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립춘에 즈음하여
□ 김춘식
올해는 음력설을 맞기 바쁘게 나흘 만에 립춘도 맞게 된다. 립춘은 봄을 알리는 절기다. 하지만 립춘은 여전히 겨울추위가 머물러있어서 아직도 봄이라 말하기는 이른 절기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춥다.
내가 살던 고향은 물론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한국에서도 립춘에 봄을 말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립춘추위 김장독 깬다.”는 속담은 이 무렵의 추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보리 연자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은 립춘이 지나도 추위는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립춘 무렵에 추위가 반드시 있다는 뜻으로 “립춘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하니 옛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말이다. “립춘 거꾸로 붙였나.”라는 속담도 있는데 정반대로 간 것을 말하는바 역시 립춘 뒤 날씨가 립춘 같지 않고 몹시 추운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 봄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소리없이 오고 있다. 저 덤불 속에도 봄은 오고 있을 것이고, 저 나무뿌리들도 열심히 물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령하의 동절기를 보내지만 흐르는 세월에 립춘의 절기가 이만큼 가까이 다가와있는 것이다.
비록 조물주의 창조질서에 의해 계절이 바뀌고 절기가 돌아가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여러 형태로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때로는 어디서나 복 받기를 원하여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복을 빌기도 한다. 이젠 오래전 하나의 옛 풍습이 되였지만 립춘이 되기 전에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들은 이름하야 립춘축(立春祝) 혹은 립춘방(立春榜), 립춘서(立春书), 춘방(春榜), 춘련(春联)이라고 하는 것을 써서 대문이나 벽, 문짝에 부적같이 멋들어지게 써붙이군 한다.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축문은 “립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阳多庆)”이다. ‘립춘을 맞아 크게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하고 나라에는 많은 경사가 있기를 축원 함’을 나타낸 글귀다. ‘건양대길’에서 ‘건양’은 고종 즉위 33년부터 다음해 7월까지 쓰인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연호(1896-1897)다. ‘건양대경’은 그 당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다는 뜻의 국태민안(国泰民安)을 비손하는 뜻에서 집집이 써서 붙였다고 한다.
관리나 고관들의 큰 대문에는 “국태민안, 가급인족(国泰民安 家给人足)”이라는 춘련이 많다고 한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하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많이 애용되는 것이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扫地黄金出 开门万福来)”인데,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다복과 장수, 풍년과 평안을 비는 마음이 그만큼 컸다.
그리고 “당상부모는 천년수요, 슬하자손은 만대영이라(堂上父母千年寿,膝下子孙万代荣)”는 춘련도 많이 쓰이는데 ‘웃어른과 부모님은 천년 수명을 누리시고, 슬하의 자손들은 만대에 영화를 누리게 하소서’라는 뜻을 의미한다
이런 축문은 눈만 뜨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붙어있으니 우리 조상들은 일년 내내 이런 시와 기도 속에 살았다 할 수 있다.
시대가 변하니 형식도 변하는가, 지금은 립춘방을 문이나 기둥에 붙이는 집이 드물고 대신 컴퓨터나 모바일로 덕담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졌다. 간단한 문구에 각종 그림과 사진을 곁들인 이미지 파일도 등장했다. PC 버전과 모바일 버전을 따로 만들어 전송하는 젊은이도 많다. 모바일 메신저 배경화면이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이것으로 바꾸는 열성파까지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왕의 천편일률적인 옛날 문구보다 자신의 개성을 살린 내용을 담은 멋진 시 한 구절을 빌어 마음을 전하는 이들도 있다. 거기에는 “얼음장 밑에서도 / 고기는 헤염을 치고 / 눈보라 속에서도 /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문병란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 털에 /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이장희 ) 등 좋은 시구가 많다. 특히 중국에서 위챗으로 보내온 립춘방을 보면 내용이나 모양이나 형식이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요, 이루 그 종류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다.
아빠트시대에 살고 있어 대문에 붙여진 “立春大吉(립춘대길)”의 붓글씨도 구경한 지 오래됐다. ‘大吉’이라 바라는 게 다 다르겠지만 사람들마다의 ‘념원’이란 게 담긴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요. 건강, 장수, 가족화목, 결혼, 취업, 합격 등등일 것이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것으로 또 ‘재물’이라는 것이 아닐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건 좋은 일이고 그걸 원치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해마다 그러하듯 올해도 어김없이 립춘첩을 모바일로 많이 전할 것이다. 어서 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물러가고 세월이 태평하고 만민이 편안하며 만복이 구름처럼 흥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 열성을 다할 것이다.
립춘이란 말은 황제가 동쪽으로 나가 봄을 맞이하고 그 기운을 일으켜 제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立’에는 ‘곧’, ‘즉시’라는 뜻도 있어 이제 곧 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립하(立夏), 립추(立秋), 립동(立冬)도 같은 원리다. 그러니 ‘봄기운이 막 일어선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봄이 일어서니 / 내 마음도 / 기쁘게 일어서야지 / 나는 어서 / 희망이 되여야지 // 누군가에게 다가가 / 봄이 되려면 / 내가 먼저 / 봄이 되여야지.”
한국 이해인 수녀의 이 시도 ‘일어서는 봄’을 노래한 것이다.
립춘은 봄의 예고다. 겨울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땅속에서는 새 생명이 움트고 있으니 봄의 기운이 서서히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의 상징은 생명, 소생, 솟구치는 힘이다. 식물은 잎과 꽃을 내며 동물은 생명을 잉태한다. 멀지 않아 오게 될 봄날을 기다리는 것도 새로운 희망의 기운과 다시 시작하는 설레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가슴 설레였던 순간처럼 봄은 우리에게 설레임을 품게 해준다. 아직 추위가 남아있고 눈이 내리지만 립춘이라 하여 대길을 말하고 새봄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지를 움직이는 신비한 자연의 순리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그 기운을 받아 봄을 꿈꾸며 소망하는 희망의 웨침이다.
누군가 말했다. ‘찬바람을 맞고 서있는 라목(裸木)은 추위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기다린다는 의미는 무턱대고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빈틈없는 준비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나긴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새봄을 준비하며 다시 살아나는 것이 자연이고 세상이다. 자연을 닮은 사람도 역시 그렇다. 세상의 끝인 것 같아 아파하다가도 새로운 시작에 설레며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우리들 사람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닮아있어서 희망을 노래할 때 희망을 꿈꾸게 된다. 전하는 데 의하면 옛 선비들은 동지 때부터 구구소한도(九九消寒图), 곧 매화 아홉송이를 아홉줄 모두 81송이를 그려나가는데 이게 모두 마치면 드디여 기다렸던 봄이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한다.
“봄은 봄의 출생이며 여름은 봄의 성장이고 가을은 봄의 성숙이요, 겨울은 봄의 수장이다.”
이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봄의 찬가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다. 옛사람들은 립춘 15일간을 3후(侯)로 나누어 초후(初侯)에는 동풍이 불어서 언땅을 녹이고 중후(中侯)에는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말후(末侯)에는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립춘이 지나면 우수, 경칩이 잇달아 오는 것이 천체의 순리라 해마다 그 절기는 다시 반복되는 법이요, 따라서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전에 농촌에서 민영교원으로 있을 때 책임포전을 10여년 다뤘는데 해마다 립춘이 지나기 바쁘게 나도 농민들과 함께 새해 농사 준비를 서둘렀다. 휴일마다 논밭에 거름을 낸다, 화학비료를 사들인다, 알곡종자를 구입하러 다닌다, 새해 농사 계획을 짠다 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무심하기를 어제와 똑같은 날이건만 필경은 새해라 새해 농사 준비에 더없이 참답고 경건해진다. 새해 농사를 두고 봄마다 희망과 신심에 차있었다. 종래로 가을에 수확이 없을가 걱정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게으른 땅이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자기만 세심하고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풍작을 담보할 수 있었다. 수확의 토대는 심혈, 땀, 지혜, 분투로 이루어졌다. 수확은 근면하고 힘을 제 곳에 쓰는 사람한테 속한다. 땅은 거짓이 없고 정직하다. 무엇을 심으면 무엇을 어김없이 낳게 하고 땀 흘려 로동하고 가꾸어 공들인 만큼 크고 작은 열매를 갖가지로 맺는다. 내가 얼마만한 힘을 들이고 땀동이를 쏟고 심혈을 몰부으면 어느 만큼 보상해준다. 준 것 만큼 받을 줄 아는 땅은 거짓 없이 정직하다. “네가 나의 땅거죽을 얼리면 나는 너의 배가죽을 얼린다.”는 속담도 있다싶이 진실한 노력, 진실한 사랑을 투입해야 진정한 수확을 안겨준다.
립춘이 새 시작을 다그치는 것은 하늘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해서다. 새해가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희망의 씨앗이라면 립춘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씨앗을 뿌리도록 알려주는 파종기이다. 일년지계는 봄에 있다는 말도 있는바 립춘은 곧 봄의 시작이요, 그러니 자연히 우리에게는 농사의 시작이요 사업의 시작이며 배움의 시작이요 사랑의 시작을 의미한다.
새해, 우리는 코로나19로 이미 잃은 것을 애써 되찾아 가꾸어야 한다. 배움을 잃은 학생은 다시 학교를 찾고 사업을 잃은 사람은 다시 일터를 찾고 꿈을 잃은 사람은 다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런즉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일분일초를 아껴야 한다. 일분일초는 곧 사라지고 없어지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 속에 그 어떤 노력한 흔적들을 남길 것이다.
이제 곧 새봄을 맞아 얼었던 땅이 풀리고 새싹이 뚫고 올라올 것이요, 버들개지에 금빛물이 오르고 개나리에 망울이 부풀 것이며 귀를 기울이면 온통 소곤대는 소리 뿐일 것을 생각하니 아~ 벌써 마음으로부터 한결 따스하게 느껴진다.
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