준이 아버지보다 높은 데다가 필법(筆法)과 구변(口辯)까지 좋고 경우가 바른데서 아버지는 맹씨를 숭배하였다. ‘저분과의 인정을 튼튼히 맺으면 천상 랑패가 될 일이 없겠는데…’ 언녕부터 이런 속궁리를 해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엉뚱한 생각으로 ‘맹씨와 사돈을 맺는 것이 묘안이다’ 고 생각하며 지체 없이 맹씨를 찾아가서 말을 건넸다. “맹유사(孟有司)…에!..에!...”, “…”, “…” “김유사(金有司), 오늘은 어찌된 일이요? 에, 에 …”, “그런게 아니라… 에…어떻게 말씀을 올린다…”,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요, 할 말이 있으면 시원히 하라니까…”, “예, 그럼 감히 말씀을 올리는데 우리가 사돈을 정하면 어떻소이까?”, “아니, 사돈이라니? 뚱딴지 같은 소리를…” “아니…예…말하자면 내가 딸을 낳고 맹유자가 아들을 낳으면…”, “아, 그런 말이였구만, 알만하이, 단마디로 우리 두집에서 낳는 자식을 약혼시킨다는 말이구려… 약혼을…” , “맹유자는 실로 말귀가 빠르네요, 바로 그런 말씀이우이다”, “아무렴, 그만한 말기야…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집 사람이 태기도 없는 데다가 지금의 청년들이 자유 련애를 하는 판에 설마 혼사가 끝까지 성사될가 걱정되네요. 혼사말은 허타히 하는 것이 아닌데…” “후에 자식들의 혼령이 되면 그 때에 다시 …”, “…자식들의 앞날 일은 이쯤으로 마무리를 합시다.” 그날 저녁에 이렇게 아퀴를 짓고 두분은 조용한 곳을 찾아 대작을 하면서 아직까지 량가 부인들이 태기(胎氣)도 없는데 ‘미태혼’을 축복했다. 1924년 8월 15일(음력)에 맹씨가 큰 딸로 맹영자가 출생했고 1925년 음력 4월 1일(음력)에 김씨도 큰 아들로 나 김수철(아명 乙祿)을 출생한데서 나와 맹영자의 결혼이 량가의 ‘부정배필(父定配匹)’로 이어졌다.   백부님의 강권 신랑 김수철, 신부 맹영자 공맹지도는 한 가문에 후대(아들)가 없다면 조상에 대한 불효라고 하였다. 하여 ‘갓바위집’ 제9대인 김창윤(金暢胤, 김수철 백부)이 아들을 잃고 ‘갓바위집’ 10대 장손으로 김수철이 7살에 백부의 계자로 되였다. 1941년 12월, 내가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한 이틑날에 집에 갔더니 생각 밖에 백부님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결혼을 나에게 강권하며 무조건 순종하란다. 백부님은 언녕부터 계자가 결혼 년령(18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기에 1942년 첫날 내가 18세가 되자바람으로 동생(친부)을 불러 하루속히 손군을 안아보겠다며 며느리감을 곁들기니 아버지는 며느리 감은 언녕 정했다고 했다. 백부님은 동생의 구구한 설명에 당장에서 친척을 밀사로 파견하며 손금보듯이 맹녀의 정황을 알아오도록 했다. 며칠 후 밀사의 회보에 따르면 맹씨 가문은 례절 밝고 인심이 좋고 경제가 넉넉한 가문이라고, 맹씨네 자녀는 5남 1녀로 모두 건강하고 총명하다고, 인물 좋은 맹녀의 단 한가지 흠이라면 아버지가 딸을 공부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백부님은 구수하벌에서 농촌 색시로 공부를 한 18세의 색시를 보고 죽자고 해도 못 찾는다며 결혼을 재촉하였다. 아버지의 선택에 백부님의 강권을 못 이겨 나는 1942년 1월 31일 (음력12월 6일)을 결혼 길일로 스스로 정하였다.   신랑의 〈아리랑〉에 신부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결혼 전날인 1942년 1월 30일 저녁이다. 나는 6간 초가집 방에서 초불을 켜놓고 9촌 할아버지(金炳活)의 지도하에서 ‘큰글’을 섰다. ‘큰글’이란 신부집에 보내기 위한 것인데 내용은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신랑의 결심서’이다. 결혼 후 리혼을 하면 이 ‘큰글’종이를 절반으로 나눠서 각기 보관한단다. 이틑날,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신랑이 떠날 준비로 모두가 서둘렀다. 신랑의 몸차림은 나의 주장대로 그냥 중학생 겨울모자 차림이였다. 나는 이상분들에게 “색시를 잘 데려 오겠습니다”며 큰절을 올린 후 길을 떠났다. 조양천에서 삯을 내서 붉은 종이로 꾸린 꽃마차는 방울소리를 절렁절렁 울리면서 하얗게 눈이 덮인 산길을 따라 해뜨는 동남 백석구쪽으로 반시간 푼히 달려 20여호의 초가집이 산재한 백석구의 남향쪽 6간 초가집 마당에 서서히 멈췄다. 명절 옷차림을 한 하객들이 사방에서 신랑을 보려고 꽃마차 두리에 몰렸다. 여기저기서 “아무리 봐도 신랑 같지 않다”, “중학생이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꽃마차에 내린 내가 구두를 신은대로 ‘디딜패’를 밟으며 집문 앞에 이르니 신랑측 생빈이 다른 길로 문앞까지 례단을 올린 후 전안례(奠雁禮)까지 끝내고 신랑 방에 들어서니 신랑상이 들어왔다. 그럭저럭 큰상을 처리하고 나니 신부가 떠날 시각이 되였다. 이제부터는 신랑신부가 상면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아버지가 어떤 제비를 뽑고 나더러 펼쳐서 보라고 할가?’ 이런 생각이 앞섰지만 아버지가 정한 일이니 할 수 없었다. 하얀 꽃너울을 쓴 녀인이 나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서로 따로 서면 나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살결은 일반 녀인들보다 퍽 흰 편이다. 낯은 반반하고 특별이 보기 싫게 튀여 나온 곳이 없었다. 눈길도 아주 순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증명되였다. 꽃마차가 영원히 운명을 함께 할 맹양(孟孃)을 싣고 백석의 동구령의 오르막 길을 달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그렇게 가볍고 신나게 들렸다. 집마당에 도착하니 동네외의 하객들이 웅성거리며 밀려온다. 신랑신부가 꽃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었던지 6명의 한족 나팔(새납)쟁이들이 잔치집 마당에 나타나 축하의 나팔을 불어댔다. 그에 따라 온마당의 남녀로소 하객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부를 맞이했다. 한족 나팔쟁이들에 따르면 지나가던 걸음에 조선족의 잔치 집을 만나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매에도 잊지 못할 감사한 분들이였다. 어느덧 밤이 되여 결혼 축하 오락판이 펼쳐졌다. 참석자들이 5, 60명이 잘 되였다. 한동네 청년이 큰 박수로 오락 시작을 선포하고 신랑신부 상견례, 신랑신부 선물교환, 신랑신부의 독창과 합창이다. 신랑이 절절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넘기고 신부를 걱정했는데 생각 밖에 신부는 물찬 제비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숙여 수줍은 인사를 하고 나서 미루 준비 했는지 〈홍도야 울지마라〉를 그렇게도 간절하게 불렀다. 신랑신부 합창으로 부부가 손 잡고 〈도라지〉룰 부르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다음은 중학교 동창 리수호의 축사에 이어 신랑의 발언과 신혼 려행이다. 신랑신부 려행이란 서로가 팔을 끼고 방안을 한 고패 도는 것이다. 신혼 려행을 끝내니 신랑더러 략사(略史) 보고를 하란다. 우리들의 약혼은 ‘미태혼’이라는 것, 그 사이 신부가 너무나 보고 싶어 남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길을 다니며 맹녀를 만나 보았다는 등 ‘아름다운 거짓말’로 하객들을 웃기였다. 오락판은 전체 하객들의 합창과 춤으로 여흥을 푼 다음 모두의 기립 박수로 페식을 선포하였다.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밤새에 싸락눈이 내려 땅을 덮었다. 항간에서 신부가 다녀온 길을 눈으로 덮으면 신부가 시집에 안착하고 시집살이를 잘 한다고 전해지기에 모두가 기뻐했다. 아침 식사 후 사람들이 놀려왔는데 강희태씨가 간밤에 난데없는 부엉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겨울에 들리는 부엉의 울음소리는 경사의 길상이라고 했다. 실로 우리 부부는 4남 1녀를 낳고 금혼잔치까지 지내고 90이 넘도록 동고동락하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나는 ‘안해’를 ‘집안의 해(태양)’라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중하듯 안해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부인 탄신 93주년에 올린 나의 축수문이다. 딸과 함께 행복했던 안해 맹영자(왼쪽) “오늘은 맹모의 93주년 생신 날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명심하여 준비하고 참여하신 귀빈 여러분과 온집 식구들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로약한 몸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장모님을 부양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현서(賢壻) 사위 최명림(崔明林), 딸 김혜란과 보모( 保養母), 그리고 맏아들 김상술 부부를 비롯한 자녀, 자부와 손자, 손녀, 증손 일동에게 맘속으로 깊이 간직해 오던 치하를 합니다! 맹모가 산출한 4남 1녀와 그의 자손으로 이뤄진 27명의 대가정은 모두 맹모의 잉태와 양육의 노력으로 이룩되였습니다. 그만큼 맹모는 위대한 녀성이며 나의 둘도 없는 ‘록색로친’ 입니다! 인생의 자연적인 산출과 사회생활, 찬란한 문화, 문명, 절대적인 사랑, 꿈, 행복 등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바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창조한 걸작입니다. 한국의 안영희박사가 훈춘 경신 방천에서 아름다운 사막공원과 련꽃 늪을 비롯한 중, 조, 로 3국의 풍경을 만끽하면서 마음속 찬탄을 못이겨 올리는 말씀이 ‘어머니가 나를 낳았기에 나는 오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보게 되였습니다!’며 자기 몸을 낳아준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도 50대 중반에 천신만고를 마다하고 두번째 장백산이라고 불리는 화룡 청산의 베개봉 절정에 올라가 만물을 굽어보며 베개봉의 암석에 ‘어머니’라는 위대한 석자를 새겼답니다. 세상에서 엄마를 잃은 젖먹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이 순간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부르던 노래 말이 떠오릅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필 때마다 안아 주세요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눈에서 피가 흐른다 … … … 눈물이 앞을 가려 더는 읽을 수 없습니다…. 맹모는 문화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백석(白石)에서 순진하게 자랐고 18세에 갓바위 집 김룡천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철이 없는 부군(夫君)의 랭대를 받으면서도 수십년을 힘겨운 수전 농사일에 종사하였습니다. 맹모는 젊은 나이에 조상들의 추석 성묘로 가는 길에서 늙으신 시아버님을 업고 구수하강을 건너며 시부모 효도를 다 하였습니다. 맹모는 4남 1녀의 잉태와 양육에서 갖은 생활난을 겪어냈으며 매서운 양력설날 추위에도 홀옷 맵시로 부군과 함께 산에 가 땔나무를 하면서도 아무런 군말이 없었습니다. 맹모는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마디 불평 없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온 손색없는 참된 어머니 용사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어머님 품에서 자란 자식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은혜에 보은하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우리 대가정의 창성 발전의 길을 펼쳤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비운을 구원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항상 몇십년을 갈라졌던 리산가족이 상봉하는 그날처럼 서로 꼭 껴안고 쓰다듬어주면서 이날을 마지막으로 갈라지는 날처럼 아끼면서 서로가 산다면 그 인생의 길은 비단길이며 만화방초가 만발한 꽃길로 삶의 영원한 디딜패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단길 개척자 맹영자 만세! 세상의 위대한 어머니들 만세! 만만세!!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건강 행복 만세! 2016년 추석 ”   ‘잠자는 공주’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린 최대의 선물이 래일의 일을 오늘에 모르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2017년 5월 7일, 내가 훈춘 경신에 가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식물을 찍고 돌아온 이틀 후인 5월 9일에 부인이 94세로 고종명을 하였다. 지난해 부인의 생일에 올린 축수문이 아직 1년도 못되여 추도문으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축수문에 욕심을 버리고 ‘맹영자 만세!’를 ‘맹영자 백세!’로 표했다면 혹시 백세를 살았을 것인데 말이다. 후회막급으로 모대기였다. 맹녀와 함께 한 나의 인생사는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 함께 파란곡절을 이겨내면서 분수에 넘친 우리들의 욕망을 실천한 인생사였다. 나는 맹영자씨를 평생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하기에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위해 90고령에 혼자서 삼성촌에서 자취하면서 주방 벽에 부인의 사진을 정히 모시고 늘 감사한 마음을 표하군 했다. 2017년 추석 맹녀의 생일 날에 나는 ‘맹영자묘석비(孟英子墓石碑)’를 세울 때 비문을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선택했는데 자녀들이 그저 ‘자녀일동립비(子女一同立碑)’라고 쓰려니 늙은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묵묵히 따라 주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지 못해 나는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오선생에게 보인다. 앵두빛 그 고운 두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여나 나에게 하얀 미소지을가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백두애간의 불로송 나는 당신과의 ‘미태혼’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의 ‘미태혼’은 전무후무한 혼사(婚事)이다. 아버지에 순종함이 나의 효도였다. 아버지의‘선견지명’이 우리 부부의 금술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  오기활 대필/길림신문
2    [수기] 할머니의 유산 댓글:  조회:329  추천:0  2020-05-27
[수기] 할머니의 유산 전복선 해마다 청명이면 나는 조상님들의 산소에 가지 못하는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기분이 착잡하기만 하다. 게다가 간밤에 밤새도록 내린 궂은비가 마침 하늘에 계시는 조상님들의 눈물처럼 생각되여 청명이면 누구보다도 할머니가 각별히 그립다. 아마 내가 예닐곱살쯤 되던 해 청명이였을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앞마당 터밭에서 마늘을 심다가 제사 상차림을 들고 산소에 가는 동네분들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엔 생활이 하도 가난한 때라 혹시라도 산소에 가야 만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산소에 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철없이 말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나중에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죽어서 저 뒤산에 묻히면 너희들도 저 사람들처럼 제사상 음식을 챙겨들고 산소에 갈게다. 그 때에 너도 해마다 청명이면 날 보러 올거지?” 하며 웃으시였다.   그 때 나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약속을 하듯이 해마다 청명이면 할머니를 보러 꼭꼭 산소에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그 때 내가 할머니와 주고 받았던 그 얘기와 약속이 내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든다.   할머니 최금순은 18세 꽃나이에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결혼 첫날, 할아버지 얼굴을 처음 봤을 때 할머니는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밤새껏 바자굽에 나가 달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죽이며 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홍역 후유증으로 얼굴이 울퉁불퉁한 곰보로 되여 가까이에서 보면 거의 흉할 정도였다.   이팔청춘 꽃나이에 할머니는 얼굴이 예쁘고 손재간이 뛰여나 동네방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할머니는 동그스름한 얼굴에 버들잎 같은 입술,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항상 웃는 듯한 실눈을 갖고 있었다. 행인들은 저 멀리서 할머니가 오시면 보고 또 보면서 할머니가 지나간 뒤에도 머리를 돌려 한참씩이나 뒤모습을 돌아보군 했단다.       할머니 최금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가 비단결 같은 마음이여서 결혼 후 한번도 소리 내여 다툰적이 없었고 할머니는 한평생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할가, 두분은 결혼한 후로 두분 만의 사랑과 금슬이 넘쳐서인지 열두 자식을 낳으셨는데 열한 자식은 알지도 못할 병으로 요절되고 요행 외독자로 아버지(전원상) 한분 만을 겨우 키워냈다 한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자식을 잃은 슬픈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철없는 나이여서 할머니의 마음속에 깊이 묻힌 아픈 상처를 가늠할 수 없었고 할머니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올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도 나를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워준 할머니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혜롭게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할머니에게서 더 많이 배웠다.   할머니는 사리가 밝고 마음이 착하셔서 동네분들을 돕는 것을 락으로 생각하셨다. 무엇보다 바느질 솜씨가 각별히 뛰여난데서 동네 이웃들의 옷이랑 예쁘게 지어 드리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   그 때 할머니가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어린 나한테 한뜸한뜸 배워준 바느질 솜씨 덕에 어른이 된 지금 옆사람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써먹고 있다.   할머니는 삼베천도 아주 깔끔하게 잘 짜셨다.   할아버지가 봄철에 심은 삼을 가을철에 베여 오시면 할머니는 그것을 가마에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다시 오리오리 실을 뽑아서 삼베천을 짜셨다. 삼껍질을 벗길 때면 저녁을 먹고 온집식구가 마루에 몰려 앉아서 어른들의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밤을 새웠다. 그 때 헐망한 초가집에서 생활했지만 화목하고 행복하게 보낸지라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할머니는 가지각색의 음식도 잘 하셨는데 특히는 증편을 빚는 솜씨가 뛰여났다.   동네 잔치상에 증편이 필수로 올랐는데 증편을 빚는 일은 무조건 우리 할머니의 몫이였다.   증편은 발효가 잘 되지 않으면 보송보송하게 부풀어나지 않아서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쌀가루 발효는 온도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아도 안되고 시간도 적당하게 잘 맞추어야 한다. 보리싹을 물에 풀어 수분을 적당하게 맞추어 잘 이긴 쌀가루에 고루고루 섞은 다음 따뜻한 가마목에 놓고 이불을 덮어서 6시간 정도 발효시켜야 하는데 할머니는 냄새를 맡고 발효완성도를 짐작하시고 판단했는데 그야말로 프로급이였다.   할머니가 만든 증편에 예쁜 연지를 찍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였다. 나는 가는 나무가지를 십자형으로 쪼개서 염색물을 묻혀서 동실하게 부푼 증편우에 찍었는데 매번 증편을 할 때마다 연지를 찍으려고 가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언제나 가마뚜껑을 열겠는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군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시군 했다.   증편 외에도 할머니는 오그랑죽, 호박죽, 설기떡, 찰떡, 기름떡, 옥수수잎떡, 떡국 등 다양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잘 만드셨는데 할머니는 색다른 음식을 하실 때면 나에게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으며 늘 나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셨다.   우리 집에는 떡 방아가 있었는데 매번 떡을 할 때마다 나와 오빠가 숨을 할딱거리며 방아를 찧었다. 할머니는 방아돌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무 막대기로 방아돌의 쌀가루를 골고루 휘저어 주셨다. 방아를 찧을 때 맥이 풀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동년시절은 너무나 가난해서 1년에 추석과 설에만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생선은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때 요행 생선이 생기면 아껴 먹느라고 소금에 푹 절여서 밥알만큼씩 먹었는데 생선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생선반찬이 있으면 뼈까지 꼭꼭 씹으시면서 “바다물고기는 썩어도 맛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선을 먹을 때마다 메아리처럼 귀가에서 울린다.   할머니는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셨기에 글에는 눈뜬 소경이였다.   그 때 생산대에 로인독보조가 있었는데 로인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드렸다. 할머니는 저녁에 독보조에서 낸 숙제를 할 때면 늘 나에게 물으셨는데 나는 그 때마다 제법 선생인 듯 우쭐했다.   동네분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는데 보도원 선생님이 “원상(아버지 이름)이네 집 애들은 할머니를 닮아서 공부를 잘하는 것 같아요. 원상의 어머님은 독보조 로인들중에서 년세도 가장 많으신데도 숙제를 제일 잘해요. 그 년세에 당의 기본로선이랑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암송해 오십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라고 할머니를 칭찬하더란다.   할머니는 년세가 드셔서 무릎 관절도 아프고 허리도 휘였지만 주말마다 독보조에 가시는 일만은 한번도 빼놓지 않으셨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서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밀차에 앉히고 독보조 문앞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했다.   “우리 부모는 녀자는 공부해서 쓸 데 없다면서 아들만 공부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남매중 남동생만 학교에 다녔고 우리 세 녀자들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 마당에 가서 창문 너머로 강의하는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그 때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을 맘속으로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지금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하냐! 세상이 좋아서 공짜로 공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할매를 보더라도 너들 열심히 공부해서 꼭 대학에 붙어야 한다.”   할머니의 가슴 시린 말씀은 우리 형제가 열심히 공부하게 된 동력이 되였다.   우리 4남매를 대학공부 시키려고 어머니(오인옥)는 생산대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한편 사시장철 두부장사를 하셨다.   할머니는 매일 새벽 3시에 어머니와 함께 일어나서 콩 갈고 콩물을 짜고 부엌에서 한시간 남짓이 손풍구를 돌렸다.   할머니는 우리 4남매를 모두 업어 키우셨고 손주들의 뒤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한데서 늘그막에 허리가 거의 90도로 휘였다. 손주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74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헤여지던 그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6년 2월말, 개학날이 되여 집을 떠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여 내 손을 꼭 잡고 수염수염 논두렁까지 기어코 나오셨다.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는 이슬 맺힌 눈으로 그윽히 바라보시더니 뼈밖에 남지 않은 갸냘픈 몸을 내 몸에 기댄 채 한참 락루하셨다. “늙은이들의 일은 누구도 모른다. 이게 너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네 손을 놓고 싶지 않구나. 시간이 늦겠다. 이젠 그만 가보거라. 공부 꼭 잘해야⋯”라고 하시면서 말끝을 맺지 못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 얼굴을 닦아 드리면서 “할머니 여름방학이 되면 또 올겁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셔야 돼요”라고 위로했다.   눈물고인 할머니의 그 애달픈 눈빛, 허물어지듯 논두렁이에 주저앉아 나의 뒤모습을 응시하며 손짓하시던 할머니,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에 조각상처럼 오래오래 그 자리에 앉아서 백발을 흗날리시면서 뻐스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젓던 할머니⋯   하늘이 무심키로 그 날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나는 고향에 가면 할머니가 앉아 계셨던 그 논두렁을 보면서 손녀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생전에 할머니는 딸 자식이 없는 것을 몹시 서운해 하셨다.   할머니는 딸이 없어서 어디에 놀러다닐 데도 없고 속이 타도 시원히 털어놓을 데도 없다는 말씀을 몇번이나 하셨다. 그래서 특별히 손녀인 나한테 정이 많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어머니보다도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꿈이였다. 할머니가 좋아 하시는 생선도 실컷 사드리고 할머니가 맛보지 못하셨던 귤이랑, 복숭아랑 바나나랑 사드리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꿈이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의 대학졸업도 지켜보지 못하고 총총히 떠나셨다. 손녀가 번 돈을 일전도 써보지 못하고 손녀가 해 드리는 반찬 한번도 드시지 못하고 산더미 같은 가난에 짓눌리시다가 하늘나라에 가셨다.   나의 할머니 최금순은 나에게 땅이나 집 같은 재물보다도 훨씬 값진 유산으로 ‘강한 생활력, 알뜰한 살림살이, 긍정적이고 남을 돕는 것을 락으로 하는 옳바른 삶’을 유산처럼 남기셨다. 할머니는 ‘가난뱅이 마음의 부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34년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가 후세에 남겨주신 유산은 나의 생활의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슴배였고 할머니의 유산을 광동이라는 타향에서도 굳건히 지켜가며 해외에서 공부하는 딸에게도 전수하고 있는 나다.   하늘 나라에 계시는 할머니 사랑합니다! /전복선
1    그 때가 되면 그 때가 되면... 댓글:  조회:292  추천:0  2020-05-20
[수기]   그 때가 되면 그 때가 되면...   조복희     세월만이 막힘없이 잘 흐르는 것 같다. 엊그제 같이 지금 이 학급의 수학을 맡은 것 같은데 벌써 졸업반이 되였다. 예전 같으면 졸업을 앞두고 더 돈독한 감정을 쌓느라 수업 외에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소학교 생활을 둘러싸고 이야기 꽃을 피우겠건만 전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사생을 ‘생리별’을 시켜 버렸다.   개학시간은 아장아장 봄아씨와 손 잡고 어김없이 다가왔건만 우리는 집에서 다만 컴퓨터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할 수 밖에 없다. 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컴퓨터를 먼저 켜놓는 것이 나의 일상으로 되였다. 그 날도 나는 첫 수업이라 밥술 놓기 바쁘게 컴퓨터를 마주했다. 30분만의 수업, 게다가 한주일에 한시간씩 줄어들다보니 수업 효률을 높이는데 여간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늘의 6학년 수학과는 〈원기둥의 특징〉이다. 현장 수업 같으면 원기둥의 면과 측면의 전개도를 연구할 때 사생이 함께 원기둥 모양의 실물을 가지고 면을 만져보고 또 측면의 전개도를 직접 펼쳐 보는 등 수학 활동을 통해 수업 효과를 더 높일 수 있을텐데… 비록 직관적인 멀티미디어에 의거하면서 학생들더러 조작해라 했지만 직접 나의 눈으로 보지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온라인 수업’에 감사를 표하기도 한다.   막상 이렇게라도 수업을 하니 말이지 이렇게까지 못하면 어떠했을가? 애들은 하루 급해서 “선생님, 우리 4월에는 개학할 수 있습니까? 빨리 학교 가고 싶습니다. 선생님들도 그립고 친구들과 막 뛰놀고 싶습니다.” 하고 말한다. “네, 우리 의무일군들이 지금 용감하게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 감염자들이 더 늘어나지 않고 통제가 잘 된 날이면 우리는 꼭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상봉의 날을 약속하면서 ‘온라인 수업’을 마쳤다.   수업이 끝나니 나는 습관적으로 무슨 새 소식이라도 있나 폰부터 열어보았다. 집에 ‘갇힌’ 몸이라 외계 정보는 유일하게 폰에서 밖에 얻을 수 없으니 나는 매일 폰을 못살게 군다. 와- 이거 뭐람? 이제 금방 애들과 만남을 약속했는데 우리 현이 오늘부터 해봉한다는 기쁜 소식이 있을 줄이야.   광장이며 공원이며 봉황산이며…거리의 모든 것이 그리워났다. 나는 마치 초롱에서 나온 새처럼 바깥 세상을 구경하러 차를 운전하고 나섰다. 대문을 나서니 한달전 까지만 해도 길가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눈도 이젠 자취를 감추고 꽁꽁 얼었던 나무 가지들도 기지개를 쭉 펴며 팔을 뻗었다. 새들은 자기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자유로이 푸르른 하늘을 누비며 자유의 몸을 자랑하였다.   나는 우리 현성에서 제일 가까운 봉황산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방금전까지만 흥분하던 나의 기분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음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착잡하고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큰길에 들어서니 흥성하던 광장도 공원도 모두들 집에 눌러 있으니 인적기라곤 없었다. 지난날 번화하던 거리에는 차량도 인가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음식점도 상점도 모두 문을 꽁꽁 닫아버렸다. 나는 천천히 운전하면서 낯 설게 변해버린 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다만 차창 밖 길 량 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쑥∽쑥 지나가면서 나하고 인사를 건네는 양 싶었다. 순간 추호의 동요도 없이 당신의 초소를 꿋꿋이 지키면서 목숨까지 바친 영웅들의 얼굴이 하나, 둘 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리문량, 하시시, 왕병…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보라, 초병 같은 이 나무들을, 땅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목숨도 가정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가는 전역(疫)에서 싸우는 백의천사들을 방불케 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럽고 위대한 분들이다. 생명을 구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사명감을 시시각각 념두에 두고 병실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자신의 몸으로 바이러스와 영용하게 싸우는 그 숭고한 정신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어느덧 봉황산에 도착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마스크를 벗고 산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애들처럼 소리 쳤다. “바이러스야, 얼른 물러가라!” 봉황산 역시 봄의 고독을 혼자 달래고 있었다. 아니, 봄은 결코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봄과 함께 있었으니까. 이제 모든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그 날이 꼭 돌아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더 깨끗하고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봄날의 따뜻함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더욱더 아름답고 꽃피여갈 봄날의 모습을 그리면서 봉황산의 봄 전경을 폰에 담고 차에 올랐다.   간만에 나온 몸인지라 20여년 열정을 몰부은 내 사업터― 정든 학교로 가보고 싶은 일념에 저도 몰래 발판을 내디뎠다.   멀리서 학교 창공에서 바람에 나붓기는 국기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났다.   오늘은 월요일, 이날이면 전교 사생들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여 장엄한 국가에 맞추어 국기 게양식을 올렸었는데… 이맘 때면 또 유치원에서는 어린이들이 노래 소리가 챙챙하게 울려퍼지고 학교 운동장에는 소학교 꼬마들이 띄운 오색령롱한 연들이 하늘 높이 아름답게 창공을 수놓았을 것이며 롱구장에는 롱구공을 요리조리 굴리면서 재간을 피우는 고중생들로 들끓었을 것인데…   하지만 모든 것이 들끓는 3월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새로 수건한 운동장이 외로워하는 것 같다. 운동장은 두 팔을 쩍 벌리고 어서 주인이 와서 마음껏 뒹굴고 뛰놀면서 한덩어리가 되 길 기대하고 있건만. 우두커니 서서 학교를 바라보노라니 지나간 모든 ‘자유’가 그립고 학생들이 그립고 동료들이 더욱더 그리워 났다.   지나간 순간순간들이 행복할 때도 있었고 가슴이 짜릿할 때도 있었고 슬플 때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를 키워주는 아름다운 무대였고 좋은 책이였다. 출근 할 땐 그토록 주말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지금은 애들과의 만남이 련인을 만나는 것처럼 기대하게 된다. 애들도 얼마나 친구들이 그립고 학교 생활이 그리울가. 그래서 지금도 ‘온라인 수업’을 끝마칠 때면 가끔 학생들과 ‘클라우드포옹’을 하면서 그리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잃은 다음에라야 그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는가 본다.   우리는 필연코 바이러스를 이겨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과 함께 아담한 교실에서 또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배우고 즐기며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해마다 인생 렬차를 환승하면서 후회 없이 떳떳하게 종착역까지 내달릴 것이다.   나는 고개들어 우러러 다시 한번 국기를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국기는 우리를 향해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는 것 같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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