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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중편소설] 바다는 국경선 있어도 물은 국경선 없다 댓글:  조회:266  추천:0  2022-03-02
[중편소설] 바다는 국경선 있어도 물은 국경선 없다 남태일 1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대성은 문뜩, “행운을 파는 곳이 있으면 사고 싶다”라는 헤밍웨이 말이 떠올랐다. 당장 사채를 빌려서라도 행운을 사고 싶은 것이 지금의 갈급한 심정이다. 이때였다. 텔레비전에서 녀 아나운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비 태풍’이 서해를 강타한 소식을 한창 방송하고 있었다. “……단동시와 동항시는 ‘나비 태풍’의 반경에 들어있었지만, 기상청에서 미리 방송하고 사전의 충분한 준비가 되었으므로 피해가 적었다. 북조선에서는 급작스레 나타난 ‘나비태풍’을 예고하지 못하여 고깃배 수십 척이 침몰 되고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단동시의 텔레비전 뉴스 방송을 듣고 난 대성은 요즘 잔뜩 부풀어 올랐던 희망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는 담배 한 모금 깊게 빨았다가 내뿜으며, 담뱃재를 창문 밑에 열병처럼 세워 놓은 빈 맥주병 속에 털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안개는 마치 작은 벌레떼처럼 한 덩어리로 엉켜 있고, 부둣가 가로등은 열심히 어둠을 삼키며 불그레한 빛을 발사하고 있다. 어젯밤까지 미쳐 날뛰던 바다는 아침이 되자, 간밤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침목을 지켰다. 해경은 오늘까지 모든 배와 선박을 출항 금지했다.  ……대성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 B 회사 회장을 대행하여 북조선 평안북도에 사는 회장의 친동생과 비밀리에 서해 코끼리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필이면 만나자 약속한 날, ‘나비 태풍’이 서해를 강타했다. 집채같은 큰 파도가 콘크리트 방파제를 대릴 때마다 인근 숙소의 유리창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대성의 가슴에서 어지러운 잡념과 추측이 마치 열 받은 냄비 속의 물과 같이 들끓었다. “아니야, 북조선 바다 인근에 사는 어부들은 자기 경험으로도 태풍 오는 줄 알고 출항하지 않을 것이야.” “그래, 육손이 아저씨는 지금 북한에서 잘 계시고 있을 거야……”. 대성은 자기 마음을 달래며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자꾸 불길한 예감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전화였다.  “아버지, 잘 계셨어요? 어쩐 일인 기요? ” “이번 팔월 추석에 집에 올기가? ”  수술 후 변해버린 아버지 쉰 목소리를 듣자, 죄송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울음이 울컥 딸려 나왔다. 대성은 은빛처럼 반짝이는 ‘망류하’가 푸른 평야에서 굽이쳐 흐르고, 아련한 추억들이 아버지가 갈아엎던 흑토(黑土) 덩어리같이 많은 고향이 오늘따라 간절하게 생각났다.  2 90년대 후기, 교화 시의 산간마을, 홍풍촌에도 봄이 찾아왔다. 마을을 가로지른 큰길 량쪽에 앙상한 백양나무들이 아직 가난한 색을 드러내며 열병처럼 서 있다. 큰길 뒷줄에 새로 지은 벽돌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한가운데, 초라한 초가 한 채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가지런히 자란 치아 한가운데 썩은 충치 한 대가 거멓게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초가 집안에 들어가 보면 비록 흙바닥일망정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가구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정갈한 조선족의 집안 구조였다. 벽에는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성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릴 때의 큰아버지와 아버지였다. 만주에 오기 전에 한국 고향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예전에 깊이 숨겨둔 사진인데 한중 수교 뒤, 길이 트이면서 멋진 사진액자를 사서 벽 한가운데 번 듯이 걸어 놓았다.  고향이 한국 경북인 정 씨는 환갑 나이에 비운이 날아들었다. 대장암 3기로 수술을 받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또 재발하여 새집 짓는다고 은행에 저축해 두었던 돈을 몽땅 찾아 병원에 가져다주었다.  중국해군 부대에서 4년 복역하다 제대한 아들 대성은 친구 따라 큰돈을 번다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밑천이 없는 그에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여동생 은영은 아버지 때문에 다른 여자애들처럼 대도시에 돈 벌러 나가지도 못하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장가갈 나이가 된 대성에게 처녀 소개는 많이 들어오지만, 결국 대성의 깊은 한숨으로 마무리 짓는다. 오늘도 외숙모가 인근 향에 사는 처녀를 소개했다. 아직도 가난의 냄새가 나는 초가집에 산다는 이유로 처녀에게 거절당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어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가슴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이번에 벌써 아홉 번째……, 정말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장가도 못 가보고, 포톨(외톨이) 귀신이 되겠다. 밑천 없이 장사해도 안되고, 에라! 모르겠다. 이제는 한국 가는 길밖에 없구나’   아들이 마치 물을 잔뜩 먹은 종이처럼 축 늘어져 집에 들어오자 대성 어머니는 벽에 걸린 누렇게 바랜 옛날 사진을 힐끔 바라다보며 원망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에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치고, 형님 되는 분은 그래,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을 초청해서 만나보면 얼마나 좋아요. 참!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들이지. 편지 회답도 없고…….” 가만히 듣고 있던 대성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마누라를 나무랐다. “뭐라카노? 또 시작이네, 한국 힝님이 살아만 있으먼 언제던 초청할기 아니가.” 며칠이 지난 뒤 대성이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집 식구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계속 이렇게 가난하게 살 수 없어요. 이틀 뒤에 저의 친구 성국이 소개로 심양시에 있는 한국회사에 가기로 했어요. 한국회사에서 2년 열심히 일하면 한국 본사에 연수생으로 갈 수 있데요, 한국에 가면 큰아버지를 꼭 찾아뵐게요.”  3 심양시 교구(郊區)정부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축구 시합을 했다. 현지의 청년 축구팀과 중년 축구팀, 한국기업 축구팀이 모두 10개 팀이 참가했다. 중국 진출한 한국 B회사 사장과 부장은 축구를 즐기는 분들이지만, B 회사 축구팀은 해마다 시합에 참여해도 꼴찌를 겨우 면할 수준이었다.  대성이 B회사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축구 운동대회가 열렸다. 제비를 뽑다 보니 현지에 청년팀과 맞붙게 되었다. 금방 시작하여 얼마 안 되어 연속 골 두 개가 들어가면서 0 : 2로 지고 있었다. 대성은 금방 입사한 초보자다 보니 운동 구경도 못 하고 자질구레한 심부름하기가 바빴다. 금방 손수레에 물과 음료수를 싣고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대원 한 명이 다리를 다쳤다. 김부장은 대성을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성씨, 일단 심부름은 그만하고 팀에 한사람이 모자라니 들어가서 숫자나 채워 주세요.”  부장이 시키는 대로 하던 심부름을 놔두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운동장에 뛰어 들어갔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공이 앞으로 굴러왔다. 익숙한 발놀림으로 요리조리 공을 몰고 상대방의 선수들을 뒤로 젖히고, 골문 앞에 가서 살짝 슈팅하자 공이 골문 안으로 대굴대굴 굴러 들어갔다. “와아!!” 환호성이 터졌다. 잠시 후 대성은 머리로 헤딩하여 또 한 골을 넣었다. 전반전이 끝나자 대성은 또 손수레를 밀고 간식을 사러 가려고 했다. 김 부장은 대성을 끌어당기며 성질이 나서 고함을 쳤다.  “지금 무엇 하는 거야, 누가 자네에게 심부름시켜서! 엉!” 김 부장은 화가 나서 고함칠 때 얼굴색까지 변했다.  “김 부장님이 시켰는데요.” “뭐, 김 부장, 김 부장이 누구야, 당장 다른 사람 시켜!” 옆에 사람들이 하하하 웃자, 김 부장은 그제야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히며 같이 따라 웃었다. 후반전에 대성은 운동복 입고 정식으로 투입되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대성이 몸을 민첩하게 놀리며 무인지경처럼 혼자서 공을 몰고 들어가 멋진 슈팅으로 또 골을 넣었다. 대성이 골 세 개를 넣자 대원들이 투지가 살아나면서 더욱 신나게 공격했다. 결국, 청년팀과 4 : 2로 이겼고, B 회사는 중국에 진출한 후 처음으로 2등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김 부장은 음료수 뚜껑을 열어 대성에게 주면서 물었다. “대성 씨, 옛날에 축구 해보았어?” “네, 중학교 다닐 때 ‘성省 소년 축구팀’에서 축구 시합에 많이 참가해 보았어요?” “그러면 그렇지!, 야! 앞으로 우리 축구팀도 희망이 있겠구만, 대성 씨는 어디도 가지 말고 우리 회사에서 해요. 하, 하, 하”  칠순이 넘은 B회사 회장은 시합이 끝나자 잰걸음으로 달려와 대성을 안아주면서 어깨를 살갑게 다독여주었다. “나는 자네가 입사할 때부터 이미 우수한 사원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네, 열심히 하게, 내가 자네를 언제든지 중히 써 줄기다.” 흥분한 회장은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대성씨 수고했어요. 정말 대단해요.” 아침 공기처럼 상쾌한 젊은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회사 인사과 과장, 회장의 무남독녀인 현미 과장이 대성이 옆으로 다가왔다. 대륙의 젊은 녀자보다 더 희고 맑은 얼굴, 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쪽 곧은 콧대, 첫눈에 보기만 해도 전형적인 한국 젊은 녀성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쌩긋쌩긋 웃으며 대성 옆으로 다가섰다. 현미 과장은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손수건을 꺼내, 쑥스러워 어쩔 바를 모르는 대성이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꾹꾹 찍어서 닦아 주었다. 대성은 가슴이 세차게 뛰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자꾸 뒷걸음을 쳤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저 혼자 닦겠습니다.” “대성 씨, 나는 대성 씨보다 한 살 더 많으니까, 나보고 누나라고 불러야 해요.” “아닙니다. 과장님, 저 같은 사람이 어찌 과장님을 보고 누님이라고…….” 그때, 현미 과장과 대성의 눈길이 마주쳤다. 대성은 이상하게도 얼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눈길에서 구름처럼 스치는 애수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4 봄 아가씨가 아지랑이를 폴폴 날리며 다가오자, 앙상한 나무들도 싱싱하게 살이 오르고 산과 들판은 점차 초록색으로 변해 갔다. 휴식 시간이 되면 현미 과장은 자주 대성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대성이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녀는 살짝 웃으며 얼굴이 삽시에 밝아지고, 커피를 타서 대성 손에 쥐여주었다. 대성은 회장의 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세련된 의복과 몸짓에서 범접하지 못할 생소한 기질을 느껴서 그런지, 자기도 모르게 그녀 앞에 서면 자꾸 위축감을 느꼈다. 때로는 너무 긴장하여 그녀의 앞에서 말을 더듬고 엉뚱한 말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진작 밖으로 나가면 향기 도는 아늑한 공간에서 그녀와 오래 얘기 못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날도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2층 현미 과장 사무실 앞으로 지나가면서 위로 쳐다보았다. 창문의 화분 통에서 자란 앙증스러운 꽃 몇 송이가 한 가닥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는 꽃 속으로 하얀 얼굴을 내밀며 2층으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 단말기를 내밀면서 말했다. “대성 씨, 휴대전화기가 없죠? 제가 오늘 휴대전화 단말기를 교체했는데 아직 새것이라서 버리기 아깝네요. 쓰던 거라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으시다면…… ”  그녀가 준 휴대전화 단말기를 손에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없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는 걸까? 그는 온갖 생각을 다 해보았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녀 관계에선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아니, 정말 이해 안 돼!’ 대성에게는 현미 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목요일 저녁 퇴근할 무렵이었다. 검은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었다. 전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현미 과장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쉰듯해서 뭔가 슬픔에 젖은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한국 K료리집에서 식사하려고 하는데 그곳으로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전화를 받자 긴장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비록 누나라 불러 달라고 말 한 적이 있지만, 아직 단둘이서 식사할 정도로 편안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현미 과장 앞에만 서면 자기도 모르게 위축감을 느끼며 항상 말과 행동이 혼란에 빠지기가 다반사였다. 갑자기 자기 같은 하층 일꾼을 불러 단둘이 식사하자고 하니 불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그렇다고 못 간다는 말은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히 묘한 흥분에 사로잡히며 알 수 없는 설렘이 온몸으로 번져 갔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시외(市外) 저수지 옆에 전망이 좋은 한국 K료리집으로 갔다. K료리집은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으나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한국 고급 료리집이었다.  비가 그치자, 부드러운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른 끝없이 펼쳐진 저수지는 마치 즐거운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K 료리집은 말 그대로 푸른 산, 맑은 물, 일류의 풍미를 자랑하는 료리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거 같다.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이미 식당 안은 많은 손님이 북적였고 중국 사람들의 특유한 고성으로 귀가 먹먹했다. 서빙을 하는 녀직원의 안내를 받아 2층의 특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대성 씨” 그녀는 반가워하며 하얀 이가 약간 보이게 미소를 지었지만, 금방 얼굴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오늘 어쩐지 아래위로 검은색 옷을 입었다. 대성은 현미 과장 정면으로 앉지 못하고 대각선으로 부자연스럽게 앉아 곁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여느 때같이 활기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깔끔한 피부는 몹시 창백하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으며 두 눈이 약간 부은 듯했다. 그녀는 몸을 약간 일으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목소리는 조금 불안했다. “저녁인데 쉬지 못하게 불러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식당에 불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죠.’ 대성도 현미 과장에게 술 한 잔을 부어 주었다. 서로 술잔이 부딪치자 현미 과장이 먼저 건배했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조용한 특실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녀는 낮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대성 씨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말하면 적잖게 불쾌할 수도 있어요.”  밝은 등불 아래 그녀의 얼굴에 눈물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날 파리 한 마리가 등불을 빙빙 돌다가 무거운 기분에 힘이 빠졌는지 테이블 한쪽 구석에 차분히 붙어 있었다.  “사실 저는 3년 전에 결혼했어요, 신랑은 저의 대학 동창이고 대학병원의 부교수였죠, 3년 전 바로 오늘이었어요, 둘이서 같이 점심을 먹고 신랑이 대구에 학술토론 하러 간다고 차를 운전하고 떠났어요. 평소에는 사람들 많은 곳에서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던 그이가 저를 꼭 안아주더군요. 그리고 세 시간 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교통사고라고. 허둥지둥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엔 우울감이 비쳐 있었다. 검정 옷깃에 다인 하얀 목덜미는 윤기가 없고 메마르고 창백하였다. “대성 씨가 처음 입사했을 때, 저가 대성 씨 이력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대성 씨의 사진 속 얼굴이 돌아간 남편과 너무나 닮았어요, 넓은 이마와 눈, 코가 똑 닮았어요. 그때 제 가슴은 세차게 뛰고 현기증까지 났어요, 대성 씨의 이력서를 한쪽에 밀어 놓고 오랫동안 고민을 했죠. 아버지는 대성 씨가 저세상 사람인 사위와 많이 닮았다며, 나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채용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상관없다고 고집하자 아버지는 허락하시더군요. 축구 하는 모습까지 많이 닮았어요.  대성 씨를 죽은 남편과 생김새를 비교하는 거는 저 자신이 너무 황당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오늘만 지나면 그이에게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울 거에요. 그래야만 그이도 내 마음에서 떠나 천국으로 갈 수 있겠죠.” 대성은 현미 과장의 이런 사연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리해할 수 없었던 행동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애수의 그늘이 진 눈빛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환영(幻影)으로 인식되었다는 거는 분명 기분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듣고 보니 젊은 녀자가 자기 앞에서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와 비밀을 토로했던 것은 그만큼 자기를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성은 현미 과장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저 같은 사람에게 한 젊은 녀자가 마음속 상처를 보여준다는 것은 저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과장님의 남편이 죽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저의 생김새도 저의 의지 되로 되지 않습니다. 과장님의 아픈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돕고 싶습니다.”  그날 현미 과장은 술을 많이 마셨고 취했다. 택시를 타고 그녀의 숙소로 갈 때였다. 그녀는 머리를 대성의 어깨에 살짝 기대고 잠들었다. 깔끔하고 유난히 흰 얼굴에는 아직도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에서 까만 머리카락 세 오리가 얼굴의 눈물 자국에 묻어 있었다. 이제까지 대성은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할 줄로만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남편을 잃은 현미 과장이 3년간 겪은 슬픈 시간은 가난한 자기보다 오히려 더 처참했을 거로 생각했다. 5 대성이 B 회사에 왔는지 3개월 되는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현미 과장이 숙소에서 쉬고 있는 대성이를 찾으러 왔다. 현미는 해맑게 웃으면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성씨, 회장님이 대성씨를 회장실에서 뵙겠다고 하네요. 회장님이 대성씨에게 큰일을 맡길 거 같아요. 중요한 일을 상의한다고 했어요. 빨리 올라가 봐요. ”  “네? 저하고 중요한 일을 상의하신다고요?” 대성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화장은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까지 했다. 대성은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현미 과장이 따끈한 커피 한잔을 대성이 앞에 가져다주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대성이 자네가 해군 출신이라면서?” “네, 회장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중국에 진출하면서부터 오랜 시간 동안 현지 동포 중에서 젊고 정직하고 담력이 있는 친구를 찾던 중이었는데……, 그래서 사실 자네가 입사한 뒤부터 줄곧 관찰 해왔네. 자네에게 에돌아 얘기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옛날 나의 고향은 한국 충청도였네, 우리는 남자 형제가 둘이었어. 어릴 때, 아버지가 벌목장에서 일하시다 사고로 돌아가게 되었네. 어머니 혼자서 어린 우리 둘 형제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었겠지. 그 무렵 아들이 없는 큰외삼촌이 만주로 가면서 내 동생 영철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네. 그 뒤에 외삼촌이 만주 봉천에서 잘 있다고 편지를 써서 인편으로 보내왔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소문에 외삼촌이 병으로 돌아가고 외숙모가 재가하게 되자 동생 영철이가 공부를 더 하겠다며 북한으로 갔다고 했네, 그 뒤에 월남한 영철이 친구가 나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평안북도에서 현지의 처녀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네.”   잠시 말하는 동안 회장은 기침을 자주 했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회장의 창백한 얼굴에 잔주름은 많았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창가에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에 오동나무 파란 잎들이 회장의 조각난 기억처럼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작은 새 한 마리가 잎이 무성한 가지에서 한 송이 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회장은 깊은 감회 속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중국 단둥시의 중국인들이 북한 평안북도의 주민들과 서해에서 민간 무역을 하고 있는데, 북한 주민 중 많은 사람이 이 기회에 탈북했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때부터 나는 믿을만한 조선족 젊은이들을 눈여겨보았네. 북한 주민들과 무역 거래를 하면서 동생 영철이를 찾아 중국에서 한 번이라도 만나 볼 계획이네.”  회장은 대성을 오래 관찰한 끝에 적임자로 선정하고, 현미도 적극적으로 추천하였기에 더 주목하게 됐노라고 말했다. 회장은 대성의 손을 꼭 잡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암 수술을 받은 사람이라 오래 살 수 있다는 보증도 없네, 내가 죽기 전에 동생 영철이를 한번 만날 수 있다면 한이 없네, 그렇다고 가족은 놔두고 동생만 한국으로 데리고 갈 생각은 없네, 동생을 찾은 뒤 거취 문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게. 우리는 자네를 믿고 이 위험하고 고생스러운 일을 부탁하는 것이네, 자네 능력으로 꼭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네, 자네, 잘 생각해 보고 삼 일 안으로 확답 주기 바라네,” “그리고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유학하겠다면 경비까지 내가 다 책임지겠네, 만약 동의한다면 당장 각서까지 쓰겠네.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월급도 지급하고 모든 경비까지 내가 책임지겠네”  옆에서 듣고 있던 현미 과장이 웃는 얼굴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성 씨는 한국 유학하는 것이 제일 큰 소망이라고 말했잖아요, 호호호”  대성은 회장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서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제가 비록 큰 능력은 없지만, 만약 그분이 살아 계시면 최선을 다해 동생분을 찾아서 회장님 앞에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역시 대성 씨는 기백이 있는 남자군. 꼭 기억해 둘 거는, 동생 영철은 1936년생이고 왼손이 여섯 손가락이야, 좀 특별하지, 허, 허.” 회장은 대성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침, 단둥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친구가 있고, 인맥이 넓다고 하니 그 친구를 찾아가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대성이 짐을 꾸려 숙소에서 나왔을 때, 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생각밖에 현미 자가용 자동차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제가 대성씨를 기차역까지 대려다 줄께요.” 그녀는 대성 얼굴을 얼핏 보고는 머리를 돌려 막연하게 비를 맞고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비를 맞고 있는 축축한 나뭇잎처럼 우울하고 생기가 없었다. “아니, 일없어요. 저 혼자 버스 타고 가면 돼요. 과장님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저 같은 일꾼까지 신경 쓰시고…….” 빗방울은 쉴새 없이 승용차 유리창에 부딪히면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애수의 그늘이 자주 스치곤 했다. 오늘따라 새 옷을 갈아입은 대성은 키가 유난히 크게 보였고 헌칠한 몸매도 의젓하고 름름해 보였다. 개찰구 앞에서 현미는 잘생긴 대성 얼굴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성씨가 뜨나니 내 마음이 왠지 허전하네요. 자주 전화해요. 너무 위험하면 다른 회사에 가지 말고 꼭 우리 회사로 돌아와요. 내가 언제든 반겨 줄 테니까요.”  6 대성은 단둥시에서 식당을 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단둥에 오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친구는 대성에게 북조선이 가까운 동항시에 가서 통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어선보다 조그마한 무역 배를 타면 북조선의 민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친구는 대성에게 허 군이라는 중국 선장을 소개해 주었다. 허 선장이 자그마한 배로 무역하는데 요즘 마누라가 병으로 죽고, 좋은 통역이 없어 돈벌이가 안 되니 좀 도와주라고 했다.   단둥시에 소속되는 현급시 동항시(東港市)는 중국 해안선에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동항시 동쪽으로는 사품 치며 흐르는 압록강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 파도가 높다는 서해를 끼고 있다. 북조선 평안북도 신도군(薪島郡)은 동항시에서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북조선의 에 당국에서는 평안북도의 룡천군, 신도군 인근 바다를 중국 배들이 래왕하도록 눈을 감아 주었다. 북조선 사람들이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과 중국 곡물을 바꾸는데 편리를 위한 것이다. 그 후부터 룡천군과 신도군 인근 바다는 북조선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같이 고기도 잡고, 물물교환하는 공해가 되었다. 북조선 사람들은 주요로 해산물과 구리, 동, 철, 때로는 귀한 약초도 가지고 나왔다. 허 선장의 디젤엔진으로 추진하는 소형목선에는 백화점같이 많은 물건이 꽉 차 있었다. 입쌀, 옥수수, 콩 등 여러 가지 양식을 비롯하여 과자, 사탕, 주류, 음료수, 채소 등 부식품이 있고, 화장품과 녀자들의 액세서리 등도 진열해 놓았다. 북조선 주민들이 바다에 나올 수 있다는 자체는 행운이었다. 내륙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들이 조금씩 캔 조개와 바지락을 들고 와서 양식과 바꾼 뒤 서비스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선장이 냉정하게 거절하면, 얼마 되지 않은 양식만 배낭에 넣고 힘겹게 배에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불쌍했다.  대성은 며칠 바다에 다니며 굶어서 뼈만 앙상한 동포들을 바라보고 가슴이 아팠다. 듣는 말보다 더 처참했다. 그래서 자기 혼자 계획을 세웠다. 한국회사에서 받은 월급은 은행에 저축하고, 배에서 통역하여 번 돈은 아예 량식을 사서 선창 뒤에 따로 보관해 두었다.  북조선 로약자들을 만나면 쌀을 푹푹 떠서 배낭에 넣어 주었다. 대성은 자기가 준 쌀을 배낭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할 때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 돈 벌어 현미와 함께 북조선과 무역도 하고 싶었다. 자기가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 방법 없이 굶고 있는 동포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성에게 배려를 받은 북조선 주민들은 돌아가서 사람 찾는 홍보도 많이 해주었다. 대성이 북조선 사람들과 물물교환하다, 우연히 북조선 신도에 육십 대 되는 육 손이 아저씨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태양이 솟아오르자 신도 앞바다에 숲을 이루는 칼바위 봉오리들이 하얀 바닷속에서 서서히 솟아올랐다. 만조가 된 고요한 바다 수면에는 산봉우리가 투영한 길고도 검은 그림자가 마치 거대한 구렁이들이 기어가는 것같이 물속에서 일렁거렸다.  대성의 목선은 곧바로 신도 방향으로 달렸다. 신도가 가까울수록 육손이 아저씨를 정말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설레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사실 다지증(多指症)은 인구의 1000명 중 2명 정도라고 한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도 육손인 사람을 찾기 힘든데 북조선 사람 중에서 육손인 사람을 찾았다는 거는 희망이 보인다는 징표였다.  대성은 신도의 육손이 아저씨가 진짜 B회사 사장의 친동생이라면, 하늘이 행운을 준 것으로 생각했다. 일이 잘 풀리면 한국도 갈 수 있고. 한국의 큰아버지도 찾아뵙고, 몇 년 류학하여 중국에 돌아오면……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오색영롱한 그림을 그렸다. 초록색 하늘에 흰 구름이 굴러가고 그 아래 푸른 바다에서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북조선 아저씨들이 통나무 쪽배에서 노를 살랑살랑 저으며 고기 낚시를 하고 있었다. 숲을 이룬 칼바위와 돌기둥 사이로 다니며 낚시하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저분들이 굶주리지만 않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대성은 혼자 생각했다. 디젤엔진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허 선장 배가 신도 바다로 진입했다. 그들은 중국 배라는 거를 이미 알고 허 씨 배에 붙였다.  쪽배마다 아침에 낚은 싱싱한 2~3킬로 되는 송어를 꺼내 놓았다. 북조선 사람들과 물물교환 할 때, 마치 상점에 상품같이 가격이 이미 정해져 있는 만큼 흥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술 담배 같은 서비스를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징징댄다. 마침, 대성이도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북조선 아저씨와 같이 식사하자면서 술과 그들이 제일 즐겨 먹는 삶은 돼지고기를 꺼내 놓았다.  그들은 푸짐하게 쓸어 놓은 삶은 돼지고기를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했다. 굶다 보니 위장이 작아졌는지, 중국인보다 식사량이 적었다. 대신 술 4병은 눈 깜박할 사이에 다 마셔 버렸다. 그들은 남은 돼지고기와 과자를 조금씩 나누어 신문지에 싸서 배낭에 깊숙이 넣고 그 위에 다른 물건을 넣었다.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는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고기를 먹고 싶어 했는데 이제 소원을 풀 수 있다며 하늘의 룡고기라도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 한 아줌마는 내일 군대에서 휴가오는 아들에게 고기에 시래기를 넣어 푹 끓여주겠다며 기뻐했다. 북조선 사람 얼굴에 항상 수심이 어려 있고, 사람끼리 경계하고 의심이 많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 찾는 사연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저는 중국통역 해석(바다에서 부르는 별명)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찾으려는 육손이 아저씨 외삼촌 딸 되는 분이 중국에서 돈을 엄청 많이 벌었어요. 누구든지 육손이 아저씨를 찾아 주시면 수고비를 많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동네 가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키가 작고 야위어 뼈만 앙상한 한 아저씨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신도에 육손이 아저씨가 살고 있고 나이도 비슷하다고 했다. 고기 낚시는 하지 않고 사리 때, 갯벌에서 조개 캐러 나온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육손이 아저씨 옆집에 산다면서 오늘 새벽 함께 바다에 나왔다고 했다.  대성은 그 아저씨에게 술 두 병, 담배 한 보루, 그리고 바가지로 쌀을 푹푹 떠서 배낭을 가득 채워 주었다. 썰물 전에 그 육손이 아저씨를 만나러 같이 가자고 했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가 있다는 곳에 다가갈수록 가슴 속에 솟구치는 희열을 억제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육손이 아저씨가 탄 배를 찾았고 그 옆에 나란히 배를 붙였다.  대성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그 육손이 아저씨와 악수했다. 먼저 손가락을 보니 여섯 손가락이었다. 나이도 비슷하였다. 육손이 아저씨는 흐릿하고 정기 없는 눈빛은 낡고 도수 높은 안경에 가려 누구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낯선 사람을 거리끼는 기색이었다. 대화가 매우 힘들었다.  묵묵히 앉아 있던 육손이 아저씨가 갑자기 손을 내밀며 술 한 모금을 돌라고 했다. 비닐봉지 술 한 봉지를 건네주자, 그는 이빨로 물어뜯고 물 마시듯 꿀컥꿀컥 마셨다. 조금 뒤, 술기운이 오르자 대화가 순리로 워 졌다.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성은 출렁이는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며 하얗게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육손이 아저씨에게 비닐봉지 술 5개, 담배 한 보루와 배낭에 하얀 입쌀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음이 자꾸 울적해지고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일이 잘 안 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깬다고. 신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대성은 변장한 북조선 군인들의 배를 민간인 배인 줄 알고, 잘못 붙였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군인들에게 배 안에 물건을 몽땅 빼앗겼다. 대성이 성질에 가만히 앉아 그들에게 빼앗기리 만무했다. 4명과 격투하다 나무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혼미해 쓰러졌다. 너무 심하게 폭행당하여 갈비뼈 4개나 부러지고 피투성이 되었다. 때마침 중국 해경 순찰 선박이 옆으로 지나가기에 다행이었다. 대성은 난생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단동시에서 식당 하는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대성이 너, 북한 군인에게 당했다며? 너 그래도 운수 좋은거야, 북조선 군인들에게 그렇게 물건 빼앗기고 맞는 거는 보통이야, 그렇다고 어디 가서 해볼 자리도 없어……. 조선족 통역 중 80%는 한 번씩 당해 보았을 거야.  다음부터 신경 많이 쓰고 조심해, 그런데 대성아! 너,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허 선장네 빛 6만 원 다 갚았다메, 허 선장 완전히 너를 신(神)으로 떠받들더라. 너, 담력 있고 장사 잘한다고 우리 식당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났어. 너 때문에, 나도 장사가 더 잘 되는 거 같다. 친구야 빨리 치료받고 우리 식당에 놀러 와! 내가 단동시 제일 고급 식당에 가서 대접할게. 친구 쨔유!     7 동항시에 조선족 통역협회가 있었다. 한 달에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하면서 정보와 경험 교류를 했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 찾는 단서가 단절되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 통역들의 모임에 참가했다. 친구들에게 자기의 고민을 얘기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통역 친구가 육손이 아저씨에 대한 단서를 고맙게 알려 주었다. “남포시를 가기 전에 온천군에서 육손인 노인과 해산물 거래도 해보았는데 중국에 친척도 있다고 하더라.” 그 통역 친구는 한참 생각 뒤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포 바다에는 개방하지 않아 아무 사람이나 갈 수 없어, 오직 고속 보트만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전번에 우리가 보트에 물건을 잔뜩 싣고 돌아오는데 북조선군대가 목선으로 쫓다가 안 되니 총으로 사격하고 포까지 쏘았던 거야, 선장 허벅지에 총알이 관통하여 많은 고생을 했어.” 그러나 대성은 보트를 임대해서라도 꼭 가야겠다고 하자, 통역 친구가 함께 남포 바다에 다니는 다른 보트 통역이 북조선군대 총에 상처를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으니 그 보트 선장을 찾아가서 연락해 보라고 했다. 대성이 보트 선장을 찾아갔을 때, 통역 친구가 미리 선장에게 소개했었다. 대성은 이 바닥에서 장사를 잘한다고 선장들에게 인기가 좋다 보니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일주일 뒤, 대성은 고속 보트를 타고 남포 바다로 갔다. 비록 새로 구매한 고속 보트지만 외부에 총알 맞은 구멍과 포탄 파편에 찢어진 자리가 력력히 보였다.  남포 특별시는 수도인 평양과 해외를 연결하는 관문이자 북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도시이다. 고속 보트가 한 시간쯤 달리자 푸른 바다에 북조선의 작은 고깃배들이 보였다. 대성이 보트는 작은 섬 사이로 다니며 수산물거래를 했다. 북조선의 남포시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거는 아주 위험한 도전이었다. 위험한 만큼 싱싱한 해삼, 골뱅이 등 조개류와 해산물을 저렴하게 곡물로 바꾸어 올 수 있다. 남포 바다에 가려면 목선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고속 보트로 남포 바다 범바위까지만 들어가면 싱싱한 해산물을 잠깐 사이에 선창을 가득 채울 수 있다.  계산이 끝나자 북조선 어부들이 아침밥을 못 먹었다며 빨리 식사를 하자고 졸랐다. 소고기볶음, 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구운 닭고기에 술까지 마음껏 먹으라고 주었다. 금방까지 먹구름 끼었던 얼굴이 환해지고 눈빛이 반짝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맛만 보고 더 먹지 않고 나누어 제각기 배낭 속에 넣었다.   대성은 담배 한 보루와 과자, 사탕을 꺼내 갑판 위에 놓고 어민들에게 사람 찾는 데 도움을 청했다. 찾아 주신 분에게 수고비를 돈이나 량식으로 섭섭하지 않게 주겠다고 했다. 듣고 난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다른 일을 제쳐 놓고 육손이 아저씨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때였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오십 대 중반 되는 아줌마가 중요한 단서를 알려 주었다. 육십 대 되는 육손인 노인 한 분이 자기 며느리 친정 동네, 온천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오늘 군대 초소에서 같이 바다로 나왔고, 그 사람은 자기 동생과 함께 다른 섬으로 갔다고 했다.  보트로 가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면 육손이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 했다. 대성은 그 아줌마에게 쌀 한 포대 주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자그마한 섬을 몇 개 지나가자 넓은 갯벌이 나타났다. 북조선 사람들이 밀물이 서서히 차오른 갯벌에서 단골 중국 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성이 보트가 밀물 따라 그들에게로 다가 갔을 때, 배들이 서로 다투며 보트 옆에 붙였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를 만나 보았다. 아저씨와 악수를 하며 손가락을 보니 손가락이 여섯 개는 분명했다. 자세히 물어보니 그는 중국에 친척은 있으나 본적은 남포시라고 했다.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쌀 한 포대와 사탕 한 봉지를 주었다.  남태일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시, 소설 등 수십 편 발표. 수상 다수 동북아신문
메인(Maine)주는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의 가장 북쪽에 있는 주로 주도는 오거스타이다. 남쪽과 동쪽은 대서양에 닿아 있으며, 북동쪽은 캐나다의 뉴브런즈윅, 북서쪽은 퀘벡 북서쪽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미국 뉴햄프셔주와 경계를 하고 있다. 아카디아 국립 해상공원과 바닷가재의 주산지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미국 50개 주에서 크기로 39위에 불과한 아주 작은 주이다.   필자는 뉴저지주 공립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작은딸과 주말을 이용하여 뉴저지 집을 출발해서 뉴욕주를 걸쳐 미국의 탄생지 뉴잉글랜드인 코네티컷주, 매사추세츠주를 거쳐 메인주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뉴잉글랜드는 3개 주 외에 뉴햄프셔주, 로드아일랜드주 등 총 다섯 개의 특별한 주로 구성되어있다. 가는 도중 평소 관심이 많은 코네티컷주에 있는 예일대학(1701년),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대학(1639), 매사츠세츠공대(1865)을 구경하면서 오랜 전통을 가진 세계적인 대학들의 개척자적 정신과 캠퍼스 향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유학 시절 우연히 어느 신문에서 감명 갚게 읽고 필자의 뇌리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생각나게 하는 롱펠로우(Henry W. Longfellow) 집을 여행 중 꼭 가보고 싶었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운 어느 날 어떤 기자가 그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롱펠로우는 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대 문호 톨스토이는 “고통은 깨달음을 준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 후에 우리는 진리 하나를 얻는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슬픔이 찾아왔다면 기쁘게 맞이하고 마음속으로 공부할 준비를 갖추어라. 그러면 슬픔은 어느새 기쁨으로 바뀌고 고통은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말했다.   롱펠로우는 1807년 2월27일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당시 매사츠세츠)에서 질파 워즈워스 롱펠로와 스테판 롱펠로의 8명 자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만 75세인 1882년 사망했다. 양부모 모두 명문가 출생이었으며 뉴잉글랜드 지방 초기 정착가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6세에 라틴어에 아주 능했다고 한다. 당대 롱펠로는 미국의 어느 시인도 누려보지 못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불멸의 왕관을 쓴 시인”으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단순한 리듬과 강한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설명: 메인주 최초의 하우스 박물관으로 미국 시인 헨리 롱펠로우가 자란 곳. 이 집은 Peleg Wadsworth 장군에 의해 1785에 지어졌음. 1807에 태어난 헨리는 이 집에서 자랐음. 헨리의 여동생 인 앤 롱펠로 우 피어스는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살았음. 이 집에는 식물원이 있어 많은 나무와 꽃들이 있음   미국 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의 흉상이 비치되고 있다. 그는 당대에 “에반젤린”, “인생찬가” 등과 같은 명시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고 또한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신곡을 포함한 단테의 문학작품을 완벽하게 번역한 충실한 학자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시인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또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예 코미디(Dante Alighieri's Divine Comedy)를 번역한 최초의 미국인이었으며 뉴잉글랜드 출신의 노변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녔으나 아버지 권유로 교사가 됐다. 1825년 메인주에 있는 보드윈대학(Bodwin University)을 졸업하고 1929년까지 유럽을 여행하면서 스페인어,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 라틴어 등 8개 국어를 익혀 뛰어난 어학실력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어학실력으로 후일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게 되었다. 유럽 여행 중 많은 것들을 유적과 문화유산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이 경험은 그의 문학에 대한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제까지 상상 속에 들어있었던 파편화된 세계의 이미지들과 테마에 역사성을 부여해 구체적으로 구성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보드윈대학에서 8년 동안 근대어를 가르치면서 문학에 대한 혼을 깨우기 위해 유럽여행을 떠나는 등 문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착실하게 쌓아나갔다. 1835년 매리 포터와 결혼한 후 첫 출산을 앞두고 함께 유럽을 여행하는 중 출산하다가 그의 아내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사랑의 이별은 롱펠로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사랑의 아픔은 오랜 고통의 시간을 거쳐 10여년 후 아름다운 사랑의 대서사시 ‘에반젤린’을 탄생시킨다. ‘에반젤린’은 알프렐여사와 재혼하고 4년여 시간이 흐른 후 마음에의 평화를 찾은 때 씌어졌다.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854년까지 18년 동안 현대 언어학,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이후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에서 물러나 창작에만 온 힘을 쏟았다. 1842년 ‘노예의 시’를 시작으로 많은 시를 발표했다. 다른 나라의 민요를 번역하기도 하고 민요를 바탕으로 작품을 쓰기도 했다. ‘밤의 목소리’, ‘마을의 대장간’, ‘불루우즈의 종탑’, ‘노예의 시’, ‘노번여인숙 이야기’, ‘하이와사의 노래’, ‘마일즈 스탠디쉬씨의 청혼’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대가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그의 부인인 알프렐 여사가 드레스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파머를 위해 밀랍향초에 불을 붙이다 드레스에 불이 옮겨 붙었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사랑하는 부인이 그의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큰 화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서서히 죽어갔다. 이 모습에 또 한 번의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마음에 가득 찬 번뇌와 아픔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가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면서 천상의 장면을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부인과 이러한 경험들과 아픔이 많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신곡’은 이탈리아어에서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원본보다 더 훌륭하게 번역해 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험난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 운명들을 정면에서 극복하고 돌파해 나갔다. 운명 앞에 당당하게 맞섰으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잃은 두 번째 부인으로 인해 더욱 영적으로 깊은 삶을 살았으며, 성자와 갈은 생활을 했다. ‘인생에 대한 찬가’가 위대한 것은 이러한 단장(斷腸)의 깊은 슬픔을 찬란한 슬픔으로 바꾼 문학의 힘이 더 위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인간의 한계와 비애를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한 찬가를 노래했다.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중략---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활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코로나19시대에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장년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선지자적 가르침인가!   롱펠로우는 〈비 오는 날〉에서 ‘슬픈 마음이여! 한탄하지 말라’고 노래한다. “내 인생 춥고 어둡고 쓸쓸도 하다. 비 내리고 쉬지도 않고. 중략---조용하거라, 슬픈 마음들이여! 그리고 한탄일랑 말지어다.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그대 운명은 뭇 사람의 운명이러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적극적으로 보았던 롱펠로우는 사랑하는 첫 번째 부인 매리 포터와 사별하고 그 아픔을 승화시켜 사랑의 장편 대서사시인 ‘에반젤린’을 쓰게 된다. ‘에반젤린’은 1755년 아카디아(지금의 노바스코샤)의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영국군에게 쫓겨 강제로 이주 당했을 때의 실화를 배경으로 쓴 시로 아카디아 지방 초원에 있는 마을을 배경으로 대장장이의 아들 가브리엘과 부유한 농부의 천사같이 아름다운 딸 에반젤린의 구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목가적인 그랑프레 마을의 젊은 남녀 가브리엘과 에반젤린은 결혼식 날 영국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추방당하여 이별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 남편을 찾아 미국 각지를 떠돌던 에반젤린은 악성 전염병이 돌던 필라델피아의 의료원에서 환자를 간호하던 중 죽음에 임박한 남편을 만나게 됨을 그리고 있다. ‘에반젤’에서 에반젤린의 남편으로 묘사된 실제 인물 루이 아르세노가 노바스코샤에서 추방된 후 살았던 집으로 여겨지는 집이 미국 루이지애나주 남부 세인트마틴빌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롱펠로 에반젤린 주립 기념지역’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롱펠로우처럼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실행한다면 우리도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1박 2일 일정으로 500마일(800km), 2,000리 길, 힘든 여정이었지만 유별나게 붉은 석양을 바라보면서 롱펠로우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했던 집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향하는 발걸음 속에서 필자는 앞으로의 인생여정을 깊게 생각하는 계기를 가졌다. 긍정적인 삶과 쓰라린 고통의 속에서도 아름다운 시를 쓴 롱펠로우를 생각하면서! (끝)동북아신문 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19    리영매 디카시 간이역 꽃잠(외 2수) 및 평설 댓글:  조회:240  추천:0  2022-01-11
디카시 간이역 꽃잠(외 2수) 리영매    세월의 기차는 멈춘게 아니라 신록의 고동 잉태중이고   잠시 숨 가둔 아이들은 새록새록 눈부신 햇살 충전중이다   종달새 휘파람소리 망울 터칠 그날 둥근 식탁     티격태격 다투고 난 이튿날 아침   깨어보니   간밤 얼룩 따뜻하게 덮어줄 하얀 눈이 가득 내렸네   존엄     세월에 속 다 파먹히고도 녹쓸지 않은 저 갈증   물빛 봄하늘 마시며 도고히 치켜든    뿔사슴의 왕관 리영매 프로필: 중국 연태시 거주 시와 편견 2021년 여름호 디카시등단 중국청음디카시 동인회 회장  산동성 연태시 기타음악협회 부회장/클래식기타 일급강사   리영매 디카시 평설 글:리준실 시인   디카시는 찰나의 예술이다. 2004년 한국 경남 고성에서 지역 문화운동으로 태동된 디카시는 오늘날 한국을 넘어 국외로 널리 전파되고 있다. 요즘 중국 조선족 문단에서 디카시 보급에 선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위챗 “청음 디카시 동인회” 회장 리영매 시인의 ,  ,  세 작품을 소개한다.       간이역에 눈이 소복히 내렸다. 운행을 멈춘 고물 기차, 정거되어 있는 전동 자전거...눈 속에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싶지만 시간은 태고연히 흐른다. 나목가지에서는 새 움이 꼼지락거리고 잎이 돋으면 종달새가 날아와 우짖을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는 선명한 계선이 없다. 계절의 교체에 관계없이 소생을 앞둔 생명들은 고동을 멈추지 않는다.   문득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떠오른다. “눈이 오면”“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떨리고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눈이 서서히 녹으면 간이역은 꽃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대의 마을에도 눈이 내렸는지...       누가 무슨 일로 티격태격 다퉜는지 모른다. 그 얼룩을 감싸주려는 듯 둥근 식탁 위에 간밤 흰 눈이 도톰히 내렸다.   화해가 불가능한 적아 지간의 모순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과 사람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는 건 입장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거나 대방의 부족함에 대한 포용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 미국대통령 오바마가 대통령 경선 때 있었던 일이다. 경선 막바지에 모 매체에서 라이벌 후보 페이린의 열일곱 살에 난 딸이 혼전 임신을 한 사실을 까발리면서 페이린이 만약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어떻게 미국사회의 심각한 사안 중 하나인 청소년문제에 대처할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올 수 있겠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모두들 오바마 쪽에서 페이린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을 들이댈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오바마는 이는 대방 후보의 사생활에 속하는 부분이라면서 자신 역시 어머니가 결혼 전 열여덟 살에 낳은 사생아였다고 말하였다. 오바마의 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솔직한 인격은 그를 더 돋보이게 했으며 경선 성공에 중요한 몫을 하게 하였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이 크다”, “전어 굽는 냄새에 나가던 며느리 다시 돌아온다”등 우리 말에는 음식과 관련된 속담이 많다. 우리 민족은 음식문화와 밥상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티격태격했던 쌍방이 둥근 식탁에 마주 앉아 밥 한끼, 술 한잔 나누면서 마음 속의 응어리를 풀고 다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인은 강가에 비스듬히 누운 해묵은 버드나무를 보며 상상을 펼친다. “세월에 파먹힌” 고목에서 “존엄”의 주인공-시적화자의 다사다난했을 경력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화자의 인격 완성에 대한 “갈증”은 만족을 모른다.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왕관”은 도고하다.   “존엄”이란 단어는 에“스승이라면 연박한 학문 외에 존엄과 위망을 갖춰야 한다(尊严而惮,可以为师)”라고 최초로 출현했으며 “예기•학기(礼记•学记)”에는 “사도존엄(师道尊严)”이라는 어휘가 출현하는데 스승이라면 반드시 지식과 기능 외에도 도리를 전수해야 존경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옛적에는 스승의 도의를 가리켰고 현대에 와서는 스승이나 교사에 대한 존경스러움을 나타낸다.   그러고 보면 “존엄”이란 단어는 높은 지위에 있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성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이 먹는다고 자연적으로 성숙되는 것은 아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거의 무학이나 다름없는 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은 늙을수록 힘이 입으로만 모인다”면서 나이가 들수록 말을 조심하고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 마을적으로도 존대받는 공경의 대상이셨다.    존엄은 누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지켜내는 것이다.   리영매 시인의 디카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재료를 뒤지며 공부도 하고 좋은 추억도 떠올리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계속 좋은 작품을 부탁드린다.
18    코로나전쟁, 나는 그 현장에서 왔다 댓글:  조회:216  추천:0  2022-01-10
코로나19 전쟁, 나는 그 현장에서 왔다 순희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삶이 흔들린다. 일상은 마비되고 사람들은 마스크라는 방호벽으로 서로 경계벽을 쌓는다. 언제 바이러스가 나를 덮칠지 모르는 공포가 매 순간 삶을 조여 온다. 거대한 고통이나 혼돈 앞에서 사람들은 할말을 잃었다. 당연했던 일상이 흔들리면서 당연한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3년전부터 한국 인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간병일을 했었다. 지난 2021년11월5일 내가 일하던 요양병원에서 첫 코로나 감염자 2명이 나왔다. 텔레비에서만 봐왔던 코로나의 현장 모습들이 눈앞의 현실로 되여 버렸다.  그 시각부터 우리는 방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환자들과 함께  격리되었다.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이었다. 환자들 앞에서는 태연한체 했지만 사실 나는 많이 떨었다. 떨리는 몸을 방호복 속에  감추고 환자 케어를 해야만 했다. 모든 일상이 그 좁은 공간에서만 허용되었다.  병원장이 방역 규칙을 소흘히 한 탓에 감염이 확산되어 날마다 확진자가 수십 명씩 증가했고 병원은 비상사태에 처했다. 병원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져 일어 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 확진자가 미확진자를, 미확진자가 확진자를 돌봐야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병원의 일상은 뒤죽박죽이 되였고 코로나는 거침없이 확산되었다.  확진자가 무더기로 증가되면서 병원 측에서는 감당이 안 되였다. 원무과장이 병원 전체에 "지금부터 확진자가 나와도 격리를 위해 이동시키지 않겠으니 전체 직원들은 각자 위치에서 계속 일하라" 고 방송통지 하였다. 명령식 강요로 공포감은 심화됐고 확진자와 미확진자를 분리하지도 않은 상태로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게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확진자와 미확진자를 함께 돌봐야만 했었다.  우리는 매일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7시면 어김없이 확인 메시지가 날아온다. 기다리는 7시가 우리에게는 고문이엇다. 가슴은 콩닥콩닥, 입안은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기다림이었다. 그 시간이 천년같이 만년같이 느껴졌다. 띵동 메세지의 알람이 울린다. 떨리는 손으로 폰을 여는순간은 입시생이 수험성적 확인하는 초조함이라할까, 재판관의 판결문을 기다리는 피고인의 긴장함이라 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와~,음성이다.' 긴장과 공포 속에서도 환희의 전율이  흐른다. 우리 간병인들은 이 시간 때면 서로서로 문자를 전하고 , 평안을 빌면서 하루를 시작하군  했다. '아~. 나는 오늘도 음성이다.' 하고 환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동료 간병인의 확진 소식에 기가 죽었다. 날에 날마다  들려오는 공포의 확진자  소식에 두려움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첫 확진자가 나타나서 4일만에 내가 맡아보고 있는 병실에도 양성 판정 받은 환자가 3명이나 나왔다고 병원장님이 통보해 주었다. 그 순간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머리는 멍~, 마음은  불안~,전신은 떨렸다. 병원이 코호트 격리 상태라 도망 갈래야 도망갈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부딪혔다.  갑갑했다. 어찌해야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운명이라면  피할 길 없으면 차라리 즐기"라고 했던가? 나는 냉정하게 마음을 다 잡고 코로나와 싸워 꼭 승자가 되여 보겠다고 다짐하였다.   2년전 중국 의료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무한으로,코로나 최전선에 자진하여 뛰어가던 그 고상하고 숭고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코로나 전담병원에서 직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일하던 현장의 감동 이야기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최소한 내 담당 병실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생명 안전은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에 코로나 현장을 이탈할 수 없었고 사명으로 코로나와 싸워야겠다는 다짐으로 매일 최선을 다 하였다.  방호복으로 전신을 무장한 우리 몸은 매일 땀으로 물참봉이 되었고 저녁이 되면 기진맥진 해서 숟가락 들 기운조차 없었다. 화장실 다니기 불편해서 물마시는 것 마저 부담스러웠다. 낮에는 복도 걸상에서 잠깐씩 휴식하고 저녁이면 복도에 놓은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밤중에도 수도 없이 병실을 드나들며 환자들 상태를 보살폈다. 확진자 마씨 할머니는 원래 기관지 천식이 있는 환자인데 코로나 증상이 심각하였다. 기침이 심하셨는데 기저귀 교체하느라 밀접 접촉할 때면 그 기침으로 내뱉는 호흡에는 얼마나 많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섞였을까? 하는 상상으로 몸이 오그라질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주저 없이 환자를 돌봤다.환자 주변과 나의 몸에 소독약을 듬뿍 뿌려 철저히 소독하면서 하루에 5~6번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식사 시중들고 양치시키고 얼굴과 몸도 닦아 드렸다. 병실 부족으로 확진자와 미확진자가 격리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행이 식판만은 분리되어 나왔다. 확진자 김씨 할머니는 끼니마다 불평하면서 아예 식사를 거부하셨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뭐라고 달래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 할머니는 이미 감염된 줄도 모르고 확진자가 될까봐 매일 공포 속에서 떨고 있었다. 할머니한테 진실을 알려 드리면 충격을 받을까 염려되어 알려줄 수가 없었다. 나는 입맛 잃어가는 할머니를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면서 끼니마다 두유,뉴케어 등 간식을 챙겨 드리며 온갖 정성으로 살폈다.  보호자들의 강력한 항의에 확진자들이 전담 병원으로 이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진자가 끊임없이 나왔다. 박씨 할머니, 최씨 할머니, 조씨 할머니... 나이가 90이든 100세든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박씨 할머니는 사유가 밝은 분이다. 간호과에서 직접 양성 판정이 나왔다고 알려 드리면서 전담 병원으로 이송준비를 하라고 통지 했었다. 86세의 고령인 할머니는 10여년 신장 투석으로 생명을 연장해가는 장기 환자다. " 여태껏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야 편안히 낙을 누리고 살만 하니까 이게 무슨 세상이 왔는가 "하시면서 슬피 우셨다. 짐정리 하시면서 "치료 받고 돌아와 녀사님과 함께 있겠으니 내 침상을 꼭 지켜달라 "고 나의 손 잡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셨다. 나는 울컥하여 할머니와 함께 펑펑 울었다. 김씨 할머니는 7명 환자중 유일하게 미확진자로 남았다. 보호자는 매일 나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으셨고 여사님 너무 감사했다고, 할머니는 장기 환자인데 여사님 덕분에 지금까지 건강하셨고  코로나에도 걸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를 누구한테 맡겨야 할지 근심 걱정에 잠도 자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틀후 확진자들을  보건소에서 배정한 전담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이렇게 나는 14일이란 시간을 코로나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보건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보건소에서 보내준 방역 택시로 11월 19일 병원에서 탈출해 격리 방으로 옮겼다.  나는 2년반이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정들고 때묻은 텅 빈 병실을 쓸쓸히 둘러 보고  만감이 교차되는 심정으로 봉쇄된 병원문을 나섰다. 물리치료사 서선생님이 대기하고 있는 방역택시까지 바래다 주면서 "푹 쉬고 꼭 다시 오세요"라고 손짓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방역 택시를 타고 격리방으로 오는 동안  내내 슬픔의 눈물,비통의 눈물, 애처로운 눈물을 흘렸다... 치료센터에 갔다가 다시 나의 방으로 보내시겠고하신 보호자들과의 약속, "여사님 꼭 우리를 기다려줘야해." 하시던 할머니들의 절절한 목소리, 코로나에 걸려 고통스럽게 신음하시던 얼굴들이 나의 가슴을 허비였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음 아픈 추억으로,상처로 남았다.  나는 차 안에서 할머니들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 오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코로나와의 싸움은 힘든 싸움이고 긴 싸움이다. 우리 모두가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평범한 일상을 즐기며 사람마다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환한 얼굴로 웃는 미소로 사는 밝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중국-장춘호텔 격리방에서  2021년 12월 25일 동북아신문
17    변창렬시인의 디카시 모음 댓글:  조회:191  추천:0  2021-11-29
순간 포착과 시의 절묘한 만남 1. 아, 슬프다   넘어질 때 하늘은 어떻게 돌더나? 살아온 반경이더나 직경이더나   엄마도 그렇게 가셨다     2. 단풍   어떻게 번져졌을까 소문도 없이 퍼졌다   혼자 속달거리니 귀가 간지럽지 얼굴이 붉어질바엔 애당초 옮기지 말던가   3. 새총 햇빛이 고무줄이면 새는 탄알이고 과녁은 단풍이다   당겨라 시드는 마음을 향해 쏴라     4. 쉼터 천천히 마르고 있는 나이 야무지게 살았다는 말씀 한마디가 그늘에서 햇빛을 찾구나     5.시집살이 속이 타서 재만 남을 터 복장 터져 불만 뿜는구나     6.아메리카 이 쪽은 트럼프란 얼굴이고 저 쪽은 바이든이란 간판이다 서로 헐뜯어도 하나 같이 고약해 우리를 깔아 뭉개자는 심보라   뒤집어 놓으면 WC인 걸     7.아마추어 서 있어야 할 시가 읽은 후 머리속에 누워있다   두뇌에 저장된 책궤는 왜 시를 바로 세워놓지 못할까   그러니 쓴 시가 엉망인가   8.비상문   감옥문이라면 밀어야 하나 당겨야 하나 당신의 그 눈빛이 감옥인데     9. 길은 하나다 천당에 살기 싫어 돌아 올 때는 뒷걸음질로 내려오라 아직 못가본 사람도 많다   가겠다고 비는 자들 발밑이 계단임을 알고 있는가     10.비 보이 십오억짜리 아파트가 기울지 거꾸로 섰다 보면 바닥도 비스듬해 비뚠게 사는 거야       변창렬 약력: 재한조선족 중견시인, 재한동포문인협회 고문, 두만강문학상, 동포문학 대상 등 수상 다수.   동북아신문
16    [김선숙 수기] 친구가 울고 있다 댓글:  조회:271  추천:0  2021-11-24
나는 늘 한편의 글이 완성되면 친구 순희에 게 수정 아니면 제목을 부탁하군 한다. 오늘 도 예외없이 글이 완성되자 순희에게 수정를 부탁했다. 돌아온 대답은 심드렁했다.순희는 늘 내 글을 한글자라도 빠드릴세라 꼼꼼히 보고 서평 쓰 듯이 여차여차하다고  지적해주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결론 한마디 뿐이다. "괜찮은 것 같아. 투고해도 되겠어."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위쳇으로  방호복 차림의 사진한장 날아왔다.  '어~? 이거 뭐 지? ' 짧은 순간에 뇌를 스치는 수만가지의 추측과 불길한 예감에 떨리는 손으로 폰다이얼 을 눌렀다. 나는 다짜고짜로  "무슨 상황이야? 방호복은 왜?" 위드코로나 단계로 들어간후 요양시설들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나고 확진자수가 가 파르게 증가되고 있어 불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나는 민감해졌다. 나의 친구들은 모 두 간병일을 하고 있다. 요즘 같은  비상시 기에 우리는 아침에 서로 너희는 괜찮냐하는 문안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도 안녕하다고 했는데...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일주일전 병원에 코로나19 확진자 2명이 나왔고 이틀만에 확진 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병원은 코호트 격리 가 되였다. 코호트격리의 병원 분위기는 우리의 상상 그 의상으로 긴장하고 불안하다. 삭막함에 가까울 정도로 공포를 느낀다. 각 자 방호복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그 시각 부 터 격리대상자가 되어 담당병실에서 나와서도 안된다. 병원은 초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속 깊은 순희는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도 친구들이 걱정할가 일주일이나 아무렇 지도 않은양 문안만 주고 받으면서 버텨왔 었다.  나는 뭐라 위로해야 할지 할말을 못찾는데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순희가 오히려  나를 안심시킨다. 첫 확진자 나오고 열흘만에 간병인 30명중 20명이 감염되었고 순희가 맡은 병실에도 2명의 어른신이 감염되었다. 확진자가 전담병원으로 제때에 이송되 지 못하기에 확잔자와 미감염환자가 같은 공간에서 5일이나 함께 했다.어르신들이 치매를 다소 앓고 있기에 확진자나 미감염 자나 마스크를 씌워드리면 벗어버리고 종 일 썻다 벗었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식사와 배변배뇨 위생관리 및 체위변경등 모든 케 어에 밀접한 신체접촉을 하는 간병인에게 도 확진자가 속출할 수 밖에 없다. 슬프게 도 간병인은 감염되여도 제 위치에서 계속 환자를 돌봐야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코 로나 전담병원 간병인력의 부족으로 확진 자가  전원하면 간병인도 함께 전원해야 하 는 사실이다 . 확진자가 전담병원으로의 이송이 신속히 이뤄지지 못하고 코호트격리만 하니 미감 염자도 점차 코로나에 걸리게 되고 확진자 를 돌보는 간병인까지 감염이 확산되는 상황이다. 순희가 돌보던 6명의 어르신중 선 후로 5명이 감염되였다. 아무리 개인방역을 철저하게 할지라도 응암병실도 아니고 일발병실에서 확진자와 24시간 함께 하고 있으니 사실 감염에 무방비상태로 있다고 봐야한다. 병원 내부에서 확진자가 갈수록 확산되고 말그대로 아비규환  상태다. 확진 자와 미감염자를 한데  가두는  격리가 되 였다. 확진자와 24시간 노출되는 현장  간병인은 제대로된 보호장치도 휴식 공간도 없이 괜찮을 거라고 견디라고만 하는 상황, 병동은 전면폐쇄 됐고 확진자  증가하니 격리도 못 하고 간병인은 각자 자기위치를 지키고 일 을 해야 한다. 하여  확진된  간병인이 미확진 환자를, 미감염간병인이 확진환자를 돌봐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확진자와 분리된 휴식공간을 달라는 간병인의 항의에 복도에 의자 몇개를 붙혀놓고  쉴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요구하지 않아도 해결해야 할 사항인데도 항의 후 조치하는 걸 보니 도대체 방역지침과 간병인에 대한 인권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의문이 들었다. 순희는 아무도 간병인을 보호해 주지 않는 다는 생각에 설음이 북받쳐 나하고 통화하 면서 울먹인다. 야무지고 웬간해서는 감정 에  휘말리지 않는 대범한 친구인데 이때는 외롭고 슬프고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 교차 되면서 서러웠다. 친구의 울먹임에 나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었다. 방호복 입고 복도의 의자에 쪼그리고 누워있는 모습은 내 마음을 사정없이 때린다. 가슴이 시려 더는 견딜수 없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불안할까? 매사에 그토록 긍정적인 친구인데 순간순간에 몰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가슴이 뛰고 혈압이 올라 약 먹고 안정을 취해야 했다.뭐든 해야겠다. 친구와 그 동료들을 구축해야겠다. 경북 청도 대남정신병원의 비극이 지금 여기 요양 병원에서 재현되고 있다. 세상에 알려야 한다. 순희는 어쩔수 없이 확진자와 미감염환자를 같은 공간에서 수 일을 간병하였다. 확진자를 분리시켜 달라는 항의끝에 6일만에  확진자를 이송해 갔는데 또 한명이 감염되였다. 확진자를 분리해달라고 간호과에 요구해도 기다리라는 답변 뿐이다. 간호과장 을 찾아 항의 했다. "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확진환자를 분리 해 주세요." 까칠하고 매정한 간호과장의 쌀쌀맞게 톡 쏘는 말 "싫으면 나가세요." 너무 화가 났다. 친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씀 드렸다 . "이건 아니 잖아요. 이런 방역이 말이 되 냐구요" 지극히 정당한 요구인데, 확진자와  24시 간 접촉하고 지친 간병인에게, 안전도 보 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간병인 에게 하면 안 되는 말이다 .얼마나 황당한 지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 하실 거라 생각한다. 순희는 뒤통수에 냉수 퍼풋고 가슴에 비수가 꽂힌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에 분노 했다. 확진자까지 간병하면서 버티고 버텼는데 돌아온 답은 "가세요" 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눈 물로 지켜온 방역수칙이 이 병원에서는 처참히 무너져 간다. 아무튼 간호과장과 그렇게 싸우고 잠도 오 지 않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병원을 이탈하기로 하였다. 지속적으로 확진자가 발 생하는 상황에서 코호트격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불확실하고 병원측의 신속한 대응도 없는 상황이기에 코로나의 현장을 떠나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구역보건소 소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을 나가고 싶다 했다 .수 년을 희로애락을 함께한 어르신들 과 동료들을 뒤로하고 보건소에서 지정한 방역택시를 타고 사비로 마련한 격리 월세 방으로 옮겼다. 순희는 울었다. 2년6개월 보살펴오던 어르신들을 코로나 의 화염속에 남겨두고 혼자만 탈출하기가 미안하고 마음 아파서 서럽게 울었다. 어르신들을 끝까지 보호해 드리겠다는 보호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에 회한 의 눈물을 흘렸다.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을 떠나는 책임감의 무게를 뼈아프게  자책하면서  눈물로 폐쇄된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와서 격리 3일 째 되는 아침이 밝아온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착잡하다. 온통 격리된 병원 걱정 뿐이다. 눈감으면 전담병원으로 이송되면서 치료받고 올때까지 꼭 기다려 달라시던 금궤 할머니, 정신이 가물가물하면서도 애처롭게 바라보시던 시장할머니, 왜 가느냐고 손 잡고 놓지 않으시던 옥이할머니, 어르신들 생각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찡~함이 가슴 에 울린다. 치료센터에서 돌아오시면 어머니 꼭 돌봐 달라던 보호자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허빈다.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은 영옥할머니 보호자는 간병사가 열심히 돌 봐준 덕분에 지금까지 무사했는데 그만두시면 우리 어머니 어떻게 하냐고 발을 동동 거린다. 보호자의 애달픔이 전화기 너머에 서 귀를 때린다. 순희는 밝아오는 아침을 맞으면서 우리 어 르신들이 코로나를 이겨내고 건강하게 귀 원  하시기를 두손 모아 빌고 또 빌어 본다.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울다가는 기도하고 기도하다 가는 눈물 범벅이 되군 한다. 내 친구 순희는 눈물로 세상에 호소한다. 2021년 11월 22일  동북아신문
15    [수필]죽음의 여운 댓글:  조회:232  추천:0  2021-11-09
죽음의 여운 천숙    며칠 전에 내가 십여 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한국 할머니가 향연 84세로 영면하시였다. 그렇게 마음 고우시고 현명하시던 할머니, 첫 한국생활에서 외로움과 서러움을 가득 안은 나를 이해해주시고 위로주시던 할머니, 손자,손녀들앞으로 달마다 대학 학자금 저축을 해주시던 할머니셨다. 며느리도 딸처럼 이해해주시고  80세에도 봉사하러 다니시며 그렇게 즐거워하시고 행복해하시였다. 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늙어가리라 마음 속으로 다졌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에게도 한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친딸이 부모형제들과 거래를 끊고 산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 밖에 안되었을 때였다. 나에게 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할아버지는 예날 고속버스기사였는데 열심히 사셔서 자식 셋을 모두 명문대에 보내셨다고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재산문제로 딸과 모순이 생기면서 딸이 친정과 인연을 끊었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하면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페암으로 앓으시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명의로 되었던 집을 할머니명의로 이전해주시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딸은 아들에게만 재산을 넘겨주려고 그런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친정에 있는 자기 사진을 다 가지고 가면서 이제는 친정과 인연을 끊고 살겠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딸은 전화도 안받고 손군들도 외할머니의 전화를 못 받게 하였다. 할머니는 아들들을 더 생각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친어머니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아버지가 새 부인을 맞이하여 아들을 낳아 엄마가 괴로워하던 일이 자꾸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릴 때부터 남존여비사상이 생겼다고 하였다. 본인이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으니 너무도 대견스럽고 행복했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딸도 배아파 난 자식인데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는가면서 섭섭해하셨다.    할머니의 여동생을 통해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라고 하였다. 딸의 요구가 무엇인데요?라고 내가 물었더니 십 억이 넘는 집을 팔아서 작은 집으로 할머니가 이사를 가고 나머지는 자식들에게 분배해주고, 자식들이 달마다 할머니에게 생활비를 주면 되지 않는가고 했단다. 들어 보니 사위는 대기업에서 높은 직함을 가지고 있어 월급도 상당히 높았다. 할머니는 자식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할아버지의 피땀으로 산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고는 방을 세 놓아 자식들의 도움이 없이 생활하셨다. 알뜰살림으로 모은 돈은 손군들에게 대학 학자금 저축을 해놓으시군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퇴근하고 서울대병원장례식장으로 달려 갔다. 다행히 11월부터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거리두기 단계가 많이 풀리여서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적지 않았다. 두 아들며느리, 할머니의 여동생, 여동생네 자식들 모두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번도 본 적 없는 할머니의 따님만은 조문객들에게 인사도 별로 안 나눈채 한쪽 구석에 앉아서 소리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참회의 눈물일까? 애통의 눈물일까? 아니면 친정엄마에 대한 원망의 눈물일까?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공통된 특징은 누구에게나 흘려야 할 눈물이 있다. 눈물은 슬픔과 아픔, 감격과 기쁨과, 분노와 사랑 등 감정을 응축시켜 흐르게 하는 신비이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 아픔과 슬픔을 씻어내고, 눈물을 통해 감격을 더 풍성하게 터쳐 낸다.그러므로 우리가 흘리는 작은 눈물방울 하나에도 무수히 많은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그 눈물의 진정한 의미는 당사자 본인밖에 모르는 것이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벌써 변호사를 통해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놓았던 것이다. 세 자식 아들 딸 차별없이 유산을 똑같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었다.    논어에서는 효를 단순한 효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효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경우도 아주 드무나 오히려 논어의 주제는 仁이나 군자같은 존재라고 보고 있다. 공자는 효제가 인의 근본이고, 모든 도덕과 행실이 효제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하였다. 효는 부모에 대한 윤리이고 仁은 흔히 人과 二의 합자로서 두 사람의 관계를 뜻하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할 수 있는 원리가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맺는 것은 최초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이어서 형제간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의 시발인 부모와 형제간의 관계는 모든 윤리의 시발이고, 또한 인(仁)의 기초가 된다. 조선의 교육사 회고록의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 (기원전 372년) 때 공자의 사상이 전해졌고, 철학교육으로, 그 핵심은 인효 仁孝가 중심이 된 교육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인효사상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큰 수난을 겪게 된다.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교육정책이 우리 효사상의 원뿌리와 정맥을 자르더니 서구사상의 강한 파도가 밀려들어와 효사상과 노인공경사상을 흐려놓았다. 이로 인해 사회는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다.  가족끼리 희생이나 양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는 지나간듯 하고,  청소년 인성문제도 아주 심각하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단적으로 말해서 자녀양육의 원뿌리를 망각하고 조선민족의 전통사상의 정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국정과제와 교육정책의 방향은 "효문화와 인성"에 역점을 두어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보게 된다.   할머니는 긴 여운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과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부모로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행복은 무엇일까? 돈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천숙 수필가/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동북아신문
14    '무아지경' 외 2수 댓글:  조회:233  추천:0  2021-10-25
김경애 시인의 '향토문학대상' 시 작품, '무아지경' 외 2수 무아지경 작년에 쏘아올린 세월을 잡으려고  포물선만 그으며 따라왔다 한 장 한 장 떨어지는 달력은 이슬에 젖고 한숨에 마른다 벌거벗은 나무의 머리채 휘어잡고 빨간 소원 하나 매달려있다 첫눈이 펑펑 소리 없이 울면 시리다 못해 그대로 얼어버리겠지 두 팔 벌려 하늘을 안아본다 바람이 금세 잠이 든다 가진 듯 안 가진 듯 우는 듯 웃는 듯   조사钓师 그림 같은 저수지에 미끼 없는 낚시를 드리우고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토닥토닥 다듬이질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변덕이 낚시의 찐 묘미인데 대물을 낚아 보려다 세월을 더러 낚이는 도시어부 찌가 찡긋 윙크를 보내니 달님이 면사포 살포시 벗고 민낯으로 쌩글쌩글 웃는다 당길까 말까 밀당의 고수들 이슬에 젖은 뜰채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늙은 부시리가 혀를 홀랑 내밀고 꼬리 빠지도록 가물거린다 찌와 그림자는 바람 따라 춤추고 수면은 잠시 멀미를 한다   여유작작   새벽이슬 맞으며 나갔다가 길어진 그림자 밟고 들어와 한 달에 스물여덟 번쯤 설익은 잠 청하는 것이 대리 꿈의 시작이었던가 주방장 김 씨는 식당 주방에서 노가다판 이 씨는 공사장에서 청소 아재 박 씨는 길거리에서 가사도우미 최 씨 이모는 주인집에서 집 아닌 집에서 남의 꿈을 꾸고 있다 납부기한 지난 공과금 영수증과 지갑에 끼워 놓은 프로필 사진은 바람과 함께 날려 버리고 대림역 9번 출구 꼬치집에서 양다리 걸치고 막걸리타령이나 뽑아보자 「심사평」   김경애시인은 중국에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우리나라에 왔다. 녹녹치 않은 한국 생활이 그녀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나 보다. 한국에 와서 한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한국인들도 시 한편을 쓰는데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 나라에서 수십 년 동안 지내온 시인이 한편의 시를 길어 올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에서 제4회 애심여성 컵 은상을 수상하고 한국국보문학 시 ․수필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을 보면 시적 믿음이 간다. 보내온 시 중에서 무아지경, 여유작작, 조사钓师 등 3편을 읽으면서 사유의 폭과 깊이에 놀랐다. ‘무아지경’1연 ‘작년에 쏘아올린 세월을 잡으려고/ 포물선만 그으며 따라왔다’로 시작하는 시는 어조가 활달하고 내공도 상당하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공간은 독자의 마음을 잡아끌며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여러 시적 요소가 잘 버무려졌다. ‘여유작작’은 시인이 시를 쓰는 동안 잠시 생활의 여유를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여유는 휴식이 아니라 재충전의 기회다. ‘조사钓师’마지막 연 ‘찌와 그림자는 바람 따라 춤추고 / 수면은 잠시 멀미를 한다‘는 삶의 한 단편을 시적으로 잘 풀어냈다. 결국 시를 비롯한 모든 글들은 독자에게 위무와 위안을 줄 때 싱싱한 시라고 한다. 시인의 시들은 우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무릇 쓰고 써 강한 시인이 되기를 주문한다.   심사위원 : 가이아클럽 이사장 / 박광영 한국문학신문 대표 / 임수홍 울산광역일보 대표 / 유정재 글정리 : 정성수   ---   「당선 소감」 풍격을 살리는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1년 제15회 향촌문학 특별대상 수상자 / 김경애   제15회 향촌문학 특별대상에 당선되었다는 향촌문학의 정성수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나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등단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인에게 향촌문학 특별대상은 정말로 특별하게 과분한 상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끄적여 놓고 보여주니 다들 괜찮다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시도했던 것이 시작(詩作)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직 앳된 나의 시상들이 사랑과 관심의 손길에 이끌려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올 것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느닷없이 떠오르는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하는 습관이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늘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나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에게 감사하며 수상의 영광을 함께 한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나의 시를 발견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정성수 회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쓰라는 격려로 생각하고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만의 풍격을 살리는 개성 있는 시인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김경애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공동회장, 한국문예·한국시사랑문학회 부회장, 한국국보문인협회 사무국장, 중국 애심여성 민족공익발전기금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중국 제4회 애심여성컵 은상, 한국국보문학 시/수필부문 신인문학상. 동포문학 시 대상 등 수상.  동북아신문
13    제3회 재한조선족시화전 온라인편(1) 댓글:  조회:179  추천:0  2021-10-18
주최 : 재한동포문인협회,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후원: 재외동포재단, 동북아신문  
12    [여행기] 코로나시기 제주도 여행하기 댓글:  조회:188  추천:0  2021-10-13
코로나시기 제주도 여행하기  장문영 한국생활을 한지도 어언 15년째, 그동안 사는 게 뭐가 그리 바빴는지 그 흔한 제주여행 한번 못 갔었다. 코로나 때문에 방콕만 한 것도 너무 답답하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그동안 갈증도 풀어줄 겸 마침 홈쇼핑에 싸고 좋은 패키지여행상품이 나와서 7월4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생에 첫 제주여행을 다녀왔다.   장마 속에 떠난 여행 날자는 썩 전에 정해 놓은 것이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전날부터 때 이른 여름장마가 시작돼서 3일 저녁부터 온밤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래도 날이 밝으니 비바람은 좀 멈췄고 여행사에서도 별다른 통지가 없으니 강행하여 청주공항으로 떠났다. 오후 3시에 제주에 도착하니 다행히 날씨는 좀 흐렸지만 생각보다 선선해서 여행하기 딱 좋았다. 제주공항은 의외로 아담하고 우리 고향의 작은 공항처럼 스텝 카(계단 차)로 내려와 버스로 공항대기실로 이동하는 시스템이었다. 가이드언니를 만나 버스에 타니 어제 밤 태풍 급 바람이 불어 첫 번째 일정인 한담 해안 산책로는 낙석으로 길이 막혀 취소되고 바로 두 번째 일정인 수목원 테마파크로 갔다. 거기에는 아이스뮤지엄,3D착시아트,5D영사관,VR등 여행객들에 맞춤 상품인 듯한 실내 테마파크였는데 사진 예쁘게 나올 포토 존을 많이 꾸며 놓아 사진을 실컷 찍었다. 지하1층에 얼음조각 몇 개랑 얼음 미끄럼틀 두 줄 만들어 놓고 아이스 뮤지엄이라고 하는데 세계적인 빙 등의 고장에서 온 우리에게는 완전 소꿉장난 같았다. 제일 기대했던 일정이 수목원 테마파크 일대의 야시장 돌기였는데 야시장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가장 싸고 다양하게 본지의 미식들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정작 가보고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도에서 관광활성화 차원에서 청년실업자 지원용으로 푸드 트럭으로 한 개 거리를 조성해 야시장 같은 효과를 내려 하였는데 코로나로 관광객이 뚝 끊기다 보니 하나 둘 철수를 하고 푸드 트럭 대여섯 개 남았는데, 그것도 영업은 두어 개뿐. 상황이 이해는 되지만 TV에서 본 대만 같은 야시장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다.   바오젠 거리와 일회용품근절한 호텔  저녁식사로 전복 뚝배기를 먹고 우리가 묵을 에어시티호텔로 향했다. 가이드분이 여기는 관광한류와 숙박, 쇼핑, 문화의 중심이라고 소개하면서 제주시중심인 호텔주위로 중국 회사 이름을 딴 차이나 거리-바오젠 거리가 있으니 호텔에 짐을 풀고 주변을 둘러볼 것을 추천해 주셨다. 푸실푸실 비가 내리는 밤거리에는 사람들 한두 명 보이고 길가의 곱창집이나 돼지고기 가게에만 한두 테이블의 손님이 있을 뿐, 기념품가게나 카페에는 직원들만 지키고 있었다. 한 때는 엄청난 중국관광객들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는 이곳–바오젠 거리는 중국 회사들에서 1년에 한번 최우수사원들에게 주는 보상휴가로 제주도가 인기 있어 무려 일년에 30만 명이 최우수사원들이 다녀가자 제주시에서 더 많은 중국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이 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 오는 거리를 한참 걷다가 어떤 중국식품점이 보이길래 반가워서 들어서는데 "환잉꽝린(欢迎光临)"하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중국어로 인사를 한다. 서울이나 경기도 인근 중국식품점은 오히려 중국어로 인사를 잘 안 한다. 많이 한국화 되어 있다는 증거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나마 중국 향수를 일으킬 만한 물건들이 잔뜩 진열된 중국식품점에서 할빈훙창이랑 산초닭발이랑 챠챠해바라기, 청도맥주 등을 사가지고 호텔로 돌아와 한잔하면서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밤을 만끽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누구도 얘기하지 않아서인지 내가 몰랐었던 것인지 제주도호텔에는 칫솔, 치약, 면도기 이런 일회용품을 제공하지 않는 단다. 농수산물재배와 여행업에 의존하는 제주도에서는 연간1500만 명의 관광객들이 배출하는 쓰레기들을 줄이려는 목적이다. 다행히 호텔로비에 작은 편의점이 있어서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요트와 더마 파크 이튿날 아침이 되니 엊저녁부터 불어친 바람 때문에 비구름은 싹 몰려가고 일정대로 샹그릴라 요트투어를 떠나게 되었다. 일정에는 바다낚시도 있었는데 파도가 세서 취소했다. 평소 버스 타고 서울 한번 가려고 해도 멀미 때문에 고생하는 내가 감히 이 큰 파도에 배? 그것도 흔들림이 유난히 심한 요트를 탈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때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전날부터 멀미 약 준비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실제로 3분의 2 시점에서 좀 울렁였지만 참을 만 했다. 그 후 일정인 더마 파크는 제주도 여행의 인기코스중의 하나인데 많은 분들이 다녀간 후기를 읽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재미있었다.10~20대 몽골 소년소녀들이 말 위에서 고난도 기예를 펼치고 광개토대왕의 이야기를 스토리로 엮어 뮤지컬공연을 해서 아주 흥미진진했다. 오랜만에 현장공연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됐다. 앳되고 풋풋한 젊은이들이 먼 이국 타향에 와서 열심히 하는 모습들이 웬지 안스럽기도 하였지만 칭기즈칸의 후예답게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들이 너무 멋지고 대견했다   천년의 숲과 승마체험 3일째에는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 승마체험과 비자림이 제일 인상 깊었다. 탐라 승마장이란 작은 간판이 있는 주차장에 내리자 사람들이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는 지인의 집에 갈 때마다 빨간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본 게 생각났다. 그 전형적인 제주도여행 기념사진들은 여기서 찍은 것들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마스크를 쓰라고 강조하는데 여기서는 말이 놀랄까봐 마스크를 옷깃 속에 숨기란다. 망설이다가 이것도 언제 또 해보겠나 싶어서 용기내서 타봤는데 처음에는 엄청 긴장되더니 조금 지나니 점점 재밌고 신났다. 하루 종일 손님들 태우고 같은 코스를 돌고 도는 말들이 좀 안쓰럽기도 했지만 자기이름을 부르니 알아듣는 것도 신기했다. 다음은 천년의 숲–비자림으로 향했다. 세계 최대 비자나무 자생 군락지이며 834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의 선조들과 함께 온갖 풍상을 이겨낸 최고령 비자나무이자 국내의 다른 비자나무와 제주도 내의 모든 나무 중 최고령 목인 새천년 비자나무, 지역의 무사 안녕과 희망과 번영은 물론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건강과 행운과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새천년 비자나무를 에돌아 나오는 이번 코스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 숲 속에서 밟고 다니는 탐방로는 송이(Scoria)로 되어 있었다. 송이는 제주도 화산 활동 시 화산 쇄설물로 알칼리성의 천연 세라믹이며 제주를 대표할 수 있는 지하 천연자원이다. 송이는 천연상태에서 원적외선 방사율이92% 탈취율이89% 수분흡수율10% 항균선이99% PH7-2로 알칼리성의 천연 세라믹으로 인체의 신진대사 촉진과 산화방지기능을 지녔으며 유해한 곰팡이증식을 없애주어 새집증후군을 없애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수분을 알맞게 조절하여 화분용 토양으로도 많이 쓰인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밟고 숲 속의 맑고 청량한 공기를 한껏 마시니  금방이라도 몸속의 나쁜 것들이 깨끗이 없어지는 듯했다. 비자나무는3~5미터의 아름드리 키 큰 나무 임에도 나무 가지들이 곧은 것이 없이 다 꾸불꾸불 얼기설기 엉켜 숲 공간이 아주 크고 환상적이었다. 숲 속을 걷노라니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나오는 숲 속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몽환적이고 멋진데 카메라로 아무리 찍어도 실제 그 느낌을 담을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정부에서는 숲을 보호하기 위하여 원래는 1일 관람 인원 제한 1800명이였는데 우리가 가기 이틀 전에 제한이 풀려서 오후에도 갈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니면 아침부터 선착순으로 1800명이 금방 차버리기에 오전방문은 필수라고 한다. 주변에는 맨발로 흙을 밟아보는 분, 두 팔을 벌리고 온몸으로 숲이 주는 정기를 다 받으려는 듯 천천히 숨쉬고 음미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다. 우리는 피톤치드를 맘껏 마시며 걷다가 숲 가운데 제일 최고령인 새천년 비자나무 있는데 까지 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돌아 나왔다. 숲 여행에서 힐링을 하고 바다 가 해녀들의 해산물 직판 식당 “동복해녀잠수촌”으로 갔다. 해녀 분들이 문어, 소라, 한치, 자리돔회 등을 썰어 놓는 대로 갖다 먹고 계산하는 시스템이어서 우리는 여행사에서 미리 주문한 전복죽에 문어회 한 접시를 더 갖다 먹었다. 평소 잘 안 먹던 문어라서 우리는 몰랐는데 다른 테이블의 아줌마들이 집에서 데치면 절대 이런 맛 못 낸다면서 감탄하시면서 드셨다. 식사 마치고 바람 부는 해변가에서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제주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여행을 마치며 이번 여행에 특히 고마웠던 것은 바로 떠나기 하루전부터 장마가 시작됐다고 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잘 참아줘서 가족들과 친구들이 장마철이라서 힘들겠다고 하는 문안전화가 무색할 정도였다. 또 하나는 우리를 인도했던 가이드언니, 제주도 토박이로 43세인데 22살부터 가이드일을 하셨다고 하니 경험도 풍부하고 제주도의 지리, 풍토, 언어, 전설, 주요 관광지, 특산품 등 해박한 지식으로 오가는 길 버스안에서 많은 풍토문화들과 제주도관련정보들을 알려줘서 고마웠다. 오래동안 해온 일이고 힘들고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이번 코로나로 인해 너무 많이 쉬어서 너무너무 손님들이 그리웠다고 하면서 일이 없어서 알바로 밀감 따러 다녀보니 자신의 천직이 가이드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분을 보니 웬 지 나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해서 씁쓸했다. 코로나 시기에 이런 고충을 겪는 분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제주도 사람들은 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옛날부터 사람을 낳으면 서울에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곳곳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는 말들도 많이 보였고 말의 온몸에 버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칼슘과 구리가 풍부해 골다공증에 좋다는 말뼈 환과 신경통, 관절염에 특효라는 마골환, 한때 엄청나게 인기있었던 마유등 제품들과 말고기전문식당이며 말가죽벨트,말가죽핸드백 등 말 관련 다양한 제품들도 있었다. 누군가 여행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남이 살던 곳으로 가서 돈 쓰고 구경하다가 다시 자기가 살던 곳으로 와서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란 글을 본적이 있다. 여행중에 엉덩이 의자를 달고 고추 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늘이 나에게는 평생에 처음인 신나는 제주도여행이지만 저분들은 이것이 평범한 일상 일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7월6일까지 700명이던 확진 자수가 7월7일 집에 온 이튿날부터 1200명을 넘더니 연이어 4일째 1200~1300명 대라 수도권에는 사회적거리두기 4단계 시행결정이 내려졌다. 제주를 포함해서 주요관광지에 조금씩 시작되던 여행객들의 움직임이 또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그 틈바구니사이에 마침 다녀온 제주기행을 쓰면서 또다시 외출을 자제하고 외부활동을 자제해야 하는 이때 여행이나 휴가를 못 떠나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대리만족이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끝으로 금방 배운 제주도 사투리로 인사 한 마디 남긴다.  ”여행사 냉 바리(시집간 여자)폭삭 속았 수다(수고하셨습니다)” 출처 : 동북아신문(http://www.dbanews.com)
11    [수필]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댓글:  조회:223  추천:0  2021-10-11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천숙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많은 동물과 식물들도 물이 풍부한 것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때론 물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물을 다스리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세상은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것일까? 강물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남송(1127~1179)시대의 궁중화가였던 마원(馬遠)이 그린 ‘황하역류’는 8백 여 년 전의 쓰나미 현장을 보고 있는 듯 생생하다.  황하는 세계 4대 문명 황하문명의 젖줄이었고 중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부터 홍수피해가 심했다. 황하의 홍수로 인해 3년에 한번은 둑이 터지고 그 토사가 쌓여 강 상류로 물이 역류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문에 파충류가 극성하여 사람들은 지상에 살지 못하고 나무 위나 동굴에 집을 짓고 살았다. 화가가 살던 남송시대까지 강가에 산 사람들이 홍수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 그림은 자연을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한 역사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 신화에는 ‘곤鯤’과 ‘우禹’가 물을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들의 치수(治水)방법은 전혀 달랐다. ‘곤’이 선택한 치수방법은 흙으로 둑을 쌓는 것이었다. 아무리 둑을 높게 쌓아도 폭우가 한번 쏟아지고 나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지면 쌓고 무너지면 또 쌓는 일을 9년이나 되풀이 했지만 결국 치수사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한다. 馬遠 [황하역류] 비단에 연한 색. 26.8×41.6cm 송나라. 북경 고궁박물관 소장 그다음 해결사로 등장한 사람은 곤의 시신에서 튀어나온 용이 변해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의 사나이 ‘우’이다. ‘우’는 치수사업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답게 오로지 치수에 매달렸다. 흙을 나르고 도랑을 파느라 손발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정강이는 털이 날 새가 없어 반질반질했다. 오죽하면 1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을 정도였을까. 결국 ‘우’는 갖은 고생 끝에 치수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다. 똑같은 물을 다스리면서도 ‘곤’은 실패하고 ‘우’는 성공했다. 이유는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곤’은 무조건 흙으로 물을 막으려고 만 했지만 ‘우’는 달랐다. 그는 억지로 물길을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물길을 타서 흘러가게 했다. 물길을 분산시켜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현명한 ‘우’는 사람이 함부로 자연에 대항하여 맞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흐르는 물과 같다. 억지로 강요하면 황하가 역류하듯이 역반응을 보일 수 있다. 마음도 길을 내야 한다. 그 길은 감동을 주고 설득을 시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길이다. 그 물길 중의 하나가 역지사지이다. 그리고 진실이란 물길을 내야 만 이 마음이 강둑을 넘지 않고 흘러갈 수 있다. 천숙 약력 : 중국 벌리현 교사 출신. 집안 심양 등지에서 사업체 운영, 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동북아신문
10    채국범의 중편소설 '노크' , 외 김경훈의 소설평 댓글:  조회:398  추천:0  2021-10-09
김경훈 소설평 : 아픔으로 커가는자의 쓸쓸함의 두 경우 본지는 ‘한중작가 문학특집’으로 채국범의 중편소설 '노크', '섬 속의 섬' 과, 그에 대한 평을 싣는다. 채국범은 최근에 들어 꽤 많은 중편단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조선족 소설문단의 주목을 끌면서 조선족 문단의, 젊은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 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 발표한 두 편의 중편소설을 읽노라면 우리는 기존세대 조선족 소설가들과 다른 소설풍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일단 소설의 서사나 묘사 등 소설기법이 자연스럽고 디테일해서 재미있는 만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일본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의 방식과 비슷하다. 또, 비교적 엄밀한 구성에 주제를 파고 드는 깊이가 보인다. 김경훈 평론가는 그의 ‘노크’를 평할 때 “(그의 소설은)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가장 은밀하면서도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와 이어진 소외화 그에 따른 여러가지 고민들을 다루고 있어서 그동안 외면하고 무관심하기 일수였던 그들의 내밀한 아픔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이해를 가지도록 만들어 한번 정도는 곰곰히 그 가치를 따지도록 촉구하기도 했다”고 했고,, 리태복 평론가는 그의 중편소설 ‘섬속의 섬’을 평할 때 “작품의 전체적 구조가 탄탄하며 사건 서술의 구도에서 저자의 능란한 솜씨가 돋보인다. 또한 사건의 디테일과 거시적 사회변화의 접목이 자연스럽고 언어감각도 뛰여나다. 무엇보다도 스토리의 전개에서 사실성과 개연성을 잘 융합시켰기에 리얼리티와 취미성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차원에서 저자의 높은 기량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고 말했다. 채국범의 소설가가 더욱 탄탄한 소설들을 내놓기를 바라면서, 이번에 실린 소설들은 중국조선족 문법대로 두고 게재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편집자-   채국범 프로필: 연변대학 일어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회원. 2002년《연변문학》 9기에 처녀작 시 를 발표. 2007년 시 로 제27회《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 신인상 수상. 2016년 중국로신문학원 제26기 소수민족문학창작반 수료. 2018년 제8차 전국청년작가창작회의 대표. 2018년 중편소설 로 제37회 《연변문학》문학상 수상. 그외 소설 , , , , , 등 발표. 현재 연변작가협회에서 근무.   중편소설                                          노크      1 나는 다시 그녀의 집 문 앞에 서있었다. 상황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머리속에 되살아나면 마지막에 가선 항상 그 아파트가 떠올랐고 이어서 101호라고 표시된 문과 그 앞에 서있는 나 자신의 옆모습이 보였다. 몇번인가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번마다 망설이며 다시 내리웠다. 또 한번 천천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녀에 대한 기억의 엔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 엔딩은 나의 눈앞을 무한반복이 되여 끊임없이 지나간다. 나는 끝끝내 노크를 하지 않았다.   똑똑똑 이사짐을 넣은 좋이박스를 뜯다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오늘밤은 열시부터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오전내로 집정리를 끝내고 이내 자야 했기에 나는 때 아닌 노크가 썩 반갑지 않았다. “누구세요?” 문을 열고 보니 상대 쪽 얼굴보다 시선에 먼저 들어온 건 눈썹 우까지 꼭 눌러쓴 회색 롱비니모자였다. “안녕하세요?  오하라 사크라꼬(大原樱子)예요.” “네, 안녕하세요. 사이(蔡의 일본어발음)라고 불러요.” “사이? 외국 분이세요?” “네, 중국에서 왔어요.” 그녀는 집안을 힐끔 곁눈질해보더니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춰올리며 호기심이 동한듯 물었다. “금방 이사왔어요? 저는 101호에 살아요.” “미안해요.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 하는데...” “괜찮아요. 아, 이거 마셔요.” 그녀는 록차가 들어있는 페트병을 쑥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나는 엉겹결에 받아쥐고는 어리둥절해 서있었다. “요 앞 자판기에서 뽑은 거예요. 시원해요.” “아, 네, 고마워요.” “오늘 날씨 참 덥죠? 벌써 30도가 넘는데요.” “그러게요. 정말 찌는 것 같아요.” 덥지 않으세요? 나는 하마트면 물어볼 번했다. 그녀의 비니모자가 참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사 온 내가 먼저 이웃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례의인데 상황은 바뀌였다. 나는 페트병을 손에 쥔 채 속으로 사크라꼬가 그냥 인사하러 온건지, 반가워서 그러는 건지, 호기심 때문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보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는 건 서투른 인사가 아닌 뜻밖의 부탁이였다. “저기, 부탁 하나 있는데요.” “네? 뭔데요?” “이 부근에 길고양이들이 욱실거려요. 그중 한쪽 눈이 까만 얼룩이가 우리 아파트에 자주 와요. 뭐 큰일은 아니구요, 시간날 때 여기 접시에 먹이를 좀 줄 수 없을가요?” 그녀는 저가락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문밖에 놓여있는 세탁기 옆을 가리켰다. 나는 머리를 들어 문 옆마다 놓여진 세탁기를 한번 훑고는 그녀한테 눈길을 돌렸다. 새로 든 세집은 신쥬크구(新宿区, 도쿄23구역중 하나)의 다카다노바바(高田马场)역에서 서쪽으로 걸어 십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일본4대명문대학의 하나인 와세다대학교 (早稻田大学)도 이 근처에 있어 부근에 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인지 방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한편이였다. 기숙사형으로 지은 아파트는 2층으로 되였고 각층에 방이 세개씩 있었다. 사크라꼬는 101호, 나는 103호였다. 방마다 한대씩 배치된 세탁기는 현관문을 열고나면 곧바로 옆에 있었다. 나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자리가 왜 하필 우리 집 문 앞인지 리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나의 의혹을 눈치 챘는지 인츰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 이 집에 사셨던 분이 고양이를 챙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먹이를 찾으러 올 때마다 이 집 앞에서 울어요. 그분이 간후로 제가 챙기고 있는데 가끔 먹이를 주는 것을 까먹군 해요. 길고양이들이 참 불쌍해요. 그렇죠?” 일본사람들은 거지에게 돈을 주지 않을지언정 고양이에게는 먹이를 준다고 한다. 회사의 정사원이 아니더라도 아르바이트로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하고 열심히 일하면 심지어 수입도 일반회사원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하기에 그들은 거지는 게을러서 궁핍하지만 동물들은 인간의 보살핌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고 여기는 습관이 있다. 그녀는 고양이밥주기에 동참해달라는듯 간절한 눈길로 바라보았고 나는 자신에게 별로 관심 없는 일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거절에 약한 성격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알겠어요. 시간날 때 저도 줄게요.” “고마워요.”      사크라꼬를 만난 건 6년전 여름이였다. 그해 봄에 일본에서는 기상관측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모멘트 9.0으로 추정되는 이 지진은 미야기현(宫城县, 중국의 성에 해당되는 행정급별) 동쪽에 떨어져있는 부근해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사실상 도쿄에서도 강한 진동이 관측되였다. 지진발생 한달전, 나는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신쥬크의 한 편의점에서 야간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밤 열시부터 이튿날 아침 여덟시까지 일해야 했기에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부엉이처럼 일어나 일만 했다. 내가 살던 세집은 12층이였고 지진은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안되여 일어났다. 집이 통채로 흔들리며 주방과 욕실에 올려놓은 물건들이 한순간에 바닥에 떨어져 요란을 피우던 소음들이 아직도 내 귀전에 또렷하다. 그 일이 있은후 나는 여기저기 방을 알아보던중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1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였다. 오래동안 나는 가끔 아무 영문도없이 그녀의 모습이 갑작스레 눈앞에 떠오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자신한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을가? 우리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가? 인간관계의 토대는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질문들은 나로 하여금 당시 자신의 행동의 근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그만큼 그녀와의 만남은 나의 머리속에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회색 롱비니모자를 꾹 눌러쓰고 고양이를 부탁하던 첫 만남이였다.   2 이사를 온후에도 나는 줄곧 밤에만 일하러 다녔다. 편의점 일은 쉬운 듯 했으나 세심하고 꼼꼼히 체크할 조목들이 엄청 많았다. 특히 야간작업은 상품수가 상당히 많아 더 번거로웠다. 점원 두명이서 몇백가지 상품들을 종류별로 나누어 하나하나 개수를 체크하고 정리, 정돈, 진렬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그 와중에 식품폐기물을 찾아내 컴퓨터에 등록하여 재료를 작성하고 신문이나 잡지, 택배업무, 레지점검, 각종 청소, 그리고 아침이면 전체 상품에 관한 재고관리와 발주까지 하고 나면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이상한 손님들을 만나 생각지 못한 트러블이나 클레임이 생기면 잔업하기가 일쑤였다. 잔업비는 지불받기에 손해 보는 건 없지만 밤을 새가며 열시간 일한 뒤 또 잔업을 하자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편의점에서 일한 지 반년 쯤 됐을 무렵에 바로 그런 일이 한번 생겼다. 8월의 도쿄날씨는 말 그대로 찜통이였다. 청량음료와 맥주는 일년중 최고매출액을 기록하였고 사람들은 고된 하루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맥주 한두 캔씩 사는 걸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손님들중에는 맥주를 사는 척하면서 점원 몰래 슬쩍 훔쳐 달아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위 좀도둑이라고 보면 되는데 일본말로는 “만비키”라고 불렀다. 그 사람은 20대의 남자손님이였다. 그는 맥주코너 앞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다른 손님들이 카운터에서 돈계산을 하는 틈을 타서 맥주 두 캔을 스포츠가방에 몰래 집어넣었다. 서너명의 손님들이 카운터에 줄을 서있었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는 또 손을 뻗었다. 서너 캔을 더 훔친후 담이 커졌는지 돌아서서 안주거리까지 쓱 채갔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과 눈길은 카운터 쪽에 고정한 채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단지 손만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나는 사무실의 모니터로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다. 모니터 옆에는 그 남자가 전에 한번 왔을 때의 모습을 프린트해놓은 종이가 붙어져있었고 여백에는 점장이 “주의인물”이라고 써놓은 글자도 함께 적혀있었다. 그는 아마 상습범인 것 같았다. 작업을 마친 그는 들고있던 가방을 천천히 메더니 별로 살 물건이 없다는듯이 고개를 저었다. 카운터 앞을 지나 능청스레 다른 한 점원인 야마모토(山本)에게 인사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나는 유니폼을 벗고 슬그머니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대여섯발짝을 걸은후 재빨리 달려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손님, 가방 안을 한번 봅시다!” “뭐야? 내가 도둑질했다는 거야?!” 흠칫 놀라는 그의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가방을 품속에 끌어안으며 나의 제안을 거부했다. 나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멱살을 잡아 다짜고짜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사무실에 가두어놓았다. 가방 안에서 캔맥주 다섯개, 아몬도 두봉지, 오징어, 포테토칩 등등이 나왔다. 전화 받고 달려 온 경찰도 도리머리 흔들더니 코웃음을 쳤다. “크, 한잔 톡톡히 하려고 작정했군. 이 안주를 고른거봐.” “도둑질한 거 아니예요. 돈 내려고 했단 말이예요.” 그 남자는 부끄러운 내색도 없이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전혀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쥬크경찰서로 끌고 갔다. 뜻밖에 나도 함께 가야했다. 도둑을 붙잡아 신고한 사람이 나였기에 같이 가서 조사에 협조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어쩔수 없이 야마모토한테 가게를 맡기고 경찰차에 합승했다. “조사 금방 끝나죠?” 가게납품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한 목소리로 경찰에게 물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처럼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 그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승인하지 않았다. 돈을 계산할 생각이 있었지만 한순간 깜빡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경찰들도 편하게 업무를 끝내기 위해 자기절로 죄를 승인하라고 유도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다른 독방에 들어가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하며 당시 상황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였고 경찰은 내말을 문자로 작성하여 컴퓨터에 입력하였다. 벌써 한시간이 지났다. 결국 형사가 직접 나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십분도 안돼 그는 순순히 자기 범행을 승인했다. 마지막으로 경찰이 나에게 한마디 물었다. “합의 보시겠습니까? 기소하시겠습니까?” “태도를 보니 안되겠어요, 기소하겠습니다.” 내가 가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두시가 넘은 뒤였다. 경찰서에 족히 두시간은 있은 것 같았다. 그사이 상품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야마모토는 손님이 올 때마다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할라니 혼자서 품목을 체크할라니 해일처럼 밀려드는 일거리에 팽이처럼 돌아치고 있었다. 나는 야마모토한테 경찰서에서 있을 일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나서 들어가 좀 쉬라고 하였다. “쓸데없는 일에 왜 끼여들어?” “왜라니?” “거 봐, 경찰 부르니까 얼마나 시끄러운가. 주말이라 손님도 많은데... 아침에 또 잔업하게 생겼잖아.” “그래서 못 본 척하라고? 그놈 한두번도 아닌데...” “물건만 되찾으면 됐지. 시끄럽게, 에이 정말!” 야마모토는 퉁명스레 둬마디 하고는 사무실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자기 리익에 손해 보는 일이 없기에 그냥 강건너 불 구경하듯 대충 넘어가도 된다는 태도에 나는 그닥 놀라지 않았다. 야마모토랑 처음 야근을 했던 그날의 대화가 생각났던 것이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막 나가려는 나를 그가 불러세웠다 “왜 그리 급해? 아직 오분 남았잖아.” “먼저 나가 준비하면 좋잖아?” “먼저 나간다고 누가 고마워하지않아. 자기 시간만 지키고 자기 일만 하면 돼. 알았지?” 그 뒤로 나는 야마모토와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하기엔 메마르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고 멀리하기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필요한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는 항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수온을 유지했다.   3 나는 그 가게에서 일하면서 모두 두명의 도둑을 붙잡았다. 다른 한 사람이 훔친 물건 값은 겨우 200엔 밖에 안되였다. 그건 아사히표 캔맥주 하나 값에 불과하였다. 전에 그 남자가 훔친 4000엔어치의 물건값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이없었다. 나는 하도 한심해서 이 정도 훔치고 붙잡힐 거면 차라리 사는 게 낫겠다고 푸념했다. 아직도 그 사람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 같다. 사무실에 끌리워가서도 어떤 후과가 초래될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듯 담담하던 그 얼굴을 말이다. “이젠 마스크를 좀 벗죠?!” “화분증이 심해서...” 화분증(꽃가루가 점막을 자극함으로써 일어나는 알레르기. 결막염, 비염, 천식 따위의 증상이 나타난다.)은 일본사람들의 국민병이기도 하다. 네명중에 한명이 이 병으로 시달리고 있을 만큼  4, 5월이 되면 환자들이 부쩍 늘어난다. 그런데 지금은 여름도 거의다 지나가는 계절이 아닌가! 나는 화가나서 손을 뻗쳐 마스크를 확 벗겼다. 곧 당황했다. 그 사람은 바로 사크라꼬였던 것이다. 그제야 빼앗은 물건을 다시한번 확인해보니200엔 밖에 안되는 고양이 먹이감이였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도 얼굴색 한번 바뀌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목석마냥 서있었다. 순간 망설여졌다. 경찰서에 전화해야 할 타이밍에 나와 그녀 사이에는 찜통같이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야마모토는 마침 휴식시간이여서 밥 먹으러 가고 가게에 없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올리다보며 야마모토가 돌아올 시간을 체크했다. 그가 돌아오면 또 뭐라 투정질 할 게 뻔하였다. 모름지기 저번에 도적사건 때문에 잠이 꼴똑 찬 두눈을 집어 뜯으며 아침까지 세시간이나 잔업하던 일이 눈 앞에 떠올랐다. 나는 어느새 이 일이 나에게 미치는 불리한 상황들을 찾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아마 그 어떤 핑게를 찾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경찰서에 보내지 않고 그냥 돌려보낼, 자신을 설득할수 있는 그럴듯한 핑게를 찾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보내달라고 애원하길 바랐다. 나 절로 보내주기엔 그런 자신이 납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그녀가 바보처럼 여겨졌고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시간은 일분일초 흘렀다. 갑자기 모니터에 야마모토의 얼굴이 언뜰거리더니 익숙한 몸집이 눈에 띄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그녀를 사무실에서 끌고 나왔다. 야마모토는 스마트폰을 훑어보다가 카운터로 향하는 우리와 시선이 마주쳤다.다행이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그냥 사무실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상품을 등록하고 값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애써 서로의 눈길을 피했고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다가 그만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급히 주어 500엔짜리 동전을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 총망히 그 자리를 떴다. 그 일로 우리는 당황한 이웃이 되었다. 어색한 건 물론 이제 우연히라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그녀는 어떤 심정일가? 나처럼 놀랐을가? 부끄러웠을가? 고마워하든 미워하든 나는 우리 사이에서 오래동안 그 “당황”이란 두 글자를 빼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이 나에게도 없었던 건 아니다. 학교 다닐 적에 싫어하는 과목을 시험 볼 때마 머리가 복잡해나군 하였다. 그때 어느 과목을 시험보고 있었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에 대충대충 공부를 했던 나는 손바닥보다 더 작은 종이에 깨알 만한 글자를 빼곡이 적은 답안지를 작성해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운 좋게 답안지에 있는 문제가 나올 때마다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그 기쁨은 아주 묘한거였다. 긴장과 흥분과 자극이 한데 어우러져 짜릿함이 전신에 감돌았다. 시험장에는 감독선생님과 밖에서 돌아다니는 순시원선생님이 계셨다. 순시원선생님은 학교의 령도자들이였기에 그들이 시험장에 들어올 때마다 감독선생님들도 긴장해하군 했다. 그런 가운데 나의 부정행위가 그만 감독선생님한테 들키고 말았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했다. 손에는 땀이 바질바질 났고 쥐고 있는 연필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뜻밖에 감독선생님은 깨알같은 글자가 가득 적힌 답안지를 재빠르게 자기 손 안에 움켜쥐고는 모르는척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듯이 서너발작 떨어져있는 순시원선생님과 별로 요긴치 않은 얘기들을 나누며 그들의 주의력을 흐트려놓았다. 그후로 나는 아무리 싫은 과목이라 해도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특히 그 감독선생님의 과목에는 더 많은 정력을 몰부었다. 하지만 매번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때면 나의 눈길은 더 이상 앞을 응시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미리 예습을 해둠으로써 언젠가 나에게 어떠한 질문을 던져도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게끔 자신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번도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후회스러웠다. 더욱 고통스러운 건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선생님과의 불편한 관계였다.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한번도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시험장의 부정행위에 관련해서도. 우리는 사생관계에 무슨 색감을 더 섞었을가?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여러가지로 분석해보군 한다. 자기의 학생이 순시원선생님한테 들키는 것을 원치 않아서, 내가 불쌍하여 측은지심 때문이라고 추측을 하는 한편 반대로 나의 부정행위로 자신의 감독직책이 제대로 리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발각될가 봐 책임회피를 하려고 막아준거라고 나는 나의 수치심을 잠재우려 하였다. 하지만 내가 그 사실에 혼자만의 리유를 붙여놓는다는 자체가 벌써 수치심이 깨여나있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어떠할가? 수업중에 항상 준비하고 있는 자신에게 질문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녀도 내가 그 어떤 방식으로 다가감으로써 당황한 이웃에서 그 “당황”이란 두글자를 빼려고 하는 걸가? 그렇다고 그것이 지워질 수 있는걸가? 나는 아직도 시험장사건이 머리속에 생생한데...   4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밀고 갔다. 가게도 집도 모두 신쥬크구역에 있었다. 골목길에 들어서서 집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그녀와 마주치지 말기를 바랬다. 내가 살고 있는 103호는 아파트 안쪽에 위치해 있기에 반드시 그녀의 집앞을 지나야만 했다. 작고 아담한 유럽풍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전거를 세우는 곳이다. 열쇠를 다 잠글 때까지 될수록 소리를 작게 내느라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는 방음처리가 잘되지 않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들리는 티비소리, 주방에서 반찬을 볶는 소리, 욕실에서 샤와하는 소리들은 옆집사람의 생활을 고스란히 전해주었고 때로는 소음으로 때로는 리듬감 넘치는 음악소리로 이 아파트에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중에 샤와소리를 나는 지금 듣고 있다. 그건 102호에 사는 사람의 하루일과의 시작이다. 누구나 모두 자기만의 생활패턴이 있기 마련이기에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 순간 어색한 건 분명했다. 제 집이 아닌 사크라꼬의 집에서 들리는 옆집 샤와소리는 엊저녁 나와 그녀사이에 흐르던 찜통같은 침묵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자전거키를 잠그고 돌아서는 나를 기다렸다는듯이 그녀는 문밖에 기대여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귀를 덮은 회색 롱비니모자는 그대로였는데 모양이 불룩한 걸로 보아 머리가 긴것 같았다.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작은 코에 해리포터 안경이 걸려있었고 두눈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똘망똘망하였다.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피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느끼며 할수없이 안내하는 대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옆집엔 와세다에 다니는 학생이 살고 있어요.”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집안을 빙 둘러보았다. 현관문 량쪽에 각각 주방과 욕실, 화장실이 붙어있다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기숙사형 아파트의 집안구조는 모두 똑같다. 나를 놀래운건 27평메터 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방에 창문을 마주해 꽤 넓어 보이는 책상이 놓여있고 그 량쪽에 각기 빨간색 바탕에 노란 쿠션을 맞춘 소파와 나무침대가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였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놀라운 건 지금 나와 그녀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소파에 앉아 방안에 가득 쌓여있는 만화책에 눈길을 던지며 넌지시 물었다. “만화 좋아해요?” “일본사람이라면 다 좋아하죠.” 듣고 보니 물어본 내가 바보 같았다. 그녀랑 눈길이 마주치기 어색하여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책상 우에 놓여있는 두툼한 종이들을 발견했다. 그 우에 그려진 수많은 그림들을 보는 순간 나는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 했다. 그녀는 만화를 즐겨보는 독자가 아니라 만화가였던 것이다. 문득 초중, 고중을 다니는 동안 만화에 푹 빠져 살던 학교시절이 떠올랐다. 예측불허의 상상과 뛰여난 실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와 그림에 매료돼 같이 나도 만화를 그려보겠노라며 똑같은 얼굴을 열두번씩 그렸던 열정들, 비록 나중에 자신의 능력부족을 한탄하며 포기는 했었지만 만화는 내가 일본을 리해하는 계기가 되였고 류학을 오게 된 여러가지 리유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솔찍히 그녀가 만화가란 사실에 나는 모름지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네? 뭐라고요?” “아, 아니예요.” 사크라꼬는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뭔가 말한 것 같았는데 나의 정신은 죄다 만화에 쏠려있었다. “만화 그리세요?” “네, 저의 직업이예요.” 호기심이 부쩍 동안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화가의 초고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녀의 만화는 기상천외한 상상을 포인트로 하는 원피스(海贼王, 인기만화)나 탄탄한 이야기줄거리를 기반으로 하는 나르토(火影忍者, 인기만화)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현실에 아주 가까웠다. 만화의 종류를 구분할 줄은 잘 모르지만 나름 대로 그런 풍격을 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난 이런 풍격의 만화가 인기가 있을지 궁금했다. “이거, 언제 완성돼요?” “글쎄요. 아마 반년정도? 출판사에서 내줄지 걱정이예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야웅-     갑자기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그녀가 말했던 얼룩이인 것 같았다. 그녀는 먹이감을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쪽 눈이 참대곰처럼 까만 얼룩이가 나의 집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먹이감을 접시에 쏟아주고는 가릉거리며 먹고 있는 얼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얄팍한 등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일어나 내 쪽으로 돌아서던 그녀와 나는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의 손에는 고양이 먹이감이 쥐여져있었고 두사람의 머리속에는 아마도 똑같은 일을 회상하는듯 싶었다. “으흠.” 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도 이내 머리 숙여 잔걸음으로 총총히 내 옆을 지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냠냠 걸탐스럽게 먹어대는 얼룩이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결국 할 얘기가 있다던 그녀는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가? 비밀로 해달라고? 고맙다고? 그 후 이 일은 나와 그녀사이의 묵인 된 비밀이 돼버렸고 또 만화로 인해 우리는 공동한 취미도 생겼다. 비밀로 동질감을 느끼고 만화로 뉴대가 생겼다는 것이 이상해났다. 나는 이런 이상한 관계가 호의적인지, 배타적인지 항상 두리뭉실하게 느껴졌다.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발각된후 감독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어색해할가 봐 일부러 외면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선생님의 마음속에 나는 주의해야 할 인물이라는 락인이 찍혔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바르지 못한 행위만 부정한 걸가 아니면 그런 행위를 한 나란 사람자체를 부정한 걸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나는 그녀의 행위를 그리고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가?     5 사크라꼬를 다시 만난 건 그해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중턱에 들어선 어느 휴식일이였다. 매일 야간작업을 하는 나와 집에 박혀 만화만 그리는 그녀의 생활패턴은 정반대여서 한달이 더 지나도록 얼굴 한번 마주치기 어려웠다. 어쩌다 돌아오는 휴식일도 생물종이 뒤죽박죽이 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 나는 해질녘에 츄하이(소주에 약간의 탄산과 과일즙을 썩은 술)사러 마트로 갔다. 안주까지 골라가지고 카운터 앞에 이르러서야 갑자기 돈지갑을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점원의 눈빛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 이거 정말 미안해요, 먼저 여기 놔둬요. 인츰 갔다 올 게요.”     “함께 계산해요.” 목소리따라 뒤를 돌아다보니 그녀가 바구니를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나한테 웃어보였다. 나는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그냥 꾹 참았다.     “미안해요, 폐를 끼쳐서.”     “괜찮아요, 갔다오기 시끄럽잖아요.”     “고마워요.”     “뭘요,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벌써 가을이네요.”     점원이 상품을 등록하는 사이 우리는 날씨를 핑게로 상투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계산이 끝나 마트에서 나온 나는 그녀의 비닐주머니를 들어주면서 돈은 집에 가서 주겠다고 하였다.     “츄하이 좋아해요?”     “잠이 안 와서요.”     “벌써 자려구요? 여섯시인데?”     “하루종일 자고 싶어요.”     “많이 피곤한가보네요.”     “네.”     “녀자친구는 돌아갔어요? 아까 마트에 올 때 봤거든요.”     “네, 갔어요.”     우리는 다리를 건너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강변을 따라 걸으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파트 옆에는 서너메터 너비의 길을 사이 두고 이름 모를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을 따라 조금 걸으면 아파트로 들어가는 철문이 보였고 그 앞에는 높다란 벚꽃나무 한그루와 다리쉼을 할 수 있는 벤치도 있었다. 벤치 우에서 우리는 얼룩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쪼르르 달려가서 얼룩이 앞에 쪼크리고 앉아 물었다.     “여기서 뭘 해?” 야웅- 얼룩이는 웅크린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먹이를 자주 챙겨줘서인지 그녀에 대해 별다른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쪼크린 그녀와 웅크린 얼룩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줄기 가을바람이 불어와 귓볼을 간지럽히더니 얼룩이 몸 우에 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떨어졌다. 그녀는 꽃잎이 떨어진 포물선을 따라 머리 우를 쳐다보더니 어린소녀마냥 환성을 질렀다.     “저 봐요, 사크라예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팔을 높이 치켜들며 손가락으로 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나도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새끼손가락 만한 가지 끝에 한두송이밖에 안되는 벚꽃이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사크라? 어떻게 가을에 피지?”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때론 가을에도 핀다고!”     그녀는 벚꽃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을빛에 노랗게 물든 벚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 그 아래 벤치에 앉은 나와 얼룩이, 조잘조잘 흐르며 멈출 줄 모르던 강... 그건 기억 속의 그녀와 만날 때마다 꼭 떠오르는 풍경이기도 했다.     그녀도 벤치에 앉았다. 얼룩이의 보드러운 털을 어루만지며 스쳐지나듯 말을 건넸다.     “아까 녀자친구랑 다퉜죠?” “네, 조금요.” “좀 있다 찾아가봐요.” “래일 가려구요.” “오늘 가요. 래일이면 늦어요.” “왜요?”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요.” “...” “그런데 다툰 것 같지 않았어요. 뒤에서 봤거든요. 어깨를 꼭 붙이고 걷는 모습을요. 다정해 보였어요.”     “그래요?”     “네, 사랑하니까 그런 거죠.”     그녀는 사랑을 굳게 믿는 천진란만한 소녀처럼 목소리에 힘까지 주었다. 금방 삽심대에 들어선 나는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크라꼬의 눈빛이 천진란만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 있어요?”     “아뇨, 없어요.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많이 좋아해요?” “네, 나를 버릴 만큼.”     “네? 음, 혹시...”     나는 잠간 뜸을 들였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유부남이세요?” “...”     그건 나 자신도 모를 직감이였다.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무슨 생각에 그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리해가 안되였다. 그녀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한참 뭔가 생각하더니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후에 이 질문의 본질을 생각해보았지만 결코 호기심이 빚은 무례인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그건 꼬리를 잡은자의 오만이였다. 유부남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앞에서, 그것도 그다지 친하지도 않는 이웃 앞에서 인정한다는 것이 예상 밖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그렇게 당당했을가? 아니면 어차피 나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가? 혼자 마음속으로 사랑하기에 답답해서였을가?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없기에 단지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을 안했을 뿐인가?     “음... 참 어렵네요.”     “찾아갈가요?”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다시 가을벚꽃을 바라보았다.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였다. 다음번에 또 피여날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계절따라 봄에 피는 것이 섭리라면 계절을 거슬러 가을에 피는 건 어떤 의미가 숨겨져있을가? “찾아갈가요?”라고 말하던 그녀의 사랑은 마치 계절을 빗나간 가을벚꽃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찾아간단 말인가? 나는 사크라꼬가 굳게 믿고 있던 사랑이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걸 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런 감정에 긍정적인 태도를 갖지 않았다. 유부남을 선택했다는 리유 때문이 아니였다. 사랑은 선택권을 갖고 있다. 허나 선택한 결과에 따라 본인의 신분도, 립장도, 관계도, 같이 달라진다. 제3자의 신분은 그녀로 하여금 피동적인 립장에 처하게 하였고 그런 관계 속에서 원하던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그 위험성과 후과를 미리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바보가 아니였다.   유부남한테서 무엇을 원했을가? 그것이 자신을 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 걸가? 혹시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단순히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생각하고 지켜왔던 이른바 사랑이나 감정 같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고 나는 자신을 달랬다.     6 내가 그녀의 사랑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런 편견은 비교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녀자친구 히토미와 사크라꼬를 대비해본 적이 있다. 우리 셋은 집 부근의 작은 공원에서 만났었다. 늦가을의 어느 날, 히토미랑 산책하러 나왔다가 벤치에 앉아 해볕쪼임을 하고 있는 그녀와 마주치게 되였다.붉은색과 하얀색 체크패턴에 앞뒤가 모두V넥라인의 롱남방을 입은 그녀는 깔깔거리며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야 서로 알아본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하라씨, 안녕하세요.” “사이씨, 안녕하세요. 산책 나왔나 봐요.” “네, 날씨 참 좋아요.” “그래요, 여기 앉으세요.” 그녀는 반 쯤 일어난 자세로 허리를 굽힌 채 벤치 끝으로 옮겨앉으며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비니모자는 쓰지 않았다. 긴 머리가 모두 한쪽으로 쏠려 어깨 앞에 미끌어져 내리며 V넥라인으로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스즈키 히토미(铃木 瞳)예요.” “안녕하세요, 오하라 사크라꼬예요.” “저는 사이씨의 녀자친구예요.” 히토미는 내가 소개하기도전에 자처해서 인사했다. “이웃이야,  101호에 살고 있어.” “아, 그렇구나.” 히토미는 그녀 옆에 앉아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애들이 신났네요. 어느 아이가 오하라씨 애예요?” “네?! 아, 전 아직 결혼 안했어요.” “아, 죄송해요. 제가 괜히...” “괜찮아요. 아이들을 좋아해서 아까부터 보고 있었어요.” “남자애 좋아해요? 녀자애 좋아해요?” “둘다요. 스즈키씨는요?” “전 녀자애요. 사이쨩은요?”(‘쨩’은 ‘씨’와 같은 말로 친근, 친밀함을 나타낸다.) 히토미는 평소에도 잘하지 않던 질문을 던졌다. “음... 말 잘 듣는 놈?” 둘은 재미 있는 대답이라며 싱긋 웃어보였다. “두분 언제 결혼해요?” “래년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그렇죠? 사이쨩.” “응, 래년 이때 쯤.” “우리 결혼식에 꼭 참가해주세요.” “네, 때가 되면 알려주세요.” “고마워요. 사이쨩, 우리 이젠 밥 먹으러 가요.” 히토미는 나의 팔짱을 끼며 일어나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공원을 거의 벗어날 쯤 나직이 물었다. “저 녀자 뭐하는 사람이야?” “왜?” “남자라면 몰라도 저 나이에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없이...  다들 출근하는 시간에 공원에서 해볕이나 쪼이고. 이상하잖아?” “너도 놀고 있잖아.” “나 오늘 사이쨩 위해 휴가냈거든.” “만화가래.” “만화가? 어떻게 알어?” “얘기 나누다가 알았지.” “벌써 그런 사이야?” “넘겨짚지 말고.” “넘겨짚을 거 없어. 나랑 상대가 안돼.” 그 말에 나는 히토미를 다시한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그녀는 보란듯이 왼쪽다리를 곧게 펴고 오른쪽다리를 한발 옆으로 기대워 세웠다. 그리고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올린후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머리결과 함께 다시 두손을 내리워 허리를 짚고 서서 우아한 포즈를 취하며 윙크했다. 그녀는 예뻤다. 히토미는 지금까지 내가 첫눈에 반한 유일한 녀자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난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한때는 모델회사의 스카우트까지 받은 그녀, 이제 겨우26살 나이에 젊고 예쁘고 밝고 열정적인 히토미는 아련하고 조용하고 내면적이고 그녀보다 열살도 더 이상인 사크라꼬에 비해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도 아까 공원에서 사크라꼬에게 경계심을 보이며 시키지도 않은 소개를 자처해서 녀자친구라고 어필하였다. 그것이 본능에서 나오는 경계심이라면 “저 나이에 결혼도 안하고 애도 없는 것이 이상하다. 나랑 상대가 안돼.”라고 말한 건 과도한 자신감일가, 아니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크라꼬의 인생에 대한 우월자로서 자기만의 가치판단일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다가가 히토미를 살짝 안아주며 어깨너머로 공원을 바라보았다. 사크라꼬도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7 도쿄는 겨울이라 해봤자 기온이 령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선지 고향의 눈이 많이 그리웠다. 일년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고향에 폭설이 내렸다. 아버지는 봄에 간암진단을 받고 겨울에 떠나셨다. 나는 봄의 소망이 생명이라면 겨울의 사념은 하얀색이라고 생각했다. 눈은 이듬해 1월이 되여서야 내렸다. 야간작업을 나가려고 전등을 끄고 문을 열던 나는 푸실푸실 흩날리는 하얀 눈에 그만 멈칫했다. 그리고 한두메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담장 우의 시커먼 물건에 또 한번 흠칫했다. (뭐, 뭐지?) 어둠에 묻혀 희미하게 보이는 가운데 두개의 새파란 유리알이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순간 문고리를 잡은 채 제 자리에 못 박힌듯 굳어져 버렸다. 야웅- (이런 씨, 고내새끼!) 다시 전등을 켜보니 얼룩이였다. 그제서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휴-”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얼룩이는 세탁기 우에 폴짝 뛰여내려 머리를 갸우뚱한 채 나를 쳐다보았다. 배가 홀쭉해진 걸 보아 요즘 많이 굶은 것 같았다. 그녀도 먹이를 주는 걸 까먹었나 싶었다. 생각해보니 이사 온 지 거의 반년이 지났건만 한번도 먹이를 준 적이 없었다. 간혹 접시에 가득 놓여있는 먹이감을 볼 때마다 “또 사크라꼬가 줬구나.”하고 생각할 뿐이였다. 언젠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고양이가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외식하기에 집에는 마땅히 줄 음식도 없었다. 나는 거지에게 돈을 줘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준 적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두손을 바지호주머니에 찔러넣고 얼룩이를 무심코 내려보다가 발끝으로 접시를 툭 찼다. “딸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사기접시는 한켠으로 밀려나갔다. “나가세요!” “조용히해!” 갑자기 사크라꼬의 거친 목소가 들려오더니  50대의 한 남자가 그녀에게 등을 떠밀려 밖으로 나왔다. “다신 오지마세요!” “잘 생각해봐.” “그럴 필요 없어요!” “너, 너 정말...  후회하게 될 거야!” 쾅! 남자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전에 문이 거세게 닫혔다. 중년남자는 뒤로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화가 났는지 발로 아파트의 철문을 걷어차고는 씩씩거리며 멀리 가버렸다. 문 앞에서 목격했던 것들이 아침에 일이 끝나서도 신경이 쓰이였다. 무슨 일이 터진 건 분명한데 또 그렇다고 무턱대고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건 례의가 아니였다. 집으로 돌아와 철문 앞에서 사크라꼬가 자판기 옆에 쪼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았다. 유난히 짙어진 다크서클이 엊저녁에 한잠도 못 잤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 마신 캔커피에 재를 털면서 그녀가 인사를 보냈다. “오하요?” (아침 인사, ‘안녕?’이라는 뜻) “오하요 고자이마스.” (아침 인사, ‘안녕하세요.’라는 뜻) “만화 완성됐어요. 한번 보실래요?” “정말요?” “네, 근데 아직은 초고예요.” “출판전에 제가 먼저 보는 거예요?” “그런 셈이죠. 문 앞에 갖다놨어요.” “고마워요, 잘 볼게요.” “그럼 전 이만.” 그녀는 초고를 완성하느라 엊저녁부터 밥 한끼도 못 먹었다며 마츠야(松屋, 요시노야, 스키야와 함께 일본의 소고기덮밥 3대 체인점의 하나)에 간다고 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계산은 내가 할테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녀가 괜찮다고 하였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왠지 그녀한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마트에서처럼.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초고를 한장한장 읽어보았다. 그녀의 만화소재는 그녀 자신이였다. 이야기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어머니 손을 잡고 첫 등교하는 모습, 단짝친구 후지하라 리에(藤原里惠)와 함께 바다가에서 조개를 줏는 모습, 그림을 잘 그려 칭찬받는 모습 등 일상 속에서 평범하면서도 작은 행복들로 가득한 동년시절을 그렸다. 그 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두곳 있었다.   그녀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며 묻는다. “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요?” “바다로 나갔지. 고기 잡으러.” “언제 돌아와요?” “글쎄, 좀 더 기다리자꾸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어른이 되여서도.   다른 한장은 그녀가 소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할아버지랑 같이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였다.   “할아버지, 왜 또 여기에 온 거예요?” “벚꽃 보러.” “지금 가을이예요.” “때론 가을에도 피는 거야.” “칫, 거짓말. 바다 보러 온 거잖아요.” 그녀는 할아버지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만화에는 그녀의 학창시절과 첫사랑이야기도 담겨져있었다.   그녀의 중학교시절도 고중시절도 별로 특별한 이야기가 없었다. 누구나 모두 거쳐가는 사춘기시절의 방황과 한번 쯤은 해보았을 짝사랑이야기, 대학입시를 앞둔 고민과 미래에 대한 동경, 불안, 희망이 때로는 사념에 사로잡힌 하얀색으로, 때로는 행복이 피는 핑크색으로, 때로는 그리움이 묻은 푸른색으로 그녀의 소녀시절을 구성하였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여 마지막 학생시절을 보냈다. 그 과정에 만화써클에서 그녀의 선배이자 첫사랑인 나카무라 료(中村 亮)를 만났다. 료는 그녀랑 한고향이였다. 둘은 누가 누구에게 먼저 다가간 것이 아니라 만화에 대한 느낌과 생각들을 교류하는 과정에 아주 자연스레 감정이 싹텄다. 다정하게 손잡고 캠퍼스를 걷는 모습, 여름방학에 고향의 바닷가에서 단짝친구랑 셋이서 바베큐파티를 여는 모습, 떨리는 첫 키스를 하다가 그만 료의 혀를 물어놓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두 사람 사이는 별로 큰 모순 없이 순조로웠고 알콩달콩 하였다. 나는 한참 읽어보다가 결국 종이박스에 다시 집어넣고 말았다. 소재가 아무리 자신의 생활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허구를 통해 두 사람의 의견분기라든가 모순 같은 것들을 곁들이면 스토리가 한결 더 재미 있을 텐데 그녀의 만화는 예전에 한번 피뜩 봤던 대로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지루하고 따분했다. 주류(主流)가 아닌 그림풍격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그림은 아주 섬세하고 생동했다. 선 하나하나에도 많은 신경을 쓰며 모든 정력을 쏟아부은 듯했고 재현된 만화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이야기를 책 속에 락인해둔것처럼 보였다. 만화도 컴퓨터로 그리는 시대에 왜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가? 한동안 나는 그녀의 만화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그녀 또한 찾아가지 않았다. 만화에 관하여 동문서답을 할가 봐 선뜻 돌려주지도 못했다. 새해도 썩 지나 이듬해 3월의 어느 봄날, 새벽에 집 부근의 마츠야에서 우연히 그녀와 만났을 때도 나는 만화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덮밥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건넨 롱담 반 진담 반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릴 뿐이다. “결혼준비는 잘돼가요?” “돈이 문제죠, 아르바이트를 두개 뛰고 있어요.” “많이 모았겠네요.” “얼마 안돼요.” “저한테 조금 빌려주세요.” “네?!”     그녀의 뜻밖의 말에 제자리에 뚝 멈춰서며 망설였다. 5년전, 친구한테 빌려준 돈도 결혼소식을 핑게로 이제야 겨우 다 받아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혹시 장난인가? 나는 이 세상에는 백프로의 순수한 롱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설령 본인이 모르더라도 무의식 속에 본능적으로 원하는 진지한 성분이 섞여있다고 믿어왔다. 이른 새벽길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발작 걷다가 뒤돌아보더니 손등을 이마에 갖다대며 밝아오는 새벽빛을 막았다. 그리고는 롱담이라며 깔깔 웃었다. 아침해살에 해맑게 웃던 그녀, 그 역시 사크라꼬에 대한 기억의 한조각이다.   그 뒤로 부동산업체 사람들이 그녀 집에 여러번 다녀갔다. 사크라꼬가 어디 갔는지 모르느냐고 묻는 말에 집에 며칠씩 없는 걸 봐서 려행갔을 수도 있다고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부동산업체사람은 세집값도 구좌에 입금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려행이 아니라 달아난 게 틀림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후로 그녀는 그 아파트에 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가? 야반도주를 한 걸가? 고작 세집값 때문에? 그렇다고 자신을 신용불량자로까지 만들 필요가 있을가? 설마 그 유부남이랑 같이 떠난 건가? 정말 돈이 필요했을가? 나는 그 당시 매일과 같이 이런 질문들을 자신한테 했었다. 새벽의 만남과 마지막 대화는 뭔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처럼 나를 괴롭혔고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사라졌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보이지 않았다.     8 봄기운이 완연하게 대지를 감싸안았고 날씨도 많이 풀려 제법 따뜻해졌다. 나는 밖에 나와 옷과 바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문뜩 사크라꼬네 집앞의 세탁기호스가 배수로에 꽂혀있는 게 보였다. (음? 언제 돌아왔지?) 줄곧 밤에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는 언제부터 호스가 배수구에 내려져있었던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서 세탁기 안을 들여다 보았다. 빨래는 끝났으나 세탁물은 그대로 있었다. (오긴 왔구나.) 갑자기 잔바람이 휙 불어오더니 어디선가 코를 콕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구역질이 났다. 배수구에서 나는 냄새인 것 같았다. 돌아서서 뽀얗게 먼지가 낀 빈 접시도 보았다. 그녀가 사라진후로 얼룩이한테 먹이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양이가 뭐길래? 참!)   요즘따라 부쩍 늘어난 벚꽃뉴스는 3월이 거의다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티비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보도하였고 다음주면 도쿄에서도 꽃구경을 할 수 있다고 전했다. 히토미는 벌써부터 뜰떠서 미리 휴식일을 잡으라고 매일같이 문자를 보내왔다. “사이쨩, 장소는 어디로 할가?” “멀리 가지말자.” “그럼, 도심으로 하자” “응, 좋아.” 도쿄도심에는 벚꽃구경 할 만한 유명한 장소가 세곳이 있다. 많은 꽃을 다종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신쥬크교엔(新宿御苑), 미술관이나 박물관 동물원도 함께 있어 남녀로소가 모두 잘 찾는 우에노공원(上野公园), 강 량편 천메터에 걸쳐 벚꽃길이 쭉 뻗은 스미다공원(隅田公园), 저마다 특색이 분명하다. 우리는 제일 가까운 신쥬크교엔으로 정했다. 스미다공원은 여름에 가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우에노는 사람이 많아 피하기로 하였다. 벚꽃잎이 한들한들 떨어지는 나무 아래서 가족이나 련인, 친구들과 함께 봄의 정취를 즐기는 건 아주 시적인 일인것 같다. 히토미는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술 한잔 부었다. 건배를 하고 나서 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화사하게 피여난 벚꽃들을 바라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참 이쁘다. 그치?” “응.” “그런데 넘 짧게 핀다.” “이쁘니까 그런거야.” 벚꽃의 생명주기는 겨우 일주일에 불과하다. 한번 핀후 여름무더위와 겨울추위를 견디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야 이듬해 봄에 또 다시 피여난다. 그 제한된 생명 속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벚꽃의 미는 창조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훼멸 속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벚꽃은 짧지만 기억 속에 오래 남아 그 생명을 또 다른 방식으로 연장한다. 우린 손잡고 한참 꽃길을 산책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쓰레기 회수일이 아니여서인지 아파트철문에 까마귀 한마리가 앉아있었다. 내가 앞장서서 손을 휙휙 저어 쫓아버리자 멀리 가기는커녕 자판기 바로 옆에 내려앉아 뾰족한 부리로 비닐주머니를 쪼아댔다. 무척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일본에 와서 인상에 남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고양이와 까마귀가 엄청 많다는 점이다. 도쿄는 완전히 고양이와 까마귀 천국이나 다름없다. 길옆에, 골목에, 담장 우에, 전기줄에, 쓰레기장에, 길고양이들이 너무 많아 정부에서는 붙잡아서 거세를 하여 번식능력을 없앤다. 그런 길고양들의 꼬리는 모두 절반 잘리워져있다. 일종의 표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까마귀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쫓으면 훨훨 날아가버리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비닐주머니를 부리로 찢어서 먹이를 찾다보니 때론 쓰레기를 모아놓는 곳이 아수라장이 되군한다. 심지어 어떤 까마귀는 사람을 공격한다고 뉴스에서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리해가 안 가는 건 다른 나라와 달리 까마귀를 길조(吉鸟)라고 여기는 일본사람들의 풍습이다. “왜 까마귀를 길조라고 생각해?” “반포지효는 옛날 얘기지.” (反哺之孝, 까마귀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효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란후에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효성을 이르는 말) “그래?” “응, 지금은 아냐.” 우리는 썩 반갑잖은 손님을 만난듯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히토미는 세탁기 옆을 지나가다 손으로 코를 싸쥐였다. “아, 구려! 이거 무슨 냄새야?” “배수로가 막혔어.” “관리원 불렀어?” “오늘 전화할 거야.” 급급히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히토미는 이튿날 출장을 가야 하기에 저녁식사만 하고 이내 돌아갔다. 아쉬워하는 그녀를 달래여 여름 불꽃놀이철에 려행을 떠나자고 약속했다.     9 나는 다시 그녀의 집 문 앞에 서있었다. 상황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머리속에 되살아나면 마지막에 가선 항상 그 아파트가 떠올랐고 이어서 101호라고 표시된 문과 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옆모습이 보였다. 몇번인가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번마다 망설이며 다시 내리웠다. 또 한번 천천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녀에 대한 기억의 엔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 엔딩은 나의 눈앞을 무한반복이 되여 끊임없이 지나간다. 나는 끝끝내 노크를 하지 않았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다카하시(高桥)예요.”     다카하시는 와세다대학에 다니는 학생인데 바로 옆집 102호에 살고 있었다. 이사 온 지 거의 일년됐지만 워낙 생활패턴이 다른지라 그녀랑은 딱 두번 인사를 나누었다. “네, 잠깐만요.” 시계는 밤 아홉시 반을 가리켰고 마침 전날이 휴식일이여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늦은 밤에.” “괜찮아요.” “저기, 지금 시간 괜찮아요?” “네.” “요즘 오하라씨를 본 적이 있어요?” “아뇨, 없는데요. 왜요?” “집이 너무 조용해서요.” “아마 집에 없을걸요.” “그래요?” “네, 부동산업체에서도 찾아왔었어요. 이달초에.” “어디로 간거예요?” “글쎄요.” “이상하네, 분명 빨래를 돌리는 소리 들었거든요.” “진짜요? 근데 세탁물은 그대로던데.” “네, 저도 봤어요.” “왔다가 또 어딜 간 건 아닐가요?” “글쎄요. 사이씨는 오하라씨랑 가까워요?” “그렇게까진...  다카하시씨는요?” “저도 별로 얘기 못해봤어요. 그냥 인사나 나눌 정도예요. 사실 이 아파트에 제가 제일 먼저 입주했거든요. 오하라씨는 작년 4월에 이사왔고.” 작년 여름에 입주한 나는 사크라꼬가 먼저 알게 된 다카하시보다 나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도 같은 일본사람이 아닌 외국인하고 말이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사크라꼬와의 대화, 편의점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녀의 집을 방문한 사실, 벚꽃나무 아래에서, 마츠야에서, 한 박스 받은 만화도, 생각보다 우리 사이는 다카하시에 비해 련결점들이 꽤 많았다. “한번 노크해볼가요?” 다카하시가 물었다. 노크? 어떡하지? 나는 눈을 내리깔고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웬지 이 상황이 싫었다. 제안 자체도 그 제안을 한 다카하시도 모두 싫어졌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수 없는 데다가 만에 하나 원치않은 상황들과 맞띄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경찰에 신고하긴 더욱 싫었다. 그러면 또 경찰서에 가서 지루한 조사에 협조를 해야 한다. 야근은 어떡하고? 나는 선택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노크할지 말지를 두고 그것이 정확한지 않는지를 판단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활이나 인생이 객관식 문제처럼 꼭 들어맞는 표준답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 결정을 피하려고 했다. 책임회피인가? 무슨 책임인가? 가족이나 련인, 친구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것들을 나와 사크라꼬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사크라꼬의 생활에 참여할 리유를 찾지 못했다. “죄송해요.” 나는 거절했고 다카하시는 할 수 없다는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도 쉽게 노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사크라꼬의 집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자전거키를 만지작거렸다. “설마요?”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설마요.” “저기, 전 야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문을 닫고 그녀를 피해 사크라꼬 집앞을 지나 자전거를 세워두는 곳으로 갔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나의 등에 꽂혔다. 머리를 홱 돌렸다. 다카하시가 다시한번 사크라꼬의 집문을 두드리더니 “오하라씨!”하고 불렀다. 나는 목석처럼 굳어져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서 문을 두드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리 대로라면 사크라꼬와의 련결고리가 더 많고 대화도 더 잦게 나누고 사이도 더 가까운 내가 노크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왜서 그녀였을가? 금방 옆집이여서? 같은 일본사람이여서? 나는 뭔가 한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험장사건 때처럼 저도 모르게 갑자기 긴장해나며 심장이 쿵쿵 뛰였다. 두손으로 자전거핸들을 꼭 잡은 채 숨죽이고 노크하는 그녀와 문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날 근무시간에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적게 찾아주어 배상청구가 들어왔는가 하면 페기날자를 잘못 체크하여 레지등록에 지장이 생겼고 상품 발주도 제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이상하게 의욕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자꾸 짜증이 났다. 그런 불안은 야간작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와서야 가뭇없이 사라졌다. 사크라꼬 집문이 열려져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밖에는 경찰차 두대와 구급차 한대가 와있었고 마스크를 낀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이 그녀의 집을 들락거렸다. 엊저녁, 다카하시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아침까지 뒤척이다가 날이 밝는 대로 경찰서에 전화해서 신고를 하였고 득돌같이 달려온 경찰들이 몇번이나 이름을 부르고 노크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열쇠를 부수고 강제침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단다. 사크라꼬가 목을 맨 모습을. 경찰이 우리한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는 다카하시가 했다. “몇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상황을 보면 죽은 지 보름정도 된 것 같은데 그사이 이상한 점 같은 거 없었어요?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부검결과를 기다려봐야 해요.” (보름? 어떻게 보름씩이나?) 문뜩 배수구가 생각났다. 잇따라 그 냄새도 기억났다. 코를 찌르는듯한 역겨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구역질이 나는 난생처음 맡아본 그 냄새말이다. 그제야 그것이 배수구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 다음 아파트철문에 앉아있던 까마귀도 결국 죽은 사람의 썩은 냄새를 맡고 날아왔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대답하기 싫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벚꽃계절은 죄다 지나갔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영원히 살고 있다. 사크라꼬에 대한 기억도 그러하다. 마지막일 것 같지 않던 순간이 마지막이 되고 끝났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나와 다카하시는 벚꽃나무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분주히 움직이는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사크라꼬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고 그 어떤 숙연함을 느꼈다. 엊저녁, 나는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사람이 잘못됐을 수도 있는 상황에 노크할지 말지를 토론했으며 지금과 같은 현실의 가능성을 예상하면서도 “설마?”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건 한 생명과 그 가치에 대한 선의(善意)적인 행동을 회피하고 도피한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노크를 한 다카하시의 행동이 도덕적 의미를 가진 선(善)에서 출발한 거라면 같이 망설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크를 거부한 나의 행동의 근원은 무엇일가? 심지어 지금 사크라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왜 아직도 노크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걸가? 대체 왜? 왜서이지? 나란 사람이 지금까지 그 정도로 도의에 어긋나게 살아왔던가? 내 마음은 그토록 가난하고 궁핍했던가? 나는 이 문제의 답을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찾기 너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 차원에서 벗어나 배후에 또 다른 무언가가 나의 그런 행동을 지배했음을 모호하게 감지했다. 그건 도대체 무엇일가?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10 만화를 끝까지 읽은 건 벚꽃계절이 지나가고 나서였다. 억지로 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만화를 다 읽고 나서 그 러브스토리가 단순히 만화가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인생과 첫사랑에 관한 기록이자 회억이며 한차례 의식(仪式)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밝고 명랑하던 그녀의 이야기는 선배인 료가2년 먼저 졸업하면서부터 색상이 점점 어두워져갔다. 두 사람은 졸업후의 진로를 놓고 의견분기가 생기게 되였다. 료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고 반대로 그녀는 도쿄에 남을 것을 원했다. 서로 맞지 않는 생각과 주장 때문에 가끔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짧으면 사나흘, 길면 보름씩 랭전상태였다. 동거를 시작한 련인들 치고는 보름은 좀 길어보였다. 료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만화 속에는 멀어져가는 료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독백하는 장면도 있었다. 료, 등을 보이지마     돌아서서 내 이름을 불러줘 우린 끝난 거 아니야 잠시 떨어져있을 뿐이야 그녀는 어쩔 수 없는 현실과 화해를 한 거지 헤여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일정한 기간을 두고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해보려고 료와 그리고 현실과 화해한거라고 하였다. 그녀는 도쿄에 계속 남아 만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남들이 하는 취직활동도 죄다 생략한 채 매일같이 만화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신만의 만화에 깊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화풍(画风)은 투시, 원근, 색채, 명암이 률동적인 립시체와 해당 사물을 자세히 따라 그리는 소묘가 결합된 풍격이였다. 립시체는 “움직이는 듯한 자세로 굳어버린 것 같다”는 혹평을 듣기도 하기에 상업 쪽에선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지만 그림기술이 뛰여난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기반으로 립시체와 소묘를 고집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처음에 “고집”이란 단어를 썼다가 나중에 “신념”으로 바꾸었다. 료와의 만남은 매 계절마다 한번 페이스로 만나다가 점차 회수가 줄어들어 반년에 한번, 나중에는 설을 쇨 때나 보군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어떡하나 견지해보려는 마음인 것 같았다. 그녀의 사랑은 의외로 깊었다. 료와 8년이란 마라톤사랑을 달려왔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먼거리련애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28살 되던 해에 료한테서 일방적인 리별통보와 함께 돌연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상대는 그녀의 단짝친구 후지하라 리에였다. 그녀는 료와 리에를 놓고 사랑과 우정을 저울질해보았다고 자백하였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축복을 빌어주기 싫었다고 한다. 또한 료의 일방적인 리별통보와 결혼에 대하여 끝까지 “배신”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고 그 리별원인에 관해서도 말을 몹시 아꼈다. 그건 료에 대한 보호이자 그들의 사랑에 대한 존중이였다. 그후 3년간 그녀는 미친 사람마냥 만화에 몰두하였다. 그동안 키워왔던 탄탄한 그림실력으로 점차 팀에서 따로 독립하여 자신의 만화실도 차렸다. 그 과정에 나이 어린 한 남자와 오랜 선배하고 각각 짧은 애인관계도 가져보았다. 후에 이 부분을 그녀는 몰두가 아닌 도피라고 정의를 내렸다. 료와 리에의 결혼에 대한 부인, 그런 현실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 자신을 다른 것에 몰아세우는 것으로 그것을 피하려 하였다. 인생의 굽인돌이는 료가 결혼해서 4년째 되던 해에 발생했다. 어느 날 밤, 료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둘이 동거하며 보냈던 그 집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출장으로 도쿄에 온 료는 술에 많이 취해있었다. 그녀는 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료는 “보고싶었다”고 했고 그녀는 듣고만 있었다. 료에게는 사리가 밝으신 부모님과 귀여운 녀동생이 있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료가 졸업한 지 얼만 안돼 부모님들이 차사고가 생겼는데 어머니는 병원으로 호송하는 도중에 죽고 아버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녀동생을 돌보면서 아버지를 간호했으나 사크라꼬에겐 잠시 비밀로 하고 빨리 취직하여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녀에게 말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쿄에서의 취직경쟁은 너무나 치렬했다. 한시가 급했던 료는 차라리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판단하였다. 고향에서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집에는 녀동생이 있었고 또 병원에는 아버지가 누워계셨다. 회사와 가족의 압력은 그로 하여금 숨도 제대로 못 쉬게 하였고 무정한 세월은 어느덧 8년이나 훌쩍 흘렀다. 료와 리에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비록 결혼하여 딸이 인츰 태여났지만 리에는 줄곧 료의 마음속에 사크라꼬가 살고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날 저녁, 료와 사크라꼬의 대화를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료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날 용서해줘.” “바라는 게 그거야?” “미안해, 바랄 자격도 없겠지.” “다른 거는 없어?” “...” “난 아직도 널 사랑하는데...” 그녀는 다가가 료를 품에 안았다. 그림 아래부분에는 이런 구절도 씌여져있었다. -- 우리는 오랜만에 섹스를 했다. -- 우리의 사랑은 한번도 끊긴 적이 없었다.   그후로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되였다. 료는 출장으로 도쿄에 올 때마다 그녀의 집에 머물렀다. 료와 리에는 별거중이였지만 리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7년동안 지속되였고 그 사이에 년로하신 사크라꼬의 할아버지와 병마에 시달리던 료의 아버지가 선후로 이 세상을 떠났다. 료의 딸애는 소학교 4학년이 되였고 녀동생도 시집을 갔다. 그리고 겨울이 다 지난 어느 봄날, 리에가 료를 찾아와서 딸애의 양육권을 자기가 가진다는 조건으로 리혼서류에 싸인을 했다. 료는 전화로 그 사실을 사크라꼬에게 전했다. 그 날은 목요일이였다. “리에가 싸인했어!” “진짜? 믿기지 않네.” “나도 그래.” “래일 올 수 있어?” “응, 주말을 함께 보내자.” “뭐 먹고싶어?” “카레.”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만화의 제일 마지막 페지에는 그 어떤 인물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튿날 둘이 서로 만났는지, 주말은 어떻게 보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지, 심지어 둘의 사랑의 결말에 대해서도 그 어떤 문구도 남기지 않았다. 종이에는 오직 땅에 떨어진 벽시계가 덩그러니, 그것도 온 종이를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랗게 그려져있었다. 시침은 2시를 가리켰고 분침은46분을 가리켰으며 초침은 떨어진 벽돌에 짓눌리워 휘여진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날자가 적혀있었다. -- 2011년3월11일, 오후 2시46분, 금요일. -- 그건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날자였다.   11 경찰이 사크라꼬의 죽음을 타살이 아닌 자살로 최종확정을 지은후 부동산업체와 청소업체, 인테리어업체 사람들이 선후하여 다녀갔다. 그녀의 물건들을 정리하여 없애기 시작했고 냄새를 제거하고 바닥도 다시 깔고 벽지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녀 집앞을 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돌려 문을 바라보군 하였다. 일하러 나갈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쓰레기를 던지러 갈 때도 빠짐없이 눈길을 돌렸다. 오래동안 나는 가끔 아무 영문도 없이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갑작스레 떠오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자신한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을가? 우리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가? 인간관계의 토대는 어디에 있는가?   원하던 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어느 파지(废纸)를 회수하는 날, 낡은 잡지들을 버리러 갔다가 청소업체 사람들이 페기한 책들 속에서 그녀의 다른 한 작품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건 지진이 일어난후의 생활을 그린 것이였다. 나는 보물을 얻은듯 그 초고들을 죄다 찾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숨 죽이고 조용히 읽어보았다. 아니, 귀를 기울여 그녀의 속심말을 들었다.      지진 당일, 나는 지하만화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진동과 더불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인츰 료한테 전화를 하였다. 도쿄에 지진이 발생하여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전하고 싶었지만 그는 부재중이였다. 급급히 보낸 문자도 줄곧 발송중으로 나타났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진원(震源)이 도쿄가 아니라 고향인 미야기현 나도리(名取)시 부근 해역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고향에는 9메터 높이의 쓰나미가 들이닥쳤다. 3층 건물 높이, 말 그대로 집채같은 파도였다. 어머니도 료도 리에도 모두 그 쓰나미에 휩쓸려 바다로 갔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달이 지난 4월11일, 나는 고향에서 열린 추도회에 참가하였다. 행사내내 울지 않았다. 공포도 불안도 슬픔도 그리움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이름모를 마비상태에 빠졌다. 유리아게 히요리야마(閖上日和山)에서 목격한 정경은 어릴 때 할아버지랑 함께 보았던 풍경하고 전혀 달랐다. 헤아릴 수 없는 집들은 형체도 없이 떠밀려갔고 나무널판자와 양철판, 각이 떨어져나간 가구, 흙이 가득 들어찬 랭장고와 세탁기들이 변형된 채 마구 흘어져있었다. 그건 마치 하늘에서 쓰레기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버스가 간신히 남겨진 한 건물2층에 곤두박혀있었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 건물기초인 차디 찬 콩트리트 뿐이였다. 추도회에서 돌아왔으나 지하수가 터지는 바람에 만화실에 물이 가득차있어 재개업을 단념했다. 료랑 오래동안 동거했던 집도 떠나 현재 아파트에 이사를 왔고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이상한 취미가 생겼다. 친구랑 함께 어쩌다 나가 놀 때면 디즈니랜드보다 디즈니씨를 더 선호하였다. 리유는 놀이시설중에 시속이 가장 빠른 “센터 오브 더 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허나 쥘 베른의 “지저세계려행” 테마를 감수한다기 보다 놀이시설의 속도에 관심이 더 컸다. 화산구를 뛰쳐나올 때의 풍경은 나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했지만 하이라이트에서 붙는 가속도와 직후 락하할 때의 순간적 흥분은 일상에 돌아와서도 자주 그리웠다. 그외에도 번지점프를 류달리 즐겼고 또 골든위크(五一节)에 후지산야생동물원으로 가다가 차가 막혀 열두시간 지체되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도착해서 호랑이를 보았을 때는 얼룩이를 본 것처럼 반가워서 차문을 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이상한 취미도 오래가지 못했다. 더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마트나 편의점 같은 곳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였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가만히 행동할 때의 긴장감과 짜릿함은 나더러 멈출 수 없는 성취감을 갖게 하였다. 그런 느낌들 가운데는 수치심도 있었다. 그건 우연하게 한 남자를 만나서부터였다. 나는 사이와의 만남을 인생의 마지막 인간관계라고 생각했다. 얼룩이를 부탁하기 위해 음료를 선물로 사들고 갔지만 그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였다. 주류(主流)매체에서 늘 부정적으로 다루는 중국뉴스 때문에 약간의 선입견은 갖고 있었지만 첫인상 치고는 괜찮은 이웃 같았다. 편의점에서 붙잡힌 건 유일한 실수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마비되였던 마음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 환호를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났다. 그건 이 모든 감정들은 내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차라리 절차 대로 경찰에 신고할 거지. 구류소에 한번 쯤 가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사이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고 그래서 의문이 생겼다. 그런 행동이 궁금하는 한편 이런 결과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참 혼란스러웠다. 집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용기를 내여 사이를 불렀다. 그런데 그의 주의력은 온통 만화에만 집중돼있어 고맙다는 내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만화를 보면서 올라가는 그의 입고리와 왼쪽 볼에 패인 보조개도 나는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만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나중에 완성되면 보여주고 의견도 들어봐야겠다. 언젠가 한번 돈지갑을 두고 온 사이를 속으로 바보라고 놀린 적이 있다. 사정이 딱해보여서 함께 계산해주었다. 또 그가 남자친구에게 대해 눈치없이 “유부남이죠?” 라고 묻는 말에 너무 직설적이여서 놀란 건 사실이지만 “네”라고 대답할 때는 반대로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당당하게 나의 사랑을 승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료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한테 답답할 정도로 지극히 열중한 것 같다. 그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 나중에는 가슴 속에 자신에게 남겨 줄 자리가 없었다. 19년동안 료를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할수록 자신을 더 많이, 더 깊게 버렸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가?  나는 료를 사랑했을가 아니면 료를 사랑하는 그 느낌을 원한 걸가? 이제는 그를 백프로로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는 지금에 나는 왜 이 사랑에 도리여 물음표를 다는 걸가? 사이에게는 모델급 수준의 녀자친구가 있다. 이십대 중반 쯤 돼보이는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그녀가 공원에서 왜 나를 경계했는지 리해가 안되였다. 대화중에 결혼얘기가 나왔을 때 그녀의 미소에서 행복감을, 나를 보는 눈빛에서 우월감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한 녀자가 담겨져있었다. 히토미와 마주하는 동안 나는 마치 현실이란 거울을 마주한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자신감을 상실했다. 사이에게 정말로 고마운 것이 하나 있다. 계약을 맺은 출판사와 트러블이 생겨 사장이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나의 만화는 사실상 큰 인기를 모으지 못했고 잘 팔리지도 않았다. 사장이 시대주류가 아닌 화풍을 바꾸어보든지 원피스나 나르토의 풍격을 본따서 그려보라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거절했다. 화가 난 사장은 출판사의 경제적 손해도 만만치 않다며 계약해제까지 들먹였다. 그는 법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이어온 인연을 감안하여 합의를 보자고 한발 물러섰다. 대신 요구가 있었다. 자기와 애인이 돼달라는것—결국 사장이 집까지 찾아온 진정한 리유였다. 그때 마침 밖에서 딸그락거리는 접시소리가 났다. 아마 사이가 얼룩이한테 먹이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담이 커져서 집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는 사장을 향해 꽥 소리를 질렀다. 사이한테 고마운 것도 있지만 몹시 화난 적도 있었다. 수많은 밤을 새가며 고생스럽게 완성한 만화를 보라고 줬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볼 만한지, 어떠한지 의견이라도 준다면 다시 수정해볼 턴데 한달이 지나도록 가타부타 반응이 없다는건 그 동안의 노력에 대한 모욕과도 같았다. 어쩌면 그는 나의 만화를 인정해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도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며 고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렇게 화가 나면서도 새벽에 마츠야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는 도리여 마음이 차분해졌다. 독자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따로 있는 만큼 그 정도는 리해하며 거기에 연연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롱담도 건네봤다. 사이한테서 정말로 돈 빌리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의 눈빛에서 순간적인 망설임을 보았다. 나는 웬지 씁쓸했다. 우린 무슨 관계일가? 그냥 이웃일가? 친구일가? 왜서 사이한테 여러가지 감정을 느낄가? 부끄러움도 고마움도 원망도 씁쓸함도... 그러고 보면 그는 나와 이웃이란 관계를 벗어나 이젠 친구정도로 된 것 같다. 그는 나의 비밀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한테 말해준 적이 거의 없다.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나는 고향이 그리웠다. 일단은 나도리시문화회관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열리는 동일본대지진1주년 합동제사에 참가했다. 행사가 끝나 일년 만에 유리아게 히요리야마를 다시 찾았다. 쓰나미가 남긴 손톱자국은 아직도 력력하였으나 시가지는 새롭게 복구되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도토리어린이도서실이 세워졌고 유리아게 사이카이시장은 한달 전에 오픈되였다. 모든 것이 다시 찾아온 봄마냥 생기가 띄고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버림받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더없이 낯설기만 하였고 예전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가 없는 고향은 나에게 아무런 삶의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다. 나는 현실 속의 고향에도, 마음속의 고향도 돌아갈 수 없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이 곳에서, 이 세상에서 소외된 듯했고 여기로 온 것을 후회하였다.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이 더 절실히, 뼈아프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나의 삶을 구성했던 부분들이 죄다 몸에서 빠져나간 채 빈 껍데기만 남았다. 그렇게 그리웠던 고향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뿌리를 잃었고 심지어 나자신도 잃어버렸다.     도쿄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앞의 길이 지평선을 따라 멀리멀리 뻗어 하늘과 맞닿은 것을 보았다. 집 문 앞에 얼룩이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주인집을 떠나 길고양이신세가 된 얼룩이는 언제부턴가 이 아파트에 머물렀다. 나도 한동안 여기에서 살았다. 우린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얼룩아.”     야웅 “이젠 떠날 시간이야.” 나는 얼룩이한테 먹이를 듬뿍 주었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에는 빨래도 하였다.     12 그녀의 의식(仪式)은 끝났다. 나는 책을 덮었다. 아홉번째였다. 열한번째로 다시 그 책을 펼쳤을 때는 이미 매우(梅雨)계절이 걷힌 다음이였다. 나에게 페트병을 쑥 내밀던 여름이 지나가고 “사크라예요!”하고 소리치던 가을이 돌아왔다. 그해 가을,  벚꽃은 피지 않았다. 거의 반년 동안 비워두었던 사크라꼬 집에 새 이웃이 이사 왔다. 20대의 남자였는데 복싱선수였다. 대머리인 그의 팔에는 해골과 복싱글러브 문신이 새겨져있었다. 다카하시는 사크라꼬의 일도 그렇고 새로 온 이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찜찜하다며 집터를 흉보더니 얼마후 이사를 가버렸다. 프로데뷔전을 끝낸 그 남자는 이틀째 세탁물을 꺼내지 않았다.     (이겼나? 졌나? 혹시 상했나?) 나는 다시 그녀의 집 문 앞에 서있었다. 상황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머리속에 되살아나면 마지막에 가선 항상 그 아파트가 떠올랐고 이어서 101호라고 표시된 문과 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옆모습이 보였다. 몇번인가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번마다 망설이며 다시 내리웠다. 또 한번 천천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녀에 대한 기억의 엔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 엔딩은 나의 눈앞을 무한반복이 되여 끊임없이 지나간다.     똑똑똑     문이 열렸다. 대머리남자가 나왔다. 다카하시가 말하던 타투가 눈에 띄였고 옆이마에는 밴드에이드가 붙어져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이예요. 103호에 살아요.” “안녕하세요. 와타나베 유스케(渡边祐介)예요.” “다름아니라 부탁이 있어서요.” “네? 뭔데요?” “이 부근에 길고양들이 많이 살아요. 그중에 한쪽눈이 까만 얼룩이가 우리 아파트에 자주 와요. 뭐 큰 일은 아니구요, 시간날 때 저기 접시에 먹이를 좀 줄 수 없을가요? 제가 야간작업 하기에 저녁에 시간이 없어서요. 길고양이들이 참 불쌍해요. 그렇죠?” 와타나베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따라 세탁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얼룩이가 웅크리고 앉아 가릉거리며 먹이를 먹고 있었다. “귀엽네요. 이름이 뭐얘요?” “사크라예요.” 그는 알았다며 흔쾌히 응낙하였다. 겉인상과 달리 꽤 괜찮은 이웃 같았다. 사크라꼬도 이런 느낌이였을가? 나와의 만남을 “인생의 마지막 인간관계”라고 하던 그녀의 말은 나에게 사고적 가치를 남겨주었다. 오래동안 나는 가끔 아무 영문도없이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갑작스레 떠오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자신한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을가? 우리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가? 인간관계의 토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가 죽은후 우리 사이도 이로써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또 기억이란 이름으로 현재의 나를 방문하였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한 모습에 나는 시달리군 했다. 그러면서 과거에 노크하지 않았던 행동과 뿌리치려 했던 순간들, 그녀가 부탁하던 얼룩이도, “당황”이란 두 글자도, 첫사랑도, 이 세상을 향해 노크하던 만화도... 모든 것들이 더 이상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존재할 때 그것들은 점차 나의 생활과 삶의 일부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은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문이 되였고 세상은 그 틀에 끼워진 조그마한 그림과도 같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누구도 인간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그 속에 존재하며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승인과 존중은 엄연히 다르다. 인간관계의 토대는 자아가치에 대한 상호승인에 있지 않을가?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세상에 부재(不在)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의 존재를, 또 그녀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고향에 대한 현실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와 인생과 삶에 어떤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 걸가? 나는 얼룩이 앞에 쪼크리고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크라쨩, 맛 있어?” 얼룩이는 대답 대신 부스러기가 묻은 나의 손가락을 가볍게 핥아주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 고이며 점차 올라와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나는 목이 메여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2017년 5월 봄 씀 2017년 제7기 발표     소설평  아픔으로 커가는 자의 쓸쓸함의 두 경우 -와 를 읽으면서        김경훈   요즘은 읽은 소설 가운데서 매우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련이어 두편을 읽고 나니 새롭게 다가오는 삶의 양상들과 그 내면의 아픔들이 뭔가를 끄적거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었다. 바로 채국범의 중편소설 와 조은경의 단편소설 가 그러했다. 이 소설들은 모두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가장 은밀하면서도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와 이어진 소외화 그에 따른 여러가지 고민들을 다루고 있어서 그동안 외면하고 무관심하기 일쑤였던 그들의 내밀한 아픔에 대해 좀더 폭넓은 리해를 가지도록 만들어 한번 정도는 곰곰히 그 가치를 따지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노크’하기가 너무 힘든 공간 중편소설 는 일인칭의 시점으로 사크라꼬라고 하는 일본 녀자와의 일상적인 관계를 다루면서 이야기를 펼쳐간다. 도꾜에서도 유명한 신쥬꾸에 새로 든 집에서 이웃하고 있는 일본녀자와 중국에서 건너간 ‘나’의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들이 작품 이곳저곳에서 무시로 튕겨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자질구레한 사건들은 사실 잡다한 데 그치지 않는다. 그 하나하나가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먼저 주인공이 ‘편의점’에서 좀도적을 잡다가 나중에 사크라꼬까지 잡게 된 사연을 보자. 일본말로 ‘만비키’라고 부르는 좀도적의 마스크를 벗기는 순간 ‘나’는 상대가 사크라꼬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제야 빼앗은 물건을 다시한번 확인해보니 200엔 밖에 안되는 고양이 먹이감이였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도 얼굴색 한번 바뀌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목석마냥 서있었다. 사실 주인공이 세방에 들어와서부터 사크라꼬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도록 부탁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쏟아왔던 그녀가 고양이 먹이감을 도덕질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200엔 밖에 안되는 그 먹이감을 훔친다는 것은 일종의 도벽에 가까운 행위였음을 주인공인 ‘나’는 학생시절 컨닝을 하면서 느꼈던 짜릿함과 련관시킴으로써 해명하려고 한다. 또 하나의 사건은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들어가보면서 그녀가 만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분이다. 그런데 그녀는 “기상천외한 상상을 포인트로 하는 원피스(海贼王, 인기만화)나 탄탄한 이야기줄거리를 기반으로 하는 나르토(火影忍者, 인기만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현실에 아주 가까운” 리얼리즘적 화가라는 점에 주인공은 인기가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러워한다. 그런데 실지로 사크라꼬는 마음이 따뜻한 녀자이다. 도적질한 적도 있지만 슈퍼에서 미처 지갑을 챙기지 못한 주인공에게 선불해주기도 하고 결과에 대한 보상이 없이 유부남을 사랑한 그녀지만 주인공의 녀자친구 등 일상에 대한 관심도 보여준다. 마치 보기 힘든 가을 벚꽃처럼 말이다. 오히려 주인공인 ‘나’는 그녀에 비해 메마르고 종잡을 수 없는 마음과 자세로 일관되여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떠돌이 고양이 ‘얼룩이’에게 종래로 먹이감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크라꼬의 여러번의 부탁이 있었음에도 주인공은 하나같이 등한시하며 밤중에 집앞에서 맞띄웠을 때는 놀란 김에 욕설을 내뱉고 고양이 먹이를 담는 접시를 발로 차버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행동에는 외국인으로서의 경계나 부적응의 심리가 작용하기도 하겠지만 사크라꼬와 같은 지극히 개성적인 일본인에 대한 몰리해가 그러한 소극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지 않나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주인공의 그러한 막히고 답답한 태도는 그로써 그치는 게 아니다. 제 나름 대로 노력하고 새롭게 세상을 보고저 하는 긍정적인 모습도 어느 정도 엿보인다. 사크라꼬한테서 그녀가 그린 만화를 갖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자세가 바로 그러한 긍정적인 새 출발이라 하겠다. 집에 돌아와 샤와하고 초고를 한장한장 읽어보았다. 그녀의 만화소재는 그녀 자신이였다. 이야기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첫 등교하는 모습, 단짝친구 후지하라 리에(藤原里惠)와 함께 바다가에서 조개를 줏는 모습, 그림을 잘 그려 칭찬받는 모습 등 일상 속에서 평범하면서도 작은 행복으로 가득한 동년시절을 그렸다. 만화는 이어서 그녀의 사춘기시절의 방황과 짝사랑이야기, 대학입시를 앞둔 고민과 미래에 대한 동경, 불안, 희망을 “때로는 사념에 사로잡힌 하얀색으로, 때로는 행복이 피는 핑크색으로, 때로는 그리움이 묻은 푸른색으로 그녀의 소녀시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작가가 말하다싶이 ‘별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주인공이 들여다본 만화에서 그나마 만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면 그녀의 대학교 마지막 시절에 만화써클에서 만난 선배이자 첫사랑인 나카무라 료(中村亮)와의 관계이다. 료는 그녀와 한고향이였는데 만화에 대한 느낌과 생각들을 나누면서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였다고 한다. 만화에는 “다정하게 손잡고 캠퍼스를 걷는 모습, 여름방학에 고향의 바다가에서 단짝친구랑 셋이서 바비큐파티를 여는 모습, 떨리는 첫 키스를 하다가 그만 료의 혀를 물어놓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두 사람 사이는 별로 큰 모순 없이 순조로웠고 알콩달콩하였다.” 그 만화에는 특별한 충격이 없이 일상의 사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였고 더우기 그 화법이 “예전에 한번 피뜩 봤던 대로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지루하고 따분”하여 주인공의 사크라꼬에 대한 리해의 노력을 어느 정도 무의미하게 하는 듯했다. 주류(主流)가 아닌 그림풍격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그림은 아주 섬세하고 생동했다. 선 하나하나에도 많은 신경을 쓰며 모든 정력을 쏟아부은 듯했고 재현된 만화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이야기를 책 속에 락인해둔 것처럼 보였다. 만화도 컴퓨터로 그리는 시대에 돼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가? 주인공은 사크라꼬의 만화에 별다른 호기심을 품지 못하며 이듬해 봄이 되여 함께 우연히 만나 덮밥을 같이 먹으면서도 만화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그러다 그후 사크라꼬가 문득 동네에서 사라진다.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그로부터 또 한참 흘러 주인공은 녀자친구인 히토미와 함께 벚꽃구경을 하면서 겨우 일주일 밖에 피지 않는 벚꽃의 개화를 두고 짧은 만큼 아름다운 그 극치를 음미한다. “그 제한된 생명 속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벚꽃의 미는 창조 속에 존재하는 동시에 훼멸 속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벚꽃은 짧지만 기억 속에 오래 남아 그 생명을 또 다른 방식으로 연장한다.” 한시적인 생명력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의 녀자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크라꼬의 외로운 죽음이다. 사크라꼬는 사실 어디로 사라졌거나 실종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방에서 쓸쓸히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 것이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거나 고양이의 그릇에 오래동아 먼지가 쌓여있다거나 한 묘사들이 복선의 역할을 하는데 새로 이사 온 다카하시라는 일본인 녀대학생이 노크에 거의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남주인공과 달리 사크라꼬의 출입문을 노크하면서 결국 경찰에 의해 사크라꼬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사클꼬는 일주일 밖에 피지 않는 벚꽃처럼 잠시 이 동네에 살았던 것이며 주인공의 마음을 두드리다가 말없이 가버린 것이다. 특별히 주인공과 련애와 같은 미묘한 관계를 이루려고 한 것도 아니지만 주인공의 무덤덤함과 알수 없는 경계심에 의해 그 마음의 문을 노크하다가 가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바꾸어보면 주인공은 사크라꼬의 그러한 노크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꼈고 그녀의 출입문을 노크하려고 몇번이고 문 앞에 섰지만 두드리지 못한 것은 어딘가 주인공의 마음의 깊숙한 곳에 사크라꼬와 그녀를 둘러 싼 장소와 공간에 대해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떠나가버린 후, 주인공은 그녀의 만화를 마저 읽고나서 그 속의 러브스토리가 그녀의 인생과 첫사랑에 대한 기록이자 회억이며 한차례 ‘의식(仪式)’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해 가을에는 벚꽃이 피지 않았다는 것과 사크라꼬가 살던 집에 새로 온 사람에게 ‘얼룩이’를 ‘사크라’라고 소개하는데 이러한 여러가지 상징적인 장면들은 주인공의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려진다는 점과 노크에 그토록 린색했던 마음의 장벽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엿보이게 해준다. 소설의 마감에 ‘사크라’라고 개명한 ‘얼룩이’를 쓰다듬으며 울컥해하는 장면은 단편영화의 결말처럼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잘 처리되였는데 다만 그 사이에 감추어도 될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해버린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관계의 토대는 자아가치에 대한 상호승인에 있지 않을가?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세상에 부재(不在)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의 존재를, 또 그녀는 마음 속에 존재하는 고향에 대한 현실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와 인생과 삶에 어떤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 걸가?  2017년 제10기 동북아신문
9    [수기] 학부모 회의 댓글:  조회:176  추천:0  2021-10-09
학부모 회의 김명화 태어난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유치원 중반생이 된 손주 개학을 앞두고 학부모회의를 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아들며느리가 모두 직장에 출근하다보니 어린 손주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리고 오는 일은 예순을 지척에 두고 있는 나의 몫이 되었다. 아들며느리가 금년에는 회사에 휴가내기 힘든지 손주의 학부모회의에 나보고 참가하라한다. 모처럼 손주 학부모회의에 참석하게 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붕 뜬 아침이다. 애고사리 같은 손주의 보동보동한 손을 잡고 유치원 문 앞에 이르니 생기가 넘치는 젊은 선생님들이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일찌감치 대문앞까지 나와서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끔 아이 손을 잡고 해맑게 웃으면서 회의실에 들어가는 숱한 젊은 엄마들 가운데 훤칠하고 멋진 남자가 양 손에 하나씩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알고보니 3반에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란다. 오누이쌍둥이 아빠, 그러고 보니 나의 오빠도 오누이쌍둥이를 둔 아빠였는데... 그 남성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대학입학시험을 앞둔 고중3학년 학부모회의에 오빠가 부모를 대신해서 참가한 일이 떠올랐다. 41년전 일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였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아버지처럼 듬직한 오빠가 학교 식당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시골에는 중학교도 졸업못한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남존여비사상이 심했던 외할아버지가 외삼촌 둘만 야학공부를 시키는 바람에  어머니는 남동생들한테서 몰래 글을 배워서야 겨우 조선글을 뗄 수 있었다. 어려운 나날에 그렇게라도 글을 익혔기에 참군한 오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 이 막내딸이 보낸 편지도 읽을 수 있었다 . 그러던 작은 외삼촌은 길에서 주어온 총알을 가지고 놀다가 터져서 목숨을 잃었고 그 슬품을 이기지 못한 외할머니도  작은외삼촌을 따라 가셨다. 해방후, 외할아버지는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17살에 난 엄마를 시집 아니, 돈을 받고 시집이라고 보내놓고 큰외삼촌만 데리고 한국으로 갔다며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셨다. 그렇게 홀로 중국에 남은 어머니는 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했다. 이제 한국가서 친정식구들을 만나게 되면 먼저 글을 가르쳐준 남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고향집 마당에는 홍시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홍시를 유난히 반기는 딸을 위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특별히 심은 거라고 하며 해마다 설날이 되면 언 감은 꼭 사다가 찬물에  담가주면서 아직도 그 홍시나무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평생 학교문에 들어서지 못한 게 여한으로 남아서 그랬던지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인 우리 4남매를 남들 부럽지 않게 모두 고중공부까지 시켰다. 우리들도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세라 한결같이 공부를 잘했다. 어린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없이 궂은일, 바른일 가리지 않고 하느라고 어머니는 한번도 우리네 학부모회의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학부모회의를 앞둔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사무실에 불러놓고 이렇게 단단히 일러주었다.  "김명화, 이번 학부모회의는 아주 중요하니 부모님께서 꼭 참가하셔야 한다. 알았지? " 나는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지만 동네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조차 학부모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어머니가 20여리의 먼 시골길을 걸어서 학부모회의에 참석할 리 만무하다는 걸 마음속으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회의가 있던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밥을 먹으려고 학교 식당에 가고.있는데 같이 가던 친구가 느닷없이 "명화, 너의 오빠야!"라고 웨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닌게 아니라 오빠가 학교 식당 앞에서 우리를 보고 반갑게 웃고 있었다. 오빠를 보는 그 순간 나의 두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오빠가 "오~명화! 우리막내!"라고 부르면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오빠! 어떻게?"      나는 금시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 같아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막내야, 학부모회의가 있다는 걸 왜 미리 알리지 않았어? 너의 담임선생님 한선생님께서 널 칭찬하시더라. 문장을 잘 쓰고 랑송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구. 게다가 춤도 잘 추니 앞으로 사범학교를 나와 교원이 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오빠도 너의 선생님과 같은 생각이란다."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과 돈 10원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빠, 올케한테 드려요. 난 괜찮아요." 그 무렵, 올케는 오누이쌍둥이를 낳고 영양실조로 황달간염에 걸려 링겔주사를 맞고 있었고 어린 조카들은 우유를 사먹고 있는 힘든 형편이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로서는 오빠의 마음을 선뜻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빠는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한병을 꺼내 보여주면서 한 병 더 있으니 걱정말고 얼른 받으라고 밀어주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반죽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는 오빠의 따뜻한 사랑 앞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 날, 오빠가 학부모회의에 기적처럼 나타나 나를 응원해준 덕분에 그 뒤로 매일매일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여느때보다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매일 아침저녘으로 비타민C를 두알씩 챙겨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밤자습이 끝나면 과자로 허기를 달래면서 밤을 새며 공부를 한 덕분에 대학에 이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꿈까지 이루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우리 고향에서도 한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돈을 번다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막내야! 한국어시험에 만 합격되면 한국에 갈 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는구나. 네가 대신 알아보고 좀 등록해줄래? 더 늙기전에 돈을 벌어 층집사서 아들을 장가 보내고 로후대책도 마련해야겠구나. 막내야, 부탁한다." 나는 오빠의 부탁대로 어렵사리 인터넷으로 한국어시험 등록을 마쳤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어에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오빠는  우리 한국어학과 선생님들마저 깜짝 놀랄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되였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오빠는 전화를 걸어와 회포에 잠긴 목소리로 속심말을 털어놓았다.    " 막내야, 고맙다! 네 덕분에 엄마가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한국에 가게 되였다. 이제 가서 자리를 잡게되면  엄마의 고향 경상북도에 가서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외삼촌을 찾아뵐 거야, 생전이면 좋겠는데... 혹시 돌아가셨다면 산소에 찾아가 제사상을 올려 엄마의 마음을 전할 거야... 이제 돈을 많이 벌어올테니 오빠 걱정 말라..." 그런데 막로동이 너무 고달팠던 걸가? 한국땅을 밟은 지 26일 만에 오빠는 심장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오르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오누이쌍둥이, 그리고 그동안 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살아온 동생들과 작별인사 한마디도 없이... 이국땅의 반지하 세방에서 홀로 떠나야 했던 그 마지막 길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억울했을까... 오빠가 가시는 모습을 보지못해서 그런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끔 버스역이나 기차역, 공항 같은 데서 오빠와 닮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오빠!"하고 부르면서 뒤쫓아가게 된다. 그리고 오빠의 친구분들을 만나도 오빠 생각이 북받쳐올라 뜨거운 눈물을 훔친다. 또한 가끔 고향윗체방에서 오빠친구분들이 즐거운 모임 사진이랑 보면 우리 오빠도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요즘은 60이 청춘이라는데 59세인 아까운 나이에 우리 오빠는 ...  이 좋은 세월에 너무 일찍이 떠난 오빠인생이 너무나 가벼워서 조용히"오빠 !" 부르며 하얗게 밤도 새군한다... 그리운 고향에도 오빠가 돌아가신 후로 발길을 뚝 끊었다. 어머니와 오빠가 계시지 않는 고향, 홍시 나무만이 고향집을 지키는 추억으로만,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는 곳으로 남게 되였다. 나의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던 오빠의 모습을 새삼 되새겨 보게 한 손주의 학부모회의, 모든 게 방불히 어제 일인듯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어린 아이처럼 사랑하는 오빠를 애 타게 부르면서 흐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전화할 때마다 언제나 "오, 우리 막내, 명화구나,..."라며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불러주던 오빠의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사무치게 그립다.  김명화 :흑룡강성 동녕시 출생.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아동문학학회 회원.흑룡강성 조선말방송에 수필 우수상."아동문학샘터"에 시와 수필발표.동북삼성 한국어학과 한글짓기 우수지도상 등 수상.한국 KBS라디오 방송에 통신 다수 발표. 동북아신문
8    [고시 산책] 가장 슬픈 시대의 가장 슬픈 시 댓글:  조회:178  추천:0  2021-09-27
가장 슬픈 시대의 가장 슬픈 시 (심양 시인) 리문호 리문호 시인 시는 역사의 증언이다. 민족정서의 반영이다. 우리민족은 수많은 치욕과 굴욕, 비운의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깊은 정한이 잠재한 민족이다. 또한 비운의 역사 속에서 분발, 항쟁으로 무수한 선열들의 생명과 피로 나라를 보존한 민족이다. 이런 투쟁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강열한 민족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 정신의 중추가 되는 것은 문화, 풍속의 힘이다. 문화가 있는 민족은 쉽게 멸망하지 않고 정복당하지 않는다. 역사는 정의의 역사가 아니라 절대 강자의 역사이다. 그리고 매 시기마다 형세 판단은 중요한 전략과 전술 제정의 근거로 된다. 그릇된 판단은 그릇된 결과와 엄중한 민족적 재앙을 가져 온다. 이에 새로 부상한 청나라와 화친파, 척화파의 논쟁으로부터 정책을 척화파에 기울어 일어난 병자호란은 가장 침통한 역사 교훈이 된다. 결국 남한 산성에 포위된 인조는 성문을 나와 홍타시 앞에 세 번 절하고 돌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였으며 세자는 불모로 심양에 잡혀 오고 3만 아녀자들은 종, 첩으로 잡혀 갔다. 서울은 약탈과 방화로 하여 수라장이 되였으며 조선 왕조는 피폐 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굴욕으로 나라를 보존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심양에 거주하면서 심양 고궁에 구경갈 때마다 형장의 이슬로 된 애국 지사 삼학사가 생각 난다. 삼 학사를 알게 된 것은 1960년대 조선에서 출간된 을 읽고 부터이다.나는 이 책을 통해 삼 학사와 김상헌이 심양에 얽힌 한을 알게 되였다. 나는 그들의 시를 가장 슬픈 시대의 가장 슬픈 시로 생각한다.    1637년 삼 학사 홍익한(洪翼漢), 오달재(吳達濟), 윤집(尹集)이 척화한 죄로 청나라의 성경 심양에 잡혀왔고 1642년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 잡혀와 투옥 되였다. 그들은 청나라 황제 홍태극(洪太極)이가 자기의 신하로 되어 준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송죽 같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홍익한은 붓을 달래서 < 천만 번 죽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피를 북에 바르면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날아 갈 것이다> 라 하였다. 여기에 심양 옥중에서 쓴 김상헌과 삼학사의 시를 소개한다. 瀋獄送秋日感懷 金尙憲 忽忽殘方斷送秋 (홀홀잔방단송추) 一年光景水爭流 (일년광경수쟁류) 連天敗草西風急 (연천패초서풍급) 羃碛寒雲落日愁 (멱적한운낙일수) 蘇武幾時終返國 (소무기시종반국) 仲宣何處可登樓 (중선하처가등루) 騷人烈士無窮恨 (소인열사무궁한) 地下傷心亦白頭 (지하상심역백두) 어느덧 이국에서 가을철 보내니 한 해 세월은 물보다 빠르구나 하늘가 시든 풀에 서풍이 세차고 겹겹 싸인 찬 구름에 지는 해 슬프다 이 몸 어느 날에 고국에 돌아 가랴 고향을 바라 볼 높은 루각도 없구나 마음 열렬한 선비의 크나 큰 한은 옥 안의 시름으로 머리가 또 희네 瀋獄踏靑日詠懷 洪翼漢 陽坡細草坼新胎 (양파세초탁신태) 孤鳥樊籠意轉哀 (고조번롱의전애) 荊俗踏靑心外事 (형속답청심외사) 禁城浮白夢中來 (금성부백몽중내) 風飜夜石陰山動 (풍번야석음산동) 雪入靑凘月窟開 (설입청시월굴개) 饑渴僅能聊縷命 (기아근능료루명) 百年今日淚沾腮 (백년금일루첨시) 양지바른 언덕에 가는 풀 새싹 움트는데 조롱안에 갇힌 외로운 새처럼 마음만 애닲아라 남의 나라 답청하는 풍속 상관할 바 있으랴만 궁 안에서 즐겁게 술 마시던 일 꿈속에 떠오르네 밤 바람이 돌을 들춰 싸늘한 산 흔들리고 눈은 성애로 녹아 달은 활짝 밝구나 배고프고 목말라 애오라지 실날 같은 목숨 이어 가니 하루가 백 년인 듯 지루해 눈물이 뺨을 적시네 瀋獄寄內南氏 吳達濟 琴瑟恩情重 (금슬은정중) 相逢未二朞 (상봉미이기) 今成萬離別 (금성만이별) 虛負百年期 (허부백년기) 地闊書難寄 (지활서난기) 山長夢亦遲 (산장몽역지) 吾生未可卜 (오생미가복) 順護腹中兒 (순호복중아) 우리의 사랑 그지없는데 서로 만난지 두해가 안 되서 오늘은 아득히 헤어졌으니 백 년의 가약 허사가 되였구려 먼먼 이국에서 글 보내기 어렵고 산이 첩첩하여 꿈 또한 더디오 내 살기를 짐작할 수 없으니 뱃속의 아이나 잘 부탁하오 除夜 尹集 半壁殘燈照不眠 (반벽잔등조불면) 夜深虛館思悽然 (심야허관사처연) 萱堂定省今安否 (훤당정성금안부) 鶴髮明朝又一年 (학발명조우닐년) 벽에 가물거리는 등잔불 보며 잠들지 못해라 밤 깊은 허전한 방에서 오늘 따라 심란도 하여라 늙으신 어머님 오늘도 편안하신지 시름 많은 백발로 또 한 해를 맞겠구나 이상 삼 학사와 김상헌의 시는 천추에 남긴 절통한 상감의 시들이다. 그들의 나라에 대한 충정으로 쓴 시는 오늘에도 강한 진동을 남긴다. 그러나 선비의 충정으로는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침통한 교훈을 후세에 남긴다. 그리고 남북 분단이란 특정 위치와 한 반도를 둘러 싸고 복잡하게 얽힌 국제 형세 속에서 어떻게 평화적으로 슬기롭게 풀어 나가야 하는 가는 민족 앞에 커다란 숙제로 대두하였다    동북아신문
7    새롭게 태어나다, 외 4수 댓글:  조회:193  추천:0  2021-09-24
새롭게 태어나다, 외 4수 김화숙  육신을 끌고 밖으로만 나아갔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나라까지 떠나 와서도 또 어디로든 떠나는 꿈만 꾼다 수묵이 한지에 번지듯 내가 곱게 스며들 그런 곳이 어디 있을 것 같았다 육신이 나의 끝 나의 밖이라고 여기고부터 육신 안에 무한함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작은 눈이  세상과 우주를 끌어 담듯 육신 안에는 몇 십 년 걸어온 길과 만난 사람 느꼈던 희로애락이 한편의 대하드라마로 남아있다 밖으로의 확장은 씨앗이 잎 틔우고 가지 뻗어 꽃피고 열매 맺는 과정이라면 안으로의 확장은 씨앗이 다시 땅에 묻혀 살아온 모든 기억을 일으켜 몸 여는 법을 되살려 새로운 뿌리가 되는 과정이다 암흑 같은 절망과 고독을 견딜 수만 있다면 스스로를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여겨 죽어서 환생하기 전에 살아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겠다.   입동 참고 있던 울화통이 한꺼번에 터졌을까 창밖의 나뭇잎들이 관우의 얼굴색으로 변했다 그 흔한 꽃 한 송이 내걸지 못하는 운명을 슬퍼하듯 몸을 떨면 악몽처럼 나뭇잎이 진다 또 한해가 빠져나가 한층 깊어진 늙음을 두터운 겉옷으로 감싸며 겨울의 입구에서 나무와 키재기를 한다.   절묘한 갈등 컴퍼스는 보다 큰 원을 그리기 위해 몸을 낮춘다 낮추지 않고 넓어질 수는 없다 컴퍼스 체형과 꼭 닮은 나 구두굽이 높아질수록 걷는 보폭은 좁아진다 높이와 넓이 사이의 갈등 집중과 분산 사이 시와 시인인 나와의 절묘한 갈등   이별의 계절 봄은 오는 계절이고 가을은 가는 계절이다 연둣빛 돋아나듯 봄은 조용히 스며오는데 앞집 할머니 낙엽 쓸어 모으는 비질 소리처럼 가을은 버석대며 간다 창밖 마른나무 가지 위  아침명상을 하고 있던 새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새보다 내가 더 놀랐다 또 한 계절이 앙상한 나뭇가지와  나를 세워두고 서걱대며 떠나고 있다.   눈물에 갇힌 것들 가을비에 낙엽은 무겁게 가라앉고 그 위를 누르는 적막 가을비에 상념은 슬픈 날개 달고 그 위로 고이는 그리움 그리움을 데리고 적막을 건너다보면 그 끝에 먼저와 걸려있는 반짝이는 눈물들. 김화숙 약력 :  중국 심양 출생. 길림사범대학 철학과 졸업. 길림조중 교원(전). 월간 「문학세계」로 등단. 대한민국통일예술제 해외작가상. 제 12회 세계문학상 해외문학 시 부문 대상. 동포문학 10회 시 부문 최우수상. 세계문인협회 일본지회장.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시집 『아름다운 착각』(2015), 『빛이 오는 방식』(2017), 『날개는 꿈이 아니다』(2019). 출처 : 동북아신문(http://www.dbanews.com)
6    류춘옥 시 '도쿄의 조선족', 외 4수와 한영남 시평 댓글:  조회:283  추천:0  2021-09-23
한영남 시평 : 재팬 드림 그 실상과 허상에 대한 고발 및 디아스포라의 애환 류춘옥(柳春玉) 약력: 1978년 흑룡강성 녕안시 출생. 1998년 중국정법대학 수료. 2000년부터 일본 거주. 현재 일본 옥룡상사주식회사 전무 이사.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사무국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길림신문 수기상, ‘애심녀성컵’ 제4회 전국조선족여성 생활수기상, ‘청년생활’ 계림문화상 등 다수 수상. 도쿄의 조선족    나는 일본에 산다 세계 경제대국으로 꼽히는 아침의 나라 기모노를 입고 늘 생글거리는 미소가 하얀 백목련으로 아름다운 나라 이곳에서 나는 그 유명한 긴자거리를 옆집 쌍가매네집 놀러 가듯 동네돌이처럼 한다 초밥을 먹고 아사히를 마시며 사시미에 심취되기도 하지만 대화를 할라치면 발음부터 꼬인다 악센트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 나는 이방인 어쩔 수 없는 이방인 당신 재팬? 아니요! 차이나? 아니요! 나는 재일 조선족입니다 조선족? 코리아?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나는 말입니다 중국 조선족입니다! 동그란 도쿄에서 도쿄가 세상 전부인 듯이 생각하는 일본인들은 알 수가 없으리라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내 형제들을 한반도에서 북만주로 갔다가 이제 개혁개방으로 일본까지 건너와 이렇게 오겡끼데스까를 중얼거리는 내가 중국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김치를 좋아하는 내 아이들이 때로는 아리랑을 흥얼거린다는 사실을   도쿄의 유산 2020년 5월 29일 효고켄 타카라즈카시는 뉴스를 발표했다 효고켄 타카라즈카 시립병원에서 최후를 마감하신 90대 할머니께서 3580만엔을 병원에 기부하셨다고 했다 새로운 의료기기들을 구입해 더 많은 환자들한테 삶의 희망을 안겨주라는 따뜻한 말씀을 얹어서 90여 년의 긴 려정을 마치면서 소담한 꽃노을로 하늘 한 자락 곱게 물들이신 할머니 그날 락조는 무지개보다 아름다웠다   도쿄의 터널 어느 별에서 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지요 오 나의 도쿄 네모 반듯한 미소만 넘치는 곳 칼로 자르듯 거절하지 않는 곳 누군가에게는 천국이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겠지요 왜 여기 이러고 있는지 아무도 물어주지 않아요 오 나의 도쿄 나의 항구 하소연은 귀등으로 스치네요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꽃피는 거리 누군가에게는 가족마저 잃어야 하는 곳 가을도 아닌데 해살만 눈부시고 겨울도 아닌데 찬바람이 부는 곳 죽음과 환생의 갈림길을 수없이 오가며 방황이 반칙으로 결론나는 곳 오 도쿄 오 나의 도쿄 나의 청춘의 터널이여   도쿄의 텃새 도쿄의 까마귀는 길조도 흉조도 아니고 그냥 텃새라 부른다 도쿄의 아침은 그 까악까악 소리에 열리고 이 텃새들은 까만 눈이 아닌 냄새로 먹이를 찾아헤맨다 그물을 덮어 길바닥에 내놓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덮치는 도심 속 무법자들 어둠이 춤 출 때에야 비로소 시큼한 입을 다시며 시커먼 하늘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도쿄는 매일마다 먹이를 찾아헤매는 텃새들의 보금자리이고 아침마다 잠 깨우는 까마귀 까마귀 남편과 새끼들을 먹이겠노라 아침부터 주방에서 분주한 나도 도쿄의 한 마리 텃새일가 이름만이라도 철새라 불리웠으면 언젠가 고향 돌아갈 아아 그 이름 철새 철새   도쿄의 파티 요즘 도쿄의 파티에는 맥주도 없고 와인도 없다 그 흔하디 흔한 신선한 사시미도 없고  꿀처럼 달달한 디저트도 없다 황량한 들판에서 말라가는 갈대처럼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누렇게 부스럭거리는  가을 국화들의 모임처럼  물 한모금 없이 목만 타들어간다 지난 해 바닥을 치던 무우값처럼 초대장 가격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올해 하늘을 찌르던 마스크값처럼 초대받은 손님들의 생활이 활짝 피여난 것도 아니겠는데 봉투의 무게는 변함없고 어쩐지 선거권 한표가 늘 모자란 도쿄의 어눌한 파티   문학비평 재팬 드림 그 실상과 허상에 대한 고발 및 디아스포라의 애환 ㅡ 류춘옥시인의 도쿄시 시리즈에 부쳐    한영남   한영남 약력 : 한영남 1967년 길림성 안도 출생. 시, 소설, 수필, 실화, 평론 등 300여만자 발표. 소설집 , 장시집 등 출간. 중국조선족수필상, 중국조선족동시상, 중국조선족연해문학상,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다수 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 자유기고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있다. 아메라칸 드림(Amrican Dream)이라는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James Truslow Adams라는 작가가 쓴 『Epic of America(미국의 서사시)』(1931)라는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배경은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에 따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열심히만 일하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결국 미국이민의 꿈으로 연결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꿈을 지향하는 용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일본 땅을 밟은 중국의 조선족들 역시 재팬 드림을 꿈꾸었고 아직 일본을 모를 때 그들에게 도쿄는 천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교육에만 물 젖어 있던 그들에게 자본주의 세계는 냉혹하기 그지없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혹자는 눈물을 삼키며 혹자는 침을 뱉으며 혹자는 엿을 먹이며 정이 들까 말까 하는 꿈의 천당을 떠나야 했다. 그들에게는 자본주의 생리만을 고집하는 재팬이 인정머리 없는 고장이었고 다시 뒤돌아보고도 싶지 않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성실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면서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2세 3세를 낳아 키우면서 그들만의 삶의 신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이라고 손쉽게 그런 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들도 새로운 환경, 새로운 풍토, 새로운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깨물어 삼키며 비로소 오늘의 생활을 가꾸어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들은 일본에 사는, 아니 도쿄에 사는 조선족으로서의 당당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중국조선족들이 일본에서의 생활을 소설로, 수필로, 실화로, 기행문으로 적어왔지만 시문학으로, 그것도 를 꺼내들고 세상에 이름을 알려온 이는 일찍 없었다. 그 경이로운 작업을 류춘옥 시인은 해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시작품의 호불호를 떠나서 라는 타이틀만 가지고도 벌써 류춘옥 시인이 성공한 시인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도쿄시 시리즈 창작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1인으로서 이 시리즈에는 일본에서 재팬 드림을 위해 엎어지며 뒹굴며 몸부림쳐온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이 적라라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다. 구체적인 시작품에서 더욱 소상하게 밝히겠거니와 이와 같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시작품의 완성만을 위해 오롯이 제3자의 각도에서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스로 벌거벗고 세상의 수술대위에 오르는 행위에 다름 아니며 자신과 자기 주변 지인들의 아픈 상처에 메스를 들이대는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인 까닭이다. 어쨌거나 그 어려운 작업을 류춘옥 시인은 해냈고 그것이 이제 라는 타이틀로 우리 앞에 성큼 와주었다. 구체 작품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자. 시 은 제목 자체부터 포장 따위를 걷어내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한테 앵글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그런가 하면 를 입고 을 먹으며 를 마시고 에 심취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일본인이 다 되어버린 듯 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발음을 들어보면 어김없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을 받는다. 일본인, 한국인으로 오해를 받을 때마다 반발처럼 치켜드는 것이 바로 라는 말이다. 못살고 낙후할망정 그것은 를 낳아 키워준 조국이요 고향인 까닭이다. 독자들은 시줄에 이끌려 이 대목까지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뭉클해내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반성해보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욱 숨김없이 까발린다. 도쿄가 세상 전부인듯이 생각하는 일본인들은 알 수가 없으리라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내 형제들을 한반도에서 북만주로 갔다가 이제 개혁개방으로 일본까지 건너와 이렇게 오겡끼데스까를 중얼거리는 내가 중국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김치를 좋아하는 내 아이들이 때로는 아리랑을 흥얼거린다는 사실을 ㅡ 시 에서 재팬들의 포위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중국 조선족임을 밝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자랑스럽다. 가난하고 헐벗었다고 어머니가 아닐 수 없듯이 시인에게 있어 낙후하다고 해서 조국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거기에 이 시의 핵이 묻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은 폭발하면서 독자들한테 엄청난 파장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시 을 보기로 하자. 시에서는 뉴스를 생방송하고 있다. 뉴스를 발표하는 연 월 일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신빙성을 부여하고 뉴스시의 정의에 충실하고 있다. 최근 등장한 이 뉴스시에 대해 일부 시인들은 사건에만 치중하면서 뉴스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을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류춘옥 시인은 뉴스시의 생명인 정확성을 확보해줌으로써 독자들의 믿음을 견인해내고 그로부터 독자와의 소통에 공감대를 형성시키고 있다. 90대 할머니가 3580만엔을 병원에 기부했다는 뉴스가 전부의 내용이다. 여기서도 구체적인 숫자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신빙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 일본에 등 돌려버린 사람들한테도 따끔한 일침이 될 수 있는 시이다. 왜냐면 자본주의 사회가 냉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도 인정이 있고 가슴 따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시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지극히 객관화된 시선으로 바라봤음을 증명해보인 셈이기도 하다. 시의 말미를 같이 보기로 하자. 90여 년의 긴 려정을 마치면서 소담한 꽃노을로 하늘 한 자락 곱게 물들이신 할머니 그날 락조는 무지개보다 아름다웠다 ㅡ 시 에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인정이 넘치고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그리하여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임을 굵고 큰 목소리가 아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 을 같이 걸어가 보기로 하자. 이 시야말로 도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를 냉철하게 객관화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이라는 간결한 시구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들에 대한 총적인 인상을 집약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일 수 있는 일본 도쿄는 왜 시적 화자한테 이며 로 자리매김 되고 있을까. 그것은 청춘의 한 토막을 일본에서 생활의 지반을 닦기 위해 바쳐온 시인의 인생 경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일본에서 살아본 조선족이라면 혹은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시에서는 이라는 재미나는 표현을 만날 수 있다. 방황이 반칙이라면 그럼 반칙을 하지 말라는, 못한다는 말로 풀이되겠는데 그것은 어떤 상황이란 말인가? 그럴 것이다.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없이 겪었을 법한 생활이고 이유 불문하고 따라야 했던 무가내한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시인은 더없이 냉철, 냉정 지어 냉혹하리만치 사정을 두지 않고 꼬집는다. 시에는 이와 같은 발상들이 숨어 있어야 시가 시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 를 구경해보자. 드디어 우리한테도 익숙한 새가 등장한다. 그런데 하필 까마귀이다. 우리는 대체로 까마귀를 보면 재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까마귀야말로 효조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까마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시인의 눈에 비친 도쿄의 까마귀는 어떤 모습일까. 무법자들이다. 그리고 까마귀들이 번창하면서 다른 새들은 다 쫓겨버린 셈이고 그리하여 까마귀는 텃새로 군림한다. 그렇다면 는 어떤가. 나 역시 한 마리 에 불과한 것이다. 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시가 끝나도 괜찮은 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한 번 잡은 시상을 절대 허투루 놓치지 않는다. 결국 시인은 까마귀에서 라는 낱말을 떠올리고 이라는 낱말을 길어올리고 있다. 까마귀가 새삼스레 뭉클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시는 시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로나사태가 터진 다음 창작된 것으로 헤아려진다. 는 파티라니? 왜 그런 황당한 일이 생겨야 하는 것일까. 황량한 들판에서 말라가는 갈대처럼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누렇게 부스럭거리는  가을 국화들의 모임처럼 ㅡ 시 에서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 파티는 스산하기 짝이 없다. 현실고발형의 시는 아무래도 가슴 아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백안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시인이다. 그런 현실을 폭로 비판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도록 견인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는 코로나시대의 한 단면을 파티라는 특정 모임을 빌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는 이나 등의 말들로 현장감을 긴장시키고 있으며 등의 시구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할수무가내한 삶의 측면에도 렌즈를 돌리고 있어 주목된다. 이상 류춘옥 시인의 를 살펴보았다. 긍정적인 것은 시인의 도쿄시 시리즈가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도쿄에서의 조선족들의 삶에 서치라이트를 켜댈지 모르지만 라는 타이틀을 처음 내건 시인이라는 점과 시들이 점차 성숙되고 완숙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가 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코리안 드림, 아메리칸 드림, 재팬 드림 등 꿈을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는 이들에게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류춘옥 시인의 도쿄시 시리즈는 미래지향적이며 건전한 시행보가 될 것이라고 믿어본다. 좋은 시를 써준 시인에게 박수를 보내며 시인의 보다 성숙된 도쿄시를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21년 8월 할빈에서    
5    생일선물 댓글:  조회:195  추천:0  2021-09-22
[수필] 생일선물 김경옥 50대 초반에 할머니가 되어서  요즘치고는 좀 이른 편이라 쑥스러울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외손주들이 재롱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매일매일  할머니소리를 들어도 행복하기 그지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둘째 외손주 두돌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우부터  시작해서 없는것 없이  조목조목 다 챙기다보니 상다리가 부러질까 걱정이다. 게다가 친할머니, 큰아빠, 큰엄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엄마, 아빠의  생일선물이 방 천장이 안 보일만큼 높이높이 쌓였다. 요즘 애들은 그야말로 공주이고 왕자이다.  옛날같았으면 엄두도 못냈을텐데 요즘은 참  신기하기도 하다. 아기때부터 가지고 싶은거  다 가지고  먹고 싶은거  다 먹으니 말이다.   요즘 말로 라떼는 아이한테 과자나  놀이감을 사주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일년을 벼르고 벼르다가 생일날이 돼서야 겨우 장난감 하나 사주고 간식은 생 무나 마늘장아찌 등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 세대는 아껴쓰고 모으기 바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돈을 별로 많이 모으지도 못했고 고질병만 얻었다. 외손주 생일상을 바라보라니 문득 과거 소녀시절  엄마밖에 모르던  때가 생각났다.  1976년 그 해 겨울, 내가 열두살때 일이다. 음력설이 지나고 엄마생신이 돌아올 무렵이 되었다. 철이 들기 시작한 나는 우리 형제들을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가진 돈은 없고  동생들 셋과 머리 맞대고 토론 끝에  고물을 주어서 팔기로 했다.  하지만  엄동설한(중국 동북은 영하30도좌우)이라 시골에는 밖에 나가면 온통 흰눈천지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동네 집집마다 집옆에 쓰레기 버리는 곳이 있었는데  나는 삽과 꽉지(괭이의 방언)를 들고 동생 (막내동생은 그 당시 네살이었다.)들을 데리고  눈을 파 헤치면서 비닐이나 신발  버린것을 찿았다. 고무신을 신고 따라 나선 막둥이는  뒤뚱거리다가 미끌어 넘어져 눈속에 빠져  절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다.동생들 얼굴은 얼어서 사과알처럼 빨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 생일선물 사려는 생각에 계속 눈을 파헤쳤다. 내가 파헤치면 동생들은 눈속에서  폐 비닐조각이랑 입을 헤벌린 버려진 고무신발을 찾아 소쿠리에 담았다. 한나절 동네를 다 헤집고 나서야 겨우 고물 한 소쿠리 주었다. 우리는 그 길로 합작사(동네슈퍼)에 가져다 팔았다.슈퍼 아저씨는 기특하다며 저울에 달지도 않고 20전을 주었다. 돈을 받아들고 우리는 다 같이 끌어안고 퐁당퐁당 뛰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처음 벌어 본 돈이었다. 돈을  꼬깃꼬깃 만지작거리면서 슈퍼안을 왔다 갔다가 하다가 나는 결국 꽃감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며칠전 설날에 엄마가 꽃감을 사왔었는데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당신은 꽃감을 안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왠지 엄마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곶감은 벌써 내 목구멍을 넘어간 다음이었다.그래서 엄마 생일선물을 곶감으로 정했다. 우리는 슈퍼 아저씨한테서 20전으로 곶감  세개를  샀다.  우리 넷은 곶감을 사들고 줄을 서서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시퍼렇게 되었지만 우리는 엄청 신났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동생들 얼굴이 얼도록 밖에서 데리고 놀았다고 맏이인 나를 엄청 나무랐다. 나의 커다란 두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억울한 듯 엄마를 쳐다보며 곶감을 쑥 내밀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곶감을 내려놓고 빨갛게 언 우리 손을 차례로 당신의 겨드랑이에 넣고 녹여줬다. 그때 나는 엄마의 크고 고운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소녀시절 엄마에게 했던 첫 선물이었다. 그때는 어른이 되면  더 많은 선물을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 살기만 급급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정작 많이 못해 드렸다. 어릴때 할아버지,할머니와 중국으로 이주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적을 회복하신 부모님 덕분에  나도 한국에 와서 정착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지금은 어느새 살림이 많이  폈지만 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초심은 잃고 자기 사는데만 혈안이 되어  엄마를 많이 못 챙겨드린것 같다. 늘 고생만 하신 우리 엄마, 늘그막에 난소암 판정을 받으셨지만 나는 항상 내 남편,내 자식,내 손주가 우선이었던것 같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더니  아무래도 이 말은 틀린것 같다. 수십년간 고생한 엄마가 이런 몹쓸병에 걸리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다. 나는 아직 엄마에게 못 해드린것이 많은데 엄마는 점점 기력이 떨어진다. 두번의 대수술과 수차례 항암치료를 반복했는데 언제까지 버티실지 모르겠다. 이제 며칠 지나 정월 열흘이면  엄마의 80세 생신인데 나는 과연 엄마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할 지 모르겠다. 올해는  코로나때문에  팔순잔치도 못하게 되었고 엄마 모시고 형제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오손도손  즐겁게 보낼수 있을지 고민이다. 연로하신 엄마한테는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멍 때리고 있다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외손주 생일상을 차리느라 장만한 음식더미와 생일선물을 바라보던 나는 급기야 반찬통과 보자기를 가져와 바리바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딸래미의 "엄마, 어디가요?"라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김경옥 프로필: 흑룡강성 녕안출생.수필 다수 발표. 현재 한국에 거주. 동북아신문
4    [단편소설] 혼주 댓글:  조회:293  추천:0  2021-09-18
[장문영 단편소설] 혼주 장문영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침부터 명선이는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는 머리를 감으랴 화장을 하랴 분주히 서둘렀다. 남편의 고향친구 철석이네 딸 결혼식에 가야 했다.  참, 이게 얼마만의 서울 나들이냐?  괜히 신바람이 나서 코노래가 절로 났다. 남편 기호도 벌써 옷을 갈아입고 괜히 집안팎을 들락날락 서성대며 부산스럽다.  망할 놈의 코로나 이후로 일년반동안 경기도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서울 근처에도 안가다보니 친구들 얼굴도 잊어먹게 생겼다. 마지막 친구모임인 19년 년말송년회때 모여서는 ‘5학년’이 된 기념으로 이제 남은 하루하루를 즐겁고 신나게 살자는 인생목표를 세우고 의기투합하여 새해에는 1박2일로 어디 펜션이라도 얻어 좋은 추억 만들어 보자고 새해 모임계획까지 거창하게 세웠는데 그것도 무산됐다. 모임은 커녕 회사ㅡ집ㅡ회사, 이렇게 두 점 사이만 토끼처럼 왕복을 한 지도 어언간 일년 반이 되여 갔다.  처음엔 회사서도 단속하지만 겁도 나고 해서 진짜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TV에서 시키는대로 회식도 일체 안하고 방콕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코로나에 내성이 생겼나 보다. 마스크만 끼고 조심하면 괜찮겠지 하고 마음의 탕개가 풀어졌다. 오래동안 외부활동을 못한 보상심리도 생겼고 고향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찐하게 술 한잔 하고 싶어졌다.  “여보, 아직 멀었소? 늦겠소 참.” “다 됐어요, 보채기는, 자기도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 볼 생각하니 조바심 났구만요, 호호…다됐어요, 아직 안늦은데 뭘 그리….”  “가서 술한잔 하려면 차를 두고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가야하는데  버스기다리는데 시간 많이 걸릴수도 있구 …” “다 됐어요, 가요, 가.” 명선이는 헤라쿠션의 퍼프로 얼굴에 잡티부분을 한번 더 눌러주고 화장을 마무리했다. 매일 마스크를 끼고 다니니 화장해도 눈위로는 보이지도 않고 마스크에 화장품 묻는 것도 귀찮고 해서 옛날에 매일매일 화장 곱게하고 출근하던 습관이 무색하게 요즘은 스킨로션만 바를때가  많았다. 갑자기 풀 메이크업을 하려니 화장이 뜨면서 잘  먹지도 않는다.  화장을 하는 내내 친구 미영이 얼굴이 떠올랐다. 작년에 결혼날짜 받았다고 전화를 주며 뭐부터 준비를 해야지? 정말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하고 기쁨반 걱정반 너스레를 떨던 친구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코로나 판국에 무슨 결혼식을 올린다고 그러냐고 하겠지만, 코로나 유행전부터 결혼말이 오갔는데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작년 5월로 예식장을 잡았다가 10월로 미루고 다시 새해 1월달로 변경했는데 3차 대유행조짐이 있어 또 식을 못올리게 됐단다.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예식장의 통보가 와서 울며겨자먹기로 형편껏 하기로 했단다. 어찌보면 신랑신부들이 젤 불쌍한 피해자들이다. 평생을 두고 잊지못할 행복하고 뜻깊은 날에  많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데  코로나로 의도치않게  된서리를 맞았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자꾸 결혼식이 미뤄지자 미영이는 속상하다고 자주 전화를 해왔었다.  솔직히 남들은 아들딸 다 시집장가 보내도 그렇게 내숭을 떨지 않더니만 친구는 좀 유별난 것 같았다. 특히 결혼식장에 혼주로 앉는 게 무슨 벼슬자리를 얻는 것처럼 유난히도 생색을 냈다.   “그건 모르는 소리, 내 처지에서 혼주자리에 앉는게 얼마나 영광인데 얘? 그건, 내가 철석씨와 살면서 내가 할 도리를 다했다는 말이 아니야? 더욱이 이붓에미로 자식한테 당당히 인정을 받고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리고 친구들이랑 세상 사람들한테 내가 인정받고 평가 받는 자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너무 소심하고 야단스러운가? 호호.”  아무튼, 미영이는 말을 해도 똑 부러지게 해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남편들 끼리 꽤 친하게 지내다 보니 코로나 전에는 부부동반으로 자주 만나 술 파티도 열고 같이 여행도 다니곤 했다. 친구네 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고 사발 몇 개가 있는 것 까지 서로가 환히 알고 있을 정도다. 제남편 흉을 보다가도 남편들이 어리둥절해서 다가오면 아닌 보살 손벽을 치며 능청을 떠는 사이가 됐었다. 다 같이 딸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미영이마음이자 자기 마음 같았다.      혼주가 된 친구가 빨리 보고싶다. 코로나전까지만 해도 친구모임도 자주 있고 대림이나 구로의 예식장 같은데서도 자주 만났었는데, 세월이 하도 수상해 이젠 얼굴 본지도 한참이 됐다.  오늘 가면 예쁜 한복입고  메이크업까지 받아서 이쁘게 단장했을 미영이를 생각하며 명선이도 갖고있는 옷들중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옷을 골라입고 길을 나섰다.  두 사람이 서둘러 신도림 역부근에 위치한 예식장에 도착해보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각자 여러 가지 색상의 마스크를 낀채 큰 예식장홀에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  같았다. 더는 방구석을 못참고 이 기회에 코바람이나 씌우려는 심산들인 것 같았다. 사상 유례없는 마스크 행색들이지만 이 일년이 넘는 시간동안 많이들 습관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마스크안끼면 허전할 지경이다. 중국에 있을 때 매일 만나고 부딪치고 하면서 정겹게 지냈던 고향마을 반가운 분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도 담소를 나누었다.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터졌다.  “어마야, 누군가 했네.”   “마스크끼니 못알아봤소!”  명선이는 미영이를 찾아 사람들 틈 사이로 분주히 눈길을 옮겼다.  아마 이런날은 무척 바쁘겠지 싶으면서도 손잡고 직접 축하라도 해주고 싶어서 신부대기실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부대기실에는 하아얀 드레스를 곱게 받쳐입고 부케를 든 신부가 검은정장을 입은 예식장 직원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하객들과 한창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신부님만 마스크 벗고 다른분들은 벗으면 안돼요. 신부님도 사진 다 찍었으면 마스크 쓸게요” “손 님~!  마스크 끼셔야 해요, 이러다 보건소 직원분들 오시면 큰일나요!”  한 친척이 마스크벗고 사진 찍으려다가 직원한테 야단을 맞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평생을 두고두고 간직할 소중한 결혼식 사진들이 마스크로 도배됐다. 휴~, 먼 훗날 그땐 그랬었단다 하면서 옛말하는 날이 오겠지? 신부대기실에서 미영이를 못찾은 명선이는 다시 홀로 나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신랑신부 부조석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자기눈을 의심하듯 다시 자세히 봤다.  분명 양복을 입고 꽃을 단 남편 친구 철석이 옆에 분홍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고 서있는 사람은 철석의 아내 미영이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세상에나,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명선이는 마침 담배 피우러 1층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신랑을 발견하자 그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가서 목소리 죽여 물었다.      “자기야, 철석이옆에 저 여자 누구야?”  “아, 저 여자~ 철석이 본처지 누구겠어, 당신은 첨 보겠네, 애가 어려서 이혼 했으니”   명선이는 갑자기 머리를 한매 맞은 듯 띵해 났다. 그럼 미영이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서 미영의 번호를 찾아 눌러보니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명선이는 이 시각, 그 어딘가에서 외로이 있을 미영이의 마음이 남의일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미영이가 철석이와 재혼을 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다.  뭐, 다 그렇구 그런 사연이 있어서 자기 혼인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새로 만난 인연들은 서로 늦게 만난게 한스러울만큼 금슬이 좋지 않았던가!? 기호와 재혼을 해서 알콩달콩 살고 있는 자신도 부러워 늘 항상 롤모델 삼고싶을  만큼 다정한 잉꼬부부였다.   서로 각자 딸을 데리고 재혼한 기호네 부부와 달리  철석이네는 철석이 딸 하나 뿐이였는데 불임이였던 미영이는  철석이가 데려온 딸애를 지극정성을 다해 키웠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다 보니 온갖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키웠었다. 딸도 엄마 엄마 하면서 팔짱 꼭 끼고  쇼핑도 다니고 영화보러도 다니는 여느 친모녀사이 부럽지 않게 보였었다.  명선이는 누구한테 머리 하나 얻어맞은 듯 너무나 큰 충격을 먹었다. 한편 미영이한테 알 수 없는 동지의식이 생겨났다.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이럴 수가 없지 않는가!      명선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결혼식장에 입장을 했다. 옆테이블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철석이 처는 안보이네.” “오, 집에 있대, 딸애가 글쎄 지 엄마 혼주 앉힌다고 십여 년만에 연락했대, 피줄이 무섭지머” “암만 잘해주면 뭐해 잘 키워줘 봤자, 그래도 낳아준 엄마 찾는데…이 결혼식도 철석이네가 다 해주는 거라고 하던데, 쯧쯧.” ……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길에 명선이는 남편한테 조용히 물었다.  “자기는 철석이네 결혼식 보니 어때?”  “뭐가?”  코로나 때문에 예전의 동포들 관행이였던 결혼식의  기본 3차-부페,노래방,중국식당 코스는 싹 취소되고 뷔페서도 방역수칙을 지켜야 해서 멀리씩 떨어져 앉는 바람에 혼자서 한잔 마신 것 가지고는 영 성에 차지 않아 서운하던 남편 기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서 아내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나 보다. 어쩌다 서울까지 와서 1차로 끝나는게 못내 아쉬워서 “옛날같으면…” 하고 술에 간이 동동 뜰때까지 먹고 마시던 옛날 생각을 하고있을 것이다. “뭐긴 뭐겠어요, 철석이 본처가 혼주자리에 척 앉아있구 미영이는 집에서 혼자있는거 말이지” “아니 당연한거 아니야? 애 친엄마인데…그리구 미영이도 그렇지, 뭐 안오구 그럴꺼까지 있어, 다들 사정모르는거도  아니구  굳이 그렇게 까지 할 것 있나?” 명선이는 한지붕아래 살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서늘한 찬 바람 한오리가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럼 남편의 딸 지혜도 결혼식 때 제 친엄마를 불러 혼주자리에 앉힐까? 그럼 난 결혼식에 참가해야 하나? 하지말아야 하나? 내딸 은수가 결혼할 때는? 지긋지긋해서 그림자도 보기 싫은 전 남편이랑 나란히 앉아 사위의 절을 받아야 하나? 그때 이사람은 어디에 있구?…. 명선이는 아직은 딸애들이 학생들이라 생각해 본적 조차 없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집에 돌아와서 저녘에 TV를 보는데 MBN의  ‘속풀이쇼 동치미’에서 재혼가정의 자녀 결혼식에 혼주로 누가 앉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연예인들이 열띤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2021.  5.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침부터 명선이는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는 머리를 감으랴 화장을 하랴 분주히 서둘렀다. 남편의 고향친구 철석이네 딸 결혼식에 가야 했다.  참, 이게 얼마만의 서울 나들이냐?  괜히 신바람이 나서 코노래가 절로 났다. 남편 기호도 벌써 옷을 갈아입고 괜히 집안팎을 들락날락 서성대며 부산스럽다.  망할 놈의 코로나 이후로 일년반동안 경기도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 서울 근처에도 안가다보니 친구들 얼굴도 잊어먹게 생겼다. 마지막 친구모임인 19년 년말송년회때 모여서는 ‘5학년’이 된 기념으로 이제 남은 하루하루를 즐겁고 신나게 살자는 인생목표를 세우고 의기투합하여 새해에는 1박2일로 어디 펜션이라도 얻어 좋은 추억 만들어 보자고 새해 모임계획까지 거창하게 세웠는데 그것도 무산됐다. 모임은 커녕 회사ㅡ집ㅡ회사, 이렇게 두 점 사이만 토끼처럼 왕복을 한 지도 어언간 일년 반이 되여 갔다.  처음엔 회사서도 단속하지만 겁도 나고 해서 진짜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TV에서 시키는대로 회식도 일체 안하고 방콕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코로나에 내성이 생겼나 보다. 마스크만 끼고 조심하면 괜찮겠지 하고 마음의 탕개가 풀어졌다. 오래동안 외부활동을 못한 보상심리도 생겼고 고향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찐하게 술 한잔 하고 싶어졌다.  “여보, 아직 멀었소? 늦겠소 참.” “다 됐어요, 보채기는, 자기도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 볼 생각하니 조바심 났구만요, 호호…다됐어요, 아직 안늦은데 뭘 그리….”  “가서 술한잔 하려면 차를 두고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가야하는데  버스기다리는데 시간 많이 걸릴수도 있구 …” “다 됐어요, 가요, 가.” 명선이는 헤라쿠션의 퍼프로 얼굴에 잡티부분을 한번 더 눌러주고 화장을 마무리했다. 매일 마스크를 끼고 다니니 화장해도 눈위로는 보이지도 않고 마스크에 화장품 묻는 것도 귀찮고 해서 옛날에 매일매일 화장 곱게하고 출근하던 습관이 무색하게 요즘은 스킨로션만 바를때가  많았다. 갑자기 풀 메이크업을 하려니 화장이 뜨면서 잘  먹지도 않는다.  화장을 하는 내내 친구 미영이 얼굴이 떠올랐다. 작년에 결혼날짜 받았다고 전화를 주며 뭐부터 준비를 해야지? 정말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하고 기쁨반 걱정반 너스레를 떨던 친구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코로나 판국에 무슨 결혼식을 올린다고 그러냐고 하겠지만, 코로나 유행전부터 결혼말이 오갔는데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작년 5월로 예식장을 잡았다가 10월로 미루고 다시 새해 1월달로 변경했는데 3차 대유행조짐이 있어 또 식을 못올리게 됐단다.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예식장의 통보가 와서 울며겨자먹기로 형편껏 하기로 했단다. 어찌보면 신랑신부들이 젤 불쌍한 피해자들이다. 평생을 두고 잊지못할 행복하고 뜻깊은 날에  많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데  코로나로 의도치않게  된서리를 맞았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자꾸 결혼식이 미뤄지자 미영이는 속상하다고 자주 전화를 해왔었다.  솔직히 남들은 아들딸 다 시집장가 보내도 그렇게 내숭을 떨지 않더니만 친구는 좀 유별난 것 같았다. 특히 결혼식장에 혼주로 앉는 게 무슨 벼슬자리를 얻는 것처럼 유난히도 생색을 냈다.   “그건 모르는 소리, 내 처지에서 혼주자리에 앉는게 얼마나 영광인데 얘? 그건, 내가 철석씨와 살면서 내가 할 도리를 다했다는 말이 아니야? 더욱이 이붓에미로 자식한테 당당히 인정을 받고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리고 친구들이랑 세상 사람들한테 내가 인정받고 평가 받는 자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너무 소심하고 야단스러운가? 호호.”  아무튼, 미영이는 말을 해도 똑 부러지게 해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남편들 끼리 꽤 친하게 지내다 보니 코로나 전에는 부부동반으로 자주 만나 술 파티도 열고 같이 여행도 다니곤 했다. 친구네 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고 사발 몇 개가 있는 것 까지 서로가 환히 알고 있을 정도다. 제남편 흉을 보다가도 남편들이 어리둥절해서 다가오면 아닌 보살 손벽을 치며 능청을 떠는 사이가 됐었다. 다 같이 딸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미영이마음이자 자기 마음 같았다.      혼주가 된 친구가 빨리 보고싶다. 코로나전까지만 해도 친구모임도 자주 있고 대림이나 구로의 예식장 같은데서도 자주 만났었는데, 세월이 하도 수상해 이젠 얼굴 본지도 한참이 됐다.  오늘 가면 예쁜 한복입고  메이크업까지 받아서 이쁘게 단장했을 미영이를 생각하며 명선이도 갖고있는 옷들중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옷을 골라입고 길을 나섰다.  두 사람이 서둘러 신도림 역부근에 위치한 예식장에 도착해보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각자 여러 가지 색상의 마스크를 낀채 큰 예식장홀에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  같았다. 더는 방구석을 못참고 이 기회에 코바람이나 씌우려는 심산들인 것 같았다. 사상 유례없는 마스크 행색들이지만 이 일년이 넘는 시간동안 많이들 습관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마스크안끼면 허전할 지경이다. 중국에 있을 때 매일 만나고 부딪치고 하면서 정겹게 지냈던 고향마을 반가운 분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도 담소를 나누었다.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터졌다.  “어마야, 누군가 했네.”   “마스크끼니 못알아봤소!”  명선이는 미영이를 찾아 사람들 틈 사이로 분주히 눈길을 옮겼다.  아마 이런날은 무척 바쁘겠지 싶으면서도 손잡고 직접 축하라도 해주고 싶어서 신부대기실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부대기실에는 하아얀 드레스를 곱게 받쳐입고 부케를 든 신부가 검은정장을 입은 예식장 직원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하객들과 한창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신부님만 마스크 벗고 다른분들은 벗으면 안돼요. 신부님도 사진 다 찍었으면 마스크 쓸게요” “손 님~!  마스크 끼셔야 해요, 이러다 보건소 직원분들 오시면 큰일나요!”  한 친척이 마스크벗고 사진 찍으려다가 직원한테 야단을 맞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평생을 두고두고 간직할 소중한 결혼식 사진들이 마스크로 도배됐다. 휴~, 먼 훗날 그땐 그랬었단다 하면서 옛말하는 날이 오겠지? 신부대기실에서 미영이를 못찾은 명선이는 다시 홀로 나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신랑신부 부조석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자기눈을 의심하듯 다시 자세히 봤다.  분명 양복을 입고 꽃을 단 남편 친구 철석이 옆에 분홍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고 서있는 사람은 철석의 아내 미영이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세상에나,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명선이는 마침 담배 피우러 1층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신랑을 발견하자 그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가서 목소리 죽여 물었다.      “자기야, 철석이옆에 저 여자 누구야?”  “아, 저 여자~ 철석이 본처지 누구겠어, 당신은 첨 보겠네, 애가 어려서 이혼 했으니”   명선이는 갑자기 머리를 한매 맞은 듯 띵해 났다. 그럼 미영이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서 미영의 번호를 찾아 눌러보니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명선이는 이 시각, 그 어딘가에서 외로이 있을 미영이의 마음이 남의일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미영이가 철석이와 재혼을 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다.  뭐, 다 그렇구 그런 사연이 있어서 자기 혼인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새로 만난 인연들은 서로 늦게 만난게 한스러울만큼 금슬이 좋지 않았던가!? 기호와 재혼을 해서 알콩달콩 살고 있는 자신도 부러워 늘 항상 롤모델 삼고싶을  만큼 다정한 잉꼬부부였다.   서로 각자 딸을 데리고 재혼한 기호네 부부와 달리  철석이네는 철석이 딸 하나 뿐이였는데 불임이였던 미영이는  철석이가 데려온 딸애를 지극정성을 다해 키웠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다 보니 온갖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키웠었다. 딸도 엄마 엄마 하면서 팔짱 꼭 끼고  쇼핑도 다니고 영화보러도 다니는 여느 친모녀사이 부럽지 않게 보였었다.  명선이는 누구한테 머리 하나 얻어맞은 듯 너무나 큰 충격을 먹었다. 한편 미영이한테 알 수 없는 동지의식이 생겨났다.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이럴 수가 없지 않는가!      명선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결혼식장에 입장을 했다. 옆테이블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철석이 처는 안보이네.” “오, 집에 있대, 딸애가 글쎄 지 엄마 혼주 앉힌다고 십여 년만에 연락했대, 피줄이 무섭지머” “암만 잘해주면 뭐해 잘 키워줘 봤자, 그래도 낳아준 엄마 찾는데…이 결혼식도 철석이네가 다 해주는 거라고 하던데, 쯧쯧.” ……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길에 명선이는 남편한테 조용히 물었다.  “자기는 철석이네 결혼식 보니 어때?”  “뭐가?”  코로나 때문에 예전의 동포들 관행이였던 결혼식의  기본 3차-부페,노래방,중국식당 코스는 싹 취소되고 뷔페서도 방역수칙을 지켜야 해서 멀리씩 떨어져 앉는 바람에 혼자서 한잔 마신 것 가지고는 영 성에 차지 않아 서운하던 남편 기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서 아내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나 보다. 어쩌다 서울까지 와서 1차로 끝나는게 못내 아쉬워서 “옛날같으면…” 하고 술에 간이 동동 뜰때까지 먹고 마시던 옛날 생각을 하고있을 것이다. “뭐긴 뭐겠어요, 철석이 본처가 혼주자리에 척 앉아있구 미영이는 집에서 혼자있는거 말이지” “아니 당연한거 아니야? 애 친엄마인데…그리구 미영이도 그렇지, 뭐 안오구 그럴꺼까지 있어, 다들 사정모르는거도  아니구  굳이 그렇게 까지 할 것 있나?” 명선이는 한지붕아래 살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서늘한 찬 바람 한오리가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럼 남편의 딸 지혜도 결혼식 때 제 친엄마를 불러 혼주자리에 앉힐까? 그럼 난 결혼식에 참가해야 하나? 하지말아야 하나? 내딸 은수가 결혼할 때는? 지긋지긋해서 그림자도 보기 싫은 전 남편이랑 나란히 앉아 사위의 절을 받아야 하나? 그때 이사람은 어디에 있구?…. 명선이는 아직은 딸애들이 학생들이라 생각해 본적 조차 없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집에 돌아와서 저녘에 TV를 보는데 MBN의  ‘속풀이쇼 동치미’에서 재혼가정의 자녀 결혼식에 혼주로 누가 앉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연예인들이 열띤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2021.  5.   장문영 약력 : 흑룡강성 벌리현 출생, 2006년부터  한국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회원.   동북아신문
3    아버지와 휠체어 댓글:  조회:198  추천:0  2021-09-01
[수필] 아버지와 휠체어 김성옥 아버지 김규봉은 1951년 목단강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8세 어린 나이에 목단강 교구 동승마을 소학교 교장 겸 교도주임으로 발령 받아 10년 간 사업을 하시다가 뜻밖에 급성뇌막염 후유증으로 28년을 휠체어 신세를 지내며 사셨다. 비록 휠체어를 타시고 인생을 마감하셨지만 불공평한 운명에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자식들에게 삶의 디딤돌을 깔아주셨다. 1968년 늦가을, 아버지는 갑자기 독감에 걸려 30일 동안 고열로 혼미상태에 빠졌단다. 깨어난 후 급성 뇌막염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됐는데 그때 나이 38세.  전 목단강지구 소수민족 선진교육자 대표로 뽑혀 1964년 국경절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 오르기까지 한 영광을 지녔던 아버지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속이 타서 애매한 병신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다 보니 근육 신경 손상으로 인해 조금만 다치면 널판자 보다 더 뻣뻣해진 두 다리가 갑자기 한데 달싹 달라붙어 앉은 채 뒤로 훌렁 넘어 가시곤 했다.  그때 우리 네 자매 중 오빠가 17살 막내 여동생은 겨우 5살이었다. 애들을 보아서라도 살아야 했다. 멀쩡한 두 손이 있었다.  며칠 후 오빠가 시내에서 휠체어를 사왔다. 그런데 이러 저리 만져보고 앉아 보시더니 마음에 안 드신다고 아예 오빠더러 목수 도구 몇 가지만 사오라 하시여 손수 휠체어를 만드셨다. 한다면 한다는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끝내 전원 장치도 없는, 단지 두 고무 바퀴만 손으로 밀면 잘 굴러갈 수 있는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그러나 어떤 의료기 상점에서 돈 주고 사려고 해도 살수도 없는 특수형 휠체어를 한대 만드셨다. 뱅글뱅글 바퀴에 기름까지 몇 방울 떨궈놓으니 제법 잘 돌아갔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제일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30대 피 끓는 젊은 나이에, 100미터 달리기를 15초 내에 완주할 수 있었던 건강한 사내가 하루아침에 휠체어 신세가 됐으니 억장이 무너져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그이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휠체어를 타실 때부터 아버지는 마음의 자세를 낮추셨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씩 돌면서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 먼저 깍듯이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를 걱정하시는 분들이 외려 이만하면 괜찮으니 편히 대하시라고 부탁을 해왔었다. 아버지는 어르신들이 한어 방송이랑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난점을 헤아려 국제 국내 시사들을 자세히 설명해 드리셨고, 짬만 있으시면 작은 삽을 갖고 다니시며 집 앞의 길을 고루고 닦으셨다. 비만 오면 물이 고여 마을의 애들이 뛰어다니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어르신들 마실 다닐 때도 불편했던 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배움을 앞세운다.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 해 가을에 마을의 아줌마들이 무우말랭이를 하고 싶은데 칼날이 굵은 채칼 파는 게 없어서 못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아버지는 밤 도와 채칼 만드는 연습을 하셨다. 처음 우리는 그렇게 세심한 채칼 날을 어떻게 만드냐고, 괜히 헛고생 하시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서서 하는 일이면 몰라도 이건 휠체어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단다. 마치 상급에서 내린 임무라도 맡은 듯이. 언제 어디서 아버지가 채칼 만드는 것을 보신 적도,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이 없으신데 그이는 이튿날 동안 꼬박 휠체어에 앉아 채칼 제작을 고안해 냈다. 집집마다 버리는 유리병 통졸임 철판 뚜껑을 찾아 가위로 잘게 자르고, 또 끝이 뾰족한 집게로 이러 저리 엮어서 시험을 해보니 싹싹 소리 내며 무우 오리가 잘 갈려내렸다. 한입 두 입 건너 동네 아줌마들이 소문을 듣고 채칼 만드는 재료를 들고 왔다. 어떤 분은 돈 주고 산 것보다 곱절 더 좋다며 돈까지 내놓으셨으나 그이는 절대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동네 아줌마들은 그 채칼을 너무 잘 썼다고 외우군 했다.  한 사람의 건강 표준을 신체조건 여하에 따라 논한다면 그건 완전하지 못하다. 아버지는 건강한 사내였다. 비록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더 받으셨다.     그날은 엄동설한 한겨울이었다. 강가에 얼음이 유리알 같이 반질거렸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강바람 쐬러 나가셨다가 그만 바퀴가 미끄러져 구멍 내놓은 강판에 푹 빠지게 됐다. 마침 강가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청년들이 달려와 아버지를 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히시고 집까지 모셔 왔으니 말이지, 폰도 없는 세월에 만약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어찌할 뻔 했을까? 그날 저녁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혹시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이 아파하실까 봐 걱정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기색 없이 마냥 유쾌하게 웃으시며 농을 하셨다.  아버지는 흑룡강신문 애독자이셨다. 신문사에서 조직하는 지식경연 응모에 여러 번 참가한 연고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텔레비죤, 라디오 방송에서 보고 들은 뉴스부터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조리 우리한테 들려 주시곤 하셨다. 그러다가 밤중이면 부엌에 내려가 손풍구를 돌리며 어머니더러 밤참을 하게 해서 자식들한테 챙겨 주시곤 하셨다. 한번은 아래 집 아주머니가 일부러 나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네 집엔 뭔 재미있는 얘기가 그렇게 많니? 너네 집 앞을 지날 때면 일부러 한참씩 듣고 간단다.”  70년대 농촌에서 한창 군대 가는 바람이 불었을 때 가정의 세대주나 다름없는 오빠가 감히 신청을 못하자 아버지는 떠밀어 보내다시피 하며 자식을 군대에 보내셨다. 오빠는 군에 6년간 복무하고 돌아왔었다.  1976년 공농병 대학교 추천 모집이 나오자 아버지는 여자일 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네가 대학생이 되면 우리 김씨 가문의 첫 대학생이니 가문의 영광이라며 나를 기어이 연변대학으로 떠나 보내셨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워 이기시려고 다리 병에 좋다는 중약은 다 드셨는데 그 약재를 차에 실으면 아마 한 수레는 될 듯싶다. 그 보기만 해도 쓰고 양이 많은 중약을 언제 한번 얼굴도 찡그리시지 않고 다 드셨다. 마을에 지원 온 해방군 의료대를 찾아 한 뽐이 넘는 침도 수 없이 맞았고 소나무 찜질이 좋다고 해 뜨거운 소나무 찜질도 많이 했었다. 뜸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의사가 정해준 뜸 자리에 손이 닿는 데는 모두 뜸을 뜨셔 팔이며 다리에는 온통 뜸 자리였다. 뜸 자리는 쉬이 아물지 않아 싯누런 진물이 나오곤 했지만 아버지는 “뜸 자리가 덧나야 효과가 좋단다”며 웃으셨다. 아픈 다리는 전혀 낫지 않았고, 밤에는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서 주무시지 못 하셨다. 그래도 우리 앞에서 단 한번의 짜증도, 원망도 없이 혼자 고통을 삼키며 묵묵히 가정의 어려운 일을 담당해 나가셨다. 심지어 자식의 옷 단추까지 달아주시곤 하셨다.   이런 아버지가 계셨기에 우리 네 남매들은 한치의 구김살이 없이 반듯하게 자라 모두가 가정도 잘 꾸리고 사회 생활도 잘해올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골회함은 아직도 고향 목단강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저번 추석에 형제들은 10여 년 간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한 자책감으로 인터넷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비석을 만들어 술을 부어 드렸다. 눈물이 앞섰다. 평생 당신 이름으로 된 은행 통장 하나 못 만드셨고 다리가 불편해 신분증 사진도 못 찍으신 아버지! 그렇지만 우리 자식들의 마음 속에는 백만장자 아버지보다 더 우러러 보이고 존경스럽다.  아, 세월이 갈수록 보고 싶은 아버지! 엊저녁 꿈에 나는 벤츠 자가용을 운전하시고 어머니와 함께 경박호 관광을 가는 아버지를 봤다. 저 세상에 가셔도 우리 아버지는 짱일 것이다.  동북아신문
2    [서정순 수필] 상렬이를 보내며 댓글:  조회:201  추천:0  2021-08-09
위챗에서 상렬이의 부고 소식을 보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상렬이가 떠나가다니, 그 용암 같이 뜨거운 정열의 사나이 상렬이가 떠나가다니, 바위 같이 든든해 보이던 상렬이가 떠나가다니, 중학교, 대학 교를 같이 다닌 동창,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락이 별로 없어도, 언제든지 옆에 있는 것 같은 나의 동창 상렬이, 상렬이가 어떻게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몸이 안 좋다는 것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아주 막연하게 상렬이 같이 정열적이고 재능이 넘치고 유머가 넘치는 착한 사람에게 병마는 꼭 비켜 가리라 믿고 싶었다. 꼭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고 싶었다. 어쩐지 상렬이는 꼭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더니 “아, 소식이 벌써 거기까지 갔나? 괜찮아, 인생이 뭐 그런 거지 뭐, 결국은 다 가는 게 아이겠소?”하며 경상도 어투에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상렬이 특유의 말투로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였다. 심양의과대학이 그런 면에서는 수술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수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난 그런 거 아이하오. 인생 얼마 산다고 몸에 칼 대고 하는 짓을 하겠소?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요. 사람이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거지. 난 지금 중의로 보수적인 치료를 하오. …” 그때만 해도 너무나 당당하고 낙관적이었다. 병 있는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연변대학시절의 요녕출신 동창들, 앞줄 왼쪽 첫번째가 우상렬,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필자 서정순. 상렬이와는 참 인연이 깊다. 소가툰에서 한 중학교, 한반을 다녔고 대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무순시조선족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었다. 갓 무순시조선족중학교에 배치 받았을 때 상렬이, 황영(대학동창), 나 세사람은 그야말로 세상물을 먹지 않은 티 없이 순진한 ‘얼간이’들이었다. 근엄하신 선생님들이 조용히 앉아 비과備科를 하는 근무시간에 눈이 왔다고 흥분하여 셋이 운동장에 나가 하얀 눈을 마음껏 밟으며 소학생들처럼 눈싸움을 하면서 히히 호호 하였다. 2년이 좀 지나 상렬이는 연구생 시험을 쳐서 무순시조선족중학교를 떠났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느 날 떠난다는 말도 없이 감쪽같이 떠나갔다. ‘상렬이 왜 그래? 왜 말도 없이 떠났어?” 그때도 나와 황영은 상렬이를 아주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말도 없이 떠나간 상렬이를. 무순조선족중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봄놀이 기념사진, 오른쪽 두번째가 우상렬. 세번째가 서정순. 2018년 12월 말, 료녕조선족문학회에서는 ≪료녕조선족문학통사≫ 발간식을 하였다. 그때 상렬이도 초대받아 왔었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만찬이 벌어졌다. 상렬이의 몸 상태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상렬이한테 와서 술을 권하였다. 상렬이는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속이 조마조마하였다. “야, 너 그렇게 마시면 돼? 넌 술 대신 이런 물을 마셔야 해.”하며 내가 광천수를 주자 그는 “그런가?’하며 슬그머니 물을 마시었다.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해서이다. 언제나 착해 빠진 상렬이, 다른 사람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상렬이, 선량함은 그의 인격의 기반이었다. 그날 상렬이는 저녁만찬 도중에 여덟 시 차로 떠나야 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중학동창인 최정실이와 나는 몹시 아쉬워하며 극히 만류하였다. 기차표를 물리고 다음날 가라고. 상렬이와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들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상렬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재미가 나기 때문이다. 상렬이는 다음에 보자고 하며 기어이 떠났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중의로 치료하는 것이 효과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상렬이의 몸상태를 알면서도 나는 일찍 떠나가는 그가 무척 섭섭하였다. 최정실이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총망하게 떠나가지? 휘익휘익 바람을 일구며 떠나가는 그의 뒤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료녕조선족문학통사≫  출간기념식 에서 고향인 소가툰 출신 문인들과 함께. 왼쪽으로부터 네번째가 우상렬 교수, 오른쪽으로부 세번째가 필자 서정순. 요즘 위챗에 올라오는 상렬이의 ‘콤플랙스’ 계렬 수필들을 나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듣고 있다. 전에 잡지에서 읽었을 때는 그냥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읽었고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구나 하며 읽었다. 그의 수필은 상렬이라는 사람처럼 가식이 조금도 없었다. 오직 진실, 진정, 진심이 수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고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상렬이가 떠난 후 다시 들으니 한 맺힌 한 남자애의, 한 사나이의 절절한 절규가 느껴졌다. 난, 우린 동창으로서의 상렬이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콤플렉스에 맺힌 절절한 그 한들을 난, 우린, 선생님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를 들으며 나는 중학시절의 상렬이를 떠올렸다. 군복을 입기 좋아했고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으며 나팔바지를 입었고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난 남자애, 상렬이가 휘익휘익 바람을 일구며 걸어올 때면 길고 넓은 나팔바지가 길우의 먼지를 다 쓸어버릴 것 같았다. 몸을 팔자로 꼬며 땅만 보고 걷는 상렬이, 그는 학교에서 유명 짜한 학생이었다. 머리가 좋아 공부는 잘하는데 그의 주위에는 희한하게도 공부 못하는 친구들만 모여 있었다. 중학교 때 그와 앙숙인 친구의 주위에는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여 있는데. 둘은 한반에서 눈만 마주치면 한판 붙곤 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상렬이는 싸움을 잘한 것으로 기억한다. 둘만 싸우면 상렬이가 우위였다. 상렬이는 굉장히 몸이 날래었다. 그런데 어쩌랴. 그 중점반에서 상렬이의 짝꿍은 한 명도 없었으니.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상렬이 앙숙의 짝꿍들이 상렬이를 빙 둘러쌌고 담임선생님도 번마다 상렬이를 꾸지람하였다. 여학생들도 놀란 눈빛으로 은근히 상렬이 앙숙의 편을 들었다. 공부성적이 우상이었던 그 시절 공부 못하는 애들을 거느린 상렬이에게, 못나 보이는 상렬이에게 호감을 느낀 여학생들이 있었던가? 그리고 상렬이와 앙숙이었던 남자애는 전교에서도 1, 2등 하는 애가 아니었던가. 중학시절 여드름투성이의 남자애, 부끄러움이 많아 땅만 보고 걸었던 남자애, 군복에 군모에, 그리고 나팔바지에 한껏 멋을 부린다고 했지만 촌티를 확확 풍겼던 남자애는 콤플렉스 속에서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진정 멋스럽고 당당한 사내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뚝 섰다. 상렬이가 떠나간 후 조선족문학 위챗췬을 가득 덮은 추모의 물결을 보며 나는 다시 상렬이를 돌아보았다. 상렬이는 자신의 넉넉한 인품과 박식한 학식으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꿈을 주었구나. 한 사람이 한 생을 살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웃음을 주고 희망을 주고 꿈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헛되이 살지 않았다. 상렬이는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분명 비범한 사람이었다. 내 먼 기억속에 남아있는 중학시절의 상렬이의 모습 때문에 어쩌면 난 상렬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모르고 지난 것 같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조선족문학을 위해 한 몸을 불살랐던 상렬이, 위챗췬에 넘쳐나는 추모의 물결들과 추모의 시와 글들, 그것은 상렬이의 인품에 대한 최고의 평가였고 상렬이의 학식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정열적이고 정직하고 유머러스하고 박식하고 선량한 상렬이, 그 두툼한 뱃속에 가득 채운 이야기들과 그 비상한 머리속에 가득 쌓아 놓은 지식들과 그 따뜻한 인정속에 한껏 넘쳐흐르는 감성들을 더 듣고 싶고 더 느끼고 싶은데 이제는 다시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구나. 창천은 어이하여 이렇게 재능 있고 좋은 사람을 질투하는가. 뭐가 그리 급해 58세라는 한창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게 하는가. 조선족문단이 이렇게 애타게 너를 부르는데, 배움에 목마른 청춘들이 애타게 너를 찾고 있는데 상렬아, 넌 언제나 그렇게 괘씸하게, 섭섭하게, 원통하게 우리 곁을 떠나가느냐. 정말 너무 너무 얄밉다. 정말 너무 너무 원통하다. 정말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진정한 사나이-우상렬, 나의 동창이며 친구인 우상렬,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거절하는 법도 좀 배우게. 특히 술을 거절하는 예술을. 상렬아, 잘 가. 명복을 빈다. 2021. 7. 15 새벽 한시   서정순(徐貞順) 약력: 중국 요녕성 심양 출생, 198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회원, 요녕성조선족문학회 이사, 수필분과 주임. 수필집 《흰눈이 내리면 그리움도 내린다》(2010년 출간), 한중시집 《시의 소통, 경계를 넘어선 만남》(2009년 번역), 《문학명작열독지도》(2012년, 공저)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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