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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양파 (외 9수) 댓글:  조회:448  추천:0  2021-09-17
►양파 (외 9수) □ 최옥란   행성처럼 태여났다   그 속에는 바람도 있고 옥돌도 있고 산도 달도 있다   금빛 겹옷 걸친 채 세상에 나와 뭇사람들 시선을 끈다   산다는 것은 년륜을 늘이며 채우고 비우고 채바퀴 돌듯 도는 것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아롱지는 눈물까지 사랑으로 반겨 준다면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구름 따라 훨훨 날아가리다 흰나비처럼… ►해바라기  아침해살 전갈받고 문을 열자 기다리던 님 빛의 금침으로 내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님의 품에 안겨 일구월심 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님은 올방자 튼 성자인 양 텅 빈 내 마음을 꽃술로 채워주고 여린 심장을 발 디딜 틈 없는 흑진주로 촘촘히 감싸주었습니다   마주하면 눈물날 것만 같아 고개숙여 무척 행복했다고 고백할 때 있겠지요.   ►산나리꽃   이름 없는 산야에 태어나 쪽빗머리 빚어올린 산지기 녀인   나름으로 살아가고 싶었던가 아침엔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저녁엔 나리꽃 향불처럼 피워놓고 먼 들녘을 바라보는 산지기 녀인   호랑나비 날아들고 풀벌레도 귀전에 속삭이는데 흰옷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네   길이 막혀 못 오시나 발이 무거워 못 오시나 노을빛 감겨드는 내 가슴 시리네   나무잎 수런거리는 소리에도 두 귀 쫑긋 세우는 산지기 녀인.   ►빈 돛배 한 척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강나루에 바람소리로 풀어내고 있는 하프소리 홀로 놓인 돛배를 보노라면 마치 섬섬옥수 가락 튕기는 녀인의 하프 독주를 보는 듯하다   흰옷 고름 볼을 매만지듯 마흔 일곱 줄, 현을 뜯고 풀어내면 울리는 공명음   부름인 듯 손짓인 듯 행인들 발걸음 소리 강을 가르고 날아가는 물새들도 물장구 치며 꽃물결 이루던 강나루   바람아, 파도를 일으켜세우듯 나를 밀어내어다오 기다려온 시간 만큼 내가 건너야 할 곳은 강건너 저쪽 피안이다.   ►무쇠솥을 보며   생떼 같은 불 지펴 단가마 열기로 보리고개 배 주린 아이 달래고   흰 밥알들 오똑하니 아버지 숭늉물에 배놀이 했지   “시집 가 잘하라” 하시며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밥물 맞춤 가르쳐주시던 엄마   까맣게 그을린 숯검정 얼굴 만지면 엄마의 함초롬한 눈빛 아른거린다   이제 엄마의 꿈은 젊음이 빠져나간 퀭한 눈   문득 깨닿는다 정신줄 잡고 불타던 엄마의 한생, 갉아먹으며 살아온 검은 무쇠솥.         ►파꽃   늙어서 피는 꽃 흰 수건 쓴듯 수수해도 꽃은 꽃인가 보네   꽃대를 붓대 삼아 일필휘지로 하늘에 전갈을 쓰면 벌, 나비 찾아들어 두 손 모으며 인사하네   외다리로 버티며 공중에 세방살이 방 한칸  지나가던 바람도 멈춰서서 기웃거리네   마음 비우며 올곧게 살아가는 의미 이제 알 것만 같네.     ►고추꽃   숲속 다락에 흰나비 닮은 새 한마리 앉아 귀 쫑긋 세우고 세상사 이야기 듣더니   탱탱 부풀어오른 퍼어런 욕망 낱낱이 얼굴 달아오르고   그네 타던 가지 마침내 힘겨운듯 무거운 짐 내려 놓는다   흰 구름이 일깨워 주었을가 금싸락주머니 열어 비우며 살라 한다.     ►살구꽃   공중다락에 앉아 섬섬옥수 거문고 뜯는 단발머리아가씨 발개진 얼굴이다   꽃가마에 오른듯 가리마머리 매만지며 홍안을 살짝 하늘 거울에 비춰보는 새색시 황홀한 몸짓이다   밤이 오면, 초롱초롱한 아기별들 깨금발로 발돋음하는 그들만의 사랑방이다.     ►양귀비꽃   천년의 정을 읊고 있는가 만년의 한을 품고 있는가 허공 속에 나붓기는 진홍의 화인(火印)이여   내 가슴에 그대 숨걸 흐르고 내 눈에 그대 눈물 고였습니다   가녀린 목 빼들고 떠가는 흰구름 손짓하며 불꽃되여 타오릅니다   돌아선 그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한몸 불태워 가시는 길 등불 환히 밝히옵니다.     ►달맞이꽃   노을 지는 언덕 우로 저녁 숲들이 술렁입니다 그대 오시는 발걸음 소리인듯   풀덤불에 초록 치마자락 물들이며 사뿐사뿐 걸어나와 길목에 섰습니다   낮이면 수줍은듯 꽃잎 접고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밤이면 나비 닮은 금빛 비녀 꽃은 채 노랑 꽃방석 펼쳐놓고 하염없이 산마루 고개 바라봅니다   부르면 백마 타고 올 것만 같은 그대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그대의 얼굴 눈망울에 그려봅니다.     최옥란    안도현 출생. 연변대학 예술학원 졸업. 연길시문화관 당지부서기 겸 부관장, 연길시소년아동도서관 관장 력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시, 시조, 수필 등 80여수(편) 발표.
152    뒤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허명훈 댓글:  조회:293  추천:0  2021-09-17
뒤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 허명훈 사람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고, 그래서 앞모습을 가꾸기 위해 매일 또는 하루에 시도 때도 없이 거울 앞에 서게 되고 또 자그마한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시를 깔끔하게 단장하며 자기 앞모습을 가꾸는 데 온갖 정성과 신경을 들이고 있다. 특히 경쟁이 치렬한 현대사회는 때로는 외모가 당락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를테면 회사 면접을 보거나 소개팅, 맞선 자리에서도 그 사람의 실력이나 사람됨됨이나 마음을 잘 읽으려 하지 않고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가 많은 사람들이 앞모습을 더 잘 꾸미기 위해 부모가 준 자연의 얼굴을 마다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성행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어려서 자립을 못할 때 부모가 머리를 빗겨주고 세수시키며 옷을 입혀주면서 겉모습을 가꿔주지만 우리가 커서 자립을 할 때면 자기 모습을 원래보다 더 아름답게 가꾸려고 미용실이나 성형외과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어디 까지나 제한되여있고 날마다 자기 모습을 가꾸는 데는 그래도 본인이 주관이다. 물론 자기 모습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가꾸고 옷도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것은 자신이 자기 얼굴을 책임지고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자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고 옷을 깔끔하게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저도 모르게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더불어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가꾸며 살고 싶고 저렇게 정갈하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거기에다 얼굴 표정이 밝고 미소까지 찰찰 흐르는 화기로운 얼굴을 보게 되면 보는 사람의 눈도 마음도 즐거워지게 된다. 이와 반대로 얼굴을 가꾸지 않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게으른 사람, 또는 추한 사람, 또는 추한 로인이라고 인정받게 되고 거기에다 얼굴 표정까지 어둡고 험악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즐거웠던 기분도 마음도 잡치게 된다. 사람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선호하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고 바람직한 자세이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앞모습을 아름답게 가꾸는데는 관심과 열정을 쏟지만 뒤모습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듯싶다. 앞모습이 한 사람의 간판이라면 뒤모습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고 인격이고 수양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것 같지만 누군가의 뒤모습과 누군가의 앞모습은 마치 설걷이를 해 놓은 그릇처럼 포개지기도 한다. 내가 머물던 자리에 누군가가 다시 찾아오고,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내가 서게 되는 것, 그래서 앞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뒤모습이 아름다움 사람이 더 좋다. 만물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의 뒤모습 너머로 거리의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해마다 남모르게 가난한 이들을 돕는 따뜻한 손길에는 화려한 앞모습이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없는 뒤모습만 있다. 티 하나 묻지 않은 화사하고 눈부심과 그윽한 꽃과 향기를 내는 것은 진흙 속에 묵묵히 일하는 뿌리이다. 이와 반대로 앞모습이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뒤모습이 흉하고 추한 사람들이 많다. 공공장소에서 안하무인격으로 큰소리를 치거나, 문명한 말 듣기 좋은 말도 많지만 굳이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하거나 지어는 험담과 악담으로 해결을 보려하는 사람들. 아무데서 담배를 피우거나, 저만치 재떨이가 보이지만 꽁초를 아무데나 마구 버리는 사람들. 음식쓰레기와 생활용쓰레기의 지정된 장소가 있지만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버리는 사람들. 사기, 협박과 공갈, 절도로 선량한 사람을 해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람들… 며칠 전 집과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다가 목격한 사실이다. 몸에 딱 붙는 청바지에 분홍 반팔티를 입고 키도 훤칠하게 쭉 빠지고 얼굴도 화사해서 한송이 꽃이라고 할지 아니면 미스코리아라고 할지 하여튼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하얀 털의 깜찍한 반려견을 품에 안고 나왔는데 반려견이 그만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길에다 변을 보았다. 공원 곳곳에는 반려견은 반드시 목줄을 해야 하고 변을 보았을 경우 주인이 변을 치워야 한다는 문구를 적은 패말이 세워져있었지만 그 예쁜 아가씨는 변을 치울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는 듯 자기 산책만 즐기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변을 치우라고 말을 하자 그 예쁘던 아가씨 얼굴이 금새 험악한 얼굴로 변하면서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며 오히려 제 쪽에서 목에 피대를 세우고 앙칼진 목소리를 뽑는 것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간이나마 그 아가씨의 예쁜 외모에 눈길을 준 것이 후회되였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이 마흔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고 했다. 그 뜻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람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자기의 뒤모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포함된 말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앞모습이 오늘을 알리는 게시판이라면 사람의 뒤모습은 현재의 삶을 달아보는 저울이요, 오늘의 마음과 량심, 인격과 수양, 도덕을 재는 자일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앞모습을 아름답게 가꾸어도 뒤모습이 인간으로서의 인격과 도덕적 수양을 갖추지 못했다면 게으른 농부가 가을에 쭉정이 농사를 짓 듯 쭉정이 인생이고 사회와 뭇사람들로부터의 비난과 질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앞모습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세상의 모든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면서 뒤모습도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열심히 가꾸고 다듬고 배우고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고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 하는 마음과 생각을 가져본다. 연변일보 
151    싸리나무 부업 댓글:  조회:273  추천:0  2021-09-10
싸리나무 부업 □ 주덕진 아침 일찍 일어나 소에게 짚과 여물을 푸짐히 준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부랴부랴 소에 수레를 지워 싸리나무 하러 산으로 떠났다. 하긴 노루꼬리만 한 겨울해는 서두르지 않으면 통 붙잡기 바쁘니 말이다. 기온이 령하 30도를 웃도는 아침 날씨는 꽤나 매짰다. 모자 가장자리엔 금방 새하얗게 서리가 끼고 사람이나 소의 코에선 흰 김이 코끼리 상아처럼 길게 뿜겨나온다. 오늘따라 투명한 유리처럼 유난히 맑은 하늘에선 성에꽃이 별처럼 반짝반짝 춤추는데 길가나 산야에 성에를 뒤집어쓴 나무들이 하얗게 소복단장하고 있어 마치 동화세계에 들어선 듯 무지 황홀한 기분이다. 이런 세계, 이런 기분 만끽할 수 있는 자체가 곧 행운이고 행복이다. 문득 “빠드득”, “빠드득” 하고 발로 눈을 밟던 소리가 멎었다. 소가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회초리를 들어 “쨩!” 하고 소궁둥이에 한매 안겼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소가 다시 걸음에 박차를 가하고 수레도 덩달아 언땅에 바퀴를 부딪치며 덜커덕 타령에 신난다. 미련한 소 같지만 힘쓰기 싫어 쓰는 약은 수다. 나는 오늘 사흘째 싸리나무 부업하러 간다. 타작을 끝내자 일부 사람들은 마치 타작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끼리끼리 자리를 틀고 모여앉아 화토장, 마작패를 만지작거리는 데 열을 올리면서 싸리나무 부업 같은데는 아예 관심이 없다. 1년 농사를 마쳤으니 이젠 탕개를 풀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휴식의 한때를 즐겨보자는 심리도 있겠지만 묵정밭이 황페화되면서 싸리나무도 퇴화되여 적어지는 데다 싸리나무는 옷과 신을 턱없이 소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거의 해마다 싸리나무 부업을 하고 있는데 싸리나무는 도끼, 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무난히 할 수 있는 불땜이 좋은 나무이기도 하거니와 나로써는 또 그럴만한 리유가 따로 있다. 1시간 남짓이 덜커덕 타령을 부르던 소수레는 마침내 마을에서 7, 8리 상거한 사흘갈이 늪(이 지방의 명소로 깊이는 명주 한 꾸레미 들어가고 둘레는 사흘갈이 밭 만큼 넓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동남쪽 묵정밭에 이르러 멈춰섰다. 이곳이 오늘 내가 찾는 목적지이다. 펑퍼짐한 곳에 수레를 벗겨서 세운 후 소는 근처 나무에 비끌어매두고 벼짚 몇단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싸리나무와 치를 전투무기-수레밑판에 꽂았던 날이 시퍼렇게 선 낫을 찾아들었다. 지금 내가 딛고 선 둬짐 푼히 될 이 땅은 70여년 전 그러니깐 우리네 조상—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이 쪽박 차고 두만강 건너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와 개간한, 개척의 첫 괭이를 박은 곳이다. 이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되여 싸리나무와 관목이 듬성듬성 자란 묵정밭을 둘러보노라니 눈앞엔 어느덧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괭이를 휘두르며 나무뿌리 뽑고 돌뿌리에 채이여 피 흘리며 한치한치 땅을 개간하던 정경이 저 세월 넘어 환영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그 후 피땀 흘려 일군 산비탈 개간지가 차츰 주인의 외면, 버림을 받으면서 력사의 뒤켠으로 밀려나 곡식 대신 관목이 들어서고 싸리나무가 자라 묵밭이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싸리나무는 보통 한번 해내면 5, 6년 자라야 다시 낫을 댈 수 있다. 싸리나무는 기름을 친 것처럼 불이 잘 당겨 불쏘시개로 충당되고 음식을 급히 끓일 때 때기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촌은 향소재지 마을이다. 나는 해마다 겨울철이면 집집이 찾아다니며 싸리나무계약을 맺고 싸리나무를 해다 파는데 그 수입이 가관은 아니여도 손을 싸매고 놀기보다 낫다. 특히 내가 싸리나무 부업을 하는 것은 생활에 보탬하려는 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핑게로 게으르다고 하는 세속사람들의 부정관념에 던지는 도전장이기도 하다. 습관적으로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낫자루를 단단히 잡은 나는 무더기로 선 나무에 낫을 걸었다. “드드득…” 잘 드는 낫이다 보니 힘을 좀 주어 끄당기자 단번에 두, 세대가 베여진다. 그렇다고 다 잘 베지는 건 아니다. 어떤 때에는, 특히 늙고 깡마른 싸리나무를 만나면 낫으로 도끼질한다. 그럴 때면 빠직빠직 진땀이 돋는다. 부지런히 낫질하고 보니 여기저기, 무덕무덕 싸리나무가 놓여진다. 그만큼 기운도 쓴지라 등허리가 시큰해나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는다. 땀도 들일겸, 낫도 갈겸 나는 눕혀놓은 싸리나무 우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배낭에서 숫돌을 꺼냈다. 숫돌로 낫을 가는 데는 5분여 정도 걸렸다. 나는 엄지손톱을 세워 낫날에 갔다 대봤다. 이것은 낫이 잘 갈아졌는지를 점검하는 절차다. 낫날에 손톱이 척척 붙는다. 날이 잘 섯음을 의미한다. 낫날을 시험해보다가 나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오래전 그러니까 학교에서 갓 돌아온 내가 햇내기 사원증을 따고 방금 일을 시작해서 낫을 갈던 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한번은 처음으로 나무하러 가서 낫을 간다는 것이 그만 낫과 숫돌의 접촉도를 잘 장악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갈다 보니 낫날이 주정뱅이처럼 이리 눕고 저리 번져지고 하여 무지 애를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련된 지금은 아무리 무딘 낫도 5분이면 날을 선득선득하게 세울 수 있다. 땀이 들자 나는 다시 낫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자 조르기라도 하는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참, 그놈의 배가 시걱은 용케도 안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걸어 수레께로 간 나는 벼단을 끌어당겨 깐 후 안해가 싸준 꾸레미를 헤치고 누룽지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게 눈 감추듯 잠간 사이에 주먹 만한 크기의 누룽지로 허기진 배를 달랜 나는 쉴 념 않고 이번엔 넓은잎딱총나무 줄기 베러 나섰다. 넓은잎딱총나무 줄기는 틀기 쉬운 데다 견딜성이 있어 맬감엔 제격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오전에 한쉼, 점심참에 한대 하며 담배쉼을 거르지 않지만 나는 그런 쉼이 없다. 넓은잎딱총나무 줄기를 베여온 나는 발로 벋디디고 끙끙거리며 탈기 시작했다. 나무를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단을 묶는 작업도 쉬운 일 아니다. 여기에도 요령이 있다. 나무들을 잘 다듬어 반듯이 놓고 묶어야 단이 단단하고 미끈하게 묶어진다. 한동안의 신고 끝에 널려있던 나무들이 한단, 두단 시장진출 허가받은 상품으로 탄생했다. 나무단들을 수레 근처에 메여다놓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헤여보는 나의 얼굴엔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한단에 2원씩 하는 나무 열다섯단이니 오늘 수입은 30원이군.’ 나는 또 생각을 굴려본다. ‘첫날 수입이 28원, 이튿날 32원, 오늘 30원이니 도합 90원이다. 새해 신문 주문금을 차곡차곡 모아야지.’ 새해 신문주문 기한이 당금이여서 무척 걱정이였는데 수입을 헤아려보니 내 마음이 금세 든든해지고 개운해진다. 신문이란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는 신문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여보, 떠놓은 밥이 다 식어요.” “미안, 요것만 마저 보고…” 이것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나와 안해의 대화다. 나는 신문을 볼라치면 식사를 제쳐놓고 보는데 마치 ‘신문에서 밥이 나오는 듯’하다. 나와 신문의 교분을 말하자면 2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나는 초중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더는 나의 뒤바라지를 해줄 가정형편이 아닌지라 농촌에 돌아와 이루지 못한 진학꿈으로 매일을 실망, 고통에 모대겼다. 그때 신문과 책이 나의 아픈 가슴을 어루쓸어주고 따뜻이 손을 잡아주었다. 특히 어느 신문에서 본,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한 남성이 불행을 딛고 자전거수리를 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준, 진한 감동을 주는 사적은 실로 나에게 충격이였다. 거기에 힘입어 한때 집구석에서 고민, 방황하던 나는 마침내 정신을 번쩍 차리고 현실을 정시하게 되여 들끓는 생산 제1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신문은 이처럼 미로에 빠져 방황하거나 좌절한 삶의 용기를 잃은 사람들한테 삶의 용기와 신심을 북돋아주고 길을 가리켜주는 가이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이때로부터 나와 신문은 찰떡궁합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의 친구로 되였고 경제적 여건으로 비록 신문을 주문해보진 못해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적극 열독하였다. 지금은 신문구독이 별 문제로 되지 않지만 그때는 작은 산촌마을에서 신문을 빌려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뜻밖의 한가지 일로 하여 나는 신문을 빌어보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주문해 보게 됐다. 그해 겨울, 어디서 신문을 얻어볼 수 있을가 생각을 굴리던 나는 향양로단에서 소조장직무를 맡고 있는 장동길네 집에 단위에서 주문해준 《연변일보》 등 신문들이 배달된다는 정보를 알고 찾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는 《연변일보》, 《길림일보(한문)》 등 신문 몇부가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신문무지를 본 나의 눈은 희한한 것을 보았을 때처럼 반짝 빛났다. 그중 《연변일보》를 골라 빌려온 나는 단숨에 둬번 읽었다. 나는 이튿날에도 그렇게 빌려다 보았다. 그런데 그 후 내가 신문을 돌려주러 갔더니 장동길의 얼굴표정이 왠지 무엇을 잘못 먹었을 때처럼 잔뜩 찌프러져있었다. “신문이 왜 이리 어지럽혀졌습니까?” “신문이 어지럽혀졌다구? 내딴에는 조심해보느라구 했는데…” 신문을 들여다봐도 별로 어지럽혀진 흔적이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송구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 쓴다는 사람이 신문주문도 못하구 맨날 동네 돌아다니며 신문 비럭질이나 하면서…” 내가 신문을 빌려보는 것이 그렇게 눈에 거슬리고 아니꼬웠던지 이번에 장동길은 마음먹고 아픈 곳을 꼬집는다. “장동무, 꼭 그렇게만 말해야 되겠소, 빌려서라도 학습하면 좋은 일 아니겠소?” 장동길한테서 까닭 없는 모욕과 멸시를 당하자 전에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리지를 되찾은 나는 매를 드는 것보다 관용이 더 바람직 하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말았다. 사실 전에 장동길은 내가 여러 신문에 경상적으로 소식 보도를 발표하는 것을 알고 상급에서 맡겨준 양로보수 임무를 완성 못하고서도 넘쳐 완성한 것으로 신문에 내여달라고 나보고 청을 든 적 있었다. 보도의 진실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나는 양로단일군들과 정황을 료해하는 과정에 장동길이 제공한 정보가 실제사실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거절했던 일이 있다. 장동길한테서 무참을 당한 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신문을 자신의 힘으로 주문해서 떳떳이 보리라 작심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싸리나무 부업이다. “훌륭한 신문은 항상 독자들 앞에 성숙되고 다듬어진 자태로 나선다.” “한권의 책을 사귀는 것이 고상한 심령의 사람과 사귀는 것과 같다면 훌륭한 신문 역시 우리의 얼굴모습을 미용해주고 내심세계를 부각해주는 거울과 같다.” 이것은 일찍 선인들이 한, 신문과 책에 대한 고도로 되는 칭송이고 평가이다. 매체로서 신문, 특히 당의 기관지는 소식에 령통할 뿐만 아니라 다원문화도 품고 있어 품위 있고 박식한 선생이 되기도 한다. 신문과 함께 해온 20년 나는 신문을 요람으로 창작의 걸음마를 익혔고 창작기량을 련마하면서 충실히 성장해왔다. 1984년, 력사적인 전환점인 개혁개방의 물살을 타고 실시된 농촌 호도거리 정책의 우월성과 성과를 여실히 반영한 통신 는 《연변일보》에 발표되여 1등상을 수상하고 내가 쓴 가사 는 공연무대를 달구는 인기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조선족이 해내외 이르는 곳마다에서 울려퍼지는 애창가요로 거듭났다. 이 20년 사이 나는 한낱 신문원고 쓰기 열성자로부터 어엿한 특약통신원, 작가협회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800여편의 통신보도를 신문, 방송에 내고 가사, 동화, 구연 등 150여편의 문예작품을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다. 신문보도상 5차, ‘길림성과외문예창작적극분자’ 영예증서 등 주급, 성급 문예창작상 8차를 수상하면서 민족의 언어문자를 지키고 전승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었다. “야호, 오늘 성수 난다!” 싸리나무단을 두둑하게 수레에 박아실은 나는 아이들처럼 흥분되여 웨쳤다.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앞뒤산이 쩌렁쩌렁 메아리 쳐 울려퍼졌다. 석양빛을 밟으며 귀로에 오른 나의 심정은 흐뭇했다. 집가기 성급한 소도 마치 주인의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대가리를 내저으며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나는 지금 비록 문학이라는 꽃을 피우기엔 어려운 농촌에서 매일 체력을 파는 힘들고 고된 삶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산과 새와 교감하면서 생동한 시골풍정을 색채 있고 실감 있게 담아내는 농촌 1선의 통신원, 작가로서 나름대로의 추구가 있고 보람이 있어 뿌듯하다. 연변일보 
150    내 기억 속 평생 두번 뿐인 아버지와의 만남 댓글:  조회:153  추천:0  2021-09-06
[수기] 내 기억 속 평생 두번 뿐인 아버지와의 만남 김삼철 룡정 룡드레 우물가를 지날 때마다 내가 일곱살 되던 해인 1947년  룡정의과대학 병원에서 병치료를 하는 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이 지금도 영화처럼 선명하게 머리 속에 떠오른다.  필자 아버지 아버지는 항일전쟁승리 후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꾸려진 민주대동맹 조직에 가입하여 혁명사업을 하다 보니 늘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의 머리 속에는 평생 단 두번 아버지를 만난 기억 밖에 남지 않았다.  1947년 이른봄 아버지께서 페결핵에 걸려 병원치료를 하게 되였다. 돈이 없어 입원치료는 못하고 병원 가까이에 세집을 맡고 병치료를 다녔다. 그 세집이 바로 룡정 룡드레 우물가 버드나무곁의 일본식 2층짜리 판자집 1층에 있는 한칸이였다. 룡정의과대학 병원과는 100메터 거리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그 집에 주숙하면서 병치료를 했다. 우리 집은 조양천 북쪽 구수하 건너편의 중흥촌에 있었고 룡정과는 30리 거리이다. 어머니는 열흘에 한번쯤 식량과 남새 가지러 집으로 다녔다. 집에는 회갑이 지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무를 돌보고 농사를 지었다. 청명이 지난 어느 따스한 봄날 어머니께서 쌀 가지러 집으로 왔는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 뵈러 가겠다고 생떼를 쓰니 어머니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나도 쌀 짐을 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자그마한 쌀 짐을 등에 지게 하고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큼직한 쌀자루를 등에 지고 머리에도 이였다. 그 때 우리 집은 연길현 14구(현재의 연길시 조양천진 구수하벌) 중흥촌 (현재의 중평촌)에 살았는데 구수하가 서쪽을 굽이쳐 흘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떠난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30리 길을 쉬염쉬염 쉬면서 가자면 오후해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런 길을 어머니는 오전에 왔다가 쉬지도 못하고 오후에 또 무거운 쌀짐을 가지고 떠났다.   필자 어머니 4월중순이라 강물은 뼈를 에이는 듯 차가왔다. 차디찬 강물을 오전에도 건넌 어머니는 한손에는 다 바래진 하얀색 헌 코고무신을 검정치마폭에 받쳐쥐고 한손으로는 머리 우의 쌀 짐을 쥐고 앞만 보며 말없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발등도 가려지지 않는 벼짚신을 벗어들고 이를 사려물고 강물을 건넜다.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렸지만 키가 작아 다 젖었다. “물 속에 있는 돌들이 미끄러우니 주의하여 천천히 건느라”라고 어머니는 소리지르며 주의를 주었다. 조양천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산에서 기울어질 때였다. 이제 좀 지나면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는 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쌀 짐을 지고 헐떡이며 삼봉동 고개에 오르니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나는 삼봉 고개 기차 길을 지나 휴식하였다. 저 멀리에서 숱한 전기불이 반짝반짝 거렸다. 어머니는 저기가 룡정 시내라고 하면서 “빨리 가자”며 일어섰다.   1935년 3월 12일에 찍은 가족 사진(필자 아버지 뒤줄 오른쪽 첫번째,필자 어머니 중간줄 오른쪽 세번째)    삼봉 고개로부터는 내리막길이여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마안툰(马安屯, 지금의 광신촌)을 지나면서 큰 신작로가 나타났고 길 량켠에 조선족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기차 대교를 건널 때에는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5, 6메터 너머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따금씩 삐거덕하는 철교의 널판자소리가 들려올 뿐 사방은 괴괴했다. 어머니가 “지금 건너는 이 기차 다리가 ‘해란강 대교’”라고 알려주셨다. 룡정 시내에 들어서니 가로등이 훤히 흙길을 비추었다. 어머니는 수양버드나무 곁의 ‘룡드레 우물’을 보시며 “인제는 다 왔다”고 하면서 그 옆의 2층 판자집 아래층 문을 열었다. “여보, 아들 철이가 왔소!”하면서 소리치며 집안에 들어섰다. 나도 어머니 따라 집안에 들어서니 “아니, 철이라니? 셋째가 왔소?”하며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나의 몸을 어루어만지셨다. “철이 많이 컸구나. 그런데 이 발뒤축에 피는 어찌된 일이냐? 여보! 빨리 와서 이걸 보오. 발뒤축 껍질이 많이 벗겨져 피가 나는 구만.”하며 야단쳤다. 어머니는 쌀 짐을 내려놓고 달려와 보더니 “벼짚신에 긁히워 벗겨졌구나. 된장을 바르면 괜치않을거야.”라고 하며 상처를 싸매주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았다. 아버지는 소고기 반찬을 나에게 짚어주며 “오늘 철이 쌀 짐을 지고 오느라 수고했다.” 고 칭찬까지 해주셨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칭찬에 아픔은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유쾌했다. 얼마나 바라던 아버지의 칭찬이였던가. 다른 집 애들이 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돌이를 할 때면 나는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기분 좋게 저녁밥을 먹었다. 아마도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나니 심정이 좋았던 같았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내고 온돌에 앉더니 “여보, 철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제법 잘 춥니다.”라고 하며 “아버지 앞에서 한번 재간 피워봐라!”며 박수를 치니 아버지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나는 기분 좋게 제꺽 일어나 당시 마을 나그네들이 부르던 〈전투동원가〉를 힘차게 불렀다. “전투준비하자, 동북의 인민 4천만…”하고 노래하자 아버지는 “철이 정말 노래 실력이 대단하구나”며 크게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양걸춤을 추었다. “양걸, 양걸, 뚤양걸 나무다리 챙챙 해방이로다…” 입으로 반주하면서 궁둥 방아를 찧으며 양걸춤을 신나게 추었다. 모두다 마을 분들이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철이 인제는 다 자랐구나.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하며 아버지는 누웠던 이불자리 밑에서 붉은색 지페 한장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며 “래일 어머니와 함께 상점에 가서 검은색 고무신을 사 신어라”고 했다. 당시 나는 그 돈이 얼마인지 몰랐는데 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동북에서만 사용했던 동북 화페 만원짜리라 하였다. 나는 그 돈을 인차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버지 병치료비도 부족하여 온 가족이 힘들어 하는 형편에서 새신을 살 생각도 안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새돈 한장이 얼마만한 가치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돈이고 내 평생 단 한번 뿐 받아 본 새 지페여서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노래소리에 깨여나 밖으로 달려갔더니 룡드레 우물가의 큰길로 어깨에 장총을 멘 숱한 군인들이 네 줄 행렬을 지어 “썅첸, 썅첸, 썅첸…”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집으로 다시 들어와 아버지에게 물으니 우리 나라 군대—중국인민해방군이라고 알려주셨다. 그 때 수백명 군대가 일제히 발을 맞추어 씩씩하게 노래하며 행진하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메아리쳤다. 그날 아침을 먹고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갔다오시더니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룡드레 우물가에 가서 룡드레 우물의 래력과 룡정지명 관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몸소 나를 데리고 룡드레 우물가를 거닐 던 그 때 그 시절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다. 그 후 아버지는 병이 악화되여 고생하시다가 결국 1947년 겨울 40세도 안되여 사망하고 말았다. 아버지와의 인연은 너무도 짧고 비참하였다. 다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어 마음이 너무 쓰렸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10여일간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아버지와 같이 린근의 상점에 가서 개눈깔 사탕도 사 먹어봤고 닭똥과자도 먹어봤다. 어머니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향수였다. 어머니는 그 일을 알고 돈을 망탕 쓴다고 아버지를 나무람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치료만 생각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때 어린 나이인 데도 그런 눈치는 챘다. 그래서 “가난한 집 애들이 일찍 셈이 든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세를 맡고 있었던 집의 바깥벽은 몽땅 널판자로 되였고 집안에는 박우물도 있었다. 물이 아주 맑고 물 맛이 좋아 그 집 주인은 약수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던 그 집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룡드레 우물가를 확장하면서 정부에서 허물어버렸다. 다행이 수양버들나무만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 번 만남에서 나는 아버지와 더욱 친숙해졌고 아버지의 고매한 성품을 알게 되였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오늘까지도 내 마음속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되였다. “철이야,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하여 꼭 나라에 쓸모 있는 훌륭한 인재가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마디마디의 부탁은 내 인생의 등불로 되여 지금까지 나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아버지는 아주 멋진 사나이였다. 키 큰 미남이였다. 진한 눈섶에 이글거리는 쌍까풀눈은 아주 매혹적이였다. 그런 체격에 연설 할 때면 강물이 흐르는듯 류창하여 듣는 사람마다 감탄했다. 나의 기억 속에 처음 아버지를 만나 뵜을 때는  내가 여섯 살 되던해의 어느 가을의 구정부 마당이였다.  백성들이 연길현 14구 구정부 마당에 모였다. 사람들이 횡도촌 새장거리를 꽉 메워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분이 있었는 데 나의 아버지라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고 인차 나한테로 와서 어깨에 가로 메였던 가죽가방에서 질감이 좋은 종이(일본제 위생종이)를 꺼내여 내 코를 닦아주시며 “너는 왜 항상 코가 많니? 떨어지면 발등이 깨지겠다.”고 나무람했다. 나도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중학교 웅변대회 때 웅변을 잘해 상으로 붉은 수첩을 탄적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돌이를 하는 애들을 볼 적마다 부러움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특별했고 동년시절 아버지를 딱 두번 만났던 그 기억은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80고개 나이에 나의 손을 잡아주셨던 아버지의 그 따뜻한 손은 난류와 더불어 지금까지 내 마음을 덮혀주고 있다. 아버지의 인생은 37세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나에게 남겨주신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은 지금 이 시각에도 내 눈앞에서 또렷이 남아 있다. 그립고 보고 싶은 나의 아버지, 80고개를 넘어서고 있는 이 셋째아들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러봅니다, 아버지! 
149    아버지와 휠체어 댓글:  조회:198  추천:0  2021-09-01
[수필] 아버지와 휠체어 김성옥 아버지 김규봉은 1951년 목단강조선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8세 어린 나이에 목단강 교구 동승마을 소학교 교장 겸 교도주임으로 발령 받아 10년 간 사업을 하시다가 뜻밖에 급성뇌막염 후유증으로 28년을 휠체어 신세를 지내며 사셨다. 비록 휠체어를 타시고 인생을 마감하셨지만 불공평한 운명에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자식들에게 삶의 디딤돌을 깔아주셨다. 1968년 늦가을, 아버지는 갑자기 독감에 걸려 30일 동안 고열로 혼미상태에 빠졌단다. 깨어난 후 급성 뇌막염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됐는데 그때 나이 38세.  전 목단강지구 소수민족 선진교육자 대표로 뽑혀 1964년 국경절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 오르기까지 한 영광을 지녔던 아버지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속이 타서 애매한 병신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다 보니 근육 신경 손상으로 인해 조금만 다치면 널판자 보다 더 뻣뻣해진 두 다리가 갑자기 한데 달싹 달라붙어 앉은 채 뒤로 훌렁 넘어 가시곤 했다.  그때 우리 네 자매 중 오빠가 17살 막내 여동생은 겨우 5살이었다. 애들을 보아서라도 살아야 했다. 멀쩡한 두 손이 있었다.  며칠 후 오빠가 시내에서 휠체어를 사왔다. 그런데 이러 저리 만져보고 앉아 보시더니 마음에 안 드신다고 아예 오빠더러 목수 도구 몇 가지만 사오라 하시여 손수 휠체어를 만드셨다. 한다면 한다는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끝내 전원 장치도 없는, 단지 두 고무 바퀴만 손으로 밀면 잘 굴러갈 수 있는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그러나 어떤 의료기 상점에서 돈 주고 사려고 해도 살수도 없는 특수형 휠체어를 한대 만드셨다. 뱅글뱅글 바퀴에 기름까지 몇 방울 떨궈놓으니 제법 잘 돌아갔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제일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30대 피 끓는 젊은 나이에, 100미터 달리기를 15초 내에 완주할 수 있었던 건강한 사내가 하루아침에 휠체어 신세가 됐으니 억장이 무너져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그이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휠체어를 타실 때부터 아버지는 마음의 자세를 낮추셨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씩 돌면서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 먼저 깍듯이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를 걱정하시는 분들이 외려 이만하면 괜찮으니 편히 대하시라고 부탁을 해왔었다. 아버지는 어르신들이 한어 방송이랑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난점을 헤아려 국제 국내 시사들을 자세히 설명해 드리셨고, 짬만 있으시면 작은 삽을 갖고 다니시며 집 앞의 길을 고루고 닦으셨다. 비만 오면 물이 고여 마을의 애들이 뛰어다니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어르신들 마실 다닐 때도 불편했던 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배움을 앞세운다.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 해 가을에 마을의 아줌마들이 무우말랭이를 하고 싶은데 칼날이 굵은 채칼 파는 게 없어서 못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아버지는 밤 도와 채칼 만드는 연습을 하셨다. 처음 우리는 그렇게 세심한 채칼 날을 어떻게 만드냐고, 괜히 헛고생 하시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서서 하는 일이면 몰라도 이건 휠체어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단다. 마치 상급에서 내린 임무라도 맡은 듯이. 언제 어디서 아버지가 채칼 만드는 것을 보신 적도,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이 없으신데 그이는 이튿날 동안 꼬박 휠체어에 앉아 채칼 제작을 고안해 냈다. 집집마다 버리는 유리병 통졸임 철판 뚜껑을 찾아 가위로 잘게 자르고, 또 끝이 뾰족한 집게로 이러 저리 엮어서 시험을 해보니 싹싹 소리 내며 무우 오리가 잘 갈려내렸다. 한입 두 입 건너 동네 아줌마들이 소문을 듣고 채칼 만드는 재료를 들고 왔다. 어떤 분은 돈 주고 산 것보다 곱절 더 좋다며 돈까지 내놓으셨으나 그이는 절대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동네 아줌마들은 그 채칼을 너무 잘 썼다고 외우군 했다.  한 사람의 건강 표준을 신체조건 여하에 따라 논한다면 그건 완전하지 못하다. 아버지는 건강한 사내였다. 비록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더 받으셨다.     그날은 엄동설한 한겨울이었다. 강가에 얼음이 유리알 같이 반질거렸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강바람 쐬러 나가셨다가 그만 바퀴가 미끄러져 구멍 내놓은 강판에 푹 빠지게 됐다. 마침 강가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청년들이 달려와 아버지를 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히시고 집까지 모셔 왔으니 말이지, 폰도 없는 세월에 만약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어찌할 뻔 했을까? 그날 저녁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혹시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이 아파하실까 봐 걱정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기색 없이 마냥 유쾌하게 웃으시며 농을 하셨다.  아버지는 흑룡강신문 애독자이셨다. 신문사에서 조직하는 지식경연 응모에 여러 번 참가한 연고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텔레비죤, 라디오 방송에서 보고 들은 뉴스부터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조리 우리한테 들려 주시곤 하셨다. 그러다가 밤중이면 부엌에 내려가 손풍구를 돌리며 어머니더러 밤참을 하게 해서 자식들한테 챙겨 주시곤 하셨다. 한번은 아래 집 아주머니가 일부러 나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네 집엔 뭔 재미있는 얘기가 그렇게 많니? 너네 집 앞을 지날 때면 일부러 한참씩 듣고 간단다.”  70년대 농촌에서 한창 군대 가는 바람이 불었을 때 가정의 세대주나 다름없는 오빠가 감히 신청을 못하자 아버지는 떠밀어 보내다시피 하며 자식을 군대에 보내셨다. 오빠는 군에 6년간 복무하고 돌아왔었다.  1976년 공농병 대학교 추천 모집이 나오자 아버지는 여자일 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네가 대학생이 되면 우리 김씨 가문의 첫 대학생이니 가문의 영광이라며 나를 기어이 연변대학으로 떠나 보내셨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워 이기시려고 다리 병에 좋다는 중약은 다 드셨는데 그 약재를 차에 실으면 아마 한 수레는 될 듯싶다. 그 보기만 해도 쓰고 양이 많은 중약을 언제 한번 얼굴도 찡그리시지 않고 다 드셨다. 마을에 지원 온 해방군 의료대를 찾아 한 뽐이 넘는 침도 수 없이 맞았고 소나무 찜질이 좋다고 해 뜨거운 소나무 찜질도 많이 했었다. 뜸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의사가 정해준 뜸 자리에 손이 닿는 데는 모두 뜸을 뜨셔 팔이며 다리에는 온통 뜸 자리였다. 뜸 자리는 쉬이 아물지 않아 싯누런 진물이 나오곤 했지만 아버지는 “뜸 자리가 덧나야 효과가 좋단다”며 웃으셨다. 아픈 다리는 전혀 낫지 않았고, 밤에는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서 주무시지 못 하셨다. 그래도 우리 앞에서 단 한번의 짜증도, 원망도 없이 혼자 고통을 삼키며 묵묵히 가정의 어려운 일을 담당해 나가셨다. 심지어 자식의 옷 단추까지 달아주시곤 하셨다.   이런 아버지가 계셨기에 우리 네 남매들은 한치의 구김살이 없이 반듯하게 자라 모두가 가정도 잘 꾸리고 사회 생활도 잘해올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골회함은 아직도 고향 목단강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저번 추석에 형제들은 10여 년 간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한 자책감으로 인터넷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 비석을 만들어 술을 부어 드렸다. 눈물이 앞섰다. 평생 당신 이름으로 된 은행 통장 하나 못 만드셨고 다리가 불편해 신분증 사진도 못 찍으신 아버지! 그렇지만 우리 자식들의 마음 속에는 백만장자 아버지보다 더 우러러 보이고 존경스럽다.  아, 세월이 갈수록 보고 싶은 아버지! 엊저녁 꿈에 나는 벤츠 자가용을 운전하시고 어머니와 함께 경박호 관광을 가는 아버지를 봤다. 저 세상에 가셔도 우리 아버지는 짱일 것이다.  동북아신문
148    날아라, 민들레씨야 댓글:  조회:264  추천:0  2021-08-30
날아라, 민들레씨야 □ 문춘산 여름방학에 나는 꿈속에서도 그려보던 고향을 찾아갔다. 고향을 떠난 지 어제 같은데 어느덧 십년도 훌쩍 넘었다. 마을 안의 큰길에는 가로등이 설치되여있었고 집집마다 하얀 칠을 올린 철바자를 산뜻이 두르고 있었다. 터밭에 심은 감자꽃이 하아얀 웃음을  건네온다. 그제날의 고향이 아니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후 한동안 근무한 적이 있는 마을 뒤에 있는 소학교로 향했다. 학교 정문은 꾹 닫겨져있었다. 대문 옆에 작은 문이 열려져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운동장을 꿰질러 교실 앞에 다가가 창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듯 넉줄로 놓인 책걸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몸을 돌려 운동장에 들어섰다가 문득 운동장의 잡초 속에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가 눈에 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저기에도 민들레가 자라고 있었다. 누구의 보살핌도 없지만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파랗게 돋아올라 생명의 터전을 지켜선 민들레를 보는 순간 감개가 솟구쳤다. 내가 이 소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때 아이들은 봄이면 노오란 민들레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기도 했고 민들레씨가 바람을 타고 날리기 시작할 때면 그것을 잡겠다고 마구 뛰여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업간휴식시간에 학급에서 키가 제일 작은 연이가 잉잉 울면서 교연실을 찾아왔다. 그 애의 헝클어진 곱슬머리 우에 하얀 깃털 같은 민들레씨가 가득 붙어있었다. 어느 장난꾸러기의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누가 그랬는가고 물었더니 연이는 쿨쩍거리면서 준이가 그랬다고 대답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준이는 하루가 멀다하게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였다. 나는 다른 애를 시켜 준이를 불러오게 했다. 준이는 교연실에 들어서자 머리부터 푹 숙였다. 그때까지도 준이는 손에 민들레씨가 이미 다 날려 밋밋한 꽃대를 쥐고 있었다. 계집애처럼 얌전하게 생겼는데 곧잘 남을 괴롭힌다. 야단맞을가 두려워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나는 준이를 이윽히 지켜보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준이는 민들레씨가 왜 하얀 깃털 같은 날개를 달았는지 알고 있나요?” 나의 뜻밖의 물음에 준이는 눈이 올롱해서 나를 쳐다보며 머리를 저었다. “민들레엄마는 민들레씨가 멀리멀리 날아가 새 땅을 찾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라고 하얀 깃털 같은 날개를 달아준 거래요. 그런데 준이는 연이의 머리 우에 민들레씨를 뿌려놓았으니 그 씨들이 싹을 틔울 수 있을가요?” 내 말에 연이와 준이는 키드득 웃었다. “우리는 민들레엄마의 꿈을 소중히 여겨야 해요. 알겠어요?” “네!” 준이는 힘있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연이의 머리에 달라붙은 민들레씨를 하나하나 뜯어주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징징 울기를 좋아하던 연이는 어엿한 의과대학 학생이 되였고 장난꾸러기이던 준이는 외국으로 류학을 갔다. 연이와 준이처럼 외지에서 공부하고 사업하는 많은 애들이 지금도 자주 나와 련락을 한다. 그 애들도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올 념은 하지 않는다. 하긴 나도 그 애들이 모두 다시 고향에 돌아와 살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민들레씨는 하얀 날개가 돋쳤기에 민들레동네의 숱한 이야기들을 조그마한 가슴에 가득 안고 머나먼 곳으로 가서 민들레의 새 이야기를 심고 자래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학으로 인하여 텅 빈 학교를 나서는 나는 아쉬움보다도 아름다운 기대가 더 컸다. 민들레씨야, 물기 어린 비옥한 흙을 찾아 저 멀리 훨훨 날아라. 자리잡은 곳에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인내와 겸손으로 새로운 이웃들과 어울리면서 민들레동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해다오. 연변일보
147    노페인, 노게인 댓글:  조회:250  추천:0  2021-08-27
노페인, 노게인 □ 미라클 “노페인, 노게인.”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가끔 이 말을 리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는 게 없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나 자신을 볼 때면 그래도 가슴이 쓰라리기만 하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느라 바삐 보내는 직장인을 볼 때면 나는 인생이란 단어에 대해 다시한번 회의감이 든다. 그리고 출근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게 너무나 슬프다. 학창시절에는 부모의 돈을 펑펑 쓰면서 “어른이 된 후에는 꼭 돈을 많이 벌어 효도할게.”라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20대의 후반에 들어선 나 자신의 모습을 보니 예전에 부모 앞에서 한 다짐은 이미 거짓말이 되여버렸다. 래일모레면 서른, 어느새 나이를 이렇게 먹었을가. 분명 2년 전까지만 해도 난 24살이였는데.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하게 흘러 “언제면 졸업할가?” “제발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했는데. 사회에 나오면 전쟁터란 말을 들었을 때도 분명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때 되면 다할 수 있어.”라며 자신만만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였을가. 노페인, 노게인.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런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나는 항상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어릴 적에는 성격이 내성적인 데다 말수까지 적다 보니 친구가 거의 없었다. 매번 동네 친구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때면 무랍없이 친구들과 대화도 하고 장난도 치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도 그들의 그룹에 끼고 싶었지만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무시했고 단 한명도 내 옆에 서주는 사람도, 내 편이 되여준 사람도 없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나의 학창시절은 불행 그 자체였다. 학교에서 휴식시간만 고대 기다렸던 나, 공부하기 싫어서도 아니고 땡땡이 치고 싶어서도 아니였다. 휴식시간에는 복도에서 옆 반에 있는 베프(가장 친한 친구)랑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반에서 겪은 속상한 일들을 하나하나 털어놓으면서 나는 너에게서, 너는 나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리해가 안되는 바보 같은 짓이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서로의 위로가 간절히 필요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보며 “비슷한 것들이 같이 논다.”라며 놀리군 했다. 그때는 모를 문제가 있어도 도움을 청할 방도가 없었던 시절이였다. 선생님은 학생들끼리 서로 물어봐서 배우라 하고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구도 나한테 가르쳐주려는 친구 없었다. 왜냐하면 ‘찌질이’와 말을 걸면 같은 찌질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매일을 버티면서 어른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었다. 누가 봐도 취직도 척척 되고 성격도 싹싹한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세상 일은 항상 뜻대로만 흐르지 않았다. 내가 손꼽아 바라던 어른은 어디로 가고 별 볼일 없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비록 성격은 예전에 비해 많이 활발해졌어도 어디 가나 예쁨을 받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취직을 하려고 면접을 보러 가면 “너무 퉁퉁해요”, “관상을 보니 저희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눈이 너무 선해서 사회와는 동떨어진 것 같네요”… 이렇게 이런저런 리유로 취직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가끔 회사에서는 인재를 모집하는지 아니면 연예인을 선발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석사 학벌에 다양한 실습경력 그리고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까지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갖은 리유로 여러번 탈락의 아픔을 겪었다. 이럴 때면 차라리 기술이라도 배우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사립학교 교원 면접을 갔었다. 매일 강의련습도 해보고 파워포인트 준비도 하면서 그리고 내 강의의 부족점을 미봉하면서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결국 면접관이 나한테 하는 말은 “선생님과는 거리가 멀다.”였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말일 수 있지만 이미 여러번 탈락의 아픔을 겪은 나에게는 이 말이 마치 칼날과도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대체 뭐가 안 어울린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목소리요. 목소리에 힘이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한 거친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이 지구를 떠돌다가 나무에게도 내물에게도 눈송이에게도 내려앉아 스며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자신과 다른 것은 포용하지 못하고 면접관은 왜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만 골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늘 노페인, 노게인이라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pain or no gain’이 되여버렸다. 즉 ‘고통은 있지만 얻는 것은 없다.’이다. 상처는 분명 아픈 것이지만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세상을 랭랭하게 살아간다면 인생의 주인자리를 ‘상처’라는 자에게 몽땅 내주는 것이란 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매 한차례의 실패, 매 한번의 상처를 받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주저앉게 된다. 가끔은 정말 세상만사가 ‘노페인, 노게인’이면 얼마나 좋을가란 생각을 해본다. 도전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도전해보면 나에게도 취업문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은 있을 테니까. 적어도 지금처럼 자신이 실패자란 생각은 들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나는 오늘도 별의별 생각을 한다. 공지영은 책에다 “고통만이 성장할 수 있게 해주죠. 하지만 고통은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걸 흘러가게 내버려두십시오. 가야 할 것은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쓴 적이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겪은 모든 실패들이 어쩌면 나를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 썰물처럼 흘러가게 하면 나에게도 진정 나에게 어울린 취업의 문이 활짝 열릴 수 있을지도. 나의 매 한차례 실패들은 모두 내가 성공으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되리라 바라면서 오늘도 희망을 가져본다. 지금까지 온갖 설음과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기적만 남았을지도. 인생이란 올리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내리막길이였지만 나머지 몇십년의 생은 올리막길일 것이다. ‘노페인, 노게인’.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이 말을 되뇌여본다. 연변일보
146    칼있으마 -김영분 댓글:  조회:107  추천:0  2021-08-24
제1회 우수상 수상작(2021년);  칼있으마 -김영분   “카리스마”라는 말이 있다.   흔히 리더를 평가할 때 이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고 집행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신의 은총’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능력이나 자질을 말한다. 어느 특정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게 하는 특징으로써 한마디로 남들보다 정의롭고 끌어당기는 힘이 세고 강하다는 말이다.    요즘 젊은 세대 위주로 ’카리스마’가 우리 말로 ‘칼있으마’로 변형되어 유행되고 있다. 처음에는 생경한 느낌이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마력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카리스마’가 그리스어라면 ‘칼있으마’는 순수한 우리말의 표현이다. ‘칼있으마’는 더 형상화하게 우리말 풀이로 그의 참뜻을 나타냈다. 글귀가 반영한 그대로 칼을 거머쥐고 결단력있고 막강한 힘으로 팀을 끌어가고 있는  모습이 한편의 액션영화처럼 선명하게 안겨온다.    나한테 이런 ‘칼있으마’가 있을까.    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싶어했을까.    마흔에 들어서면서 지난 세월에 누리지 못했던 여러가지 감정들을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풀쩍이는 메뚜기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특히 카리스마를 가지고 싶었다. 어릴 때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걷잡을 수가 없다.    어릴 때 고분고분하기로 유명했던 나, 평범하기로 청도 바다가의 백사장에서 움켜쥐면 실실 빠져나가는 한톨의 모래와 같았던 나다. 외우기를 잘해서 문과는 자신이 있었지만 틀려서 남들이 웃으면 어쩔까 하는 생각에 손도 못들었던 나다. 수학이 너무 어려워 수학선생님을 만나면 가던 길도 에돌아 갔던 나다. 혹여나 선생님이 관심을 보이면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쥐구멍에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던 그때 그 심정을 한폭의 그림으로 표현을 한다면 아마도 큰 산앞에 왜소하게 서서 죄없는 돌맹이들을 애매하게 툭툭 걷어차고 있는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가난한 가정형편과 부모님의 잦은 다툼, 사춘기 때엔 온 얼굴에 퍼진 주근깨와 다른 애들처럼 찰랑거리는 머리결을 가지지 못한 것이 내심 못마땅해 스스로 자신을 구석에 가두고 좀처럼 세상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주눅이 들어있으면서 언제나 밝게 웃으며 즐겁게 지내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왜 저들처럼 사랑을 받지 못할까?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원망만 할뿐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당당함을 표현할 줄 몰랐다.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저 성실하게 정해진 규률에 따라 고분고분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늘 주위 사람들로부터 참하다는 평가를 듣고 살았다. 종래로 누구랑 다툰 적도 없고 얼굴을 붉힌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나는 내면의 공격성을 꽁꽁 짖누르면서 나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바뀌는 사계절처럼 내 안에서 봄바람이 불고 가을 단풍이 여러번 우수수 흩날리면서 슬슬 변화가 온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해내고 싶었고 나를 인정해주고 싶었다.    조용히 독서를 하면서 책 속의 인물들과 수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일제히 내게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그 중에서도 심플하게 살아야 한다는 프랑스작가의 말이 아주 인상깊다. 추구해야 하는 물질도 감정도 모두 심플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많이 추구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사람이 도리어 물질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감정을 억누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일을 남의 비위 맞추는데 사용한다면 자기 마음을 바줄로 동여매어 숨가쁘게 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했다.    심플한 감정패턴은 자기감정에 충실하는 것이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자기감정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나자신이 점점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치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을 자신이 생겼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일인지 깨달았다. 나자신을 긍정하고 응원하는 힘이 생겼다. 어릴 때의 그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러웠는지 예전의 나를 꼭 안아주고 훨훨 날려보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도 매우 바쁘다.누가 남의 일에 관심이 그리 많으랴.비로소 내가 무엇을 하든, 잘하든 못하든 비웃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재미의 세계가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는 많아지고 소심한 감정의 지배를 덜 받게 되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인 동시에 감독이고 관객이다. 나부터 나에게 박수를 보내니 점점 나를 위해 응원해주는 관객들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강사공부도 곁들였다. 얼마전에 육아에 관한 주제로 여러 엄마들에게 두시간동안 씩씩하게 아이의 애착에 초점을 두라는 강의도 했었다.    내가 강단에 섰다고 하니 학교시절 친구들이 나의 새로운 모습에 많이 놀라는 것이었다.그들뿐만 아니라 사실 나자신도 놀랐다. 수업시간에 손 한번 들어도 식은땀을 쏟던 나였기에,나는 나안에 이런 용암처럼 뿜어져나오는 용기가 있을 줄 생각도 못했었다.    웅크렸던 세월만큼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 동기는 강했다. 내가 살아온 매 한순간이 헛되지 않음을 알았다. 지금 쏟아붓고 있는 이 열정은 아마도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놓친 노력의 순간들을 보상하고 싶어서가 아닐까.주눅 든 세월을 보내고나니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졌다. 온화해졌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끝없는 활기가 생겼다.    문득 누군가가 나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여유롭게 온유하게 그리고 ‘칼있으마’가 넘치게.    뭐라고? 나에게 ‘칼있으마’? 에이. 설마 하면서도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칼은 최대한 작은 면에 힘을 집중하여 자기가 자르려고 하는 것을 자르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무에게도 쉽게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열정을 집중해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성실하고 꿋꿋한 모습이라면 나 역시 ‘칼’과 조금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으리으리하고 권력있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금수저를 물고 태여났다”고 한다. 금수저는 참말로 신의 은총이였을까. 나한테는 은총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였다. 신은 금수저대신 나에게 나만의 칼을 쥐어주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그 ‘칼’을 좀 늦게 찾았을 뿐이다.    신은 오래전부터 매 사람마다 칼을 다 주셨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자기에게만 속하는 성공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칼’이 보일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은총을 빨리 찾아내길 바란다.    ‘칼있으마’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나만의 특유한 부드러운 ‘칼있으마’를 계속 간직하련다.       -------------------------------------    김영분 프로필    길림성 영길현 출생. 2004년부터 현재까지 청도에서 가방회사 운영. 2016년 6월 요녕신문에 수필 로 등단. 지금까지 , 등 80여편 작품 발표. 연변작가협회 회원, 청도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겸 사무국장. 흑룡강신문 연해뉴스  
145    귀향길과 귀가길 댓글:  조회:210  추천:0  2021-08-20
귀향길과 귀가길 □ 김승원 ‘귀향길’과 ‘귀가길’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운 ‘길’이다. 그러나 이 ‘길’에서의 느낌에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생활 속에서 흔히 겪는 ‘귀향길’과 ‘귀가길’에서의 소감을 공유하려 한다. 지난 5월 9일 나는 상해에서 코로나 백신접종을  끝마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국제표준과는 아직 6개월 차이가 있는 준로인이지만 고향에 간다는 리유 만으로도 전날밤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과거 집체호 생활 때나 대학시절에도, 그리고 직장에서 출장갔다 돌아올 때면 ‘귀가’라는 두글자 때문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내가 퇴직 후의 언젠가부터 ‘귀가길’과 ‘귀향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 정년퇴직 후 나와 집사람은 많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게 손녀의 ‘노예’로 ‘몰락’했다. 비록 ‘림시’라고 하였지만 어느덧 5년철이 다가온다. 첫 몇달은 애들과 함께 그럭저럭 지냈는데 도심생활에 흥취가 없는 데다가 여러모로 불편하여 아들집에서 약 45킬로메터 떨어진 해변가에 거처를 잡고 따로 생활을 하였다. 애들은 내가 고독해한다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주말마다 손녀를 데리고 와서 하루이틀 묵어가지 않으면 한달에 적어도 한번은(코로나 류행 전) 리조트에 가서 1박2일씩 힐링하고 돌아오군 했다. 아들며느리의 효심은 너무 고마우나 가끔 즐거움에 뒤따르는 서운함도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말이 지나면 나는 또다시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되니깐! 하루 삼시에 설걷이, 집안정리와 정원 가꾸기, 40분 정도의 운동, 두시간의 독서시간과 서예, 텔레비죤 시청 등으로 하루 또 하루가 느닷없이 흘러간다. 너무 적적할 때면 캔맥주 한잔에 노래도 불러보지만 결국은 나 혼자만의 무미건조한 생활이다. 주변에는 소통할만한 상대가 거의 없다. 의료계통에서 41년간 내과의사로부터 과장,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평생동안 할 말을 다 해서인지 퇴직 후 어느 땐가부터는 말할 수 있는 ‘벙어리’가 되여버렸다. 그러나 귀향길에 올라서면 나앞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고향에는 내가 사랑하는 조상들의 뼈와 넋이 묻혀있다. 고향에는 어느 때건 진심으로 반겨주는 친인들이 있다. 고향에는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청춘의 꿈을 키우던 동창들이 있다. 고향에는 한직장에서 다년간 고락을 함께 나눈 동료들이 있다. 고향에는 아무 때건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생사친구가 있다. 고향에는 장백산과 두만강이 있는가 하면 모아산과 해란강이 있다. 고향에는 시원하고 달콤한 샘물이 있는가 하면 음이온 함량이 높고 가슴을 확 틔여주는 청신한 공기가 있다. 고향에는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 아직 어머니 손맛이 살아있는 여러가지 김치에 토장, 청국장이 있다. 고향은 사계절이 분명하다. 백화만발한 봄도 아름답지만 불같은 태양빛에 짙어가는 여름의 록음은 더 가관이다. 황금파도 출렁이고 단풍에 물든 가을이 그림같다면 백설로 단장한 겨울은 동화세계를 방불케 한다. 고향에는 자연재해가 별반 없거니와 무서운 온역도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천하명당이다. 나는 고향의 산천계곡, 일초일목도 모두다 사랑한다. 나는 고향의 친인, 친구, 동창, 동사자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나는 언제나 손님을 친인처럼 환대하는 고향사람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귀향길에 미련을 두지 않겠는가! 지금의 나는 ‘귀향길’이 사무치게 그립다. 연변일보 
144    하늘을 높이로 (외 2수) 댓글:  조회:215  추천:0  2021-08-20
하늘을 높이로 (외 2수) □ 김향옥 높이 쳐다 보지만 비온 뒤 어쩌다 한번 피여나는 무지개처럼 오색령롱 자태를 나타내지 않고 더 자유로이 떠돈다   머리 숙여 깔보지만 비온 뒤 어쩌다 한번 땅우에 몸을 펴는 지렁이처럼 비굴한  자태를 드러내지 않고 더 평범히 얼굴 내민다   모두 하늘을 높이로 더욱 분주히 오가고 있다.   네가 한번   네가 한번 눈감아주고 얼굴 감추니 목말라 갈라터지는 땅도 원기를 회복하고   네가 한번 이불 덮고 잠드니 옹크리고만 있던 우산도 손에 받들려 꽃을 피우네   길게 여위여만 가던 개울물도 다시 살이 찌고 크게 높게만 보여지던 빌딩도 딛고 갈 수 있네   한껏 열정만 피우지 말고 때론 휴식하는 것도 좋으려무나.   엽 서   네모난 마음가짐으로 남의 인생 풍부히 조각했다   몸을 내번지고 찢기우는 흔적 날리고 일생을 마무리 했다   펼치면서 어제를 밀어내고 드러내며 오늘을 보여주고 뒤에 밀며 래일을 숨겨두고   한장 한장의 계곡을 넘나드는 그 속에서 나는 커갔다   키로만이 아닌. 연변일보
143    전설처럼 살다가신 할머니 댓글:  조회:160  추천:0  2021-08-11
[제21회 재외동포문학상 체험수기 대상작(2019년)] 전설처럼 살다가신 할머니     -박영희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지난 세기 60년대로 지금과는 달리 생활 형편이 째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월급을 타서는 전부 할머니에게 맡겼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나셨는데 마치도 마술사처럼 늘 맛있고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곤 하셨다.    손맷돌을 돌려 두부, 노란콩쌀죽, 녹두지짐을 만드는가 하면 겨울에는 엿을 달이고 순대를 만들고 또 시루떡, 증편, 오그랑죽 등은 할머니의 손에서 엇갈아 빙빙 돌아 가면서 그처럼 손쉽게 만들어 질 수가 없었다. 식구가 단출했지만 친척들이 쉴 사이 없이 드나드는 통에 우리집 밥상은 한 끼도 조용할 사이 없었다.    할머니는 꼭 여유 있게 만들어서는 먼저 가까운 이웃에 일일이 돌렸고 겨울이면 얼려두었다가 다시 쪄서는 밥상 위에 내놓곤 하셨다. 매번 할머니의 손끝에서 탄생한 맛깔스러운 음식의 깜짝쇼가 있을 때마다 기쁨의 함성과 함께 온 집안 식구들의 얼굴에는 행복의  웃음꽃이 피어나곤 하였다.   그때 중국 동북 지역의 겨울은 왜 그렇게 매서웠던지. 사람마다 두꺼운 솜바지와 솜저고리에 솜신까지 신고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막을 수 없어 덜덜 떨었다. 추운 새벽이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항상 불을 켜고 바느질하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때론 철없는 내가 불빛이 시끄러워 시계를 쳐다보면 바늘이 새벽 두세 시를 가리켰다.    할머니의 매일 일과는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겨울마다 이맘때면 할머니는 싸늘한 새벽 공기를 무릅쓰고 집의 모든 이부자리와 솜바지, 저고리를 다시 한번 깨끗이 씻어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수선해 놓으셨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한 온돌 구들에 차려 놓은 김이 몰몰 피어오르는 아침밥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집집이 온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수돗물을 길어서 먹을 때였다. 우리 집에는 아주 큰 지독으로 된 물항아리가 있었는데 큰 물통으로 13통이 들어갈 수 있었다. 아침 설거지가 끝나고 집을 말끔히 거둔 후면 할머니는 물을 머리에 이어서 날랐는데 큰 물독에 넘치면 가마에 넣고, 다음 한 통을 더 길어 물독 위에 올려놓고야 그만두셨다. 할머니는 매번 물을 길을 때는 독 밑을 말끔히 굽을 내어 씻었고 또 이렇게 하루건너 물을 길었는데 그 어떤 일을 하나 아무리 힘들어도 깔끔하면서도 단숨에 끝을 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 맺고 끊는 성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노라면 옛집에서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고 또 닦아 항상 새로 기름칠한 듯 반들반들 윤나는 노란 장판과 원목 가구들, 그리고 알뜰한 저녁 밥상을  차려 놓고 전등불을 환히 밝히고 바느질하면서 식구들을 기다리던 할머니의 옆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할머니가 계셨기에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 아버지가 바삐 보내면서 집에 계시지 않은 수많은 썰렁하고 가슴 저린 고독한 나날도 행복으로 메울 수 있었다.   1969년 5월 30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사인 우리 집은 “의료공작의 중점을 농촌에 두어야 한다”라는 나라의 지시와 정부의 안배에 따라 편벽한 시골에 내려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때 이미 80세에 가까웠던 할머니는 농촌 마을에 오시자 마치 몇십 년간떠났던 고향마을에 다시 돌아온 듯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집 앞에 분배받은 기름진 300여 제곱미터 남짓한 자류지와 집 뒤에 있는 여러 가지 풀로 덮여 있는 대면적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돌고 돌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며칠 밤을 쉬지 않고 뒤척이며 어떻게 그 땅을 충분히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 즐거운 고민을 하셨다.    우리가 이사하였을 때 자류지에는 이미 담배모가 옮겨졌을 때였다. 할머니와 나는 먼저 밭 변두리에 해바라기씨와 강낭콩씨을 심고 이어 뒷산에는 호박씨를 박았다. 가을이 되자 원래부터 기름진 담배밭 변두리의 해바라기는 키를 넘게 자랐고 줄기가 어른들의 팔뚝만큼 실했으며 씨가 들어앉은 이삭은 크기가 어른들의 팔로도 안을 수 없게 컸는데 직경이 모두 50센티미터 넘었다. 그런데 씨가 막 영글어 가고 있을 때 하루에 몇 번씩 난데없는 참새떼들이 새까맣게 덮쳐드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허수아비를 세우고 줄을 길게 늘이였고 거기에 방울을 달았다. 새 떼가 오면 할머니는 줄을 흔들면서 “훠이, 휘이-” 하고 큰 소리로 외쳐 새 떼를 쫓곤 하였다.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뒤에 있었다. 가을이 되어 해바라기씨를 털어보니 큰 마대로 두 개나 되었다. 할머니는 또 병아리 50마리를 키우고 강아지 두 마리도 사다 놓으셨다.   가을이 되니 할머니는 일찌감치 다음 해의 계획을 세우기에 바쁘셨다. 할머니는 앞마당 가까운 곳에 채소 심을 곳을 내놓고 전부 찰수수를 심었다. 100% 한전 지대인 그곳에서 기장쌀, 차좁쌀은 있지만 찰수수는 드물었다. 기름진 자류지에 심은 찰수수는 매일같이 우쭉우쭉 탐스럽게 잘 자랐다. 가을이 되어 할머니는 남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찰수수를 세 마대 거둬들였다.   나날이 많아지는 닭무리에서 수탉은 잡아먹고 암탉으로는 병아리를 깨워 알닭인 암탉만 50여 마리로 부쩍 늘어났다. 할머니는 매일 달걀 한 광주리씩 주워 담았다. 그런데 닭이 곳곳에 널려 말썽을 부리는 까닭에 채소밭 변두리에 울타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머니는 남새를 일 년에 세 차례 심었는데 초봄에는 시금치, 햇배추, 파를 심고 다음은 그 자리에 고추, 가지, 토마토, 오이 모를 내고 끝으로 갓, 영채와 같은 늦가을 남새 씨를 뿌렸다.   그때는 도시나 농촌이나 막심한 식량난을 겪을 때였는지라 한전 지대인 이곳 대다수 집에서는 무를 채로 썰어 놓고 그 위에 좁쌀을 조금 넣어 무밥을해서 끼니를 때웠다. 지금은 무로 영양밥을 짖기도 하지만 그때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수단이었다.     우리 집은 도시 호적이기에 식량은 집과 4~5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공사마을(향)의 식량 공급소에 가서 인구 당으로 배당되는 쌀을 사 와야 했다. 그나마 입쌀은 몇 근 되지 않고 모두 옥수숫가루와 같은 잡곡뿐이었다. 그러니 할머니가 지은 농사가 얼마나 큰 보탬이 됐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마치 쉴 줄 모르는 기계와 같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내가 감탄하고신기해한 것은 이 모든 일을 할머니는 마치 평범한 매일의 일과로 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나 할머니는 눈에 띄게 힘겨워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조용히 하나하나 진행해 나갔다.    1971년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라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도시로부터 ‘5.7’ 하향 간부들이 연이어 농촌으로 와 자리 잡았는데 그중 한 집은 우리 집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여섯 식구의 이삿짐을 부리고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집 온돌의 구들돌을 잘못 놓아서인지 불을 때면 아궁이로부터 연기가 곧장나왔다.    그 추운 겨울 사람들을 불러와 서너 번이나 고쳤으나 매번 마찬가지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말없이 가서 일하는 것을 지켜 보시더니 참지 못하고 두 손을 걷고 나섰다. 부뚜막과 온돌 고래를 조금 드텨 놓고 이겨 놓은 흙을 척척 바르더니 20여 분 후 손을 씻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그러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농촌에 내려간 후 명절을 쇠면서 처음으로 개를 잡을 때였다. 그때 농촌에서 자란 사촌 오빠들도 있고 친척들도 몇 명 있었지만, 할머니를 빼고는 누구도 개를 잡아 본 경험이 없었다. 먼 옛날 생계를 위해 육개장집을 경영한 적 있는 할머니는 자신이 나서면 젊은이들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을 흔들면서 돌아앉았다. 그런데 이튿날 개 잡이에 나선 두 오빠가 개를 놓고 어정쩡 주춤거리자 결국 할머니가 나서야 했다. 모두들 할머니의 그 칼 쓰는 솜씨에 놀라움과 감탄을 감추지 못하였다.   해방 전 할아버지 사 형제는 전부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혁명의 저조기에 토벌대의 대도살을 피해  소련으로 떠났다. 둘째인 우리 할아버지도 형님을 따라 소련에 가셨고, 얼마 후 사 형제가 전부 소련에 모여서 활동하였다. 집에는 노인과 여자들 뿐이었다. 집은 가난에 쪼들려 가고 본래 3대가 모여 살던 대가족은 할 수 없이 분가를 하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는 삼 남매, 즉 나의 큰아버지(8살), 고모(4살), 둘째 큰아버지(2살)을 데리고 나오게 되었다. 셋째인 아버지는 출생 전이었다.    할머니는 그때 생활의 쪼들림보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애들이 마음에 걸려 안절부절못하였다. 할머니는 소련으로 할아버지를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비용을 마련하려고 할머니는 장사를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돈을 꾸어 먼저 떡장사, 두부 장사를 하였는데 주로 머리에 이고 여러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팔았고 그 후에는 작은 가게를 얻어 국밥집을 차렸다.    붙임성이 좋고 음식 솜씨가 좋아 장사가 아주 잘 되었는데 주위의 장사꾼들이 손님을 싹 쓸어간다고 질투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2년간 애써 모은 돈으로 소련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경은 항상 봉쇄가 엄밀하지만, 당시는 국세가 긴장하였으므로 비상 상태였다. 소련 쪽은 더욱 감시가 철저했다. 붙잡히면 큰일이었다. 세 아이를 데리고 농촌 아낙네가 큰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남편 찾아 비밀리에 변경을 넘는다는 것은 모험에 모험을 더한 엄청난 일이었다. 들리는 소문마다 더욱 무시무시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결심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변경을 넘으려면 든든한 길잡이가 있어야 했다. 변경에 밀수쟁이들이 들락날락하기에 길잡이꾼들도 많았고 사기꾼들도 많았다. 강을 건너고 밀림을 지나야 하는데 나쁜 길잡이를 만나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밀수꾼들은 위험에 처하면 날 살려라 하고 혼자 뺑소니를 치는데 상대방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믿음직하고 길이 익숙한 사람을 하나 물색하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사정을 알고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내는 몇 배의 돈을 내걸고 사정하여 끝내 대답을 얻었다. 할머니는 짐 세 개를 만들어 하나는 당신의 머리에 이고 하나는 등에 지고 다른 하나는 큰아들의 등에 지우고  그다음 작은아들의 손을 잡고 캄캄한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천 리 타향 길에 올랐다. 그런대로 길잡이 덕분에 변경은 무사히 넘었고 다만 보따리 하나만 물 건널 때 물살에 밀려 떠내려갔다. 물을 건너 둔덕까지 오르고 보니 푸르무레한 새벽빛에 저 멀리 낯선 마을이 보였고 길잡이는 여기서 돈을 가지고 급히 자리를 떴다.    더욱 어려운 고비는 그다음 부터였다. 소련말 한마디 모르고 돈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장 어린 자식들에게 끼니를 먹여야 하였고 손에는 할아버지 거처의 주소가 적혀 있는 종이쪽지를 달랑 하나 쥐고 얼마를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길을 이제부터 떠나야 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감시가 엄한 당시 소비에트 구역인 이 마을을 어떻게 무사통과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을까지 가는 길은 무인지경이었다.    갑자기 저 멀리에서 말 타고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카빈총을 어깨에 멘 순찰대가 마을을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에 나서기만 하면 붙잡힐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잠시 숨어서 관찰해 보다가 순찰대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애들을 이끌고 마을로 향해 반달음 쳤다. 마을에 도착하여 골목 하나를 빠져 막 큰길로 가로지르려 하는데 마을 어귀에 또다시 순찰대가나타났다. 다급한 할머니는 다시 골목길에 들어서서 이쪽저쪽 살피면서 마땅한 피할 곳을 찾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할머니는 어느 집 담장 안의 뒷마당에 널린 빨래 속에 흰 조선족 옷도 걸려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할머니는 조금도 주저 없이 짐들을 그 집 담장 뒤에 넘겨 놓았다. 다음 애들을 데리고 사립문을 떼고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선 할머니는 다짜고짜 넙죽 엎드려 “사람 살려 주소서.” 하며 두 손을 비비면서 사정하였다. 마침 아침을 먹으려고 밥상에 마주 앉았던 주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에 너무 놀라 엉거주춤 일어섰다. 생각대로 그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조선족이었다.    할머니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들은 불청객을 맞아들였다. 선량한 그 집 아주머니는 애들에게 아침밥을 먹인 후 남편과 한참 의논한 끝에 마을의 제일 큰 분이며 당위원장인 사람을 찾기로 하였다. 오후가 되어서 당위원장이라 하는 사람이 집에 들어섰다. 그분은 할머니를 보고 당장 애들을 데리고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혼자도 아니고 여자가 아이 셋을 데리고 그 먼 길을 찾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할머니는 돌아가면 봉변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니 어른, 아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고 또 갈 수 있다고 제발 도와 달라고 손시늉을 해가면서 빌고 또 빌었다.    아주머니도 옆에서 통역해주면서 사정하였다. 드디어 주인집 아주머니가 보증 서고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소개장을 떼어 주었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어디도 갈 수 있지만 그때는 소개장이 돈보다 힘을 쓸 때였다. 할머니는 그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한 장의 소개장을 가지고 소련말 한마디도 모르면서 기차 타고, 배 타고, 걷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15일 후에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 늘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소련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였다. 그 많은 이야기도 이젠 거의 기억에서 어렴풋이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잊히지 않는 것은 그때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소련말을 몇 마디씩 섞어 가면서 흥분에 겨워 말씀하던 할머니의 그 모습과 할머니가 소련에 방금 도착하여 있은 몇 가지 일들이다.    할머니는 난생처음으로 소련에서 그렇게 큰 배를  보고 또 배를 타고  하룻밤 하룻낮을 달렸다. 할머니는 애들이 뱃멀미 하던 일, 큰 선창 안이 우글거리는 사람 천지여서 발 옮겨 디딜 곳도 없는데 어린 고모가 열이 나면서 앓던 일, 큰 배가 위험지대를 지날 때 키 크고 코가 높은 선원들이 삼각기를 들고 낯이 백지장처럼 되어 알아듣지 못할 큰 소리로 선창 안의 사람들을 지휘하여 꼼짝 움직이지 못하게 전부 누워 있게 하여 할머니가 “아차” 가슴이 철렁했고 이 낯모를 타향에서 애들과 함께 이젠 죽겠구나 하고 두 손에땀을 쥐고 긴장해 하던 일, 그리고 기선에서 내려 짐꾼이라고 당시 그곳에서흔히 보는 쪽지게쟁이를 불렀는데 말 모르는 농촌 아낙네이고 애들이 딸려 있는 것을 보고는 업신여겨 앞에서 짐을 지고는 따라 오라고 하면서 자기는 반달음의 줄행랑을 놓는 것을 큰 소리로 호통치면서 멀리까지 따라가 겨우 따라잡고 짐을 빼앗아 내던 일, 온갖고생 끝에 할아버지가 계신 집을 찾아가니 할아버지는 그때 집에 계시지 않고 할머니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온 동네 남녀로소가 집 앞마당과 울타리 밑에 둘러서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상봉을 지켜보려고 떠나지 않고 기다리던 일…   그 후에 안 일이었지만 이와 같이 이국땅으로 고생하며 남편을 찾아간 여자들은 처음 만날 때 남편과 대판 싸움부터 한다고 한다. 통신이 끊기어 사람을 통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시기여서, 이런 경우 남편들은 여자가 찾아오는 것을 미리 알 수 없었다. 그날 마침 할아버지는 외출하여 집에 없었고 할머니는 주인집의 도움으로 빈 집안을 거두고 쌀독을 찾아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애들을 거느리고 중국에서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표정 그대로 집에 들어선 할아버지가 애들을 데리고 이 먼 길 어떻게 왔는가 하는 말에 할머니는 마치 마실 갔다 돌아온 남편 대하듯이 평소와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맞이하면서 “애들에게 아비 찾아 주려고 고생 찾아 이곳까지 왔다”라고 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박수를 치며 소련말로  “대단하다”, “좋다” 하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후 소련에서 7년을 보냈고, 그때 아버지와 막내 삼촌이 소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5살 되던 해에 온 집 식구가 다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집을 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고 ‘사람 기다리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는 것이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일생 기다림에 지친 분이시다. 젊었을 때는 집을 떠나 소련에 간 할아버지를 기다려야 했고, 항일 전쟁 때에는 담가대로 전선에 나간 큰아버지를 기다려야 하였고, 또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학질에 걸려 시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다시 돌아온 둘째 큰아버지를 기다려야 했으며, 해방전쟁 때에는 형제 중 셋째인 아버지가 부대의 퇀급 군의로 비밀리에 부대와 함께 대이동한 후 소식이 끊겼다가 나중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오게 된 기나긴 3년간을 피눈물로 기다려야 했다.    그때 집에는 병으로 움직이기 어려워하는 할아버지와 심각한 골 결핵으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형제 중 넷째이며 막내 삼촌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딸(나의 고모)이 5살짜리 어린애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의 맏며느리(나의 큰어머니)가 4살과 6살짜리 오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 어린 것들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그 후 시름시름 앓던 삼촌도 20살의 젊은 나이에 끝내 할머니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을 도려내는 큰 아픔 앞에서 울음소리 한 번 시원히 내지 못했고 몸이 아파도 앓아누울 수 조차 없었다.   자식들이 남겨 놓고 간 어린 것들을  보살피며 울음을 씹어 삼켜야 했고 빗발치는 총탄 속을 누비며 전쟁의 죽음의 변두리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삼 형제를 생각해서 마음껏 통곡할 수 없었다. 매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호미를 찾아 들고 정신없이 밭으로 달렸다고 한다. 오직 그곳만이 할머니가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곳이었고 정신없이 일로 몸을 혹사하여야만 그 기나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깨어나면 다시 잠들 수 없었고 그러면 당연히 밭으로 향하였다. 달빛을 빌어 정신없이 김매고 있으면 먼동이 훤히 밝아오고, 이때면 다시 집으로 향하였다. 그때 할머니는 가정의 유일한 노동력이었다. 할머니는 그 후 여러 가지 자그마한 일로 속을 태우는 사람을 보면 늘 위아내주며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나는 죽은 아들을 옆에 놓고도 밥 한 끼 굶지 않았소. 산 사람은 역시 살아야 하고 애들 입에 거미줄을 치게 할 수는 없었소.”     할머니는 한 가난한 가정의 넷째로 태어나 8살에 박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을 오셨다. 시집올 때 할머니는 이미 가사일은 물론 베로 옷을 짜고 바느질하는 등 일에 능숙했다. 어릴 때부터 일로 잔뼈가 굵은 할머니는 시집온 후 수많은 같은세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대가족의 크고작은 가정일을 책임졌다. 하루 세끼 밥을 하여서는 두 끼 음식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의 밭으로 이어 날라야 했고 틈만 있으면 베틀에 올라 앉아 베를 짜고 밤늦게까지 손바느질을 해야 했고 밥알 같은 어린 자식들을 거느려야 했다.   그때는 전쟁과 약탈, 빈곤과 전염병이 쌍으로 성행하던 시기라 사람들이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고난의 연대, 동란의 시대였다. 추위와 굶주림 망국노의 슬픔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항일에 떨쳐나서기 시작했다. 집에는 항일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집의 뒷방 칸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천성이 지혜롭고 솜씨 빠른 할머니는 비밀리에 항일하는 할아버지와 형제들의 밥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때때로 토벌을 피해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친인들을 위해 산을 넘어 밥을 나르고 소식을 전하는 일도 했다. 밤길에 산골짜기를 톱아 오르면서 풀 덩굴에 긁히고 넘어져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먼 옛날, 할머니의 시아버님(나의 증조부)은 28세의 노총각으로 혈혈단신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오는 이민의 물결을 따라 훈춘의 한 편벽한 마을에 정착하셨다. 전염병과 식량난으로 혈육을 전부 잃고 홀로 된 시아버지는 가족애와 일솜씨로 인근에 소문이 있었다. 부지런하고 인품 좋은 시아버지는 빈털털이 소작농으로 일하시면서 돈을 모아 장가들어 아들 사 형제를 보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뼈 빠지게 일하면서 아들들을 출세시키려고 이를 악물고 맏아들을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형의 영향으로 아래 형제들이 모두 글 읽기를 즐겼다. 후에는 하나둘 집을 떠나 항일의 길에 들어섰고 그 후에는 유명한 항일 투사로 성장하였다. 그렇게 되자 집에는 여자들만 남게 되어 생활이 더욱 궁핍하였다. 생활의 중압감은 항상 할머니의 두어두 어깨를 짓눌렀다.   그 후 불행하게 중국의 최고 사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교도관으로 있던 맏시형이 유명한 광주봉기에서 부대를 영솔하여 포위를 돌파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었다(연변 역사박물관에 모셔진 영웅). 온 가정의 정신적 기둥이 무너지고 수시로 들이닥치는 토벌대의 수색 위험이 뒤따랐다. 항상 위험을 피해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업고 이끌고 부모들을 부축하면서 이사를 밥 먹듯 해야 했다. 할머니의 맏동서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눈물로 세월을 보낼 때 할머니가 항상 옆에서 함께 울고 두 손을 잡고 위아내 주었다. 그때 가정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갸름한 체격에 강단 있고 날래었으며 언제나 부지런하고 깔끔하였다. 또 놀라운 기억력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이셨다. 고령이 되었어도 낮잠을 자는 것을 보지 못했고 일을 찾아 두 손이 쉴 사이 없었다. 동네방네 시집가는 새색시 이부자리를 장수 할머니가 꾸미면 복이 온다고 모셔 가면 한 솜씨 하셨고, 갓난아기 출생 때 장수 할머니의 속옷이 필요하다는 부탁에 만면에 웃음 짓고 흰 속옷들을 내놓으셨다.    90세가 넘어서도 흰머리가 별로 없는 새까만 머리를 한 오리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이 빗어 넘기고 흰 부드러운 전으로 된 머릿수건을 쓰고 다녔으며 그 당시에 주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옛날에 짰다는 베옷을 즐겨 입으셨고 흰 속옷들을 의연히 풀을 먹여 다듬질하여 입으셨다.    개혁 개방 후, 민속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서 종종 할머니를 찾아와 과거 역사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90여 세의 고령에 이른 할머니의 기억력과 말재주였다. 녹음기 앞에서 할머니는 두 시간 동안 잠깐 쉼도 없이 청산유수의 말솜씨와 또렷한 정신력으로 녹음을 하였다.    그 후 나도 녹음테이프의 복사본을 들어봤는데 유머까지 섞어 가면서 옛일들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야기하셨기에 함께 듣는 사람들의 감탄과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할머니 인터뷰 현장에 두 번 동참했다. 할머니는 그때의 산골짜기의 이름, 그 연대와 그 시대의 큰 사건인 토벌대의 대소탕 같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취재하러 온 손님은 역사 기록과 할머니의 말씀을 대조해 보면서 이야기를 유도했는데 연신 혀를 끌끌 차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이 보아도 할머니의 인생은 곧 하나의 민족 역사였던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1주년이 되는 날, 저녁 추모회에서 내가 할머니에 대해 추억하면서 “우리 할머니는 위대한 할머니시고, 영웅 할머니십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랜 침묵 끝에 어른 한 분이 나를 보고 한마디 하셨다. “너의 할머니는 우리 남자들도 인정하는 여호걸이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침묵 속에서 할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을 되새기며 저쪽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화와 행복을 누리시기를 묵묵히 빌었다. ---------------------------------------  박영희 프로필  1957년 12월 출생. 1982년 7월 연변대학 화학학부 졸업.  2017년 12월 청도농업대학 정년퇴직.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신문 연해뉴스
142    [서정순 수필] 상렬이를 보내며 댓글:  조회:201  추천:0  2021-08-09
위챗에서 상렬이의 부고 소식을 보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상렬이가 떠나가다니, 그 용암 같이 뜨거운 정열의 사나이 상렬이가 떠나가다니, 바위 같이 든든해 보이던 상렬이가 떠나가다니, 중학교, 대학 교를 같이 다닌 동창,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락이 별로 없어도, 언제든지 옆에 있는 것 같은 나의 동창 상렬이, 상렬이가 어떻게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몸이 안 좋다는 것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아주 막연하게 상렬이 같이 정열적이고 재능이 넘치고 유머가 넘치는 착한 사람에게 병마는 꼭 비켜 가리라 믿고 싶었다. 꼭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고 싶었다. 어쩐지 상렬이는 꼭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더니 “아, 소식이 벌써 거기까지 갔나? 괜찮아, 인생이 뭐 그런 거지 뭐, 결국은 다 가는 게 아이겠소?”하며 경상도 어투에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상렬이 특유의 말투로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였다. 심양의과대학이 그런 면에서는 수술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수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난 그런 거 아이하오. 인생 얼마 산다고 몸에 칼 대고 하는 짓을 하겠소?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요. 사람이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거지. 난 지금 중의로 보수적인 치료를 하오. …” 그때만 해도 너무나 당당하고 낙관적이었다. 병 있는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연변대학시절의 요녕출신 동창들, 앞줄 왼쪽 첫번째가 우상렬,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필자 서정순. 상렬이와는 참 인연이 깊다. 소가툰에서 한 중학교, 한반을 다녔고 대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무순시조선족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었다. 갓 무순시조선족중학교에 배치 받았을 때 상렬이, 황영(대학동창), 나 세사람은 그야말로 세상물을 먹지 않은 티 없이 순진한 ‘얼간이’들이었다. 근엄하신 선생님들이 조용히 앉아 비과備科를 하는 근무시간에 눈이 왔다고 흥분하여 셋이 운동장에 나가 하얀 눈을 마음껏 밟으며 소학생들처럼 눈싸움을 하면서 히히 호호 하였다. 2년이 좀 지나 상렬이는 연구생 시험을 쳐서 무순시조선족중학교를 떠났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느 날 떠난다는 말도 없이 감쪽같이 떠나갔다. ‘상렬이 왜 그래? 왜 말도 없이 떠났어?” 그때도 나와 황영은 상렬이를 아주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말도 없이 떠나간 상렬이를. 무순조선족중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봄놀이 기념사진, 오른쪽 두번째가 우상렬. 세번째가 서정순. 2018년 12월 말, 료녕조선족문학회에서는 ≪료녕조선족문학통사≫ 발간식을 하였다. 그때 상렬이도 초대받아 왔었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만찬이 벌어졌다. 상렬이의 몸 상태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상렬이한테 와서 술을 권하였다. 상렬이는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속이 조마조마하였다. “야, 너 그렇게 마시면 돼? 넌 술 대신 이런 물을 마셔야 해.”하며 내가 광천수를 주자 그는 “그런가?’하며 슬그머니 물을 마시었다.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해서이다. 언제나 착해 빠진 상렬이, 다른 사람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상렬이, 선량함은 그의 인격의 기반이었다. 그날 상렬이는 저녁만찬 도중에 여덟 시 차로 떠나야 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중학동창인 최정실이와 나는 몹시 아쉬워하며 극히 만류하였다. 기차표를 물리고 다음날 가라고. 상렬이와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들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상렬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재미가 나기 때문이다. 상렬이는 다음에 보자고 하며 기어이 떠났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중의로 치료하는 것이 효과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상렬이의 몸상태를 알면서도 나는 일찍 떠나가는 그가 무척 섭섭하였다. 최정실이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총망하게 떠나가지? 휘익휘익 바람을 일구며 떠나가는 그의 뒤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료녕조선족문학통사≫  출간기념식 에서 고향인 소가툰 출신 문인들과 함께. 왼쪽으로부터 네번째가 우상렬 교수, 오른쪽으로부 세번째가 필자 서정순. 요즘 위챗에 올라오는 상렬이의 ‘콤플랙스’ 계렬 수필들을 나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듣고 있다. 전에 잡지에서 읽었을 때는 그냥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읽었고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구나 하며 읽었다. 그의 수필은 상렬이라는 사람처럼 가식이 조금도 없었다. 오직 진실, 진정, 진심이 수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고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상렬이가 떠난 후 다시 들으니 한 맺힌 한 남자애의, 한 사나이의 절절한 절규가 느껴졌다. 난, 우린 동창으로서의 상렬이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콤플렉스에 맺힌 절절한 그 한들을 난, 우린, 선생님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를 들으며 나는 중학시절의 상렬이를 떠올렸다. 군복을 입기 좋아했고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으며 나팔바지를 입었고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난 남자애, 상렬이가 휘익휘익 바람을 일구며 걸어올 때면 길고 넓은 나팔바지가 길우의 먼지를 다 쓸어버릴 것 같았다. 몸을 팔자로 꼬며 땅만 보고 걷는 상렬이, 그는 학교에서 유명 짜한 학생이었다. 머리가 좋아 공부는 잘하는데 그의 주위에는 희한하게도 공부 못하는 친구들만 모여 있었다. 중학교 때 그와 앙숙인 친구의 주위에는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여 있는데. 둘은 한반에서 눈만 마주치면 한판 붙곤 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상렬이는 싸움을 잘한 것으로 기억한다. 둘만 싸우면 상렬이가 우위였다. 상렬이는 굉장히 몸이 날래었다. 그런데 어쩌랴. 그 중점반에서 상렬이의 짝꿍은 한 명도 없었으니.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상렬이 앙숙의 짝꿍들이 상렬이를 빙 둘러쌌고 담임선생님도 번마다 상렬이를 꾸지람하였다. 여학생들도 놀란 눈빛으로 은근히 상렬이 앙숙의 편을 들었다. 공부성적이 우상이었던 그 시절 공부 못하는 애들을 거느린 상렬이에게, 못나 보이는 상렬이에게 호감을 느낀 여학생들이 있었던가? 그리고 상렬이와 앙숙이었던 남자애는 전교에서도 1, 2등 하는 애가 아니었던가. 중학시절 여드름투성이의 남자애, 부끄러움이 많아 땅만 보고 걸었던 남자애, 군복에 군모에, 그리고 나팔바지에 한껏 멋을 부린다고 했지만 촌티를 확확 풍겼던 남자애는 콤플렉스 속에서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진정 멋스럽고 당당한 사내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뚝 섰다. 상렬이가 떠나간 후 조선족문학 위챗췬을 가득 덮은 추모의 물결을 보며 나는 다시 상렬이를 돌아보았다. 상렬이는 자신의 넉넉한 인품과 박식한 학식으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꿈을 주었구나. 한 사람이 한 생을 살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웃음을 주고 희망을 주고 꿈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헛되이 살지 않았다. 상렬이는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분명 비범한 사람이었다. 내 먼 기억속에 남아있는 중학시절의 상렬이의 모습 때문에 어쩌면 난 상렬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모르고 지난 것 같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조선족문학을 위해 한 몸을 불살랐던 상렬이, 위챗췬에 넘쳐나는 추모의 물결들과 추모의 시와 글들, 그것은 상렬이의 인품에 대한 최고의 평가였고 상렬이의 학식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정열적이고 정직하고 유머러스하고 박식하고 선량한 상렬이, 그 두툼한 뱃속에 가득 채운 이야기들과 그 비상한 머리속에 가득 쌓아 놓은 지식들과 그 따뜻한 인정속에 한껏 넘쳐흐르는 감성들을 더 듣고 싶고 더 느끼고 싶은데 이제는 다시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구나. 창천은 어이하여 이렇게 재능 있고 좋은 사람을 질투하는가. 뭐가 그리 급해 58세라는 한창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게 하는가. 조선족문단이 이렇게 애타게 너를 부르는데, 배움에 목마른 청춘들이 애타게 너를 찾고 있는데 상렬아, 넌 언제나 그렇게 괘씸하게, 섭섭하게, 원통하게 우리 곁을 떠나가느냐. 정말 너무 너무 얄밉다. 정말 너무 너무 원통하다. 정말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진정한 사나이-우상렬, 나의 동창이며 친구인 우상렬,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거절하는 법도 좀 배우게. 특히 술을 거절하는 예술을. 상렬아, 잘 가. 명복을 빈다. 2021. 7. 15 새벽 한시   서정순(徐貞順) 약력: 중국 요녕성 심양 출생, 198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회원, 요녕성조선족문학회 이사, 수필분과 주임. 수필집 《흰눈이 내리면 그리움도 내린다》(2010년 출간), 한중시집 《시의 소통, 경계를 넘어선 만남》(2009년 번역), 《문학명작열독지도》(2012년, 공저) 동북아신문
141    입이 무거운 자가 이긴다 댓글:  조회:295  추천:0  2021-08-06
글 궁금이 · 방송 구서림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익숙히 들어오고 자주 써먹었던 말이지만 어떤 시점에서 유난히 소름끼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히려 저 속담이 틀렸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어떤 말은 아예 몰랐더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굳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실망의 메시지를 전해들었을 때 몰려오는 배신감은 사람을 급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이 뉴스를 찾아가던 시대로부터 이제 뉴스가 주동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방적으로 주입하면 주는 대로 받아물었던 시대를 뒤로 하고 개개인의 구미에 맞는 내용을 골라서 추천하고 구독자가 선택하여 찾아보는 형태로 바뀌였다. 우리는 이왕 그 어느때보다도 시청각이 각별히 민감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입을 조심해 놀려야 한다.       어제도 퇴근하면서 지하철에서 뉴스거리를 만났다. 어떤 아주머니가 마스크를 턱에 건 채로 장시간 통화하는 장면을 봤다. 아빠트단지에서 단 한명이 나와도 만명이 관리를 받아야 하는 이 시점에 대중교통에서 마스크를 내린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영상을 찍어 올리기만 하면 화제 인물로 되는 건 순간의 일이다. 모자이크를 하면 마스크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리지 않으니 그런 기술처리가 없이 얼굴이 그냥 공개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초상권이라는 게 있는데 찍지는 않았다. 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비상식적이라고 해야 할지 답답한 아주머니다.         마스크를 한 상태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도 말을 자제하라고 권장하는 게 요즘 방역이다. 말을 할 때 방출되는 호흡량과 비말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뻔한 상식이다. 아무리 급한 일도 엘리베이터를 타는 몇십초를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방역의 일상화 관리라고 함은 앞으로 신종코로나바이러스나 델타변이가 사라졌다고 해도 지금 실시하고 있는 상당 부분 조치는 계속 이어진다는 얘기다. 이번 바이러스만 넘기면 전의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에볼라, 사스, 메르스에 이어 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까지 미루어 봤을 때 앞으로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다른 바이러스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오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억울함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해는 근원적으로 원인 제공을 하지 않는 게 제일 바람직하지만 사람 감정의 판단이라는 게 자로 재듯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추측과 첨가제까지 따라서면 흰색도 검은색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여론의 힘이다. 신매체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사람마다 정보 제작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의 제일 감각은 정보의 진실성보다는 자극성에 더 민감하다. 그리고 이런 속성을 역리용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특히 데이터의 수요가 간절한 사람들한테서 여실하게 표현된다.        아는 도둑이 더 무섭다고 했다. 간격이 없이 아무 말이나 다 했던 사이가 뒤틀려지면 골치 아프다. 그래서 가까웠던 사이일수록 멀어지면 더 남이 된다. 설사 그사이 쌓아온 서로의 속마음을 철저히 다 지켜준다고 해도 100% 보험이 되지 않는 한 불안을 철저히 가셔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남이 될 각오를 하고 시시각각 말을 아낀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어려운 얘기다. 총체적으로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가르침이 그른 데 없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맹랑한 경우는 그 당시에는 신나게 맞장구를 쳐놓고 돌아서서는 모르쇠를 대며 한발을 빼는 얍삽함이다. 불을 질러놓고는 활활 타오른 결과만 따다가 그대로 당사자 앞에 옮겨 놓으면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만큼 속터지는 일도 없다. 이런 경우에 사실 말리는 시누이를 더 미워해야 하지만 그래도 즉흥적으로 흥분하는 사람은 그걸 가리기 쉽지 않다.         방법은 하나다. 일시적인 통쾌함에 저지르지 말고 재채기를 참는 심정으로 랭정하게 입을 다무는 수련이 필요하다.        귀신 듣게 떡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40    뿌린대로 거둔다,외 1편 댓글:  조회:274  추천:0  2021-08-05
뿌린대로 거둔다,외 1편 최정실 글 씨앗이 움트고 자라서 꽃이 필 때까지는 꼭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아들을 거의 혼자서 키우면서 버릇없다는 뒤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무척 애썼지만 그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개구장이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버스를 타면 빈 좌석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 뭇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아들을 보며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얘야, 너는 동방의 예의지국의 한민족이야, 그 명예에 손색이 가는 짓을 좀 하지 말아다오." 입에 신물이 날 정도로 아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쳤지만 그게 아들한테는 왜 그렇게 소 귀에 경읽기였던지… 그 아들이 인젠 장성하여 17살, 곧 성년이 된다. 며칠 전 영어 토플 시험준비로 맛보기수업이 있어 오랜만에 아들과 영어학원에 다녀왔다. 그 서너 시간의 동행에서 나는 아들의 일거일동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하철을 탈 때면 사람이 다 내리지 않았는데도 앉을 자리를 찾기 위해 서둘러 오르려는 사람이 있다. 아들은 내가 그 사람들과 같이 서둘러 오를까 봐 나의 옷자락을 꼭 잡아당기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맛보기수업 느낌이 어땠냐고 얘기를 꺼냈다. 아들은 공중버스안에서의 얘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삼가하자고 "쉿" 하고 두 손가락를 입에 가져다대는 것이였다. 어제는 또 학원에 간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넘어서도 도착하지 않아 어디까지 왔냐고 물으려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뚝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3초 후에 "공중버스 이용중"이란 문자가 날아왔다. 예의를 지키는 아들의 변화에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지만 조금은 도가 넘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급한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왜 전화를 끊었냐고 따졌다. 그러자 아들이 웃으며 되받아친다. "엄마, 우리는 한민족이에요. 동방의 예의지국의 이름난 한민족이란 말이예요." 어렸을 때 내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컴퓨터에 입력했던것처럼 아들의 입에서 튀여나왔다. 아마 그래서 무엇을 심으면 무엇이 난다 했던가!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나 보다. 요즘 자녀교육 할 때 어떤 부모들은 자꾸 타일러도 아이들이 듣지 않는다고 하면서 한탄한다. 더 강조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의 교육을 시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내라는 인(忍)자는 심장에 비수를 꽂는것과 같이 견디기 힘든 아픔이란 걸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포기하지 않았다면 원하는 결과에 이르지 않았을까? 모죽은 씨를 뿌린 후 5년동안 물을 주고 가꾸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어느 날 손가락 만한 죽순이 돋아나는데 주 성장기인 4월이 되면 갑자기 하루에 80센치씩 쑥쑥 자라기 시작해서 30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버릇이 없는 철부지 아들에게 말해도 듣지 않는다고 교육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입에 신물이 날 정도로 말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아들의 변화를 볼 수 있었을까? 사람마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인간성이란 바로 어제의 ‘나’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예의범절은 인간만이 갖출 수 있는 것으로서 절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돌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갈고 닦아 빛 뿌리는 보석으로 만들 듯이 스스로의 언행을 갈고 다듬는 수련을 거쳐야만 참된 인간성이 완성되는 것이다. 예의범절을 알고 지킬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품위가 있는 사람이 된다. 문명사회란 바로 이런 품위있는 사람들이 안정적인 사회환경을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릴 때 버릇이 없어 내속을 태우던 아들의 바람직한 변화는 나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하였다. 아이들은 어른이 어떤 씨를 뿌리고 어떻게 키우는가에 따라서 그대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나는 엄마이면서 또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따라 우리 학생들도 그렇게 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예의범절이 밝은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하며 나는 오늘도 씨를 뿌리러 학교에 간다. 진통 끝에는   출산에 임한 여자들은 스물 몇 마디의 뼈가 끊어지는 진통의 아픔을 겪어야만 새 생명을 영접하는, 전 우주를 갖는 최고의 감동을 맛볼수 있다. 제왕절개의 경우는 얘기가 약간 달라지겠지만... 서른여덟 살 고령 산부에 그것도 첫 애를, 나는 순산하고 싶었다. 17년전 일이지만 나는 일본이란 선진국에서 운이 좋아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를 만난 덕분에 순산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나 자신의 아낌없는 노력과도 갈라 놓을 수 없었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즘은 산모 뱃속의 태아의 여러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부득불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산모들이 진통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한다. 출산의 진통을 견뎌 내려면 뼈가 끊기는 아픔을 참아내는 참을성도 필요하지만 참고 견디면 꼭 사랑스런 내 아기를 품을수 있다는 필승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아울러 그 마음 가짐을 갖기 위한 기법 같은것도 필요했다. 나는 몇 개월 동안 산모 요가를 하면서 명상을 통해 이 모든것을 몸에 터득했다. 가없는 바다 한 가운데 평온하게 물위에 누워 있다. 거센 파도가 밀려 온다. 나는 그 파도를 이겨 내려고 맞서지 않는다. 그저 내 몸이 파도의 일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는 파도가 올때는 들숨을 쉬고 파도가 밀려 갈때는 날숨을 내쉬면서 모든 정신을 파도와 함께 호흡하는데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아픔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바다는 머지않아 평온한 바다로 원상복귀 하고 나의 진통도 어느새 끝이 난다. 출산의 경험은 여자의 최대 가치의 경험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출산의 경험을 하면서 나는 삶을 배웠다. 사랑의 첫번째 조건은 인내와 아픔이란것, 삶에서 영원한 아픔은 없다는것, 어려움은 하나의 진통이라는것, 진통은 말그대로 순간 통증에 불과하며 그 통증을 극복하려면 맘을 비우고 자연의 섭리를 따를줄 알아야 한다는것, 긍정정인 마음가짐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묘약이라는것... 속담에 여자 셋이 모이면 꼭 애 낳는 얘기가 나온다 했다. 나역시 출산의 체험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특히 그때 느꼈던 진통과 그 진통을 이겨냈던 방법은 삶의 영양분이 되여 오늘의 나로 하여금 보다 자신감 넘치고 보다 낙관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채찍질 한다. 삶에서 겪는 모든 진통은 보다 휘황찬 미래를 펼치기 위함이다. 동북아신문
139    장미의 얼굴 댓글:  조회:262  추천:0  2021-08-03
수필 “장미의 얼굴" 수상 소감     류재순 약력: 중국작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공무원문인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명예회장. 중단편소설집 북경민족출판사/서울'과학과 사상사' 출판 . '도라지' 해외조선족 문학상', '설원문학상'소설대상 등 수상 다수 아침에 일어났는데 햇볕이 유난이 밝게 침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구름 많은 하늘 아래 칙칙한 미세먼지까지 덮치며 마음을 우울하게 했던 날들이 말끔히 가셔진 것 같습니다.   이날은 확실히 좋은 날이었습니다. 저의 수필이 대상에 당선되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요.   해마다 5월이 오면 저는 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길을 뻗는 아름다운 덩굴장미들의 모습에 온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의 향에 유혹되어 버리고 그의 아름다움에 발길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불타는 정열과 가시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장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는 끝없는 대화를 해 봅니다.  그것은 나만의 오월의 향수이며 산책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작가들이 흔히 말하는- 자신 속에 있는 제2의 존재와 그렇게 만드는 세상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그러다나면 반짝이는 깨달음과 감동적인 정서의 흐름, 그에 맞춰지려는 언어들이 마구 튀어나와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써놓고 보면 항상 완성품은 아닙니다. 못난 흠집을 꼭 어딘가에 숨겨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창작이라는 멍에를 지고 있는 작가는 그 완성품을 향한, 끈질긴 추구라는 것이 생기나 봅니다.   항상 격려해 주시는 서병진 회장님, 그리고 저의 수필을 주목해 주시고 대상으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수 필]   장미의 얼굴 / 류재순       서울의 오월은 빠알간 장미들이 핑크핑크 한창 뽐을 내는 계절입니다. 공원거리나 골목길을 거느릴 때면 어디에나 영락없이 담 밖으로 한껏 목을 내밀고 기다렸다는 듯이 길손을 반겨주는 덩굴장미들의 유혹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방글방글 꽃잎을 피우며 빵긋빵긋 웃는 모습에 눈길이 사로잡히노라면 생각지 않던 감동과 사색이 몰려옵니다.   벚나무, 철쭉나무, 진달래…이른 봄을 알리는 봄꽃들이 한 자취 흔적을 남기고 사라질 무렵, 서울의 들녘에는 온통 흰 눈꽃과도 같은, 아니 소복소복 가득 담은 입쌀밥 그릇 같은 이팝나무 꽃들과 노란 좁쌀을 중간에 살짝 섞은 조기 밥그릇 같은 조팝나무 꽃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깊어가는 초여름의 짙은 녹음 속에서 하얀 별천지를 이루는 경관 중, 모닥모닥 피어나는 빨간 장미들의 요염하게 튀는 얼굴들이 선을 보일 때쯤 되면 봄날이라는 아름다운 한 폭 유화의 마지막 완성품이 됩니다. 마치 다 그려진 물고기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어 살아난 눈부신 생명체를 발견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아마 장미는 오월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 봅니다.   겹겹이 피어나는 장미 꽃송이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 순간 그 송이 송이들은 하나의 이름 모를 얼굴로 떠오릅니다. 그 얼굴 속에서 나는 잔잔한 숨결을 느끼고 그 속에 묻혀있는 희로애락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슬을 머금은 아침 장미도 약동하는 생명의 구술 빛으로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슬픈 눈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숨겨놓고 있는 가시도 가끔은 톡 쏘는 사이다 같은 여인의 신선한 매력으로 보이고 가끔은 또 옛날 춘향이 같이 절개와 자존을 지키는 수호천사와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보이며 어떤 때는 독을 품은 여자의 한으로 보이기도 한답니다.   내가 갓 한국에 왔던 한 20여 년 전 일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동포들의 합법체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여서 중국에서 남 부럽지 않은 공직으로 일하던 많은 친구 까지도 생전 해보지 않던, 3D 업종에서 숨어서 일할 때였습니다.   그해도 덩굴장미들은 봄을 맞아 어김없이 무더기로 피어나며 울바자 밖으로 빠끔빠끔 얼굴들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미꽃 얼굴을 보는 내 마음은 한없이 우울했습니다.   어쩐지 울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장미의 모습은 울안에 갇혀 숨어서 일하는 우리의 얼굴 같았고 생계를 위하여 한국 늙은이에게 시집온 고향 아줌마 고향 아가씨들 같다는 생각이 울컥하고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혹은 사랑하던 고향 머슴애를 버리고 한국 땅에 들어온 그녀들의 슬픈 영혼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숨 막히는 담벼락 안이 싫어서, 그리운 고향 모습을 찾아 저렇게 매일매일 담 밖으로 한 많은 얼굴을 내밀고 뻗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다독여 주려 했습니다. 따끔하고 벌침에 쏘인 듯 손끝이 아팠습니다. 금방 빨간 피가 맺히더군요. 그때 나는 장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슬픈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매서움과 한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아, 내가 가시 장미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구나!…”   나는 물 젖은 마음으로 장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늘 나는 또 넝쿨넝쿨 담 밖으로 뻗어 나오는 오월의 장미꽃 울바자 길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마침 5월 14일 로즈데이 날이군요. 로즈데이는 미국에서 꽃가게를 하던 청년이 자신의 연인에게 가계의 장미를 모두 바치며 사랑을 고백한 날이랍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장미꽃을 선물하는 유래가 되었다는군요. 열렬한 사랑의 빨간 장미, 첫사랑의 주황 장미, 순결의 하얀 장미, 질투의 노란 장미…제 가끔의 사연과 의미가 있다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을 들여서 한국에 와서도 숨어서 일한다는 사연도, 돈 없는 동포 여자들이 혼인이라는 비극적인 절차를 밟아 한국 땅에 정착했다는 얘기도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었습니다. 체류가 합법화된 고국의 땅에서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동포 여성들의 별빛 같은 얘기들은 무시로 우리의 가슴을 흥분시킵니다. 그들은 자유로이 고향과 고국을 넘나들면서 금융계에서 상업계에서 학계에서 언론계에서 지어는 정계에서까지 능력과 활약을 돋보이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빌라를 사고 상가를 운영하며 축적된 부의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며 대통령상까지 탄 여걸들도 있습니다. 특히 끊임없이 고국에 유학을 오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 분발하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새로운 전망을 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제는 적잖은 고국의 젊은 남자들이 우리 멋진 동포 아가씨, 아줌마들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쉿, 이건 지금 장미들이 숨겨놓은 스팩입니다.   이런저런 사색에 묻혀 장미꽃이 휘늘어진 울바자 밖 길을 걷노라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장미꽃 향이 물씬 가슴에 안겨 옵니다. 그 향은 저 멀리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와 라일락 꽃나무의 향과 어울려 정말 환상적입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붉게 타고 있는 장미꽃 송이를 들여다봅니다. 요염하고 화려하고 콧대가 잔뜩 높아 보입니다. 그 속의 가시를 한번 건드려 볼까요? 아니요, 자존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픔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그 싱그러운 향기의 유혹을 물리치긴 쉽지 않네요.   빨간 장미는 열정 욕망 기쁨 아름다움의 상징이랍니다. 나는 지금 그 열정 욕망 기쁨 아름다움을 그 얼굴에서 분명 보아냈습니다. 그것을 수호하기 위한 숨어있는 가시의 깊은 뜻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아직 저런 열정 욕망 기쁨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며 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을 새우며   타자하며 사색에 사색을 멈추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실패를 거듭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이튿날이면 그 욕망은 다시 살아납니다.   어느 날, 자그마한 성과를 이루었을 때 그 찰나의 기쁨과 환희는 나를 미치게 하며 그 누군가에게 왕창 사랑을 주고 싶어집니다. 물론 나에게도 빨간 장미의 열렬한 사랑도 있지만 노랑 장미와 같은 질투도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해 하기도 하고 가슴앓이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창피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잖아요.   가끔은 이 노숙한 가슴에도 흰 장미와 같은 순수성과 천진성이 있답니다. 세상천지를 모르는 소녀같이 깔깔거리곤 하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아직도 미래를 가진 동심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 모든 속성 사색 갈망들은 분명 내 얼굴에 다 쓰여 있을 겁니다. 장미의 얼굴만큼 아름답진 못해도 말입니다. 내 마음도 오래오래 핑크핑크 오월의 장미를 담고 싶습니다.   동북아신문
138    구닥다리가 어째서 댓글:  조회:269  추천:0  2021-07-20
구닥다리가 어째서 □ 리삼민 얼마 전 대련시에 이주한 고향친구들이 모임이 있다기에 나는 무등 기뻤다. 산 좋고 물 맑은 ‘흑룡강의 소강남’이라 불리우는 동녕현에서 태여나 장장 60여년 살았으니 몸은 비록 대련으로 옮겨왔어도 꿈결에도 오가는 것이 맨발로 헝겊공을 차고 자치기를 놀고 밤낚시를 같이 다니던 고향친구들이였다. 어서 빨리 달려가 고향친구들과 서로 껴안고 마음껏 춤도 추고 노래 부르고 싶은 마음에 쏜살같이 달리는 전철도 굼벵이처럼 느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빗나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친구들의 모습도 변하였고 마음도 풋풋한 인정이 아니였다. 헐레벌떡 음식점에 들어서서 보니 술좌석 친구들의 앉은 자리부터 달랐다. 출입문을 향하여 정좌석에 앉은 사람은 몇해 전 부현장직에서 퇴직한 류씨였고 그 량옆에 앉은 사람은 30년 전 대련에 들어와 기업을 꾸려 돈낟가리에 앉은 김씨와 최씨였다. 내가 들어서니 나와 한 직장에서 퇴직한 안씨가 허허 웃으면서 “책벌레 구닥다리가 왔구만.” 하고 반겨줬고 다른 사람들도 하하 웃으면서 어서 앉으라고 했다. 나의 자리는 말등좌석이였다. 문 옆 복무원들이 료리를 날라오는 길목이였고 나의 옆에 앉은 사람들은 대련에 금방 온 풋내기 장사군들이였다. 특색료리 잉어튀김도 머리는 류씨를 향하였고 꼬리는 내 쪽을 향했다. 술이 한순배 돌자 친구들은 말이 많아졌고 하는 이야기도 콩 한쪽도 서로 나누어 먹던 고향이야기는 한쪽으로 밀려가고 다음번엔 일본려행을 가자는둥 조선아가씨들이 꾸리는 단동으로 놀러가자는둥 아니면 호남 장가계로 유람을  가자는 이야기로 벅적거렸다. 건배를 해도 자기들끼리 술잔을 부딪치면서 내 쪽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술맛을 잃었고 앉아있는 것이 불청객과 같았다. 인간을 조롱거리로 만든다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은 없다. 나는 수저를 드는둥 마는둥 하다가 마누라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핑게를 대고 술상에서 일어났다. 롱담 속에 진담이 있고 웃음 속에 칼이 숨겨있다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구닥다리를 “여러해 묵어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사물, 생각 따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고희를 넘긴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는 하얗게 밤을 새우며 기억의 창고에 깔린 ‘구닥다리’ 조각들을 찾아보았다. 1964년 7월, 독서와 글쓰기에 무척 흥취를 가진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뜻을 품고 총복습에 몰입했는데 공교롭게도 신체검사에서 락방되였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왜서 그렇게 고지식해? 페검사 투시를 할 때 다른 사람 들여보냈더라면 무사히 통과했겠는 걸…” 하고 말하면서 퍼그나 아쉬워했다. 그해 가을, 군대모집이 있었는데  또 치질이 있다고 퇴짜를 맞았다. 소문이 퍼지자 윤활유를 친 것처럼 속셈이 빨리 돌아가는 소대 회계가 “저 사람은 융통성 없는 구닥다리야. 군대모집 군관에게 담배 한곽 사주면서 한번 슬쩍 눈을 감아달라고 청들면 되는 걸 가지고…” 하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 이듬해 봄, 전쟁준비 수요로 상급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할빈에 가서 1년 간 학습한 후 현공안국에 출근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차례졌다. 공교롭게도 등록할 때 나이가 한달 더 많다는 조건으로 또 락방되였다. 소문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퍼그나 아쉬워 하면서 “슬그머니 파출소에 가서 호구부를 고쳤더라면 되는 걸 가지고… 저 사람 구닥다리야.”하고 비웃었다. 아마도 그때로부터 융통성이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딱지가 수십년간 찰거마리처럼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 같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휘청거리며 걸어온 구닥다리인생을 뒤돌아보노라니 문득 오랜 옛날 사회의 부정비리에 곁눈을 팔지 않고 인간 본연을 지켜 초연하게 일생을 마친 굴원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초나라 때 귀족가문에서 태여난 굴원은 청렴하고 천부적인 재능으로 22세 때부터 왕의 총애를 받아 국정을 의논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외교를 맡아 큰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굴원은 간신들의 참소로 일생동안 무려 세번이나 귀양을 가면서 결국 울분을 삭이지 못해 멱라강에 몸을 던져 파란만장한 50세의 일생을 끝마쳤다. 그가 남긴 엔 이런 시구가 있다. “찰랑의 물이 맑으면 이내 갓끈을 씻고/ 찰랑의 물이 흐리면 이내 발을 씻으리.” 철학가 파스칼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혜는 고독에서 온다. 몸이 굽으면 그림자도 굽으니 어찌 그림자 굽은 것만 한탄할 것인가. 나외에는 내 불행을 치료해줄 사람이 없다.” 인생살이가 련속적인 흐름인 것을 명기하고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그 어떤 요행이나 부정비리에 곁눈을 팔지 말고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과 집착, 아집과 허영의 묵은때를 걷어내면서 주어진 자기 삶에 충직하는 것이 옳바른 삶이다. 허물어져가는 례의범절, 본말이 전도된 가치판단, 빈말이 아우성치는 이 험악한 세월에 생각을 바꾸어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나간 나의 인생도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쭉정이인생인 것 같지 않다. 사람마다 코밑치성을 하여 좋은 일자리를 얻고 주먹과 부릅뜬 눈으로 거리중심을 차지하고 허위와 거짓말로 돈낟가리를 차지하면 바다가에 밀려나와 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라를 누가 도와주며 파파 늙은 맹인이 지팽이를 짚고 거리를 헤맬 때 그 누가 로인의 길을 인도하고 암증에 시달려 고통받는 환자가 손길을 내밀 때 그 누가 나서겠는가. 진이 다 빠져나간 나무처럼 언제 세찬 바람에 넘어갈지 모르는 고목처럼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인생의 막바지에서 문학이란 오솔길을 걸어온 나의 구닥다리인생을 뒤돌아본다. 1965년 9월, 내가 세번이나 출세의 길이 끊어져 갈팡질팡할 때 사회주의교육 공작대로 하향한  황호석 대장이 나를 찾아와 “전 대대(촌)에서 고중졸업생이 동무 혼자 뿐이요. 대대 단지부 서기와 선전 사업을 책임지오.”라고 말하면서  흑룡강조선문보 한묶음을 넘겨주었다. 호기심에 끌려 나는 청년활동을 활발히 조직하는 한편 가담가담 통신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보냈는데 20여편 원고가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때 탈곡하러 갔던 둘째 형님이 집안에 들어서며 “오늘 신문에 네가 쓴 글이 실렸구나.”라고 하면서 신문과 원고비 5원을 나에게 주는 것이였다. 내가 쓴 첫 기사가 활자로 찍혀나온 신문을 보고 또 보면서 글쓰기 대문을 노크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무살, 한창 의욕이 넘쳐날 때라  초중2학년 때부터 참외오두막에서 호롱불을 켜고 걸탐스레 읽은 《쇠파리》, 《청춘의 노래》, 《인간문제》 등 동서고금의 책들은 거침없이 나의 붓을 달리게 했으며 불꽃 튀는 생활은 둘도 없는 나의 창작의 원천으로 되였다. 짧디짧은 두달 사이에 나는 20여편의 통신기사를 신문에 발표했으며 청년단사업에서 실적을 올려 입당하고 중학교를 거쳐 향당위 선전위원으로 발탁됐다. 코밑치성 하나 없이 나 절로 찾은 글쓰기 오솔길, 원고료가 쥐꼬리만 해도 나는 즐겁기만하다. 40여년 동안 나는 절주 빠른 세월에 많은 사람들이 바람에 따라 돛을 올려야 한다고 떠들면서 외국으로, 남방으로 빠져나가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르신들에게 코밑치성을 하지만 나는 문학이란 구닥다리 인생길을 걸어왔다. 작년에 나는 고향의 한 개발상이 서산땅을 도급하면서 부모의 산소를 옮기라고 하기에 고향을 다녀왔다. 장장 10년 만의 고향방문이라 보고 싶은 고향의 산과 들, 만나고 싶은  친척과 친구들이 많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살아보려고 외국으로, 남방으로 떠나가 버린 고향마을은 자못 쓸쓸했다. 입을 꾹 다문 자물쇠들이 빈집을 지키고 있었고 옛 학교운동장엔 쑥대가 무성했다. 인심도 다 말라들어 어쩌다 마을사람을 만나도 악수하는 데 그쳤고 친척집을 찾아갔더니 내가 내민 돈봉투가 엷어서인지 돼지 비게덩이 둬점 띠운 시래기국에다 밥 한공기 먹었다. 이튿날, 기차표를 끊으려고 현성으로 떠나려는데 50대 녀성 두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하면서 “오늘 점심에 식사를 대접하겠으니 가지 마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였다. 찬찬히 대방을 살펴보고 기억을 더듬으니 두분중 한 사람은 일찍 남편을 잃고 나의 고향에서 신체장애인 총각과 재혼하고 새 가정을 꾸린 녀성이였고 다른 한 녀성은 때이른 사랑의 쓴맛을 겪은  녀성으로서 내가 오래전 취재하고 신문에 사적을 낸 보도대상들이였다. 그들은 당년에 신문을 보고 큰 힘을 얻었다면서  나를 특별 초대하는 것이였다. 찰찰 넘치는 술에다 포식하고 말린 고추, 고사리, 도라지를 선물받는 순간, 나는 코등이 찡해났다. 한 직장 동료가 2년간 무슨 공부를 끝내고 졸업론문을 쓰지 못해 나의 손을 빌었어도 언제 한번 수고했다는 감사의 말을 들어봤던가. 무심하게 속을 다듬으며 진실에 묻혀사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기울어져가는 이 세상을 바로잡는 진정한 기둥이고 고임돌이 아닌가! 나는 두 녀성과 갈라지면서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돈과 권력으로 부를 얻을 수 있어도 삶의 최대가치인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부동산이나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정직했고 맡겨진 책임을 다했으며 세상에 리익을 주었다는 량심의 흡족함과 내면의 평화일 뿐이다. 오늘도 나는 비좁은 서재에서 이 글을 쓴다. 지갑을 열어도 잔돈 하나 없고  벽에는 ‘우수통신간부’, 흑룡강조선어방송국 ‘우리 사는 세상’ 공모 1등상, 동북과학기술신문 ‘치부이야기’공모 1등상 등 상장들과 서재를 꽉 채운 책들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밖에 없는 생명을 헛되이 살았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구닥다리가 어째서? 황금은 천년만년 땅에 묻히였어도  색갈이 변하지 않으며 선산을 지키는 오동나무는 엄동설한에도 제자리를 지킨다. 나무가지 사이로 퐁퐁 넘나들며 사람들의 총애를 받지만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 다람쥐보다는 한평생 말없이 논과 밭을 갈다가 마지막에 고스란히 도살장으로 들어가 자기 몸을 다 바치는 황소처럼 살고 싶다. 어느 한 명인의 시로 나의 글을 마무리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연변일보 
137    그렇게 가시다니요, 믿기지 않습니다 댓글:  조회:335  추천:0  2021-07-13
[추모글] 그렇게 가시다니요, 믿기지 않습니다  ㅡ고 우상렬교수님 영전에   리해란    아니지요, 그렇게 가시다니요? 한번쯤은 만나뵐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은데 그렇게 가시다니요?   부고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또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인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다섯 번 받아 본 선생님의 심사평  초학자의 글도 자상히 평해주셨지요   소탈하신 성격이라 들었습니다  유모아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생활에선 작은 일에 신경 쓰지 않지만 학문에선 세심하고 깊이 있고    누구나 우러러 보는 누구든 포용해 주는  그런 선생님께서  먼길을 가시다니요?   아직은 젊으시잖아요 아직은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그렇게 가시면 우린 어떡하나요 믿기지가 않습니다    아니지요, 가신거 아니지요? 믿기지가 않아서  믿을수가 없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아아 어제의 별이 없네요 눈물만 두 볼 타고 내려오고 별은 보이지 않네요  믿기지가 않지만 그렇게 가셨군요    ㅡ삼가 명복을 빕니다!   2021년7월12일 대련에서 리해란 
136    [홍연숙 수필] 냉이의 예찬 댓글:  조회:198  추천:0  2021-07-12
아침에 셋집주인할머니는 냉이를 한 소쿠리 가져왔다. 할머니의 굽은 등에 냉이가 한 짐 실려 있었는데 부드러운 흙냄새가 안개처럼 퍼져왔다. 이에 할머니가 새벽에 젖은 흙을 밟으며 냉이를 캐셨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쿠리의 냉이와 등에 진 보자기와 봄 바람에 거슬린 할머니의 모습에는 봄 향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올해 87세 고령인 할머니는 마을 변두리에 자그마하게 밭을 부치고 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밭에 나가 겨우내 올라온 냉이를 캐다 주곤 했고 철철이 그 밭에서 나는 깻잎, 상추, 오이, 고추, 가지, 마늘, 배추, 무, 대파, 감자, 호박, 강냉이를 문 앞에 놓인 소쿠리에 담아 두곤 했다. 소쿠리는 할머니가 놓아 둔 것이다. 나는 그 낡은 소쿠리를 볼 때마다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는 무뚝뚝하고 말이 적은 편이지만 마음 만은 후 덥고 진국이었다. 가끔 수도꼭지를 바꾸거나 샤워기를 바꾸거나 하면 꼭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계산을 해주는 센스도 넘쳤다. “여 서 돈 벌고 집 사서 나가.” 대충 툭 던지는 말이지만 온 몸이 후끈했다. 그리고는 항상 어디가 불편하냐 고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구 뽑아 왔더니 검불이 많다. 잘 다듬어 무어라.” 냉이의 향이 집안을 채우며 봄의 싱그러움이 넘쳤다. 싱크대에 냉이를 쏟으며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보니 할머니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며칠 전에 남편하고 냉이 캐러 갔다가 민들레만 한 줌이나 될까 말까 하게 캐어왔다. 강가나 길가의 냉이는 땅 속에 단단히 박혀서 캐기가 말썽이었다. 냉이는 뿌리채로 뽑아야 한다. 냉이의 강한 향과 맛은 그 뿌리에 있다. 어르신이 지나가다가 냉이는 겨우내 비워 두었던 밭에 가야 쑥쑥 잘 뽑힌다고 했다. 해마다 할머니가 캐어 준 냉이에 맛 들었는지 남편은 땅이 녹기 전부터 냉이타령을 했다. 그 성화에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는데 할머니가 때마침 알고 가져온 것이다. 냉이는 황새냉이, 미나리냉이, 물 냉이 등 종류가 다양하다. 이른 봄의 냉이는 색부터 다르다. 바깥 잎은 불그레 하고 질기며 겨우내 말라 검불처럼 붙어 있었고 안쪽으로 파릇하면서 점점 연두색으로 오며 싱싱하다. 이렇게 삼색으로 나 있는 게 봄 냉이다. 요즘은 일반 하우스에서도 키우는데 이른 봄의 냉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봄 냉이를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달콤하고 쌉쌀하다고 보통 말을 하는데 그것도 완벽한 표현은 아니라고 본다. 그 특유의 향은 설명하기 어려워 나는 그냥 봄의 맛이라 한다.  이 집에 이사 온 지도 거의 십년이 되어간다. 할머니는 내가 이사 들었던 그 다음 해부터 냉이를 캐다 주었다. 고향에서는 냉이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봄이 오면 눈에 띄는 게 냉이더라 만 엄마는 한 번도 냉이 무침 같은 걸 해 준 적이 없었다. 봄이면 들에 나가 달래나 민들레는 캤지만 냉이만은 캐지 않았다. 냉이는 그냥 풀이었다. 냉이랑 씀바귀 랑 등겨에 섞어 돼지를 먹이던 걸 본 게 전부였다. “이거 돼지 풀이잖아요.” 쉬는 날에 귀찮게 먹지도 못할 풀때기를 들고 온 할머니가 짜증이 났다. “먹어 봐. 요즘은 인터넷 검색하면 요리법이 나온다더라 만. 나는 그래도 된장국이 최고여.” 내가 싫어하거나 말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는 당신 말을 툭 던지고 나가셨다. 별로 기분은 내키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말씀대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냉이 요리를 시도해봤다. 생으로 새콤달콤하게 무치거나 데쳐서 마늘, 소금, 참기름을 넣고 버무리기도 하고 부침가루로 반죽하여 지짐도 만들고 된장을 풀어 넣어 장국도 끓였다. 아닌 게 아니라 된장국으로 끓이는 게 훨씬 맛이 있었다. 된장국에서의 냉이의 맛은 풀어지지 않았고 냉이 맛을 그대로 살려 냈다. 몸 속에도 봄 냄새가 퍼지고 마음에도 봄 풀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니 할머니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게 괜히 미안했다.   어느 날, 나와 남편이 벽지를 바르고 있는데 할머니는 커다란 수박을 반 잘라서 들고 오셨다. “도배는 내가 해줘야 하는 디, 다 하고 나면 말 혀. 비용은 내가 줄 거여.” 우리는 수박을 먹으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쟁은 어떠 했나요?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지고 오던 꾸러미를 내려놓듯 퍼 대고 앉아 풀어 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정치를 모른다고 했다. 또 이 나라의 역사도 잘 모르고 글도 모른다고 했다. 매일 산을 타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쩔뚝바리 남자한테 시집이라고 와서 가족들의 밥을 챙겨주다가 늙어버렸다고 했다. 꿈이라는 건 모르고 컸다 했다. 어릴 때는 한 끼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고 가족이 배 곯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라 했다. 물론 지금도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다고 했다. 평생을 새벽시장에서 야채를 팔며 자식 둘을 키우고 아끼며 모은 돈으로 2층 주택을 마련했다고 했다. 그것이 할머니의 정치였고 왜곡이 없는 진실한 역사였다. 전쟁으로 혈육들을 잃고 형제들이 서로 적이 되어 갈리고 폭격으로 산천이 벌 둥지처럼 파였던 땅에서 풀 뿌리를 캐어 먹는 일이 먼저였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비일 비재 했지만 다 견뎌 냈 어도 배고픔만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풀 뿌리를 씹어 먹으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봄이 흘리는 눈물의 맛일 것이다.  조선전쟁만이 아니었다. 모든 전쟁은 기아로 이어지고 질병을 가져오고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며 전쟁은 또 일어날 것이다. 지금도 지구의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은 생명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앞에 놓인 문제이다. 아직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냉이의 그 눈물의 맛을 이해한다. 중국인민홍군의 2만5천리 장정의 굶주림을 기억하고 해방후의 대 약진을 기억한다. 풀 뿌리로 온 식구가 죽을 끓여 먹고 나면 또 들판에 나가 풀뿌리를 캤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형제들은 건강하게 커 왔다. 엄마는 우리에게 풀을 먹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게 엄마 식의 소박한 사랑이었다. ‘세계의 어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전쟁은 사라진다.’ 이 말은 어느 영화에서 들었던 구절인데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먹여 키워야 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풀 뿌리라도 캐서 먹였다. 어머니들은 사랑으로 키운 자식이 총알받이로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지만 지금까지 승리를 가져온 전쟁은 없었다. 전쟁으로는 죽음만 늘어나는 것이다. 삶은 죽음을 무시할 수 없다. 할머니의 남편은 전쟁 수난자였다. 지금도 총알이 다리에 박혀 있으며 걸음을 떼기 어려워한다. 나의 먼 친척의 할아버지는 총을 들고 인천까지 내려왔었다 했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그 할아버지의 고향은 여기 경상남도 밀양이었다. 그 분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평생을 고통속에서 보냈다고 했다.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전쟁은 배고픔을 말하지 않고 서로들의 보금자리를 폭격하고 나무와 풀을 남기지 않고 불로 태우는 것이었다. 전쟁은 땅이 기억하고 그 아픔과 슬픔은 땅 속의 모든 뿌리들에 스며 들었다. 냉이의 뿌리에도 스며 들었다. 저녁에 퇴근을 한 남편이 들어오며 집안에 풍기는 냄새에 싱글벙글 한다. 봄 냉이의 진한 향은 지금의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준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알칼리성 작물로 원기를 돋우고 피로 회복과 춘곤증에 좋다고 한다. 지혈과 산후출혈 등에 처방하는 약재로도 사용된다고 했다. 또 냉이로 밥도 하고 조림도 하고 튀김도 만들고 만두로도 만들 수 있어, 냉이는 우리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냉이로 여러가지 반찬을 만들어 사진을 찍어 모멘트에 올렸더니 하얼빈에 계시는 시인님이 막걸리 한잔 해라며 댓글을 달아 주셨다. 많은 친구들이 하트를 보내주었다. 냉이의 향이 산 넘고 바다 건너 고향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봄을 전했나 보다. 냉이의 원산지는 아세아와 유럽이지만 지금은 전 세계로 분포되어 있다. 어느 나라에서도 냉이는 식용으로 쓰인다. 이 세상 어머니들의 사랑 마냥 냉이는 모든 이들에게 애틋한 봄의 향기와 행복을 준다. 나는 이 봄날에 냉이를 읊는다. 냉이에서 엄마 냄새가 난다. 겨울 강 얼음 꽃 하얗게 필 때 새벽 길 걸으며 어디로 가는가 입술을 앙다물고 머리에 이고 잔등에 한 꾸러미 양손에 가득  어디로 가는가 가로등 울어 대고 거리도 적막한데 어디로 가려는가 설 자리 앉을 자리 없다고 가야 한다는  우리의 길을 찾아 가야 한다는  그렇게 겨울을 꼬박 걸어  이른 봄에 핀 냉이 꽃     '송화강문학지' 3호 발표 홍연숙 약력: 시, 수필, 소설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동포문학 시부문 우수상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현재 울산 거주. 동북아신문
135    강매화 시 화투놀이 (외 4수) 댓글:  조회:168  추천:0  2021-07-07
1、화투놀이 강매화   새된 북풍이 늙은 문풍지 울리면 오두막 밤을 깎는 파르르 소리 가냘픈 등잔에 불씨를 지펴놓는다     따끈한 아래목에 올방자 틀고  한바탕 화투판 벌여놓으면 긴 겨울밤은 외할머니의 가르마를 톺아오른다   우리 외손녀 얼른 커서 두둥실 공산명월처럼 밝고 사쿠라꽃길만 걸으라던 외할머니   마흔에 9남매 키우신 청상과부 비령감님 어서 데려가소 놀려주면 철없은 우스개에 쓴웃만 지으셨다   수줍은 달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 때면 각 떨어진 매화꽃 화투 쪽에  서글픈 외할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2、너를 위한 시를 쓰고 싶다        강매화   머리에 떠오르는  시들 넘어 너만을 위해 가슴으로 쓰고 싶다   머리는 늘 차가워도 네가 있어 늘 뜨거운 가슴으로 시를 쓰고 싶다   너만을 위한 시어가 되여 우리란 이름의 또 다른 풍경으로   물푸레나무에 머문 해살처럼 구름 우에 떠있는 산새소리처럼       3、우담화 (대련) 강매화   오늘 올가  래일 올가 그토록 애간장 태우더니 온다는 말도 없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나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 던지듯 내 마음 흔들며 하루밤 순정으로 영원을 불태운  사랑의 경전이여!       4、지나가는 아침비  강매화(대련)     예고도 없이  후두둑 후두둑 갑자기 내 마음 두드리네요    해님이 벌써 구름 제치고 나와  이제 또, 바로 떠나야 한다며  옷섶 부여잡고 헉헉 울먹이네요    바람에 등 떠밀려  적셔진 마음 그대로 둔 채 나뭇가지에 걸리고 풀잎에 치이며 아리랑 산고개 넘어가네요        5、홍시   대련/강매화     수줍은듯 살풋이 고개 숙이고  홍조 어린 얼굴 발가스레 달아오른다 손에 닿으면 터질듯 입에 넣으면 녹을듯    내님과 손잡을 그날을 내님과 입맞춤할 그날을  하루 하루  마음조이며 애타게 기다린다    노을은 저만치 지켜보고 있는데 바람은 곁에 와  살살 옆구리 간지르는데      [강매화 프로필]   흑룡강성 출생 흑룡강성 조선족 사범학교 졸업. 현재 대련시 옹달샘 한글학교 교사 료녕성 문학회 회원   문학활동: 한국 잡지《오늘의 가시문학》과《작가와 문학》,《료녕신문》《송화강》《연변녀성 》등에 수필,시 발표.
134    신념의 힘 댓글:  조회:324  추천:0  2021-07-06
신념의 힘 □ 김순희 다들 사람이 늙으면 회억 속에서 산다더니 이미 퇴직 할머니 신세가 된 나도 요즘엔 자주 지난날을 회억하게  된다. 요즘은 더우기 중국공산당 창건 100돐 이라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견강한 공산당원인 나의 존경하는 고모, 연변녀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원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녀련합회 제1임 주석 김찬해에 대한 회억 속에 빠지게 된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과 고모네 집은 앞뒤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여 우리 형제는 고모집을 매일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나의 인상 속에 고모네와 우리 부모는 떨어질 수 없이 극진한 사이였다. 고모는 저녁 퇴근 전에 먼저 우리 집에 들렸다가 갈 때도 많았다. 그들 사이는 언제나 그렇듯 할말이 그렇게도 많았다. 어린 나는 가까이에서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이야기가 많다. 오늘 나는 고모의 파란만장한 인생길에서의 몇가지 일들을 글로 적으려 한다. 고모 김찬해는 1905년 4월 21일 한국 김해에서 꽤 잘 사는 집의 장녀로 태여났다. 본명은 김필수이다. 고모가 태여날 때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을 점차 식민지로 전락시켜 갈 때였으며 봉건적인 남존녀비 사상이 조선 전체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8살 학교에 갈 나이가 되니  고모 김찬해는 다른 애들과 함께 할아버지가 꾸리는 서당에 공부하러 들어갔다가 녀자라는 리유로 가차없이 쫓겨났다. 그래도 공부하고 싶었던 고모는 서당 문턱가에 쪼그리고 않아 문틈으로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가면서 ‘도적’공부를 하였다. 고모는 머리를 빠금히 쳐들고  문틈으로 할아버지의  강의를 훔쳐보다가는 할아버지의 시선이 문가를 스치면 인차 몸을 사리곤 했다. 시간을 마친다는 훈장의 말이 떨어져서야 고모는 재빠르게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러다가 훈장이 다시 교실에 들어서면 고모도 또다시 문가로 다가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면 서당문 가에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떠날 념을 하지 않았다. 고모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고모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려고 찾으면 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시대에 그들은 고모가 서당 문가에서 ‘도적공부’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하루, 가게부를 정리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앉아있던 고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수판보다 빠르게 정답이 튕겨 나와 집식구들을 깜짝 놀래켰다. 그의 구지욕과 의력, 총기는 끝내 할아버지를 감동시켰다. 드디여 고모도 남존녀비의 문턱을  넘어 서당에서 마음껏 공부하게  되였다. 18살 되던 해 고모는 공부를 더 하려는 일념으로 봉건적 혼인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밤중에 가출하여 홀몸으로 산을 넘고 령을 지나 거의 반년동안 걸어서 서울에 갔다. 서울에서 고모는 고학으로 서울동덕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서울동덕녀자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반일 지하 공작에 참가하였다. 1926년 12월 5일 고모 김필수는 서울 락원동에서 녀성들의 대중적 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한 중앙녀자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3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위원으로, 같은 해 7월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8년 고모 김필수의 두드러진 활약과 표현에 조직에서는 그녀를 쏘련 모스크바동방대학 (모스크바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고모는 자기의 이름을 김씨 형제의 돌림자 찬(灿)자에 해(海)자를 넣어서 김찬해(金灿海)라고 고쳤다. 당시 모스크바는 세계혁명의 요람이였다. 모스크바동방대학은 각국의 혁명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꾸린 간부학교로서 우수한 혁명가들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체계적으로 맑스주의리론을 전수하는 동시에 기타지식과 기술도 배워주었다. 1928년 동방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조선반을 설치하여 고모는 첫기의 조선반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동방대학에서 고모는 중국에서 파견되여 간 림민호(원 연변대학 부교장)와 한반 동창으로 지냈다. 같이 학습하면서 감정을 싹틔운 그들은 자유련애로 1930년에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에는 귀여운 아들 마이를 보게 되였다. 고모는 동방대학에서의 4년간의 학습을 마치고 1932년 9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임무를 받고 모스크바를 떠나게 되였다. 고모는 당시 한살 반 밖에 안되는 첫애를 모스크바 국제고아원(외국 혁명자들의 자녀를 수용하는 곳)에 맡기였다. 고아원 외 더 좋은 곳은 없었다. 국경을 넘나들며 혁명하는 지하공작자가 아기를 업고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되였다. 한살 반이면 아기가 어머니를 알아보고  간단한 말도 하며 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이고 모자간의 정이 푹 든 때이다. 아기와의 가슴아픈 리별을 고려하여 애가 잠이 든 시간을 택하여 고아원에 맡기려 하였는데 그날따라 아기도 무슨 기미를 알아 차렸는지 자지 않고 어머니를 꼭 붙잡고  보채였다.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보채는 아들을 보는 고모의 마음도 리별의 아픔으로 모대기였다. 고모는 떨어지는 눈물을 속으로 삼키고 예정대로 아들 김마이를 고아원 원장에게 넘겨주었다. 고모는 지하공작자이기에 아들의 이름과 자기 본인의 성은 고아원에 남길 수 있었지만 애아버지는 비밀로 되였다. 하여 중국에서 태여난 고모의 다른 아들들의 성은 림씨지만, 마이만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되였었다. 마이는 어머니의 품에서 낯선 사람의 손으로 넘겨지는 순간 어머니를 붙잡으려고  두손을 휘저으며 벌버둥치며 울어대기 시작했는데 온 얼굴이 눈물인지 코물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범벅이 되였다. 원장이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한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다 못해 얼굴색까지  하얗게 질리며 기절 할 지경으로 보채였다. 강의한 의력의 소유자인 어머니를 닮아 그런지 아들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일체를 바치려고 결심하고 견강하게 살아온 고모였지만 그도 어머니인지라 모성애로 인해 마음속으로부터 그 무슨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도 생리별의 아픔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잠간 주춤하다가 이를 옥물고 돌아 보지도 않고 곧게 혁명의 길에 올랐다. 그렇게 그녀는  혁명을 위하여 자신의 살붙이와 생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들을 떼 놓은 날 저녁 그녀는 잠들래야 잠들 수 없었다. 아들의 결사적이고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하냥 귀전에서 맴돌아 쳤고 아들의 애처로운 마지막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고모의 이 이야기를 어릴때부터 들어왔다. 그때는 어려서 고모는 혁명가이니 의례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나도 어머니가 되여보니 고모의 그 생살 도려내는 듯한 마음을  리해 할 수 있게 됐으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아들 김마이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의 생리별로 그친 것이 아니였다. 1933년 가을에 고모는 정황을 회보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 홀몸으로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가 임무를 받고 다시 함흥으로 돌아와 이름을 최성려라고 고치고 농사군 차림을 하고 홍색로조사업을 했다. 갔던 바엔 모스크바에 가서 아들을 볼 생각이 간절했을 법도 한데 듣는 말에 의하면 고모는 모스크바에 가지 않고 임무를 받은 즉시로 돌아왔다 한다. 후에 조직의 파견으로 1934년 10월에 모스크바에 가서 비밀 임무를 맡았다. 모스크바에로 떠나기 전부터 고모는 너무나도 아들이 보고 싶었다. 아들을 고아원에 두고 온지도 어언 2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어머니로서 그녀는 자기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마이는 지금쯤 얼마나 컸을가? 자식이란 왜 이다지도 엄마의 가슴을 후벼파는지? 견강한 공산주의 전사이지만 아들을 보고싶은 마음은 억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모는 또 한번 치밀어 오르는 모성애를 가슴속에 묻고 말았다. 어느 한번 나의 어머니가 왜서  문앞까지 갔다가 아들도 보지 않았는가 물으니 고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공작자였던 고모는 당의 비밀을 절대적으로 고수한다. 시기가 성숙되기 전에는 그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의 고모- 한 지하공작자의 풍격이였다. 하여 그가 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 원인은 그 누구도 모른다. 아마도 혁명을 위해서였으리라고 리해한다. 사람들은 녀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한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강한 엄마도 신념 앞에서는 자기의 모성애를 희생했다. 공산당원 앞에서 신념은 모성애를 뛰여넘었다. 고모는 마이와 생리별 후 얼마나 가슴 아팠을가? 어릴 적에 엄마와 생리별하고 아버지의 성조차 가지지 못한 김마이의 감정세계 또한 어떠했을가. 모스크바에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후 고모는 계속 목숨을 내걸고 반일투쟁을 하다가 3년 반이나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1941년1월 중국에 온 후에도 여전히 신념을 굽히지 않고 반일 투쟁을 견지하다가 또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했다.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 나온 후에도 고모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중국해방전쟁에 뛰여 들었으며  해방후에도 사회주의 건설에 힘다하였다. 고모는 목숨을 내걸고 혁명한 혁명가로서 견강하고 완강한 의력의 소유자이며 호걸다운 풍도가 있다. 그러면서도 고모는 다정다감 하고 인정미가 짙은 선량하고 소박한 녀성이였다. 고모는 고위급 간부로 근무하였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질고를 먼저 생각했다. 어느 하루 어둠이 드리울 저녁 무렵 나와 고모는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허리가 휜 할머니 한분이 길옆에서 가지, 고추등 채소를 놓고 사람들이 사가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고모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할머니와 몇마디 주고 받더니 할머니 앞의 채소를 몽땅 사겠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 가라고 하면서 인정스럽게 할머니를 바래였다. 내가 왜 이많은 채소를 다 사는가고 물으니 고모의 말씀이 할머니의 집이 먼데 빨리 집으로 가야지 하는 것이였다. 할머니를 보내기 위하여 고모는 그 채소들을 다 사서 우리 집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모는 7남매중의 맏이였다. 맏이인만큼 고모는 친동생인 우리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했으며 우리 어머니를 친자매처럼 생각했다. 또한 조카인 우리를 여간만 사랑한 것이 아니였다. 언제나 우리들의 성장을 관심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건설의 후계자가 되라고 정확한 인도를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돈인 우리 외가집들과도 한집안 식구처럼 화목하게 지냈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머니한테서 고모를 탄복하는 말을 많이 들어 왔으며 이런 시누이가 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말을 많이 들어 왔다. 우리 삼형제도 이런 고모가 한분만 더 계셔도 얼마나 좋겠는가 하였다. 이런 화기애애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나는 시누이와 올케, 고모와 조카의 관계는 다 이렇게 화목한가 하고 천진하게만 여겼다. 고모는 연변녀성의 최고 수장으로 사업하였기에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고모가 직접 해결해주고 도와준 사람도 많다. 가끔은 이런 분들이 인사로 선물을 들고 오면 고모는 절대 받지 않거나, 막부득이한 경우에는 돈을 드리거나 직접 드리지 못할 경우에는 부쳐보내기도 했다. 나는 고모가 주는 것만 보았지 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껴입고 아껴먹으며 절약한 돈으로 생활이 곤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만 보고 들었다. 이것 역시 당시 혁명가와 령도 간부들의 풍격이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는 공산당원의 작풍이였다. 고모의 좌우명은 “나라에 리롭다면 생사를 가리지 않으려니, 어찌 화를 피해 복만 받으려고 애쓰랴.”이다. 실로 대의에 살고 죽는 녀걸다운 호쾌한 멋을 풍기는 우리 당의 견강한 공산당원이다. 파란만장한 인생길에서 그 어떤 역경 속에서든지 그녀는 시종일관하게 당을 믿었으며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고모는 실로 명실이 부합되는 존경스러운 혁명가였다. 운명에 굴하지 않는 정신, 확고한 신념, 개인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걸어 온 길,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는 자기희생정신, 령도간부로서 청렴한 작풍, 혁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일체를 헌신하는 기백, 인간관계에서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을 소유하고 있는 고모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생각된다. 고모 김찬해는 명실이 부합되는 우수한 공산당원이였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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