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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연변시인협회 당창건 100돐 맞이 현지창작 시특집] 댓글:  조회:287  추천:0  2021-07-02
  팔도촌의 느티나무 -당창건 백돐에 삼가 바치노라! □ 김학송   1 해살로 속삭이는 고목의 입술 바람으로 열린 고목의 귀 희망의 전야를 보듬어주는 고목의 푸른 웃음소리   2 낫과 마치 새겨진 기발을 향해 경건히 고개 숙인 느티나무   100년의 해살을 한 허리에 두르고 룡봉이 되어 나래 펼친 느티나무   구수하의 노래에 박자 맞춰 태양을 향해 춤을 추는 느티나무   곱게 열린 시인들의 귀가에 이 땅의 전설을 속삭이는 느티나무   3 불서러운 오봉산의 통곡소리를 이 나무는 들었다고 합니다   그날의 투사들의 의로운 눈빛을 이 나무는 보았다고 합니다   백년고목이 추켜든 그날의 기발은 눈부신 노을이 되여 대지의 깊은 꿈을 덮어줍니다     민들레 -팔도촌 혁명렬사기념비 앞에서 □ 최옥란   “꼭 돌아 오겠소. 어린애와 로모를 잘 부탁하오” 그 한마디 남기고 가시밭 언덕길 넘어간지 몇해이런가   망돌같은 가슴에 한숨이 피여나도록 갈기갈기 찢어진 몽당치마   반신불수 로모 병 시중 들고 물아기 밭머리에 눕혀놓고 콩밭 매던 설음 그 얼마였던가   가냘픈 어머니 산자락에 모셔놓고 어린 자식 홀씨 되어 훨훨 꿈 찾아 가고 부서지는 해빛 아래 홀로 앉은 민들레   스치는 실바람에도 소스라쳐 퀭한 눈 헐도록 전쟁터로 떠난 님 길 잃을가 봐 뿌리 내린 망부석.     울밑 도라지 말을 걸어오네 □ 최기자   백년전설이 감도는 도끼봉자락에서 어설피 시 찾아 헤매는데 반신을 묻어 진액 빚어가는 이주살이 울밑 도라지가 옷깃 세워 빤히 쳐다보며 쓰겁게 말을 걸어오네   헤맨다고 찾아지고 줏는다고 시가 되나   이 마을 두그루 느티나무 룡으로 봉으로 날개 펴기까지 뿌리 지켜 풍진세월 백년일세 허리 꺾이고 머리 눌리고 창자 꼬이고 뼈가 탈리며   어정쩡 문학인생 몇고개라 퍼렇게 고독 세우고 혼돈을 살아내게나 빼빼 마른 시상 서둘러 살지우게나 모질게 감성을 앓으며 처녀지에서 시어 낳아가노라면   렴치없이 퍼붓는 소낙비 피치 않고 고스란히 맞아가며 울밑 도라지가 한 수 던져주는데     팔도촌 룡봉나무 □ 리종화   강산이 열번 바뀌는 한세기를 살아오며 수없는 비바람 맞고 수많은 전설 보아왔소   마을의 평안을 지키느라 굽이굽이 굽어진 허리, 푸른 갈기 날리는 청룡으로 하늘을 비상하는 봉황이 되였소   바람세찬 언덕배기 저 멀리 흰 렬사비 바라 볼 때마다 고히 잠든 선렬들이 떠올라 소리없이 눈물도 뿌렸소   낮이면 푸른 잎새 해빛 굴리며 변모한 팔도촌을 자랑하고 밤이면 별이 된 충혼들과 눈빛 맞춰 그들의 순국의 지조 기리였소   날따라 비약하는 팔도촌의 산뜻한 모습 대견스럽고, 청정한 팔도골이 자랑스러워 백년을 천년을 더 살고싶소.     팔도 마을 □ 김영능   굽이굽이 구수하 감돌아 푸르고 푸른 오봉산기슭 팔도강산 백년 마을   백년의 거리는 새단장 새기상 백년의 교회당 옛모습 옛자태 종소리도 늙지 않고 우람찬데   백년의 페교 너무도 허름하여 글읽는 소리 들리지 않고 운동장에 잣나무만 차렷 자세   백년의 장마당 날따라 흥성하고 백년 느티나무 풍도가 름름하여 도기봉 치솟아 서슬이 도도하니   백두의 기상 천지의 얼 박달의 혼이 어리였는가   독한 술 반주하여 불러 넘기는 백년중학 교가 가슴에 모닥불을 지핀다     백년 전에 왔던 나그네들 □ 신철호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아무도 살지 않았던 이곳에 백년전 무릎 넘는 눈길을 헤치며 흰옷을 입고 찾아와서   먼 곳에 두고온 고향의 한을 지게에 무겁게 지고 하늘을 열고 땅을  열어 새 천지 만들던 나그네들   굽이굽이 흘러 흐르는 구수하 따라 버들이 우거진 넓은 이 벌판에 무거운 구리종의  은은한 소리를 사방에 울려 새벽을 깨우며   가지 여린 느티나무 부여잡고 계몽의 글소리 랑랑하게 들려주고 짚신감발이 분주하는 시장거리에서 갱생의 북장구 힘있게 치던 나그네들   오는 사람마다 정들어 짐을 풀어놓고 열망의 땀으로 억척스레 걸군 이 땅에 고향을 빠앗았던 무리들의 흉악한 마수가 또다시 피비린 바람 몰고 올 때   이에는 이로 총칼에는 총칼로 맞서 뒤길이 더 없는 마지막 고개 지키다가 눈속의 매화같은 선혈이 핀 두루마기 날리며 검은 연기 타고 산화한 불멸의 나그네들   백년의 세월은 그들의 위명을 꿋꿋이 지켜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룡처럼 머리를 들고 있고 우람한 구리종은 굵은 소리를 품고 있고 기념비는 붉은 별의 넋을 창공에 빛 뿌린다   백년전 황량한 이곳을 처음 찾아왔던 나그네들 이 땅의 맨 먼저 주인이 되였던 나그네들 이 산과 이 들과 이 강의 혈맥이 된 나그네들 아~ 그 나그네들! 잊지 못할 우리의 할아버지들이여!     구수하정(情) □ 리기춘   백년을 흐르고 흘러도 구수하는 흐르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   말쑥한 강바닥의 모래와 조약돌이 붙잡고 놓지 않아 못가는 건 아닌데   조상의 발자취가 력력한 푸른 언덕 떠나기 아쉬워서 가지 못하는가   항일투사의 넋이 숨쉬는 오봉산에 처절히 감겨 들어 가지 못하는가   고향정이 하얗게 출렁이는 강이여 눈물젖은 전설이 굽이치는 강이여   바다의 유혹을 물결에 실어 보내고 세월이 아무리 끌어 당겨도 구수하는 제자리를 지켜 흐르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     해님과 대지 □ 석문주   대지의 파아란 생령들은 해님을 우러러 어머니라 부르며 빛발을 젖줄기처럼 물고 흥그러이 설레입니다.   하늘의 눈부신 해님은 푸르른 대지를 굽어보며 생령들 가슴에 빛발을 뿌리 박고 무진장한 자양을 흡수합니다.   해님이 있어 대지는 싱싱하고 생령들 있어 해님은 더욱 눈부십니다 해님과 생령들 조화를 이루니 세상은 이렇듯 아름다워집니다     팔도촌을 돌아보며 □ 유춘란   침략의 발길을 피해 살길을 찾아 헤매던 실향민들   그 마음을 보듬어 주며 땅도 나누어 주시던 은혜가 고마워   먹장구름과 광풍폭우를 몰아내고 목숨으로 이 땅을 지켰던 이는 팔도의 감농군들 이였다   그 때로부터 피로 물든 동토의 이 땅 다시는 춥지 않았고 천둥번개 울부짖던 하늘은 눈부신 해살로 찬란했나니   백년을 두고 울린 종소리 들으며 백년을 뿌리내린 느티나무 바라보며 경건해지는 이 마음이다   꽃처럼 화려하지 못하다 대나무 처럼 올곧지 못하다 어찌 근본이야 잊으랴 휘여진 허리로 이땅을 지키고 소박한 미소로 태양을 우러르는   울담 밑의 도라지 동구밖의 소나무 마주하고 섰노니   백년의 깊은 숨결이 묻어있는 팔도의 훈풍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길에서 길을 읽다 -조양천진 팔도촌 중심거리에서 □ 전병칠   진붉은 피줄로 살아 숨 쉬는 길이 한가닥의 태줄처럼 길게 뽑혀나왔다.   그-긴- 옛 흙길 따라 강포를 두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 렬을 지어 걸어가고 있는 호호탕탕한 발구름소리 보였다   감조감식하라 도끼봉에 메아리치며 구수하 강반을 물들이던 5.30추수폭동의 우람찬 함성 쩌렁쩌렁 귀에 꽂혔다   호롱불에 일렁이던 흰옷 입은 사람들 하나의 해돋이를 향해 앞 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 엮은 질펀한 서사시가 씹힌다     붉은 기발에 앉아있는 생령들이 부화시키는 색 다른 아침이 씨엉씨엉 활개치며 걸어오는 길 한마리 꽃새가 되여 날으고 싶다     려명의 빛과 선인의 숨결 —팔도촌의 리력을 읽고서 □ 리순옥   려명의 빛을 쫓아 선인들이 숨결 피운 곳 이 땅에는 삭지 않은 혼들의 숨결이 항시 운무처럼 핀다   따스한 해빛과 풍요롭게 마음 걸구어준 땅과 그리고 삭지 않는 지성은 이 땅에 식지 않는 소망의 향연을 항시 피워갔다   언제든 별의 빛 꿈을 잃지 않는한 꿈은 항시 소망의 하늘에 찬연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조각해 갈 것이니   이것이 한 숨결을 다 바래여 새 시대 가장 맑지고 아름다운 혼백의  세계를 피워낸 선인들에 대한 가장 경건한 보답이려니… 우리 글 가르치는 독일수녀의 사진에 적다 김태국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도 외국 수녀에게서 배워야 했던 서러웠던 그 때   일하고 일해도 굶주리던 그때 두손에 총칼을 부여잡았던 팔도의 용사들아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비장한 노래 만들더니   지금은 어느 산속에 이름도 없이 고요히 잠들었노?   창살사이로 아침해살이 도란도란 뛰여드는 농가의 아침   랑랑한 글소리 들리는 듯 우렁찬 구령소리 들려오는 듯 구수하는 긴 이야기에 목이 쉬였구나     태양의 전설 □ 김춘희   태양의 전설은 동방의 전설 100년 숨결 불태우며 고난의 도탄속에서 허덕이던 시련에 몸부림치던 어머니 조국의 전설 지혜와 정열로 빚은  위대한 중국공산당의 신화 견고한 신념과 뜨거운 해살로 새겨진 기념비.   동방의 불길은 태양의 불길 국내혁명과  항전승리의 거세찬 불길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의 뜨거운 함성 개혁개방 환희의 황금물결.   동방의 전설은 위대한 전설 위대한 인민의 전설- 기적의 메아리 속에서 신화는 다시 세계의 봉우리로 나래 펼치고 태양은 더욱 빛난다.   불패의 동방 불멸의 전설 태양의 전설이여, 산이면 산마다에 강이면 강마다에 영원히 붉게 붉게 타올라라 이 고장 연변땅에도 그 빛발 해살처럼 주렁져라.     [련시조] 선구자 □ 리영해   백년의 긴 흐름이 흘러간 강토 우에 진붉은 기폭 하나 오늘도 펄럭이네 비바람 눈보라 속을 헤치고 온 선구자   헐벗고 굶주리던 만백성 이끌고서 어둠을 몰아내고 새 삶을 안겼거니 그 은혜 하늘에 닿아 격양가로 넘쳐라   개방의 물결타고 온 나라가 들썩이니 문명이 길을 열고 과학이 봄을 맞아 가난은 줄행랑이라 호시절에 살맛나네   이 땅은 어딜 가나 행복으로 통하는 길 백년의 거룩함을 가슴가슴 새기고서 당이여 그대를 따라 몸과 마음 바쳐가리 연변일보 
132    내 손전화 코로나에 걸렸슈다-현룡운 댓글:  조회:352  추천:1  2021-06-02
(써우지(手机) ,핸드폰 ,손전화 ,휴대폰 ,모바일등등 용어가 어느게 맞는지 모르지만)   내 손 전화(手机)가 코로나 19 아니고  코로나 20에 걸렸슈 이제 또 코로나 21도 닥쳐 올건데.   숱한 기생충이 벌벌  구데기처럼 손바닥에서 기생하네 별라별 헛소리 다 들려 오고   문화 기생충들이  메뚜기 (황충)처럼  내 손 전화에서 죽기 살기로  시시각각  번식하네 . 부글부글..우글우글…   휴대폰에도 마스크를 씌우고 최고의 방역 주사를 놓고  그것도  계속 놓아야 하는데  그런게 어디없소 ?   온 세상 사기군들 모두가  문자언론 가지고 기생처럼  춤추네  문화기생 자본주의가 싹트는데 저 불쌍한 컴맹 ,망맹(网盲)들을 어히 할고 하늘과 땅이 인간을 웃는데  참.안된네.   세상 인간들은 먼저  국제 통용 손 전화 면허 자격증  시험쳐야 하지 않을가.   그런 국제 국내 손전화 면허증을  그런 배움터을  꾸려 볼가. 아이템(항목)좋을 것 같은데 ..휴휴    손전화 기생충들이  가슴아프게 세상을 우려먹는데. 왜서 족치는 사람들이 없을가.. 왜서 왜서……. .   인간이 손 전화에 목숨마저 맡기고,돈마저 다 주고 그 지령 지시를 받는 세월이 되였는가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기막히지. 휴휴  연변일보 
131    [시] 얼굴 (외 7수) ♦허옥진 댓글:  조회:207  추천:0  2021-05-24
►얼굴   허옥진   시작도 끝도 없이 생겨나는 즙의 맛으로 우리는 맛의 빙점에 와있다   착즙기의 즙은 흘러넘치고 나는 당신의 빈방의 열쇠를 갖고 있다   당신은 끝없이 흘러내리고 이젠 나는 각종 맛을 인내할 수 있는  강아지의 여유로운 혀로 당신을 맘대로 핥아낼 수가 있다.   방의 축음기는 돌아가고   이 슬리퍼는 참으로 오래된 것인데   나는 슬리퍼를 벗어내치고 물이 떨어지는 수도꼭지를 닫는다   아,  멈출 수가 없어요 전 겨울이 싫어요 절 멈추게 한 지혜는 저  창밖에서   탕후루糖葫芦 파는 늙은이의 호주머니에 있어요   나는 장농 안에서 그의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본다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어요 저의 빛의 부스레기들을 저 새들이 쪼아간 지 오래돼요 아, 병치된 언저리에 피여나는 해바라기, 해바라기 명도明度에 잘린 해바라기 속 해바라기   여전히 축음기는 돌아가고 나는 담배를 피워문다   절 태우지 말아주세요 저의 령혼을 흡입하면 당신은 나의 령혼 속에 살게 될 거예요   빈방에서 당신의 냄새로 가득한 빈 침대에서    나는 길게 누워 잠재울 수 없는  당신을 손가락으로 다독이며 당신의 카텐을 내리우고 다시 일어나서  랭수 한컵 들이켜고....   2019. 12. 4     ►해바라기   허옥진   나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지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돼 이건 요람이야 외마디 부르짖고 한층 기여 오르고 아니 이 분지는 넘 고요하고  스스로 분출될 우려를 갖고 있기도 해   꽉 껴안은 이 팔은 넝쿨같기도 하고 그 창턱을 기억해? 스스로 기어 오르다  꽃이 피고 지었던 질긴 틈  말라간 사이로 이빨이 생겼던 게야 지칠 줄 모르고 까고까고 까고   이 분수는 분출을 멈추지 않아 텅 비였던 광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이건 피난이야 비비고 들어선 건 너의 앞니였지   미소한 전률은 송수신되지 못한 수집된 기록일 뿐이야   오래 동안 광장은 넓고 외다리로 길어져 목 떨구고  하루종일 침묵을 보이고 고드름이  길게 발 아래로 내려가  길고 긴 엿의 맛을 내지   책 속의 이야기는 우리한테 혼란을 가져와 가방 속에 한줌 넣고 가 까고 까고 까고 공연히 방향판 속에 헛돌게 해   난 이 화판우의 그림을 찢고  다시 그려야 해   까맣게 타들어간  어두운 한줄기 둥 뜬 표정   2020. 3. 17     ►신발   허옥진   신발을 바꿔 신고 사시斜视의 방향으로 가 보았습니다 어긋났던 발걸음들이 기러기가 되여 한일자로 날고 있었습니다 벌어졌던 입을 모으는 순간이였습니다   내 안으로 후두둑 새떼들이 지퍼처럼 날아들며 우짖고 있었습니다   저리도 긴 세기의 줄을 흔들 수 있었을가 허나 줄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고여서 흐르는 먼 길의 진물들은  온몸을 화끈화끈 지지고 있었습니다 뼈의 락인이 된 아집들은 단단한 거였습니다   골수에 닿아 전파된  배와 노의 옆에는 노란 여우의 노린내가 십킬로메터를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코와 신발이 맞닿는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신, 그래도 그런 롱담이 좋은 거였습니다 슬그머니 밑바닥부터 꽉 껴안는 그런 느낌이    반쪽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난 반쪽이 됐습니다 더 높아질 수 없다면 땅이 높아지길 바랬습니다   작은 것이 좋다는 건 페허가 된 육중한 몸뚱이에서 처음 느꼈습니다   키의 축소판이 된 발자욱은 평생을 따라왔습니다 발가락은 여섯개의 혐의를 버리고 신발 안에서 꽁꽁 고부린 채 옹송그린 발톱의 넓다란 기슭을 허비고 있었습니다   얘야 더 판다면 쥐굴이란다 그럼  대신 새줄을 내려주세요   수많은 발가락들의 피아노 소리가 신발 안에서 울려나왔습니다 발가락들 발레가 시작되는 오후였습니다   2020. 1. 24     ►빨래    허옥진   우리들의 교는 씻겨지는 것이지요 수많은 옷들이 쌓여지고 있어요 보디가드 같은  단추들을 벗어난 일상들은 헐렁해져 있습니다 버티던 관절들은 사라지고 경직된 울타리들을 벗어난  하염없이 연연한 그리움 같습니다   우리가 씻길 수 있는 것은 단추와 같은 당신과 단추구멍 같은 내가 서로를 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잠은 깊습니다   때 먼지 속에 사라져간 아이가 있어요 꾀죄죄한 그 아이는 먼지처럼 작아졌지요 공기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아이는  유령 같은 존재였습니다 익힌 발음 하나 구명의처럼 떠가고 있어요 비누물이 구름처럼 내 주위를 감싸죠.   오늘도 비눗물의 세례로 아침을 시작하지요 한알 두알 사탕처럼 모아둔 것들 녹고 있어요 발밑에도 흰 구름이 떠 있군요 우리는 거품처럼 사라지는 건가요   정오의 빛이  마술사의 금박 지팡이가 될 때까지 솟구치는 분수는 정수리 뒤에서 날개 가진 천사로 착각하게 만들죠   먹먹하게 그리움에 말리워 들어가면 또 한층 색 바래여 나와서는  우리는 건조증으로   가려움에 불타다가 또다시 씻겨지는 겁니다   말쑥한 세상에서 우리의 외로움은 때묻지않은 것이였습니다   2019. 10. 24     ►울타리   허옥진   륵골을 들어올려 우리는 가출하는 당신을  기러기, 해당화, 민들레, 맨드라미, 개똥벌레, 참나리로 한데 묶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흔들리는 풍경입니다   흐르려는 당신을 우리는 고요히 품어줘야 합니다   응고된 고집은  반맹증의 의혹을 갖게 할 테지만 다시 겹쓰기를 한다 해도 우리는 고집할 것입니다   몇번 흔들렸지만 박힌 교훈으로 더 든든해진 우리는 어깨 결은 사이좋은 자매입니다   이음새에 피는 벚꽃은 당신의 필사본에 늘어나지 않는 저금통장에 당신이 구겨서 던진 에이포용지에 송이송이 무럭무럭 핍니다   늘 순간에 멈춰서서 버텨내는 지정학적 교훈은 거세당한 척박한 땅에서 기름진 꿈입니다   우리는 개연성 근원의 모서리에서 탄생한 것 같은 자아 환각에 빠졌나 봅니다   한번 쯤 당신을 껴안고 왈쯔라도 신나게 춘다면 와인과도 같은 이 밤은  우리의 등을 너무나 어둡게 지지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늘 한자리에 멈춰있는데 당신이든 나든 몰락의 순간에  서로를 버텨낼 수 있는 끈끈함입니다     ►모래   이 세상을 가장 깊이 알게 된 후로 우리 가슴 한켠에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이 한껏 불고 난 후로 움켜쥔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한줌의 모래 만큼이나 우리는 서로가 모래임을 쑥스럽게 생각했다 흙에 묻힌 얼굴을 씻고 볼 일이다 기대려 하던 바보스러움과 서로가 상대방에게 스며들 수 없는 존재란 걸 알게 된 후로 우리는 서걱이는 몸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갈증에 타는 목으로 사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였다 하나의 군체로 모임이 필요했을 뿐 더 이상 풀을 재래울 수 있는 흙인 척 꾸미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우리는 더는 씻을 필요 없는 얼굴이.되였다. 탁자에서 굴러내리는 콩알 만큼 불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확인한 후로  불어서 터져죽을 사랑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젖은 바지가랭이에 묻어가는 우리일진 모르지만  말라서 털리우면 우리는 또  완전한 개체임을  수시로 깨쳐야만 했다 불도를 얻으러갔던 약속이란 단어마저  지우기로 했다. 해변가의 모래성답게 없는 것을 굳이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자尺안에 들어갈 만큼 큰 존재가 아니므로, 모래일 뿐이므로 한없이 바다가 그리웠다.   해빛 속에 반짝이고  물속에 부드러워지는  우리는 우리 대로의 고요함을 깨치기 위한 것일 뿐 황사마저도 바다로 가기 위한 몸부림인 것을 알았다 바다를 잉태하기 위한 련어의 억센 거스르기임을 알았다  모래 만큼이나 개인주의자의 껄끄러움을 감수하는 것이 종내는 맑아지는 것임을 알았다     ►꿈에 대하여                                     그것은 불타버린 여름의 내장 주체못 할 가을비의 설사 동면의 깊은 곬으로 흘러 나오는 빛의 여울 푸르름으로 늘어 가는 흙의 사설 지평의 혼솔기를 마선질 하는 분침의 재봉틀 흑색의 칠판위에 하얗게 움트는 아지랑이들 비닐안의 끝없는 속삭임으로 눈 뜨는 부풀림 신용을 어긴 신용 불랑자의 낙언 벼락을 향해 솟구치는 피뢰침 백만광년의 집착으로 시공을 뚫는 별의 송곳 수거함에 분리되는 계절의 배설물들로 알찬 열매들 그것은 초원, 뭉게구름 노트북, 일기장..... 무수한 변신을 꿈꾸는 너와 나  그런 우리들.. .  한곳에 모여 함께 광장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하네 함께 노래하네 합창의 우렁참은 극단의 기둥을 타고 높은 지붕을 떠이고 불멸의 흐름을 예언하지 1234567 도레미파쏠라시 솜사탕처럼 늘어져야 지 풀무가 돌아가는 한 우리의  부피 뜯어간다 그래도 우리는 달디단 맛          2018. 7. 23 9시     ►진눈까비의 복허수에 대하여    너에게로 날아든다 새나 나비처럼 근대성 가까이  어둡게 너한테 침몰 되는 중 나는 나라고 말 할 수 없어 사라지기 위해 네가 나를 위한 생리대는  일년에 두번쯤은 족 해   복식의 방안으로  복허수复虚数의 실수는 나의 이중성을 떠나는 첫번째 계절이 되였다   자기 카드에 인출된 수량만큼 형태소形态素를 나타냈을 뿐 너의 류배지에서  채 해동되지 못한 표절된 허두가 나의 첫 음성으로  너에게로 반환되여 사라지는 중   설맹雪盲으로 지양 되지 못한 여백에 공명으로 슴슴해 진 언어의 혈액형들 더는 낭설로 너의 밑바닥까지 적시진 않아   잠언으로 환원되지 못한 계절의 쪼각들 환절의 어설픈 주성走性으로  너에 향한 회귀성은  겨울을 견딜 수 있는  푸르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될 수 있었다 [허옥진 략력]   화룡시 출생 연변작가협회 리사   수상경력: 제15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2017년 연변문학 문학상 수상 중국 조선족 청년작가 수필 우수상 두만강 여울소리 시 우수상 수상  
130    담 비□ 현청화 댓글:  조회:433  추천:0  2021-05-07
집 밑 화단 옆 벤치에는 언제나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길고양이가 있다. 이사를 온 지 5년째, 첫아이가 태여날 때부터 가끔 보는 길고양이였으니 자그만치 다섯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노란 털이 온몸을 덮고 얼굴 쪽은 흰 길고양이였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들고 눈인사를 보내는 그 고양이가 하도 마음에 들어 두 아이는 내게 제발 고양이를 키우게 해달라고 졸라대군 한다. “엄마도 어릴 때 고양이를 길렀다고 했잖아요!” 딸애의 부르튼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찌 어릴 때 뿐이랴. 불과 6년 전만 해도 나는 한꺼번에 12마리의 고양이를 기른 적 있는 광적인 애묘인이였다. 그런 내가 고양이를 기르는 일을 잠정 중단한 것은 담비라는 이름을 가진 한 길고양이 때문이였다. 담비는 내가 혼자 무역일을 벌려서 제일 바삐 돌아칠 때 우리 집으로 왔다. 온 것이 아니라 내게 랍치를 당했다고 하는편이 더 적절했다. 외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줄근하게 비를 맞고 있는 노란 고양이를 본 나는 도저히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마침 그 고양이도 내 련민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조심조심 내 뒤를 따라왔다. 아빠트단지에 들어서고 집 밑까지 따라왔을 때, 나는 몸을 돌려 고양이를 품안에 껴안았다. 그렇게 그 고양이는 나를 따라 집으로 왔고 그날로 담비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 이름은 전에 가출해버린 어느 어린 고양이의 이름이였고 담비는 마침 그 고양이와 같은 색상의 노란 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담비는 가출한 그 고양이와는 다르게 온순한 성격이였다. 내가 목욕물을 받아 목욕을 시켜도 순순히 몸을 맡겼고 대소변은 꼭 화장실에서 보라는 내 어눌한 제스처를 금세 알아들은 듯했다. 서둘러 사료와 고양이 모래를 장만하는 등 일련의 인터넷쇼핑이 이어졌고 그날 밤 나는 드디여 처음으로 혼자 밤을 새며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그러던 담비가 앓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사흘째 되는 날이였다. 처음에는 코물만 흘리던 것이 반나절이 지나자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기만 했다. 서둘러 근처 동물병원으로 이동했고 수의사는 장염이니 링게르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링게르를 꽂는 동안에도 담비는 거부하지 않았고 수의사도 이렇게 온순한 고양이는 처음 본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날 밤부터 담비는 노란 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담비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갔고 볼일을 보고 나오는 순간 뒤다리가 힘이 풀리는지 배변 우에 주저앉았다. 나는 또 한번 담비에게 반신욕을 시키고 토사물들을 정리했다. 그날 일이며 드라마며 다 뒤전으로 하고 나는 담비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든 신경을 도사렸다. 담비는 갔다. 이튿날 아침 동물병원에 한번 더 가봐야지 하면서 새벽녘에 어렴풋이 쪽잠이 들었을 때의 일이였다. 귀전에 야웅 하는 처절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고 내가 펄쩍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담비의 몸이 차츰 식고 있을 때였다. 작은 경련을 몇번 일으키다가 담비는 점점 꽛꽛하게 굳어져갔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눈물만 좔좔 흘렸다. 동트는 새벽녘, 어스름한 원룸 안에서 나는 사람을 믿고 사는 한 연약한 생명이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참담하게 스러지는 것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말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담비의 배에 귀를 대봐도, 엉엉 소리내여 울며 쭈크리고 앉아서 목 언저리에 손을 대봐도 담비는 가르릉거리며 가쁜 숨만 몇번 몰아쉰   후 드디여 미동도 하지 않고 차거운 시체로 굳어졌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동하게, 구체적으로 내 눈앞에서 무자비하게 벌어져버렸다. 사실 담비는 내가 기른 고양이중에서 제일 큰 고양이였다. 나는 전에 쩍하면 새끼 길냥이를 주어다 튼튼하게 길러 분양을 줬었고 분만을 앞둔 어미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와 고양이의 해산을 돕고 산파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고양이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고, 고양이는 그리 취약한 동물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게 문제였다. 담비처럼 바깥생활을 오래 한 큰고양이는 갑자기 거주환경이 바뀌고 생활패턴이 바뀌면 스트레스로 인한 장염에 걸리기 쉬우며 그것이 치명적이기도 하다고 수의사가 주의를 줬건만 나는 귀등으로 들었다. 방 한구석에 포장을 뜯지 않은 사료와 고양이 모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그날부터 옹근 보름 동안 장마에 폭우가 이어졌다. 어쩌면 하늘도 나의 경망한 행동에 분노를 표하는 듯했다. 시간이 오래 흘렀지만 그날 새벽을 떠올리면 나는 저도 모르게 다시 눈물을 쏟군 한다. 담비는 왜 하필 날 따라왔을가. 어쩌면 생의 마지막 날들에, 사람의 곁에서 한가닥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을가? 비틀거리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화장실에 가 배변을 보던 그 착한 고양이에게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사람을 믿고 따라온 약한 동물에게 내 무지와 오만은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였던 걸가. 그 후 나는 다시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하면 그 또한 애완동물에 대한 례의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에 햄스터를 기르다가 이사를 할 때 허름한 종이박스에 넣어 가다가 기차역에서 놓친 일이며, 내가 분양을 주었던 고양이가 어느 식당 주인한테 목줄을 채운 채 음식점 마당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서도 식당이니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자기 합리화를 했던 일이 날카로운 칼의 단면처럼 내 기억을 스치며 나를 아프게 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람이라는 우세로, 강자라는 리유로 애완동물들의 생활에 개입하고 선택을 강요하는 건 동물사랑을 빙자한 건방지고 거만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애완동물을 기르는 일을 한결 신중하게, 한결 조심스럽게 결정해보려고 한다. 담비라는 이름은 그렇게 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아픔과 비밀의 대명사가 되였다. 내 젊은 날의 혹독한 신고식이기도 했다. “그럼 언제 고양이를 기를 수 있어요?” 딸애는 집에 들어서서도 포기하지 않고 졸라댄다. 나는 두 아이를 품에 안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너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언제면 어른이 되나요?” 글쎄다. 몸이 자라고 사고가 성숙되면 어른이 되는 걸가, 아니면 삶의 성장통을 겪어야 비로소 범사를 신중하게 바라보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걸가. 나는 두 아이를 방안으로 손짓해 불렀다. “엄마가 이야기를 해줄게. 전에 담비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있었는데…” 연변일보
129    청명 고향행 댓글:  조회:282  추천:0  2021-04-08
글 궁금이 · 방송 구서림     您的浏览器不支持 audio标签     1년3개월만에 부모님의 산소를 찾았다. 연길행 아침 비행기는 6시40분이라 집에서 3시반에 출발했다. 이 시간에 길이 막힐 념려는 없지만 혹시 방역 조치로 공항의 수속이 길어질가봐 호들갑스럽게 일찍 나왔다. 고향 사투리로는 새도래라고 한다. 북경의 좋은 점은 순환도로에 들어서면 공항까지 신호등 하나 없이 직통으로 이어진다. 공항에서도 생각했던 것처럼 수속이 번거롭지 않았다. 그냥 체온을 측정하는 한개 절차만 늘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검색대를 지나서 탑승구역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생겼다. 연길공항에서 온 최신 소식이라며 안내 방송을 하는데 비행기에 내리면 핵산검사를 해야 되고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투숙지에서 기다려야 한단다. 핵산 검사 결과가 그날로 나올 리는 없고 이튿날에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시간을 그냥 호텔에만 있다가 돌아오게 생겼다. 주목적이 산소인데 그것도 어떻게 될지 미결이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미리 얘기를 하지 여기까지 들어와서 알려주면 어떻게 하냐는 원성이였다. 비행기표를 물려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옹근 가격의 손해를 보더라도 물려야지 호텔 구경만 하려고 천키로밖에 다녀올 일은 없다. 맞은 켠에 앉아 있던 젊은 부부도 고민은 나와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럼 우리가 갈 일이 없지 않아요?”     “그러게. 이런 통지를 왜 이제야 하지.”     안해의 말에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며 전화기를 꺼내든다. 통화 내용으로 봤을 때 연길 공항에 근무하는 지인한테 하는가 보다. 확인 결과 연길공항에서는 그런 조치가 없다고 한다. 인맥이 넓은 사람 덕분에 덩달아 나도 시름을 놓게 됐다. 그럼 북경공항에서 받은 통지는 어디에서 나온 걸가. 아니나 다를가 잠시후에 이동경로앱만 스캔해 연길공항에서 보여주면 되고 다른 검사는 없다는 안내방송을 다시 한다. 그러면 그렇지 저위험부담지역에서 오는 비행기까지 다 핵산검사를 하면 이건 분명 과잉대응이다. 그런 번거로운 절차까지 감수하면서 다시 찾을 손님들이 과연 얼마나 될가. 만의 하나 생길지 말지 모르는 책임을 지는 게 싫어서 령위험부담의 수많은 사람이 불편을 겪게 하는 것도 소신있는 결책자의 자세는 아니다. 과잉대응으로 자칫 관광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부면 효과를 산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연길공항에 내리니 말끔히 해소됐고 여기서도 그냥 건강코드와 체온 측정만 거치면 끝이다. 이튿날 호텔에서 아침 먹으러 내려갔다가 식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다른 지방에 가면 식사할 때만 마스크를 벗고 음식 뜨러 다닐 때는 착용하라고 하던데 여기는 저마다 맨얼굴로 활보하고 다닌다. 빈자리를 찾는데만 세바퀴를 돌아서 겨우 합석하는 자리를 찾았다. 이제 사람들은 사흘만 휴식시간을 줘도 어디든 나가고 싶어하는가보다. 지난 1년을 너무 집에만 있다보니 그런 욕구가 더 간절해졌을 것이다.     오랜만에 국제항공사의 비행기를 탔다. 전에는 남방항공만 고집했었는데 공항을 이전하면서 시간도 바뀌여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행히 연길행 비행기는 원래 남방항공사가 사용했던 T2터미널을 그대로 리용하고 있어서 친숙하다. 승객의 립장에서는 공항이 작을수록 이동거리가 짧아서 리용하기 편리하다. 으리으리하게 크게 지어봤자 단순 승객의 견지에서는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비행기에 오르니 체온 측정을 한번 더 하는데 승무원의 목소리가 아주 명랑하다. 그냥 기계적으로 건성건성 어서오십시요 하는 것과 밝은 목소리로 성의있게 대해주는 건 마스크를 썼어도 감각상 확연히 다르게 안겨온다. 승무원들의 마스크 왼편에 장식해놓은 하트 무늬도 인상적이다.      하얀 마스크 우로 초롱초롱한 눈이 그들의 청초한 미모를 한결 더 돋보이게 한다. 지금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시대에는 눈과 눈섭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에 소설 묘사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오똑한 코 앵두 같은 입술은 마스크 뒤의 신비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이 시기 미모는 눈과 눈섭이 전담한다. 한국 방송에서 들었는데 사람의 얼굴에서 눈섭이 또 그렇게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싱거운 사람이 실험을 했는데 쟁쟁한 녀배우들의 사진에서 눈섭을 지워봤더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완전 다른 사람이 돼 있더라고 한다. 너무 놀라서 다시 그려넣었더니 그때에야 다시 이건 김태희 저건 전지현 이렇게 원래 모습으로 다시 복원됐다.     옆좌석에는 부부간으로 보이는 남녀가 탔다. 보통 내가 창문쪽에 앉았으면 남자가 가운데 좌석으로 앉고 부인은 복도쪽으로 앉히는 게 정상인데 이 집은 녀자를 가운데 앉힌다. 이 녀성은 거울도 소지하지 않았는지 남자가 자꾸 휴대폰으로 녀자의 눈 주변을 찍어서 보여준다. 한번으로 잘 확인이 되지 않는지 두번 세번 찍어서 재삼 확인시켜 준다. 하두 찍으니 인간적으로 나도 궁금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들여다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남자는 비행기를 타는 내내 녀자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걸 봐서 아주 끔찍한 사이다. 그러고보니 녀자를 복도쪽에 앉히면 손을 잡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맛있다. 대~박”     조선족이 많은 연변에 간다고 조선말을 배웠는지 갑자기 녀성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여나온다. 보통은 다른 언어를 배울 때 “안녕하세요. 아름답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말부터 배우는데 이들은 민생의 최전선에 있는 음식 관련 용어부터 배웠다. 간만에 비행기에서 만난 아기자기한 남녀다.     “고향의 하늘은 푸른 정도가 다르네요.”     부르하통하의 풍경을 찍어 위챗단체방에 올렸더니 후배가 한 말이다. 고향은 하늘도 푸르고 태양도 뜨겁다. 강변의 벤치에 앉아 볕쪼임을 하는데 아직 다소 싸늘한 강바람과는 달리 해볕이 뜨겁게 얼굴을 비춘다. 그만큼 자외선도 강하련만 싫지만은 않다. 그냥 몇시간이고 강을 마주하고 그대로 쉬고 싶어진다.      고향은 갈 때마다 정답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28    달팽이 약속 "고추달리개" 댓글:  조회:295  추천:0  2021-02-08
  글 김경희 · 방송 구서림         您的浏览器不支持 audio标签       나의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고추달리개 하나만 있어도 순천김씨대를 이어나가겠건만, 쯔쯔.”     할머니께서는 슬하에  3남3녀를 두셨다. 그런데 손군들대에 와서 가들가들 순천김씨성을 탄 씨종자는 셋뿐이고 그외 손군들이 열아홉이나 되였다. 그러니 남존녀비사상이 꽉 찬 할머니로 놓고 말하면 “고추달리개”타령이 나올만도 했다.      어린 기억에 할머니 아들딸들이, 큰 손군들이 “이걸 소비돈 하세요.” 하고 드린 돈들을 할머니께서는 속옷주머니에 꽁꽁 감추었다가는 늘쌍 막내삼촌네 맏아들에게 가만히 쥐여주는 것을 목격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원인은 큰아버지네 두 아들이 장가들었는데 아기를 낳은 것이 둘다 딸이였으니 이제 희망을 걸데라고는 막내삼촌에 큰아들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릴 때 오죽했으면 나의 꿈이 남자가 되는 것이였을까! 그러면 나한테도 돈이 생겨서 그렇게 먹고 싶었던 개눈깔사탕이랑 신바닥과자랑 사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몸이 특별히 약해 엄마가 닭고음이랑 해주고 닭알이랑 가만히 삶아주고 기관이 약해서 늘 기침이 멎지 않기에 천지꽃꿀이랑 해주면 그것들을 먹을 때마다 나는 얼마나 할머니눈치가 보였는지 모른다.      “가시나, 애비도 모르고 제입에만 쓸어넣어? 쯔쯔, 지애비하나 가들가들, 보기만 해도 속쓰러워서 원.”      나때문에 엄마까지 함께 욕본거다.      그 “고추달리개”타령에 아들 하나 못 둔 엄마는 또 얼마나 눈물동이를 쏟았는지 모른다. 그때는 남존녀비사상이 통을 치고 있는 때고 할머니가 시도때도 없이 엄마에게 딸들만 낳았다고 눈치를 주고있는 판이였고 녀자아이를 낳은 건 녀자의 문제라고만 여겼던 때라 엄마는 눈물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넷째를 낳았을 땐 “쯔쯔, 또 가시나.”라고 하며 옷섶으로 눈굽을 꾹꾹 찍으며 갓 태여난 막내를 빤히 들여다 보더니만 “애가 눈섭과 귀밑머리가 붙었구만. 이런 애는 남의 집에 줘야 어시나 애한테 좋다오. 그 아래로 낳으면 아들이구.”하고 말해서 금방 해산하고 가뜩이나 힘든 엄마의 속을 얼마나 박박 긁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쳐도 속에서 떨어진 귀여운 자식을 어떻게 남에게 주는가며 절대 안될 일이라며 할머니 생각을 끊어놓는 건 단칼 같았다.      그런데 어느새 할머니는 자기생각을 동네에까지 들고 나간거다. 어느날 문득 왕씨성을 가진 사람이 중매군을 붙여 우리집에 탐문 온 것이다.      “소문 듣고 왔습니다. 애를 기를 집이 나졌는데 애를 정말 줄 생각이세요?”     손군욕심에 할머니가 하는 넉두리로만 넘겨버리고 말았던 일이 이 지경까지 벌어지니 엄마는 더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열불을 토하고 말았다.      누구 이렇게 터무니없는 뜬소문을 퍼뜨려서 남의 가정에 화불을 놓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 티끌만치도 해본 적 없으니 어서 빨리 손 싹 씻고 이집에서 나가달라고 축객령을 내렸다. 아빠도 할머니를 힐끔 한눈 무섭게 보고는 그런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으니 그 사람을 단념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중매군을 돌려보냈다.      할머니도 얼마나 손자비위가 났으면 그랬을가!     그런데 그 유일한 희망이였던 막내아들네 맏이가 장가를 들고 애를 낳은 것도 또 딸인거다. 할머니의 "고추달리개" 꿈은 이렇게 되여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후에 손녀신랑들이 들락날락하며 가정에 새로운 분위기를 부여하면서 할머니입에서 그 “가시나”소리도 종적을 감추었고 “고추달리개”타령도 드물어갔다.      고추달리개면 어떻고 딸이면 또 어떤가. 할머니도 “죽어도 맏아들네 집에서 죽겠다.”던 고집를 꺾고 결국 둘째아들인 우리 아빠집에서 세상을 떠난 것 아닌가.      우리 딸들이 엄마, 아빠를 호강시켜 가보고 싶은 곳 다 돌아보시게 하고 드시고 싶은 것을 다 드셔보게 하고 다리가 아파하시면 엘리베이터가 있는 층집에서 사시게 하고 70진갑 버젓이 차려드리고 결혼 50주년 기념일 깜짝이벤트를 장만해 드리고 신식류행 따르게 해드려 로년생활을 충실히 보내고 계시는 우리 엄마, 아빠를 하늘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굽어보신다면 할머니도 더는 “고추달리개”타령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딸들도 든든한 기둥이라면 기둥이고 따뜻한 솜이불이라면 솜이불이잖는가! 중국조선어방송넷 
127    [일본인상기] 입은 재앙의 근원 댓글:  조회:280  추천:0  2021-02-07
중국 5대 10국시대의 정치가 풍도(馮道)는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 즉 다섯 왕조에 거쳐 여덟 개의 성을 가진 열한명의 임금을 섬긴 재상이다. 그는 설시(舌詩)라는 제목의 시로 자기의 처세관을 후세인들에게 이렇게 남겼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페구심장설) :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기만 한다면. 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 가는 곳 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여러 지방정권(10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에 20년이나 재상으로 일한 비법이 말조심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풍도의 처세술에 대한 총화이다. 우리말에도 흡사한 속담이 있다. ・세치 혀 밑에 도끼 날이 들어 있다 ・화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내 뱉으면 못 줏는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일본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침묵은 금, 웅변은 은 (沈黙は金、雄弁は銀) ・꿩도 울지 않으면 총에 맞지 않는다(雉も鳴かずば撃たれまい) ・입은 재난의 근원(口は災いの元) 모든 속담의 의미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짧은 387일간의 임기 기간에 여러가지 부적절한 발언으로 각계의 비난을 받았던 일본의 제85,86대 총리 모리요시로(森喜朗)가 요즘 녀성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일본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도꾜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인 모리씨는 2월 3일에 있은 JOC 평의원 회의에서 “녀성이 많이 참가한 리사회는 시간이 걸린다. 녀성은 경쟁의식이 강하므로 누가 발언하면 자기도 발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긴다. 하여 누구나 다 발언하려 한다.”는 녀성비하적인 말을 하였다. 국내외 여론이 그 발언에 대한 비난에 박차를 가하면서 회장퇴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모리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상기 발언을 철회하였지만 여론은 여전하다. 한편 네티즌들은 모리씨의 발언은 올림픽정신에 위반되며 일본의 남존녀비 의식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된다고 비난이 쌓이고 있다. 3년전에 썼던 일본인상기 (2018년 4월 9일 발표)를 떠올리면서 변화되지 않는 낡은 의식의 존재를 다시 한번 비판하고 싶어진다. 2018년 4월 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舞鶴)시에서 있은 봄철 오오즈모(大相撲:일본전통씨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던 시장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다. 긴급한 상황에서 관객석에 있었던 두 녀성(간호사)이 도효(土俵:경기장)에 올라 구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잇따라 다른 두명의 녀성도 도효에 오르게 되였다. 두 녀성이 심장 맛사지를 진행하는 도중에 경기장내에서는 “녀성분들은 도효에서 내려 와 주십시오.”“남성분들이 올라 와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이 세번이나 있었고 더우기 관객석으로부터 “내려오라!”는 웨침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환자를 두고 잠시 주저했던 두 녀성이 도효에서 내려 오고 때마침 도착한 구급일군에 의해 환자는 병원으로 호송되였다. 구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남성이 현장에 없었던 상황에서 자칫하면 인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던 그날 안내방송이였다. 한동안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여론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따라서‘전통이냐? 구명이냐?’라는 재래의식에 대한 의문들이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인 스모(相撲)계를 흔들었다. 1500여년전, 농경민족인 일본인들의 신도(神道)의식에서부터 생겨났다는 스모,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일본 특유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경기장인 도효(土俵)가 신성한 장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도효에 녀성이 올라서는 안된다'는, 오래된 신도(神道)의 전통을 주장하는 일본스모이지만 거기에는 전통이라는 명목하의 남녀차별 유전자가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공개한‘큰’사건이였다. 의 ‘뼈대'를 다시 한번 옮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온 풍습이거나 신앙,경향에 대한 유형 혹은 무형의 계승을 전통이라고 한다면 그 전통 역시 력사와 더불어 개변되고 바로 잡혀지면서 나날이 승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고대로 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길게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인간의 정신적인 성취감만을 놓고 보아도 관례와 계통만이 아닌 인간자체의 리해와 납득이 동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계승이 아닐가 싶다. 메이지(明治)시대 이전에는 녀성스모가 존재했다는 력사기재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도효에 녀성이 올라서는 안된다'는 전통도 중도에 새롭게 정해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전통여부를 론하기전에 그번 일은 녀성에 대한 현재 일본사회의 심한 차별경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종 차별을 피하기 위해 피부색갈, 년령 등을 명확히 기재하지 않으며 일본인 특유의‘모호함'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현재 일본사회에서 아무리 전통을 중시하는 장소라 하지만 공공연하게 “녀성은 내려 오고 남성은 올라 가라”고 하다니… 전통의 원격조정에 의한 현존감 비슷한 고리타분한 규정이 죽느냐 사느냐의 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우선적으로, 거침없이 지켜져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능조차를 억제시키는 격이 아닐가 싶다. 3년전 그번의‘사건'을 두고 스모협회가 여러모로 사과를 했지만 한동안 사회적인 실망과 분노는 여전하였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고나니 그 때의 그일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다. 아마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까마득히 잊혀져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그 때와 류사한 아나운스를 하면 안된다는 매뉴얼이 만들어졌을 것 외에 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2019년 에서 발표한데 의하면 경제, 교육, 정치, 건강 등 4가지 분야에서 세계 남녀격차 지수(Gender Gap Index)를 분석한 결과 조사에 참여한 세계 153개 국가 중 일본녀성의 지위도가 121위였다고 한다. 물론 정치참여에 관한 중시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남성들과의 임금차이 등 홀시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존녀비'‘남녀평등'에 대한 일본의 뿌리깊은 의식은 언제쯤 탈을 바꿀가.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문제로 되고 있다. 일본 특파원 리홍매/길림신문
126    애매한 계선 댓글:  조회:331  추천:0  2021-01-19
애매한 계선 궁금이 글 궁금이 · 방송 구서림     您的浏览器不支持 audio标签 지난주에 대련의 한 아빠트단지에서 찍힌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가도판사처 부주임이 아빠트단지에 들어서면서 방역원이 신분정보를 등록하라고 하자 이를 거부하고 지역사회 서기한테 전화를 한다. 자기가 아무개인데 방역원이 까다롭게 구니 그냥 들어가게 말해달라는 전화였다. 방역원이 무슨 큰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신분증번호를 등록하라는 거였는데 이 부주임은 아마도 자기가 관할 구역의 령도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어서 거부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방역원이 엄격히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쯤 되면 너의 고집이 이기냐 내 신분이 이기냐는 자존심 문제다. 너희들 지역사회 서기도 내 아래사람인데 일개 방역원이 감히 나를 감 놓으라 배놓으라 하냐는 신분의 우월감이 발동한다. 물론 개인 신분 류출이 민감한 시대에 나도 어디 가면 신분증번호를 적기가 망설여지기는 한다. 이점에서는 리해가 가지만 특수시기는 다르게 봐야 한다. 합리하든 불합리하든 그것이 이 아빠트단지의 방역규정이라면 무조건 거기에 따르고 민원이 있으면 나중에 제기해도 늦지 않다. 걸핏하면 인터넷에 오르는 시대에 권위주의와 오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일단 인터넷에 오르고나면 전후 경위야 어떻게 됐든간에,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원만하게 해결되였든간에 다 사후약방문이다. 명예 복구가 지극히 어렵다. 사생활과 공공관리는 영원한 모순이다. 어디까지가 개인 자유의 제한이고 어디까지가 사회관리의 계선인지 애매하다. 같은 일도 방역과 같은 특수 시기에는 다르게 봐야 한다. 하물며 빅데이터시대에 어느 정도까지 사생활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렵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역무원의 무전기가 울리는 걸 들었다. “10호 문앞의 승객이 마스크를 바로 쓰지 않았으니 귀띔해주세요.” 역내의 카메라로 매개 승객의 얼굴 상태에 대한 체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래도 일대일 무전기로 말해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고 역내 방송에다 대고 “10호 문앞의 검은색 옷을 입은 승객분께서는 마스크를 바로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해버리면 승객의 립장이 대략 난감하다. 물론 승객이 잘못했으니 할 말은 없다. 이렇게 같은 일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가에 따라 일처리 방식의 예술이 구현된다. 그리고 나타나는 효과와 결과도 많이 다르다.  인터넷에서 많이 만나는 게 운전자와 교통경찰 사이 마찰 영상과 고속철에서의 자리 다툼 영상이다. 물론 여론 감독도 중요하지만 이런 영상을 올리는 사람의 목적도 살펴봐야 한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영상은 대부분이 완정한 영상이 아니다. 앞에서 어떤 전주곡이 있었고 뒤에서는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구독자들은 알 길이 없고 그런 상태에서 댓글이 달린다. 영상은 올리는 사람의 구미에 따라 내용의 본질이 달라지고 사실이 외곡될 수도 있다. 어느쪽이든 당하는 립장에서는 입이 열개라도 해명할 방법이 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렇다고 “력사가 옳바르게 재판해 줄 것”이라고 할만한 큰일도 아니다. 억울한 대로 넘어가야 한다. 립장은 환경에 따라 많이 달리한다. 우리가 평소에 많이 하는 인사말 중에는 “식사했습니까”의 빈도가 상당히 높다. 특히 북경 사람들이 많이 쓴다. 상대방이 이미 밥을 먹었는지 아니면 식사 전인지 그것이 궁금해서가 아니고 그냥 “안녕하세요”와 같은 상규적인 인사말이다. 물어봤다가 안 먹었으면 사줄 생각도 전혀 없다. 별로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이런 인사말도 장소에 따라서 가려 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만났는데 먹었냐고 물으면 대답이 난처하다. 물은 사람은 아무런 뜻이 없었더라도 답하는 사람의 립장에서는 목적어를 명확하게 넣어서 대답하게 된다. “구내식당에서 먹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달력을 들여다보니 2000에도 이제 뒤에 21이나 더 달렸다. 지난주에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켰더니 네개 현대화 실현이라는 표현이 등장해서 옛날 생각이 났다. 당시에는 2000년에 가서 네개 현대화를 실현한다는 가히 흥분할만한 목표를 제기했었다. 아득히 먼 것 같았던 2000년은 드디여 다가왔고 우리가 상상했던 현대화는 미완성이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했냐고 따지지 않는다. 물론 완벽하게 실현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걸 목표로 희망을 가지고 노력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별로 나쁠 게 없다.  계획이란 앞으로 할 일의 절차, 방법, 규모를 미리 헤아려 작정함 또는 그 내용이라고 풀이했다. 앞으로의 일이고, 미리 헤아려 정하는 것만큼 그 사이에 무슨 변수가 생길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실현되면 좋고 안되였더라도 그냥 희망사항을 갖고 살았던 세월에 만족하는 것도 일종의 삶의 방식이다. 모든 게 다 예측가능하다면 그건 미래가 아니라 창작 소설이다. 그렇다고 아무 목적도 정하지 않고 살면 또 동력이 부족하다. 물론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현재도 진행형이지만. “나는 아무 생각없이 삽니다.” 90년대 중반에 한국의 모 연수원 부장이 연회상을 돌며 술을 권할 때 했던 말이다. 이분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겠지만 나는 그 말이 아주 부럽고 멋있어보였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건 아무 걱정이 없다는 말로 들어도 된다. 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할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25    자숙-가까운 사람에게 주는 상처(궁금이) 댓글:  조회:303  추천:0  2020-12-08
글 궁금이 · 방송 구서림   您的浏览器不支持 audio标签 가까운 사람 사이에는 흔히 허물이 없다고들 얘기한다. 이 허물이 없다는 표현에는 어찌 보면 막해도 된다는 숨은 뜻이 자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주에도 가까운 친구들이 오랜만에 소범위로 모였었다. 좋은 술을 마시며 화기애애하게 마무리하면 좋은데 가운데 내가 또 넉두리를 했다. 이튿날에 후회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니 어쩔수 없다. 그렇다고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애매하다. 무슨 일이냐 하면 많지도 않은 네명의 단체방에서 왜 문자를 씹냐는 거였다. 누가 원해서 만들어진 단체방도 아니고 끌려들어왔는데 답을 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나만의 자대로 다른 사람에게 답을 강요한 것으로 됐다.  “나에게도 사정이 있어.” 친구의 이 답을 듣고나니 더 미안한 마음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다른 일들도 많이 돌아보게 된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 처사보다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참 포용심이 많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다른 한 친구한테 상처를 줘서 멀어질뻔 했던 적도 있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가까운 사이라는 전제하에 롱담을 막 던졌는데 거기에 여러차례 뼈가 있었나 보다.  “나를 그렇게 아프게 하고 속이 편했을가?” 지금도 정확하게 어떤 일에서 어떻게 잘못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여러 사람 앞에서 내가 적절하지 못한 말을 했던건 분명한 것 같다. 나중에 서로가 풀고 다시 좋은 사이로 돌아왔지만 그 뒤로 말을 조심하게 된다. 굳이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조금 자제해야 된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가. 자기 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성의가 부족한 원인이다. 모멘트에서 이런 글을 봤다. “가장 사람을 애석하게 하는 것은 분명 익숙한데 나중에 점차 낯선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뜨끔했다. 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상처를 주면서 우리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사이로 바뀌여 간다. 그런 결과도 무서운 일이지만 그 결과의 원인을 모르는 게 더 두려운 일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아픈데 상처를 준 사람은 그 리유조차 모른다고 할 때 상대방의 아픔은 배로 커진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 하니 모든 걸 다 주는데 왜 날 울리니” 이 노래 가사가 다시 되새겨지는 대목이다. 누구도 배려를 의무로 안고 태여나지는 않는다. 그런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사람은 리기적이 된다. 배려에는 믿음이 가장 큰 전제이다. 내가 배려할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행해지는 감정활동이고 이 믿음이 깨지면서 받는 충격은 믿었던 만큼의 깊이로 사람을 아프게 한다.  상처는 장기간 쌓아온 친분에 대한 자아훼손이다. 바로 장기간 쌓아왔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치유가 됐더라도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들이 하나둘 쌓이면 결국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온다.  여린 마음이란 표현이 있다. 여리지 않은 마음도 있을가 싶다. 마음은 다 여린데 받는 충격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도를 튼 성인일지라도 겉으로는 보여지지 않을 수 있지만 속으로 흘리는 눈물은 반드시 있다. 그게 정상적인 인간의 심리체계이다.  가까운 사람은 리해심이 깊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서는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그럴수록 시간이 흐르면서 웬만하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된다. 개미구멍으로 둑이 무너지듯이 티가 나지 않는 상처가 고이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심지어 나중에는 왜 그렇게 되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마음이 식어간다.  이미 구겨진 종이장은 아무리 지극정성을 넣어서 펴놓는다고 해도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종이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식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재가열을 한다고 해서 원래의 온도를 회복하기 힘들다. 가령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드려진 음영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날 같은 충격을 받으면 또다시 급속히 랭각된다. 이렇게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가열 세포가 다 소진돼 복구가 불가능하다. 양몰이 소년이 승냥이가 왔다는 거짓말을 해서 진짜 승냥이가 왔을 때에는 사람들이 더는 믿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세상은 넓고 인연은 유한하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럴 열정과 에너지도 없거니와 어떻게 보면 그런 수요가 없을 수도 있다. 인정세태를 다 겪은 마음에서 웬만한 자극은 별로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리고 잔잔한 상태가 오래갈수록 파도가 싫어진다. 고저장단이 없는 감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인연들이 더 소중하다. 묵은지는 은은한 맛에서 그 매력이 오래 간다.
124    새 세기 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난 ‘고향’의 새로운 표상 댓글:  조회:178  추천:0  2020-11-17
새 세기 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난 ‘고향’의 새로운 표상 김옥철 1. 들어가며 조선족문학은 만주시기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 연구성과를 축적해오고 있는 문학분야이다. 현시대를 보면 조선족문학은 단순히 한국문학이나 중국문학의 범주 속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이 가능한 리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족문학이 탄생할 수 있는 독특한 자양분과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20세기의 이주문학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디아스포라적 경험은 조선족문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채를 띠게 한다.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고려할 때 우리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은 한국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과 일부 다른 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주의 경험을 지닌 조선족에게 최초의 고향, 즉 20세기 30~40년대의 고향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원적인 표상이다. 하지만 새로운 현실을 바라보고 낯선 지대에 정착하기 위해 ‘고향’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원적인 표상은 부득불 변화를 가져야 했다. 그리고 건국 이후에는 정치적 리념을 문학적으로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된 현실에 대한 수용은 고향의 표상을 변형시키면서 과거와의 매개점을 찾고저 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발표된 조선족 시에 관련된 연구 성과들을 보면 많이는 20세기 30~40년대, 즉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기에 형성된 간도 지역 문단과 그것을 토대로 성립된 중국조선족문학을 연구해왔다. 이러한 문제점들로부터 출발하여 본고에서는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조선족문학에서 고향의 표상은 어떠한 양상으로 변형 및 수용되였는가 하는 점을 고찰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본고는 새 세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에 대한 표상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2. 90년대와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고에서 말하려는 1990년대와 새 세기의 조선족문학에서 나타나는 ‘고향’에 관한 시에서는 이러한 표상을 찾아볼 수 있다. 떠나간 하늘이 가슴에 흘러들면/ 속삭이는 먼 별이 내 꿈속에 돋아나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개산골의 메밀꽃/ 젊은 엄마 모시수건 못내 그립소// ―〈향수〉(김학송 1990년) 우의 시에서는 ‘속삭이는 먼 별’, ‘개산골의 메밀꽃’과 ‘모시수건’ 등 많은 이미지들을 리용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렸다. 이처럼 9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사실상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시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시가 부단히 창작되는 반면 고향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보여주는 시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무너질듯한 도시에/ 밀려드는 사람… 사람…//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그립다〉(김학송 1993년) 우의 시는 1993년에 창작된 김학송의 〈사람이 그립다〉이다. 시 속에서 화자는 “무너질 듯한 도시에/ 밀려드는 사람…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표현했다. 하지만 진정 ‘무너질 듯한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사실상 화자가 말하려는 것은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개선하려고 도시로 밀려들었지만 진정 사람으로서 간직해야 하는 인성이나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느꼈던 이웃 사이의 다정한 정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무너질듯한 도시’에서 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지만 옛 추억 속에 살아있는 따스한 온기와 이웃 사이의 정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는 진정한 원인이 되겠다. 날로 늘어나는 생활수준에 비한 인성의 메마름과 옛 고향에서 느낄 수 있었던 풋풋한 정감의 소실, 이는 현시대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점차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는 고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바로 이러한 ‘밀려드는 사람…’과 동시에 조선족문학중 고향에 대한 새로운 표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녹 쓴 자물통 하나가 입을 꼬옥 다물고/ 지긋이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주인 없는 빈집 교대도 없이// 주인은 통도 크게 큰집 한채를/ 저 죄꼬만 자물통에 다 맡겨놓고/ 흔연히 먼길 떠났습니다// 미련도 없이 시름도 잊은듯/ 집도 맡기고 재산도 맡기고/ 래일의 기대와 희망마저 몽땅 맡기고 간/ 막중한 사명 때문에 자물통은/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합니다// 오로지 주인이 남기고 간/ 그 부탁 명심하고/ 깊은 밤 쇠망치에 몰래/ 정수리를 얻어맞으면서도/ 입만은 꼭 앙다물고 열지 않으려/ 신음하듯 아픔을 내뱉는/ 저 작은 보초군이 안스러워/ 처마밑 호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지나가는 바람이 흔들어보다/ 어둠 내쏘는 뚫린 창문이/ 마치 피리구멍인듯 입술을 바싹 대고/ 위로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피리소리 한바탕 내고 갑니다/ ―〈자물통― 어느 시골 마을에서〉(강효삼 2016년) 2016년에 창작된 강효삼의 시 〈자물통〉은 비교적 간단한 구성이다. 화자는 자물통을 인용하여 한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버려진 집에 대해 묘사했다. 여기서 비교적 독특한 것은 강효삼은 시에서 “주인은 통도 크게 큰집 한채를/ 저 죄꼬만 자물통에 다 맡겨놓고/ 흔연히 먼길 떠났습니다// 미련도 없이 시름도 잊은듯/ 집도 맡기고 재산도 맡기고/ 래일의 기대와 희망마저 몽땅 맡기고 간/ 막중한 사명 때문에 자물통은/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합니다.”라는 구절들을 인용하여 주인이 떠나게 된 ‘원인’을 서술했다. 주인은 ‘래일의 기대와 희망을 안고’ 흔연히 떠난 것이였다. 기대와 희망을 안고 흔연히 떠난 주인과는 달리 자물통한테 남은 것은 슬픔 뿐이다. 홀로 남은 자물통은 “깊은 밤 쇠망치에 몰래/ 정수리를 얻어맞으면서”도 자신의 ‘직무’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물통을 알아주는 것은 오로지 ‘처마밑 호미’와 ‘피리소리를 내는 뚫린 창문’ 뿐이다. 이처럼 강효삼은 ‘자물통’을 이미지화하여 ‘주인’들이 떠나고 난 ‘집’들의 모습을 그렸다. 슬프고 쓸쓸한 집들을 말이다. 이 시는 2016년에 창작된 만큼 사회문제인 농촌인구 류실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강효삼은 ‘주인’들이 떠난 후의 슬픈 모습을 그리는 동시에 일정한 희망도 남겨주었다. ‘자물통’의 주인은 ‘집도 맡기고 재산도 맡기고’ 갔을 뿐만 아니라 ‘래일의 기대와 희망마저 몽땅 맡기고’ 떠났다. 그리고 어떠한 ‘망치질’과 ‘녹’이 쓸어도 ‘자물통’은 자신의 입을 열지 않았다. ‘주인’이 맡기고 간 책임 때문이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주인의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마밑에 걸려있는 호미’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돌아와 다시금 호미를 잡고 일해야 하는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처마밑에 걸려있다. 이는 어찌 보면 언젠가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화자의 작은 바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 속에서 이미지화된 ‘굳건한 자물통’과 ‘처마밑에 걸려있는 호미’는 우리들한테 이러한 희망을 남겨주고 있다. 3. 결론 우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90년대와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문학중 고향에 대한 표상은 향수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떠난 후의 서러움과 슬픈 감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사회의 소용돌이와 개혁개방이라는 큰 환경하에서 날로 부유해지는 생활환경과 변화되는 조선족들의 정체성과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가지게 되는 응당한 변화인지도 모른다. 고향은 출생과 성장의 근원적 장소이자 정신적 기원이며 정체성의 뿌리로 여겨지는 장소이다. 고향은 구체적인 동년시기의 기억 뿐만 아니라 세대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 공간과는 달리 실제적인 장소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또한 고향에 대한 애착은 공통적인 인간의 감정이며 고향에 대한 애착, 특히 토지에 대한 애착은 정착민이라는 특수한 개체의 근원적인 정서이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이와 같은 감정은 마음이나 관념 속에서 규정된 지리적 개념으로 상상되고 인식된 공간이지 어떠한 구체적인 장소나 지리적인 위치에 속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고향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대한 인식은 항상 동일한 물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부동한 시기의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부동한 표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고향’은 실질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이야기되는 것에 의해 드러나는 공간인 것이다. 1990년대와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시인들은 이러한 사상에 비추어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다. 례를 들어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김기덕시인의 〈콩〉, 석문주시인의 〈고향의 살구나무아래에서〉와 전옥선시인의 〈귀향길〉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이중 김기덕의 〈콩〉에서는 “고향을 떠난 삶에 해살이 여뭅니다”와 같이 새로운 제2의 고향을 그렸고 석문주의 〈고향의 살구나무 아래에서〉는 ‘숙’이라는 녀성과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향수의 정감을 나타냈다. 길림신문                                                          
123    틈과 선 사이(궁금이) 댓글:  조회:283  추천:0  2020-11-13
  글 궁금이 · 방송 전금화     아침에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또 담배연기 냄새가 가득하다. 전에는 엘리베이터에 카메라가 없어서 자각이 되지 않는구나 생각했는데 제3의 눈이 지켜봐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일관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아빠트관리사무소는 이를 의식했는지 뒤늦게야 엘리베이터에 “흡연금지”라는 팻말을 붙여놓았다. 그래도 소용없다. 이 정도 자질이면 “흡연금지라고만 했지 어디 불을 붙인 담배를 들고 타지 말라고 했냐”며 발뺌을 할 사람들이다. 이게 사회규범의 틈이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엘리베이터를 타기전에 한대 붙여서 입에 문다. 그러면 담배 한대를 다 태우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그러면 담배를 끄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타게 된다. 그 안에서도 담배를 빨아서 연기를 뿜어낼 정도의 인간은 없다. 그래도 타는 담배에서 연기가 피여오르는 건 막지 못한다. 하물며 아빠트 복도도 공공장소이니 시작부터 잘못된 행동이였다. 이게 사회규범의 선이다.   “될수록이면 일찍 다니시지.”   직장 상사들이 많이 하는 말씀이다. 하도 지각을 밥먹듯 하길래 지적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이 늦지도 않고 애매하게 출근시간을 저울질하며 대밑에서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선을 넘은 것이고 후자는 틈을 노린 행동이다. 내가 1분을 앞두고 왔어도 분명 지각이 아닌데 뭘 지적하냐고 하면 당당한 경우이고 고작 1분을 늦었는데 뭘 그걸 갖고 쪼잔하게 따지냐고 하면 뻔뻔한 경우이다. 이렇게 어떤 경우에는 틈과 선 사이가 종이 한장의 차이이다.   틈은 찾으려고 눈만 밝히면 도처에 널려있다. 아무리 완벽한 법률이나 법규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주관적으로 만드는 것인만큼 모든 경우를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그러면 틈새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골문을 살살 스치면서 지나가지만 백번이면 백번을 골문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일단 들어가면 뒤에 그물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이런 교묘한 수법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갈수록 로련해지고 능수능란해진다. 법의 선에서 찰랑찰랑 넘칠가 말가 아슬아슬하게 망을 벗어나 리익의 극대화를 실현한다. 총명은 총명인데 소총명이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수도 있다. 어찌됐든 고도의 집중력으로 로심초사하면서 들인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    “탐관 치고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달변가 기효란”이란 드라마에서 기효란이 한 말이다. 부정수단으로 부를 축적하는 비리 관리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성사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지런하다는 자체는 좋은 의미의 단어인데 그걸 어디에 쓰냐에 따라서 결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부지런히 틈새만 노려서 여기저기서 기교만 부리고 결국 성과는 자기 주머니에 넣는 그런 부지런함이라면 갈수록 심산이다. 돈에 눈이 멀면 점점 눈가리고 아웅을 연출하게 되며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자아위안하에 모든 틈새를 노리게 된다. 그 틈새가 개미구멍이 되여 저수지 댐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다. 혹은 아예 할 생각이 없다. 결과 브레이크가 풀린 운전석에서 가속페달만 부지런히 밟게 된다.    한국에는 김영란법이라고 있어서 공직자들이 한화로 3만원 이상의 식사초대나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되여 있다. 이 법이 발효되자 식당들에서는 2.99만원짜리 식단을 만들어냈다. 걱정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액수를 최대한 채워서 편하게 드시라는 틈새전략이였다.  3만원은 선이고 100원은 틈이다.    어떤 한식점에 가면 테이블당 밑반찬을 한세트씩만 올린다고 규정했다. 그러면 한 테이블에 네명이 앉든 한명이 앉든 밑반찬을 똑같게 올린다. 네명인데 더 달라고 하면 종업원은 그게 이 식당의 규정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 짓궂은 손님은 네명이 테이블 네개에 갈라 앉았다가 밑반찬이 오른 다음 다시 합치겠다고 한다. 말이 그렇지 막상 그렇게 실천하는 손님은 없지만 식당의 규정이나 종업원의 령활성에도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한세트를 아끼려다 두세트를 추가로 손해보는 장사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에 관계없이 너무 한고집으로 선을 그어도 다른 틈이 생겨나는 수가 있다.   령활성의 반대어로 고지식하다는 말을 쓴다. 한때 한국에서 성희롱을 하는 세상 나쁜놈을 다 잡아낼 것처럼 떠들었던 미투가 요즘은 왠지 잠잠하다. 세상이 전과 많이 달라져서 언급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쁜놈이 한명도 없이 다 사라져서 그런지는 알 길이 없지만 미투는 틈과 선 사이에서 어지간히 어려운 문제였다. 허물없이 대해주고 친화력이 있으면 틈을 주는 것 같고 만날 정색을 하고 선을 그으면 잘난 척 한다고 비웃는다. 미투가 하두 들끓으니 어떤 회사는 회식 때 녀성들을 배제하거나 비서직에는 아예 녀성을 두지 말자는 주장도 제기되였었다. 도를 넘으면 틈이나 선이나 다 그렇게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다.   틈은 막아야 하고 선은 지켜져야 하지만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기준에 따라 틈도 허용이 되는 때가 있고 간혹 무의식간에 선을 넘을 수도 있다.    다 사람에 달렸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22    연예인의 명과 암(궁금이) 댓글:  조회:248  추천:0  2020-11-04
  글 궁금이 · 방송 구서림     아침에 후배로부터 박지선씨에 대해 쓰라는 엉뚱한 부탁을 받았다. 후배들에게 잘 보여야 회사 생활이 편안하고 대접도 받는다. 그래서 어명이 떨어졌으니 흉내라도 내야 한다. 이 후배가 글을 쓰라는 리유는 이러하다. “한국에 있을 때 홍대 근처에서 떡볶이를 같이 먹으면서 똑똑하고 밝고 웃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하루 사이에 저세상 사람이 됐으니 충격입니다.”  아직 사인에 대한 정확한 발표는 없으나 함께 간 모친의 유서로 추정되는 메모지에는 “딸이 피부병 때문에 힘들어했으며 최근 다른 질환을 치료하는 과정에 피부병이 악화돼 더 힘들어했다. 딸만 혼자 보낼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뉴스는 어제 오후 2시 51분에 올라왔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나온 박지선씨는 지적인 미에 사람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주는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36세를 일기로 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최진실씨로부터 구하라씨에 이르기까지 한국 연예인의 극단적인 선택은 TV에서 보여지는 광환 배후에서 겪는 그들만의 고충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왜 정상급의 배우에서 한시기를 풍미한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을가. 대중들에게 문화생활을 선물하면서 그들은 내심의 압력을 이겨내야 했고 외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했다. 인기가 떨어져도 문제고 인기의 정상에서 미세한 실수를 저질러도 치명적이였다. 사람들은 항상 유명인에 대한 평가에서 관대하지 못하다. 같은 실수도 연예인이 저지르면 몇배씩 확대하여 들여다 본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권리가 있는데 이 사회는 흔히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대한다.   36세에 나는 뭘 했을가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주변의 36세의 후배들을 보면서 얼마나 아까운 나이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무슨 넘지 못할 산이 있어서 그런 선택을 할가 싶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말 넘기 어려운 산을 만나는 게 생명의 숙명이다. 문제는 숙명을 어떻게 능동적인 삶으로 전환하는가에 달렸다. 쉽지는 않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연예인은 인기를 얻는 동시에 내 삶이지만 온정한 내 삶을 살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건 본인의 의지에 의해 좌우지 되는 일이 아니다. 얼굴이 알려지는 순간 마음 편하게 길거리를 다니기도 힘들다. 인기에 의한 세간의 관심은 고마운 일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량날의 칼이다. 인기를 누려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그런 경지에서 연예인은 호랑이 잔등에 탄 립장이다. 내려오는 순간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하물며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호랑이외의 야생동물들이 도처에 서식하고 있다. 이들은 식성에 따라 먹이감을 노리는 방향과 수단이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방어도 어려워진다. 이럴줄 알았더면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걸. 그러나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 만약이란 없고 후회는 항상 일이 벌어진 뒤에 찾아온다. 창밖을 내다보면 세상은 그렇게 평온하고 회사의 동료들은 따뜻한 커피잔을 홀짝이며 저마다 자기 일에 바삐 돈다. 간혹 타부서의 젊은 친구들은 노래도 흥얼거리며 복도를 지나간다. 아침에 겨우 눈을 떠서 힘들게 출근하지만 그래도 직장이 있다는데 감사하고 하루의 일상이 또 시작된다는데서 희열을 찾고 싶다.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웃으며 완성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원래 록록하지 않은 게 세상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항상 여의한 일만 바라면 그럴수록 못마땅한 일들이 보인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똑같을 리 없고 다른 사람의 기준이 내 표준과 다를 수도 있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내 입안의 혀도 씹을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혀가 돌아가면서 나오는 말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비방과 중상과 뒤담화도 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제조되는 것이니 막을 수는 없지만 내 입만은 단속이 가능하다. 한마디를 해도 타인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게 돌아오는 말도 곱게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다. 내 입인데 내 스스로 더럽힐 리유가 뭐가 있을가. 올해에는 그 공포스러운 신종코로나바이러스도 이겨냈고 2020년도 이제 두달을 남겨두고 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 친구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에도 다리맥이 풀렸다. 수시로 구급차의 경보음이 울리고 복도에서는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가 밀려다닌다. 옆에서 보는 것도 속이 떨리는데 당사자의 고통은 얼마나 심할가. 아프지 않으면 부자라던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한편 매일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존경스럽고 그들은 어떤 월등한 대우를 받아도 응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다른 욕심은 여러가지로 부리면서 상대적으로 건강에 대한 민감성은 그다지 높지 못하다. 운동에는 게으르고 음주에는 부지런하다.  평범하게 오래 살자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하루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21    [문학닷컴](단편소설)아, 모성애는(황기철) 댓글:  조회:235  추천:0  2020-11-02
단편소설   아, 모성애는   황기철   화창한 여름날 해맑은 아침이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있는 중년교수 현영학은 과부 전옥선을 만나려고 장춘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전옥선은 현영학의 고중시절 한학급 동창생이며 현영학이 첫사랑을 고백했던 첫 련인이다. 그러나 후에 여차여차한 원인으로 일이 탈리다보니 전옥선은 현영학이와 갈라지고 그의 딱친구인 강대룡의 품에 안기게 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해가 뜨고 달이 지며 세월이 흘러흘러 20여년이 지나간 오늘 사정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였다. 그들 세사람의 마음속에 자리를 틀고 앉았던 많은 일은 옛추억으로 남았고 홀애비로 된 현영학은 다시 청혼길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1 기차가 목적지에 이르자 현영학은 무거운 두 다리를 놀리며 마지막 사람으로 기차에서 내렸다. 비록 집에서 용단을 내리고 떠났고 성사할 가능성이 백프로라고 확신한 터이지만 어쩐지 마음은 설레이기만 했다. '내가 옥선이의 속내도 모르고 대룡이의 말만 믿고 이렇게 떠났다가…' 그 시각 그는 또다시 자기의 판단을 검토해보았다. 이왕사가 토막토막 무어져 긴 필림으로 되여 그의 머리 속에서 돌아갔다… 지난해 초여름 어느 일요일에 있은 일이다. 현영학이 서재에서 력사자료를 뒤지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문을 연 영학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룡이, 이거…” 영학이는 지나친 자책감으로 하여 뒤말을 잇지 못했다. 워낙 그는 이틀 전에 한 친구에게서 대룡이가 위암으로 지구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인차 문병하러 가려던 참인데 급한 일을 마무리느라고 여직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 일년이나 보지 못한 대룡이 쪽에서 먼저 지친 몸으로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마음은 여간 쓰리지 않았다. “뜻밖일테지? 단 한번이라도 더 보고퍼서 왔네. 의사가 극구 말리는 것도…” 대룡이는 영학의 낯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용서해달라구. 대룡이 내가 너무 무정했네…” 둘은 부둥켜안았다. 옛정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그들 둘의 눈에는 다 물기가 어렸다. 그들은 고중시절에 한집에서 하숙하며 한가마밥을 먹었고 추울 땐 이불을 겹덮고 딩굴며 장래를 꿈꾸어왔다. “꼭 만나고싶었어! 저승에 가더라도 정만은 못 잊겠네.” 대룡이의 목소리는 피리의 청처럼 떨었다. 영학이도 가야금줄처럼 떨리는 손으로 대룡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영학이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미안하네 미안해. 헌데 허수한 생각은 말라구. "하늘이 무너져도 이 대룡이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 자네가 아닌가? 너무 상심하면 몸이 축가네.” “하긴 그렇기도 해. 시초에 이 세상을 하직한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무섭던지 온몸에 소름이 끼치데. 헌데 사람마다 한번씩은 다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더니 대수롭지 않더군…” 강대룡의 눈에서는 삶의 정열이 불처럼 타고 있었다. 영학이는 위안할만한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대룡이, 마음을 크게 먹자구! 또 과학도 좀 믿어야지…” “병원에서 원장질을 하는 내가 아무리 둔하기루 앞길을 몰라서 큰 병원에 온 줄로 알아? 옥선이와의 정두 떼구… 아들애에게 공부할 시간두 주려는거야… 그래서… 자, 이런 말 그만두자구!” 영학이는 또 머리가 무거워지는감을 느꼈다. 자기가 죽은 뒤엔 안해더러 남편을 덜 생각하게 하려고 정을 뗀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장하며 죽기 전에 아들의 정성도 마다하고 시간을 더주어 대학교에 보내려는 아버지로서의 그 마음이 또 얼마나 기특한가! 영학이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었다. “자넨 가슴이 만리장성 담벽보다 더 넓은 사람이야!” 이건 영학이가 그 앞에서 처음 하는 말이 아니다. 영학이는 대룡이의 됨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고중졸업을 앞둔 어느날이다. (그때는 “투쟁고리”를 단단히 틀어쥐던 때다) 옥선이네 부모가 영학이의 가정출신이 나쁘다고 그들의 혼사를 막아나섰다는 말을 들은 대룡이는 영학이와 상론도 없이 점심밥을 조겨먹고 30리길을 걸어 옥선의 부모를 찾아갔다. 그는 학급공청단 서기의 신분으로 옥선이의 부모 앞에서 영학이네 집에는 큰 력사문제가 없다고 해석했고 영학이는 재능 있는 학생이여서 전도가 양양하다고 하면서 자랑을 아끼지 않았었다. 차차 로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중매군답게 절까지 꾸벅 했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고 가라는 로인들의 만류도 마다하고 밤도와 학교에 돌아와 영학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영학이, 옥선의 부모가 동의했어. 한턱 내라구!” 대룡이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영학이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만둬야겠어. 난 옥선이의 한생을 책임질 것 같지 못해… 후유…” 그때 학급장직을 맡았던 현영학은 학습에서 첫손에 꼽혔다. 그러나 “부농분자자제”란 딱지가 붙은 자기가 전 학교에서 “고분이”로 불리우는 옥선이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녀의 한생에 대한 유린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바보같은 소릴! 너 머리가 돌지 않았니?” “넌 모를거야. 난 요즘 강한 정치적 위압감을 느끼고 있어. 난 자기가 겪어야 할 재난을 옥선에게 나누어주고 싶잖아!” 결국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옥선이가 배신한것이 아니라 영학이가 뒤걸음질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에헴!” 대룡이의 기침소리가 영학이의 회억을 깨뜨렸다. 대룡이는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학이, 한가지 청이 있어 왔네.” “무슨 청인가?” 영학이는 한번 더 자책감을 느꼈다. 아픈 몸을 지탱하여 찾아온 대룡이를 생각하니 기대가 실린 그의 눈을 보기마저 지어되였다. “어서 말하라구.” “나의 청을 꼭 들어주겠다고 다짐해야 말머리를 떼겠네.” “자넨 내 마음이 얼음처럼 식었다구만 생각하나? 아니야. 내 마음은 친구의 정으로 단대루 있어. 어서 말하라구.” 20여년간 딱친구로 사귀여온 영학이로 말할 때 이 시각 사경에서 헤매는 그의 청을 들어준다는건 조금치도 주춤거릴 일이 아니였다. “들어주잖구.” 한동안 머리를 떨구고 묵상에 잠겼던 대룡이는 믿음으로 이글거리는 눈길로 영학이를 보았다. “꼭 들어주겠나?” “들어주구말구. 갑갑하네, 어서 말하라구!” “옥선이와 결혼하라구!” “뭐야?” “옥선이와 결혼하라구!” “뭐 뭐… 자네 정신나가지 않았어?” 영학이는 입을 벌리고 눈빗질만 했다. “아니야 생각하고 생각던 끝에 청을 드는거네. 살아서 마지막으로 드는 청이네.” “에익, 사람두, 그것도 말이라구 하는가? 자네 날 그렇게 보나?” 대룡이는 영학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랑을 놓고 영학에겐 한가지 지조가 있었다. 그것은 “친구의 련인과 치정을 나눌수 없다, 그런다면 친구를 잃게 된다”는것이다. 그래서 대룡이와 옥선이가 결혼한후로는 그들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지만 옥선이를 만나도 말도 잘 건네지 않았던것이다. “자네를 잘 아니까 하는 말이네. 영학이, 래일이면 황천으로 갈 사람의 청이니 꼭 들어주게나. 이건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갈 유언이구 황천에 가서두 바랄 소원이네. 꼭 들어주게.” “내가 자네를 놓구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이 영학이 인간값에 가겠나? 짐승같은 소린 그만두라구!” “이보게 영학이, 산 사람의 소원도 풀어줄라니 사형선고를 받은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나?” 대룡이는 영학의 두손을 잡아끌며 애걸하다싶이 말했다. 그러나 영학이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자네 친구의 정마저 깡그리 갖고 가려나? 안되네, 안돼!” “진정 옥선일 사랑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자네뿐이네. 또 옥선이가 사랑해야 할 사람두 자네지. 다른 조건이야 꺼릴 게 있나? 삼복이 문제겠지. 그 애 근심은 말게. 대학교에 갈 준비도 돼있네.” “제발 비네. 삼복이 때문이 아니야. 난 친구간의 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싶네.” 영학이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자네 잊었나? 삼복이를 보았을 때 자넨 나보고 뭐라 했지? "영학이 자넨 딸을 보라구. 그래야 우리들이 사돈을 맺구 늙어서두 걔들을 보면서 살지?" "허허허, 사돈끼리 어찌 한집에서 사나?" 나의 말에 자네가 또 뭐라고 했나? "사돈이랄게 있나? 동창생이라면 그만이지." 그때로부터 난 걔를 제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는거야. 그러나 옥선의 일만은 안되겠네… 더 말치 말라구!” “난 믿겠네. 황천에서라도 날 눈 감게 해주게.” 그 때로부터 일년이란 시간이 무정하게 흘러갔다. 2 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옥선이는 영학이를 맞으러 부랴부랴 역전으로 가고 있다… 사흘전에 영학이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로부터 옥선이는 낮이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망설이였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해 갈개였다. 옥선이는 영학이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지만 오늘 이 때까지도 그 때 그와 갈라진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대룡이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시집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기가 꼭 걸어야 할 인생길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남편이 림종전에 영학이의 말을 꺼낸 뒤로는 어쩐지 영학이의 말만 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녀인의 인생은 이토록 기묘해야 하는지? 남편이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밤도 옥선이는 “당신들끼리 손을 잡으라구!” 하며 눈을 감던 남편의 일이 떠올라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것은 지난해 대룡이가 영학이네 집에 갔다 온지 달포가 지난 어느날이다… 남편의 병세가 급하다는 장거리전화를 받은 옥선이는 그 자리로 택시를 불러 타고 지구병원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이미 구급실에 옮겨가 한창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병실에서는 주임의사 한분과 녀간호원들이 구급대책을 대려고 황급히 돌아쳤다. 옥선이가 병실에 들어서니 아들 삼복이와 영학이가 마주나왔다. “옥선이, 마음을 크게 먹어야겠소.” 영학이는 옥선이를 위안하느라고 이렇게 말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무엇한 감이 들었다. 자기가 의사의 당부를 잊고 그런 말을 한것도 그러하거니와 자기의 처지에선 그런 말을 입에 바르지 말아야 했을 것이라고 그는 후회했다. “그새 수고 너무 많았어요.” 옥선이는 이렇게 한마디 말만 건네고 곧추 남편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벌써 눈물이 앞을 가리워 남편의 모습을 똑똑히 볼수 없었지만 의사로서의 직감적인 느낌으로도 남편은 자기가 왔던 사흘전보다 퍽 수척해졌고 앞길이 멀지 않았다는 걸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보세요… 흑흑, 정신을 차리세요. 제가 왔어요.” 사랑의 힘이란 그렇게도 강력한 것인가? 신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영학이를 불러오라고 삼복에게 당부하고 나서 여직 혼미상태에 있던 대룡이는 안해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인차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대룡이의 눈길은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며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여보세요. 정신을 차리세요. 주임선생이 말씀하시는데 래일부터는 병세가 나아질 거라고 했어요…” 대룡이는 느슨하게 내리깔렸던 눈까풀을 올리떴다. 그의 표정은 안해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안되오. 난 다 알고 있소. 이윽고 흐리마리한 그의 눈길이 안해의 눈에 박혔다. 옥선이도 눈확에 찬 눈물을 뚫고 배추 속 같이 흰 피기 없는 남편의 낯을 내려다 보았다. 대룡이는 왼쪽 손을 들려고 모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옥선이는 인차 그 뜻을 알아차렸다. “팔이 저리세요?” 대룡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옥선이는 침상의 왼쪽에 돌아가 남편의 손을 잡아쥐고 주물러줬다. “영학이… 이리… 오게…” 그의 말은 모기소리 만치 낮았다. “현선생님, 이분이 부르네요.” 옥선이가 머리를 돌리며 영학에게 말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가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있던 영학이는 인차 침상의 오른쪽에 다가왔다. “자, 내… 손을… 잡아주게…” 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이 움직이는 모양에서 그의 뜻을 알아차린 영학이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대룡이는 자기의 두손을 가슴앞에 모이려고 또 모지름을 쓰는 것 같았다. 옥선이와 영학이가 거들어주자 손 여섯이 대룡의 배우에서 한덩어리를 이루었다. “당신들끼리… 손을 잡으라구!” 대룡이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으나 그들 둘은 이번에도 대룡이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난 당신들이 꼭 손잡길 바라네. 대룡이의 시선이 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 둘은 마주보지 않고 낯을 딴 데로 돌렸다. “영…학…이…” 대룡이는 개개풀린 눈길을 영학의 낯에 박았다. 그들 둘의 눈길이 속심을 나누었다. 영학이 내 마음을 알 테지? 알만하네. 헌데 자네… 왜… 믿겠네! 난 자네가 알만하다니 기쁘네… 기뻐… 영학이는 머리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이 시각 그는 무어라고 더 말할 수 없었다. 이번에 대룡이는 안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그끼레한 대룡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피여올랐다. 난 시름을 놓겠소. 마지막 부탁만은 꼭 들어주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왜 당신은 오늘까지도 그런 생각만 하시나요? 옥선이의 눈길과 표정이 남편에게 되물었다. 영학인 좋은 사람이요. 믿어주오…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임잔 나를 만난 후 고생뿐이였지! 삼복이를 출세시키자면 아직도 고생이 막심할 텐데… 그런 말씀 마세요. 웬 근심이세요… 영학인 꼭 도와줄거요… 옥선이는 눈뿌리가 달아올랐다. 얼굴도 더 붉어졌다. 그런 일 근심 마시고 용기를 내세요. 우린 아직 갈라질 수 없어요. 안되오. 난 이미 황천객이요… 옥선이는 영학이를 보기가 무엇하여 고개를 돌렸다. 기실 그들 셋이 다 동창생이고 자기와 영학이와의 관계를 대룡이가 개의치 않는 한 또 그가 지금 “중매군”으로 나서는 형편에서 건너다보는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림) 그러나 옥선이는 남편 앞에서 영학이를 마주보는 것마저 그에게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실 그들 셋의 관계는 그 뿐이 아니다. 워낙 영학이는 옥선이와 대룡이의 중매군이였다. 영학이와 갈라진 후 고중을 졸업한 옥선이는 의학원에 입학하여 대룡이와 한학급에서 공부했다. 그들 둘은 한 책상에서 밤자습을 했고 한 나무 그늘 밑에서 학술문제를 쟁론했으며 학교영화관 2층에 나란히 앉아 “영원한 사랑”을 보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그 누구도 동창생의 한계를 벗어난 일을 한 적 없었고 사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담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졸업실습을 떠나기 전날 저녁 영학이가 불쑥 나타나 그들에게 청실홍실을 이어주었던 것이다… 그 때 옥선이는 영학에게서 “사랑의 참뜻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랑을 양보할 수 있다.”는 도리를 더더욱 깊이 느꼈던 것이다. 병실은 고요했다. 침묵,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는지? 침묵 속에서 사랑의 새싹이 움트고 있는지? 아무튼 그 침묵의 가치는 미의 극치로 재이여야 할 것이다. 이 때다. “주임의사선생님, 병자의 혈압이! 맥박이!…” 겁에 질린 간호장의 새된 목소리가 병실의 괴괴한 침묵을 깨뜨렸다. 이어 산소통이 들어오고 당직의사들이 몰려들었다… 병실에서는 삶과 죽음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다… “뿡―” 기차의 고동이 옥선의 사색을 깨뜨렸다. 옥선이는 역전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3 몸둘바를 모르는 두 남녀가 개찰구 앞에서 만났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마와요.” 이렇게 말하는 옥선이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여오를 대신 그늘이 비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 때까지도 착잡한 생각의 갈피 속에서 채 헤여나오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러저러한 일로 바쁠 줄 아오.” 이어 한동안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제나름으로 속생각을 굴리며 시가지 쪽으로 들어갔다. “공소사식당” 문앞에 이르렀을 때다. 옥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당 저의 집에 모셔야겠지만… 너무 수선해서요… 량해하세요.” “너무 사양하면 의려 송구스럽지.” 로서구진에서 제일 큰 식당이라고 하는 그 식당은 독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강당처럼 널직하고 스산한 통칸 하나 뿐이였는데 가운데 둥근상 여덟개가 두줄로 놓여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아직 점심손님들은 한 사람도 없고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서 들어온 큰 검둥개 한마리가 씩씩거리며 그들을 싸고 분주히 돌아칠 뿐이였다. 이윽고 료리 세접시가 들어왔다. 옥선이는 풋고추소고기볶음과 소천엽회를 받아 영학의 앞에 놓고 제 앞에는 소갈비찜을 놓았다. 이어 통닭국이 들어왔다. 옥선이는 병마개를 뽑고 영학의 술고뿌에 청주를 부으며 말했다. “이 고장의 특산이예요. 좀 쓰기는 하나 향긋하다고들 하더군요.” 영학이가 술고뿌를 받아들려는 순간 혀를 빼들고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상 밑에 앉았던 그 개가 돌아치다가 영학의 구두를 밟았다. 그가 흠치 놀라는 바람에 술이 상판에 쏟아졌다. 옥선이는 상을 닦고 술을 다시 부을뿐 그 개를 쫓아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분이 잡치기는 했지만 영학이는 내색을 내지 않고 잔을 들어 단모금에 굽을 냈다. 영학이가 술을 마시는 사이에 옥선이는 저가락으로 큰 갈비찜 두개를 집어 상 밑에 던졌다. 개는 좋아라고 그걸 받아물었다. 영학의 마음은 여간 언짢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 개가 돌아치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자기가 먹어보기도 전에 개에게 코밑진상을 하다니! 정말 말이 아니였다. 그는 옥선이의 거동이 저으기 섭섭하게 생각되였다. 영학이가 두번째 잔을 쳐들 때다. 그 개가 돌아앉으며 꼬리로 그의 미색바지에 검은 흙줄을 그려놓았다. 그는 골이 나서 벌떡 일어서며 그 개의 배를 들이찼다. “어마나!” 옥선이가 부서지는 소리를 치며 영학이의 팔을 힘껏 당겼다. “제발 놔두세요!” 옥선이의 낯이 새파래졌다. “왜서? 사람과 개가 한 상에서 먹는 법이 어디 있소. 아무리 시골이기루…” 영학이가 옥선이를 직시하며 하는 말이였다. 그의 목소리는 자못 거칠었다. “용서해줘요. 저 개가 새끼를 밴 듯해요.” “뭐라오? 새끼를 뱄는 데는?” “그놈이 제가 먹고싶어서 그랬겠어요? 배 안에 든 새끼를 생각해서겠지요!” “엉? 새끼를 생각해서…” 영학이는 짚이는 데가 있어 상 밑을 내려다보았다. 배가 물동이만치 크고 신강포도알만큼 큰 젖꼭지를 주렁주렁 단 개는 겁에 질려 화등잔만한 눈으로 영학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영학의 머리 속에서 한가지 생각이 번개쳤다. '옥선이의 모성애가 저 개를 어루쓸어주고 있구나!' 그 시각 영학이는 인간학을 탐구하고 있는 사회학자로서의 자기와 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는 의학자로서의 옥선이의 차이점을 심심히 느꼈다. 옥선이가 또 갈비찜을 집어 문쪽에 던지니 개는 날래게 문가로 뛰여나갔다. “미안해요. 시골은 그저 이러해요. 시장하실 텐데 많이 드세요.” 옥선이는 굳어진 분위기를 풀려고 상글상글 웃으며 말했다. 영학이도 덩달아 허구프게 웃었다. 자기가 찾아온 뜻을 이야기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 영학이가 옥선에게 물었다. “삼복이까지 학교에 보냈으니 적적할 테지?” “괜찮아요. 고양이가 매일 저의 동무를 잘해주어요.” 영학이가 바라던 것과는 달리 옥선이의 대답은 생뚱같았다. “고양이와 동무하고 있다구? 거 참 흥미있는 말인데?” “그래요. 제가 '고양이동무'의 이야기 해드릴가요?” 옥선이는 샐쭉 웃으며 아미를 숙였다. “어서 말하오.” 영학의 눈은 호기심으로 찼다. “저의 집엔 누렁고양이가 있어요. 건 우리 병원 간호장이 저에게 준건데 참 귀염성스럽지요.” 옥선이는 음료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고양인 올봄에 새끼를 낳았어요. 생김새는 어미를 닮았지만 털만은 이곳저곳에 검은 점이 박혔어요.” “어미고양인 누렁고양이고 새끼고양인 얼룩고양이라 그런 말이지?” “그래요. 그런데 얼룩이가 난지 둬달 지나서였어요. 바로 일요일날 제가 뜨락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검정고양이 한마리가 우리 집 문앞에 와서 '야웅, 야웅' 하며 울어대더군요. 그래 어쨌는지 아세요?” “글쎄… 그래서? 어서 말하오.” “참 묘하지요. 그 놈이 온 걸 안 어미고양인 새끼고양이를 탁자 밑에 숨겨놓고 혼자 밖으로 나오더군요. 그런데 두 고양이는 만나자마자 맞다들어 싸워대더군요.” “검정고양이에게 맞다들었단 말이지? 왜설가?” “글쎄요. 한참 물고뜯고 하더니 두 고양인 다 피투성이 되여버렸어요. 두 고양이가 어찌나 끈지게 달려드는지 말려낼 재간이 있어야지요.” “별일이군. 그놈들이 척을 진 게로구만…” “그날은 그저 그랬지요. 그런데 옆집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는데 그후 그놈들은 련며칠 그렇게 싸웠대요.” “그래서?” “후에 알고보니 검정고양인 얼룩고양이의 '애비'였지요. 목요일날저녁 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는 없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누렁고양이가 책상 밑에 쓰러져 끙끙 앓고 있었어요…” “'아들'을 빼앗긴 설음이란말이지?…” “옳아요. 난 그 고양이가 어찌나 불쌍하던지요. 사흘후였어요. 제가 퇴근하고 시장에 들려 집에 와보니 그 새끼고양이가 피투성이된 어미고양이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더군요. 그러고보니 그 놈들이 정말 '자식 빼앗기'를 한 게지요. 전 그놈들이 어찌나 귀여운지 사가지고 온 소고기를 다 먹였어요.” “그놈이 왜 새끼고양이를 찾아와야만 하오?” 영학이 의아쩍게 물었다. “영학씨야 아시겠지요. 사랑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진지한 것이 모성애라는 걸요. 짐승도 그런가 보죠?” 함박꽃처럼 환한 옥선이의 낯에서는 자신심이 너울쳤다. “거야 그럴 테지…” 옥선이는 청주를 따르고나서 말했다. “전 때론 이렇게도 생각해요. 사랑은 자사적인 것이여서 외력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고요!” “뭐요? 외력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구?” 영학의 두손은 안개 속에 잠긴 호수물 같이 흐려졌다. 그의 얼굴과 조화를 이루 듯이 개였던 창공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사위는 어둑시그레해졌다. 그러나 수정 같이 맑은 옥선이의 두눈만은 그냥 광채를 뿌렸다. “그래요. 모성으로 말할 때 자식에 대한 사랑을 독점해야만 그 참뜻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지요. 그 속에는 외력이 차지할 자리가 없나보죠.” 자신심에 찬 옥선이의 목소리는 그 언제보다 더 챙챙하게 울렸다. “아?! 모성애는… 모성애는 진정…” 한동안 입속말로 되뇌이던 영학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아, 모성애는…” 옥선이는 입을 철문처럼 닫아버렸다. 옥선이의 눈길을 피하여 창밖에 흘러가는 검은 구름을 넋없이 쳐다보던 영학이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어섰다. 옥선이는 눈길로 영학이를 바랬다. 이윽고 기차의 고동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아리랑 (1991년 12월호) 연변인민출판사
120    외로움의 가치□ 허미란 댓글:  조회:397  추천:0  2020-10-30
외로움은 내 삶에 있어서 불편한 존재인 줄 알았다. 외로움에 빠지지 않으려고 등산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요가하러도  다녔다.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을 떨쳐내려고 모지름을 썼다. 외로움에 빠지지 않으려고 친구들을 불러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나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을 떨쳐내려 발버둥 쳤다.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웃고 떠들다가도 집에 돌아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쳐다보는 순간 또 공허함이 밀려 온다. 외롭다는 느낌이 든다. 우울해 진다. 외로움은 우울증을 불러오는 장본인인 줄 알았다. 외로움은 자살을 낳는 삶의 적인 줄로만 알았다. 미국 방문일정을 끝내고 3월 31일이면 귀국하려던 계획이 산산쪼각이 났다. 상상을 훨씬 뛰여넘는 충격파를 던지고 있는 코로나19가 하늘길을 가로 막았다. 좀처럼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그 기세가 확산되여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있다. 종일 듣는  우울한 뉴스와 안내문자 소리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혹시 내 가족과 친지와 친우들의 감염 소식이 들려올가 두렵다. 어쩌다 먹을거리를 사러나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 끼리도 좀비를 만난 듯 슬금슬금 외면하고 서로 피해간다. 잔뜩 긴장하여 지나치고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황페해지나싶어 쓴 웃음이 나온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데 이 코로나19의 끝은 어디일가?  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온다. 마음이 썰렁해진다. 외로움이 스멀스멀 괴여오른다. 이보다 더 크고 묵직한 외로움이 내 생에 또 있을가 싶다. 이 외로움은 그 무엇으로 달래도 달래야지 안그러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무엇으로 달랠가… 30여년을 교직에 종사하다가 퇴직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하여 필을 든 적이 있었다. 인생 1막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쓰고 싶었던 주제가 참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뛰놀던 생동감 넘치는 내용을 주제로 끄적여보고 싶었다. 언제나 말 없이 한쪽 어깨를 내여주며 때로는 별빛으로 때로는 따스한 해살이 되여준 남편을, 이 어미가 자기의 롤모델이라며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던 딸을  쓰고 싶었다. 내 인생에 든든한 받침목이 되여준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바르게 인도해준 스승님과 선배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동료들과 친구들을 글로 그리고 싶었다. 허나 어찌하다보니 오늘까지 써내려가지 못했다. 아마도 이것이 하늘이 나에게 하사한 기회가 아닌가 싶다.  시작이 절반이라는데 시작해보자.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루 24시간이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불안도 외로움도 오간데 없이 자취를 감춘다. 전업작가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대로 마무리하고 보면 흐뭇함에 읽고 또 읽으며 성공의 희열을 느낀다. 잘 써서라기보다는 삶을 떠나서 쓸 수 없는 글쓰기가 사랑의 달콤함도 가정의 귀중함도 자식의 소중함도 부모의 거룩함도 다시 알게 하기 때문이다. 작품성이 있든 없든, 감동을 주든 안 주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로 인해 힘들었을 이들에게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의 글을 써서 전할 수 있음에 즐겁고 행복하다. 그 어느 한 작가의 글에서, 어중이 떠중이들이 글을 쓴다고 설쳐대면서 사상도 없고 주제도 없는 글을 퍼뜨린다고 일침을 놓은 글을 보면서도 감히 원고를 일간지에, 잡지사에 보내보았다. 너무 감사하게도 아마추어인 나의 시와 수기, 수필이 련이어 신문이며 잡지들에 발표되였다는 소식들이 전해져온다. 하늘을 훨훨 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랑스럽다. 미칠듯이 외로운 난관을 극복하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외로움 속에서도 이렇게 성장해가고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글쓰는 시간만은 나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오직 자신의 길을 좇는 자만이 숨겨진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음을 터득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속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음도 터득했다. 일간지로부터 칼럼청탁이 날아든다. 월간지에 투고된 수기와 수필 원고들이 하나 둘 오케이라는 이모티콘을 보내온다. 인생 2막의 설계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외로움이 준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외로움은 현자의 역할을 하는 좋은 스승임도 깨닫게 했다. 이  아침도 숨을 쉬고 눈을 뜰 수 있게 해줌에 감사함을 알게 했다. 마스크 한장의 소중함도 알게 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보니 무리지어 사는 삶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알게 했다. ‘불행중 다행’, ‘전화위복’… 위안의 말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예전과 다르게 친구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안부메일을 더 자주 많이 받는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외로움은 ‘축복’임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도 나는 뉴욕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나만의 시간을 늘여가는 련습을 한다. 외로움을 절망과 고립,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성찰, 후반생을 새롭게 계획하고 실천해가는 소중한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연변일보 
119    축적(궁금이) 댓글:  조회:221  추천:0  2020-10-29
글 궁금이 · 방송 전금화             있는 만큼 쏟는다. 올해는 년초에 고향에 한번 다녀오고 북경시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보고 들은 것이 적으니 위챗글도 점점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전에는 그래도 서점에서 새책코너라도 뒤져서 자양분을 잘 섭취했었는데 지난 몇달은 역중천 작가의 중화사 20권에만 꽂혀있다 보니 글소재가 별로 없다. 사람이 한가지 일을 석달만 견지하면 습관이 된다고 하던데 글은 왜 습관으로 씌여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서먹서먹한 사람끼리 만나면 갑갑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없는 화두라도 만들어내느라 애쓴다. 그러다 보면 불필요한 화제까지 들춰내는 수가 있다. 불필요하다 함은 공개하지 말아야 할 다른 사람의 비밀일 수도 있고 자기 개인의 사생활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별로 바람직한 공개는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는 안된 일에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 또 그런 부분을 신나게 실어나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 아는 정보는 그것이 어떤 성격의 것이든 만천하에 공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그 정보력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부문을 맡아보니 우리는 한 일에 비해 티를 너무 안냅니다. 그렇다고 다른 부문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적어도 해놓은 일을 충분히 자랑하고 심지어는 부풀려서까지 얘기합니다. 자체 홍보도 적정선에서는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어떤 회사의 상사가 부서 회의에서 한 말이다. 문제는 저 적정선이라는 게 어렵다.낮 일은 새가 알고 밤 일은 쥐가 안다. 보석이라면 어디서든, 언젠가는 빛나게 되여 있다. 벼이삭은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보편 진리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알아주면 좋고 몰라도 내 앞의 일만 하면 된다는 저자세가 통하는 곳이 있고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려운 얘기다.        “자치통감”으로 세인들에게 알려진 사마광은 송신종의 한림학사 임명을 극구 거부했던 사람이다. 거부한 리유 또한 황당하다. 다음은 송신종과 사마광사이에 오간 대화다.       “자고로 많은 군자는 학문이 깊으면 문필이 따라가지 못하거나 문필이 좋으면 학문이 딸렸는데 그대는 량자 다 겸비하고 있는데 왜 한림학사의 임명을 수락하지 않는거요?”       “소인은 조서를 작성할 줄 모릅니다. “       “필요없네. 량한 때 만큼이면 족하네”       “송나라의 관례는 다른 줄로 아옵니다.”       “그대는 진사에까지 합격한 사람인데 조서를 작성할 줄 모른다니 말이 되나?”       여기서 말문이 막힌 사마광은 그자리에서 일어나 줄행랑을 놓았고 황제는 환관을 시켜 쫓아가는 황당한 그림이 펼쳐졌다. 결국에는 황제의 명을 받은 환관들이 임명장을 억지로 사마광의 품에 밀어넣어서야 어쩔 수 없이 한림학사의 자리를 메우게 되였다.        이게 사실인 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승진에 목을 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자치통감”을 완성할 보석이였으니 묻히기도 힘들었다. 머리에 축적된 어마어마한 내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발한 것이다. 천리마라면 굳이 백락이 아니여도 그 출중함은 어디 가지 않는다. 우리는 중학교 때 량변과 질변의 법칙을 배운다. 일정한 량이 쌓이면 반드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게 축적의 강대함이다.       나는 가끔 내가 재학중일 때 선생님들의 년세가 어떻게 되였던지 계산을 해보고 입사했을 때 어마어마해 보였던 선배들의 년세가 어떻게 되였던지를 생각해 본다. 두 경우 다 나보다 어린 나이였었다. 그럼 당시 내가 우러러 봤던 선생님과 선배들에 비하면 나는 어디까지 와 있을가 고민해 보게 된다. 한편 지금 후배들이 나를 보는 시각은 어떨지도 동시에 돌아보게 된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어떤 선배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며 또 어떻게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겠는가 하는 문제다.        시월도 이틀을 남겨두고 있다. 조만간에 모멘트에서 “잊혀진 계절”이 등장할 시간이다. 세월과 나이는 신경쓰지 않아도 어김없이 축적되여 간다.        “사람의 마음은 처마밑에 달아놓은 파와 같아서 겨울에는 다 죽은 것 같다가도 봄이 오면 또 파랗게 살아납니다.”       직장 대선배님이 해주셨던 말씀이다.       “마음이 낡지 않아서...”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외우셨던 말씀이다.       늙음을 인정한다는 건 엄청 어려운 일이다. 한편 너무 인정하지 않아도 후배들로부터 주책이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다. 요즘 말로 하면 꼰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꼰대가 되여 있었네”       모 연예프로에서 한 개그맨이 한 말이다. 내가 20대 때의 생각을 잣대로 지금의 20대의 생각을 맞추다가 충격을 먹고 내뱉은 한탄이다. 그러나 꼰대도 꼰대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적어도 축적된 것이 많다. 그것도 재산이다.        쌓아두면 언제든 쓰일 때가 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18    모든 기회가 두번씩이라면(궁금이) 댓글:  조회:237  추천:0  2020-10-28
글 궁금이 · 방송 강설화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기전에는 적지 않은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이제 휴대전화에 전화번호가 무한대로 입력되니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기억의 훈련이 없어진 뒤로는 전화를 받으면서 상대방이 불러주는 11자리수 번호에 대한 일시 기억력도 쇠퇴해졌다. 꼭 옆에 메모지가 있어서 수자 하나씩 받아적어야만 한다. 메모지가 없으면 아예 문자메시지로 전화번호를 보내달라고 한다. 기억할 념을 하지 않는다.       남들은 자서전을 쓰는데 나는 2년전부터 위챗에다 내 기억을 다 쏟아부어서 쓸 멋도 없게 됐다. 뿐만아니라 이미 다 쏟아놓으니 기억에서도 사라져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때는 엄마 얘기도 많이 했었더랬는데 이제 소진돼서 쓸 것도 없거니와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다가도 산 사람은 그래도 산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이 그른 데 없다. 어제도 모친의 장례식을 마치고 상주가 마련한 식사장소에 갔는데 다들 롱담도 하고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가 아니다. 어쩔수 없는 생로병사에 대해 사람들은 갈수록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준비가 되여 있는 것 같다.       “생을 두번 살아보니 그것도 지겹더라”       시간려행을 주제로 다룬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다. 미래와 현실을 오가는 사람들의 여러가지 삶을 다룬 드라마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바라는 여러가지 생활상을 그려냈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라면서 여러 노래와 시들에서 많이 오르내리지만 정작 두번을 살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준비가 되여 있을가. 한번에 200년을 살고 그런 삶을 열번을 살아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번마다 새로운 욕심이 생겨날 거고 그러면 고통도 어디 가지 못한다. 인간은 희로애락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남자들이 짝사랑을 많이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녀자들이 더 많다. 드라마 작가중에 녀자가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이 정말 애탄다.        “중학교 때부터 널 쭉 좋아했어. 너도 날 좋아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계속 좋아할 수 있게만 해줘”       자존심을 다 버린 녀자의 고백이다. 그런데 녀자가 싫은 건 살아도 남자가 싫은 건 못 산다던 엄마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남자의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는데 녀자가 죽기살기로 따라다닌다고 되는 일이 아니였다. 녀자가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남자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현실은 랭정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은 일찍 접는게 좋다. 그리고 나를 좋다고 하는 다른 사랑을 찾아가는 게 상처도 덜 받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빠른 길이다.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가 그 사람을 만든다. 녀자는 한 남자가 너무 좋아지면 좋은 나머지 감시에 들어간다. 그 주변의 모든 녀자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경계한다. 머리속에서 별의별 상상을 다해가며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점검한다. 그런데 집착이 심할수록 남자는 점점 멀어져간다. 악순환이다. 그러면 이런 시간을 매일 반복하는 녀자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미칠 지경이다.        사람이 흥분하면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을 하게 된다. 판단력과 자제력이 동시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흥분이 련애단계이고 가라 앉으면 결혼이다. 얻지 못해 미칠 것 같았는데 얻고 보니 내가 바랐던 그 삶이 아니다. 그때는 내가 왜 그렇게 미칠 듯이 좋아했을가 싶다. 하지만 이미 다 된 밥이니 죽밥이든 설익은 밥이든 먹어야 한다. 그 과정에 소화가 안 될 수도 있고 때를 거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밥을 다시 쌀로 돌아가게 할 방법은 없다. 그게 현실이다.        어떻게 보면 이루어지지 못할 좋은 감정은 고스란히 묻어두는 게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 동경이 완정하게 남아서 상상만으로도 항상 즐겁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에는 싫은 감정도 포함되여 있는 법이다. 항상 좋은 면만 보며 행복했는데 굳이 안좋은 면까지 볼 수 있는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도 본인의 몫이다. 다만 그걸 감안하고 감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여 있으면 된다.       한편 기회는 포착하라고 존재한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모든 일이 허무해진다. 아니면 자기가 싫은 일은 일단은 안 된다고 가정해 놓고 소극적인 원인과 요소들을 부여하면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껏해 몇십년을 사는데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일은 그 년령 단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더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 30대에 가서 20대를 후회하지 말고 단계별 선택은 신중하되 어떤 일은 안해서 후회하기보다는 해보고 감당하는 게 낫다.       “만약”은 위험부담이 큰 불확실한 단어이다. 그리고 현재만이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기회는 두번 있더라도 첫번을 놓치지 않는 게 좋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17    물레방아 도는 래력□ 백한 댓글:  조회:345  추천:1  2020-10-23
그날 아버지는 여느때와 달리 말 한마디 없이 부지런히 수저만 움직이더니 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아, 니가 좀 나가봐라.” “우리 박녀사께서 웬 일이래? 늘그막에 누가 남편 훔쳐갈가 봐 걱정이 되나요? 글고 나 아직 밥 먹고 있잖아.” “한두번도 아니고 이번엔 벌써 세번째라니께, 세살 먹은 얼라도 다 부르겠다. 맨날 3절에서 막힌다잖아. 바보 아니면 치매환잔가?” “엄마도 참, 치매는 무슨, 맨날 깜빡깜빡하는 엄마보단 아버지 기억력이 훨 낫고만.” “그럼 왜 그런긴데, 한국에서 산 지 20년이 넘었으니 그 사이에 귀화를 해도 열두번도 더했을 것을.”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닐가?” 아버지는 엄마 등쌀에 밀려 오늘 낮에 귀화신청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한국 국가를 부르다가 3절에서 그만 막혀서 통과를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집 맞은편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습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있어서 멀리에서도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눈처럼 하얀 양말도 유표합니다. 랠모레 일흔이지만 날렵한 턱선과 별로 주름이 없는 얼굴 피부 덕분에 아버지는 얼핏 보기엔 50대 후반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많이 작아졌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부피가 줄은 밀가루포대처럼 홀쭉합니다. 내 눈길은 저도 모르게 벤치 우에 놓인 아버지의 손에 가 머무릅니다. 십년 전 아버지는 일을 하다 기계에 손가락 한개를 잃었습니다. 오른손 식지입니다. “거 우리 뒤집 춘자네 있지……” 아버지는 뜬금없이 고향 얘기를 꺼냅니다. 아버지 만큼 고향사람들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기억력도 어찌나 비상한지 몇십년 전 이야기를 마치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할 때면 아라비안나이트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지요. 이런 아버지를 치매환자 취급을 하다니요? 귀화를 독촉하는 어머니의 잔소리 만큼이나 근래에 아버지는 부쩍 고향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의 아버지 백태호로 놓고 말하면 젊었을 때는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만큼 날파람 있고 힘이 장사였습니다. 넘쳐나는 젊음의 혈기를 다 소모하지 않고선 도저히 주체할 길이 없었나 봅니다. 마을의 싸움판에는 늘 아버지의 모습이 빠지지 않았고 아버지로서는 또 언제나 그랬듯이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습니다. 의리를 위한 것이라든가 정의를 위한 것이라든가 아니면 뭐 눈꼴이 시여서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든가 그때 마침 기분이 개떡 같았다든가 등등 나름 리유가 충분했습니다. 사고가 터지고 사태가 조금 잠잠해졌다 싶으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집으로 기여들어왔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말을 빈다면. 너덜너덜해진 옷을 뻔뻔스럽게 척 내밀었답니다. 추종자들인 동생들의 옷까지 들고 와서 기워달라고 할 때면 삯바느질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찢어진 옷보다 더 나달나달해졌다고 합니다. 그렇긴 해도 평소에 아버지는 멋쟁이였죠. 바지는 항상 칼주름을 내서 입었고 양말은 주구장창 하얀색만 고집을 했습니다. 제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무렵 아버지는 동네 어린이들에게 장난을 치는 게 취미였습니다. 길을 가다 모래더미에서 놀고 있는 사내아이들이 눈에 띄면 너 이놈, 이리 와봐라, 내가 호신술을 가르쳐줄게, 하면서 돌려차기도 가르치고 치고 박는 ‘무예’를 가르쳤지요. 애들의 얼굴이 발개지면서 때국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요 정도로 이렇게 숨이 차서야 되겠냐? 내가 힘 세지는 비법을 가르쳐주지, 하고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애들에게 말합니다. 밥에다가 모래 한숟가락 푹 넣어서 비벼먹으면 힘장사가 되는기라. “캬, 성일이 그 자슥 인물이더라, 다른 애들은 한숟가락 먹고는 퉤퉤 하며 똥 씹은 표정인데 그노무 자슥은 우물우물 하면서도 한그릇을 다 비우더라니까.” 이건 제가 아버지한테서 직접 들은 얘깁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고놈한텐 특별히 몇가지 동작을 더 가르쳐줬지, 돌놈이야, 돌놈.” 이런 장난은 아버지에겐 일상이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아버지는 이런 방식으로 한 반에 다니는 어리숙한 남학생을 골탕 먹였다고 합니다. 대놓고 이상한 걸 먹으라고 하기엔 상대는 이미 성숙된 나이였죠, 이번에는 다른 수법을 씁니다. 그 남학생은 공짜라면 양재물도 들이킬 위인이였거든요. 아버지는 어느 날 같이 숙제를 하자며 집으로 데려와서는 발뒤축의 투명한 굳은 살을 면도칼로 살살 도려내서 고무사탕이라며 그 애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뭐야? 왜 이렇게 질겨? 글구 이거 냄새가 이상한데.” “더 씹어, 오래오래 씹으면 단맛이 난다니까.” 아버지는 그 애의 얼굴을 면전에서 바라보면서 능청스럽게 시물시물 웃었다고 합니다. 뭐 단물 빠진 껌도 아니고 씹다 씹다 구역질이 올라와서 그 애는 결국 뱉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이튿날로 학교에는 소문이 파다했죠. 누구는 태호 발뒤축 굳은살 먹은 애라고. “야, 넌 무신 놈 애가 머리가 그따구로 돌아가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뭐라고 해도 아버지는 태연합니다. “남이사 전보대로 이발을 쑤시든, 남이사 눈깔을 빼서 다마치기를 하든.” 아버지의 이 말버릇은 한때 친구들 사이에서 류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소신이 확실한 사람이였거든요. “저놈의 자슥은 언제 사람구실 하겠냐? 저래서 장가나 들겠냐?” 할아버지의 잔소리 아닌 걱정이였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보기 좋게 펀치를 날렸죠. 친구인 성일이네 삼촌 큰집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사촌녀동생을 단박에 꼬셔버렸답니다. 박선녀, 생전 해볕이라고는 쬔 적 없는 사람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저의 엄마는 우로는 그림만 그리는 오빠와 아래로는 책벌레인 남동생 사이에서 소외감을 지니고 있던 차 갑자기 어떤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내가 먹여 살리지요 하는 말에 큰 위로를 느꼈나 봅니다. 술주정뱅이인 저의 외할아버지로부터 한시 급히 도망치고 싶었던 엄마에게 아버지는 최상의 피난처였죠. 며칠 후 두번째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엄마는 언제 또 와요? 하고 조바심을 내며 시집 갈 마음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오케이하면 바로 보따리 싸들고 따라갈 기세였죠. 결혼은 가타부타 말없이 진행이 되였습니다. 결혼이란 걸 하고 달덩이 같은 저를 낳고도 한참 지나서야 아버지는 사람 패는 걸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로는 장작을 팼냐구요? 천만에요. 제가 대여섯 될 때라고 기억되는데, 아버지는 헛간에다 모래주머니를 달아매놓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련습하군 했습니다. 벽에다는 두께가 3센치가량 되는 나무판을 붙여놓고 틈만 나면 거기에다 대고 내 주먹이 세나 나무판자가 세나 내기를 하군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주먹은 가죽이 벗겨져 피가 흘렀죠.  이 짓은 꽤 오래동안 지속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권투선수라도 되려는 줄 알았습니다. 가끔 저는 링에 올라서 상대선수와 죽도록 주먹을 휘두르면서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피투성이 된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승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흡족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이날 이때까지도 권투선수는커녕 스포츠채널의 권투경기조차 구경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권투라는 스포츠종목이 존재하는 걸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백태호씨의 휘황한 력사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제가 태여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죠. 어느 핸가 아버지는 쇠꼬챙이로 금고(이불장에 딸린 서랍) 자물쇠를 열고 할아버지가 서랍에 고이 모셔둔 현금중에서 200원이란 거금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기 한참 전이라 일 년 농사수입이 몇백원이던 시절이였다고 합니다. 일곱 식구의 밥줄인 그 돈을 훔쳐서 사라진 아버지가 며칠 후에 벽돌장보다 조금 큰 요상한 물건을 들고 집에 나타났습니다. “이노무새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기여들어와!” 마침 식사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대로 비자루를 아버지의 면상에 뿌렸고 아버지는 막 문턱을 넘어서려다 후닥닥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렸습니다. 그 순간에 숟가락이 아닌 비자루를 집어던지신 걸 보면 할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비자루의 면적이 숟가락보다 커서 아버지를 명중할 확률이 높을 거란 계산을 했던 모양입니다. “집안 말아먹을 노무시키,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톰과 제리처럼 부자간에 한바탕 쫓고 쫓기는 소동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식구들은 그 요상한 물건을 구들 한복판에 놓고 빙 둘러앉았습니다. “요게 뭣이렷다?” “아버지, 요게 록음기라는 건데요, 참 희한한 물건이지요. 요걸 누르면 이 안에 있는 테프에서 노래가 나오고요, 요 단추를 누르면 아버지께서 방금 하신 말씀이 다 록음이 된다니께요.” “그래 이게 일년 농사 맞잡이라더냐?” “아무렴요, 이게 현대화의 산물인데 우리 마을에선 아마 제가 첫 사람으로 샀을 겁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요. 지금 한창 류행하는 노래들이 요 안에 다 들어있어요. 사람은 늘 앞서가야 합니다, 아버지!” 워낙에 음주가무에 능하신 할아버지는 그만 록음기의 마술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정든 땅 언덕 우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밖에 나가 길쌈을 매고’ 하면서 을 흥얼거리게 되였으니까요. 덕분에 제가 태여나서 제일 처음 배운 노래는 ‘우리 엄마 기쁘게 한번 웃으면’ 이런 노래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이였지요. 술 한 잔 걸친 날이면 아버지는 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아, 물레방아 도는 래력 한번 불러보거라.” 네, 저의 아버지는 제 이름을 백한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백한이라는 이름이 정말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째는 아들을 만들려고 저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줬나 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몇년 후 저에겐 녀동생이 생겼고 아버지는 여리여리한 녀동생에게 백조라는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저에게 백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명이 떨어지면 저의 입에선 자동으로 이 흘러나왔습니다. 록음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아버지, 고모 삼촌들이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는 밤이면 저는 밤새도록 곁에 앉아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을 부르고 또 불렀죠.   벼슬도 싫다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우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밖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새들이 우는 속’인데 저는 그 앞부분에 포인트를 두고 불렀습니다. ‘새끼 꼬면서’ 요 부분에서 꼬는 꼬오로 한음절 더 빼주다가 면에서 고개를 45도 각으로 돌리고 뒤로 젖히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올리막을 올라갑니다. ‘새끼이 꼬오 며언서’, 이러는 저의 모습이 귀여워죽겠다며 집안에는 웃음이 때그르르 구르죠. 저는 벼슬이 뭔지, 명예가 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그런 건가요, 전 이날 이때까지 겨자씨만한 벼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태여난 후 아버지의 쌀개는 기질은 잠시 주춤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새로운 놀이가 된 거죠.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아버지는 저에게 ‘곤디’를 시켰습니다. 제 돌잔치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아버지 손바닥 우에서 제가 한쪽 다리로 서서 춤을 추는 것이였습니다. “곤디, 곤디, 잘한다!” 하는 아버지의 구령에 맞춰 저는 좌우로 평형을 잡으며 참 오래도 서있었죠. 그  후에는요? 제가 이 곤디놀이에 조금 시들해질 무렵에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둥가타령을 불렀는데 저는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춤을 춰야 했답니다.   둥가 둥가 둥가야 부뚜막에서 시어머니 시며느리 방귀 뀌는데/ 시아버지 놀라서 담배통 들고 시며느리 놀라서 앞치마 비트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의 타령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 그건 정말 고역이였습니다. 아버지의 노래가 다섯번쯤 되풀이될 때면 팔이 끊어질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지만 노래가 멈추기 전에는 절대로 팔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는 걸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이런 날은 저의 재난의 날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저는 역시 포기를 모르는 백태호의 딸이였지요. 이불장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빈 자루처럼 푹 한쪽으로 쓰러질 때까지 저는 공기를 빵빵하게 채워넣은 스카이댄서처럼 두 팔을 너풀거려야 했습니다. 덕분일가요? 소학교 때 학교에서 원족이라는 걸 가게 되면 저는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비자루를 들고 핫, 핫 하면서 무예랍시고 멋있어보이는 동작을 선보였죠. 그때 한창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던 향항드라마 《곽원갑》의 주제가를 고쳐서 ‘헌 쓰레받기, 노란 빗잘기………’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말입니다. 제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였을 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또 한번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동안에는 띵가띵가 놀면서도 할아버지가 무서워 농사일을 따라하는 흉내라도 냈었는데 이번엔 아예 삽을 내팽겨쳐버린 거죠. “아버지, 저는 농사군이 싫습니다. 아버지처럼 평생 땅 뚜져봐야 돈 몇푼 벌겠어요? 저는 큰돈을 벌어 신세 고칠랍니다.” “이노무시키가 미쳤구나, 지한테 차례진 밥통을 스스로 차 던지고 날아다니는 돈을 잡겠다고? 돈이 눈이 멀었다더냐?” 할아버지가 길길이 뛰였지만 호기롭게 선언을 한 아버지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장사거리를 찾아다녔지요. 우연히 신문에서 목돈을 벌 수 있는 거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거니,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것이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그를 데 없군. 그 사업이란 바로 지렁이를 키우는 겁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지체없이 지렁이 양식사업에 착수했죠. 그 사업 밑천도 할아버지의 서랍에서 ‘절도’해온 것인지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농촌엔 흔한 게 지렁이가 아니던가요? 신문에 난 기사는 누가 봐도 귀가 솔깃할 법했습니다. 지렁이는 단백질덩어리라 보약으로 쓰인다고 했습니다. 먹이 또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농촌의 변소 주변이나 길가에 흔해빠진 소똥을 주어다가 먹이면 통통하게 자랄 거니까요. 그야말로 밑천이 들지 않는 사업이였습니다. 백조를 임신해서 남산만한 배를 부여잡고 뚱기적거리며 걷는 엄마의 거세찬 반대에도 아버지는 꿋꿋하게 일을 추진해나갔습니다. 손수 톱으로 나무를 켜서 지렁이를 키울 나무상자를 여러개 만들고 톱밥과 흙으로 상자를 꽉 채웠죠. 아버지는 집의 안방 바닥과 정주간에 나무상자를 전부 들였습니다. 이번에는 삽을 들고 지렁이를 파러 다녔고 그다음에는 소똥을 주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어온 소똥은 비닐로 정성스레 덮어서 푹 삭힙니다. 지렁이가 자라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선 소똥을 잘 삭히는 것이 관건이라고 들었거든요. 한동안 저의 집에는 소똥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공기 립자 속에는 소똥이 알알이 박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대체 사람 사는 집인지 마구간인지 분간을 못하겠네. 애가 태여나면 쇠구유에서 여물을 먹이게 생겼어.” 박선녀씨는 매일 바가지를 긁었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곧 태여날 둘째를 위해서라도 목돈을 벌어야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거부기 등껍질처럼 단단했습니다. 잘 삭혀진 소똥을 먹은 지렁이는 똥을 누는데 그것이 흙을 부들부들하게 만드는 작용을 합니다. 그 부들부들한 흙 속에서 지렁이는 제 새끼손가락만 하게 통통하게 자랐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미물이지요. 자기가 싼 똥 속에서 더 건강하게 자라다니요. 예닐곱 살 된 저는 나무상자 안에서 득실거리는 지렁이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손으로 잡아서 아버지 몰래 닭에게 먹이군 하였습니다. 역시 지렁이의 최고의 사랑은 닭들입니다. 지렁이를 던져주면 닭들은 부리나케 달려와서 서로 뺏을내기를 했지요. 나중에는 제가 지렁이를 들고 마당에 나타나면 닭들이 저를 둥그렇게 포위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기겁을 했죠. “한이 저노무 지지배는 뭐가 될라꼬 겁도 없이 저러노.” 아버지는 아까운 걸 왜 닭에게 먹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지렁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삼사개월 지속되였습니다. 하지만 지렁이를 사서 약재로 쓰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포동포동 살이 오른 지렁이를 닭모이용으로 이웃집에 나눠주고 고작 닭알 몇알 얻어오거나 낚시미끼로 쓰라고 나눠주고 애들 손바닥만한 붕어새끼 몇마리 얻어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것으로 아버지의 지렁이 양식사업은 총망히 막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동생 백조가 우렁찬 목소리로 이 세상에 왔노라고 신고식을 했을 때 지렁이는 이미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습니다. 할아버지 말씀 대로 착실하게 농사나 지을 것이지 날아다니는 돈 붙잡겠다고 설치다가 된통 당한 꼴이 되였지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 백태호가 누굽니까? 한번 백사장이란 말을 듣자 다시는 백태호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였지요. 이번에 아버지는 신문에서 유리섬유 사업이 돈을 번다는 광고를 접했습니다. 이게 절호의 기회다. 사내대장부가 한번 사업 망했다고 겁을 먹을 필요가 있나. 이번에는 내 기필코 성공하고야 말리다. 아버지는 또 례의 그 한마디, 내가 먹여 살릴게 하는 말로 박선녀씨를 구슬려 유리실공장을 차리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고향에서 수백리 떨어진 큰할아버지가 사는 고장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저 반드시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호기롭게 할아버지에게 장담했습니다. “아이구, 외지에 가서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냐? 이 어린것들을 데리고.” 할머니가 치마자락으로 눈굽을 찍었지만 저는 기차를 타고 먼길을 떠나 곧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올랐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꼬깃꼬깃한 돈을 바지주머니 속에 꼭 넣어두고 몇번이나 확인을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큰할아버지네 집 서쪽칸에 짐을 풀었습니다. 아버지는 빈집을 하나 임대하여 기계를 들이고 유리실공장 공장장이자 사장이 되였습니다. 공장에 출근하는 직원들은 대개가 스무 살을 금방 넘긴 이십대 초반의 남녀들인데 그들은 쉬는 시간이면 둘러앉아서 포커를 쳤습니다. 가끔 남자들이 이기면 꼴찌를 한 녀자에게 뽀뽀를 하자고 떼를 쓰기도 했지요. 저는 문 뒤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정작 남자의 입이 녀자 얼굴과 겹쳐지려고 하는 순간이면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서 되돌아서 집을 향해 달렸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먹었으니 한턱 내러 가야지.” 하면서 변소로 가기 위해 뒤문으로 향합니다. 그러면 큰할머니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아버지를 따라 뒤문께로 갑니다. “야야, 또 누구한테 한턱 내노? 돈 헤프게 쓰지 말거래이.” “아이고, 큰엄니도 참, 똥 눈다는 소릴 저렇게 하는 기래요.” 옆에서 어머니가 설명을 합니다. 아버지의 롱담을 알아듣기까지 큰할머니에겐 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는 중고차를 몰고 다니며 동네의 유리병이란 유리병은 다 거두어왔습니다. 너네 아버지 페물 줏는 사람이가? 새 친구들이 이상한 눈길로 전학생인 나를 쳐다보며 묻습니다. 아니거든, 우리 아버진 유리실공장 사장이야. 유리로 된 거 가져오면 우리 아버지가 돈 준다, 깨진거든 안 깨진거든 다 돈으로 쳐준다. 정말? 그럼. 그걸 다시 뿌사서 유리실 뽑는다. 저는 우쭐해서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제 집에 있는 유리로 된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들고 와서 유리실공장 앞에 줄을 섰습니다. 몇몇 남자아이들은 학교 창문틀 유리를 빼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반성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리용기란 용기는 죄다 구경했습니다. 앙증맞은 통졸임병도 있고 목이 기다란 술병도 있고 채색의 꽃병도 있고 그릇도 있고 재떨이도 있고 어항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거울처럼 투명했지만 어떤 것은 안에 오물이 들어가있기도 했고 병 뚜껑이며 나무꼬챙이, 신문지 조각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직원을 시켜 그것들을 깨끗이 씻어서 큰 가마에 넣고 고온으로 녹입니다. 엿을 달이듯이. 그다음에 그걸 기계에 넣고 기계를 작동시키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은빛의 섬유가 되여 쏟아져나옵니다. 아버지는 은빛에 도취되여 휘청합니다. 이번에는 판로도 아주 넓었습니다. 유리섬유가 사용되는 령역이 그만큼 넓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고객들을 찾아 나서서 니디워디 하며 어설픈 중국어로 한족들과 대화를 나누었죠. 술이 둬순배 들어가고 따꺼, 쓩띠 하면서 술상이 여름 참외 익듯이 무르익으면 아버지는 벌써 주머니에 돈이 두둑이 들어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다음날에 찾아가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유리섬유가 쌓이는 만큼 아버지의 주량도 자꾸 늘었지만 결국 유리섬유는 몇톤 팔지 못했지요. 팔리지 못한 유리섬유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였습니다. 이건 뭐 지렁이처럼 닭에게 먹일 수도 없고 낚시바늘에 꿰서 물고기를 유혹할 수도 없는 거였죠. 어머니는 새파랗게 도끼눈을 해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먹여 살린다 했잖아, 이제 어쩔긴데? 손가락 빨라고?” “녀편네가 하는 것도 없이 자꾸 징징대니까 일이 안되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내가 왜 하는 일이 없어? 애 키우랴, 밥 하랴, 채소 심으랴, 온갖 일을 다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어머니는 쓰리잡을 하셨죠. “이걸 그냥 콱!” 아버지는 어머니를 벽 구석으로 몰아가 단단히 한대 칠 듯이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픽 웃으며 내려놓습니다. “쬐꼬마해서 어디 때릴 곳도 없네.” “먹여 살리지도 못하면서 왜 결혼하자고 해서 생고생을 시켜? 분통 터져서 내가 담 생에는  썩은 고추라도 달고 태여나야지.” 만 두살이 좀 넘은, 열심히 말을 배우는 백조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썩은 고추 싫어, 난 썩은 고추 싫어.”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팔자야! 저 인간을 믿고 내가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어머니는 방에 퍼더버리고 앉아 백조를 끌어안고 웁니다. 그때 아마도 저는 남자들이란 믿을 족속이 못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중학생이 되였고 집이 없는 우리는 할머니네 집에 얹혀살게 되였습니다. “내 원 남사스러워서 못살겠다.” 할아버지의 경멸에 찬 눈빛 앞에서도 아버지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거 사내새끼로 한번 태여났으면 실패란 것도 해봐야죠.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으셨어도 어디 해마다 잘되던가요? 풍년 들 때도 있고 흉년 들 때도 있었잖아요.” 그러면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날렵하게 비자루를 쌩 하고 날립니다. 그 즈음 아버지는 늘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요. >>7면 연변일보 
116    추석길□ 조홍매 댓글:  조회:418  추천:0  2020-10-16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눈부신 해살, 여느 봄날씨를 방불케 하는 청명한 가을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처음으로 가족 9명이 모두 함께 추석 성묘길에 올랐다. 오랜 외국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돌아오신 부모님과의 오랜만의 추석 동행길이라 가는 내내 우리 모두는 한껏 부풀어있었다. 세 아이는 언녕 길옆의 코스모스며 이름 모를 들꽃을 꺾으면서 까르르 신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에 황금색으로 누렇게 곡식이 영글어가는 소리, 바스락바스락 단풍잎의 속삭임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져있어 풍성하고 근사한 가을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엄마는 세 아이에게 조금만 더 지나면 찔광이나무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찔광이가 아이들이 겨울에 즐겨먹는 ‘탕후루’라는 추가 설명을 하는 사이에 빨간 찔광이가 가득 열린 찔광이나무에 다달았고 아이들에겐 흥분을, 엄마에게는 주린 배를 달랬던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선사했다.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게 했던 찔광이열매를 따먹던 이야기를 듣노라니 나 역시 이 찔광이나무를 리정표로 삼았던 아버지와의 추석 동행이 떠올랐다. 한손에는 간소한 짐꾸러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해빛에 반사되여 유난히 반짝이는 예리한 낫을 휙휙 허공중에 기운차게 소리를 그어가며 젊은 사나이가 성큼성큼 앞서면 그 뒤에는 여라문살 되는 어린 녀자아이가 숨가쁘게 뒤꽁무니를 쫓는 그 장면은 결코 풍경만이 아니였다. 희붐히 밝아오는 동녘하늘에 획기적인 한획을 그으려는 듯 수탉이 홰를 쳐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 둘씩 굴뚝에서 물물 피여오르는 연기가 시골의 하루를 연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아버지와 가마목에서 분주한 엄마의 도란도란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소박한 추석날의 아침상이 마련된다. 한치의 흠집도 없도록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서 담아놓은 세알의 삶은 닭알, 일매지게 썰어놓은 돼지고기와 실발이 선명한 큼직한 소고기, 노릇노릇 예쁘게 구워진 찹쌀지지미는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가득한 제사음식이였다. 어느 결에 아버지는 뒤울안에서 해탕이며 양리며 복숭아를 따다 주머니에 넣었다. 신문지로 돌돌 말아놓은 수저와 술잔까지 합세하면 곧장 집문을 나선다. 아버지는 성미처럼 걸음걸이가 아주 급했다. 제일 첫 산소행이 몇살 때 였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짧은 다리로 아버지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뒤꽁무니를 쫓았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내 주위를 뱅뱅 맴돌아도, 메뚜기가 여기저기서 나랑 숨박곡질을 쳐대도, 통통한 강아지풀이 내 손등을 간지럽히며 다정하게 스쳐도 나는 한눈 팔 겨를이 없이 오로지 아버지의 그 쩍 벌어진 어깨의 들썩임을 좌우하는 발걸음에만 고정되였다. 한참을 종주먹을 쥐고 부지런히 따르다 도무지 힘들어 발걸음이 더이상 움직여지지 않을 때면 애원하듯 “아브지(아버지), 좀 천천히 가기쇼.” 라고 볼멘 소리를 했다. 그제야 아버지는 뒤따르는 나를 의식하고는 금새 속도를 줄여주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산을 오를 때엔 올리막이라 더더욱 힘들었다. 아버지는 량손에 짐까지 쥐고도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지만 나는 이미 기진맥진이였다. 산소에 도착하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확 트인 산아래를 굽어보았다. 황금벼파도가 출렁이는 벌판을 따라 저 멀리 무덤무덤 초가삼간으로 아담한 우리 마을을 바라보노라면 산소행 대신 일밭으로 향하던 엄마가 생각났다. 일이 밀렸다는 건 핑게였고 무서워서 산소행을 거부했다는 것을 썩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산아래로는 벌떼같이 많은 사람들이 조상을 찾아 산을 톺는 모습도 한눈에 안겨왔다. 서늘한 가을바람은 후끈후끈해진 내 몸의 열기와 땀방울을 시원하게 걷어가군 했다. 아버지는 담배쉼을 할 겨를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곧바로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풀들로 가리워진 무덤 우의 벌초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는 사람들과의 주고받는 인사는 은근히 나의 시샘을 자아냈다. 항상 대가족으로 북적이는 다른 집들과 달리 우리 집은 달랑 아버지랑 나 뿐이였기 때문이다. 벌초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술을 따르면서 인사를 드리는 간단한 제사식을 끝내고 옆 산소에 오신 분들이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자리하고 갖춰 온 음식을 나누면서 조상님들의 생전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군 하였다.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는 하면서 다들 아이같이 부모님들 얘기를 주거니받거니 여념이 없었지만 아버지만은 일언반구도 없이 덤덤히 계셨다. 누군가 사리밝고 똑똑하신 우리 할아버지는 손끝이 여물어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뜨개질을 잘하셨다고, 나이 40에 겨우 얻은 아들이라 금이야 옥이야 했지만 돌잔치도 함께 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시는가 하면 일찍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자식 넷을 거느리고 고생하셔서인지 할머니는 늘 구박받아도 상관없으니 며느리 만큼은 똑부러진 녀자를 들이시고 싶다고 노래처럼 부르셨으나 애석하게도 구박은커녕 며느리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씀에도 아버지는 그냥 무덤덤했다. 사실 두 집에서 산소를 나란히 잡게 된 데도 사연이 있었다. 생전에 워낙에 각별한 정을 나누셨던 터라 나중에 당신들이 돌아가시면 산소도 이웃으로 정하련다며 입을 모았고 그 념원에 따라 가지런히 자리하게 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을 얻어먹는 것 뿐이였다. 옆집은 자식들이 여럿인 데다가 시내에 사는 분들이라 서로서로 챙기다 보니 음식은 늘 풍성했다. 특히 그 시절 보기 드문 바나나며 과일향으로 가득한 사탕이며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과자는 별미중의 별미였다. 빙 둘러앉아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는 작별을 고하며 산을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에 비하면 수월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여전히 버거웠다. 아버지의 빈틈없는 전속력은 나에게 무언의 독촉이였으나 호주머니 한가득 받아넣은 한웅큼의 사탕이 있어 마음만은 아주 달콤했다. 아버지와의 최종 동행의 목적을 실현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입안 가득 달콤함으로 꽉 찼지만 사탕이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입술을 감빨면서도 나는 한번도 총망한 아버지의 발걸음 따위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생활형편이 조금씩 펴이게 되면서 드디여 내 소원중의 하나가 이루어졌다. 바로 산소에 묘비를 세우는 일이였다. 아버지가 뜨락또르로 직접 필요한 모래, 자갈, 세멘트 그리고 물까지 실어나르던 어느 추석날의 흥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오매에도 바라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도 비석이 세워지게 되였다. 기분이 둥둥 떠서는 토끼처럼 퐁퐁 뛰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였다. 워낙에 말수가 적으시고 표현을 잘 안하는 분이라 그때 아버지의 웃음의 진정한 의미도 몰랐었다. 외국붐으로 한창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돌연 외국행을 결심했고 그렇게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바람에 나와 아버지의 추석동행길도 십여년 전에 멈춰버렸다. 하지만 결혼 전까지 나는 산소에 다니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대학을 다니면서도 청가를 내서라도 꼭꼭 산소에 다녀가는 것으로 아버지가 못한 효도를 대신했다. 어쩌면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는 출가를 했고 아버지는 더이상 내 기억 속 쩍 벌어진 어깨를 들썩이는, 청춘의 패기로 가득찬 그제날의 젊은이가 아니였다. 세월은 어느새 아버지에게 왜소한 체구와 밭고랑 같은 주름과 구부정한 허리를 내여주었다. 평생 성실함을 삶의 신조로, 뼈빠지게 부지런히 일만 해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왜 할아버지 산소에 준비해가는 제사상 음식이 조촐하냐, 남들이 다 있는 비석도 없냐고 할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덤덤하게 오랜 산이라는 말로 일축했던 그 리유를 말이다. 걸음걸이가 하도 빨라 동네에서 ‘빼똘’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아버지는 성미가 급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서두름이 남달랐다. 어쩌면 아버지의 인생사전에는 느긋함이란 단어가 없었던 것 같다. 식사 도중이라도, 잠결이라도 누가 부탁해오면 즉시 달려나가고 후닥닥 잽싸게 해내는 스타일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그런 줄로만,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돌도 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탓에 아버지와의 추억은 고사하고 평생 아버지의 얼굴 조차 모르고 살아온 아버지에게, 살면서 한번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는 아버지에게 삶이란 어느 노래가사처럼 한평생 처자식 밥그릇에 청춘을 걸고 오로지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였으리라. 잠간의 방황도, 잠시의 여유도 곧 사치였을 것이다. 앞만 보며 이를 악문 채 두려움도 외로움도 스스로 떨쳐내야 했고 힘들어도 슬퍼도 눈물을 삼켜야 했을 아버지. 그 서러움을 누가 보듬어줄가? 그 애처로움을 누가 리해해줄가? 외국생활중에도 아버지는 해마다 추석 즈음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산소에 다녀오라고 당부를 해왔다. 어쩌면 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이 자식된 도리도 이런 것이 아닐가? 날이 갈수록 부모님의 소중함을 조금씩 조금씩 터득해 가는 것. 날이 갈수록 부모님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들여다보며 리해하기 시작하는 것. 그렇게 내 부모의 삶의 방식이 삶의 자세로, 삶의 태도로 조용히 지혜롭게 현명한 가르침으로 내 마음에 다가올 때 나 또한 누군가에게 부모라는 이름으로 한걸음 두걸음씩 성장하여가는 것이리라. 산소에 이르니 여전히 무덤 우는 잡초 투성이였다. 아버지는 낫을 들고 팔을 걷었다. 아들과 사위까지 벌초에 합세해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벌초를 끝났다. 대가족답게 북적이며 제를 지내는데 옆집 아저씨가 롱담조로 한마디 하셨다. “이 집은 오늘 추석이라고 산 사람, 죽은 사람 다 모였구만!” 내 기억으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이제 아버지는 늙으셨고 나는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더이상 내 어릴 적의 잽싼 걸음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 역시 더이상 줄달음 치기에 바빠 볼멘 소리로 앙탈을 부리던 어린 소녀가 아니다. 그러나 추석길에 함께 했던 추억 만큼은 여전하다. 먼 후날, 우리 아이들에게도 오늘 이 순간들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이 또다시 그리움으로 다가올 때 함께였던 이 추석길도 그냥 추석길만은 아니겠지. 연변일보 
115    국경일기(궁금이) 댓글:  조회:278  추천:0  2020-10-13
글 궁금이 · 방송 김홍화     국경일기(2) 국경절 련휴 사흘째 날에는 당직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라 이날은 운동을 접었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나오니 이제 날이 어둑어둑하다. 그사이를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또 길옆의 잔디밭을 파헤쳐서 신새벽부터 공사를 한다. 올해에 들어서서 이 한곳만 몇번을 파헤치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지만 그들이라고 심심해서 파고 되묻기를 반복하는 게 아닐 것이다.    멀쩡한 땅을 파서 공사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차량 한대가 주변에 쌓아놓은 건축자재에 둘러쌓였다. 아마도 주인을 찾다 못해 련락이 닿지 않아 차를 에둘러 공사를 시작했나 보다. 이제 주인이 주동적으로 찾아와서 차를 빼자고 해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원래 주차하는 곳이 아니였으니 차주인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공사측에서 교통경찰에 신고하면 불법주차딱지를 뗄 일이다.   북경 사람들이 밖으로 많이 빠져나간 대신 외지에서 관광을 많이 왔는지 지하철은 평소와 다름없이 승객이 많다. 출근하면서 지하철을 반시간 정도 타는데 그사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노라면 시간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른다. 그런데 환승역 금방 전 역에서 서버린 지하철은 문을 열어놓은 채 움직일 념을 하지 않는다. 안내방송은 일시정차라고만 하고 언제 떠난다는 확실한 정보는 없다. 정 급하면 다른 선로를 타라고 권장한다. 어차피 나는 내려서 걸어가도 40분거리이니 아예 역에서 나와버렸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40분동안의 걷기운동이 차례졌다. 화까지는 아니지만 전화위복이란 말이 틀린 데 없다.   당직을 마치고 저녁 9시에 사무실을 나오니 명절의 야경이 또 발길을 잡는다. 늦은 시간이지만 놓칠 수 없다. 사진을 찍어 위챗에 올리고 영상을 찍어 틱톡에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 정도면 만족해야 하는데 두개 역이면 천안문이라고 생각하니 그 쪽의 야경은 더 멋있을 것 같다. 유혹은 컸지만 사람들이 붐빌 생각을 하니 포기하게 된다.    풍경이란 게 낮에 더 잘 보이련만 어두운 밤에 조명을 밝히고 보면 또 다른 풍경인 건 무엇때문일가. 태양빛에 의한 통일적인 광선보다는 인공조명에 의한 명암이 분명한 색상이 더 색달라 보여서 그런걸가. 원시사회에서 류인원은 가리지 않고 다녀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살아가면서 별 사고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인류가 문명사회에 들어서면서 이런저런 단장을 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가지지 말아야 할 생각도 만들게 되였다. 어둠이 가려진 세상에 대한 조명의 역할이 그 맥락이 아닐가 싶다.    이제 련 사흘을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4일째 아침에 산에 오르니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고양이들은 아침 세수에 바쁘고 로인 부대는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등산길에 오른다. 은행나무에 주렁진 열매는 무르익은 나머지 땅에 떨어져 뒹굴고 해마다 탐내는 사람들이 없어 서운한 감도 슬슬 빨갛게 익어간다. 분명 따다가 팔면 돈인데 왜 북경의 감은 저절로 땅에 떨어져 썩을 때까지 아무도 관심이 없을가. 어차피 버리는 거 누가 따지 못하게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사람의 욕심은 유독 감에서만 쉽게 비워진다. 높은 곳에 열려서 따는 도구가 마땅치 않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참 아까운 과일이다. 올리다 사진을 찍는 나는 싱거운 나머지 휴대폰 화면을 확대해가며 감을 세기도 한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데 이건 며칠이고 쳐다는 보는데 아무도  손이 가지 않는다.    산에서 연한 가지색의 꽃을 만난다. 작은 초롱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슬이 맺힌 채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뻐서 사진을 많이 찍어뒀는데 후에 바이두에 검색해보니 더덕꽃이였다. 자연인프로에서 자연인이 산에 올라 이런저런 약재를 캐는 걸 보면서 많이 부러웠었는데 내가 바로 눈앞에다 더덕을 두고 사진만 찍었다. 보석을 사라고 했더니 이쁜 포장만 욕심내는 꼴이 됐다.     “이 시기 산에서 부는 바람은 뼈속을 파고드는 바람이네요.”   부부간이 옆을 지나가며 부인이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늘진 곳에서 바람이 차기는 하다. 차다는 건 시원하다와 춥다는 감각을 동시에 전해준다. 차니까 발길은 더 빨라지고 빨라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땀이 나게 된다. 그 땀이 가을 바람을 만나면 순간적으로 쾌감을 느낀다. 상쾌하다는 단어로도 잘 표현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순간 심호흡을 하며 산의 기를 한껏 빨아들인다. 그러다가 오늘 같은 날은 낮술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새 휴대폰에 손이 가고 있다.   “아침부터 웬일이여?”   “명절인데 낮술 한잔해야지.”   “대낮부터? 좋지.”   약속은 세마디로 잡힌다. 이왕의 경험에 의하면 낮술은 흔히 저녁까지 이어진다. 그 중간에 초창기 맴버는 슬슬 도태되고 새로 영입한 선수들이 계속 이어서 바통을 잡는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저녁을 넘어 밤중으로 이어지고 여러 집을 전전하며 기억력도 하나둘 흘리게 된다. 명절인데 기억이 한두개 없어진다고 큰일나지 않는다. 하물며 기억해야 할 핵심은 반드시 재생해낸다.   그중의 한 친구는 제주도에 집을 한채 사놓고 여유가 있을 때면 간혹 그곳에 날아가서 휴식을 취한다. 어느날 사우나에 갔더니 거기에서 물건을 파는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한다.   “중국에서 오셨다는데 거기서는 고기를 먹고 사시우? 내가 한끼 사드리고 싶은데...”   아마도 할머니가 들은데 의하면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배를 곯으며 사는 줄로 알았나 보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생각을 하냐 싶지만 엄연한 실화다. 그러니까 좀 양념을 치면 친구가 집도 변변치 않아서 사우나에서 먹고 자는 줄로 알았나 보다. 드라마에 보면 회사에서 잘리우고 사우나에서 죽치고 있는 장면이 그렇게 드문 게 아니니 그런 생각을 가질 법도 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낮술을 하고 있는 내가 괜히 사치스러워보인다. 그렇게 걱정해주는 고국의 할머니도 계시는데 이렇게 흥청망청 먹어도 되나 싶다. 아무튼 이미 시작한 명절이니 계속 이어서 신나게 쇠야 한다.   명절은 뭐니뭐니 해도 사람들이 북적거려야 제 분위기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14    살구향기□ 남옥란 댓글:  조회:1436  추천:0  2020-09-25
살구향기 □ 남옥란 과일가게 문 앞을 지나는데 옛날부터 맡아왔던 익숙한 과일향기가 내 코를 톡하고 건드린다. 그제서야 과일구럭에 모록이 담긴 살구를 발견하였다. 원래는 주황색 빛이 나는 자름한 살구에서 풍겨나오는 냄새였다. 시간은 빠르기도 하지, 벌써 살구 먹는 철이 됐구나. 그 시절에 살구에 깃들었던 아름다운 이야기, 나는 기나긴 먼 옛날의 소용돌이를 헤집으면서 어렴풋이 보이는 추억의 한쪽 끈을 틀어쥐고 생각을 더듬었다. 가물가물한 물안개를 헤치고 아득히 먼 지평선 저 끝자락에 파묻혔던, 살구에 깃든 추억을 끄집어냈다. 반세기 썩 전에 애들이 촌에서 살구로 주린 배를 달래고 동네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던 인정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 이맘때면 먹어왔던 간식이 살구였다. 동네에 누구네 집이든지 살구나무 한그루만 있어도 온 동네 애들의 먹거리로는 문제가 없었다. 봄에 피는 살구꽃은 온 동네에 향기를 풍겼다. 살구는 벌레도 멀리한다. 저절로 꽃이 피고 지고 가지가 부러지도록 살구가 달린다. 많이 열리면 많이 먹고 적게 열리면 적은 대로 먹는 게 살구였다. 마치도 야생 딸기나 개암처럼 사람들이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제멋대로 그렇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익어서 늘 허기졌던 사람의 든든한 먹거리로 되여주었다. 살구라 하면 살구중의 왕이라 불리우는 백살구, 다음으로 참살구, 또 떡살구, 콩살구, 개살구 등 종류가 다양하다. 살구는 그 맛이 향긋하고 달콤하다. 사과배처럼 시원하고 상큼한 맛은 없어도 담백하고 감칠맛이 난다. 인심이 후하던 옛날부터 경제적인 수단으로 팔고 사는 게 아니라 익으면 누구네 집 살구든지 관계없이 온 동네에서 뜯어먹었다. 그때 우리 집 구새목 바로 웃집 내 친구 정자네 집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살구가 익는 철을 용하게도 알고 나는 비린내를 맡은 고양이처럼 부지런히 정자네 집에 놀러 갔다. 정자네 할머니는 나에게 살구를 먹으라고 하면서 긴 장대를 들고 높은 가지에 달려있는 살구를 후려쳤다. 장대에 얻어맞은 살구는 후두둑하고 땅에 떨어졌다. 정자와 나는 한참이나 앉아서 땅에 떨어진 살구들을 모조리 주어먹었다. 참살구여서 씨까지 깨서 먹어치웠다. 한참을 먹고 나면 배가 부르군 했다. 그때는 비닐봉다리가 없을 때였다. 나는 옷섶에다 정자 할머니가 주는 살구를 담아가지고는 집에 와서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서 하루가 지나면 또 그 살구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나는 또다시 정자네 집에 놀러 갔다. 정자 할머니는 역시나 그 나무 막대기로 살구를 후려쳐서 떨구었다. 이렇게 살구가 거덜이 날 때까지 정자네 집 살구밭에는 내 발자국이 수없이 찍히였고 살구나무도 잎새와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살구도 여러가지 품종이 있는데 일찍 먹을 수 있는 것과 좀 지나서야 먹을 수 있는 품종이 있다. 우리 륙촌 오빠네 집 살구는 개살구여서 늦종이다. 정자네 집 살구를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그 오빠네 집으로 살구 먹으러 정자까지 데리고 함께 갔다. 오빠네 내외는 인심이 후하고 마음씨가 선량하였다. 오빠네는 등발 받침대를 만들어서 살구를 딸 때만 쓰군 하였다. 내가 살구 먹으러 왔다는 것을 알고는 키가 구척이나 되는 륙촌 오빠는 등발을 디디고 올라서는데 얼굴이 살구나무가지 사이로 하늘에 치달은 것 같았다. 하나 따서는 내가 들고 있는 광주리에 뿌렸다. 그렇게 광주리가 무둑해지면 나와 정자는 신이 나서 먹었다. 개살구지만 푹 익히면 맛이 괜찮았다. 새콤달콤한 게 어딘가 모르게 약간 떫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세월에는 별미였다. 씨는 조금 큰편인데 너무 떫고 써서 못 먹는다. 나는 씨만 모아서 도랑물에 깨끗하게 씻었다. 다음에 비가 안 닿는 이영새 밑에 있는 마루에다 말리웠다가 동생들에게 나눠도 주고 그랬다. 오빠네 집에는 떡살구라는 품종도 있었다. 떡살구는 떡처럼 뭉덩뭉덩한게 단맛도 없고 신맛도 없고 별로다. 그에 비해 백살구는 노름한 색이 나는데 맛이 일품이다. 지금도 이웃나라에서는 주요한 과일로 치부한다. 그때 아직 어렸던 나는 남의 집 살구나무가 너무 부러워 아버지한테 살구나무 한그루만 심어달라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살구나무가 귀신을 청해들인다고 하면서 못 심는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골려주느라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면 최고지시였다. 내가 살구를 제일 맛있게 먹어본 것은 시집을 가서 큰딸을 임신하였을 때였다. 우리 집과 길을 사이에 둔 앞집은 세대주가 석방진이란 한족이였는데 큰 울바자 안에 없는 것이 없었다. 때는 바로 살구철이였다. 그 집 아줌마가 나를 보고 울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처음 그 집 울안에 들어가 보았는데 살구나무가 너무 커서 굉장하였다. 살구나무숲이 사방 백평방메터도 더 되게 가지를 드리웠는데 그 밑에 앉아서 나무를 쳐다보니 그야말로 아름다운 그림이 따로 없었다. 워낙 관리를 알뜰하게 잘해서 살구가 주렁주렁 그렇게도 많이 열리였다. 노르끄레한 가운데 붉은색이 비치는 새콤달콤한 참살구였다. 아주머니가 나무가지를 타고 올라가더니 가지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살구가 후둑후둑 떨어지는데 뿌리 밑 파아란 풀밭에 한벌 쫙 깔리였다. 나는 마침 임신반응으로 신 것이 무지하게 당기던 때라 두 손이 모자라게 허겁지겁 주어먹었다. 임신한 새각시라는게 부끄러운 것도 없었고 체면도 저리 가라였다. 실로 어른이 된 후 그렇게 맛있는 살구를 그처럼 많이 먹어 보기는 처음이였다. 그 자그마한 열매 한알이 나에게는 새 생명의 감로수였다. 정말로 눈물 나게 감사한 일이였다. 그 후로 나는 임신 열달을 무난하게 넘기고 이쁜 딸을 낳았다. 후에는 사업이 바빠서 여기저기 전근 다니다 보니 그렇듯 인정이 넘치고 고마운 분들에게 인사 한번 올리지 못하였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고 저세상 사람이 되였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 감사하고 고맙던 일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살구를 지금 애들은 먹지 않는다. 여러가지 남방과일이 흔하니까 살구 따위는 잘 거들떠보지 않는다. 사실 살구는 영양가치가 대단한 과일이다. ‘피지’라는 나라에서는 주식으로 살구를 먹는데 비록 작은 나라지만 암에 걸린 환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 지금 바로 칠월부터 살구철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잘 익은 참살구를 몇근 사서는 물로 잘 씻은 다음 일대일 비례로 사탕가루를 넣어서 발효시킨다. 두달 내지 석달이 지나면 그 물을 조금씩 먹는데 향기로운 살구냄새에 맛이 일품이다. 올해도 철을 놓치지 말고 살구를 몇근 사서 발효음료로 만들어 먹어야 하겠다. 몇해 전에 남편의 병치료 때문에 농촌에 가서 살았다. 집집의 울바자 안에는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있었다. 애들도 별로 없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외국에 가거나 혹은 다른 데 가서 살다 보니 그저 버려지는 게 살구였다. 제철이면 살구, 앵두, 찔광이들이 해볕에 빨갛게 익어서 고운 얼굴을 자랑한다. 자그마한 산골마을에는 과일향기가 차고 넘치지만 마을에는 몇몇 로인들 뿐이라 그 과일들을 처리할 수가 없다. 60여년 전에는 동네 아이들의 제일가는 간식이 되여 주린 배를 채워주던 살구, 살구씨로 내기를 하며 흥겹게 놀던 그 옛날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살구 하나로 동네 인심이 훈훈하게 오가던 그때가 그립다. 살구향기는 몇십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그렇게 내 마음속에 깃들어있을 것이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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