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찾아줘
-현청화
1
지수의 병원 상담실을 빠져나온 건 저녁 여섯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집까지 가는 시간은30분이 되나마나한 거리지만 오늘따라 도로가 정체되었다. 금요일인데다가 비까지 부실부실 내렸다. 차창 문을 조금 내리니 곧 실낱같은 빗방울들이 날려 들어왔지만 오히려 숨이 틔었다. 밀폐된 차안은 그녀가 곧 도착해야 하는 집만큼이나 사람을 질식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교차로를 지나면서 그녀는 집 쪽을 힐끗 바라 보았다. 길거리 가게들의 네온사인들도 비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녀는 가게가 올망졸망 들어선 이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동네에 집을 구매한 것은 온전히 남편의 주장 때문이었다. 이제 5년만 있으면 이 구역 재개발 가능성이 있다는 부동산업체 직원의 말을 남편은 그대로 믿는 듯 했다. 아파트는 낡았지만 터무니없이 비쌌고 그녀의 남편은 평소의 꼼꼼한 성격답지 않게 빠른 시간 내에 계약을 체결했다.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오디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어디야.”
“집 앞이야.”
“밥도 안하고.”
“병원 갔었어.”
남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5분 안에 들어갈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원 계획대로 마트에 들려 장을 봐오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지만 그녀는 단념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바뀌는 걸 기다리면서 그녀는 마음을 조였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녀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마냥 목을 움츠리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다시 티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은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무표정하여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그런 침묵이 여자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침묵이 중후하고 듬직하다고 느껴진 적도 있었다. 결혼한 지 십년이 되는 지금에는 그 침묵이 불안해서 마치 무거운 바위에 지지눌린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지만 그 불안감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약간의 현기증마저 동반했다. 그 바람에 손에 든 그릇이 대리석바닥에 부딪치며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냈다.
남편은 한숨을 내쉬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그제야 작게 숨을 불어 내쉬었다. 부랴부랴 냄비를 달여 냉장고에 남은 채소들로 볶음요리를 하고 계란을 둬 개 풀어 시금치계란국을 끓였다. 보통 음식을 상에 차려놓으면 남편이 나오고 식사 내내 침묵이 지속되었다. 가끔 취사가 늦어지거나 요리가 탈 때면 남편은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태도가 더 큰 위압감으로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런 집안 분위기가 싫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저녁상을 차렸다. 평소에 밑반찬 몇 가지를 항상 준비해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식탁에 국그릇을 올려놓는 것으로 상차림이 끝났고 남편이 정확히 그 시각 방문을 열었다. 밥 먹자, 여보. 그녀의 말이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남편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침묵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그녀가 한 요리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었다. 당최 표정을 읽어낼 수 없어 만족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주관적인 판단이었지만 말이다. 십년동안 같이 살다보니 남편의 음식취향 정도는 눈 감고도 맞출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반찬투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투정이나마 듣고 싶었다. 국이 짜. 이 고기는 너무 익었어. 이런 정도의 사소한 투정이라도 좋았다. 고중동창 미옥이는 남편이 반찬투정을 할 땐 죽여 버리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그녀는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의 애증의 관계는 얼마나 깊은 감정일까 생각했다. 그러느라고 간장 종지에 젓가락이 들어갔고 남편은 그런 모습에 살짝 미간만 찌푸렸을 뿐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아기, 가질 수 있대. 남편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동시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상담소를 나와서 줄곧 고민하고 있던 말이었다. 남편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남편의 시선을 그녀가 똑바로 마주했다. 의사가 그랬어. 이젠 가져도 된다고.
남편의 윗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그게 웃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웃음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외면했다. 아기 갖고 싶어. 몸도 괜찮아졌고 또……
외로워서라고 말하기도 전에 눈물이 절로 기어 나왔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 남편은 물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긴 침묵이 계속될까 싶었는데 의외로 남편이 입을 열었다. 괜찮대? 정말?
그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다 싶었다. 미옥이가 그랬었다. 아기를 가져. 서로 대화가 없는 부부도 아기라는 연결고리가 있으면 달라진다니까. 아기는 사랑의 결실이라고도 하잖아. 날 봐. 저 인간 죽도록 밉다가도 애만 보면 마음이 돌려진다니까. 다 애 때문에 사는 거지. 그리고 애가 있어봐. 없던 대화도 생겨. 아이에 대한 화제, 이 세상에 내 아이를 똑같이 예뻐하는 내편이 생긴다는 것. 그거 무시 못하는 감정이거든. 그래서 아이는 혼인의 완성이라고도 하지.
그녀의 눈빛은 순간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남편은 어쩌면 표현에 서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지 십년째, 그들은 아기를 가지지 않았다. 그녀의 문제였다. 시댁 식구들에게 비밀로 하느라고 남편도 무지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사흘이 멀다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그녀가 적당히 대처했으나 후에는 전화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호흡마저 가빠지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 후부터는 시댁 전화는 일체 남편이 받았다. 명절에도 가급적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등 남편이 그녀에 대한 사소한 배려들은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런 침묵이 더 할 나위 없이 괴로웠다.
의사가 이번 달 안에 가져도 된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오늘이…… 배란기야.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래. 남편이 지극히 건조한 어조로 짧게 내뱉었다. 건조하다 못해 냉담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설거지 할게. 먼저…… 씻어.
이 말을 내뱉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그야말로 익은 홍시를 방불케 했다. 결혼 십년차 부부지만 그녀는 아직도 쑥스럽기만 했다. 친구들끼리 만날 때 미옥이는 매번 남편과의 밤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댔고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항상 듣는 사람의 몫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부득불 그런 미옥이를 답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그만큼 아기가 간절했다. 그녀는 설거지를 하면서 화장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자 수돗물을 끄고 재차 확인하기까지 했다. 화장실 쪽은 평소 남편의 침묵만큼이나 조용했다. 하도 조용해서 집에 그녀 혼자만 있는가 착각할 정도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쪽으로 나오자 그녀는 그것이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메모 한 장이 놓여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들어 확인하자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혼하자. 변호사한테 위임장 보냈어. 날 찾지는 마.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그녀는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메모지를 와락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삼검불처럼 흐트러졌다. 그녀의 남편은 어쩌면 줄곧 이 날을 애타게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집을 구매하면서도 남편은 최소한의 가전제품과 가구들만 갖추었다. 어차피 이혼하면 다 버리고 갈 것들이니까.
그동안 남편의 침묵에 대한 불안감이 그제야 무엇인지 그녀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편은 원래 과묵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표현에 서툰 것이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남편은 애초부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침묵은 그녀와의 이별을 철저하게 대비해온 남편의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소파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 내어 울었다.
……
2
“축하해, 임신이야.”
지수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과연 이게 축하받을 만 한 일인가 생각했다. 남편이 집을 나간 지 이 주째 되는 날이었다. 고중동창인 지수는 그들 동창들 중에 꽤 잘 나가는 셈이었다. 지수는 의대를 졸업하고 큰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몇 년 간 스펙을 쌓은 후 덜컥 산부인과 병원을 차렸다. 지수의 원장 상담실에 비치해둔 긴 의자에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확실해?”
“이게 날 뭘로 보고. 이런 걸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말할 것 같냐? 5주째고 착상도 제대로 된 거 같다. 시댁에서 좋아하겠네.”
지수는 병원 차트를 뒤적이면서 말했다. 그녀는 망연한 기색으로 지수의 가운에 달려있는 명찰을 보았다. 김선화라는 좋은 이름을 두고 김지수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다니…… 이름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조차 알 수가 없는데.
“강정연, 정신 차려.”
지수는 차트를 덮고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약물치료도 있었고 어렵게 온 아기라는 걸 알아. 지금 노산이야. 그러니 얼빠진 얼굴 하고 있지 말고 남편이랑 시댁에 빨리 얘기해. 고령 임산부 잘 보살필 수 있게.”
“그래…… 야겠지.”
“미옥이 알면 좋아하겠다. 셋이 만나면 자기만 애 엄마라고 얼마나 유세를 떠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를 보았다. 셋 중에서도 제일 조용해서 학교 때는 존재감마저 없던 애가 지금은 말과 행동이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역시 나이를 먹어도 일하는 여자가 멋있는 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까지도 그녀 역시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애를 가지라고 닥달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과장급 이상으로 승진도 가능했을 것이다. 엄마만 계셨더라도…… 엄마는 그녀가 일을 하게 지지해주고 애는 당신이 키워주마 하고 호언장담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까지 비가 그치지 않더니 어느새 우기가 지나고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진찰이 있어 나가봐야 한다며 지수가 나갔고 그녀는 조금 기다렸다가 미옥이까지 불러 점심을 먹기로 계획했다. 폰을 꺼내 몇 번을 망설였지만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집어넣고 말았다. 남편은 집을 나간 채 폰도 꺼두고 연락두절이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도 남편이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는 비서의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다시 폰을 꺼낸 후 꼬깃꼬깃한 메모지도 함께 꺼냈다.
“여보세요.”
수화기 저쪽에서 울려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남편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귀에 익었다. 그녀는 메모지를 내려다보고 다시 폰 액정을 확인했다. 뇌리 속으로 이름 하나가 스쳐지나갔고 순간 가슴에 약간의 파동이 일었다.
“박성준?”
“강정연……”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거의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박성준은 남편의 고중 동창이자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남편이 남긴 긴급연락처는 왜 하필 그의 전화번호일까.
“너 호주 간 거 아니었어?”
“들어왔지. 일년 전에.”
“그렇구나.”
“정말 오랜만이다…… 너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성준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혹시…… 현우 거기 없어?”
“현우? 걔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차현우, 그녀의 남편은 이처럼 대책 없는 일을 벌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연락도…… 없어?”
“연락 있을리가. 걔가 나 얼마나 미워하는지 잘 알잖아.”
모를 리 없다. 지난 세월동안 남편에게 박성준은 금기어와도 같았다. 그녀 역시 남편이 남긴 긴급연락처가 박성준의 연락처인줄 알았다면 전화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혹감이 차츰 그녀의 얼굴을 물들였다. 이제 어떻게 남편을 찾아야 할지 그녀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이거 네 연락처야?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아직……”
그녀가 통화를 종료하려는 눈치를 채고 성준이 말했다. 그녀는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남편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있어서도 박성준은 돌이키기 싫은 한 단락의 참담한 과거였다. 대체 남편은 왜 하필 그의 연락처를 남겼을까.
“나중에. 나 지금은 급한 일 있어서.”
전화를 끊고 그녀는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진찰을 끝낸 지수가 들어오더니 잰걸음으로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왜? 또 머리가 아파?”
“응? 응……”
“물리치료 한 번 더 받을래?”
어차피 점심시간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아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민폐캐릭터 친구를 두고 있는 지수도 새삼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이 멀다하게 병원을 찾아서 아픔을 호소하는 그녀가 마냥 반가울 수는 없겠지만 지수는 단 한 번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매번 살뜰하게 그녀를 대해주었다. 시댁에 전화하는 것을 점심으로 미루고 그녀가 의자에 누웠고, 그녀의 머리에 기기들을 연결해준 지수가 의자 손잡이를 돌려 그녀의 자세를 편하게 해주었다.
“잠시 쉬고 있어. 병동 돌아보고 올게.”
그녀는 작게 머리를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지수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갔다. 꼭 감긴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임신이라…… 이 소식이 마냥 기쁘지 않은 것은 단지 남편의 가출이 이유가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요의가 살짝 느껴졌으나 머리에 댄 기기들을 치우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잠들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으나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왔다. 머릿속은 삼검풀이 뒤엉킨 듯 복잡했지만 몸은 자꾸만 힘없이 추락해 내렸다. 뜻밖의 임신소식, 연락두절 된 남편, 다시 나타난 박성준…… 그리고…… 그리고 뭔가 가물가물 기억이 떠오르는 듯 했지만 몸은 자꾸만 그녀의 의식을 편안한 잠의 세계로 빠뜨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앳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아줌마, 아줌마……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아줌마……”
뭐? 아줌…… 마? 아무리 나이 마흔을 앞두고 있어도 그렇지…… 아기도 없는데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꿈인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꿈이 아니라면 분명 지수의 상담실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며 잠들었을 자신이 왜 생뚱 같이 이런 낯선 카페에 와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주위에는 왁자지껄 떠드는 고중생들 천지다. 아유 시끄러워. 우리 때는 말도 조용조용 하고 엄청 조신했는데 요즘 애들이란…… 그녀는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야, 강정연!”
그녀는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이상했다. 분명 앳된 모습의 어린 소녀인데 이토록 당돌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니…… 참으로 방자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했다.
“꾸물거리고 뭐해? 빨랑 안 튀어와?”
뭣이 어쩌고 어째? 꾸물? 튀어? 이것이 보자보자하니까……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뉘 집 애인지 가정교육 한 번 제대로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옥, 좀 조용히 못해? 너 혼자만 있는 공간 아니잖아.”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는 한 작은 인영이 이렇게 뇌까리며 앳된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익숙한 모습과 목소리…… 조금 앳되긴 했지만 분명 자신과 같은 음성이며 말투였다.
“그나저나 선화 그 년은 왜 아직도 안 와? 정연이 너보다 더 꾸물거리는데?”
그러고 보니 방자한 소녀의 앳된 얼굴이 동창 미옥이의 얼굴과 오버랩 되었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꿈일 거야. 그래, 이건 분명 꿈으로 자신의 지난 과거 모습을 보는 것일 거야.
“저기 저 아줌마가 카페에서 자고 있더라구……”
그녀 쪽을 바라보는 어린 그녀와 어망 결에 시선이 부딪쳤다. 어? 내가 보이는 건가? 금방 날 깨운 것도 어린 “나”였나? 그럼 이건 설마 꿈이 아닌 건가?
“뭐야, 정연이 너도 참 너다. 웬 아줌마가 자든 말든 너랑 뭔 상관인데?”
어린 미옥이 그녀를 건너다보며 궁시렁거렸다. 어린 그녀는 여전히 걱정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자다가 지갑이라도 잃어버리면……”
애숭아, 미안한데 지금 우린 거의 지갑을 안 쓰거든. 다들 위챗이며 알리페이로 결제를 하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가 덴겁한 듯 가방을 확인했다. 다행히 크로스백은 그녀가 멘 상태로 있었고 가방 안의 핸드폰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폰 화면을 확인해보니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2G폰 시대여서 4G서비스가 불가능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행히 가방 안에 지갑이 있고 돈도 약간은 들어있었다. 와이파이가 안 터져 핸드폰 결제가 불가능할 때 쓰려고 대비해둔 건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주위 학생들이 자꾸 힐끗거리는 게 신경 쓰여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웨이터는 그녀가 내민 돈을 보더니 얼굴 한가득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손님? 돈을 주셔야 합니다.”
“돈 맞잖아요.”
“죄송하지만 이런 지폐는 본 적이 없어요. 가짜돈은 안됩니다.”
그녀는 민망한 얼굴로 빨간색 백 위안짜리를 거두어들였다. 그렇다. 아직 신권 지폐가 유통되지 않았을 터. 그녀는 커피 한 잔도 못 마실 뿐더러 당장 주숙과 식사마저 문제가 될 판이었다. 재잘대던 소녀 둘이 이쪽을 쳐다보았고 당혹감이 일순간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
3
그녀는 지갑을 거꾸로 털어 제일 안쪽 케이스 안에 있는 동전을 꺼냈다. 액수를 확인했더니 다행히 주스 한 잔의 금액만큼의 일 위안짜리 동전이 들어있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그제야 두 소녀가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전해왔다. 가느다란 목소리였지만 분명 성준이라는 이름이 들려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맞다. 그녀 나이 18살, 첫사랑치고는 늦지 않은 편이었고 그때 그 시절엔 더 그랬다. 어린 “그녀”가 낮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간다고?”
“성준이 친구 데리고 온댔어. 선화는 안 간다 했으니까 2:2야. 넌 어때?”
“엄마가 1박 2일 여행 간다고 하면 다리 분지를 거야.”
“고3이라서 놀러 다닐 새도 없단 말이야. 왜 그리 융통성도 없냐? 모의고사 준비로 우리 집에서 공부하다가 자고 간다면 되잖아.”
“그래도 될까?”
되긴 개뿔…… 그녀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틀어쥐었다. 소녀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지금 고중 3학년생이고 만일 그렇다면 어린 “그녀”의 엄마도 건재하고 있는 게 분명하였다. 아마 눈앞의 이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열여덟 살의 그녀가 막 대학입시를 앞둔 늦은 봄날일 것이다. 그녀는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는 어린 “그녀”를 눈자리 나게 바라보았다. 두 뺨에 살짝 홍조가 어린, 곧 닥칠 불행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눈물겹도록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어린 모습을.
“안 돼.”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키득거리던 두 소녀는 얘기를 끝냈는지 주섬주섬 책들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카페를 빠져나와 가만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옥이와 헤어져서 집 쪽으로 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낮다분한 건물들과 올망졸망 들어서있는 다세대주택들이 20년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바로 여기였구나. 여기가 원래 이런 모습이었구나.
문득 앞쪽에서 걷던 소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도 주춤 멈춰 섰다. 소녀는 홱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미처 피할 사이도 없었지만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를 꼭 닮은, 맑고 그윽한 눈빛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짜릿한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아줌마. 카페에서 봤던 아줌마 맞죠?”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그녀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날 따라오는 거에요?”
“혹시…… 학생 이름이 강정연 맞어?”
막상 말을 내뱉으니 의외로 자연스러워졌다. 눈앞의 어린 소녀가 가장 익숙하고도 가장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맞는데요. 아줌마 저 알아요?”
“엄마 이름은 강순옥 맞고?”
“우리 엄마도 알아요?”
“알지.”
“아줌마는 어디서 왔어요? 우리 엄마랑 어떻게 되는 사이에요?”
소녀가 눈을 올롱하게 떴다. 그녀는 일단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나 먼데서 왔어. 엄마랑은……”
“먼데라면, 혹시 외국에서 왔어요?”
“외국? 음.”
“혹시 미국 사는 순희이모?”
가만히 생각해보면 솔직히 미국에 그런 이모가 한 분 있긴 하였다. 비록 그녀가 일가친척 그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 어……”
“이모! 엄마한테 이모 얘기 들었어요!”
소녀가 팔랑거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녀의 몸을 받아 안았다. 작고 가녀린 어깨와 연약한 몸매…… 어린 그녀……
“왜 이제야 온 거에요? 엄마가 이모 얘기를 여러 번 했었어요. 외할머니가 미국으로 재가를 하면서 데리고 갔다고……”
“그…… 그래.”
“빨리 집으로 가요.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소녀가 그녀를 잡아끌었고 그녀는 난감한 기색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
“왜요?”
“엄…… 엄마가 많이 놀라실 거야. 솔직히 반가워할지도 미결이고.”
“아……”
“그러니까 정연아.”
그녀는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오늘 날 만난 건 당분간 비밀로 해줘. 난 그냥 네가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서 이리 따라 온 거야.”
“네……”
“그리고 한 가지 네게 말해줄 게 있어서 따라온 거야.”
“네, 말씀하세요. 이모.”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친척 신분으로 접근했다 해도 어린 “그녀”는 상당한 고집이 있어보였고 남의 말을 그리 쉽게 믿는 타입이 아닌 듯 보였다.
“그…… 여행 가는 거.”
“아, 들으셨어요?”
소녀가 얼굴을 잔뜩 붉혔다. 그녀는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들이켰다.
“나도 그 일 비밀로 할 테니까 겁먹진 말고. 그런데, 안 가면 안 되겠니?”
“왜요?”
“그날…… 태풍이 불어.”
“……”
“그니까…… 일기예보에서 봤어. 그래서 그때 그 섬에 가면 배들이 끊길 거야.”
“섬이요?”
“섬에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런 계획은 아직 없었는데요? 아 섬이라…… 잼있겠는데요?”
뭔가…… 일이 묘하게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아닌데…… 그날 그녀 일행은 분명 섬으로 갔고 계획했던 일박이일의 여행은 태풍으로 배가 끊기는 바람에 무기한으로 연장되고 말았다. 일주일 후 겨우 집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엄마의 영정이었다. 미혼모였던 엄마는 그녀에게 모든 삶의 희망을 기탁했었고, 엄마 목숨을 앗아간 것은 태풍에 넘어진 나무를 피하려던 봉고차 한 대였다. 엄마는 실종된 그녀를 찾으러 애타게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정연아, 내 말 잘 들어.”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소녀의 어깨를 바싹 잡아당겼다.
“너 절대 그 섬으로 가서는 안 돼. 아니, 그날 집을 떠나선 안 돼. 그날 태풍이 엄청 부니까 너는 엄마 시선을 벗어나서는 안 돼.”
“그런데…… 이미 약속을 했는걸요.”
“약속……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무슨 약속. 가지 마.”
“이모, 그건 너무해요.”
소녀는 몸을 비틀어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지금까지 엄마도 날 이러라 저러라 하지 않았어요. 이모가 왜 나한테 이런 명령을 하는데요?”
“너 자꾸 그러면 벌써 연애한다고 엄마한테 이를 거야.”
“맘대로 하세요. 나 열여덟이에요. 그런 협박 먹히는 나이는 지났어요.”
하아…… 이게 누굴 닮아서 고집은…… 그녀는 이를 악물다가 차츰 눈에서 힘을 뺐다. 소녀의 치켜뜬 눈꼬리와 꼭 다문 입매에서 그녀는 일순 현기증을 느꼈다. 매번 거울을 들여다봤을 때 느꼈던 그 삭막함이 그녀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가련한 것.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비쳐 일렁거렸다. 그녀의 아랫배에 살짝 통증이 일었다. 뭔가 날카로운 것이 스치고 지나가고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이어졌다. 그녀는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디…… 아파요?”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소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천천히 쭈크리고 앉았다. 임신소식을 알기 전에도 이랬었다. 하지만 소식을 안 후에는 그렇게 그녀에게 무언가를 알리려는 양 간간히 통증이 몰려왔다. 사는 게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뱃속에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그녀더러 의식하게 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배를 감싸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었다.
“정연아. 거기서 뭐해?”
누군가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기억 깊은 곳에 소장되어있던, 그래서 떠올리기조차 꺼려지던 그 존재. 그녀의 깊은 아픔.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초점이 허공 어딘가에 맞춰졌고, 그런 그녀의 시야 안으로 한 얼굴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괜찮으시오?”
한여름의 햇살이 공기 속을 부유한다. 희뿌연 빛줄기가 머리 위의 그 얼굴을 한결 몽롱하게 만들었다. 꿈이 맞을 거야. 이제 갓 아이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한 그녀에게, 똑같이 그녀를 열달 동안 뱃속에 품었을 그 사람을 그녀에게 보내주다니……
“엄마.”
엄마…… 그녀는 가만히 입속으로 어린 그녀를 따라 불렀다. 그저 불러봤을 뿐인데 그와 동시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소녀와 소녀의 엄마가 급히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시우?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지 않겠소?”
“엄마, 이분은……”
소녀가 말하다 말고 그녀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엄마의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꿰뚫었다. 소녀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혹시 엄마는……
“뉘시…… 우?”
아스라이 솟구치는 체념과 실망 속에서 그녀는 입꼬리만 실룩거렸다. 엄마가 다시 그녀를 찬찬히 보았다. 손등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엄마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순희…… 냐?”
그녀는 허구푸게 웃었다. 탄력 잃은 피부와 눈가에 파인 주름…… 대체 어떻게 그녀를 알아본단 말인가. 또 눈앞에 열여덟의 어린 그녀가 버젓이 서있는데 말이다. 강순희, 어쩌면 당분간 이 이름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뿌옇게 흐린 그녀의 시선 안으로 아직은 건강한 엄마의 얼굴이 또렷이 들어왔다. 그래, 이거면 되었다.
……
4
엄마와 그녀가 살았던 구식 아파트단지 대문은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했다. 크고 작은 노점상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를 뚫고 그녀의 엄마와 어린 그녀(이하 소녀로 통일)가 그녀를 부축해 걸었다. 아파트단지 입구에서 그녀가 멈춰 섰고 그녀의 엄마는 으레 그러하듯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소녀에게 내밀었다.
“가서 귤 한 근만 사.”
소녀가 돈을 받아들고 나는 듯이 뛰어갔다. 그녀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엄마는 가난했다.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는 평소 과일 한 번 사먹는 것도 사치였으나 유독 그녀의 용돈만은 제한하지 않았다. 평소 친하던 미옥이나 선화도 그녀의 집안 형편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도록 말이다.
“어떻게 여길 찾았어?”
집안에 들어선 엄마는 그녀를 소파에 앉힌 후 따뜻한 물 한 컵을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집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가전제품에 거무칙칙한 색상의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의 삐걱거리는 문은 한 번도 손보지 않은 듯 했고 현관 쪽의 형광등은 아직도 깜빡거리고 있었다.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엄마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뜬금없이 과거여행을 하는데다가 오래전에 헤어진 엄마의 친동생을 열연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퇴로는 없어보였다.
“엄마……”
아니다, 엄마가 아니라 언니라고 해야 하는 건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찾아가라고 하던?”
“네? 네.”
“생각보다 우리말 잘하네.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겠는데 말이야.”
그녀는 대답이 구구해져서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엄마는 살짝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양키놈들 그 행동은 비슷하군.”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물이 찰랑거리는 머그잔만 내려다보았다.
“마셔. 물은 괜찮지? 커피 줄까?”
“아니에요.”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바로 그때 귤 한 봉지를 든 소녀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 앞에 귤 봉지를 내려놓고 소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소녀가 한쪽에 벗어놓은, 한때는 그녀의 것이었던 연노랑 재킷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떻게 지냈어? 거긴 다 잘 지내지?”
귤을 까면서 엄마가 무심한 듯 물었다. 거기라면 어디, 그녀가 온 곳인가 아니면 미국인가? 어디든 다 바이러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어있고 미국이라면 더 그럴 테고. 그녀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냥…… 그렇죠.”
“엄마는 잘 계셔?”
그녀는 언젠가 미국에서 날아온 부고를 생각했다. 엄마가 세상 뜬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땐 서로 찾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그 후 편지가 두어 차례 더 왔지만 그녀는 회신조차 하지 않았고 후에는 아예 이사를 해버렸다. 그래서 엄마가 묻는 말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만 떨어트리고 있었다.
“하긴. 엄마가 계셨더라면 너더러 날 찾아오게 할 순 없지. 내가 그 성미를 몰라서. 편안하게 갔지? 병으로 간 거 맞지?”
엄마는 담담히 말하면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 알약 둬 알을 입안에 넣고 목을 젖혀 그것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엄마의 모습을 쫓았다.
“어디 아파요?”
“별거 아니야. 나이가 드니 이리저리 쑤시네. 미안. 너보다 고작 몇 살 이상이면서 이런 말 해서.”
“그래봤자 마흔넷이잖아요.”
“내 나이 잘 아네.”
엄마가 후훗 웃었다. 그리고는 팔을 거두며 그녀에게 얼굴을 돌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미국에선 주로 뭘 먹지? 어디 보자…… 내가 할 수 있으려나.”
“찌개 먹고 싶어요.”
“응?”
“김치찌개…… 참치도 고기도 안 넣고 그냥 김치만 넣어서. 깔끔하게요.”
“내가 김치찌개 잘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엄마는 웃으면서 쌀을 안쳐 밥 가마에 넣은 후 뚜껑을 닫고 낡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잘게 썰었다. 얼마 안 지나 구수한 밥 냄새가 거실에 풍겨왔다. 그녀는 주방 곁에 놓인 식탁으로 다가가 수저를 챙겨 놓았다. 그때 소녀의 방문이 열리더니 옆구리에 책 하나를 낀 소녀가 도둑처럼 살금살금 까치발을 하고 현관 쪽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밥도 안 먹고 어딜 가?”
그녀의 말에 소녀가 입에 식지를 댔다.
“쉿, 조용히 해요.”
“밥 거의 다 됐어.”
“알아요. 그런데 미옥이랑 나가 먹기로 했어요.”
“외식 돈 들어. 그리고 너 지금 고3이야. 한창 공부할 때에……”
“아이 참, 엄마 잔소리도 머리 아픈데 이모까지……”
소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갔다. 문소리에 엄마가 밥을 푸다말고 주방에서 목을 길게 빼고 물었다.
“누가 왔어?”
“정연이 나갔어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발”했다. 이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게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인간의 적응능력과 수용능력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라 그래.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같이 마주 앉지도 않아.”
엄마가 밥 두 공기를 들고 주방을 나왔다. 둘은 말없이 상을 차렸다. 국과 간단한 밑반찬 두 가지를 놓고 그들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그제야 엄마가 그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몸은 어때? 아까는 어디가 안 좋았어?”
“아, 별일 아니에요. 임신이에요.”
밥 한 숟가락을 뜨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가 멍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국을 한술 떴다.
“맛있네요. 김치찌개는 역시 아무것도 안 들어간 깔끔한 맛이 좋더라구요.”
“누구냐.”
“네?”
“아빠가 누구냐. 설마 너도……”
“에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의 트라우마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미혼모라는 주홍글씨는 줄곧 엄마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럼 남편이랑 같이 오지 그랬니.”
“그이는 일이 바빠서……”
“그냥 잠깐 온 거야? 아니면 이제 여기로 자리 잡은 거야?”
“잠깐 얼굴 보러 온 거에요.”
“그래. 몸도 그런데 매운 거 먹지 말아.”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더는 말이 없었고 둘은 고개를 숙이고 수걱수걱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설거지를 하겠다는 그녀에게 엄마가 화를 낸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상황이 없었다. 소녀의 방 침대에 그녀의 잠자리가 펴졌고 이제 소녀가 들어오면 자기랑 함께 자면 된다고 엄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소녀의 테이블 위에서 그녀는 비번이 걸려있는 소녀의 일기책을 발견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그 노트를 만지작거리니 스르륵 하고 비번이 풀렸다. 그녀는 뭔가 한참 생각하다가 노트 제일 뒷장을 펼쳐들었다.
그녀를 잠에서 깨운 것은 한밤중 엄마의 방에서 울려나오는 소녀의 울음소리였다. 그녀는 더듬더듬 전등을 켜고 방문을 나섰다. 소녀가 엄마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 미옥이네처럼 가정이 화목한 것도 아니고, 선화네처럼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고…… 엄마도 어린 나이에 연애하고 말 안 들어서 외할머니한테 버림 받은 거 아니야? 그러면서 지금 왜 나를 막는 건데?……”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소리가 멎어버렸다.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녀가 급히 달려 나왔다. 그녀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소녀는 울면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방안과 현관 쪽을 번갈아 보다가 소녀가 소파에 벗어놓은 재킷을 챙겨들었다.
후미진 골목은 노점상들이 휩쓸고 간 빈자리 때문에 더 어수선했고 한산한 길거리의 가로등들은 희부연 먼지를 들쓴 채 고즈넉하게 서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시각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20년 전의 그날, 그녀가 처음으로 외박을 한 날.
“어서 오세요.”
한밤중에 등장한 고객이 썩 반갑지만은 않은 듯 작고 허름한 라면집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그런 주인을 지나쳐 곧장 가게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카운터에 가려져 외부가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자리로 다가갔다.
“강정연, 나 좀 봐.”
……
5
“이모……”
소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집요하게 자리를 지켰다. 단단하고 고집스럽게 얽힌 눈빛을 한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중에 얘기해요. 나 약속 있어요.”
“박성준 안 와.”
“네?”
“네가 호출했다고 바로 나오는 그런 애 아니야.”
“이모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성준인 어떻게 알아요?”
그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후 잠시 숨을 들이켰다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둘, 셋……”
끔뻑…… 하고 가게가 정전이 되어버렸다.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속에서 가게 주인이 역증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가 멀다하게 정전이니 나 원 참. 뭔 장사를 해먹겠어.”
그녀는 손을 내밀어 소녀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 소녀는 순순히 그녀를 따라 나왔다. 도로에 나오니 그래도 먼 곳의 네온사인 때문에 지척이 보였다. 그녀는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촘촘한 어둠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이 일대는 항상 이렇게 정전이 돼. 이번에도 십여 분쯤 걸릴 거야. 이 상황이 개선되려면 앞으로도 십년은 더 있어야 하고.”
“……”
“박성준은 유학을 준비해. 애초에 진로를 국내로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 일기 훔쳐봤죠?”
어둠속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한결 차갑게 들려왔다. 그녀는 허구푸게 웃었다. 소녀가 이렇게 헛짚으니 구구히 설명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녀 자신의 일기였으니 훔쳐보고 말 것도 없었지만.
“일기에…… 썼구나?”
“나에 대해 아는 척 하지 마요. 이모가 뭘 안다고.”
소녀가 뇌까렸다. 그녀는 서글프게 웃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이번에는 일기에 없는 내용을 말해보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넌 엄마가 싫었지. 아빠가 없는 것도 모자라 미혼모라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으니까. 넌 크면서 엄마가 항상 무덤덤한 것도 싫어했어. 잘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함이라곤 하나 없는 그 덤덤한 태도가 넌 마음에 들지 않았어.”
“……”
“넌 항상 빨리 커서 엄마를 벗어나고 싶어 했지. 하루빨리 너에게 속한 가족을 만들어, 제대로 된 가정생활을 해보고 싶어 했어. 넌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지.”
“……”
“언젠가 각 학교 축구시합에서 학교 응원팀으로 나갔던 넌 우연히 박성준을 만났어. 미옥이 한동네 친구가 박성준과 한 학교였고, 성준이 친구 현우는 마침 초등학교 동창이라 시합이 끝나고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게 되었지.”
“……”
“박성준은 그 학교 킹카야. 잘생겼고 집안 좋고 공부도 잘하고 게다가 축구도 잘해.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좋아했는데 넌 그 애와 사귀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현우를 이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지. 네 친구인 미옥이나 선화도 모르는 일이야. 맞지? 심지어 넌 엄마가 미혼모라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어. 넌 성준이 그 일을 알면 널 떠날까봐 두려워하고.”
“이모……”
소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희미하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데 박성준은 집에서 시키는 대로 유학을 가게 되어있어. 외국 가서 대학을 다닐 예정이거든. 성준이는 네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넌 집안 형편 때문에 갈 수 없어. 그래서 너는……”
“그만해요.”
드디어 소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배어나왔다. 그녀는 밤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뿜었다. 긴 시간을 성큼 가로지른 하늘은 여전했고 일월성신의 자리도 그대로였다. 그녀의 눈귀에도 한줄기 눈물이 배어나왔다. 고해성사란 바로 이런 느낌이었군.
“너의 원 계획은 아까 내가 카페에서 들은 대로 여행을 가는 거였는데 엄마가 동의할 것 같지 않아 넌 지금 일부러 엄마랑 싸우고 가출을 꾀하려고……”
“이모 뭐에요? 왜 이래요? 어떻게 알아요? 나에 대해 조사하고 성준이도 조사했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소녀는 당장이라도 큰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사위가 확 밝아져 그녀는 눈을 가슴츠레 떴다. 전기가 들어온 길거리는 아까보다는 조금 활기가 돌았다. 라면가게 주인이 구시렁거리며 셔터를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소녀에게 가지고 나온 재킷을 씌워주었다.
“가자. 이 일은 내가 도와줄게.”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 그녀가 따라주는 따뜻한 물을 받아마셨다. 엄마의 방문은 꼭 닫혀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방 쪽을 흘깃거리는 소녀에게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일 아침에 얘기해. 오늘은 서로 기분 눅잦히고.”
“엄마 화 많이 냈죠?”
“글쎄……”
“처음이었어요. 엄마가 날 때린 건. 남들처럼 금이야 옥이야 키우진 않았어도 해줄 건 다 해주고 그랬거든요. 아까는 내가 좀 심한 말을 했던 거 같아요……”
“내일 아침 엄마한테 얘기하렴. 지금의 너의 생각들에 대해.”
“그런데, 이모는 어떻게 나에 대해 그리 속속들이 알아요? 설마 정말 우리한테 개인탐정이라도 붙였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일들은 기억을 더듬어낼 수 있지만 그 후의 일들은 미지수였다. 20년 전의 그녀는 처음으로 외박을 했고 그날 그 라면집에 나와 준 사람은 박성준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와 남편인 차현우 사이에 얽힌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과정이 바뀌었다. 그녀가 라면집에 가서 소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소녀는 외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런 소녀라면 일주일 뒤의 여행도 감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엄마의 정해진 운명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그녀의 임신소식을 알고 얼마나 기뻐해주실까.
그녀가 굳이 밖으로 따라 나가 소녀를 데려온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날은 바로 그녀와 남편이 만나는 날이었다. 20년 전의 이날, 라면가게가 거의 문을 닫을 무렵, 한 남학생이 땀벌창이 되어 가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오늘처럼 가게가 정전이 되자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한마디를 던졌다.
“차현우, 우리 어디 가서 술 마실까?”
그날이 없었더라면, 성준과 오해도 없었을 것이고, 그 후 엄마의 부재와 실연의 고통을 한꺼번에 겪어야 하는 슬픈 날들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까짓거, 그깟 운명 변하면 또 어때? 아무리 불행해도 지금보다야 더 하랴 싶었다.
“이모 날 도와준다 하지 않았어요?”
소파에 다리를 올려 턱을 괴이고 앉은 채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소녀의 머루알 같이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랬지.”
“성준이랑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는지 알려줘요.”
“사랑해?”
“네?”
“박성준 사랑하냐고. 네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라도 그 사람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 만큼.”
“뭘 그렇게 무섭게 얘기해요? 사랑이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럼 뭐라고 생각해?”
“그냥 바라보면 기분 좋고, 만나면 설레고, 헤어지면 보고 싶어 미치겠고…… 그런 게 사랑 아니에요?”
“그건 다 네 주관적인 느낌이잖아.”
“……”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해?”
“글쎄…… 요? 그럴 걸요?”
“반문형인 걸 보니 너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구나.”
소녀는 머리를 푹 떨어트렸다. 그녀는 눈을 들어 소녀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하얀 뺨까지. 소녀는 예뻤다. 꼭 마치도 막 터지려는 꽃봉오리처럼 함초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가련한 것. 그녀는 또 한 번 생각했다.
“누구보다 너 자신을 잘 아끼도록 해.”
“네?”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소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소녀가 그녀에게 몸을 살짝 기대왔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넌,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야. 굳이 애써 누구를 잡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 조금만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엄마가 미혼모라는 게 누구의 잘못이 아니고 집이 가난한 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걸. 네게 부족한 건 자신감이야. 그러니까 네 자신을 아끼고 당당해질 필요가 있어. 넌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이모처럼요?”
가슴이 선득해져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쌕쌕 잠든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니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린 그녀, 그녀의 과거이지만 이제부터는 그녀와 다른 성장과정을 거칠지도 모르는 어린 그녀…… 그 어린 그녀는 나중에 지금의 그녀와 혼연일체를 이룰 수 있을까.
커튼 사이를 비집고 찬란한 아침햇살이 집요하게 뚫고 들어온다. 그녀는 손차양을 하고 소녀의 얼굴에 햇빛이 비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인기척소리가 나며 엄마가 방문을 열다가 거실에 있는 그녀 둘을 보고 주춤했다. 그녀는 식지를 입에 가져다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에 엄마는 시무룩하게 웃더니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눈앞의 정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기억에서 소진된 엄마와의 평범한 아침, 지난 시간동안 기억 저변에 깊이 묻고 살았던 그 익숙한 느낌…… 이런 행복을, 그녀는 언제부터 놓치게 되었을까. 서서히, 그녀의 가슴속으로 한 가닥 온기가 스며들었다. 동시에 눈물도 같이 흘러내렸다.
……
6
그녀의 조언이 빛을 발했는지 소녀는 그 번 주말에 여행을 가지 않았다. 대신 박성준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야단법석이었지만 그녀는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때 소녀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모, 안에 계시죠?”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다. 박성준…… 앳된 얼굴에 정갈한 옷차림을 한 그가 거실 한복판에 긴장된 얼굴로 꼿꼿이 서있었다. 그녀는 냉랭하게 그를 훑어본 후 여전히 준수한 그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은 박성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우연히 여행을 같이 갔고, 우연히 배가 끊겨 돌아오지 못했고, 우연히 그녀의 모친상을 당했고, 또 우연히 그녀의 엄마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빼고 말이다.
장례를 치른 후 한달 지나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엄마를 잃은 슬픔 때문에 건강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별다른 의심 없이 병원에 갔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임신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 하고 그녀는 황급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어느 학교 몇 학년생이냐 하는 의사의 추궁이 두려운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그때의 그녀로서는 아이를 부담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푸라기 같은 한 가닥 기대를 안고 성준이를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괜찮다고. 이왕 이렇게 된 바엔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유학을 떠나자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런 빈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머리를 싸쥐고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믿기 힘든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확실해?
무슨 소리야?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참기 어려울 만큼 현기증이 일었다.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우리 분명…… 처음이었어.
난 처음이야. 하지만 넌 모르지. 언제 너 현우랑 바에서 술 마시는 거 본 사람 있어.
차현우. 그날 널 호출했는데 네가 축구하느라 호출기를 현우한테 두고 갔던 날. 후에 너랑 이 얘기했었잖아.
밤새며 술 마셨다는 얘긴 안했어.
지금 너, 현우랑 나 의심하는 거야?
상황이 그렇게 됐잖아. 어떻게 딱 한 번만에 임신이 돼? 그리 쉽게 되는 거였나? 너 애초에도 현우랑 사귀는 척 하면서 날 자극해서 네게 고백하게 만들었잖아. 어쩌면 그때 현우랑 사귀는 척 한 게 아니고 사귄 건 아니야? 그리고 여행을 간 게 내 제안도 아닌데 하필이면 너희 집엔 사고가 났어. 그것만 해도 마음 무거워 죽겠는데 또 이런 일까지 겹쳐서…… 그리고 솔직히 엄마 일도 날 속였는데 또 무엇을……
찰싹.
무슨 정신에 돌아섰는지 몰랐다. 처음으로 한 사람의 귀뺨을 때려보았다. 어찌 엄마를…… 고인이 된 엄마의 일까지 거론하며 의심한단 말인가. 며칠 후 그녀는 작은 개인 진료실 수술대에 올랐다. 작은 진료소라도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생각났다.
현우가 또 한 번 땀벌창이 되어 달려왔다. 그는 사인을 하고 수술실 밖에서 두 시간을 대기했다. 마취가 풀리고 그녀가 벽을 짚고 나오자 그가 다급히 다가왔다. 핏기가 빠져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현우가 말했다. 성준이, 내일 유학 가.
상관없어. 그리 말하는데 입과는 별개로 그녀는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튿날, 그녀는 공항에서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옥이가 팔랑거리며 달려와서 말했다. 현우가 공항에 찾아가 성준이 때렸대, 성준이 아주 코피 터지고 난리 났다더라. 현우가 널 좋아했나봐. 어머, 웬일이야…… 나 이런 거 영화에서나 봤는데.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들이 현우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그녀가 아는 현우는 그 누구도 좋아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혼자였다. 현우는 입양된 아이였고 양부모와도 항상 거리를 두었다. 그는 항상 혼자 다녔고 밥도 혼자 먹었으며 친구들과도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온 현우의 양엄마가 담임에게 얘기하는 걸 그녀가 우연히 들었던 적이 있었다. 현우는 성준과는 완전히 정반대 타입이었다. 그나마 둘 다 축구를 좋아해 친구로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둘 사이 관계도 완전히 찢어졌다.
그 후, 대학입시를 치르고 현우는 원하는 대학을 갔지만 그녀는 대학을 포기하고 외국어 전문학교로 갔다. 졸업 후 그녀는 이 도시 어느 무역회사에 입사해 해외 전자상거래를 맡았다. 그 사이 대시하는 사람이 꽤 되었지만 그녀는 모조리 거절했다. 그리고 그녀가 스물여덟이 되던 해, 현우가 불쑥 그녀의 회사로 찾아왔다.
“결혼하자.”
“뭐?”
“어차피 너랑 나, 지금 둘 다 외톨이야. 집에서도 결혼하라고 재촉하고. 너도 주위 시선들이 따가울 거 아니야. 여자 혼자 살아가기엔 불편한 세상이기도 하고.”
“……”
“좋아하는 사람 나타나면 언제든지 헤어져줄게. 일명 쇼윈도우 부부.”
“……”
“툭 까놓고 말할게. 결혼을 하고 손자를 봐야만 회사를 주겠다네. 내 양부모가.”
“아, 그렇구나.”
고민하고 연락을 달라며 현우가 명함을 남기고 일어섰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한때 자신을 도와준 현우였으니 아마 그 갚음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모,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요?”
소녀가 그녀를 툭 건드렸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눈앞의 두 아이를 보았다. 싱그러운 나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젊은 날의 순수함이 묻어있었다.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러니까, 호주엔 언제 간다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디 간다고 아직 정연이한테도 말 안했는데.”
박성준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언뜻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요즘 많이들 유학을 가니까. 호주 아니면 뉴질랜드로.”
“하긴 그래요.”
박성준은 해맑게 웃으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연이랑 꼭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형편도 안 되고 하니까…… 나중에 꼭 데려가든가 제가 오든가 할게요.”
“앞으로의 일은 장담하지 말아.”
소녀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 앞일을 누가 알 수 있겠어? 그냥 지금을 소중히 생각해. 난 대학지원 안 넣고 외국어전문학교 갈 거야. 누가 알어? 먼 훗날엔 유학파보다 우리처럼 국내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직장 찾기 더 유리하게 될지.”
“정연아.”
“뭐지? 그 새삼스러운 눈빛은? 나도 내가 놀랍긴 한데…… 이모 말을 듣기로 했어. 나는 내가 소중해. 그래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기로 생각했어. 그게 행복해지는 길이래.”
박성준은 놀랍다는 기색으로 소녀를 보았고 소녀는 그녀에게 회심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마가 주방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간장 떨어졌는데 잠깐 나갔다 올게.”
“내가 갈게요.”
그녀가 일어서자 엄마가 그녀를 다시 눌러 앉혔다.
“앉아서 얘기들 하고 있어. 애들이 너랑 얘기 잘 통하는 거 같은데 뭘 자리 비우고 그런다냐. 후딱 갔다올게.”
“네, 어머님 다녀오세요.”
박성준이 일어나서 허리를 굽혔다. 참으로 구김 없이 반듯하게 자란 아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그녀는 박성준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안 사정은 잘 알고 있겠지?”
“이모, 내가 다 얘기했어요.”
소녀가 낮게 소곤거렸다. 박성준은 고개를 돌리고 소녀의 손을 잡았다.
“네, 이모님. 얘기 들었어요. 좀 의외이긴 했는데 상관없어요. 나는 그냥 정연이가 좋은 거니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한테는 아직 말씀 못 드렸어요. 요즘 제 진로 때문에 예민하세요. 나중에 차차 말씀 드리고 허락 받으려구요.”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배안에서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또다시 바늘로 콕콕 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어린 그녀가 행복하다는데…… 창문 밖으로는 옥양목 같은 화사한 구름이 높이 떠있고 햇살이 찬연한 어느 여름날 오후, 햇빛이 그녀의 배에 사선으로 내려앉고 열어둔 창문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 들어와 식탁보가 살랑살랑 나붓거리고 있는 지금…… 그녀는 행복했다. 이 행복을 그대로 박제해두고 싶었다.
바로 그때, 아츠러운 전화벨소리가 그녀의 행복을 깨뜨렸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든 소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기색도 참담해졌다. 아, 행복에 취해 그만 잊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
“엄마가……”
막혔던 울음을 터뜨리며 소녀가 말하였다. 그녀는 아스라이 그것을 듣고만 있었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둔했다. 운명은, 정해진 팔자는 정녕 거스를 수 없는 것일까.
“엄마가 사고 당했대. 요 앞 사거리에서……”
그녀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배에 손이 갔다. 그동안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불안감이 이제야 비로소 형체가 생겼다. 간간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이 아이…… 만일 엄마가 살아계시고 소녀와 박성준이 헤어지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걸까? 이런 슬픈 딜레마가 또 있을까.
셋은 허둥지둥 집 문을 나섰다. 아파트를 빠져 나오자 사거리 길목에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여 있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등줄기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
7
인파를 헤치고 그들이 다가갔을 때,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녀가 예상했던 교통사고의 참혹한 현장이 아니었다. 엄마는 눈을 꼭 감고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누군가가 한창 엄마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깼다. 눈 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녀는 엎어지듯 엄마의 곁에 다가갔다. 엄마가 눈을 뜨자 엄마를 구한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박성준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차현우?”
그녀의 심장이 한 박자 놓쳤다가 다시 세차게 뛰었다. 그를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를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될 줄은 더욱 더.
앳된 얼굴의 박성준과 달리 현우의 눈빛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긴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무심한 듯한 표정은 여전하였다. 그들을 잠시 보다가 현우가 몸을 일으켰다.
병원으로 모셔가자.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법석대던 인파가 흩어졌다. 병원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녀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귓전에는 현우와 성준, 그리고 소녀의 대화가 두런두런 전해졌다. 어떻게 된 거야? 급성 심부전으로 인한 심근경색. 지병이 있었던 거 같아. 엄마가 그녀 앞에서 먹던 알약이 떠올랐다. 넌 어떻게 왔어? 네 호출기 나한테 있었잖아. 정연이가 문자 넣었더라. 오늘 보자고. 아, 맞다. 내가 불렀지. 겸사겸사 밥이나 같이 먹자고. 소녀의 말에 박성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 성준의 말끝이 흐려졌고 소녀가 말했다. 차현우, 너 아니었음 큰일 날 뻔 했어. 응급치료도 다 할 줄 알고. 대단하다. 집안에 환자가 있어. 아, 그렇구나……
병원에 도착하고 입원수속을 마치자 그제야 그녀는 현우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늘 그녀를 대하던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노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행인 것은 아직 현우는 열여덟 살의 고중학생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고마워, 학생.”
현우는 그녀에게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그에게, 그에게만은 뭔가라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은 소녀가 그때까지 성준과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눈에 띄자 더 할 나위 없이 절박하게 밀려왔다. 그녀가 현우의 팔을 잡았다. 현우는 묵묵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커피라도 살게.”
“아니에요.”
“엄마, 아니 언니가 알면 꼭 뭐라 하실 거야. 생명의 은인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녀에게 엄마를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한 다음 현우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병원 맞은 켠의 자그마한 카페에 마주앉을 때까지 현우는 아무 말 없었다. 그는 그리 과묵한 성정이 아니었지만 유독 그녀를 대할 때만은 침묵이 많은 것 같았다. 주문한 커피가 올라오자 뭔가 말하려던 그녀가 문득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현우는 웨이터에게 물 한잔을 시켜서 그녀에게로 밀어놓았다. 물을 한 모금 크게 들이키자 다행히 울렁거림이 멈췄다.
“머리, 잘라야겠네.”
그녀가 현우를 보며 말했다. 남편은 항상 깔끔하게 머리를 정돈했었다. 하도 정밀하게 머리카락을 손질해서 매번 여자인 그녀보다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네.”
“아까는 고마웠어.”
“아니에요.”
그녀가 풋 웃자 현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니야.”
“네.”
“네, 아니요 말고 할 줄 아는 말이 더는 없어?”
“네?”
“아니야, 됐어. 그냥 농담한 거야. 왠지 학생 얼굴 보니 친근해보여서.”
현우가 알릴락 말락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았다. 처음 보았다. 그가 그런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것을.
“내 얼굴이 친근해 보인다는 사람도 다 있군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과 닮았어.”
“그래요?”
그것을 끝으로 둘의 대화가 끊겼다. 그녀는 민망함을 감추느라 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진로는, 어떻게 정했어?”
“네?”
“그 또래 학생들 다들 지원 쓰고 야단이어서. 학생들 사이에 제일가는 화제 아니야?”
“나 대학 안 가요.”
“응? 왜?”
그가 다시 침묵했다. 문득 정연이 대학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게 생각이 났다. 설마 하는 의심이 똬리처럼 그녀의 머리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한 번 찔러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너 정연이 좋아하냐?”
현우의 눈빛이 한결 짙게 가라앉았다. 의심이 확인되자 문득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남편은 분명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애초에 쇼윈도우를 제안했었고 결혼 후에도 정확히 선을 지켰었다. 매번 부부생활도 판에 박은 듯 정해진 날짜에 치러졌고 일이 끝나면 더 머물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오죽하면 그녀가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제안하자 거품처럼 종적을 감추었겠는가.
“내가 정곡을 찔렀나?”
일부러 소탈한 듯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긴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을 탁자 밑으로 내려 가만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현우는 여전히 아무 말 없었다.
“진작에 포기해 버리는 게…… 좋을걸.”
“왜요?”
그가 똑바로 시선을 들었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삭막한 여인의 얼굴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그녀 얼굴을 향하는 듯 여겨져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기증이 일고 속이 메슥거렸다. 뱃속의 한 생명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듯 목구멍을 타고 신물이 올라왔다. 배가 간간히 아파왔다.
“그러니까 정연인 박성준 좋아해.”
“알아요……”
“둘은 진짜 사랑인 것 같고 설사 환경이 둘을 잠시 갈라놓는다 해도 정연이 마음속에는 줄곧 박성준이 있을 거야. 정연인 성준일 기다릴 거야. 내가 그걸 알아.”
너와 이어져서는…… 안 돼. 그러면 미래가 현실이 될 거고 운명이 바뀐 엄마는 이대로 사라질지도 몰라. 못 다한 말을 그녀는 입안으로 삼키고 말았다. 어쩌면 이것 역시 현우를 위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둘의 결혼생활이 과연 행복했던 걸까? 그래서 뱃속의 이 아이…… 포기한다 해도 그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복통이 더 밀려왔다. 그녀는 어쩌면 아기가 자신의 결정을 알아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넌 대학을 가. 너 법대 좋아했잖아. 소원대로 법대 가고 로펌도 차려. 넌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남편이 차린 로펌은 주가가 날로 상승했고 크고 작은 기업들은 다들 남편의 명성을 신뢰했다. 사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남편은 왜 집에만 들어오면 웃는 얼굴이 없었을까.
“그리고 막상 정연이 성준과 헤어졌다 해도, 정연일 사랑해서는 안 돼. 그 아이는 마음속에 항상 성준일 품고 있을 아이니까. 우리 집안 여자들 집념이 그래. 내가 지나온 경험자로서 얘기하는 거야……”
극심한 복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신음소리를 막지 못했다. 현우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야, 미안해……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조였다.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현우의 모습이 눈앞에서 흐릿해졌다. 설마 이 아이, 아빠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을까.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그러안았다. 다리를 타고 뭔가 끈적한 것이 흘러내렸다.
“도와…… 줘.”
드디어 이 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현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들었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기…… 가 잘못된 거 같아……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처럼 흐느꼈다. 어떡해? 아기…… 이 아기 살려줘…… 포기하고 싶지 않아…… 우리 아기…… 그가 비틀거리며 달렸다.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그녀를 안고 달려갔다. 병원 대문이 가까워올 때 그녀는 그만 의식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소녀를 향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어떻게 됐어?
이모, 엄마 괜찮아요…… 의식 회복했어요. 소녀가 그녀를 눕혔다. 그녀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누웠다. 소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기도 괜찮아요. 성준이랑 현우랑 밥 먹으라고 보냈어요.
그녀는 배에 손을 올렸다. 눈가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아기를 포기할 생각을 해……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결혼 후 얼마 안 지나 그녀는 전의 임신중절수술의 후유증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더 이상 임신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시어머니는 집요했다. 자식을 가질 수 없어 남편을 입양했던 시댁은 손자마저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녀 또한 남편과의 삭막한 결혼생활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자 희망이 바로 아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아기를 잃을 번하다니……
아기, 괜찮아요. 착상 중에 출혈이 있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래요. 하지만 꼭 정기검진 다녀야 한대요. 복통이 있어도 병원 다니구요. 아셨죠?
소녀는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는 알릴락 말락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엄마 어딨어? 나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어.
다행히 엄마의 병실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녀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복도에 놓인 의자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던 미옥이와 선화가 둘을 발견하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옥이는 통이 너른 바지를 입고 있었고 선화는 진한 색상의 뿔테안경을 걸고 있었다. 소녀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여긴 우리 이모야.
안녕하세요. 둘이 그녀에게 곱삭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참 고맙구나. 너희들이 있어줘서. 별말씀을. 정연이 일이자 우리 일인 걸요. 미옥이 밝게 대답했고 선화가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수야, 고마워.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다들 어정쩡해 서있었고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아, 미안. 내 친구 중 얘랑 비슷한 친구가 있어서. 학생 이름은? 선화에요. 김선화. 그런데 지수라는 그분, 여자에요? 응? 응…… 여자야. 그건 왜? 아니요. 이름이 특이하고 개성 있어서요.
우리 그때에 그건 정말 흔하디흔한 이름이야…… 다행히 이 말은 입안으로만 중얼거렸다. 엄마의 병실에 들어선 그녀는 소녀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다정하게 문까지 꼭 닫아주었다.
……
8
엄마는 고개를 반쯤 돌려 들어서는 그녀에게 허약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녀는 침대에 앉아 엄마의 손을 잡았다.
“놀라 죽을 번했잖아요. 못 볼까봐.”
“정연이한테서 들었다. 네가 걔네들보다도 더 울었다며?”
“그런 병이 있었으면 말을 미리 하시지……”
“그동안 정연이도 모르는 일이었어. 쓸데없는 걱정 끼치긴 싫었거든.”
엄마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 잘 왔다.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
“뭔데요?”
“네가 언제까지 머물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연이…… 좀 맡아줘.”
“……”
“난감한 일이라는 걸 알아. 염치없는 부탁인 줄도 알고.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0년 전, 외할머니의 부고에 이어 그녀더러 미국으로 오라는 이모의 편지를 엄마가 받았었다는 말을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엄마는 그녀의 망설임을 다른 의미로 곡해한 듯 보였다.
“그래. 너로서도 쉬운 결정이 아닐 거야. 너도 가정이 있고 아기도 곧……”
“아니에요. 그런 거.”
그녀는 허리 굽혀 엄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별일 없을 거예요. 만일 지금 병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 때문이 아니야. 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은 딸이야. 널 보니 알겠더라.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어른이 다 되었고, 난 한참 세상을 살았는데도 참 너희들에게 남겨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삶이 이토록 허무한데, 난 평생 무엇을 기다렸는지……”
“의사가 몸조리만 잘 하면 괜찮댔어요. 정연이 장래가 걱정되는 거라면 그건 내가……”
“참 많이 닮았어.”
문득 엄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리고 뭔가 입안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는지 그녀가 되물었다. 형광등에 비친 엄마의 얼굴은 혈색 없이 창백했다. 엄마는 다시 그녀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정연이랑 너 말이다. 정연이 나중에 나이 들면 네 지금 모습이겠지?”
엄마의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반문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만일 그녀가 20년 후의 딸이라는 걸 엄마가 안다면…… 엄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거의 죽다 살아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나는 잘 살지 못했지만 정연이한테는 제대로 된 삶을 준비해주고 싶었어. 그동안 정연이 앞으로 집을 사려고 준비해둔 돈이 있어. 정연이가 성준이 따라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면 그 돈으로 보내. 처음에 남자친구 생겼다고 해서 마음 졸였는데 보니까 알겠더라. 반듯한 집에서 좋은 것만 보고 구김살 없이 자랐을 것 같은 남자애. 우리 정연이 속 썩일 것 같지는 않았어. 만일 유학경비 모자라면 지금 사는 집 그거 팔아서 보내줘. 집에 가면 옷장 맨 마지막 층에 상자 하나가 있을 거야. 관련 서류들은 그 안에 다 넣어뒀어.”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문득 화가 치밀었다. 엄마의 말은 평온하다 못해 꼭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마냥 그녀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반지하 셋집을 여러 번 전전하면서, 겨우 지금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구매해 이사 올 때까지 집안 살림은 항상 쪼들렸었다. 그녀에게 변변한 옷가지 하나 사주지 못하고,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과일 한 번 시름 놓고 사주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엄마가 다른 과일은 비싸서 엄두를 못 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함구하고 말았다. 게다가 두통으로 항상 시름시름 앓고 있던 엄마라 모녀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딸애에게 엄마가 평생 고생하면서 끌어 모은 전 재산은 단지 그녀의 장래를 위해서였다. 박성준과 함께 유학을 떠나기 위한, 그녀의 철없는 사랑을 지키기 위한.
“누가 그런 걸 준비해 달래?”
불퉁한 기색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시 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여전히 목구멍으로 치닫는 원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원망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참 이해가 안 갔어. 분명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난 소통과 이해가 필요했다고.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뭐가 해결돼? 누가 대단하다고 해? 그 위대한 모성애를 기려 기념비라도 세워줘?”
엄마의 결정에 향한 불만인지 아니면 그동안 억눌렀던 본능적인 감정인지 모를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항상 이런 식이지. 그 어떤 거창한 것을 바란 것도 아니야. 그냥 가족이 필요했다고. 누군가와 같이 한 공간에서 살고 밥 먹고 잠을 자고. 동네에 생긴 일이나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다는 얘기 정도. 그냥 그런 평범한 가족사랑을 바랐어. 그래야만 이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이 안 드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알아?”
미안하다. 엄마의 눈가로 굵은 눈물이 배어나왔다. 그래야만 하는 줄로 알았어. 처음엔 얘기했는데, 차츰 깨달았어. 서로 힘들 바엔 혼자가 낫다는 걸. 누군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걸. 이러면 막상 누군가가 가버려도 남겨진 사람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정연 아빠가 가고 그리 살아왔었어. 나만 참으면 된다고. 넌 그렇게 살지 말아.
그녀는 눈확이 시큰거렸다. 고개를 돌렸지만 눈물은 여전히 눈 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데퉁스런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가족이란 게 뭔데. 험한 일 궂은 일도 같이 겪는 게 가족이야. 정연이가 알아봐. 얼마나 속상하겠어. 의사가 그러는데 일찍 수술했으면 이런 일도 없대. 수술비가 아까워서 버텨왔다는 걸 알면 정연이가 퍽이나 즐겁게 유학을 가겠다.”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정연이한테 이 일 비밀로 하고 네가 유학 지원하는 걸로 해. 정연이 말이 맞아. 엄마로서 난 딱히 해준 게 없었으니 이거 하나라도 해주고 싶어. 난 괜찮아. 약도 있으니까 몇 년은 버틸 만 해.”
“그러다 만약 병이 더 중해지면? 혼자 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번엔 누가 구해줄 건데? 현우가 매번 나타날 수도 없잖아.”
“현우? 아 그 학생 이름이 현우였어? 아까 얼굴 봤는데 참해보이더라. 정연이 친구?”
“만일, 만일 말이야……”
그녀는 가만히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이 엄마의 눈가에 비쳐 한 가닥 음영을 만들어냈다.
“정연이 유학 안 보내면 어떻게 되는데? 박성준보다 차현우가 낫지 않아?”
“무슨 소릴. 정연이가 저 남자애 얼마나 좋아하는데, 우리 정연이가 모질어서 한 번 먹은 마음 쉽게 못 굽혀. 그걸 내가 알아. 내 딸인데 내가 모르겠니? 하나밖에 없는 딸 마음에 대못 박을 일 있냐. 나도 그랬지. 정연아빠 보내고 평생을 혼자 살기로 결심했어. 나는 정연이가 있어 버틸 수 있었는데 정연인 내가 가고 나면 철저하게 혼자가 될 수도 있어. 그 전에 그 애 편 하나는 만들어주고 싶어. 걔가 얼마나 외로움을 못 견디는 애인지 너도 잘 알거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다음 말을 삼킨 채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로 하여금 박성준을 따라 유학을 가게 한다면 그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엄마는 홀로 남아 병마와 외롭게 싸울 것이고 소녀는 완연히 다른 그녀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만 협조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심하게 균열이 일었다. 누군가의 슬픔과 희생을 전제로 한 삶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삐걱. 문이 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문가에 버티고 서있었다. 소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고 그녀는 소녀의 눈빛에서 소녀가 그들의 대화를 전부 엿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까부터 격한 듯 큰소리로 말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나, 유학 안 가요.”
소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엄마 쪽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길은 한결 성숙되고 단단한 느낌이 풍겼다.
“엄마가 모은 돈이든, 이모의 지원이든. 난 안 가요. 이모 말이 맞아. 난 그냥 평범한 가족사랑을 바랐다구요. 말 안하고 무조건 참는다고 내가 불편하지 않았을 줄 알아? 미안하지 않았을 줄 아냐고?”
“정연아.”
“수술일정 잡아요. 우린 가족이야. 험한 일 궂은 일 같이 겪어야 가족이죠. 난 평생 엄마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엄마는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엄마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얼굴을 타고 굵은 눈물 한 줄기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소녀 쪽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녀도 그녀를 향해 반달같이 눈을 휘면서 웃었다.
……
9
수술 일정이 잡힌 날 아침 그녀는 병원 의자에 앉아 얼굴에 자잘하게 부서지는 햇살을 만끽했다. 소녀가 멀리로부터 깡충거리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달려왔다.
“수속 다 밟았어요.”
“알아.”
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들었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귓볼을 간지럽혔다.
“이모, 고마워요.”
“뭐가.”
“그날 나더러 엄마의 진심을 듣게 해주신 거. 이모가 문 뒤에 서있으라고 미리 눈치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사람은 말이지…… 그녀는 후훗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항상 딴에는 남을 배려한답시고 바보 같은 일을 하군 해. 나도 그런 적 있어. 이모두요? 그래. 같이 사는 남자가 있었는데……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임신이 안됐어. 그래서 줄곧 내 진심을 얘기 안했어. 괜히 얘기하면 그 사람이 제대로 이별을 통보하지 못할까봐. 헤어지길 원했나요?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이모 진심은 뭐에요? 앞으로도 얘기 안할 건가요? 그녀는 자기 손을 배 위에 가볍게 얹었다. 얘기해야지…… 그런데, 기회가 없네.
“무슨 기회요?”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물었다. 소녀는 뒤를 돌아본 후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왔는지 손에 봉투 같은 것을 든 차현우가 그들의 등 뒤에 서있었다. 현우의 시선이 소녀의 얼굴에 꽂혔다.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그것을 본 차현우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은 괜찮아요?”
“응, 덕분에. 그날은 고마웠어.”
“아니에요.”
“어디서 오는 길이야?”
소녀가 묻자 차현우는 병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 혼자 둘 수 없다며 소녀가 일어섰고 그녀는 소녀의 뒷모습을 눈 바람한 후 손으로 벤치 옆자리를 툭툭 쳤다. 현우는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반쯤 돌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하면서 생경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 잘랐네? 보기 좋아.”
원래 눈가까지 거의 내려왔던 현우의 긴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제야 한 공간에서 마주하며 살았던 남자의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졌다. 그는 그녀의 칭찬이 민망한지 잠시 한손으로 앞쪽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아까 기회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응.”
“기회라는 건,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그쪽 진심 맞아요?”
“뭐가? 기회가?”
“아니요, 사랑.”
“……”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사랑한다고 말할 건가요?”
“그럼 넌?”
“사랑해요.”
가벼운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영근 햇살을 받으며 그가 말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찬 서리를 맞은 듯 멍하니 앉아있었다.
사랑…… 그녀는 눈을 가늘게 감았다. 그는 열여덟 살의 소녀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박성준에 대한 소녀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나마 마음을 터놓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다시 눈을 뜨며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무척이나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그녀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너무 놀라 숨을 죽였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왜 일까. 그는 왜 하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설마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그녀의 정체를 그가 알아본 걸까. 그녀에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가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봐요. 난 말했어요. 그러니 후회 없어요.
아. 그녀는 짧게 탄식했다. 역시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는 단지 소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나마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혼잣말일수도 있는 고백일 거라고.
그녀는 문득 소녀와 그녀 자신을 두 사람으로 혼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소녀가 박성준에 대한 순애보 사랑이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소녀에게 꽂히는 현우의 시선에 질투 비스무리한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경악했다. 현우에 대해서 그녀는 줄곧 고마움과 경외의 마음뿐이라고 생각했다. 박성준에 대해서는 그녀는 자신이 원망과 증오의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과거로 돌아와 그를 다시 만나기까지, 아니 어쩌면 거슬러 올라가 애초에 호주에서 돌아온 박성준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전혀 흔들림 없음에 곤혹스러웠다. 현우 때문이었을까? 오랜 시간을 거친 동반은 정말 모든 것을 망각하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엄마의 수술이 시작될 때까지 그녀는 줄곧 이런 곤혹에 빠져있었다. 수술실 문이 닫히자 소녀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 다행이에요. 소녀가 중얼거렸다. 뭐가? 이모가 와서. 이모가 온 후 뭔가 달라졌어요. 엄마와 나 사이도. 그래? 네, 주방문과 형광등도 이모가 고쳤죠? 응, 나 그런 거 잘해. 고마워요. 가전기물 고쳐준 거? 아니요, 모두 다.
그녀와 소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는데 벌써 다리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이 곧 배로 이어지자 그녀는 움찔하며 손으로 배를 감쌌다. 소녀가 걱정 어린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다섯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해요. 이모 가서 좀 쉬세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그녀는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미옥이와 선화는 어느새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그녀가 옆으로 다가가자 선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생들 고생이 많네. 고마워. 괜찮아요, 이모. 선화가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뿔테안경의 소녀를 눈 박아보았다. 안경을 안 끼는게 훨씬 예쁠 거 같아. 그래요? 우리 정연이 잘 부탁해. 나중에 귀찮게 하더라도.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소녀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긴 복도를 걸어 나왔다. 온몸에 땀이 나면서도 찬 기운이 느껴져 덜덜 떨렸다. 오한이라도 걸린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느 빈 병실이라도 보면 들어가서 잠시 누워있고 싶었다. 공기 속에 부유하는 먼지와 창틀에 부딪치는 햇살, 창밖의 꽃나무와 잔디밭, 오가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귓전을 울렸다. 긴 터널을 건너듯 복도를 지나 굽이돌이를 돌았을 때였다. 왠지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멀리 앞쪽에 언뜰했다. 차현우…… 그녀의 걸음걸이가 문득 빨라졌다. 그를 당장 만나야 한다는 충동이, 20년 후의 그는 왜 그녀를 떠나야만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는 충동이 못 견디게 일었다. 그렇게 미궁 같은 몇 개의 복도를 통과하자 드디어 환한 출구가 나타났다. 바로 그때 문득 귓전에 느닷없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동안 신호가 잡히지 않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번호는 눈에 익었다. 그녀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뒤쪽을 돌아보다가 다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분명 지수라고 떠있었다.
“김지수?”
“강정연 너 어디야?”
그녀는 또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했다. 분명 방금 전 김선화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금 핸드폰에서는 분명 지수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설마 김지수도 타임슬립을?
“나? 말로는 설명 못하겠는데 말이야.”
“물리치료 받다말고 어디 갔냐고. 점심 같이 먹자며.”
“지수 넌 지금 어딘데?”
“원장실이지. 너 화장실 갔어? 미옥이도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와.”덜컥. 전화가 끊겼다. 다시 고개를 쳐든 그녀의 눈앞에 화장실 표기가 보였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스라이 방금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지만 그게 아득한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수술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몸을 홱 돌린 그녀는 정신없이 오던 길을 내달렸다. 역시 미궁 같은 여러 복도를 지나 굽이돌이를 했다. 긴 복도가 앞에 보였지만 그 끝은 더 이상 수술실이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현기증이 몰려왔고 그녀는 다리맥이 풀려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지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그녀는 원장실이라고 표시된 방문을 열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사람과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던 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들었다. 왔네, 왔어. 둘이 이구동성으로 말했고 실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야릇한 느낌이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탕개가 풀리면서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미옥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 늦은 임신이 그렇게 기쁘냐? 그녀는 미옥이의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몽유병이냐? 분명 중간에 들어와서 자는 걸 확인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어. 어디 갔댔어? 지수가 걱정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계속 연결되지 않았잖아.
꿈이었다면 차라리 깨지 말 것을, 꿈이 아니었다면 좀 더 있다가 올 걸…… 돌아온 시공간에 엄마는 여전히 부재했고 남편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녀 혼자 지난 시간의 유감을 안고 남은 세월을 버텨야만 한다.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사실이었을지도 모를 과거의 일들을 알아버린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참 그럴듯하게 행복한 꿈이어서 더 할 나위 없이 슬펐다.
……
10
“전에 우리 셋 자주 여기 와서 커피 마셨는데 그 작은 카페가 지금은 그럴듯한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했지 뭐야. 내가 이 상가 위층을 병원으로 임대한 건 바로 여기 음식 맛도 한 몫 하기 때문이지.”
능숙하게 메뉴를 고른 후 지수가 말했다. 미옥이는 메뉴판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임산부한테 양보할래. 두 몫 시켜.”
“평소 한 몫도 못 먹는 애를.”
지수가 혀를 찼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메뉴를 골랐지만 뇌리 속에는 온통 과거의 기억으로 뒤덮였다. 혹시 점심에 여기로 올 줄 알고 방금 전에 그런 꿈을 꿨던 걸까.
요리가 오르길 기다리며 미옥이는 그녀에게 임산부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주느라 부산을 떨었다. 한참 그런 미옥이를 보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이런 옷차림보다 통 너른 나팔바지가 참 어울렸었는데.”
“아이고. 어느 때 적 얘기를. 나 그 바지 입었다고 고중 담임 샘이 뭐라 했는 줄 알아? 내가 지나가면 청소할 필요가 없댔잖니. 나보단 선화…… 아니 지수 얘 뿔테안경이 더 대박이었지. 그때 얘 별명이 참대곰이었나?”
“그래, 지수는 지금처럼 렌즈를 착용하는 게 훨씬 예뻐.”
그녀가 말을 받자 지수가 가볍게 웃었다.
“같은 얘기 한 사람 있어.”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비슷한가봐.”
그녀는 머리를 끄덕인 후 다시 지수 쪽을 보았다.
“그런데, 이 자리가 원래는 뭐였지? 통 기억이 안 나네.”
“여기는 카페였고, 이 위층은 다 병원이었잖아. 심장판막수술 전문. 그 병원이 이사 가고 내가 임대계약을 했지.”
어떻게 그런 희한한 꿈을 꾼 걸까. 그녀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숙이고 스파게티를 말아 올렸다. 귓가에서 지수와 미옥이 계속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선화, 아니, 지수야, 나는 계속 네 새 이름이 입에 안 오르네. 왜 하필 김지수냐? 수지도 아니고. 특이하고 개성 있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미옥이 떠들어대자 지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이 이름을 듣고 확연하게 느낌이 오더라구. 내 이름이 맞는구나 하고. 그때? 아, 그때 병원에서 그 아줌마가 한 말 때문에? 아줌마는 무슨…… 정연이 이모 되시는 분한테. 하이고, 정연 엄마 수술 전에는 정연이 맡는다고 호언장담 하다가 인사도 안하고 미국 가버린 그 분이 뭐……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사정은 무슨 사정, 그 후에도 연락조차 없었잖아. 정연아, 내 말 맞지? 넌 왜 그리 멍해 앉아있니? 내가 네 이모 안 좋게 말했다고 화났어?
그녀는 포크를 놓고 벌컥 자리에서 일어섰다. 흥분과 긴장감에 온몸이 떨렸다. 몸을 움직이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졌고, 다시 일어났을 때 그녀는 지수의 손을 움켜잡았다. 혹시 그 이모, 네게 날 부탁했니? 그런 적 있어. 널 잘 챙겨달라고, 나중에 귀찮게 하더라도. 그렇게 얘기하셨어. 그때 그게 작별인사였더라구. 그럼 엄마는…… 그때 엄마는 어떻게 됐어? 정적이 흘렀다. 일초가 흘러갈수록 목이 말라들었다. 지수가 미옥이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피를 말리는 듯한 몇 초가 지나고, 미옥이 드디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임신을 하더니 건망증이 심해졌구나. 어머님 그때 수술 후 증후군으로 며칠 더 버티다 돌아가셨잖아.
그녀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미옥이는 지수와 걱정 어린 눈빛을 교환하더니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 임신 사실 현우에게 알리기나 했어? 현우 되게 좋아할 텐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들먹하게 차올랐다. 엄마는, 그녀의 엄마는 비슷한 시간에 돌아가셨지만 사인은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긴 시간 억눌렀던 그녀의 자책과 회의감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충격이 가라앉자 다시 불안이 찾아왔다. 엄마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거라면 그녀가 과거를, 운명을 바꿨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녀와 차현우는 지금 어떤 사이가 되어있을까. 그녀는 부랴부랴 폰을 꺼낸 후 남편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잠시 후 그녀는 맥없이 폰을 내렸다.
“현우가, 계속 연락이 안 돼.”
두 친구의 의아한 시선을 뒤에 남기고 그녀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여전히 그녀가 나가기 전의 모습이었다. 검소한 인테리어도 여전했고 최소한으로 갖춘 가구들도 여전했다. 싱크대 옆의 식탁 위에는 그녀가 먹다 남은 라면그릇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주방 용기들과 조미료가 놓여 진 위치도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와 남편 사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잠시 멍해 서있던 그녀는 남편의 방문을 열었다. 잘 정돈된 간소한 서재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을 차지한 책장에는 법률서적들이 꽉 차있었고 그 중간에는 어딘가 눈에 익은 노트도 같이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 집으로 이사할 때 그녀의 짐에서 빠져나온 적 있는 그녀의 일기책이었다. 노트를 뽑아든 그녀는 잠시 기억을 되살려 비번을 풀었다. 일기장이 열리자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제일 뒤에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2020이란 숫자가 씌어져 있었다.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일기장 중간에는 편지지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미국에서 온 편지였다. 그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한 번 오라는 순희 이모의 간절한 부탁이 들어있는 편지였다. 엄마는 그 편지를 들고 오랫동안 오열했다고 그녀의 일기에 적혀있었다. 일기책을 덮고 원래대로 끼워 넣으려다 그녀는 그 옆에 끼워진 색 바란 편지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에 적힌 글씨를 보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일그러졌다.
엄마의 글씨였다. 그리고 편지는 뜻밖에도 남편인 차현우 앞으로 되어있었다. 엄마가 왜 하필 현우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그녀는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펼쳐들었다.
-차현우라고 했지?
내일이 수술이라고 들었어. 이번에 날 구해준 일, 고맙다는 인사 제대로 못한 것도 있고 정연이한텐 특별한 친구 같아서 편지를 보내는 거야. 꽤 긴 내용이야. 그러니까 잘 읽어보고 절대 이상한 아줌마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박성준, 정연이가 사랑하는 그 아이…… 반듯하고 착해 보이긴 했어. 너랑도 아는 사이라고 했지? 정연이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기쁘긴 한데,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어. 그래서 이렇게 네게 편지를 건네게 됐어.
만일, 만일 말이야. 박성준이 유학 가서 연락이라도 뜸해지면, 그래서 둘이 헤어지기라도 하면…… 현우 네가 우리 정연이 보살펴줄 수 있겠니?
다 나 때문인 걸 알아. 정연이 유학비용을 수술비로 써서…… 내 목숨을 좀 더 부지하려고 내 딸 전도 망친 것 같아 가슴이 아파.
실은, 내 심장은 이미 기능을 소진해서 인공판막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것도 수술이 잘된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야. 수술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생기게 되면, 난 수술대 위에서나 수술 후 증후군으로 잘못될 수도 있을 거야. 정연이한테는 제대로 얘기 하지 말아달라고 의사한테 부탁을 했지만 넌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아. 정연이한테 들었는데 집에 같은 환자가 있다고 했다면서.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짚는다면 그 환자가 바로 너지? 어떻게 알았냐고? 나 이 병 오래 앓았어. 그러니까 같은 병을 알아보는 그런 텔레파시 같은 거지. 아줌마랑 상황이 다르다면 넌 아직 젊어 잘 치료만 하면 충분히 나보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이게 바로 내가 지금 정연이를 너한테 허락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할까. 그와 같은 일, 나는 이미 겪었고 평생을 아파했으니까.
정연아빠 병으로 갔어. 병마가 그렇게 건강하던 한 젊은 생명을 반년 만에 빼앗아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네게 남은 시간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난 내 딸이 내 팔자를 닮을까봐 너무 겁이 나.
여기까지 쓰고 보니 너한테는 너무 잔인한 요구라는 생각도 들어. 병이 너의 잘못은 아닐 텐데. 아줌마가 이기적이고 염치없는 걸 알아. 내가 더 살 수만 있다면 너한테 이런 무리한 부탁을 안 하겠는데 말이야.
차현우, 내 부탁은 두 가지야. 하나는 정연이와 있는 힘껏 거리를 둘 것. 또 하나는 우리 정연이를 있는 힘껏 보살펴줄 것. 모순인 걸 알아. 이걸 어떻게 동시에 하냐고 의문을 품을 것도 같아. 하지만 지금부터 내 설명을 잘 듣는다면 넌 분명 이해하게 될 거야.
현우야, 행여나 내가 하는 말에 놀라지 말아줘. 혹시 시간여행이라고 들어봤지? 넌 아줌마보다 훨씬 젊고 보고 들은 게 많으니까 잘 알거라 믿어. 그거 알어? 우리 정연이, 시간여행으로 날 보러 왔어.
그녀의 손이 멈칫하면서 편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20년 전 수술 증후군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그녀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니. 잠시 복통이 일었다. 아랫배에 따끔거리는 느낌이 지나자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안 건 아니야. 순희라는 이름을 썼는데 어쩐지 너무 닮긴 했어. 정연이처럼 귤을 싫어하고, 김치만 들어간 김치찌개를 좋아하더라구. 우연으로만 생각했어. 그리고 그 아이 손에는 정연이와 똑같은 상처가 있었어. 아주 작은 상처이긴 하지만, 어릴 때 불에 덴 자리라 유표했거든.
내가 그 아이라고 확신한 것은 바로 미국에서 온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어. 엄마의 유언을 지키려고 순희가 내게 편지를 보내온 거야. 순희는 중국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서 수속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정연일 데리고 가주길 바라더라구. 여기에서 버럭 의심이 들었지. 순희는 이미 내 집에 와있는데, 그 아이가 순희가 아니라면 누굴까. 왜 그 아이는 순희를 빙자하고 우리와 같이 지내고 있을까.
전화카드를 사서 국제전화를 했어. 순희와 통화를 했고, 한결 내 의심을 증명했어. 순희는 우리말을 잘 못했어. 거의 영어를 주로 말했고, 편지는 다른 사람이 대필해서 보내온 거라고 했어. 전화를 끊고 나는 덜덜 몸을 떨었어.
세상에…… 그래서 그 아이의 눈빛이 그랬구나. 그 슬픈 눈빛이며 회한이 섞인 말투며…… 하늘이시어, 서른여덟 살의 그 아이를 내게 보내주다니, 아마 내가 그때까지 살지 못하니까…… 내게 그 아이의 성숙된 모습을 보라고 보내준 게 틀림없을 거야……
미리 알았더라면, 홀몸도 아닌 그 아이에게 귤이 아닌 다른 과일이라도 사다 먹이는 건데…… 입덧하기 전에 김치찌개 대신 보신탕이라도 끓여주는 건데…… 이리 잘 커줘서 고맙다고 얼굴이라도 쓰다듬어 주는 건데…… 그런데, 갑자기 더럭 겁도 났어. 내가 알아보면 그 애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이대로 미래로 가버리는 게 아닐까…… 그 아이 임신까지 했는데, 그 아기가 잘못되는 게 아닐까.
다행인건 내겐 시간이 조금 남아 있고, 부탁할 사람이라도 있지. 정말이지 나도 좀 더 살고 싶어. 하늘에 수라도 빌고 싶고, 착한 일을 더 해서라도 우리 정연이 아이 낳을 때까지라도, 아니, 그 아기 내가 봐줄 때까지라도…… 그래서 그 아이가 굳이 시간여행을 하지 않고서도 날 볼 수 있게…… 그렇게 더 살고 싶은데…… 하지만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어. 현우 네가 내 말을 믿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아줌마가 죽기 직전에 횡설수설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걸 유서라 치고 제발 내 말대로만 해줘.
우선, 네가 치료에 집중해서 다만 몇 년이라도 그 아이 곁을 지킬 수 있거든…… 그리고 동시에 그 아이가 만일 박성준과 헤어졌다면, 그 아이가 한창 꽃다운 나이를 놓치지 않게 찾아가서 프러포즈를 해줘. 그 어떤 이유를 대서든지, 그 아이 곁에 남아줘. 유독 외로움을 못 견디는 아이야. 장담컨데 지금의 정연이는 마음속에 박성준 뿐이지만, 그 아이는 너를 거부하지 않을 거야. 내 앞에서 박성준보단 네가 어떠냐고 물어보기까지 한 아이니까.
내게 온 그 아이의 상태는 나쁘지 않아보였어. 임신도 했고 얼굴도 밝았어. 누군지는 모르겠어. 너일 수도 있고, 박성준일 수도 있고, 너희가 아닌 다른 누구일 수도 있고. 단 한 가지 확신이 든다면, 그 아이…… 행복해보였어. 아끼고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야.
그래서 난 모험을 할 수 없어. 그 아이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어. 그 아이가 무사히 미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깟 상봉 따위야…… 그냥 나 혼자 간직하고 갈 거야. 그 아이와의 덤으로 얻은 시간들을.
그런데 만일, 만일 이런 가설이 다 깨지고 네가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겠다면…… 그 아이를 보내줘. 그러기 위해서라면 정을 주지 말아. 나는 평생을 그리워했어. 그러니까 내 딸은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지 말기를…… 못된 아줌마 이기심으로 이렇게 간절히 부탁할게. 제발…… 제발 그 아이를 사랑한다면, 그 아이를 사랑하지 말아줘.
두서없는 말로 무리한 부탁해서 미안하다 차현우. 그리고 고마워, 차 서방…… 여담인데 만일 가능하다면 나중에 살 집도 내가 살던 집 근처로 해줘. 그래야 그 아이가 후에 시간여행을 하더라도 발 아프지 않게…… 쉽게 우리가 살던 집을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래도 만일, 만일 말이야…… 내가 그 아이를 알아봤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번 다정하게 안아라도 보겠는데, 사랑한다 말이라도 해보겠는데…… 욕심이겠지? 시간의 질서와 배치에 맞서지 않아야 그 아이가 안전하게 되돌아갈 수 있겠지? 그 아이의 서른여덟 살이 행복해보이니까 내가 그 균형과 순리를 깨뜨리면 안 되는 거겠지?……”
눈물이 앞을 가려 편지 속 내용이 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항상 자신이 혼자인 줄 알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엄마는 무심했고 남편은 냉정했다. 그녀의 행복은 20년 전의 그 봄날 아침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엄마는 그녀를 위해 심지어 무리하기까지 한 부탁을 남편에게 유언으로 남겼고, 그동안 냉철했던 남편의 평소 행동들은, 어쩌면 그녀 곁에 있을 시간을 조금 더 버텨내기 위한 인고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실종직전 그가 남긴 메모……
-이혼하자. 변호사한테 위임장 보냈어. 날 찾지는 마.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그의 병이 심해졌던 걸까. 긴급연락처라고 남긴 전화번호의 주인은 박성준, 어쩌면 그가 그녀를 밀어내는 건 단순히 엄마의 부탁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20년 전 병원근처 카페에서 그녀가 그에게 했던 몹쓸 말들이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정연인 박성준 좋아해.”
“둘은 진짜 사랑인 것 같고 설사 환경이 둘을 잠시 갈라놓는다 해도 정연이 마음속에는 줄곧 박성준이 있을 거야. 정연인 성준일 기다릴 거야. 내가 알아.”
“그래서…… 넌 대학을 가. 너 법대 좋아했잖아. 너 소원대로 법대 가고 로펌도 차려. 넌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막상 정연이 성준과 헤어졌다 해도, 정연일 사랑해서는 안 돼. 그 아이는 마음속에 항상 성준일 품고 있을 아이니까. 우리 집안 여자들 집념이 그래. 내가 지나온 경험자로서 얘기하는 거야……”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남편의 오랜 침묵, 그것은 어쩌면 20년 전의 엄마의 편지와 지금의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 만든 합작품이었다. 엄마의 부탁대로 그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절제했고, 그녀가 이런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이별에 석연해지길 원했을 것이다. 그것이 엄마가 남긴 부탁이자, 그의 진실된 마음이기도 했을 테니까. 드디어 수수께끼 같았던 모든 퍼즐이 맞추어졌다.
그녀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봄빛이 그의 얼굴을 한가득 물들이는 그날 아침, 병원 앞 벤치에서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은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의 탐색이었던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을……
“소위 기회라는 건, 더 늦어지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그럼 그쪽 진심 맞아요?”
“뭐가? 기회가?”
“아니요, 사랑.”
“……”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사랑한다고 말할 건가요?”
“그럼 넌?”
“사랑해요.”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그때 그녀를 알아본 것은 단지 엄마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그동안 놓쳤다고 생각해왔던 사랑과 행복은, 사실 줄곧 그녀 곁에 있었고 그녀가 손만 내밀면 그것들을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문밖을 나서면서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의 박성준은 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어올 줄 몰랐다는 듯, 그렇지만 정말 다행이라는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강정연…… 너 이번엔 전화 끊지 말아줘…… 나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기.”
“그러니까 아마 20년 전…… 그때 아줌마가, 그러니까 너의 어머님이 수술직전 내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셨는데…… 그게, 아줌마 그리 되고 경황없어서 나 그거 못 읽어보고 유학 갔어. 그리고 1년 전에 돌아와서 그걸 보게 되었는데 말이야…… 아, 나 두서없이 말해서 미안한데…… 그게, 그 내용이 좀 이상해서……”
“혹시, 그건 그럼 엄마가 날 부탁하는 편지였니?”
“맞긴 맞는데, 그런데 그게 좀…… 너무 스펙타클한 내용이라 좀 황당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걸 내가 그때 당시엔 못 보고…… 그래서 일이 어딘가 뒤틀린 거 같아…… 내가 정말 미안해……”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면서 어떤 인간관계는 가끔은 오해로, 가끔은 인내로, 또 가끔은 침묵으로 뒤엉킬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겪은 사람들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용서와 화해, 이해와 배려, 희생과 사랑으로 다양한 인생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도 하고 서로에게 온기를 전해주기도 한다. 행복한 삶은 가끔은 유쾌하고 단순해야 하며 진실 된 마음은 전혀 복잡해질 필요가 없다. 그녀가 엄마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그리고 박성준과 친구들에게 못한 말들, 어쩌면 남편에게는 그 말을 할 기회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녀는 길게 숨을 불어 내쉰 후 한결 또렷하고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내 남편을 찾아줘. 친구들한테 다 문자돌렸어. 그러니까 지금 너도, 날 도와줘.”
《송화강》2021년 6기 휴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