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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空)
□ 주련화
“95호로 가득 채워주세요.”
차창을 내린 후 나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내뱉었다. 시원한 밤 바람이 머리 우로 흘러내린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주유소 직원이 다가오더니 익숙한 동작으로 주유총을 뽑아들었다. 눈길이 차체를 꼼꼼하게 훑고 다시 나한테 머문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은 뻘겋게 충혈되여있었다. 웬지 밤샘을 하면서 핸드폰게임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감한 무사가 되여 큰 칼을 휘두르면서 밤새 괴물을 무찌르고 또 무찔렀을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황급하게 눈길을 거두어들였다. 피씩 입가로 웃음이 새여나왔다.
기름통이 절반쯤 찼을 무렵, 그의 눈길이 집요하리만치 또다시 나의 얼굴을 훑는다. 도심을 훨씬 벗어난 외곽, 이런 곳에서 고급 외제차를 본 적은 몇번 없을 테지. 그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이 너무 궁금하다. 젊은 성공인사? 재벌2세? 또 아니면? 입귀가 슬며시 올라간다.
물론 나는 그가 좀전에 사채업자의 빚재촉 전화를 받았다는 걸 알길이 없다. 사채업자가 3일이라는 기한을 줬다는 건 더더욱 모른다.
10분 후, 나는 곧 뮤즈바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 도시에서 제일가는 미녀와 갑부들이 모인다는 그곳. 돈이 입장권이고 곧 신분증인 바로 그곳에서 최고의 미녀랑 와인 한잔 기울이고 댄스를 출 것이다.
사람들은 새 페이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자고로 영웅은 출처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
돈다발을 가슴 속으로 찔러주면 미녀는 마시멜로처럼 내 품안으로 녹아들겠지.
“오늘 밤 함께 있고 싶어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는 상당히 고혹적이다.
가난한 게 죄냐고 히스테리적으로 울부짖던 스무살의 내가 보인다. 가난은 죄가 맞다고 또박또박 내뱉던 미희의 얼굴도 보인다. 미희는 나의 첫사랑이였고 마지막 사랑이였다. 물론 내가 나중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미희가 자기 아버지보다 세살 이상인 남자랑 같이 산다고 말해준건 한때 미희가 좋다고 따라다녔던 정수였다. 그 말을 하면서 정수는 손가락 세개를 들어보였다. 미친놈임에 틀림없었다. 사정없이 주먹을 날리고 나오면서 나는 미희의 불행을 빌었다.
“땡큐, 이건 팁이에요.”
주유소 직원한테 100원짜리 한장을 찔러준 뒤 엑셀을 힘껏 밟았다. 독일의 최고 장인들이 만들었다는 엔진이 기분 좋은 중저음을 내뱉는다.
후시경으로 주유소 직원이 허둥지둥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의 대화내용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궁금할 리가 없다. 기껏해야 친구한테 비싼 외제차를 봤다고 자랑을 하거나 고급차량에 주유나 하는 자기 인생을 한탄하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10초가 되지 않아 직원은 이내 작은 점이 되여 사라졌다.
그 시각, 직원은 핸드폰을 든 채로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한참을 서있었다.
“110이죠? 여기 고속도로 옆 주유소입니다. 뉴스에서 봤는데 외제차를 훔치고 도망간 사람을 제보하면 10만원 상금 준다고 하셨죠? 제가 이제 방금 그 사람을 봤습니다… 네? 정신이상 증세가 보이고 공격성도 지니고 있다고요? 아니요, 공격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네, 자주색 스포츠카에 회색 양복을 입었더군요. 네. 뉴스에서 나오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 왼쪽 얼굴에 기미가 있었어요. 네? 이미 다른 사람이 제보했다구요?”
직원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머리 우에는 핸드폰 사용금지라고 쓴 빨간 패쪽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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