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 모성애는
황기철
화창한 여름날 해맑은 아침이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있는 중년교수 현영학은 과부 전옥선을 만나려고 장춘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전옥선은 현영학의 고중시절 한학급 동창생이며 현영학이 첫사랑을 고백했던 첫 련인이다. 그러나 후에 여차여차한 원인으로 일이 탈리다보니 전옥선은 현영학이와 갈라지고 그의 딱친구인 강대룡의 품에 안기게 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해가 뜨고 달이 지며 세월이 흘러흘러 20여년이 지나간 오늘 사정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였다. 그들 세사람의 마음속에 자리를 틀고 앉았던 많은 일은 옛추억으로 남았고 홀애비로 된 현영학은 다시 청혼길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1
기차가 목적지에 이르자 현영학은 무거운 두 다리를 놀리며 마지막 사람으로 기차에서 내렸다. 비록 집에서 용단을 내리고 떠났고 성사할 가능성이 백프로라고 확신한 터이지만 어쩐지 마음은 설레이기만 했다.
'내가 옥선이의 속내도 모르고 대룡이의 말만 믿고 이렇게 떠났다가…'
그 시각 그는 또다시 자기의 판단을 검토해보았다. 이왕사가 토막토막 무어져 긴 필림으로 되여 그의 머리 속에서 돌아갔다…
지난해 초여름 어느 일요일에 있은 일이다.
현영학이 서재에서 력사자료를 뒤지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문을 연 영학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룡이, 이거…”
영학이는 지나친 자책감으로 하여 뒤말을 잇지 못했다. 워낙 그는 이틀 전에 한 친구에게서 대룡이가 위암으로 지구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인차 문병하러 가려던 참인데 급한 일을 마무리느라고 여직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 일년이나 보지 못한 대룡이 쪽에서 먼저 지친 몸으로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마음은 여간 쓰리지 않았다.
“뜻밖일테지? 단 한번이라도 더 보고퍼서 왔네. 의사가 극구 말리는 것도…”
대룡이는 영학의 낯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용서해달라구. 대룡이 내가 너무 무정했네…”
둘은 부둥켜안았다. 옛정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그들 둘의 눈에는 다 물기가 어렸다.
그들은 고중시절에 한집에서 하숙하며 한가마밥을 먹었고 추울 땐 이불을 겹덮고 딩굴며 장래를 꿈꾸어왔다.
“꼭 만나고싶었어! 저승에 가더라도 정만은 못 잊겠네.”
대룡이의 목소리는 피리의 청처럼 떨었다. 영학이도 가야금줄처럼 떨리는 손으로 대룡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영학이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미안하네 미안해. 헌데 허수한 생각은 말라구. "하늘이 무너져도 이 대룡이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 자네가 아닌가? 너무 상심하면 몸이 축가네.”
“하긴 그렇기도 해. 시초에 이 세상을 하직한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무섭던지 온몸에 소름이 끼치데. 헌데 사람마다 한번씩은 다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더니 대수롭지 않더군…”
강대룡의 눈에서는 삶의 정열이 불처럼 타고 있었다. 영학이는 위안할만한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대룡이, 마음을 크게 먹자구! 또 과학도 좀 믿어야지…”
“병원에서 원장질을 하는 내가 아무리 둔하기루 앞길을 몰라서 큰 병원에 온 줄로 알아? 옥선이와의 정두 떼구… 아들애에게 공부할 시간두 주려는거야… 그래서… 자, 이런 말 그만두자구!”
영학이는 또 머리가 무거워지는감을 느꼈다. 자기가 죽은 뒤엔 안해더러 남편을 덜 생각하게 하려고 정을 뗀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장하며 죽기 전에 아들의 정성도 마다하고 시간을 더주어 대학교에 보내려는 아버지로서의 그 마음이 또 얼마나 기특한가! 영학이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었다.
“자넨 가슴이 만리장성 담벽보다 더 넓은 사람이야!”
이건 영학이가 그 앞에서 처음 하는 말이 아니다. 영학이는 대룡이의 됨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고중졸업을 앞둔 어느날이다. (그때는 “투쟁고리”를 단단히 틀어쥐던 때다) 옥선이네 부모가 영학이의 가정출신이 나쁘다고 그들의 혼사를 막아나섰다는 말을 들은 대룡이는 영학이와 상론도 없이 점심밥을 조겨먹고 30리길을 걸어 옥선의 부모를 찾아갔다. 그는 학급공청단 서기의 신분으로 옥선이의 부모 앞에서 영학이네 집에는 큰 력사문제가 없다고 해석했고 영학이는 재능 있는 학생이여서 전도가 양양하다고 하면서 자랑을 아끼지 않았었다. 차차 로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중매군답게 절까지 꾸벅 했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고 가라는 로인들의 만류도 마다하고 밤도와 학교에 돌아와 영학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영학이, 옥선의 부모가 동의했어. 한턱 내라구!”
대룡이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영학이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만둬야겠어. 난 옥선이의 한생을 책임질 것 같지 못해… 후유…”
그때 학급장직을 맡았던 현영학은 학습에서 첫손에 꼽혔다. 그러나 “부농분자자제”란 딱지가 붙은 자기가 전 학교에서 “고분이”로 불리우는 옥선이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녀의 한생에 대한 유린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바보같은 소릴! 너 머리가 돌지 않았니?”
“넌 모를거야. 난 요즘 강한 정치적 위압감을 느끼고 있어. 난 자기가 겪어야 할 재난을 옥선에게 나누어주고 싶잖아!”
결국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옥선이가 배신한것이 아니라 영학이가 뒤걸음질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에헴!”
대룡이의 기침소리가 영학이의 회억을 깨뜨렸다. 대룡이는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학이, 한가지 청이 있어 왔네.”
“무슨 청인가?”
영학이는 한번 더 자책감을 느꼈다. 아픈 몸을 지탱하여 찾아온 대룡이를 생각하니 기대가 실린 그의 눈을 보기마저 지어되였다.
“어서 말하라구.”
“나의 청을 꼭 들어주겠다고 다짐해야 말머리를 떼겠네.”
“자넨 내 마음이 얼음처럼 식었다구만 생각하나? 아니야. 내 마음은 친구의 정으로 단대루 있어. 어서 말하라구.”
20여년간 딱친구로 사귀여온 영학이로 말할 때 이 시각 사경에서 헤매는 그의 청을 들어준다는건 조금치도 주춤거릴 일이 아니였다.
“들어주잖구.”
한동안 머리를 떨구고 묵상에 잠겼던 대룡이는 믿음으로 이글거리는 눈길로 영학이를 보았다.
“꼭 들어주겠나?”
“들어주구말구. 갑갑하네, 어서 말하라구!”
“옥선이와 결혼하라구!”
“뭐야?”
“옥선이와 결혼하라구!”
“뭐 뭐… 자네 정신나가지 않았어?”
영학이는 입을 벌리고 눈빗질만 했다.
“아니야 생각하고 생각던 끝에 청을 드는거네. 살아서 마지막으로 드는 청이네.”
“에익, 사람두, 그것도 말이라구 하는가? 자네 날 그렇게 보나?”
대룡이는 영학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랑을 놓고 영학에겐 한가지 지조가 있었다. 그것은 “친구의 련인과 치정을 나눌수 없다, 그런다면 친구를 잃게 된다”는것이다. 그래서 대룡이와 옥선이가 결혼한후로는 그들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지만 옥선이를 만나도 말도 잘 건네지 않았던것이다.
“자네를 잘 아니까 하는 말이네. 영학이, 래일이면 황천으로 갈 사람의 청이니 꼭 들어주게나. 이건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갈 유언이구 황천에 가서두 바랄 소원이네. 꼭 들어주게.”
“내가 자네를 놓구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이 영학이 인간값에 가겠나? 짐승같은 소린 그만두라구!”
“이보게 영학이, 산 사람의 소원도 풀어줄라니 사형선고를 받은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나?”
대룡이는 영학의 두손을 잡아끌며 애걸하다싶이 말했다. 그러나 영학이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자네 친구의 정마저 깡그리 갖고 가려나? 안되네, 안돼!”
“진정 옥선일 사랑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자네뿐이네. 또 옥선이가 사랑해야 할 사람두 자네지. 다른 조건이야 꺼릴 게 있나? 삼복이 문제겠지. 그 애 근심은 말게. 대학교에 갈 준비도 돼있네.”
“제발 비네. 삼복이 때문이 아니야. 난 친구간의 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싶네.”
영학이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자네 잊었나? 삼복이를 보았을 때 자넨 나보고 뭐라 했지?
"영학이 자넨 딸을 보라구. 그래야 우리들이 사돈을 맺구 늙어서두 걔들을 보면서 살지?"
"허허허, 사돈끼리 어찌 한집에서 사나?"
나의 말에 자네가 또 뭐라고 했나?
"사돈이랄게 있나? 동창생이라면 그만이지."
그때로부터 난 걔를 제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는거야. 그러나 옥선의 일만은 안되겠네… 더 말치 말라구!”
“난 믿겠네. 황천에서라도 날 눈 감게 해주게.”
그 때로부터 일년이란 시간이 무정하게 흘러갔다.
2
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옥선이는 영학이를 맞으러 부랴부랴 역전으로 가고 있다…
사흘전에 영학이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로부터 옥선이는 낮이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망설이였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해 갈개였다.
옥선이는 영학이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지만 오늘 이 때까지도 그 때 그와 갈라진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대룡이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시집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기가 꼭 걸어야 할 인생길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남편이 림종전에 영학이의 말을 꺼낸 뒤로는 어쩐지 영학이의 말만 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녀인의 인생은 이토록 기묘해야 하는지? 남편이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밤도 옥선이는 “당신들끼리 손을 잡으라구!” 하며 눈을 감던 남편의 일이 떠올라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것은 지난해 대룡이가 영학이네 집에 갔다 온지 달포가 지난 어느날이다…
남편의 병세가 급하다는 장거리전화를 받은 옥선이는 그 자리로 택시를 불러 타고 지구병원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이미 구급실에 옮겨가 한창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병실에서는 주임의사 한분과 녀간호원들이 구급대책을 대려고 황급히 돌아쳤다.
옥선이가 병실에 들어서니 아들 삼복이와 영학이가 마주나왔다.
“옥선이, 마음을 크게 먹어야겠소.”
영학이는 옥선이를 위안하느라고 이렇게 말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무엇한 감이 들었다. 자기가 의사의 당부를 잊고 그런 말을 한것도 그러하거니와 자기의 처지에선 그런 말을 입에 바르지 말아야 했을 것이라고 그는 후회했다.
“그새 수고 너무 많았어요.”
옥선이는 이렇게 한마디 말만 건네고 곧추 남편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벌써 눈물이 앞을 가리워 남편의 모습을 똑똑히 볼수 없었지만 의사로서의 직감적인 느낌으로도 남편은 자기가 왔던 사흘전보다 퍽 수척해졌고 앞길이 멀지 않았다는 걸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보세요… 흑흑, 정신을 차리세요. 제가 왔어요.”
사랑의 힘이란 그렇게도 강력한 것인가?
신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영학이를 불러오라고 삼복에게 당부하고 나서 여직 혼미상태에 있던 대룡이는 안해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인차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대룡이의 눈길은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며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여보세요. 정신을 차리세요. 주임선생이 말씀하시는데 래일부터는 병세가 나아질 거라고 했어요…”
대룡이는 느슨하게 내리깔렸던 눈까풀을 올리떴다. 그의 표정은 안해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안되오. 난 다 알고 있소.
이윽고 흐리마리한 그의 눈길이 안해의 눈에 박혔다. 옥선이도 눈확에 찬 눈물을 뚫고 배추 속 같이 흰 피기 없는 남편의 낯을 내려다 보았다.
대룡이는 왼쪽 손을 들려고 모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옥선이는 인차 그 뜻을 알아차렸다.
“팔이 저리세요?”
대룡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옥선이는 침상의 왼쪽에 돌아가 남편의 손을 잡아쥐고 주물러줬다.
“영학이… 이리… 오게…”
그의 말은 모기소리 만치 낮았다.
“현선생님, 이분이 부르네요.”
옥선이가 머리를 돌리며 영학에게 말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가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있던 영학이는 인차 침상의 오른쪽에 다가왔다.
“자, 내… 손을… 잡아주게…”
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이 움직이는 모양에서 그의 뜻을 알아차린 영학이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대룡이는 자기의 두손을 가슴앞에 모이려고 또 모지름을 쓰는 것 같았다. 옥선이와 영학이가 거들어주자 손 여섯이 대룡의 배우에서 한덩어리를 이루었다.
“당신들끼리… 손을 잡으라구!”
대룡이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으나 그들 둘은 이번에도 대룡이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난 당신들이 꼭 손잡길 바라네.
대룡이의 시선이 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 둘은 마주보지 않고 낯을 딴 데로 돌렸다.
“영…학…이…”
대룡이는 개개풀린 눈길을 영학의 낯에 박았다. 그들 둘의 눈길이 속심을 나누었다.
영학이 내 마음을 알 테지?
알만하네. 헌데 자네… 왜…
믿겠네! 난 자네가 알만하다니 기쁘네… 기뻐…
영학이는 머리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이 시각 그는 무어라고 더 말할 수 없었다.
이번에 대룡이는 안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그끼레한 대룡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피여올랐다.
난 시름을 놓겠소. 마지막 부탁만은 꼭 들어주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왜 당신은 오늘까지도 그런 생각만 하시나요?
옥선이의 눈길과 표정이 남편에게 되물었다.
영학인 좋은 사람이요. 믿어주오…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임잔 나를 만난 후 고생뿐이였지! 삼복이를 출세시키자면 아직도 고생이 막심할 텐데…
그런 말씀 마세요. 웬 근심이세요…
영학인 꼭 도와줄거요…
옥선이는 눈뿌리가 달아올랐다. 얼굴도 더 붉어졌다.
그런 일 근심 마시고 용기를 내세요. 우린 아직 갈라질 수 없어요.
안되오. 난 이미 황천객이요…
옥선이는 영학이를 보기가 무엇하여 고개를 돌렸다. 기실 그들 셋이 다 동창생이고 자기와 영학이와의 관계를 대룡이가 개의치 않는 한 또 그가 지금 “중매군”으로 나서는 형편에서 건너다보는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림) 그러나 옥선이는 남편 앞에서 영학이를 마주보는 것마저 그에게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실 그들 셋의 관계는 그 뿐이 아니다. 워낙 영학이는 옥선이와 대룡이의 중매군이였다.
영학이와 갈라진 후 고중을 졸업한 옥선이는 의학원에 입학하여 대룡이와 한학급에서 공부했다. 그들 둘은 한 책상에서 밤자습을 했고 한 나무 그늘 밑에서 학술문제를 쟁론했으며 학교영화관 2층에 나란히 앉아 “영원한 사랑”을 보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그 누구도 동창생의 한계를 벗어난 일을 한 적 없었고 사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담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졸업실습을 떠나기 전날 저녁 영학이가 불쑥 나타나 그들에게 청실홍실을 이어주었던 것이다…
그 때 옥선이는 영학에게서 “사랑의 참뜻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랑을 양보할 수 있다.”는 도리를 더더욱 깊이 느꼈던 것이다.
병실은 고요했다. 침묵,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는지? 침묵 속에서 사랑의 새싹이 움트고 있는지? 아무튼 그 침묵의 가치는 미의 극치로 재이여야 할 것이다.
이 때다.
“주임의사선생님, 병자의 혈압이! 맥박이!…”
겁에 질린 간호장의 새된 목소리가 병실의 괴괴한 침묵을 깨뜨렸다.
이어 산소통이 들어오고 당직의사들이 몰려들었다… 병실에서는 삶과 죽음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다…
“뿡―”
기차의 고동이 옥선의 사색을 깨뜨렸다. 옥선이는 역전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3
몸둘바를 모르는 두 남녀가 개찰구 앞에서 만났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마와요.”
이렇게 말하는 옥선이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여오를 대신 그늘이 비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 때까지도 착잡한 생각의 갈피 속에서 채 헤여나오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러저러한 일로 바쁠 줄 아오.”
이어 한동안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제나름으로 속생각을 굴리며 시가지 쪽으로 들어갔다. “공소사식당” 문앞에 이르렀을 때다. 옥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당 저의 집에 모셔야겠지만… 너무 수선해서요… 량해하세요.”
“너무 사양하면 의려 송구스럽지.”
로서구진에서 제일 큰 식당이라고 하는 그 식당은 독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강당처럼 널직하고 스산한 통칸 하나 뿐이였는데 가운데 둥근상 여덟개가 두줄로 놓여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아직 점심손님들은 한 사람도 없고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서 들어온 큰 검둥개 한마리가 씩씩거리며 그들을 싸고 분주히 돌아칠 뿐이였다.
이윽고 료리 세접시가 들어왔다. 옥선이는 풋고추소고기볶음과 소천엽회를 받아 영학의 앞에 놓고 제 앞에는 소갈비찜을 놓았다. 이어 통닭국이 들어왔다.
옥선이는 병마개를 뽑고 영학의 술고뿌에 청주를 부으며 말했다.
“이 고장의 특산이예요. 좀 쓰기는 하나 향긋하다고들 하더군요.”
영학이가 술고뿌를 받아들려는 순간 혀를 빼들고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상 밑에 앉았던 그 개가 돌아치다가 영학의 구두를 밟았다. 그가 흠치 놀라는 바람에 술이 상판에 쏟아졌다. 옥선이는 상을 닦고 술을 다시 부을뿐 그 개를 쫓아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분이 잡치기는 했지만 영학이는 내색을 내지 않고 잔을 들어 단모금에 굽을 냈다.
영학이가 술을 마시는 사이에 옥선이는 저가락으로 큰 갈비찜 두개를 집어 상 밑에 던졌다. 개는 좋아라고 그걸 받아물었다.
영학의 마음은 여간 언짢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 개가 돌아치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자기가 먹어보기도 전에 개에게 코밑진상을 하다니! 정말 말이 아니였다. 그는 옥선이의 거동이 저으기 섭섭하게 생각되였다.
영학이가 두번째 잔을 쳐들 때다. 그 개가 돌아앉으며 꼬리로 그의 미색바지에 검은 흙줄을 그려놓았다. 그는 골이 나서 벌떡 일어서며 그 개의 배를 들이찼다.
“어마나!”
옥선이가 부서지는 소리를 치며 영학이의 팔을 힘껏 당겼다.
“제발 놔두세요!”
옥선이의 낯이 새파래졌다.
“왜서? 사람과 개가 한 상에서 먹는 법이 어디 있소. 아무리 시골이기루…”
영학이가 옥선이를 직시하며 하는 말이였다. 그의 목소리는 자못 거칠었다.
“용서해줘요. 저 개가 새끼를 밴 듯해요.”
“뭐라오? 새끼를 뱄는 데는?”
“그놈이 제가 먹고싶어서 그랬겠어요? 배 안에 든 새끼를 생각해서겠지요!”
“엉? 새끼를 생각해서…”
영학이는 짚이는 데가 있어 상 밑을 내려다보았다. 배가 물동이만치 크고 신강포도알만큼 큰 젖꼭지를 주렁주렁 단 개는 겁에 질려 화등잔만한 눈으로 영학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영학의 머리 속에서 한가지 생각이 번개쳤다.
'옥선이의 모성애가 저 개를 어루쓸어주고 있구나!'
그 시각 영학이는 인간학을 탐구하고 있는 사회학자로서의 자기와 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는 의학자로서의 옥선이의 차이점을 심심히 느꼈다.
옥선이가 또 갈비찜을 집어 문쪽에 던지니 개는 날래게 문가로 뛰여나갔다.
“미안해요. 시골은 그저 이러해요. 시장하실 텐데 많이 드세요.”
옥선이는 굳어진 분위기를 풀려고 상글상글 웃으며 말했다. 영학이도 덩달아 허구프게 웃었다.
자기가 찾아온 뜻을 이야기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 영학이가 옥선에게 물었다.
“삼복이까지 학교에 보냈으니 적적할 테지?”
“괜찮아요. 고양이가 매일 저의 동무를 잘해주어요.”
영학이가 바라던 것과는 달리 옥선이의 대답은 생뚱같았다.
“고양이와 동무하고 있다구? 거 참 흥미있는 말인데?”
“그래요. 제가 '고양이동무'의 이야기 해드릴가요?”
옥선이는 샐쭉 웃으며 아미를 숙였다.
“어서 말하오.”
영학의 눈은 호기심으로 찼다.
“저의 집엔 누렁고양이가 있어요. 건 우리 병원 간호장이 저에게 준건데 참 귀염성스럽지요.” 옥선이는 음료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고양인 올봄에 새끼를 낳았어요. 생김새는 어미를 닮았지만 털만은 이곳저곳에 검은 점이 박혔어요.”
“어미고양인 누렁고양이고 새끼고양인 얼룩고양이라 그런 말이지?”
“그래요. 그런데 얼룩이가 난지 둬달 지나서였어요. 바로 일요일날 제가 뜨락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검정고양이 한마리가 우리 집 문앞에 와서 '야웅, 야웅' 하며 울어대더군요. 그래 어쨌는지 아세요?”
“글쎄… 그래서? 어서 말하오.”
“참 묘하지요. 그 놈이 온 걸 안 어미고양인 새끼고양이를 탁자 밑에 숨겨놓고 혼자 밖으로 나오더군요. 그런데 두 고양이는 만나자마자 맞다들어 싸워대더군요.”
“검정고양이에게 맞다들었단 말이지? 왜설가?”
“글쎄요. 한참 물고뜯고 하더니 두 고양인 다 피투성이 되여버렸어요. 두 고양이가 어찌나 끈지게 달려드는지 말려낼 재간이 있어야지요.”
“별일이군. 그놈들이 척을 진 게로구만…”
“그날은 그저 그랬지요. 그런데 옆집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는데 그후 그놈들은 련며칠 그렇게 싸웠대요.”
“그래서?”
“후에 알고보니 검정고양인 얼룩고양이의 '애비'였지요. 목요일날저녁 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는 없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누렁고양이가 책상 밑에 쓰러져 끙끙 앓고 있었어요…”
“'아들'을 빼앗긴 설음이란말이지?…”
“옳아요. 난 그 고양이가 어찌나 불쌍하던지요. 사흘후였어요. 제가 퇴근하고 시장에 들려 집에 와보니 그 새끼고양이가 피투성이된 어미고양이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더군요. 그러고보니 그 놈들이 정말 '자식 빼앗기'를 한 게지요. 전 그놈들이 어찌나 귀여운지 사가지고 온 소고기를 다 먹였어요.”
“그놈이 왜 새끼고양이를 찾아와야만 하오?”
영학이 의아쩍게 물었다.
“영학씨야 아시겠지요. 사랑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진지한 것이 모성애라는 걸요. 짐승도 그런가 보죠?”
함박꽃처럼 환한 옥선이의 낯에서는 자신심이 너울쳤다.
“거야 그럴 테지…”
옥선이는 청주를 따르고나서 말했다.
“전 때론 이렇게도 생각해요. 사랑은 자사적인 것이여서 외력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고요!”
“뭐요? 외력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구?”
영학의 두손은 안개 속에 잠긴 호수물 같이 흐려졌다. 그의 얼굴과 조화를 이루 듯이 개였던 창공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사위는 어둑시그레해졌다.
그러나 수정 같이 맑은 옥선이의 두눈만은 그냥 광채를 뿌렸다.
“그래요. 모성으로 말할 때 자식에 대한 사랑을 독점해야만 그 참뜻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지요. 그 속에는 외력이 차지할 자리가 없나보죠.”
자신심에 찬 옥선이의 목소리는 그 언제보다 더 챙챙하게 울렸다.
“아?! 모성애는… 모성애는 진정…” 한동안 입속말로 되뇌이던 영학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아, 모성애는…”
옥선이는 입을 철문처럼 닫아버렸다.
옥선이의 눈길을 피하여 창밖에 흘러가는 검은 구름을 넋없이 쳐다보던 영학이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어섰다.
옥선이는 눈길로 영학이를 바랬다.
이윽고 기차의 고동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아리랑 (1991년 12월호)
연변인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