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버지는 여느때와 달리 말 한마디 없이 부지런히 수저만 움직이더니 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아, 니가 좀 나가봐라.”
“우리 박녀사께서 웬 일이래? 늘그막에 누가 남편 훔쳐갈가 봐 걱정이 되나요? 글고 나 아직 밥 먹고 있잖아.”
“한두번도 아니고 이번엔 벌써 세번째라니께, 세살 먹은 얼라도 다 부르겠다. 맨날 3절에서 막힌다잖아. 바보 아니면 치매환잔가?”
“엄마도 참, 치매는 무슨, 맨날 깜빡깜빡하는 엄마보단 아버지 기억력이 훨 낫고만.”
“그럼 왜 그런긴데, 한국에서 산 지 20년이 넘었으니 그 사이에 귀화를 해도 열두번도 더했을 것을.”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닐가?”
아버지는 엄마 등쌀에 밀려 오늘 낮에 귀화신청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한국 국가를 부르다가 3절에서 그만 막혀서 통과를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집 맞은편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습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있어서 멀리에서도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눈처럼 하얀 양말도 유표합니다. 랠모레 일흔이지만 날렵한 턱선과 별로 주름이 없는 얼굴 피부 덕분에 아버지는 얼핏 보기엔 50대 후반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많이 작아졌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부피가 줄은 밀가루포대처럼 홀쭉합니다. 내 눈길은 저도 모르게 벤치 우에 놓인 아버지의 손에 가 머무릅니다. 십년 전 아버지는 일을 하다 기계에 손가락 한개를 잃었습니다. 오른손 식지입니다.
“거 우리 뒤집 춘자네 있지……”
아버지는 뜬금없이 고향 얘기를 꺼냅니다. 아버지 만큼 고향사람들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기억력도 어찌나 비상한지 몇십년 전 이야기를 마치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할 때면 아라비안나이트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지요. 이런 아버지를 치매환자 취급을 하다니요? 귀화를 독촉하는 어머니의 잔소리 만큼이나 근래에 아버지는 부쩍 고향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의 아버지 백태호로 놓고 말하면 젊었을 때는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만큼 날파람 있고 힘이 장사였습니다. 넘쳐나는 젊음의 혈기를 다 소모하지 않고선 도저히 주체할 길이 없었나 봅니다. 마을의 싸움판에는 늘 아버지의 모습이 빠지지 않았고 아버지로서는 또 언제나 그랬듯이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습니다. 의리를 위한 것이라든가 정의를 위한 것이라든가 아니면 뭐 눈꼴이 시여서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든가 그때 마침 기분이 개떡 같았다든가 등등 나름 리유가 충분했습니다.
사고가 터지고 사태가 조금 잠잠해졌다 싶으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집으로 기여들어왔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말을 빈다면. 너덜너덜해진 옷을 뻔뻔스럽게 척 내밀었답니다. 추종자들인 동생들의 옷까지 들고 와서 기워달라고 할 때면 삯바느질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찢어진 옷보다 더 나달나달해졌다고 합니다. 그렇긴 해도 평소에 아버지는 멋쟁이였죠. 바지는 항상 칼주름을 내서 입었고 양말은 주구장창 하얀색만 고집을 했습니다.
제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무렵 아버지는 동네 어린이들에게 장난을 치는 게 취미였습니다. 길을 가다 모래더미에서 놀고 있는 사내아이들이 눈에 띄면 너 이놈, 이리 와봐라, 내가 호신술을 가르쳐줄게, 하면서 돌려차기도 가르치고 치고 박는 ‘무예’를 가르쳤지요. 애들의 얼굴이 발개지면서 때국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요 정도로 이렇게 숨이 차서야 되겠냐? 내가 힘 세지는 비법을 가르쳐주지, 하고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애들에게 말합니다. 밥에다가 모래 한숟가락 푹 넣어서 비벼먹으면 힘장사가 되는기라.
“캬, 성일이 그 자슥 인물이더라, 다른 애들은 한숟가락 먹고는 퉤퉤 하며 똥 씹은 표정인데 그노무 자슥은 우물우물 하면서도 한그릇을 다 비우더라니까.”
이건 제가 아버지한테서 직접 들은 얘깁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고놈한텐 특별히 몇가지 동작을 더 가르쳐줬지, 돌놈이야, 돌놈.”
이런 장난은 아버지에겐 일상이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아버지는 이런 방식으로 한 반에 다니는 어리숙한 남학생을 골탕 먹였다고 합니다. 대놓고 이상한 걸 먹으라고 하기엔 상대는 이미 성숙된 나이였죠, 이번에는 다른 수법을 씁니다. 그 남학생은 공짜라면 양재물도 들이킬 위인이였거든요. 아버지는 어느 날 같이 숙제를 하자며 집으로 데려와서는 발뒤축의 투명한 굳은 살을 면도칼로 살살 도려내서 고무사탕이라며 그 애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뭐야? 왜 이렇게 질겨? 글구 이거 냄새가 이상한데.”
“더 씹어, 오래오래 씹으면 단맛이 난다니까.”
아버지는 그 애의 얼굴을 면전에서 바라보면서 능청스럽게 시물시물 웃었다고 합니다. 뭐 단물 빠진 껌도 아니고 씹다 씹다 구역질이 올라와서 그 애는 결국 뱉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이튿날로 학교에는 소문이 파다했죠. 누구는 태호 발뒤축 굳은살 먹은 애라고.
“야, 넌 무신 놈 애가 머리가 그따구로 돌아가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뭐라고 해도 아버지는 태연합니다.
“남이사 전보대로 이발을 쑤시든, 남이사 눈깔을 빼서 다마치기를 하든.”
아버지의 이 말버릇은 한때 친구들 사이에서 류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소신이 확실한 사람이였거든요.
“저놈의 자슥은 언제 사람구실 하겠냐? 저래서 장가나 들겠냐?”
할아버지의 잔소리 아닌 걱정이였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보기 좋게 펀치를 날렸죠. 친구인 성일이네 삼촌 큰집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사촌녀동생을 단박에 꼬셔버렸답니다. 박선녀, 생전 해볕이라고는 쬔 적 없는 사람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저의 엄마는 우로는 그림만 그리는 오빠와 아래로는 책벌레인 남동생 사이에서 소외감을 지니고 있던 차 갑자기 어떤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내가 먹여 살리지요 하는 말에 큰 위로를 느꼈나 봅니다. 술주정뱅이인 저의 외할아버지로부터 한시 급히 도망치고 싶었던 엄마에게 아버지는 최상의 피난처였죠. 며칠 후 두번째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엄마는 언제 또 와요? 하고 조바심을 내며 시집 갈 마음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오케이하면 바로 보따리 싸들고 따라갈 기세였죠. 결혼은 가타부타 말없이 진행이 되였습니다.
결혼이란 걸 하고 달덩이 같은 저를 낳고도 한참 지나서야 아버지는 사람 패는 걸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로는 장작을 팼냐구요? 천만에요. 제가 대여섯 될 때라고 기억되는데, 아버지는 헛간에다 모래주머니를 달아매놓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련습하군 했습니다. 벽에다는 두께가 3센치가량 되는 나무판을 붙여놓고 틈만 나면 거기에다 대고 내 주먹이 세나 나무판자가 세나 내기를 하군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주먹은 가죽이 벗겨져 피가 흘렀죠. 이 짓은 꽤 오래동안 지속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권투선수라도 되려는 줄 알았습니다. 가끔 저는 링에 올라서 상대선수와 죽도록 주먹을 휘두르면서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피투성이 된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승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흡족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이날 이때까지도 권투선수는커녕 스포츠채널의 권투경기조차 구경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권투라는 스포츠종목이 존재하는 걸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백태호씨의 휘황한 력사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제가 태여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죠. 어느 핸가 아버지는 쇠꼬챙이로 금고(이불장에 딸린 서랍) 자물쇠를 열고 할아버지가 서랍에 고이 모셔둔 현금중에서 200원이란 거금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기 한참 전이라 일 년 농사수입이 몇백원이던 시절이였다고 합니다. 일곱 식구의 밥줄인 그 돈을 훔쳐서 사라진 아버지가 며칠 후에 벽돌장보다 조금 큰 요상한 물건을 들고 집에 나타났습니다.
“이노무새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기여들어와!”
마침 식사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대로 비자루를 아버지의 면상에 뿌렸고 아버지는 막 문턱을 넘어서려다 후닥닥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렸습니다. 그 순간에 숟가락이 아닌 비자루를 집어던지신 걸 보면 할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비자루의 면적이 숟가락보다 커서 아버지를 명중할 확률이 높을 거란 계산을 했던 모양입니다.
“집안 말아먹을 노무시키,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톰과 제리처럼 부자간에 한바탕 쫓고 쫓기는 소동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식구들은 그 요상한 물건을 구들 한복판에 놓고 빙 둘러앉았습니다.
“요게 뭣이렷다?”
“아버지, 요게 록음기라는 건데요, 참 희한한 물건이지요. 요걸 누르면 이 안에 있는 테프에서 노래가 나오고요, 요 단추를 누르면 아버지께서 방금 하신 말씀이 다 록음이 된다니께요.”
“그래 이게 일년 농사 맞잡이라더냐?”
“아무렴요, 이게 현대화의 산물인데 우리 마을에선 아마 제가 첫 사람으로 샀을 겁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요. 지금 한창 류행하는 노래들이 요 안에 다 들어있어요. 사람은 늘 앞서가야 합니다, 아버지!”
워낙에 음주가무에 능하신 할아버지는 그만 록음기의 마술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정든 땅 언덕 우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밖에 나가 길쌈을 매고’ 하면서 을 흥얼거리게 되였으니까요. 덕분에 제가 태여나서 제일 처음 배운 노래는 ‘우리 엄마 기쁘게 한번 웃으면’ 이런 노래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이였지요. 술 한 잔 걸친 날이면 아버지는 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아, 물레방아 도는 래력 한번 불러보거라.”
네, 저의 아버지는 제 이름을 백한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백한이라는 이름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째는 아들을 만들려고 저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줬나 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몇년 후 저에겐 녀동생이 생겼고 아버지는 여리여리한 녀동생에게 백조라는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저에게 백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명이 떨어지면 저의 입에선 자동으로 이 흘러나왔습니다. 록음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아버지, 고모 삼촌들이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는 밤이면 저는 밤새도록 곁에 앉아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을 부르고 또 불렀죠.
벼슬도 싫다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우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밖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새들이 우는 속’인데 저는 그 앞부분에 포인트를 두고 불렀습니다. ‘새끼 꼬면서’ 요 부분에서 꼬는 꼬오로 한음절 더 빼주다가 면에서 고개를 45도 각으로 돌리고 뒤로 젖히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올리막을 올라갑니다. ‘새끼이 꼬오 며언서’, 이러는 저의 모습이 귀여워죽겠다며 집안에는 웃음이 때그르르 구르죠. 저는 벼슬이 뭔지, 명예가 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그런 건가요, 전 이날 이때까지 겨자씨만한 벼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태여난 후 아버지의 쌀개는 기질은 잠시 주춤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새로운 놀이가 된 거죠.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아버지는 저에게 ‘곤디’를 시켰습니다. 제 돌잔치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아버지 손바닥 우에서 제가 한쪽 다리로 서서 춤을 추는 것이였습니다. “곤디, 곤디, 잘한다!” 하는 아버지의 구령에 맞춰 저는 좌우로 평형을 잡으며 참 오래도 서있었죠. 그 후에는요? 제가 이 곤디놀이에 조금 시들해질 무렵에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둥가타령을 불렀는데 저는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춤을 춰야 했답니다.
둥가 둥가 둥가야 부뚜막에서 시어머니 시며느리 방귀 뀌는데/
시아버지 놀라서 담배통 들고 시며느리 놀라서 앞치마 비트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의 타령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 그건 정말 고역이였습니다. 아버지의 노래가 다섯번쯤 되풀이될 때면 팔이 끊어질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지만 노래가 멈추기 전에는 절대로 팔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는 걸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이런 날은 저의 재난의 날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저는 역시 포기를 모르는 백태호의 딸이였지요. 이불장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빈 자루처럼 푹 한쪽으로 쓰러질 때까지 저는 공기를 빵빵하게 채워넣은 스카이댄서처럼 두 팔을 너풀거려야 했습니다.
덕분일가요? 소학교 때 학교에서 원족이라는 걸 가게 되면 저는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비자루를 들고 핫, 핫 하면서 무예랍시고 멋있어보이는 동작을 선보였죠. 그때 한창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던 향항드라마 《곽원갑》의 주제가를 고쳐서 ‘헌 쓰레받기, 노란 빗잘기………’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말입니다.
제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였을 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또 한번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동안에는 띵가띵가 놀면서도 할아버지가 무서워 농사일을 따라하는 흉내라도 냈었는데 이번엔 아예 삽을 내팽겨쳐버린 거죠.
“아버지, 저는 농사군이 싫습니다. 아버지처럼 평생 땅 뚜져봐야 돈 몇푼 벌겠어요? 저는 큰돈을 벌어 신세 고칠랍니다.”
“이노무시키가 미쳤구나, 지한테 차례진 밥통을 스스로 차 던지고 날아다니는 돈을 잡겠다고? 돈이 눈이 멀었다더냐?”
할아버지가 길길이 뛰였지만 호기롭게 선언을 한 아버지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장사거리를 찾아다녔지요. 우연히 신문에서 목돈을 벌 수 있는 거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거니,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것이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그를 데 없군. 그 사업이란 바로 지렁이를 키우는 겁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지체없이 지렁이 양식사업에 착수했죠. 그 사업 밑천도 할아버지의 서랍에서 ‘절도’해온 것인지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농촌엔 흔한 게 지렁이가 아니던가요?
신문에 난 기사는 누가 봐도 귀가 솔깃할 법했습니다. 지렁이는 단백질덩어리라 보약으로 쓰인다고 했습니다. 먹이 또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농촌의 변소 주변이나 길가에 흔해빠진 소똥을 주어다가 먹이면 통통하게 자랄 거니까요. 그야말로 밑천이 들지 않는 사업이였습니다. 백조를 임신해서 남산만한 배를 부여잡고 뚱기적거리며 걷는 엄마의 거세찬 반대에도 아버지는 꿋꿋하게 일을 추진해나갔습니다. 손수 톱으로 나무를 켜서 지렁이를 키울 나무상자를 여러개 만들고 톱밥과 흙으로 상자를 꽉 채웠죠. 아버지는 집의 안방 바닥과 정주간에 나무상자를 전부 들였습니다. 이번에는 삽을 들고 지렁이를 파러 다녔고 그다음에는 소똥을 주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어온 소똥은 비닐로 정성스레 덮어서 푹 삭힙니다. 지렁이가 자라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선 소똥을 잘 삭히는 것이 관건이라고 들었거든요. 한동안 저의 집에는 소똥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공기 립자 속에는 소똥이 알알이 박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대체 사람 사는 집인지 마구간인지 분간을 못하겠네. 애가 태여나면 쇠구유에서 여물을 먹이게 생겼어.”
박선녀씨는 매일 바가지를 긁었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곧 태여날 둘째를 위해서라도 목돈을 벌어야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거부기 등껍질처럼 단단했습니다.
잘 삭혀진 소똥을 먹은 지렁이는 똥을 누는데 그것이 흙을 부들부들하게 만드는 작용을 합니다. 그 부들부들한 흙 속에서 지렁이는 제 새끼손가락만 하게 통통하게 자랐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미물이지요. 자기가 싼 똥 속에서 더 건강하게 자라다니요. 예닐곱 살 된 저는 나무상자 안에서 득실거리는 지렁이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손으로 잡아서 아버지 몰래 닭에게 먹이군 하였습니다. 역시 지렁이의 최고의 사랑은 닭들입니다. 지렁이를 던져주면 닭들은 부리나케 달려와서 서로 뺏을내기를 했지요. 나중에는 제가 지렁이를 들고 마당에 나타나면 닭들이 저를 둥그렇게 포위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기겁을 했죠.
“한이 저노무 지지배는 뭐가 될라꼬 겁도 없이 저러노.”
아버지는 아까운 걸 왜 닭에게 먹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지렁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삼사개월 지속되였습니다. 하지만 지렁이를 사서 약재로 쓰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포동포동 살이 오른 지렁이를 닭모이용으로 이웃집에 나눠주고 고작 닭알 몇알 얻어오거나 낚시미끼로 쓰라고 나눠주고 애들 손바닥만한 붕어새끼 몇마리 얻어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것으로 아버지의 지렁이 양식사업은 총망히 막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동생 백조가 우렁찬 목소리로 이 세상에 왔노라고 신고식을 했을 때 지렁이는 이미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습니다.
할아버지 말씀 대로 착실하게 농사나 지을 것이지 날아다니는 돈 붙잡겠다고 설치다가 된통 당한 꼴이 되였지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 백태호가 누굽니까? 한번 백사장이란 말을 듣자 다시는 백태호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였지요.
이번에 아버지는 신문에서 유리섬유 사업이 돈을 번다는 광고를 접했습니다. 이게 절호의 기회다. 사내대장부가 한번 사업 망했다고 겁을 먹을 필요가 있나. 이번에는 내 기필코 성공하고야 말리다. 아버지는 또 례의 그 한마디, 내가 먹여 살릴게 하는 말로 박선녀씨를 구슬려 유리실공장을 차리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고향에서 수백리 떨어진 큰할아버지가 사는 고장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저 반드시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호기롭게 할아버지에게 장담했습니다.
“아이구, 외지에 가서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냐? 이 어린것들을 데리고.”
할머니가 치마자락으로 눈굽을 찍었지만 저는 기차를 타고 먼길을 떠나 곧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올랐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꼬깃꼬깃한 돈을 바지주머니 속에 꼭 넣어두고 몇번이나 확인을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큰할아버지네 집 서쪽칸에 짐을 풀었습니다. 아버지는 빈집을 하나 임대하여 기계를 들이고 유리실공장 공장장이자 사장이 되였습니다. 공장에 출근하는 직원들은 대개가 스무 살을 금방 넘긴 이십대 초반의 남녀들인데 그들은 쉬는 시간이면 둘러앉아서 포커를 쳤습니다. 가끔 남자들이 이기면 꼴찌를 한 녀자에게 뽀뽀를 하자고 떼를 쓰기도 했지요. 저는 문 뒤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정작 남자의 입이 녀자 얼굴과 겹쳐지려고 하는 순간이면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서 되돌아서 집을 향해 달렸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먹었으니 한턱 내러 가야지.” 하면서 변소로 가기 위해 뒤문으로 향합니다. 그러면 큰할머니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아버지를 따라 뒤문께로 갑니다.
“야야, 또 누구한테 한턱 내노? 돈 헤프게 쓰지 말거래이.”
“아이고, 큰엄니도 참, 똥 눈다는 소릴 저렇게 하는 기래요.”
옆에서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아버지의 롱담을 알아듣기까지 큰할머니에겐 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는 중고차를 몰고 다니며 동네의 유리병이란 유리병은 다 거두어왔습니다. 너네 아버지 페물 줏는 사람이가? 새 친구들이 이상한 눈길로 전학생인 나를 쳐다보며 묻습니다. 아니거든, 우리 아버진 유리실공장 사장이야. 유리로 된 거 가져오면 우리 아버지가 돈 준다, 깨진거든 안 깨진거든 다 돈으로 쳐준다. 정말? 그럼. 그걸 다시 뿌사서 유리실 뽑는다. 저는 우쭐해서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제 집에 있는 유리로 된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들고 와서 유리실공장 앞에 줄을 섰습니다. 몇몇 남자아이들은 학교 창문틀 유리를 빼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반성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리용기란 용기는 죄다 구경했습니다. 앙증맞은 통졸임병도 있고 목이 기다란 술병도 있고 채색의 꽃병도 있고 그릇도 있고 재떨이도 있고 어항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거울처럼 투명했지만 어떤 것은 안에 오물이 들어가있기도 했고 병 뚜껑이며 나무꼬챙이, 신문지 조각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직원을 시켜 그것들을 깨끗이 씻어서 큰 가마에 넣고 고온으로 녹입니다. 엿을 달이듯이. 그다음에 그걸 기계에 넣고 기계를 작동시키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은빛의 섬유가 되여 쏟아져나옵니다. 아버지는 은빛에 도취되여 휘청합니다. 이번에는 판로도 아주 넓었습니다. 유리섬유가 사용되는 령역이 그만큼 넓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고객들을 찾아 나서서 니디워디 하며 어설픈 중국어로 한족들과 대화를 나누었죠. 술이 둬순배 들어가고 따꺼, 쓩띠 하면서 술상이 여름 참외 익듯이 무르익으면 아버지는 벌써 주머니에 돈이 두둑이 들어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다음날에 찾아가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유리섬유가 쌓이는 만큼 아버지의 주량도 자꾸 늘었지만 결국 유리섬유는 몇톤 팔지 못했지요. 팔리지 못한 유리섬유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였습니다. 이건 뭐 지렁이처럼 닭에게 먹일 수도 없고 낚시바늘에 꿰서 물고기를 유혹할 수도 없는 거였죠.
어머니는 새파랗게 도끼눈을 해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먹여 살린다 했잖아, 이제 어쩔긴데? 손가락 빨라고?”
“녀편네가 하는 것도 없이 자꾸 징징대니까 일이 안되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내가 왜 하는 일이 없어? 애 키우랴, 밥 하랴, 채소 심으랴, 온갖 일을 다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어머니는 쓰리잡을 하셨죠.
“이걸 그냥 콱!”
아버지는 어머니를 벽 구석으로 몰아가 단단히 한대 칠 듯이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픽 웃으며 내려놓습니다.
“쬐꼬마해서 어디 때릴 곳도 없네.”
“먹여 살리지도 못하면서 왜 결혼하자고 해서 생고생을 시켜? 분통 터져서 내가 담 생에는 썩은 고추라도 달고 태여나야지.”
만 두살이 좀 넘은, 열심히 말을 배우는 백조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썩은 고추 싫어, 난 썩은 고추 싫어.”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팔자야! 저 인간을 믿고 내가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어머니는 방에 퍼더버리고 앉아 백조를 끌어안고 웁니다. 그때 아마도 저는 남자들이란 믿을 족속이 못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중학생이 되였고 집이 없는 우리는 할머니네 집에 얹혀살게 되였습니다.
“내 원 남사스러워서 못살겠다.”
할아버지의 경멸에 찬 눈빛 앞에서도 아버지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거 사내새끼로 한번 태여났으면 실패란 것도 해봐야죠.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으셨어도 어디 해마다 잘되던가요? 풍년 들 때도 있고 흉년 들 때도 있었잖아요.”
그러면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날렵하게 비자루를 쌩 하고 날립니다.
그 즈음 아버지는 늘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요.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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